교회와 기도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번에 제가 설교하는 것은 사실은 설교라기보다는 세미나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성경 본문을 읽고 계속 딴소리를 하나 그렇게 시비를 걸지 말아 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오늘 지난 시간에는 학문과 경건에 대해서 생각해 봤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사랑과 열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들어가실 때 성을 보시면서 우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희랍어 성경에는 이 부분을 “에클라우셈”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셨다는 기록이 성경에 모두 3번이 나오는데 두 번은 에클라우셈이라고 씌여졌고 또 한 번은 “에다클리우센”이라고 씌여졌습니다. 에다클리우센은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이고 에클라우스는 소리를 내서 엉엉 우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시며 엉엉 우셨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죠. 아무도 예수님의 그 눈물을 이해할 수 없었던 이유는 우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십 년 후로 다가오고 있는 예루살렘에 대한 역사적 심판을 미리 알고 계셨고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밀려오면서 예수님은 누구도 알 수 없는 역사의 미래에 대한 통찰로 눈물을 흘리시고 우셨던 것입니다. 제가 오늘 설교는 이 부분을 상세히 주경하는 것이 설교의 목표가 아닙니다. 문제는 예수님 마음 안에 있었던 이러한 뜨거운 열정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느냐 묻고 싶은 것입니다. 제이 앤 케인즈라고 하는 사람은 원래 영국에서 공부를 한 경제학자였습니다. 대단한 실력가였지만 영국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그의 학문적인 깊이를 인정받아서 미국에 크게 기여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마침 미국은 이제 일대에 없었던 1939년도에 대공황을 경험하고 있었고 이때에 이 공황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이제 이론적인 대안들을 제시함으로써 미국을 경제 공황의 늪에서 건져낸 인물로 기록이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경제학을 연구하려는 모든 후배들에게 늘 해 주는 교훈이 있었습니다. “Have a cool head and warm heart 경제학을 하려거든 차가운 머리와 그리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계량 경제학에 의한 합리주의적인 경제정책이야말로 모든 국가의 부를 불러오는 최고의 방척인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시경제의 안목에서 이 모든 경제를 이론을 새로 세우면서 가장 합리적이고 좋아 보이는 경제 정책이 수행된다고 할지라도 그 그늘에서 고통하는 사람들 때문에 합리성을 포기해야 되는 때가 있다는 사실들을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경제학은 최고의 과학적인 학문이지만 인간을 위한 학문이니 인간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없이는 이 경제학을 공부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후일 그의 이러한 사상은 이제 이 합리적인 경제학에 경제학의 도덕성을 가늠하는 규범 경제학이라고 하는 새로운 분야를 불러 들이는 그러한 시도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꼭 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신학을 하려거든 냉철한 지성과 하나님과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함께 소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에게 열정과 지성이 함께 갖추어지기를 원하시는데도 왜 그런지 교회의 역사를 보면 이런 점에 있어서 신앙에 있어서 근본이 냉철한 지성이냐 아니면 뜨거운 열정이고 체험이냐...이 둘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 하고 어느 한 쪽에 치우쳐 온 것이 교회의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학을 공부하는 동안에 이러한 신앙에 있어서 지성과 그리고 열정에 있어서 어느 쪽에 신학이 치우치면서 오류에 빠졌는가를 한 번 일별해 보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지혜를 갖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죠.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축으로 해서 신학과 이지와 교리를 중시하는 경향, 그리고 신비한 체험과 열정, 하나님과의 직통적인 내적 교제를 중시하는 경향이 시계추처럼 진자운동을 계속 해 온 것이 바로 교회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에요. 초대교회의 생명력 있는 불길들이 식어가고 로마 제국은 드디어 사상적인 박해를 가해오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한 기독교의 대안으로 많은 변증가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통해서 교회는 아주 든든한 교리들을 수립할 수 있었고 애매하던 기독교의 모든 그 규칙들을 새롭게 세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또 그러는 한편 교회에 생명력이 식어가게 되었고 이러면서 강력한 반발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몬타누스 운동이었습니다. 주후 2세기경서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극단적인 신비 체험과 열정, 그리고 감성을 중시한 신앙의 경향이었습니다. 몬타누스 자신을 통해서 보혜사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교리를 내세운 대표적인 이단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한 쪽으로 치우치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감성과 체험을 중시하는 이 몬타누스주의는 쇠퇴하고 이번에는 기독교에 대한 지성주의적 이단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2,3세기 어간에 인간의 구원을 지식에다 둘 정도로 지식에 치중하였던 영지주의라고 하는 중요한 이단과 마주하여야 했습니다. 그 후 다시 신앙에 있어서 수도와 개인의 체험, 열정, 내적 관상 같은 것들을 중요한 수도원주의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제 4세기 넘어서 시작이 되어서 10세기까지 계속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많은 중세의 신비주의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중세의 신비주의를 복원하려고 하는 움직임이 복음주의 안에서 일어나고 있고 토마스 머튼 같은 사람들이 다시 일으키고 있는 이것은 매우 우리가 신학적으로 경계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은 토마스 머튼의 생애에 대해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사람은 중세의 수도적 영성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은 너무나 청빈하고 깨끗했지만 마지막 결과가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중세의 신비주의를 현대에 재건하기 위해서 그가 만난 사람은 일본의 유명한 고승이었고 마지막에는 베트남 불교의 지도자였던 팀나칸을 만나는 것으로 해서 범세계적인 종교의 다원주의를 꿈꾸는 것으로 그의 생애는 마쳐졌던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자신의 인생의 공공연한 대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복음주의 목회권에 와서 버젓이 커다란 교회들을 목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관상기도회니, 영성이니 하는 것에 휘몰아치면서 그러면서 새로운 수도원주의의 바람들이 불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우리 개혁주의는 침묵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알지도 못 하는 무지한 양떼들은 여기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죠. 10세기까지 이런 운동에 접어들다가 11세기에 접어 들면서 서서히 이제 이 수도원 주의 운동이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식상하게 되자 새로운 지성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중세의 스콜라주의입니다. 14세기까지 계속된 스콜라주의는 여러분들이 아다시피 희랍의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체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과 구원을 설명하려고 했던 신학사조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의 이성이면 뭐든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은 교만으로 이제껏까지 논의되어 오던 모든 신학의 주제들을 세분하기 시작했고 미세하게 쪼개어서 번세한 스콜라철학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한 와중에서 단지 철학의 틀을 빌린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더 큰 야망이 있었으니 철학과 신학의 통합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학에 있어서 명제적인 사실은 오직 성경만이 제시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철학 속에서 이런 명제들을 제시하고 이것으로써 성경에 있는 진리들을 억압하면서 말하자면 철학을 통해서 이 전 세계를 포괄하는 지식의 체계들을 세우려고 했던 것이죠. 이러면서 신앙적인 열정 같은 것들은 하찮게 생각하게 됐던 것이죠. 그러나 그 다음에는 14세기 15세기에는 이 스콜라주의에 대한 강력한 반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비주의 운동입니다. 중세 후기에 이 신비주의는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존 에쿠와르트, 존 타올러, 헨리 수소, 공동생활의 창립자인 러이스 브레이크 등에 의해 후일 에보츄 모데르나라고 하는 새로운 경건주의 운동의 물결로까지 이어지는 이 신비주의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에쿠와르트는 정죄되고, 교황 요한 2세에 이들이 주장하는 교리들 중 상당부분을 이단적인 것으로 공포하게 되었습니다. 모두 이성을 중시하고 체험을 무시하는 강하게 빠진 스콜라철학에서 몸부림을 쳐 본 그런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후에 오랜만에 이 신앙과 신앙에 있어서 이 체험과 이 진리, 지식이 균형점을 잡게 되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16세기의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 칼빈, 쯔빙글리, 그리고 멜란히톤, 뿐만 아니라 그 이전에 있었던 종교개혁 이전에 있었던 종교개혁가들, 팀베이나 이런 많은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성경, 특히 복음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참된 지식과 경험이 일체된 가운데에 종교개혁이 태동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의 글을 보면 냉담하고 차갑지가 않고 뜨거운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언젠가 존 캘빈이 디모데서를 설교한 설교를 읽으면서 아주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의 직무는 성경의 직무와 연속선상에 있다는 거죠,.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는 것, 그리고 또 불신자들에 대해서는 구원에 이르는 지식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죠. 