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기도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녹취자: 백지영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주기도문이 어떻게 생겨나게 됐는지를 말해 주는 본문입니다. 예수님이한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고 제자들은 나중에 예수님을 찾으러 온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하는 모습이 워낙 진지하고 간절하고 성스러웠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기다렸다가 예수님의 기도가 끝났을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가서 예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 라고 말입니다. 이 요청에 의해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주기도문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의 정체성, 그들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목적하고 살아야 하는 전체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위대한 신학의 산물입니다. 저는 최근 이 주기도문으로 470쪽짜리 책을 완성했고 아마 목사님들이 6월 초에는 서점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주기도문을 그렇게 간단한 기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이 유장한 주기도문을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주기도문 자체가 아니라 이 주기도문이 성립하게 된 이 짧은 1절의 기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기도가 무엇이고 목회의 영광을 위해 기도는 어떤 위치를 갖는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림으로써 이번 수련회의 마지막 저의 설교를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우선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기도했다고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기도의 주체가 되어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는 탄원자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이 가능할까요? 예수님은 분명히 성경이 말하기를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가르쳐 주었는데 하나님이신 그분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포함한 같은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올려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서 5장 7절은 말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바로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 라고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기도해야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기도의 생애였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기도로 점철된 생애였습니다. 우리는 항상 성경을 대할 때 습관을 따라 대하지 말고 너무나 당연한 성경의 언급도 한번쯤은 이것이 왜 이럴까 하고 의문을 제기해 볼 때 거기에서 예기치 않은 복음의 빛을 마주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것입니다.
왜 예수께서 하나님이심에도 불고하고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셨을까요? 우리 인간의 경우에는 능력이 부족하고 없기 때문에 혹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리기 때문에 간절한 기도는 필요하고, 그 기도에 의해서 무엇인가 우리 자신이 정화되고 우리 능력으로 이룰 수 없는 어떤 일들을 하나님 도우심을 힘입어 성취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신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신학적으로 이 문제를 더듬어 보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 예수의 인카네이션(incarnation), 즉 성육신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되짚어 보는 일은 이 문제의 답을 내는데 매우 요긴합니다.
자, 우리들이 흔히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는 소위 얘기하는 도성인신(道成人身)의 교리, 이 교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 까지는 이 세상의 모든 사건들과 역사를 섭리하심으로써 당신의 성품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리 영적으로 뛰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언제나 그것은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당신 자신이 우리를 위한 대속 제물로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신 그분은 죽으실 수 없는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신 분이셨으나,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했고 죽기 위해서는 죽을 사람의 몸을 입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죽음에 종속되는 모든 사람들이 죄의 영향 아래 태어나고 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죽지만 예수님은 죄 없이 하나님의 인격으로 이 세상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사람이고 참 인간이셨으나 인격에 있어서는 사람의 인격을 취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이것을 바로 '안휘포스타씨씨에 예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비록 사람이지만 사람의 인격 없이 하나님의 인격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참 사람이지만 동시에 참 하나님이 되셨으니 이것을 '엔휘포스타씨씨에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기 위해 죽으셔야 했기 때문에 사람의 필멸할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죽으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하나님과 인간에 대하여 보여 주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 보냄을 받은 독생자로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성육신 이전까지 하나님에 관한 모든 계시들이 다 간접적인 것이었고 그림자와 같은 것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도성인신(道成人身)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당신의 인격과 모든 삶 자체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셨으니, 그가 말없이 죄인들을 향해 눈물을 흘리는 그 인격 안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을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 실체로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과 만나고, 병든 자와 만나고, 방황하는 자들과 만났던 그 모든 관계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속성의 빛들은 바로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오신 목적을 훌륭하게 성취한 예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들에게 참 인간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의 생애의 모습은 타락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었을 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모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하나의 인격 안에서 한편으로는 완전하신 하나님을 인간에게 보여주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완전한 인간이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 되셨고, 그래서 그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왜 이렇게 마음을 다해서 목회를 하고, 한 영혼이라도 전도하려고 하고, 전도한 영혼들을 내버려두지 않고 오늘도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으로 모든 성경의 진리를 가르치고, 신학을 가르치고 교리를 익혀 사람다운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이 목회사역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참으로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들이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 그가 친히 하신 아주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시고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그림처럼 보여주는 아름다운 기독론이 빌립보 제2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자,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라고 하는 대목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교리사 속에서 이 구절은 소위 얘기하는 케노시스 이론의 토대가 되었고 아직도 한국교회에서 이 이단인 케노시스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케노시스 이론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에 신성 자체를 퍼서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신이시기를 거부하시고 인간의 불완전함 속에 갇히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이단적인 교리로 정죄되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올바른 신학이 이해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셨으나 누구의 강요도 없이 하나님이 자기를 이 세상에 보내신 대속주의 사역을 실현하시기 위해서 스스로 신성을 인성 아래 깊이 감추시고 때로는 이 신성을 사용하기를 포기하셔서, 스스로 하나님만큼 모르는 일을 스스로 떠안으시고 인간의 육체의 모든 한계와 고통을 죄는 없으시지만 그 모든 죄의 결과인 연약함을 스스로 짊어지셨으니, 이것이 이사야 53장에서 예언된 고난 받는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성취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고난을 통해 순종을 배우시길 원했고 그래서 죄는 없으셨지만 죄인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살아가는 그 비참함에 당신 자신이 깊은 공감을 하는 형제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하지 않으셔도 되는 분이셨는데 스스로 자기의 백성들과 똑같은 어깨를 겨루는 위치에서 하나님의 작은 아들로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죄인들이 기도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절대의존을 우리에게 모범으로 남겨 주신 것입니다.
