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강
교회와 기도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대로 만난지라 나귀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눅 19:28-46).
I. 본문의 배경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깨어 있는 것이 그 시대를 위해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여러분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본문은 연이은 두 사건을 담고 있다. 먼저 나타나는 사건은 예수님께서 “호산나” 찬양소리를 들으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이고, 이어서 나타나는 사건은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사건이다. 이 두 기사는 단순히 별개의 두 사건을 나열해 놓은 것이 아니라 한 맥락 안에 있는 사건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즉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주일이었다. 많은 무리가 그들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눅 19:37),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님을 환영했다. 그 찬송과 환영이 얼마나 대대적이었는지 마태복음 21장 10절은 “온 성이 소동하였다”고 기록한다. 예수님을 주의 일음으로 오시는 왕으로 불렀고, 그분의 오심이 “하늘에는 평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눅 19:38)이라고 외쳤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는 그들이 벗은 겉옷이 양탄자처럼 깔려있고, 밭에서 베어 온 종려나무 가지가 길 위에 펼쳐져 있었다.
실로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이처럼 환영 받으신 적도 없었다. 온 성의 환영이 얼마나 열광적이었는지, 시기하는 바리새인들이 말하기를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눅 19:39)라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이 환영과 하나님께 대한 이들의 찬양을 마땅한 것으로 여기셨다. 마땅히 하나님께 그러한 찬양이 드려져야 할 때였기 때문이다. 이 날은 유월절이 시작되는 첫 날이었다. 이들은 비록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백성들의 죄가 대속될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이런 구원의 맥락에서 하나님께 대한 이들의 찬양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셨다.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은 곧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의미했지만,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속함을 입고, 아버지께 나아가게 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하나님의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으셨던 것이다.
II. 심판의 운명을 모르는 도성
벳바게와 베다니를 떠나 온 예수님의 입성 행렬이 예루살렘 성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생겼다. 아직도 환영의 기쁜 소리들과 찬양소리가 성곽 앞에 가득하고 뒤따르는 백성들도 수다한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우시는 것이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그것도 그냥 눈물을 흘리신 것이 아니다. 헬라어 성경은 이 “우시며”를 에클라우센(ἔκλαυσεν)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요한복음 11장 나사로의 부활현장을 보도하는 데 사용된 “눈물을 흘리다”(εδακρυσεν)라는 동사와 다르다. 오늘 본문에 쓰인 “우시고”(ἔκλαυσεν)는 단순히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고, 소리 내어 엉엉 우는 것이다. 환영인파에 둘러싸여서 예루살렘을 향해 다가가시던 예수님께서 환영의 찬송소리를 들으시면서, 갑자기 어깨를 들먹이시며, 목 놓아 우신 것이다. 수없이 스쳐지나가곤 하는 성경 구절이지만, 좀더 유심히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을 멈추고 이 본문을 묵상하면 예루살렘 입성의 인파에 둘러싸인 채 대성통곡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본문 앞뒤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 특별히 인물과 사건을 다루고 있는 부분을 읽어갈 때,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성경을 읽을 때 그 인물과 사건에 생각 없이 빠져들지 말고, 객관적인 시각을 지니면서 본문을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구약 성경을 읽을 때 그렇다. 아브라함, 모세, 다윗과 같은 신앙의 위인들의 삶을 읽어갈 때 그들이 모두 완전한 사람일 것이라는 생각의 지배를 받으면서 성경 속으로 빠져들기 쉽다. 이런 점을 조심해야만 우리는 그들 뒤에서 역사하시는 더 크신 하나님의 손길을 읽을 수 있다.
