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기도할 때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6:7)
녹취자 : 윤은정
예수님 당시에는 바리새인들이 그 기도를 하던 습관이 있었습니다. 성전 어구에 서서 손을 높이 들고 성전에서 손을 높이 들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기도하는 그 모습은 마치 모든 사람이 보는 성읍 어구에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도록 구제를 하는 것과 유사한 행위였습니다. 외식은 특별히 선을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 한분을 의식하기보다,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서 그들에게 좋은 평판을 얻고자 하는데서 비롯되는 선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똑같은 실수를 기도에서 늘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존경심을 표하고, 종교적으로 좋은 평판을 얻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집에 골방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 곳이고, 그 골방은 사람이 거처하기 위해서 수시로 사람들이 드나드는 방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띄지 않는 그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떨어져서 하나님 한분만을 의식하며 기도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기도는 단지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의 수단을 주신 것은, 하나님을 바꾸시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바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기도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치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면은 무엇인가 바뀌고 변화되시는 분인 것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경험하게 하심으로서 그 경륜적 삼위일체의 현실 속에서 그것을 사용하여 우리를 교훈하고, 인도하고, 도덕적으로 바르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길이 잘못 가는 길이 있고, 인간이 간절히 기도하거나 하나님께 성경구절을 들어대면서 따지면, 그때서야 하나님이 “아이고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이렇게 하면서 뜻을 수시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자기가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마음에 정하신 영원한 작정과 뜻이 어떻게 시간적인 경륜 속에서 우리에게 변화가 있는 것처럼 다가오는가 하는 것은 신비에 속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해 놓기로 영원 전부터 작정하셨다고 할지라도, 작정하신 그것을 시간적으로 전개하여 실현하실 때에는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갈망하게 하시고, 은혜를 구하게 하시고, 죄를 회개하게 하시고, 삶을 돌이키게 하시고,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성취해 가시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는 다른 초월적인 하나님이, 영원하신 하나님이 시간 속에 있는 우리와 더불어 관계를 맺으시고, 또,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하시는 아버지와 같은 성품을 우리들이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서 성경은 우리가 기도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바꿀려고 기도하지만, 사실은 그와 같은 생각을 우리에게 갖게 하심으로 우리 자신을 고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드물기는 하지만, 주위에 기도를 많이 하는데도 이상하게 그 사람의 인격이나, 신앙에 대해서 동의가 안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 그 자체가 기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고, 이 기도가 자신을 거룩한 하나님의 면전 앞에 세우는 그런 경건한 행위가 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내용들이 6절에 들어있지만, 7절로 넘어가보면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 많은 이방인들은 기계적인 신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신에게 무엇인가를 반복해서 호소하거나 혹은 어떤 희생으로 제물을 드리면 그것이 뇌물처럼 작용해서 이 인간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해준다고 하는 조잡한 신관이 있었는데, 이것은 신약시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뿌리 깊게 내려오는 고대 근동에서부터의 전통입니다. 수 많은 중동의 신들을 이야기 하지만, 그 중에 여호와와 같은 도덕적인 신들은 없습니다. 원래 귀신들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과 똑같이 자기 욕망에 붙들리고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높은 도덕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태도를 우리들이 한번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로 하여금 기도라고 하는 수단을 통해서 당신 앞에 세우고, 당신 앞에 마음을 쏟아 기도하게 하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큰 뜻을 그들의 마음속에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들이 신들을 달달볶듯이, 괴롭히듯이, 기계적인 간청으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내려고 하는 그런 속에서는 무슨 자기 깨어짐이라든지, 신 앞에 자기를 돌아보며 이 세상이 창조된 목적으로 자기를 합치시킨다든지 하는 그런 고차원적인 도덕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 여기에서 성경말씀을 보면은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문자적으로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따지만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 번이나 같은 기도를 하셨잖아요. 