18세기 미국의 위대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자신의 논문 속에서 이런 말을 남깁니다. “하나님은 다른 세계 어느 곳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신다.”고 말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라고 하는 이 한 마디 말씀이 이 해설로써 끝났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최소한 이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 없으신 성령의 능력을 한량없이 받으신 완전한 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평생 마치 위대한 위인처럼 사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연약한 갈대처럼 그렇게 하나님께 어린아이처럼 매달리며 그렇게 기도하시면서 사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그렇게 기도하며 사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말년에 누군가에게 질문을 받으셨답니다. “목사님, 설교와 기도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러자 목사님은 “설교는 항상 쉽고, 기도는 언제나 어렵습니다.” 설교가 쉽다는 것도 어폐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도 사람이 하는 것이니까 얼마만큼 하면 숙달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진지하게 학문을 탐구하고, 성경과 씨름하면 설교는 함께 원숙해집니다. 그리고 원숙이라는 말 속에는 어느 정도 익숙이라는 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이 설교를 마음속으로 준비하면서도 깊은 자책을 느꼈습니다. 젊었을 때에 기도에 미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기에 계신 젊은 후배 목사님들께 말씀을 드립니다. 인생의 계획표를 짤 때에 80에 죽는다고 생각하고 40이 중간이라고 생각하면 여러분들은 계산을 많이 잘못한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수면의 질, 건강의 질, 정신의 질이 떨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젊었을 때 감당하던 똑같은 시간을 그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와 같은 품질의 것이 잘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 많이 기도했어도 나이가 들어서는 젊었을 때의 그 영적인 열심을 유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고, 젊었을 때 그렇지 않던 사람들이 머리가 하얘지면서 젊었을 때 없었던 뜨거운 열정이 생겨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별로 발생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래서 치열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딱 떨어지는 것을 좋아하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면 젊은 목사님들은 그러면 도대체 얼마나 기도해야 되느냐고 묻겠지요. 그러면 저는 간단하게 3시간 정도라고 추천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정신은 기독교 목회와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놀랍게 연결이 되고, 교인들을 움직이고 심지어는 교회를 이끄는 영적인 지도자인 목회자까지도 움직입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기회가 있다면 현대 사상에 대해서 깊이 공부하고, 오늘 우리들이 숨 쉬는 것처럼 이 현대사상에 어떻게 감염되어 있는지를 발견하게 된다면 아마 소스라치게 놀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당한 기도와 학문적인 탐구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정신은 그렇게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기도와 같은 이런 의존적인 인간의 정신을 찬동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시대를 접어드는 이때에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비록 그분이 신이라고 할지라도 그를 전적으로 의존하는 그러한 사람으로서 인간을 해석하는 그런 종류의 인간관에 찬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때에 유럽 세계를 뒤흔들만한 위대한 천재 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피코델라 미란돌라’라고 하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은 이태리 사람이었고, 귀족집안 출신이었으며, 26살이 되던 해에 세계 모든 종교와 철학에 대해 달통했다고 스스로 자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남긴 역사적으로 유명한 글 가운데 ‘인간존엄성에 관한 연설’이라는 청사에 길이 빛나는 위대한 연설문이 있습니다. 그 연설문 속에서 그는 오늘날 현대인들이 인간을 어떻게 생각할 지에 대한 예고를 아주 또렷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원고를 가지고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글자 한 자 한 자까지도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양해를 구하며 기억을 더듬어 인용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그의 이 작품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 하나님은 아담 너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내가 너를 창조할 때에 이것은 이래야 하고 저것은 마땅히 저래야 하고 너는 이런 운명이어야 하고 너는 저런 운명이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미리 정해놓지 않았다. 다만 나는 너로 하여금 이 모든 것을 개척해 갈 수 있는 능력을 부여 하였으니 너는 소신껏 네 인생을 개척하고 그것이 너의 운명이 될 것이다.” 