두 번째로 성경을 읽을 때 마음에 두어야 할 것은-정반대의 이야기가 되겠지만-성경의 인물과 사건을 대할 때 반드시 그 삶의 정황 속으로 들어가서 본문을 음미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어가면서 계속해서 객관적인 관찰자(outsider)로 남아있다면, 본문을 지식적으로 알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 본문을 읽는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을 경험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도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 예를 들어 보자. 창세기 22장에는 그 유명한 아브라함의 시험, 독자 이삭을 바치는 시험이 들어 있다. 백 세에 외아들로 낳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 사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창 22:2-3), 그러나 이렇게 성경을 읽는 것으로 그쳤다면, 그것으로 본문은 알 수 있을지 모르나, 감동은 없었을 것이다. 이 짧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눈을 감고 본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 그리고 그 아들 이삭이 어떻게 태어나게 되었는지, 오직 그 아들에게 무슨 약속을 주셨는지 등등, 도움이 될 만한 성경의 기록을 모두 상기하면서 4,000년 전 모래바람이 이는 블레셋 족속의 땅에 장막을 치고 살던 아브라함의 삶의 정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렇게 묵상할 때, 우리는 아브라함이 당한 이 시험이 주는 고통과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창세기 22장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을 대하면서 여러분께 이 같은 묵상을 권한다. 약 2,000년 전으로 여러분의 생각을 옮기시고, 여러분 자신을 예루살렘 입성의 환영 인파 중 한 사람으로 두어라. 여러분이 지금 예수님을 환영하는 인파 속에 섞여서 그분과 함께 찬송을 부르며, 의기양양하게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여러분이 특별히 선택되어서 예수님 바로 곁에서 그분이 타신 나귀의 고삐를 잡고 입성하게 되었다고 치자.
찬송을 받으시고, 온화한 얼굴로 제자들을 대하시고,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시던 예수님께서 성 가까이 오시자 갑자기 목 놓아 우신다. 이 장면이 이해가 가는가? 이처럼 가슴 벅찬 환영에 둘러싸인 적이 또 있었는가? 주님의 생애는 항상 긴장과 고난과 섬김의 연속이었다. 종교지도자들로부터의 핍박과 논쟁이 그치지 않았다. 안으로는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말씀으로 섬기시고, 치료로 봉사하기에 쉴 틈 없는 생애를 사셔야 했다. 그러나 이 순간은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백성들의 찬양에 둘러싸여 환영을 받으시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시자 돌연 안색이 변하시면서 통곡을 터뜨리셨다. 그분 주위에는 찬양의 소리가 그치고, 제자들과 따르던 백성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의아해하기 시작한다. 어느 모로 보나, 이 날은 함께 기뻐하고 웃으셔야 할 순간이지 결코 외로이 흐느껴 우셔야 할 비극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직도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감출 생각도 아니하시고, 계속 목 놓아 우신다.
그분의 생애를 생각해 보자. 그분은 결단코 연약하신 분이 아니셨다. 오히려 강철 같은 분이셨다.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던 때도 결코 나약해지지 않으셨고, 복음을 전하시다가 동리에서 쫓겨나 악한들의 추격을 받으실 때에도, 낙심하지 않으셨다.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팔려 체포당해 가시던 때도 그 배신 때문에 상심치 않으셨고 간악한 로마 병정에 의해 손과 발이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고통의 순간에서 조차도 결코 눈물을 보이시지 않으셨다. 그토록 강하신 예수님께서 가슴이 찢어지시는 슬픔과 비탄으로, 울음을 터뜨리셨다.
예수님께서 성 가까이 오사 목 놓아 우신 것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지만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가 그토록 대성통곡 하셔야 했던 이유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우신 사건에 대해 이처럼 강렬한 울음은 뜻하는 단어가 쓰인 곳은 이곳뿐이다. 그런데, 본문은 그저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 19:41)라고 적고 있다. 그분이 우신 것은 단지 성을 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말은 더 이상하다. 예루살렘을 예수님 혼자 보셨는가?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인파가 다 함께 보았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 가까이 이르셨을 때, 그 성은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목 놓아 울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수많은 세월동안 그랬던 어제처럼 견고히 서 있고, 성문으로는 지난주처럼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이 예루살렘 성이 하나님의 특별한 언약을 받은 성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성을 보셨다. “성을 보시고”(눅 19:41) 이 “보시고”를 헬라어 성경은 “이돈(ιδων)”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그냥 보는 것이 아니다. “직관적인 통찰력으로 사물을 인지하는 것”이다. 이 단어의 의미는 육체의 두 눈으로 쳐다보는 것에 그치는 그런 종류의 “쳐다봄”이 아니다. 사물의 배후를 꿰뚫어 보는 “직관적인 통찰”을 의미한다. 외관상으로는 어제와 다름없는 편안한 수도였고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랑하는 유서 깊은 성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도성을 영적인 통찰로 꿰뚫어 보셨고 이때 주님은 목 놓아 우셨다.