그러면서 그는 설교에 있어서 설교 본문과 설교자의 패밀리 에러티, 즉 친밀성을 강조하였고 그 친밀성의 근원은 본문에 대한 영적인 체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설교 속에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당신이 만약에 아비라면 당신의 새끼가 잘못했을 때 얘야 그러지 말거라 이렇게만 말할 수 있겠느냐. 만약에 명백하게 그가 잘못했다면 이 놈의 자식, 네가 그 따위로 행할 거야. 너 정말 죽고 싶어 라고 회초리를 들 것이다 교인들에게 그렇게 설교하라”..그러나 종교 개혁 후기부터 일어난 이 교파간의 치열한 교리 논쟁, 특히 카톨릭과 루터파와의 논쟁을 통해 그 변증의 과정에서 새로운 번세 철학적인 요소가 중시되고 교회는 어느 정도 생명력을 결여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리 보다는 삶이라는 구호를 내건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는데 이것이 바로 17, 8세기에 있었던 경건주의 운동입니다. 할례대학을 중심으로 해서 진전 도르프, 프랑크푸르트의 목회자이던 필립 야곱 츄페너 등에 의해서 일어난 이 운동은 교회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교리 보다 삶이라는 그들의 이 순수한 그 의도와는 달리 후일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부인하고 복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과 인류 평화주의의 추구에 의한 보다 나은 세상의 건설 사이를 혼돈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 길을 열어주고 마는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이제 19세기로 넘어오게 되고 19세기 말쯤으로 넘어오게 되면 자유주의의 물결에 의해서 모든 대륙들이 거의 삼킨 바 됩니다. 이 때에 이제는 초자연적인 계시 같은 것들은 믿지 않고 그리고 이제 인도주의적인 그러한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고 인간의 행복을 증진하는 데에 모든 것들이 집중되게 됩니다. 이런 속에서 성경에 대한 곧은 비평이 이루어지게 되고 계시의 신적인 기원을 부인하는 기독교의 절삭점(?)부인하는 이러한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면서 이제 서서히 지성적인 흐름을 가지고 있었던 종교들이 미국에서 구라파에서 쇠퇴하게 되고 미국을 중심으로 새로운 또 다른 하나의 체험을 중시하는 신비적인 경향의 운동들이 일어나고 대중의 환영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오순절 운동입니다. 이렇게 해서 지금은 이런 것들이 아주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게 됐습니다. 이제 포스트 모더니즘의 치하에서 진리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시대의 정신과 함께 이러한 것들이 아주 혼란스럽게 되어 가고 그러면서 한 쪽에서는 극단적인 신비체험을 강조하고 또 한 쪽에서는 윤리운동이 일어나고 또 한 쪽에서는 기독교를 차가운 지식의 세계로 보는 이러한 혼란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우리들이 이제 목회의 후보생들로써 하나님 앞에 훈련을 받고 있는 거예요. 이런 것들에 대한 답을 우리들은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기는 하지만 그러나 가장 좋은 해결책은 도대체 이 문제에 대해서 성경이 무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지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는 것이 가장 훌륭한 해결책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러한 문제들은 도대체 어떤 식일까요? 이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개념부터 손을 대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호세아 4장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희를 버려 제사장 나라가 되지 못 하게 하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지식은 의심할 여지 없이 “다트”곧 “다트 엘로힘”이었습니다. 다트 엘로힘..곧 하나님의 지식, 혹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을 버려서 더 이상 제사장의 나라가 되지 못 하게 하셨다고 하였으니 결국 이 지식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 거룩하고 선택된 백성들의 모든 총체적인 삶, 한복판에 있는 핵심적인 요소였던 것입니다. 자...그렇다면 도대체 이 다트 엘로힘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다트라는 이 명사는 야다라고 하는 동사에서 나왔고 구약 성경에서 이 야다라는 동사가 제일 먼저 씌여진 것은 창세기 2장에서의 일입니다. 아담이 하와와 함께 동침하니 아이를 낳았는데 가인이었더라...할 때의 동침하다라는 단어가 바로 이 야다였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는 결혼하지 않은 처녀가 “나는 저 남자를 안다”라고 말하면 혼사길이 막힌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자가 남자를 안다라고 하는 것은 같이 성교를 했다라고 하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똑같은 표현이 마태복음 1장에 나오지 않습니까? 누가복음에도 나오지 않습니까? 마리아에게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 할 때 마리아는 물었습니다. “내가 사내를 알지 못하거늘 내가 사내와 교접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다라고 하는 이 단어를 통해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그 히브리 마인드를 대충 여러분들이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지식과 경험을 세분하게 나눈 것은 히브리의 통합적인 마인드가 아니라 그리크의 분석적인 마인드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 그리크의 분석적인 마인드가 아니라 히브리의 통합적인 마인드하에서 기록이 된 것이죠. 그러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지식의 개념이 어떤 것일까요? 어떤 사실에 대한 지성적인 앎과 그것에 대한 감정적인 경험이 하나로 합쳐진 그것이 바로 참된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지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결정적인 특징은 바로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이 지식이 공동체적으로 경험될 때 그 공동체적으로 함께 공유하고 있는 다트 엘로힘이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의 유니티를 이루게 만들어 줬던 것입니다. 좀 더 핵심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과의 언약의 체결이라고 하는 것이 껍데기라면 그 껍데기를 꽉 채우고 있는 내용은 그 언약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를 통해서 공동체적으로 함께 경험하게 해 주시는 것, 이것이 바로 그 내적인 지리였습니다. 이 두 가지 껍질과 외포와 그리고 내면 그 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 하고 언약관계 속에 들어오지 못한 다른 모든 이방 백성들과는 구별되는 삶을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제 호세아 선지자가 그 지식을 버렸기 때문에 나도 너를 버리노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과한 말씀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들이 역사를 타고 구약 속에서 면면히 흐르게 됩니다. 선지자들이 꿈 꾸고 바라보던 미래,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 나라를 통해 이뤄질 하나님의 왕국의 완성은 바로 이런 다트 엘로힘, 그것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편만하게 되고 그 안에서 모든 이스라엘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공경하는 세상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그들이 꿈 꾸던 이스라엘의 왕국의 미래상이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런 다트 엘로힘 사상은 신약으로 넘어가면서 기독론적인 해석을 거치는 가운데 바울 신학 속에서 구체화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너시스투 크리스투”입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의 체험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거기에서 그리스도 예수께 사로잡히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서 아주 중대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중보로 성령 안에서 창조된 것처럼 또한 하나님이 죄로 말미암아 모든 상호교통이 깨어진 이 무질서한 세상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중보자로 이 세상에 보내셨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다시 연합된다라고 하는 사상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구약에서 다트 엘로힘이라고 했던 그것이 신약에서 기독론적인 해석, 그리고 교회론적인 해석을 거치면서 바울을 통해서 새로운 신학적인 개념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그너시스투 크리스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빌리보서에서 고백했던 사도 바울의 이 고백, “내가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고 유대인 중에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그리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으며 이러이러한 사람이었는데 그랬는데 내가 이 모든 것을 다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 왜냐하면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 그 고백의 의미를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정확하게 그너시스투 크리스투와 그리고 다트 엘로힘, 이 두 사상은 구속사적으로 기가 막힌 연대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따라서 하나님을 알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을 독자적으로 찾아야 될 것이 아니라 수도원에서 관상을 하고 토마스 머튼의 제자가 될 것이 아니라, 네? 아니란 말이야..네? 그게 아니라, 그리스도를 탐구하면 구약 시대의 성도들이 그렇게 갖고 싶었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다트 엘로힘을 소유하게 된다 이거에요. 유일한 길이에요. 모든 하나님에 관한 신비한 비밀이 오직 그 예수 안에 있는 거예요. 그 사상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일생의 비전이 뭐였는지 생각해 보면 오늘날 이 유치한 교회 성장주의의 비전놀음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 알 수 있을 거예요. 로마에다 500개 교회 세우는 것이 사도 바울의 비전이었어요? 100만명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세례를 주는 것이 사도 바울의 비전이었어요? 아니면 세계에서 제일 큰 처치빌딩 세우는 것이 그 바울의 비전이었어요? 5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이 바울의 비전이었다고 말한다면 난 그 사람을 비웃겠어요. 그의 생애적인 비전이 무엇이었는지 아세요? 빌립보서 3장에서 말합니다. “내가 나의 얻은 의는 곧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다”라고 말하면서 그는 말합니다. 자기의 일생의 비전이 이거라고 말합니다. 