이런 줄거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은 하지만, 포괄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실제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이것은 인간 자신이 자율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가지고 해쳐나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를 극대화 시킨 사상이 17세기 18세기에 요원(燎原)의 불길처럼 유럽에 번졌던 이신론(理神論) 사상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신론은 광범위한 영향을 유럽 세계에 끼쳤고 지금까지도 끼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섭리에 실질적으로 간섭한다는 사상을 배제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림으로써 우리 인간사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섭리적인 사역을 인정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쏟아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간구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단순히 종교 행위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기독 서점에 넘쳐나는 기도에 관한 책들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대부분 기도에 관한 책들은 어떤 내용들을 다루고 있느냐 하면, 내가 혹은 누군가가 열렬히 기도했더니 기도 안했으면 이루어지지 않았을 일들을 이루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식의 기도에 관한 교훈이 한쪽으로 쏠리게 되면 우리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게 되느냐 하면 기도는 안 하면 본전이고 열심히 하면 대단한 좋은 결과가 온다고 하는 사상이 우리에게 주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기도에 관한 경륜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어떤 일들을 성취하고 이룩하기 위해 하나님의 해결사적인 도움을 끌어내리는 수단으로서만 하나님이 이 기도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보다 깊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신학이 있습니다. 요한 칼빈이 남긴 기도에 관한 훌륭한 책이 기도론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한 번쯤은 읽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독교 강요의 성화 편에 나오는 기도에 관한 교훈도 아주 훌륭합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론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왜 기도하라고 하실까? 첫째는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만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두 번째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게 하시기 위해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제자에게 보낸 편지를 모아서 책을 누가 한권 내셨습니다. 그래서 꼼꼼히 읽었습니다. 거기에 박 목사님의 충고가 나오는데 유학하고 있는 자신의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아무개 목사, 공부하는 것은 좋은데 열렬히 기도하십시오. 당신이 기도하지 않으면 자유주의자 됩니다.” 정곡을 찌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에 한국교회와 비교해 볼 때 현저히 기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기회 있으면 교회에 돌아가셔서 앙케트를 해보십시오. 우리들이 돌보는 교인들의 절반 이상은 하루에 10분도 기도를 안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고 자신의 범사를 주님의 주권에 맡기는 복종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교인들의 그러한 가벼운 신앙의 태도는 누구에게서 배웠을까요? 정말 목회자에게서 그리고 장로들에게서 배운 것이 아닐까요? 여러분 교회에 장로님들 가운데 돈 많은 사람들은 있고 목사님 말 잘 듣는 사람들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장로하면 아, 기도하던 그 사람하고 떠오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수입니까? 이런 식으로 교회는 예전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던 이 기도들이 현저하게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7세기의 화란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 가운데 ‘히스베르투스 푸치우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아마 개신교 역사상 가톨릭을 가장 잘 알던 정말 복음서의 가르침을 뜨겁게 실천 하려고 했던 탁월한 신학자이면서 실천가였습니다. 이 사람이 자신의 ‘절제론’이라는 책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간절한 기도야말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한 최고의 경외의 표현이다.” 목회자의 가벼운 기도생활은 피상적인 목회를 가져오고, 목회의 진정한 영광을 추구하기 보다는 그 진정한 영적 영광을 세속의 영광으로 바꾸려고 하게끔 만들어줍니다. 이것은 미래의 한국 교회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매우 염려스러운 부분인 것입니다. 좀 더 말씀을 드리고 싶지만 진도를 나가겠습니다. 첫 번째 결론은 예수님도 기도하셨으니 우리도 기도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두 번째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예수님이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희랍어 성경은 이 부분을 ‘엔토포티니’라고 말합니다. 직역을 하자면 'in certain place'입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한 곳에서' 기도하시더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누가는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록하지 못하고 왜 '토포티니', 어떤 곳이라고 지칭했을까요?