주님이 목 놓아 우신 것은 어제와 다름없이 견고하게 서 있는 이 성, 천여 년의 언약이 깃든 이 도성이 무너질 심판을 보셨기 때문이다. 큰 소리로 우시던 주님께서 젖은 눈을 들어 울음 섞인 음성으로 말씀하셨다.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눅 19:42). 이것은 선포가 아니라 차라리 홀로 되뇌시는 독백에 가까운 것이었다. 하나님을 등진 나머지 말씀 선포를 통해서 돌아서기에는 너무나 강퍅해진 종교적 도시, 이제 예루살렘을 사랑하시는 예수님도 이 성을 향해 40여 년 앞으로 다가온 예루살렘의 멸망을 바라보시면서도, 이미 정해진 아버지의 뜻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형편을 보시고, 목 놓아 우시다가 독백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평화(shalom)를 상실한 이 성은 “평화에 관한 일”을 모르고 있었다. 예루살렘 성,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 성은 평화의 성이었다. 이 도성은 무려 천오백 년의 언약이 깃든 하나님의 도성이었다. 모세 시대로부터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만날 한 장소를 예정하신다. 이 백성들이 모여서 가나안으로 들어오기 이전부터 이 도성은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도성이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우셨고, 이곳을 중심으로 여호와의 왕권이 행사되었다. 무엇보다도 그 거룩한 언약의 성전이 자리 잡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예루살렘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유서 깊은 성 뒤편에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을 영적 통찰로서 꿰뚫어 보셨다. “날이 이를찌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눅 19:43-44).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심판의 예언이 그 후로부터 정확히 40년 뒤, 얼마나 무섭게 예루살렘에 임했는지 아는가?
예루살렘이 포위를 당하기 전 이때는 마침 유월절이었다. 이 성에는 백만여 명의 유대인들이 모여 있었다. 로마의 장군 디도(Titus)에 의해 포위당한 예루살렘은 보급이 끊기자, 극심한 기근에 고통을 받았다. 주후 70년의 일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굻어 죽어 나갔고, 급기야는 어린아이를 잡아서 삶아 먹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고 유대 역사가는 전한다. 주후 70년 6월 24일 안토니오 요새가 점령되고, 7월 6일에는 항상 드리던 성전의 희생제사까지 그쳤다. 8월 27일에는 예루살렘 성전의 위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대문이 불에 타버렸고, 9월 24일에는 전 도시가 디도 장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 날이 바로 예루살렘 최후의 날이었다. 그들의 점령에는 무자비한 약탈이 뒤따랐고, 약탈을 위해서 무자비한 살육이 이어졌으며, 거리 이곳저곳에서는 겁탈 당하는 부녀자들의 비명 소리로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예루살렘 성은 지옥을 방불케 하는 살육의 도성이 되었다. 거리마다 유대인들의 피로 도랑을 이루었고, 형식적인 제사 속에서 위안을 제공해주던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들의 시체가 거리거리에 쌓여 있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노예로, 검투사로, 개처럼 끌려갔던 것이다. 유서 깊은 종교 도시였지만 그들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회개치 아니할 때, 그곳은 결국 저주 받은 묘지의 도성이 되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별고 없이 서 있는 예루살렘, 이 성이 머지않아 당하게 될 비참한 심판의 종말을 미리 보셨던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등진 민족의 역사를 다루신 하나님의 한 손길이다. 다른 나라에 비하면 이스라엘은 제법 도덕적인 민족이었고, 그때도 성전에서는 희생제사가 끊이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제사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종교적인 민족이었고, 그들의 입술에는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이 오르내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백성들은 지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되어져 있었고, 그들은 끝까지 회개치 않고 있었다. 눈앞에 다가온 하나님의 심판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날 너도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눅 19:42). 헬라어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읽고 있다. “이 날에 너라도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조국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잃어버리고 여호와를 등진 것을 몰랐다. 그로 말미암아 40년 후에 다가올 민족의 멸망도 몰랐다.
이 심판의 영적인 비밀을 사마리아가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갈릴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이해가 간다. 이 다가올 민족의 위기를 유다가 깨닫지 못하는 것도 납득이 간다. 그러나 모든 성읍들이 다가올 민족의 멸망을 몰라도 “예루살렘! 너만이라도” 알아야 했다는 것이다. 다른 모든 백성들과 성읍들은 이것을 몰라도, 예루살렘만큼은 이 재앙을 미리 알고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했다. 우리 주님이 그 앞에서 목 놓아 우시는데도 이 성은 깨닫지 못한다. 멸망을 눈앞에 두고도 말이다. 이 성은 눈앞에 다가온 심판의 운명을 모르고 있었다.