다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붙잡았다함도 아니라 미친 듯이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데 그 비전이 뭐였어요?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함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여...그랬어요. 알고자 하여...그에게 있어서 최고의 비전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 그리고 급기야는 그리스도의 그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었어요, 그게 비전이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개혁주의 목회자가 되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 성육신 하신 그 예수그리스도 한 분의 인격에 철저히 매인 사람이 돼야 되는 거예요. 거기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세계 속에 있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지혜를 발견하고, 그래서 참 재밌는 것이 뭐냐면 존 오웬 목사님은 창조론을 기독론 속에서 진술했어요. 큰 창조론의 틀을 기독론 크리스톨로기아에서 기독론을 진술해 가요. 그 분의 판단으로는 기독론 속에서 창조론을 다루는 것이 가장 복음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 안에 무엇인가 사물을 판단할 수 있는 두 가지 기능을 주셨어요. 그게 뭐냐면 하나는 감각하고 사변하는 기능이고, 또 하나는 마음 안에 있는 호불호의 성향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이렇게 눈을 통해서 내 바깥에 있는 사물들을 보고 그것이 지성 속에 들어와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은 대개 세 가지의 인식론적인 과정을 거치게 되는 거예요. 첫째는 감각이에요. 감각을 통해서 물상들이 뇌 속으로 들어오게 되고 들어온 그것들은 하나의 느낌과 커다란 인식의 질료가 되어서 불명확한채로 어떤 질료의 상태로 우리의 정신 속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것을 “퍼셉션”, ‘지각’이라고 불러요. 그리고 그렇게 들어온 것들이 마치 형상을 부여받고 물체가 되듯이 우리 속에 있던 어떤 고유한 관념을 통해서 해석됨으로써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우리 속에 인식되게 되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카그니션’, ‘인식’이라고 부르는 거죠. 이렇게 해서 내 밖에 있는 사물들이 인식론적인 과정을 거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이러한 인식론적인 과정은 필연적으로 해석을 필요로 해요. 그럼 해석을 필요로 하는데 그러한 해석을 무엇이 미치냐 하면 우리 안에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지식만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의 우리의 감정, 우리 안에 있는 애정의 성향 같은 것들이 영향을 미치게 되는 거죠. 그래서 만약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서에 붙잡혀 있게 되면 사물들 모두를 생각하게 될 때 그것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의미적으로 연결되며 해석이 되게 되고, 그리고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들이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향하여 연결을 짓고 해석이 되게 되는 거죠. 그것이 바로 우리의 우리 안에 있는 인식론적인 특성이에요. 어느 장로님이 선심 예배 시간에 성경 봉독하러 올라갔는데 이 분이 배추장사 하시는 분이었어요. 예배 시간 내내 배추값이 떨어진 것 가지고 고민을 하다가 “박 장로님 올라오셔서 성경봉독 해 주시겠습니다.” 그러니까 얼핏 해서 올라가서 한다는 얘기가 “오늘 설교 본문은 요한복음 3원 16전입니다.”이 마음의 무슨 느낌이 있는가에 따라서 이것들이 이게 인식이 좌우되는 거예요. 그러니 만약에 여러분들이 신학을 공부하는데 이 신학이라는 것 자체는 두렵고 사랑스러우신 하나님에 대한 학문이에요. 그러니까 그 하나님에 대한 학문을 공부하기에 가장 적합한 마음은 그 학문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 그 학문의 목적이 되는 경배의 정신, 그 속에서 이루어지는 학문의 상태가 가장 이상적인 상태이고, 그런 속에서만 하나님에 관한 제대로 된 지식들을 습득할 수 있게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오늘날은 세상이 변했다고 많이 이야기하고, 그래서 이제 옛날의 목회의 방식들, 그리고 전설적인 목회사역에 있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이 사람들의 이 모든 체험 같은 것, 경험 같은 것들은 별로 필요가 없고, 그런 지혜를 배울 필요는 별로 없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면 오늘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이 세대는 옛날하고 전혀 틀린 세대고 격변하는 세대이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정신의 목회 방식이 필요하고 우리의 선배는 이러한 새로운 현실에 직면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분들에게서는 별로 배울 것이 없다라고 생각을 하는거죠. 그런데 교회 역사를 보면 어느 시대든지 그렇게 얘기하지 않은 시대가 없었습니다. 모두 자기네 시대는 새로운 시대라고 생각했고, 옛날 시대의 재판이라고 생각한 시대는 아무 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좀 더 이러한 우리 속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교회와 이 시대에 대한 견해들이 정상적인 견해인지를 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에요. 저는 오히려 지금 교회가 세상이 변한 것을 가지고 고민하는 것 말고 더 필요한 것이 있는데 진짜 큰일난 것은 세상이 변한게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너무 많이 변한거예요. 자기 자신의 변화에 대해서 교회가 경악을 하지 않으면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 아무리 충격을 받아도 새롭다고 내놓는 그 방법들이 결코 교회를 살리지 못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러면 지금 교회가 너무 많이 변한 것, 거기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죠? 교회 안에서 진리에 대한 진지한 체험이 사라져 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죠. 도대체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신앙생활 그 자체가 진리를 찾아가는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죠. 사도 시대 때에 유대교 속에 묻혀있는 한 종파로 알았던 그리스도교가 새로운 그들이 보기에 새로운 철학과 종교를 들고 나왔을 때 그것은 그들에게 ‘뉴 웨이 오브 라이프’였습니다.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서의 복음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 새로운 철학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의 복음 전파에 대해서 그렇게 철학자들과 사색하는 사람들이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의 사상에 대한 개방성이 이러한 자유를 어느 정도 허락을 했던 것이죠.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곧 새로운 삶의 방식을 택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곧 새로운 철학을 선택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는 신앙 때문에 자신의 삶을 바꾼다든지 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세상에 있는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윤리적인 수준이 더 낫지도 않고 또 나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고 이렇게 방송을 통해서 교회가 얻어맞고 하면 분노하고 그리고 궐기대회도 해 보지만 교회의 도덕적인 수준에 뭐 특별한 변환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일들은 별로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모든 심각한 교회의 본질의 변화 중심에는 무엇이 있냐면 이 진리에 대한 체험의 결핍이 있는 거죠. 그래서 성경이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전도라고 하는 것은 그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이 ‘트루쓰 커뮤니케이터’가 되는 거예요. 진리의 전달하는 전달자들이 되는 거예요. 자기가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고 그 분에게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전수받고 그렇게 그 삶의 방식을 유지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통한 성령의 놀라운 은혜 속에 살면서 천국을 자신의 삶 속에서 실제로 경험하고 그래서 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보다 더 소중한 그런 영원에 잇대인 어떤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믿으면서 이 험악한 세상에서 고난과 핍박을 이기면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그 모습이 바로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자의 모습이에요. 근데 문제는 뭐죠? 진리에 대한 체험이 교회에서 사라지는 것이죠. 난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 번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교회 모두 다니시고 사역을 하고 계시니까 여러분 주위에서 최근에 진리를 경험하고 그 진리 때문에 회심한 사람을 얼마나 만났습니까? 그 진리 때문에 예전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새로운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을 도입한 사람을 여러분들이 얼마나 만나게 되었습니까? 영혼의 변화를 여러분들은 교회 속에서 발견하고 있습니까? 성도들이 이처럼 진리에 대한 체험을 상실한 것은 전수받을 진리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그런 모든 문제의 핵심에는 누가 있습니까? 진리를 전달해 주는 주된 통로인 목회자 자신이 이 진리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이 살아가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목회라고 하는 말은 교회 경영 정도를 의미하는 말이 되었지. 그 이상의 일상적인 목회자의 그 기능을 수행하는 정도로 이해되지, 더 이상 이해되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목회자에 대한 중요한 그 정체성의 변화입니다. 미국을 기준으로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목사 하면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된 정체성은 트루쓰 커뮤니케이터였습니다. 진리를 전달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19세기의 중엽에 미국에서 중대한 변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산업혁명입니다. 구라파 보다는 한 100년 뒤졌죠?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전에는 물건을 만들어서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한테 실명제로 팔았습니다. 재화의 유통 속에 인격적인 교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장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대량 생산이 이뤄집니다. 