물론 그 장소가 어디인지를 몰랐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동가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 하시는 생애였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일정한 주거지가 없으셨습니다. 불쌍한 영혼들이 있는 곳이라면 거기가 갈리리든, 사마리아든, 유대 땅이든 다니셨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주무시지만 내일은 저기서 식사를 하셨고, 또 오늘은 여기서 주리시고 모래는 또 다른 곳에서 주무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애였습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이 장소도 사실은 정해진 곳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디를 여행하시든지 예수님은 언제나 새벽 시간 아니면 깊은 밤에 기도를 하셨고 그리고 이곳에서도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제가 그리는 그림은 이것입니다. 밤늦게까지 복음 사역을 하고 예수님과 함께 어느 숙소에서 제자들이 함께 잤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눈을 떠보니까 예수님이 없어졌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아침결에 예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찾아다녔는데, 저 한적한 어느 들판에서 혹은 조용한 한 장소에서 예수님이 마음을 쏟으며 새벽 미명부터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한 20년 전에, 도대체 왜 예수님은 그 많은 시간 내버려두고 새벽에 기도를 하셔서 우리 목사들을 이렇게 부담스럽게 만드셨을까? 거기에는 뭔가 심오한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고 성경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새벽에 일어난 위대한 역사를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일이 어디 새벽에만 일어났습니까? 밤에도 일어났고 낮에도 일어났습니다. 설득력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을 때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신 것은 낮에는 일하시기 위해서 새벽에 기도하신 것입니다. 병자와 무지한 자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도록 당신을 찾아오는데, 나 지금 경건의 시간 가져야 된다고 그 불쌍한 사람들 내버려두고 산으로 기도하러 올라가면 그들은 누가 고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새벽에 아직까지도 불쌍한 양떼들이 잠들어서 당신께 아직 나오지 못하는 그 시간에 당신은 마음을 쏟으며 기도하고, 그들이 당신께 나올 수 있는 시간에 당신은 기도를 마치시고 그들을 위한 치료와 말씀 사역을 감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보니까 마가복음 1장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고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하고 그리고 베드로의 집에 가서 가족을 고쳐주시고 그리고 밤늦게까지 병든 자들을 하나하나씩 다 고쳐주시고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은 “오히려 새벽 미명에 예수께서 기도하시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가셨다.”
(찬양)
마음이 어둡고 외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주는 모든 괴로움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우리는 얼마나 환경의 핑계를 잘 대는 사람들입니까? 목회사역이 바쁘다는 이유 때문에,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 때문에, 내일 해야 될 일이 많다는 이유 때문에, 공부해야 된다는 이유 때문에 등등 등등의 많은 이유 때문에 우리는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 시간을 현저히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 목사들뿐이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자문해 봅시다. 최근에 아무 이유 없이 기도회 인도하고 그러는 것 말고, 홀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내 마음을 모두 쏟아 놓으며 우리 주님과 교통하며 착한 어린 아이처럼 그분 앞에 눈물을 쏟은 적이 언제입니까? 무슨 목회자의 영혼은 특수영혼입니까? 그도 그냥 죄인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래서 기도 안 하면 정욕도 들어오고, 물욕도 들어오고, 자기 싫어하는 사람 미워하게도 되고, 목회의 영광을 자기 개인의 영광으로 바꾸고 싶어 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나는 누군가 나더러 목회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목회는 마음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것.” 우리의 삶이 얼마나 고단합니까? 그래서 때로는 말도 안 되는 기도지만 오늘 저녁에 눈을 감으면 내일 아침에는 하늘에서 눈을 뜨고 싶은 적도 있습니다.