성경은 예루살렘 성이 이처럼 눈뜬 소경이 된 이유에 대해서 말한다.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숨기웠도다”-헬라어 성경은 이 부분을 “에크뤼베(ἐκρύβη)”라고 읽는다. 이것은 수동태이다. 누군가에 의해 못 보도록 감추어버림을 당한 상태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진 백성들, 그분과의 평화를 등진 교회의 비극적인 특징은 영적인 것들에 대한 무지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가 가려져 있고, 잠들어있는 자들에게는 역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대한 이해가 감추어져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애통을 알까? 민족을 향해 목 놓아 우시는 예수님의 심정에 관심이 있는가? 저마다 예수 믿고 복 받기에 혈안이 되어있다. 이방신상 앞에서나 구하는 탐심과 부패한 욕망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 이런 무지함이 우리 속에 있는 한 우리는 결단코 이 시대와 조국의 교회를 향한 주님의 애통하시는 그 눈물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멸망 받을 예루살렘을 위해 십자가를 지시려고 올라가시는 우리 예수님의 심정을 알 수 없을 것이다.
III. 잠들어 있는 성전
이처럼 뜻밖의 통곡을 그친 예수님께서, 그 다음에 방문하신 곳이 어디인줄 아는가?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이 두 기사가 연결되고 있다. 이번에도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목 놓아 우시던 예수님이 이번에는 격렬히 행동하시는 분으로 돌변하셨다. 갑자기 무슨 이변을 맞으신 것처럼 마구 분노와 흥분으로 가득한 모습으로 변하셨다. 성전 안에서 사람들을 내어 쫓고, 상과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이 예수님의 진노하시는 모습을 가리켜서, 많은 사람들은 “의분”, “의로운 분노”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장면은 이렇게 간단히 처리해 버리고 지나칠 수 없는, 교회의 생명에 관계된 진리를 담고 있다.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시각이 인간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보여준다.
그 시대의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 보자. 예수님이 성전을 찾으셨을 때 무슨 엄청난 일이 성전에서 벌어지고 있었는가? 아니다. 성전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고 있었다. 어제처럼, 지난 절기처럼 사람들은 성전에 찾아왔고, 작년에 행하던 그 일이 올해도 되풀이 되고 있었으며, 지난번에 행해지던 의식이 이 날에도 되풀이되고 있었다. 사람이 바뀌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성전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제사장, 서기관 모두 전통적으로 행해져 오던 일들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성전에서 제사에 쓸 동물들을 팔았다고 하지만, 이 전통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생긴 것도 아니고, 누가 성전을 말아 먹으려고 작당을 해서 시작한 것도 아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과 로마에게 수난을 겪으면서 많은 동족들이 흩어졌고,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유대인들은 구약의 규례에 따라서 동물들을 가지고 제사 장소까지 오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처음에는 성전 가까운 동네에서 구입해 가지고 올라왔는데,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아예 성전에서 그것을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유대에서는 헬라 돈, 로마 돈, 히브리 돈이 통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헬라 돈, 로마 돈은 명목 가치가 실질 가치보다 높은 일종의 악화(惡貨)였다. 그러나 히브리 돈, 세겔(shekel)은 표준 중량을 지니고 있어 “흠이 없는 하나님의 예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헌금의 편의를 위해서 이처럼 성전에서 돈을 바꾸어주는 전통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도 어느 날 갑자기 무슨 포고령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닌 듯싶다. 천천히 진행된, 과정상의 논리적인 무리가 없이 그렇게 되어서 여기에 이른 것이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제물을 팔고, 돈을 바꾸면서 엄청난 이득을 제사장들이 착복했다고 하지만, 부루스(F. F. Bruce) 같은 학자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서 확실한 증거는 없다고 주장한다. 누가 아는가? 진심으로 유대종교와 성전의식을 원만히 진행하기 위한 조처였는지 말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그 환영인파도, 예수님을 밤낮없이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성전에서 별다른 하나님의 분노를 살만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의 모습을 보라! 징그러운 뱀을 보시거나 한 것처럼 흥분하셨다. 오랜 세월동안 전통적인 인습에 따라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신다. 커다란 죄악의 현장을 목격하기라도 하신 것처럼 상과 의자를 마구 둘러엎으시면서, 큰 소리로 외치신다. 본문을 대하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보는가? 나는 이 본문 속에서 이 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본다. 이 조국 교회와 여러분의 신앙생활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각을 말하고자 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말할 수 없이 귀한 교훈을 준다. 하나님의 시각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축복은 먼저 그 시대와 조국의 교회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시각(視角)에 서게 되는 것이다.