그러다 보니까 대량 생산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자본과 기술, 그 다음에 노동력 등을 한꺼번에 모을 수 있는 인프라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도시가 발달하게 되는 거죠. 예전에는 나 혼자 성실하게 농사를 지으면 이제 농사를 할 수 있었고 가족들과 함께 집 안에서 이렇게 저렇게 만들면 연장이나 도구들을 생산해 낼 수 있었는데 이제는 모든 많은 도시의 인프라를 사용하지 않으면 이 생산이 안 되는 거죠. 그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산의 한 요소로 작용을 하게 되는 거죠. 이제 누구도 무시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면서 결국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치의 상대성이 인정되기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누구의 의견도 이젠 절대적인 것이 없는 그렇게 고집해서는 생산 활동과 경제 활동이 불가능하게 되죠. 예전에는 동네 사람이 동네 사람에게 팔았는데 이제는 대량 생산해 내고 업자들이 그것을 사다 날라서 유통망을 통해서 배포하고 그리고 알지 못 하는 미지의 고객들에 의해서 구입되어 소비되게 되는 거죠. 사람들의 관계는 사라지고 돈과 자본, 기술이 물 처럼, 비인격적으로 흐르게 되는 것이죠. 이 속에서 진리에 대한 심령들이 급격히 약화되지 시작합니다. 물론 강력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부흥이 있었다면 괜찮았을텐데 이런 것들이 일어나지 않고 부분적이었기 때문에 미국사회 전체적으로 진리의 절대성 자체에 대한 확신들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우리나라에서는 20세기 중반 이후에 전쟁이 끝나기 시작하면서 이뤄지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식이 된 속에서 이제 목사라고 하는 사람도 우리가 필요로하는 삶의 다양한 영역 중에 문화, 교육, 생활, 뭐 등등 있는데 그 중에서 종교라고 하는 한 부분에 맡아서 우리에게 서비스해 주는 사람이라고 하는 생각을 갖게 되고 그리고 그 사람의 이야기는 또 많은 나의 삶과 관계를 맺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견해 가운데 한 견해일 뿐이라는 생각이 사람들 현대인 사이에 들어오게 되는 거죠. 그러면서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는 준비가 되는 거예요. 자, 이렇게 된 속에서 해결책이라고 한다면 결국은 이 진리가 결코 그런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여전히 이 시대가 수없이 변했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목회자들을 하나님의 진리를 전달하는 중요한 도구로 부르셨다고 하는 것들을 실제의 삶의 현장을 통해서 목회 사역의 현장을 통해서 다수의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는 것이거든요? 그것은 결국은 설교자 자신이 증거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진리에 사로잡히는 일들이 필요하게 된 거예요. 필요한 거예요. 그것이 바로 뭐냐면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체험에 의한 이 거룩한 열정과 사랑을 소유하게 되는 거라 이거죠. 저는 뭐 직접 교육을 그 분을 통해 받지 못했습니다만, 아주 가까이 지내시던 제자가 저의 스승이셨기 때문에 자주 그 분에 관한 증언을 들었습니다. 우리 학교에 계시던 고 박윤선 목사님이셨습니다. 50이 훨씬 넘으셔서 서울에 교회를 하나 개척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서 설교를 하셨어요. 그 교회에 문선명 교파에 속한 대학교수 여교수 한 사람이 전도를 받아서 예배에 참석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수요예배 주일예배 이렇게 지내면서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이렇게 지내오게 되었어요. 한 두어달 지난 후에 부목사님이 이 여교수를 만나서 물었습니다. “교수님, 이제 우리 박 목사님 설교를 그 동안에 여러 번 들어셨는데 이제 좀 깨달아지십니까?” 이 여교수의 대답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커요. 그게 뭐냐면 “저는 솔직히 지금도 문 선생님 말이 맞는지 박 목사님 말이 맞는지 잘 판단이 안 섭니다. 그러나 제가 두 달 설교를 들으면서 확실히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확실히 깨달은 것 하나는 저 박 목사님이 외치는 말씀이 진리일 가능성이 많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 분이 외치는 설교가 진리가 아니라면 저렇게 나이 드신 분이 설교 시간에 저렇게 피를 토할 듯이 온 몸으로 부르짖을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나는 누가 저더러 설교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피 바른 성경의 진리에 대한 발언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설교자 속에서 성경을 통해 깨달아진 진리가 진액과 피를 바르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간에게 전달된 발화, 이것이 바로 설교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 체험하지 못한 진리를 설교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이 현대 교회에 있어서 최대의 위기이고 그리고 이것이 바로 교인들을 방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들은 방자하게 마련입니다. 이 사사기를 보십시오. 여호수아와 하나님의 영광을 보던 모든 조상들이 죽게 되자 그들은 각자 자기의 옳은대로 행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학생들은 신학을 열심히 공부하는데 동기가 순결하지를 않습니다. 즉, 이 신학의 공부를 통해 성경을 더 잘 사랑하고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영혼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목적에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공부를 통해서 보다 좋은 자리를 마련하고 그리고 공부한 후에는 다른 사람보다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공부를 하고 더욱이 그러한 공부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사람들을 향해 자만해 지는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자기의 자랑을 위해선 공부하는 것은 신학적인 간음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도 우리가 이런 식으로 신학 공부를 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신학을 시작할 때 뿐만이 아니라 그 신학적인 지식을 추구하고 쌓여가는 모든 과정에 있어서까지 하나님에게 철저히 복종되고 하나님에 관한 아름다운 진리들을 한하나 배워갈수록 예전보다 그 분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는 이 사랑과 열정의 정서 속에서 성숙되어져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 제 10장은 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9장까지 계속해서 예수님 곁에 있었던 소위 제자들이 10장을 계기로 해서, ‘아포스톨로스’, ‘사도’로 파송이 되기 때문이죠. 이렇게 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던 제자들은 본격적으로 파송받은 사도로써 일하게 되고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약한 것과 병든 것을 고칠 수 있는 권세를 주셔서 영적인 놀라운 권세를 주셔서 자기의 제자들을 사도로 파송하시게 됩니다. 그런데 그 동기가 무엇이엇습니까? 마태복음 9장에서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함이라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의 제자들을 이 세상에 파송하셨던 것입니다. 민망히 여기셨다라고 하는 이 번역이 희랍어 성경에는 ‘에스플랑 크니스데’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수동태 동사입니다. 이 에스플랑 크니스데는 적당한 번역을 찾기 어려운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자적인 이 뜻은 ‘비 무부드 투 원스 바울’입니다. . 즉 한 사람의 창자에 이르기까지 감동을 받다..라고 하는 것이 이 에스클랑 크니스데의 원래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이제 팔레스타인의 문화적인 맥락과 관련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의 좌소가 창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콩고 사람들은 콩고나 우간다 지역의 사람들은 인간의 영혼이 간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 때 우간다의 독재자였던 이디 아민이 자기의 정적을 죽여서 간을 꺼내서 씹어 먹은 사건이 신문에 보도가 되어서 전세계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사람들의 문맥에서 보면 대적자의 어떠한 부활도 방지하는 훌륭한 종교적인 방책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 팔레스타인의 문맥에서 보면 에스플랑 크니데스라고 하는 단어는 이렇게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 말로 등가번역을 시도한다라고 할 것 같으면 이런 번역이 되는 것이죠.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파하셨으니..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고 고생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신학교에 올 소명을 받게 되었냐고 물으니까 환경이 거기로 갈 수밖에 없도록 몰았습니다..라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결코 소명은 그렇게 자기의식과는 상관이 없이 환경에 의해서 인도되는 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나는 내가 가르쳤던 많은 신학교에서 나의 후학들에게 했던 것처럼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도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에게서 소명되지 않은 분들은 신학을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주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여러분들에게 한 형제로써 간곡히 권합니다. 그것은 본인에게 매우 불행한 일이고 교회에게는 더없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조지 윗필드라는 사람은 회심하지 않은 목회자야말로 교회에 두고두고 독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소명되지 않았다면 여기 왜 이 자리에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여기 있어야 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이 길은 그렇게 기분 좋은 길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 학교를 마치고 나면 어떤 좋은 일이 기다릴 것이라고 희망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치욕과 멸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참된 목회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면 거긴 영광이 없습니다. 부유함도 없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세속적인 기쁨과 환락, 그리고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영광과 존엄 같은 것,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후배가 저를 찾아와서 “저는 선배님이 부럽습니다.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뭐가 그렇게 행복해 보입니까?” 그러니까 “책도 많이 쓰시죠, 교회도 개척해서 사람도 모이죠,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형제여 오늘 뜨게, 오늘 떠라..내가 만약에 6개월 동안을 매일 하나님 이제는 내 생명이 충분합니다. 