(예화) 어느 목사님이 산길을 가다가 큰 고목나무를 만났답니다. 구멍이 뻥 뚫어진 고목나무. 심방 가방을 들고 그 나무 가까이 가서 나무를 어루만지면서 말하더랍니다. “얘야 너는 목회도 안하는데 왜 이렇게 구멍이 뚫렸니?”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해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목회의 목표가 세상의 성공이라면 교인 많이 모으고 큰 교회 가지고 있으면 기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회는 그런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제 마음에 큰 감동을 주었던 스승이 한 분 계셨습니다. 몇 분계신데 그 중의 한 분이 작고하신 김희보 박사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참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저는 사실상 그분이 마지막 학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분이 언젠가 그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예화) 어느 날 제자한테 전화가 왔더랍니다. 스승님, 저 김 아무개 목사입니다. 아, 그래 김 목사 그래 목회를 잘 하고 있다지? 예, 목사님. 그런데 선생님 제가 이번에 사임을 하려고 합니다. 아니 왜 사임을 해? 교인이 이제 1700명 정도 모이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 전에 예배당도 크게 지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제가 뭐 할 일이 있겠습니까? 좋은 후배에게 물려주고 저는 이제 다시 개척교회를 하러 떠나려고 합니다. 그러면 선생님이 너는 참 희생적이고 훌륭하구나 그렇게 말씀해 주실 줄 알았던 것이지요. 그랬더니 이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야, 이놈아. 내가 너에게 신학을 가르쳐 주었지 건축학을 가르쳐 주었느냐? 교인이 1700명이 모이고 예배당을 크게 지어 놓았으니 이제는 네 할 일이 없다고? 보이는 교회가 그렇게 멋있게 지어졌는데 한 가지 묻자. 그러면 보이지 않는 교회도 그렇게 예쁘냐? 이 전화를 끊고 목사님이 깊이 자기의 교만을 회개하고 그 교회에서 지사충성(至死忠誠)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우리 목회자의 눈물의 이유 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셨다는 이 평범한 한 표현은 우리에게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는 예수님의 이 기도가 환경을 능가하는 열심을 품은 기도생활이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회가 고달프면 핍박받으시던 예수님처럼 고달프겠습니까? 우리가 헌신을 많이 한다면 일체의 휴식도 없이 새벽 미명부터 깊은 밤까지 당신의 옥체를 깨뜨려 쏟으셨던 예수님의 노고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환경에 굴복하지 않는 치열한 열심으로 주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으면 목사들은 다른 데서 기도하지 말고 여기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강대에서. 그래서 오랫동안 신음하며 맨 처음 의지할 것도 없고 믿을 것도 없기 때문에 교회를 세워놓고 우리 주님 한 분밖에 의지할 분이 없어서 매일 어린애처럼 주님께 매달렸던 것처럼, 그 마음 변하지 않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린다면 교회가 영적으로 얼마나 새로워지겠습니까?
목회자의 거룩한 향기는 목회의 방법이나 요령을 터득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에서 오는 향기입니다. 그것이 목회자의 품격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자로서의 평전을 많은 사람들이 썼지만 아마 가장 탁월한 책은 토니 사지트의 책일 것입니다. 그는 실제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설교를 수천편이나 들었던 동역자였습니다. 그는 목사님이 말씀하신 한 마디를 인용했습니다. “설교자, 그 사람은 비상하리만치 신령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신령함이 어디에서 나올까요? 환경에 굴하지 않는 깊은 기도생활, 그것입니다. 좀 더 하고 싶지만 넘어가겠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런 동사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라고 말입니다. 이 ‘마치시매’라고 하는 희랍어 단어가 ‘에파오싸토’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이 희랍어 '에파오싸토'의 에큐벨런트(equivalent) 히브리어 동치어가 ‘샤밧트’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누가가 이 구절을 쓸 때에 이 머릿속에 있었던 히브리어 단어, 이 글을 읽으면서 희랍어 보다는 히브리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떠올랐던 단어가 샤밧트라는 단어입니다. 그 샤밧트에서 '샤밧트 데이' 안식일이 왔다는 것쯤은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모두 창조하시고 쉬셨다고 할 때에 씌여진 샤밧트, '안식하다' 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스스로 추적해 가면서 커다란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동사 하나가 예수님의 기도 시간의 길이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기도는 공중전화 걸듯이 간단하게 올린 무전기형 기도가 아니라 상당한 시간을 당신을 쏟아 부으며 매달렸기 때문에 기도가 끝난 후에는 휴식을 취하시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러한 장시간의 기도였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짧은 기도로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불러 내린 기도의 사례들이 등장합니다. 구약에서 예를 들자면 여호수아의 기도입니다. 