IV. 하나님의 시각(視角)
본문을 묵상할 때, 우리가 받게 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들은 우리 앞에 있게 된 거대한 기독교, 치밀한 교회 조직, 역사 깊은 종교 습관들을 대하면서 문제를 못 느낀다는 것이다. 마치 격정에 들떠서 예수님의 입성을 환영하기는 했지만, 예루살렘 성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못 느낀 백성들처럼, 들끓는 환영의 물결 속에서 예수님께 헌신을 맹세하기는 했으나, 예루살렘 성전이 그토록 예수님의 진노를 살 만큼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못한 제자들처럼 말이다. 그토록 거대한 기독교가, 그토록 오랜 전통 속에서 이루어진 교회가, 이토록 많은 교회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이 관습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살 만큼 잘못된 것이라고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가 흑암을 향해 내려가던 시대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이 그러했던 것을 잊지 마라. 나는 오늘날 조국교회 속에서 이런 의식의 빈곤을 느낀다. 사람과 전통의 시각에서 보면 예루살렘은 아무 문제도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예루살렘에서 행해져 오던 이 관습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논쟁거리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수천 년의 약속이 깃든 이 거룩한 하나님의 예루살렘 성전이, 하나님의 전이기에 그 어떤 종교 건물보다 성자 예수님과 친밀해야 할 성전이 쏟아지는 하나님의 분노를 감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라. 이미 이 성전은 거룩한 약속의 전당이 아니라, 진노의 굴혈이 되어버린 것을 발견한다.
이 시대의 교회와 우리들이 지금 그리스도 예수의 심판대 앞에 선다면 칭찬보다는 책망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사항들 때문에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의 심판대 앞에 선 자신과 조국교회를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그리고 어떤 것들에 대해 하나님이 당신과 이 시대의 교회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 시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망스러운 특징은 “하나님의 시각”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작년 이맘때도 예루살렘 성전에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있었다. 그들이 그렇게 돈을 바꾸고, 그렇게 제물을 사다가 제사를 드렸다. 지난번 절기에도 이 성전에서는 그렇게 바꾼 돈을 헌금으로 받았고, 그렇게 사온 동물들로 제사 드려 주었다. 예수님이 당도하시기 전 오늘 아침에도 이와 같은 헌금과 제사 방식에 아무런 이의를 품지 않고, 성전에 들어갔다. 그런데, 왜 유독 예수님께선 이토록 분노하실까? 그의 공생애 중에 이처럼 치를 떨듯 분노하신 적이 있으셨는가? 자신을 팔아넘기려는 순간도,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간에도 진노하시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 오늘 “별다른 일이 없는” 이곳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토록 진노하셨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정염(情炎), 하나님의 파토스(pathos)를 가지셨기 때문이다. 무엇이 자비하신 주님을 하나님의 격정에 사로잡히게 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시각, 교회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는 이 같은 하나님의 시각을 가진 그리스도인을 원한다. 교회를 원한다. 참으로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이 같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교회를 바라보는 일 없이는 이 조국 교회가 결단코 그 영광스러움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다. 오,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주님의 시각으로 교회를 사랑하게 하소서. 이 시각을 회복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시대의 교회를 바라보면서 마음 아파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지켜보시면서, 눈물 흘리시는 그리스도의 심장을 나누어 갖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할까 생각하기에 앞서 영적인 각성을 통해 하나님의 시각을 회복하도록, 그리스도의 파토스(pathos)를 갖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뉴잉글랜드의 각성운동의 지도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그는 천재에 가까운 그리스도인이었다. 9살에 유물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글로서 밝혔고, 12살에는 자연 철학에 관한 문제들을 분석 평가하는 글을 썼다. 1726년 그가 13세 되던 해에는 히브리어와 헬라어, 라틴어를 마스터한 채 고전을 섭렵하면서 예일(Yale) 대학에 입하하고, 4년 후에는 그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다. 19살에는 예일 대학의 강사로 청빙을 받았다. 그는 그 같은 예리한 지성(知性)이 불타오르는 복음의 열정과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 증인이 되었다. 화려한 학벌과는 어울리지 않게 뜨거운 가슴을 지닌 그리스도인이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 영광을 체험한 후 그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교회와 역사를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1729년 그가 메사추세스 주 노르댐톤(Northdampton)에 있는 교회에 부임하면서 끊임없이 외쳤던 것은 지옥에 대한 설교였다. 그 시대의 완악하고, 타락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시각과 열정에 사로잡혔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말씀은 “지옥의 심판”이었다. 