나를 이 고통스러운 목회의 현장에서 이제 나를 거두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면 네가 믿을 수 있겠느냐”그런 영광 기쁨 없습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시는 목회자들은 가시밭길을 걷게 하셔요. 그들의 흘린 피가 설교를 살아있게 하고 그들이 흘리는 눈물이 그들의 기도를 생명력 있게 그래서 하나님이 놔두지 않으셔요. 놔두지 않으셔. 난 오늘 여러분들에게 정말 진지하게 말하고 싶어요. 부인할 수 없는 소명은 환경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의식 세계 속에서 오는 거예요. 그 의식 세계 속에서 오는 거라는 것이 뭐냐면 바로 이 에스플랑 크니스데에 동참하는 것, 그게 소명을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에요. 그래서 이 소명은 어떤 일생을 하나님을 위해서 살 계획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할 비전을 통해서 소명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는 한 분의 인격과 맞닿뜨리면서 소명을 만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냥 이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한 순간에 진리의 빛이 확 비쳐 물론 예전에도 비쳤고 예전에도 그리스도를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복음 사역을 위해서 일생을 살기 위해서는 매우 특별한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이 필요한 거예요. 그게 소명의 핵심이에요. 그러니까 그렇게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만났기 때문에 만났을 때의 자신의 마음속에 드는 건 뭐죠? 그게 뭐예요? 그게 왜 그리스도께서 쓸모없는 나 같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 그러면서 이 쓸모없는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그 놀라운 사랑에 전율하는 거죠.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존귀하심과 그 십자가의 은혜를 입은 자신의 비참한 사이에서 좁힐 수 없는 그 무한한 격자 앞에서 흐느끼며 감격을 하는 거죠.
(찬양)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십자가의 사랑 앞에 깊이 꺾어지는, 그러고 보니까 예전에 나를 위해 살았던 모든 날들이 서럽도록 다가와요. 이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사랑, 나를 죽음에서 건져주시고 쓰레기 같은 이 인간을 택하여 당신의 나라를 위해 살게 하시고 그 분의 아름다움을 찬송하며 살게 해 주신 그 크신 은혜에 깊이 감격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복종하여 드리는 것, 그러고 나서 보니까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 내 마음 속에 이 에스프랑 크니스데의 마음이 함께 느껴지는 거죠. 나는 이 큰 사랑을 알고 이 십자가의 은혜 속에서 이렇게 살게 됐는데 아직까지도 이 눈을 들어 세상을 보니까 이러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리고 그들은 무엇으로도 그들의 불행을 막을 수가 없는 거죠. 그리고 이 세상의 어떤 것도 그들에 있어서 그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고 생각을 하고 그들에게 오직 필요한 것은 내가 만난 이 그리스도 예수 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해요. 이것이 너무 크게 짓눌러서 내가 도저히 일상적인 직업에 종사해서는 그렇게 살 수가 없고 시간을 틈틈이 내서 복음을 전하고 직장 생활 하면서 틈틈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는 도저히 내 마음에 있는 이 견딜 수 없는 열정이 채워지지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가난할지언정 세상의 명예를 잃어버릴지언정 보장된 미래가 없을지언정 사람들에게 멸시와 치욕과 고난을 받을지언정 나의 가려던 인생의 모든 길을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자기를 버리는 것, 이 소명이에요. 만약에 없다면 떠나십시오. 제가 신학교에 9년 있는 동안 약 200명 내지 300명의 학생들을 신학교 밖으로 내보냈어요. 떠나세요. 그리고 떳떳하게 정직하게 자기 생업에 종사하며 한 교회의 훌륭한 평신도가 되십시오. 동료들 중에 너무 훌륭하고 좋은 전도사님들이 목사 되면 그 밑에 가서 집사로 권사로 장로로 봉사하면서 물질적으로 헌신하고 주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십시오. 만약에 떠날 확신이 없다면 모든 것을 멈추고 여러분 마음 속에 외치시는 성령님의 긴급 동의를 들어보십시오. 소명을 확인하거라 하고 말이에요. 목숨을 걸고 소명을 확인하십시오. 만약에 하나님이 내가 이 신학교를 다녀서 복음 사역을 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면 내 마음에도 그 필연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목숨을 걸고 기도해 보셨습니까? 목숨을 걸고 기도해 보셨습니까? 이 소명은 목숨을 걸고 기도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응답이 없으면 아닌 줄 알고 정직하게 교회로 돌아가서 직업을 다시 찾는 것입니다. 신학교에 들어와서 만난 많은 제자들을 소명 없음을 확인하고 보냈습니다. 자동차 맨 세일즈 맨으로, 햄버거 집 주인으로. 회사에 다니며 그리고 컨설턴트 대표로 열심히 일하면서 좋은 신앙 생활 하고 있는 내 제자들 많습니다. 난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윌리암 퍼피스는 ‘디 아트 어브 프로페사인’이라고 하는 자신의 대표적인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설교가 무엇인가,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심령을 파헤치고 지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내가 묻겠습니다. 어떤 설교자가 진리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진리를 아는 사람만이 진리를 말할 수가 있겠죠. 그런데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 진리가 저 인간의 심령을 파헤치고 지나가야되겠다라고 하는 설교의 목표를 가진 설교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자신이 그런 것을 미리 경험해본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혹시 뮤지컬 오르가즘이라는 단어를 알고 계십니까? 종종 음악회에 음악을 듣다가 기절하는 사람을 두고 가르키는 단어입니다. 한국이 낳은 팝페라 가수 조수미 씨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대에서 서실 때 어떤 마음이십니까? ” “나는 무대에 설 때마다 내 노래를 듣는 모든 청중을 쓰러뜨려버려야 되겠다라는 마음으로 노래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어쩜 진리를 전달하는 것이 그렇게 맥이 없고 재미가 없습니까? 자기가 보고 경험하고 자신의 마음을 불 붙인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에는 무엇인가 신비스러운 그 무엇이 사람들 속에 전달될 수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은 구약에 나오는 선지자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선지자들을 대부분 제일 먼저 선지서가 시작될 때마다 거기에는 소명에 관한 기사가 나옵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그 소명의 기사는 ‘봐이 예히 데봐르 엘로힘 엘’ 혹은 ‘레’ 혹은 ‘뵈’이렇게 등등 등장합니다. 번역을 하자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혹은 ‘여호와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임하니라’고 나오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선지자의 소명을 묘사하는 구약 선지서의 공통적인 기록입니다. 여기에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주 깊은 선지자직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과 관련된 비밀이었습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신약에 있어서의 성령론과 구약에 있어서의 성령론은 사뭇 다릅니다. 신약의 성령론은 이미 오셔서 우리 안에 충만하게 내주하시는 성령이시지만 구약에서의 성령님은 각기 당신의 직무를 위해서 사람들에게 찾아오시고 그리고 그에게 비범한 지혜와 능력과 권능을 주신 후 일이 끝나면 성령님을 거두시는 것이 구약에 나오는 일반적인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이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는 그 경험은 반드시 그 위에 성령님이 함께 임하시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결코 영만의 독자적인 신비체험이 아니었습니다. 선지자들은 선지 활동하러 나가기 전에 그들의 가슴 속에 하나님이 주신 각각 개별적인 메시지들이 있었습니다. 이 메시지들이 성령과 함께 임하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임재 속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런 임재를 통해서 이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 거룩하심, 이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코데쉬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거룩함의 경험이야말로 모든 선지자들의 공통된 소명의 특징이었습니다. 이것을 어느 정도 깊이 경험했느냐는 선지자에 따라서 차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선지자는 모두 하나님의 이 거룩하심을 말씀이 임하는 영적인 경험 가운데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통하여 그들은 두 가지 중요한 변화를 이 영혼과 지성 안에 간직하게 됩니다. 하나는 무엇이냐하면 우선 그 시대에 태어나서 그 사람은 필연적으로 그 시대에 자식이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신학공부를 하면서도 아무리 위대한 신학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그렇게 총명한 사람들이 결국은 그 시대가 가르쳐준 정신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놀랍니다. 그러나 사실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태어나서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영향이 필요하지만 이 시대를 본받기 위해서 우리들이 애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냥 시대에 섞여서 살아가면 모두 이 시대를 본받는 사람이 되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성령의 임재의 경험은 선지자들로 하여금 그 시대의 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모든 그 시대가 가르쳐준 잘못된 사고방식과 가치관으로부터 결별하도록 만들어주는것이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갖게 되는 것이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영광에 대한 장중한 경험을 통해서 그 시대에 전파하지 않을 수 없는 메시지를 이 가슴 속에 소유하게 되는 것이죠. 그것에 대한 웅변적인 증거를 한 증거를 예레미야 선지자가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진리의 말씀을 전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는 시위대 뜰에 갇혔습니다. 그 사람은 인간적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진리를 말하는데도 너희들이 듣지를 않아? 