가나안을 정복하려고 할 때 원주민을 추격하는데 해가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해가 떨어지고 나면 어두움이 내릴 것이고 그러면 이 가나안의 지형에 익숙하지 않은 여호수아의 군대는 그들을 추격하여 멸망시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달과 해에게 명령을 합니다. 멈추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변형된 형태의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는 사도행전 이후에 사도들의 행동에서도 많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렇게 짧은 기도로 큰 하늘의 능력을 이 세상에 불러 내렸던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순간에 그 일을 했기 때문에 위대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평소에 깊은 기도의 헌신해온 인물들에게만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출애굽기 34장에 나타났던 이스라엘의 각성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동행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에 모세는 회막을 세우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게 하였습니다. 이때 모세는 집에 돌아갔어도 홀로 그 회막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여호수아였습니다. 이런 간절한 기도에 장시간 헌신했던 사람들이 바로 짧은 기도로 위대한 능력을 불러 내렸던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깊어지기 위해서는 시간에 대한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볍고 그리고 시간의 길이를 동반하지 않는 간단한 기도는 목회자들의 영적인 생명을 고사시킵니다. 하루, 이틀, 삼일, 사일, 한 달, 두 달 반복되면서 그는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어제 여러분들에게 설교에 관해 말씀드리면서, 목회자가 설교를 통해 목회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잘 믿고 잘 살아야 할 뿐 아니라 치열하게 탐구하여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확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리고 특히 지력이 있는 젊은 목회자들이 공부하지 않는 것을 보면 마음이 심히 괴롭습니다. 그리고 저 아까운 시간과 건강을 나에게 주지라고 말입니다. 정말 열렬히 탐구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목회자로서 독서하는 것이 싫다면 소명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공부를 위해서 치열하게 헌신해야 합니다. 잠깐 곁가지로 나가는 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주일 날 8시 설교를 끝냈는데 몸이 너무 아팠습니다. 네 번을 더 설교를 해야 하는데 온 몸에 땀이 흐르고 내 몸이 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벌벌벌벌 떨면서 사택으로 들어가서 링거를 맞고 주일 내내 누워 있었습니다. 월요일은 제가 공부하는 날입니다. 일곱 시에 옷을 주섬주섬 챙기고 보따리를 싸가지고 나가다가 7시 반쯤 새벽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아내와 마주쳤습니다. “여보, 그 몸으로 어디를 가려고 해? 나 공부하러 가야 돼. 여보, 이제 그만큼 공부했으면 됐잖아. 일평생 공부했는데 이제 그냥 대충해도 되잖아.”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여보, 나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야. 나는 매 주일 들통을 지고 갱도에 걸어 내려가서 그래서 일주일 내내 곡괭이질 해서 석탄 몇 개 캐다가 들고 와서 주일 날 불때주고 나면 다음 주일 날 불 땔 것을 석탄을 캐러 다시 갱도로 내려가야 되는 사람이야. 나도 당신이 아는 것처럼 그렇게 학문이 깊고 아는 것이 많아서 공부할 필요 없이 설교할 수 있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겠어.” 아마 아내는 그 날 돌아서는 내 눈에 맺히는 이슬을 못 보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나 자신에 대해서 자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매일 매일 주님께서 주시지 않으시면 나는 아무 것도 없는 목회자다.” 이것이 겸손의 말이라면 저도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겸손의 말이 아닙니다. 그 무한한 기독교 지성의 역사 속에 나라고 하는 인간은 정말 티끌만도 아닌 인간, 도대체 내가 알 수 있다는 것이 무엇일까? 어느 철학자가 말한 것처럼 All that I know is that I know nothing. “내가 아는 것은 모두 아무 것도 모른다는 것 이외에 확실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신학교 다닐 때는 너무 가난해서 책을 살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을 굶고 점심 값을 모아서 서점에 가서 원서 한 권을 사들고 가슴에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오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제는 책 살 돈이 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서부터는 나의 연구하는 것을 이해해서 교회에서 모든 책을 조달해 줍니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거꾸로 되었습니다.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서재에 들어가면 가끔씩 도대체 이 많은 책들 중 내가 읽은 것이 몇 권이나 될까 그리고 눈물이 흐릅니다. 서재를 열고 들어가면 수많은 책들이 재잘거리며 소리를 지릅니다. “목사님, 목사님, 나 좀 읽어주세요.” 옆에 있는 책이 소리를 지릅니다. “아니에요. 제가 더 새로 왔어요. 저를 읽어주세요.”