이것은 어떤 내용의 반복을 말하기 보다는 말로 표명되는 기도의 언어와 마음이 분리된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한 단어도 중복하지 않고 이야기해도 마음이 딴 데 가있는 기도는 모두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의 기도의 은혜를 회복할 때에는 우리가 많은 말로 하나님 앞에 논물을 쓰려고 하지 말고, 심지어는 따지듯이 하나님을 몰아붙여서 항복을 받으려는 것 같은 태도로 기도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 우리의 기도의 은혜를 회복하고 싶을 때에는 아무도 간섭받는 사람이 없는 고요한 곳에서 하나님 한분만을 응시하는 영혼의 응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느려도 좋고, 빠르지 않아도 좋으니,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의 언어를 길어내어 한 마디씩, 한 마디씩, 빚어, 어눌하게 하나님께 아뢸지라도,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언어를 길어내는 과정을 통해서 거기에서 진실한 기도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아부도 시종일관 계속하면 충성이 되고, 다른 사람을 빈 말로 칭찬하는 이야기라도 꾸준히 하면 그것이 진심이 되어버린다고 하더라구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주님을 섬길 때, 항상 우리의 마음이 그 일에 합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는 때도 있지만, 간밤에 괴로운 일이 있거나, 심한 노동으로 고생을 했을 때에는 몸은 깨었으나, 마음은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가 우리 인간에게 언제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그때마다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다스리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잠시 하나님의 일에 열심히 식을 적도 있고, 이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저 일을 할 수 있지만, 우리 주님을 버릴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때마다 우리야, 우리의 마음과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마음이 우리와는 다른 남인 것처럼 대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여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너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라.’, ‘네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라고 대화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프로그램과 형식, 의무를 따르는 기도는 우리를 그렇게 바꾸는 힘이 없어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분 앞에 나아가 고요히 땅에 얼굴을 뭍고, 아버지의 이름을 간절히 부르며, 자신의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에는 이렇게 우리의 내면의 세계를 움직이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요동하던 마음은 잠잠해지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는 식게 되고, 그리고, 끝을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충동들은 잠잠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폭풍과 같은 큰 바람이 멎고 난 후에 비로소 사물의 움직이는 소리들이 들리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는 24시간 중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받기 보다는, 나를 향한 사람들의 평가, 나를 향한 사람들의 태도,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나의 감정, 이런 것들에 한번 충실한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잃어버린 나의 좋은 평판, 혹은 나에 대한 좋은 이야기들, 이런 것들에 나의 마음을 많이 쓰는 것만큼,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많이 쓰는 지를 우리는 되물어보지 않으면 안돼는 것입니다.
종교의 위대한 힘은 마음의 집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번뇌와 많은 사물들, 수시로 우리의 마음속에 솟구치는 욕망과 어리석음, 그리고, 미움, 이런 것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정신을 흐트러 놓아서, 그래서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 한분을 앙망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불교와 달리 기독교는, 그저 단지 욕심을 버리고,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뜻들을 이루어 가는 그런 적극적인 종교입니다.
어떤 분이 신문에 글을 썼는데, 요새 법정스님이나, 혜민, 뭐, 불자들의 글들이 서점가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뭐, 기독교에서 나오는 글들은 익히지 않습니다. 누가 아주 냉정하게 지적을 했더군요. ‘그런 글들을 읽고 있으면, 정말, 마음이 맑아지고, 순순해지고, 눈물도 나는데, 그런데, 아쉬운 것은 그러면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그리고 욕심을 버리고, 자기를 낮추고, 인생의 허무함을 알고 하는 것은 좋은데, 도대체 우리는 마땅히 살아가야 할 삶의 추동력을 어디서 얻는 것을까?’ 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욕심을 비우고, 자기를 포기하고, 하는 것들은 우리의 인생의 가는 방향을 고치고 올바르게 하는 데는 아주 훌륭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길을 찾았다고 할지라도 시동이 꺼졌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못가는 것인데,,, 그런데, 기독교는 자기를 끊임없이 비우는 선의 생활이 없이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추동력을 가지고 달려가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종교이니, 이 기도의 중요성은 점점 더 강조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비우려고 하기보다 하나님 사랑으로 가득 채우고, 그 은혜로 가득 채우는 거기에서 우리의 순수함이 오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폭풍과 같은 경험을 통해서 오기도 하지만, 대부분, 하나님 앞에 자기를 비우고, 침전하는 가운데, 우리의 육체의 눈을 통해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보다는, 오히려 잠시 눈을 감고, 그리고, 우리의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는 가운데 들어오는 신령한 것들의 인상을 통하여 하나님께 집중하게 되고, 이것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눈을 감는 것은 누가 만들어 낸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자연스러운 종교심리라고 봅니다. 눈에 들어오던 사물들과 잠시 결별하고 싶다는 표이고, 그래서, 마음의 눈을 더 크게 뜨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앙망하겠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한번 여러분도 노력을 해보십시오. 수많은 행사들을 눈앞에 두고, 어지럽고 정신이 없는 때에, 조용히 아침에 좀 일찍 나와서, 혹은 점심시간에라도, 혹은 퇴근길에라도, 혹은 그 어떤 시간에라도 조용히 누구의 방해도 없이 하나님 한분 앞에 서서, 심지어는 하나님 앞에 잘됐으면 좋을 일에 대한 욕망조차도 버리고, 하나님 한분을 고요히 응시하면서, 그래서 하나님께 내 뜻을 이뤄달라고 기도할 뿐만 아니라, ‘내가 이렇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사오니, 나에게 당신의 일을 행하시옵소서.’ 라고 그렇게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이 될 수 있을 때, 그 때에 여러분들의 마음은 다시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은혜로 채워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