그럼 나도 말 안 할 거야’ 그러나 그는 잠시 후 자신의 이러한 결심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즉 다시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할라치면 그 말씀이 중심에 불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골수에 사무치는 것 같아서 그걸 토해놓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핍박을 받고 매 맞으면서도 그 진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전치사 하나를 가지고 이런 것들을 논증하는 것 자체가 뭐 모험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러나 저는 하나의 본문을 예로 들고 싶습니다. 호세아 1장 4절에 나오는 호세아의 소명에 관한 기사입니다. 그 부분은 이렇게 적습니다. ‘떼일라뜨디떼르 엘로힘 베 호샤’라고 말합니다. 직역을 하자면 맨 처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말씀을 하시니라 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호세아라고 하는 이름 앞에 나와 있는 전치사가 히브리 말로 ‘베’입니다. 정확하게 번역을 하자면 ‘인투 호세아’죠. 즉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셨는데 호세아에게 그냥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말씀은 호세아 속으로 들어가서 호세아를 관통하며 그 시대에 태어나서 젖었던 자기의 모든 사고방식과 이런 것들을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훌륭한 통로가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이러한 놀라운 이 속에 있는 이 틀들을 깨뜨리는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던 것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의 소명은 그런 점에서 전혀 새로운 경험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이 선지자들에게 임했던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의 경험이 기독론적인 새로운 해석을 거쳐서 그리스도에 대한 경험으로 내려오게 된 것이죠. 그래서 다트 엘로힘이 그노시스투 크리스토스 투 된 것처럼 성령으로 말미암는 여호와의 메시지의 경험이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경험이 된 것이죠. 이 부분에 대해서 김세윤 박사님은 자신의 박사 논문 속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의 신학과 모든 삶의 핵심 속에는 다메섹의 체험이 있다”고 말입니다. 다메섹에서 무슨 체험을 했습니까? 빛으로 나타난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이전에 그는 정치적으로는 로마니즘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고 문화적으로는 헬레네즘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면 종교적으로는 주다이즘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갈 어떤 자리도 없는 그 시대의 정신에 꽁꽁 매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빛으로 예수님을 나타나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만났습니다. 그 분에게 온 마음이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그리스도와의 만남, 부활의 만남,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신학적인 해석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죄, 율법을 어긴 모든 이스라엘 백성과 인류의 죄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죠. 그러면서 그를 감싸고 있던 이 모든 시대의 정신의 틀들이 박살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숙명, 즉 아낭테(?)에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였습니까? 디바인 엔폴스먼트..그것이 바로 신적인 강제력이었습니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그래서 다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말하지 아니할라 라고 마음을 먹는다고 해도 그것이 소용없어서 피를 토하면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말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채찍에 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예수는 그리스도시라 너희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그리스도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 보내신 메시아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그 필연적인 숙명에 매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소명입니다. 그게 소명입니다. 안갈 수 없는 길, 그게 소명이에요. 냉담한 시대 속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에서 불순종하고 하나님을 거스려 살던 일주일의 시간이 끝나고 다시 하나님 앞에 와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드리는 찬송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자기 같이 걸레만도 못한 인간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 때문에 구속 얻은 사람으로 드리는 기도가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이 감사의 제사인 예배가 어쩜 그렇게 냉냉할 수 있습니까? 제가 하는 이야기가 가슴이 아프더라도 여러분들이 좀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참 사랑하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이 학교에 대한 사랑이 내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나 총신을 다니는 여러분들에게는 제가 다니는 수많은 학교와 비교할 때 아주 독특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겸손의 결핍..그리고 냉소주의, 신학적 냉소주의, 아마도 전국에서 똑똑한 학생이 모였기 때문에 그럴 거다라고 생각합니다. 서울대가 그런 분위기입니다. 그렇게 위로를 해 봅니다마는 잘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냉담한 것은 큰 질병입니다. 자기의견은 아무것도 말할 수 없으면서 무엇이든지 냉소하는 것, 칼빈도 씹고, 그 다음에 교수님도 씹고, 신학자도 씹고, 현대주의자도 씹고, 어거스틴도 씹고, 난 묻고 싶어요. 네가 그렇게 잘났냐고..겸손해져야 됩니다. 그러니까 총신 학생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스승이 없어요. 여러 학생 보고 물어봤어요. 없어요. 선생님이 없어요. 예전에 총신에 훌륭한 선생님들 여럿 계셨고요, 지금도 제가 이 나이 먹었는데도 머리가 숙여지는 선생님들이 아직도 이 학교에 계세요. 안 믿어질지 모르지만 목회 하다가 깊은 어려움과 시련을 만나면 그 선생님이시라면 어떻게 행동하셨을까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선생님들이 아직도 이 학교에 계세요. 존경하세요. 정말 냉담해요. 이것이 결국은 신학이 불 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신학 공부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사랑의 열정 속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에요. 이것을 나는 신앙적 정동이라고 부릅니다. ‘아펙투스’ 혹은 영어로 ‘어펙션’이라는 단어는 우리 말로 정서로 번역이 되지만, 저는 이것을 정동이라는 말로 옮기기를 좋아합니다. 즉, 정이 흔들리는 것이죠. 자 그러면 이제 왜 이 참된 신학 지식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사랑의 정서와 나뉠 수 없는지에 대해서 잠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자 우리의 인식은 지성의 작용이고, 그리고 우리의 감정은 영혼 안에 있는 또 다른 어떤 애성의 기능이 되는 것이겠죠? 그러면 이것은 이렇게 아는 것 따로 그 다음에 뜨거운 열정 따로 이렇게 목회 현장에서 추구돼야 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요즘 하는 얘기는 뭐냐하면 교리는 집어 칩시다, 이제 우리가 머리만 커졌습니다..그런데 아니거든요? 누구 머리가 커졌는지 내 묻고 싶습니다. 누구 머리에 그렇게 기독교 지식이 많이 들어가고 염려스러울 정도로 성경 지식이 많이 들어갔는지 묻고 싶습니다. 절대 머리 커진 적 없거든요? 머리는 커질 지 모르지만 속은 비어 있습니다. 충격적입니다. 신학대학원 다니는 학생들이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하고 왔습니다. 우리 학교만은 아닙니다. 평신도들과 함께 가장 기초적인 교리 문제 50문제를 내고 OX 시험을 봤습니다. 신학대학원 다니는 학생들이 30점 맞았습니다. 성도들은 60점 내지 70점 맞고...자, 무슨 머리가 그렇게 염려스러울 정도로 커졌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래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하면 이제는 머리만 키우는 것 하지 말고 이제는 가슴을 뜨겁게 키우는 것을 합시다..그리고는 무슨 수없이 사랑을 끌어올리는 그런 열렬한 찬양, 아니면 무엇인가 분위기, 그리고 교회를 공연장처럼 만드는 어떤 새로운 시도, 경건의 미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고 거대한 행사나 이벤트 페스티발처럼 열리는 그 예배, 이런 것들은 정말 개혁주의 아닙니다. 정말 개혁주의 아닙니다. 한 트럭이 넘는 음향기기를 쏟아놓고 그리고 막 현란한 음악과 조명 속에서 그렇게 번쩍거리면서 그렇게 사람들의 흥을 돋두는 거기에 미친듯이 날뛰면서 노래 부르는 그 속에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습니다. 다 쓰레기 같은 열정주의입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경건한 열정과 그리고 그 신령한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경험은 이러한 공식으로 요약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렐리저서펙션’이라고 하는 책에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개진한 바 그의 교리와 같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신령한 체험은 은혜로운 정서를 반드시 불러온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지성을 통해 진리의 말씀을 믿는 신앙으로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에 관한 그 놀라운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지식들을 갖게 되면 그 갖게 된 지식이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전달될 때 반드시 그것은 우리 안에서 합당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고 이 지성적으로 인식한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진리에 대한 사실과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뜨거운 정서의 반응이 함께 합쳐져서 이것들이 움직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마음 안에서 진리의 아름다움과 진리에 대한 감격하는 사랑이 함께 움직여서 이 마음을 출렁거리며 정동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이러한 출렁거리는 정동들이 우리 안에서 계속 반복될 때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충만한 생활로 우리들이 이어질 수 있는 거라 이거죠. 그러면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오늘도 오기 전에 어떤 책을 잠깐 읽고 왔는데 거기서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 목사의 개척 수기를 이야기 하면서 “개척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 개척할 땅에 가 보니까 기라성 같이 커다란 교회가 떡 버티고 사방에 진 치고 있었다. 