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언부언하는 기도를 금하심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녹취자 : 김미현
인간의 역사에서 기도는 항상 있었고 사실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마음속으로 기도하지 않습니까? 제가 오래전에 병원에 심방을 갔습니다. 한 교우를 위해서 예배드리고 간절히 기도해주고 났더니 병실을 나오는데 옆에 있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나를 붙들면서 자기를 위해서도 좀 기도 해주고 가면 안 되냐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했더니 안 믿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를 하고 가까운 교회에 나가도록 권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인류의 본성 안에 하나님이 주신 종교의 씨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이 기도의 본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역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기도는 기도의 본질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진 방식으로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역사를 보면 종교라고 할지라도 그 기도가 적절하게 교훈되고 올바르게 가르쳐지지 않으면 그 헛된 것들을 헛된 방식으로 기도하는 것이 누룩처럼 번지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경전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선입니다. 참선입니다. 그래서 고요히 묵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묵상하지만 그 사람들의 참선의 목표는 참선하고 있는 자기 자신조차도 잊어버리는 경지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동한거 하한거 해서 3개월 가까이 들어가서 참선을 하는데 한번 하고 오면 8~9kg가 빠진다고 합니다.
어제 신문에 보니까 불교의 불자들이 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뽑는 것 때문에 거기에 폭력, 성폭행, 금권선거 쭉 보면서 ‘어쩜 이렇게 기독교하고 판박이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각목을 휘둘러서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하는 일들이 몇 해 전에도 있지 않았습니까? 이런 모든 것들은 결국은 종교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어도 자기가 믿는 그 종교의 대상 앞에 마음을 쏟는 진실한 탄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 사람들이 헛된 것을 믿어도 마음을 다 쏟으며 자기 자신을 비우는 일반은총의 빛의 극대화만 이루어도 결코 그렇게 혼탁하고 무질서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해하는 가운데에 기도하니까 우리는 참 종교 안에서 이 기도를 배워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기도에 대해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시기 전에 먼저 두 가지를 예수님이 교훈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외식으로 기도하는 것과 허심으로 기도하는 것 두 개를 말씀하신 후에 그 다음에 어떤 패턴으로 기도해야 할 것인지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외식으로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시에 사람들은 길거리 어귀에서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기도를 해서 ‘저분은 정말 거룩한 분이구나. 종교적인 분이구나. 우리 같은 사람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신령하게 기도를 하는 사람이구나.’이런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이 외식하는 기도의 목적이었다면 허심의 기도는 마음에 없는 기도입니다. 이 둘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볼 때에 하나님께 이르는 가장 중요한 기도는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시킨 기도입니다. 그 마음을 물같이 쏟는 기도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책속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사라고 표현했던 바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플라톤 철학에서 돌이켜 서서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분노했던 것이 그것입니다. “저 사람들이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 주기는 했습니까? 저들의 철학에는 통회하는 마음과 눈물 흘리는 회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등질 수밖에 없는 배반하는 인자를 가지고 있는 인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는 살수가 없습니다. 크게 배반하느냐 아니면 매우 적게 배반하느냐의 문제이지 우리는 늘 부패하기 쉬운 음식과 같아서 주님을 배반하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분께 다시 돌아가는 진정한 회개, 개심, 혹은 전향, 회심 이러한 배향하는 삶으로부터의 전향은 마음을 하나님 앞에 고정시키는 것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무엇으로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태로 미루어볼 때에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기 전에 외식하는 기도의 위험에 대해서 제일 먼저 말씀하시면서 그러면 그 외식을 타파하는 길이 무엇이냐 그것을 가리켜서 골방으로 들어가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문자적인 교훈이라기 보다는 뽐내기 좋아하고 사람들 앞에 허세를 부리는 유대인들에 대한 하나의 대조로서 골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골방은 집에서 거의 물건 넣어둘 때 이외에는 열어보지 않는 방이 골방입니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방에 작은 방에 들어가서 은신하는 가운데 기도하는데 그 이유는 사람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 한분을 앙망하기 위해서 그렇게 골방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언제나 활활 타오르듯이 기도할 수 있으면 참 좋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더군다나 근심이 있고 어려운 일들이 있고 하면 혼란스러운 것들이 굉장히 마음을 어지럽힙니다. 이번에도 나에게도 좀 약간 혼란스러운 일이 있어서 인터넷에 지금 한창 떠들고 있지만 총신대 총장으로 가니 마니 해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결국은 안가기로 깨끗하게 정리를 하고 며칠 전부터 언론에도 내 얘기를 전부다 다 전달을 했고 오늘아침에도 전달을 했는데 그렇게 복잡한 일이 있고 하면 마음이 많이 상합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입니다. 그럴 때에 어떨 때는 정말 기도가 안 됩니다. 그럴 때에는 항상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충천하는 화염과 같은 기도를 꿈꾸지 말고 추운 겨울에 한곳에서 모닥불 피우는 사람을 생각을 해보십시오. 처음에 작은 나뭇가지 몇 개를 놓고 밑에다 나뭇잎을 집어넣고 성냥불을 펴서 그래서 엉덩이를 하늘로 치받치고 엎드려서 정성껏 입김으로 불면서 몇 가지 나뭇가지에 불을 붙입니다. 