(찬양)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그래서 제가 생각해 낸 것이 ‘고3이론’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정체성은 ‘고3’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드리러 백쌕을 메고 주일 예배에 올라갔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설교를 잘 하고 내려올 때도 “나는 걸출한 설교자가 아니라 학생일 뿐이다.” 그렇게 제가 강조를 했습니다. 탐구 안하고도 진실한 목회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매우 어렵습니다. 실력 없는 사람이 진실해지는 것은 가능한 일인데 어마어마한 신앙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물론 공부를 많이 했다고 그 사람이 신실해 진다는 것은 또한 절대 아닙니다. 그렇게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됩니다. 이것을 재미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요, 이 일을 위해 내가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고 이 지성을 헌신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할 때 그 ‘뜻’이 희랍어로 ‘디아노이아’입니다. 그것이 ‘지성’입니다. 지성을 헌신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경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강조하는데 그것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자, 정확한 공부를 통해서 정확한 지식을 갖는 것은 면도날 같은 것입니다. 그것으로 시비를 가리고 정확하게 자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얼어붙은 인간의 마음, 커다란 빗장이 질러진 불신앙의 마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도 복종하지 않는 짐승과 같은 완고한 교인들을 무너뜨리기에는 정확한 지식의 칼날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 칼날이 그렇게 예리하지는 않아도, 뭉툭하지만 그러나 도끼 같아서 힘차게 그 대문에 쾅하고 내리 꽂힐 때 그 빗장이 우직 끈하고 부러지면서 대문이 열리는 것처럼 목회에는 그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우리 선배들이 하던 이야기로 영력(靈力)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스피릿츄얼 파워(spiritual power), 비록 세밀한 지식이나 날카로운 논리는 없지만 그 말을 들을 때 뭔가 모를 그 무엇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들고 두려워 떨게 만드는 그 모종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잘 차려 입은 가운이나 학위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기도 속에서 단련된 목회자의 깊은 영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유명한 일화가 있지 않습니까?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지도하던 세 사람의 걸출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파렐, 비레, 프로방이라는 사람입니다. 그 중에서 파렐과 존 칼빈의 만남은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때 이미 칼빈은 유럽에서 총장 취임사를 대신 쓰고 나서 지명수배가 내린 이후에 유명한 사람이 되었고, 그 이전에도 ‘스티겔베르그’같은 학자는 22세 때 이미 유럽에서 최고의 지성인이라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 사람이 피신을 해서 결국은 스위스로 도망을 가게 되었는데 잠깐 제네바에 들를 예정이었습니다. 거기서 파렐과의 숙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학문으로 말하자면 파렐은 존 칼빈과 겨룰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력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칼빈이 “나는 휴식이 필요하고 그리고 책을 쓰려고 합니다.”라고 했을 때, “당신이 이 종교계의 현장을 저버리고 가면 당신의 휴식에 저주가 있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근거를 알 수 없는 큰 힘이 칼빈을 엄습했습니다. 그리고 이 탁월한 지성인 칼빈은 파렐 앞에 무릎을 꿇고 아기처럼 울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손에 붙잡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서 나온 힘입니까? 어디서 나온 위대한 능력입니까? 사람의 이론과 그리고 세상의 사술을 파하는 그 위대한 말씀의 파워, 비록 학자처럼 정교하지는 않아도 그 하나님의 말씀 속에 담겨진 그 파워가 어디에서 옵니까? 그것이 바로 오랜 시간 기도에 헌신한 자기를 하나님 앞에 바친 목회자, 거기에서 자신이 정화되고 무엇을 말하든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말하는 목회자의 선포 속에서 묻어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는 5분만 들어보면 알지 않습니까? 저 사람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학문의 깊이는 5분보다 좀 더 들어봐야 될지 모르겠지만 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인가? 저 사람이 진정으로 신학을 기도의 눈물 속에서 신학을 하고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은 잠깐이면 파악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작년에 9월에 저는 미국의 동부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 초정을 받아서 개강 집회를 인도했습니다. 저는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한국 이외의 나라에서 열흘 이상 머물러 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저의 영어가 오죽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아니라 그 학교 총장 피터 릴백이라고 하는 신학자입니다. 그분이 한 2000명 되는 교회를 잘 목회하시다가 총장이 되셨습니다. 언약신학에 있어서는 개혁권내의 권위자입니다. 그분이 우리 교회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누가 통역을 해주었습니다. 여러분 알다시피 동역을 해서 은혜 받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워낙 잘하지를 않으면. 통역을 해서 전달되었는데도 성도들이 손수건을 꺼내서 흐느끼면서 눈물을 닦는 것입니다. 머리가 하얀 노학자가 하나님 말씀을 천천히 천천히 전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저것이 신학을 한다는 것이구나. 그래서 우리가 읽은 수많은 책들이 설교 속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 신학자가 모든 책들을 통해 치열하게 하나님을 탐구하면서 주님을 발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회중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달될 때 거기에 참여하면서 저항 할 수 없는 그 어떤 하나님의 부성을 느끼며 그러면서 깊이 감동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참 성도들이 은혜 받는 광경을 보면서 저도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무엇을 말하든지 그 안에서 반드시 설교는 기도의 깊이를 노출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목회자의 인격은 그 기도의 깊이를 반영하는 척도입니다. 내리고 싶은 세 번째 결론은 이것입니다. “오래 기도하자. 많은 시간을 기도에 바치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쏟아 놓으며 우리 주님이 아무도 없고 제자들마저 잠들어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마음 중심을 쏟으며 하나님 한 분만을 의식하며 그 임재 속에 들어가 깊이 기도하는 가운데, 신학이 말하고자 하는 그 영적인 실재가 무엇인지를 우리의 내면의 세계 속에서 직접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의 진실입니다.