나는 결심했다, 그래,.너희들 나 하고 붙어보자, 그리고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전도의 동기가 뭡니까? 그 대형교회하고 한 번 붙어서 이겨보기 위해서 전도한 겁니까? 그래서 경쟁을 해서 이겨서 마지막에 무얼 얻고 싶은거죠? 그 교회 교인이라도 한 번 뺏어와 보겠다는 겁니까? 아니죠. 만약에 사도들이었다면 그런 큰 교회들이 있는데도 여전히 복음이 소외된 외로운 그늘 속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며 흐느끼며 전도지를 돌렸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은 이것입니다. 신학 공부는 하나님에 대한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앎, 그것들을 성경과 학문을 통해 진지하게 탐구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게 될 때 성령께서 함께 하시면 그것을 발견하게 될 때 우리의 마음 안에 그에 합당한 정서가 일어나는 것이지, 이것은 젖혀놓고 우리 모두 마음을 뜨겁게 하기 위해서 박수를 치자, 최신 음향기기를 동원해서 한 번 뒤집어보자, 그렇게 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정말 개혁주의 아니거든요? 정말 아니거든요? 우리가 개혁주의가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모든 위대한 신학자들은 이러한 신학 공부와 그리고 진리, 그리고 열정 이것이 조화된 것을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칼빈 선생은 주석을 쓰면서 갑자기 주석을 멈추고는 장문의 기도를 써내려갑니다. 탄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준 그의 저술은 그 마음 안에 있는 신적인 정서를 보여주는 것이죠. ‘플로스 로기온’이라고 하는 이성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고자 하는 그 무모하기 짝이 없는 시도를 하면서 드리는 안셀무스의 긴 탄원의 기도는 우리의 마음에 다가옵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마틴 루터, 존 오웬, 그 이외에 헤아릴 수 없는 수 많은 믿음의 많은 사람들이 신학을 하는 그 현장에서 목매이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17세기 영국의 위대한 성학들, 그들 모두 이 체험과 학문이 동반된 가운데 하나님의 신학을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읽은지가 오래 되어서 어떤 그 시기에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정확한 문맥은 상실했습니다만 청교도들 가운데 길레스피라고 하는 유명한 경건한 목사가 있었습니다. 목회자들이 하나님에 관한 신앙고백을 작성하기 위하여 모두 모여서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사회 보는 목사님이 “오늘 우리 이 신앙 고백 작성을 위해 모임을 위해 길레스피 목사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겠습니다” 했어요. 목사님은 조용히 눈을 감고 천천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거룩하시고 사랑이 많으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 쭉 기도하고 기도하는 그 순간 고백서를 작성하기 위해 모인 모든 목사들이 함께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기도가 끝난 후에 신앙 고백 작성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을 때 어느 목사님이 긴급 동의를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제껏 살았지만 오늘 길레스피 목사님이 기도하시는 가운데 묘사한 하나님만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정확한 묘사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 분의 기도를 다시 옮겨서 우리 신앙 고백의 자료로 삼도록 합시다”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경건한 사람들이었어요. 진리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선지 동산에 있는 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때가 지나고 나면 여러분들은 누구 앞에가도 손쉽게 ‘나는 모릅니다 날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위치를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몰라도 아는 척해야 되고, 아는 게 없으면서도 그래도 아는 게 꽤 있는 것처럼 행세를 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여기에 머무는 이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지 기억해 보십시오. 공부 많이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부에 관심이 없으면 소명이 아닙니다. 적어도 목사의 소명은 아닙니다. 전도자로 사십시오. 전도자로., 열심히 전도자로 사십시오. 목사라면 반드시 공부해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그래서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공부가 하기 싫으십니까? 아마 목사의 소명이 아닐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는 진리의 전달자이기 때문에 진리에 대해서 깨달은 사람들의 족적을 탐구하는 것을 계속할 때에 싫증이 날 리가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 여러분, 정말 공부해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눈물로 호소하고 싶어요. 제가 여러분만할 때에는 책이 없어서 공부를 못 했어요. 우리 학교 도서관 통 털어도 6만권 밖에 없었고 그 중의 절반 이상은 독본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는 돈이 없어서 일주일씩 점심을 굶고 그 돈을 모아서 생명의 말씀사에 가서 원서를 사 가지고 돌아오곤 했어요. 시간은 있었는데 책을 살 수 없었어요. 지금은 책 살 돈 있게 됐어요. 그런데 읽은 시간이 없어요. 그래서 작년에 어느 시절에도 서재에 가서 책을 만지다가 주저 앉아서 막 울었어요. “이제 조금 눈의 띄어져서 이제 어떻게 이 학문을 하면 알겠다는 지혜가 생겨났는데 하나님 시간이 너무 없습니다, 잠을 아무리 줄여도 입술이 부르트도록 잠을 줄여도 이미 내 머리가 퇴화되어서 외워지지 않습니다. 두 달 전에 읽은 책이 펴 보면 줄 친 자국만 있고 내 마음 속에 새로운 책입니다. 하나님 도와 주십시오..진리를 전달하도록 부름 받았는데 내가 이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한참을 울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얼마나 좋은 때에요? 제가 여러분만할 때 하루에 라틴어 단어 200개씩 외웠어요. 지금은 20개도 외워지지 않습니다. 이 소중한 때에 여러분들이 그렇게 세월을 낭비하면 나중에 주님을 어떻게 만나시려고 합니까? 제가 대학교의 신학 대학에서 강의했을 때 책을 많이 소개시켜 줬어요. 그랬더니 2년이 지난 후에 어느 학생이 찾아와서 “교수님 머리 숙여서 감사드립니다. ” “왜? ” “교수님이 2년동안 저를 가르쳐 주셨는데 교수님이 읽으라는 책을 읽으면서 제가 지적으로 영적으로 많이 성숙했습니다 교수님이 우리에게 읽으라고 수업 시간에 소개해준 책이 얼만지 아십니까? 한 학기에 한 키였습니다.”이 학생은 정확하게 1년에 한 키씩 읽은 거예요. 2년에 걸쳐서 두 키를 읽었대용. 그것도 신학서적과 거룩한 책들을 말이에요. 가슴에 찔리시겠지만 들으십시오. 여러분들이 지금 1학년 2학년 아니면 졸업을 앞둔 3학년일 것입니다. 양심에 손을 얹고 레포트를 쓰기 위해서 군데 군데 읽은 것 말고 그리고 책 사서 수업시간에만 들여다 본 것 말고 그리고 사다각 점잖게 꽂아놓은 책 말고 카바에서 카바까지 신학적인 무게가 있는 책을 읽은 것이 입학한 이후로 여태까지 몇 권이나 되는지 한 번 여기에다가 쌓아놓아 보면 여러분들 그 키가 3년 동안 읽은게 어디까지 올라올까요? 어디까지 올라올까요? 정말 여러분들이 각성하고 하나님 앞에 깊이 공부해야 합니다. 제가 대학의 선생으로 있을 때 퇴수회 시간에 어느 강사 한 분이 오셨습니다,. 그 분은 여러분들도 잘 아는 분입니다. 예전에 있었던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보면 6 25의 참상을 묘사하는 흑백사진에, 손에 밥그릇을 들고 숟가락을 들고 하늘을 쳐다보며 울고 있는 가난한 어린 아이가 바로 그 강사였습니다. 그 사람이 와서 우리에게 강의를 해 줄 때 저는 엄청난 도전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은 하버드에서 석사와 학사와 박사를 모두 했고 그리고 헨리 키신저 시절에 그 백악관에 들어가서 고위 관리를 지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자신은 한국에 와서 보고 통탄을 한다는 거죠. 학생들이 너무 너무 공부를 안 한다는 것, 그리고 기껏 공부하는 것 보면 취직 시험 공부하는 거라 이거죠.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미국이 무시할 수 없는 나라인 이유를 아십니까 되물었어요. 자기가 하버드에서 공부할 때 전학생들이 하루에 600페이지의 책을 소화해야 됐답니다. 그 얘기를 상세하게 들려주는데 전 충격이었습니다. 그 학생들이 수업이 끝나고 나면 모두 도서관으로 가고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받거나 찾아서 그 다음서부터는 읽기 시작하고 그리고 읽은 그 학생들이 가지고 올라와서 10시 넘어서부터 기숙사에서 레포트를 쓰기 위해서 타이프를 치는데 당시엔 컴퓨터가 없었으니까 여름에 창문을 열어놓고 타이프를 치면 소나기 소리가 확 난다는 거예요. 실력이 있는 학생서부터 2시 정도에 불이 꺼지기 시작하고 3시 4시 급기야 실력이 없고 그리고 쳐지는 학생들은 5시까지 결국은 불이 안 꺼지다가 5시 좀 넘어서 교수들과 함께 조깅에 나온다는 거예요. 그리고 레포트는 칼 같이 정해진 시간에 내지 않으면 자기가 10분 늦게 갖고 갔더니 교수가 그 앞에서 문을 열고 딱 받더니 ‘노 땡큐’그러더니 쓰레기 통에다 탁 집어 넣더래요. 그러면서 대학 4년, 대학원 1년 내지 2년, 박사과정 3년 내지 7년을 공부를 하는 거예요. 물론 그 600페이지는 영어, 독일어, 불어, 심하면 다른 나라 언어까지도 공부를 해야 되는 거죠. 그러면서 덧붙이는 얘기가 재밌어요. “요즘 우리 학교 이제 폭삭 삭았습니다. 엊그제 가 보니까 480페이지씩 밖에 소화를 못 하고 있습니다.”그 얘기를 들을 때 마른 뼈처럼 살아가는 나 자신과 신학생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어요. 도덕적인 수준도 욕을 먹는데 이제는 지적인 수준까지 욕을 먹는 처지에 와 있는 것이 너무 슬펐어요. 여러분 능력 받고 은혜 받으면 된다...거짓말이거든요? 속지 마십시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목회해 보면 절대 그게 아니라는 걸 여러분들에게 3시간에 걸쳐서 논증할 수 있어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절대..2년 정도는 여러분들이 신선하게 설교할 수 있어요. 2년 지나고 나서는 공부 안 하면 옛날 설교 재탕해야 되는데 교인들이 담임목사와의 끈끈한 인간의 정에 붙들려서 묶여 있거나 혹은 교인들과의 끈끈한 정에 있어서 묶여 있거나 건축 헌금 낸 돈 본전이 아까워서 묶여 있거나 셋 중에 하나이지 진리 때문에 묶여 있는 건 아니라는 거죠,. 그게 얼마나 중대한 죄입니까? 그리스도의 교회가 진리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그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이것이 교회의 모습이지, 막역한 담임 목사와의 인간적인 관계, 교인들과의 끈끈한 정에 묶여서 그렇게 교회에 남아 있는 것이 그것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어느 한 순간 신학이고 성경이고 하나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캄캄해지고 아무것도 설교할 것이 없는 빈 마음이 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때마다 생각합니다. 내가 젊은 날 열심히 살려고 애썼지만 더 열심히 했더라면 그리고 더 많이 공부하고 더 많이 진리를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는 것이죠. 어느 목사님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김 목사님, 신학교에서 흘린 눈물은 들어가기 전에 흘린 눈물, 졸업하고 난 후의 눈물과 틀립니다.” “어떻게 틀립니까?” “신학교에 다닐 때 흘린 눈물은 30년 동안 사라지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습니다.”하고 얘기했어요. 