그것들이 점점 크게 해서 활활 타오르는 불이 되듯이 마음을 하나님 앞에 모읍니다. 그래서 천천히 천천히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기도가 안 되면 기도가 안 된다는 얘기까지 주님께 드리면서 도와달라고 해서 마음의 시선을 하나님께로 모으는 것 그것이 바로 골방에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또 하나의 교훈을 해주신 후에 주기도문을 말씀하시는데 그 교훈이 오늘 우리가 읽은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중언부언이라는 말은 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런 기도가 유대인들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언부언하는 이 기도는 허심의 기도라고 말할 수 있는데 허심의 기도는 외식의 기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교훈이 아닙니다. 외식하지 말라는 기도를 바깥에서 본 것이라면 허심의 기도는 안쪽에서 들여다 본 것입니다. 외식하는 모든 기도는 마음이 기도의 내용에 부착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외식하는 기도는 마음이 자신이 하는 기도의 내용에 부착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예화) 언제도 제가 한번 여러해 전에 한번 말씀드렸습니다. 11세기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소설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보면 대주교가 늘 예배당에 나와서 “주여, 주여.” 그러고 새눈을 뜨고 주위에 사람이 있는가 보고 있으면 더 거룩하고 슬프게 기도하다가 사람이 없으면 슬며시 접고 들어가던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주여.” 하고 거룩한 목소리로 기도하니까 하늘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하나님이 “네가 나를 찾았느냐.” 음성이 들렸습니다.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마음속에 허심의 기도는 그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기대도 없거니와 그 기도가 이루어지면 예상치 못한 결과였기 때문에 오히려 충격을 받을 그런 마음입니다.
그런 기도가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주신 의도와 반대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기도를 주신 것은 당신이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보고하라고 기도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새로운 지식을 가지시는 분인 것처럼 우리에게 유아기적으로 가르쳐주심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기도할 때마다 쏟아놓아 청소해서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살게 하는 것이 사실은 기도의 수단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한 사람들은 칼빈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선한 의지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자기가 올바른 길로 돌아서본 사람은 자기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압니다. 하나님이 놀랍게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자기는 움직이시는 그 하나님을 따라갔을 뿐이기 때문에 올바른 것을 하지 않았을 때에는 내 힘으로 한 것이지만 올바른 일을 했을 때는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공통된 간증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심의 기도는 기도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는 다르고 그 기도의 결과에 있어서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도 못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허심의 기도를 강력하게 탄핵하시고 그리고 그것은 마치 마음에 없이 하나님을 제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회심의 기도의 반복은 위선의 기도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을 기도했다고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으로 기도하고 기도했다고 자부심을 느끼는 것보다는 요새 나는 기도하지 못했다고 괴로워하는 편이 하나님 앞에서 훨씬 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문제인 것입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문자 그대로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반복하는 것을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중언부언하다고 하는 것은 기도의 내용에 마음이 따라오지 않는 모든 기도가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한마디도 반복되지 않을지라도 모두 다 중언부언하는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도 속에서 우리가 습관적으로 하는 관용적인 표현 같은 것들은 특히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되기 매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기도하는 발화와 그 발화된 말에 부착된 마음이 항상 따라가는 것, 그래서 기도를 이 입술을 비롯한 상체에서 하지 말고 깊이 이 속으로 내려가서 폐부에서 언어를 길어 올려서 마음을 묻어 기도할 때 그 기도가 느린 것 같고 기도의 양은 작아도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기도의 물을 쏟아내는 물을 쏟듯이 기도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기도할 수 없는 분들은 오늘부터 한번 시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화) 깊은 물에다가 두레박을 던져서 깊이 던져서 ‘픙덩’하면 좋은데 그렇게까지 안 된다면 두레박을 자꾸 흔들면 어딘가 물소리가 납니다. 물이 가물어서 한쪽으로 몰렸습니다. 자꾸 흔들면 바가지가 들어가는 느낌이 납니다. 그리고 물이 반쯤 담겼을 때 한 번 더 아래로 떨어뜨리면 무게에 의해 출렁하고 가라앉으면서 물이 가득히 담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천천히 천천히 길어 올린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한마디 한마디에다가 자기의 마음을 철저하게 담아서 그것이 화려한 수식어나 유창한 기도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담아서 하나님께 드리게 될 때에 그것이 말하자면 펌프로 말하면 마중물이 되어서 더 열렬한 기도를 길어 올리게 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외식하는 기도와 허심의 기도는 절대로 그렇게 마중물의 역할을 해서 우리 마음속에 있는 기도를 길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홀로 조용히 앉아서 그분을 묵상하며 그분께 우리의 마음을 토해놓는 것 그래서 화려한 수식어가 아니더라도 아버지라고 하는 호칭 하나에 그 다음에 긍휼히 여겨달라는 호소 하나에 자신의 마음을 하나하나 담그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서투르고 아직은 풍부한 양이 아니더라도 그런 기도를 통해서 더 풍부한 기도가 우리 마음속에 길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기도는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