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위대한 설교자가 되고 싶으냐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탁월한 기도자가 되고 싶으냐고 물으면 나는 30초도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택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는 기도자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누구를 위해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찰스 피니의 신학에 전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록들을 읽어볼 때 한 가지는 우리들이 배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엄청난 기도의 헌신입니다. 찰스 피니는 알미니우스주의자도 아니고 쎄미 펠라리우스 주의자도 아니고 펠라리우스주의자였습니다. 그의 신학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는 그가 쓴 신학 책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원죄 부정했고, 성령의 역사도 부정했습니다. 구원받는 데 있어서. 극단적인 인본주의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치열한 전도의 사람이었고 그리고 열렬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더 많이 남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접으려고 합니다. 저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의 목회의 영광은 세상의 척도에 의해서 측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목회의 영광은, 하나님을 대적하던 짐승 같은 인간들이 변하여 하나님 사랑하고 이 풍파 많은 세상에서 진리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굳게 붙들고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목회 사역 속에서는 무엇인가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초월적인 어떤 파워와 영향력이 우리의 목회 사역 갈피갈피에 깃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동토와 같이 얼어붙었던 인간의 마음이 뜨겁게 녹아지는 은혜의 체험, 그리고 완고한 인간의 사상을 꺾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 그가 인도하는 예배의 현장에 있을 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거룩한 하나님의 위엄이 회중을 뒤덮는 것 같은 부인할 수 없는 커다란 영향력, 영적인 감각 이런 것들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가끔 이런 말씀을 하는 목회자들을 만납니다. “저는 행정도 잘 못하고, 교회 운영도 잘 못합니다.” 그것 자랑 아닙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행정을 못하거나 교회의 정치를 잘 못하면 그것이 진실성의 표증인 것처럼 생각하는 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그것은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모르면 배우셔야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풀빵 장사도 저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 방법으로 목회를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너무 답답합니다. 그것이 안 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아는데 본인은 모릅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제대로 된 교회가 됨에 있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한데 첫째로 하드웨어입니다. 교회의 위치 혹은 선교적인 자리, 예배당의 구조 기능 등등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다음에 무엇이냐 하면 소프트웨어입니다. 잘 조직하고, 그 한 예가 바로 이드로의 장인과 모세의 만남 아닙니까? 그렇게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인데 소프트웨어를 조직할 줄 몰랐습니다. 그래서 장인의 도움을 받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모르면 다른 사람들의 머리를 빌어서라도 연구를 해서 하나님이 주신 자원들이 낭비되지 않고 효율적으로 하게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래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이니까 세상보다는 윤리적인 수준이나, 돈 한 푼을 써도 세상보다는 정확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대충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욕을 먹는 것입니다. 그 소프트웨어를 발견하고 잘 해 보려고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들이 마케팅 교회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 가지고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최고 상층부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스피릿웨어(spirit ware), 이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 다른 곳에서 예배를 드릴 때는 안 그랬는데 이 예배당에 와서 앉으면 하나님의 거룩함이 느껴지는 것일까요? 그리고 단순하고 투박한 말씀 앞에 왜 그런지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이것은 인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로 부터만 온다는 것.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을 쏟으며 어린아이처럼 자기의 목회 경력이나 학문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아이같이 어리니 하늘을 열고 나의 목회 사역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하늘의 거룩한 능력을 내려달라고 울부짖는 당신의 종들에게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는 사실, 그것 하나만을 우리가 알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 전부 돌아갑시다. 우리가 이 사역에 들어섰을 때 이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 되고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는 명사가 되려고 이 길 들어선 것 아닙니다. 그때 맨 처음 그 마음, 물론 돌아가기 어렵겠지요. 그러나 누가 거기에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서로를 격려하며 맨 처음 불러주셨을 때 그때 그 마음으로. 물론 우리 목회사역에 누구도 알 수 없는 쓰라림과 고통, 저녁이면 눈을 감고 아침에는 하늘에서 눈을 뜨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기도는 그 모든 것을 이기게 합니다.
(찬양)
외치는 이 소리 귀기울이시사 손잡고 날 인도하소서.
목회하다가 힘들 때면 아내가 가끔 말합니다. “여보, 걱정이야 어떻게 하면 좋아.” “너무 걱정하지 마. 괜찮아, 조금만 기다리면 돼.” “뭐 좋은 일 있어?” “죽잖아. 조금만 있으면. 그때까지만 참으면 되는데 지옥의 무한정한 고통도 아니고 조금만 참으면 되잖아.” 그때에 주님 앞에 갔을 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목회사역에서 흘린 네 눈물을 내가 보았노라.” 주님이 우리 눈물을 씻겨주신다면 그 날이 얼마나 우리에게 영광스러운 날이 되겠습니까? 우리 같이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