어느 날 신학교에서 어느 학생이 노트가 있길래 무심코 겉장을 툭 폈더니 이렇게 적혀 있었어요. ‘나는 세상의 법정에 서 있는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이다 일평생 나의 생명을 다해 그 분의 누명을 벗겨 드리리라’..정말 숙연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내가 성경이 각 성에서 증거하기를 환란과 핍박이 나를 기다린다고 하지만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의 복음 전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노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그 소명이었습니다. 그런 신적인 정서 속에서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 웨슬레 선생의 목회의 성공의 비결을 묻는 어떤 사람에게 그의 유적지를 방문하면서 예배당에 들어가서 가이드하는 분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지금 웨슬레 선생의 목회의 성공의 비결을 물으셨습니까?” “예” “자 강단에 올라가십시오. 웨슬레 선생처럼 똑같이 해 보십시오 자 무릎을 꿇으십시오. 손을 모으시죠. 고개를 숙이십시오. 잘 하셨습니다 자 이제는 우십시오. 그 분처럼 흐느껴 우십시오.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과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십시오.” 그 전까지는 따라할 수 있는데 그 마지막은 따라할 수 없죠. 그래서 나는 오늘 이 설교를 모두 마치면서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사람이 되십시오. 깊이..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거예요. 성경을 통해서 만나는 하나님만큼 안전한 하나님이 없습니다. 다른 곳에서 만나는 것은 신뢰할 수 없는 측면들을 많이 가지고 있어요. 성경에서 주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신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 1년 2년쯤 되었을 때 일이었습니다. 너무 몸이 아파서 집에 드러누웠는데 잠이 도저히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계를 보니까 10시 20분쯤이었어요. 그래서 이제 일어났습니다. 성경을 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 보시는 교수님이 읽어주신 그 본문이 제가 읽을 차례의 성경 본문이었습니다. 서서히 읽다가 잠이 오면 자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시선이 멈췄습니다.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을 읽는 동안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강력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 전체 속에 흐르고 있는 타락한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 예수의 애통하시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도시가 멸망을 앞두기까지 잠들어 있는 교회의 그림이 떠올랐습니다. 많이 깨달은 후에는 걷잡을 수 없이 기도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무릎을 꿇고 한참을 기도를 했습니다. 얼만큼 기도했는지 시간도 잘 모르겠는데 끝나고 난 후에는 이 진리가 깨달음이 사라져 버리면 어떻하나 하는 안타까움 때문에 노트를 펴 놓고 깨달은 내용을 깨알처럼 막 적기 시작했습니다.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 밤에 내가 깨달은 내용을 중요한 것들은 거의 정리했다고 생각이 되어서 연필을 놓았을 때 이튿날 아침 8시 40분을 시계가 가르키고 있었습니다. 시계를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10시간이 흐를 수가 있을까..제 느낌에는 한 2시간 흘렀는데 10시간이 흘렀습니다. 종종 이러한 체험을 하게 될 때마다 사실 일주일에 한 번 설교해야 된다는 것은 목사에게 있어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한 번 그렇게 들어갔다 나오니까 한 3개월 이상을 설교할 재료들이 얻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설교할 기회는 일주일에 공식적인 예배에서 설교가 주어지지 않아요. 설교할 재료를 얻기 위해서 따로 노력하지 말고 자기가 말씀 앞에 서는 거예요. 사람들이 다 다니는 이 길이 산에는 항상 있습니다. 수없이 밟고 다녀서 대머리가 까지고 먼지가 풀풀 납니다. 그러나 그 길을 걷다가 저 숲속에서 들리는 가냘픈 소리를 들으며 남들이 가 보지 않은 숲 속에 두려움 속에 길을 들여놓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성경을 펴고 생각하는 것은 대부분 다른 사람도 다 생각하고 발견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더 많이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그 성경 속에 있는 또 다른 진리의 세계가 보여요. 숲 속으로 들어가 활짝 펼쳐진 빽빽한 나무 사이로 활짝 펼쳐진 새로운 풀밭이 나타나는 것을 발견하게 돼요. 그리고 찬란한 구슬처럼 빛나는 아침 이슬들이 이 풀밭에 하얗게 깔려 있어요. 그리고 하늘 높이 솟습니다. 나무들, 아침 이른 햇살에 나부끼는 반짝임, 그 나뭇잎새를 찢고 들어오는 아침의 찬란한 햇살, 그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는 아침 이슬, 그리고 펼쳐지는 끝없는 호수와 그리고 풀벌레 소리들..
(찬양)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하늘로부터 임함이로다
학문이 없이 성경을 읽고 깊이 들어가면 필연적으로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공부 많이 하지 않은 사람이 묵상을 깊이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겁니다. 대부분 신비주의자들과 그릇된 성경 해석가들이 거기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렇게 깊은 신비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자기를 잃어버릴 정도로 깊이 침장하여 묵상의 세계 속에 들어가도 절대로 길을 잃어버리지 않게 만들어 주는 것은 뭐냐면 탄탄한 신학의 틀, 개혁신학의 탄탄한 틀, 이것이 아무리 깊이 묵상해도 결코 우리를 빗나가게 해 주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학문의 중요성은 신령해지면 신령해 질수록 학문의 중요성은 아주 화두로 떠오르게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깊이 진리를 깨달은 후에 나타나서 그래서 많은 사람들 앞에 이 진리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파하는 그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인 거죠. 신대원을 졸업을 하고 어느 날 18세기의 선교사였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기라는 책을 읽었어요. 그 책을 읽었을 때의 저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평생에 4권의 책을 샀고 4번 정도 책을 읽었습니다. 최근에도 다시 읽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정말 예일대학을 나온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깊이 만난 사람이었고 모두들 인디안에게 영혼이 있느냐고 물으며 주일 예배가 끝나면 인디안들 머리 가죽을 벗기러 총을 메고 나가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그는 그렇게 미국 사람들이 버린 인디안들을 위해서 헌신적인 선교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21살에 회심하고 25살에 선교사로 헌신해서 29살에 과로한 목회사역 속에서 폐결핵으로 일생을 마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일기를 보면서 나는 그래도 기도를 꽤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일기 속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은 나의 스물 몇 번째 생일이다. 오늘은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과 하루 종일 교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쏟아지는 새벽 별빛을 받으며 나는 숲 속으로 들어갔다. 생각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했다. 금식하면서 기도할 때 내 영혼은 고양되었다. 온 몸에 땀이 흘렀다. 추위가 느껴졌다. 기도가 모두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눈 덮인 언덕에서 미국 사람들이 버린 인디안의 영혼을 위해 혼신의 힘으로 기도했습니다. 그는 너무 너무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번 설교하고 난 강대 아래 앉아서 한 사발의 피를 토해야 할 정도의 형편 없는 건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영혼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헌신적으로 섬겼고 기도했습니다. 눈 덮인 언덕에 엎드려서 씨름을 하며 죽어가는 인디안의 영혼들을 위해 온 몸으로 기도하고 나면 그가 기도하고 일어난 자리에는 시뻘건 선혈이 가득히 토해져 나왔던 것입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제가 티에이치에 있을 때인데 너무 마음이 아파서 총신의 옆에 제가 살았어요. 기도하러 새벽에 총신하러 올라갔어요. 그래서 한 일주일을 다녔어요. 산에 올라가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는데 11월 하순경이었어요. 그래서 폐결핵 4기에 브레이너드도 했는데 내가..그리고는 그 바닥에 엎드려서 이마를 땅에 대고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딱 30분이 지나고 나니까 이 서리 맺힌 땅에서 쏟아지는 그 냉기가 나의 머리는 물론이고 내장까지 완전히 얼어붙게 만드는 거예요. 나중엔 이렇게 기도의 정신이 모아지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고통스러워요. 그래서 일주일동안을 그렇게 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난 후에 다시 한 번 그의 헌신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선교사에게 헌신한 사람이었지만 18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의 판단에는 신학적으로 대단한 깊이가 있는 명석한 사람이었고 그리고 그런 흔적들은 그의 설교 속에 잘 묻어나 있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마지막 죽으면서 자기의 일기를 출판하겠다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안 된다고 말리다가 마지막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한도 안에서만 출판하라고 마치면서 넘겨진 그의 일기 속에는 이러한 그의 고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우리의 신학함이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과 어떻게 하나되어야 하는지를 절실하게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 일기의 글이 너무 아름다워서 제가 노래를 붙였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부르고 마치겠습니다.
(찬양)영혼을 주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지 어떻게 살든지 또 무엇을 견디게 되든지 나는 관계치를 않노라 잠을 자면 저들을 꿈꾸고 잠을 깨면 첫째 생각이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잃어버린 영혼들이라 아무리 박식하고 능란하며 또 심오한 설교와 청중을 감동시키는 웅변이 있을지라도 그것이 결코 인간의 심령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결핍을 대신할 수는 없노라
학창에 공부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기도 많이 하십시오. 마음에 뜨거운 눈물과 사랑을 담은 주의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