그러나 많은 교회가 그 같은 설교와 열정을 비난했고, 자기 교회 교인들조차도 단순한 위로와 심방만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던 1735년 어느 날 지옥에 대한 설교를 들은 후 한 젊은이가 자살하게 됨으로서, 교회는 큰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주위의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동역자들의 태도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 열정에 사로잡혀서 외치는 고독한 설교자를 더욱 괴롭혔다. 여러 가지 핍박과 회유에 직면하던 그는 자신의 입장을 수정하기를 거부하고 23년이나 정들었던 교회를 사임하였다. 그러나 이 설교자의 예언적인 선포는 그 영광스러운 제1차 대각성운동에서 하나님이 왜, 이 사람 조나단 에드워즈를 들어서 사용하셨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당신을 환영하는 엄청난 인파가 아니라, 종교적인 충동으로 헌신을 결심한 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 시대와 교회를 분별하고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그 아픔을 느낄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다. 교회의 역사는 이런 한정된 소수가 어떻게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는가에 대한 실증이다. 조지 휘트필드(J. Whitefield)가 그 시대의 교회에 대해 이 같은 시각과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를 1741년 그 영광스러운 대각성운동에 에드워즈와 함께 일하게 하셨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교회의 현실 속에도 주님의 고통은 있다. 그 고통을 또 다시 받으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교회를 세우셨는가? 하나님의 시각을 구하라. 아무 일도 없는 것 같은 이 시대의 교회를 하나님의 눈으로 볼 수 있도록 그분의 시각을 구하라. 그리고 그릇된 교회와 여러분 자신의 삶을 보면서 오늘, 예루살렘 성전에서 분노에 차서 외치시는 주님의 격정과 눈물을 갖게 해달라고 매달리라.
예수님께서 그토록 상상을 뛰어넘는 진노 끝에 주신 말씀이 무엇이었는가?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이다. 마가복음 11:17의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말씀은 이사야서 56:7에서 인용된 말씀이다. 이사야서의 히브리어 원문은 이 부분을 이렇게 읽는다. “왜냐하면 내 집은 그 모든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잠시 이사야의 글에 실린 이 구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53장에서 메시아의 수난을 예언한 후, 54장부터 이스라엘의 영적 회복을 말씀하고 있다. 오늘 누가복음의 말씀이 인용된 이사야서 56장이 바로 이 문맥에 놓여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회복하고, 영적으로 새롭게 깨어나 은총의 시대를 맞게 될 때, 그러한 영적 상황과 밀접히 연관된 변화가 하나님의 성전에도 있을 것인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전이 “그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a house of prayer for all nations)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기도의 집!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을, “그 민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것이 바로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하나님의 열망이셨고, 오늘 예루살렘 성전이 이 같은 하나님의 열망에서 떠나 잠들어 있는 것을 예수님은 목격하셨던 것이다. 히브리어 성경과 헬라어 원문은 이 성전을, 단순히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지 않고 소유격을 써서 “기도의 집”이라고 말한다. “기도의 집”, “기도하는 것이 특징이 되어버린 그 집”, 구원받을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나의 집”임이 잘 드러나지 않을 그 집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 시대, 조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열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시대의 교회와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중심적인 일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기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섬김, 구원받지 못한 백성들을 위한 제사장적인 애끓는 중보의 기도가 없이는, 결코 교회가 그 존재의 목적을 다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님께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이 성전에 이처럼 진노하신 것도 사실은 “내 집”이 기도하는 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V. 더 깊은 기도의 세계로
그러나 이 같은 예수님의 말씀은 몇 가지 점에서 의문을 가지게 한다. 무슨 이야기 인가? 매매하고 돈 바꾸는 일과 기도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더구나 이 매매하는 일과 돈 바꾸는 일은 갑자기 생긴 일도 아니었다. 무엇을 위해서, “매매”를 했으며, 무엇을 하려고, 돈을 바꾸었는가? 성전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위해서였다. 제사를 위해서였고, 기도를 받기 위해서였다. 무엇이 주(主)이고, 무엇이 종(從)이었는가? 부인할 수 없이 분명한 사실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제사와 기도가, “주(主)” 된 일이었고, “매매”와 “돈 바꾸는 일”은 그것을 위한 “종(從)”된 일이었다. 나는 당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가 보려는 몇 번의 묵상 속에서도 결코 이 매매하는 일과 돈 바꾸는 일들이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성전에서 행해지는 제사나 기도를 방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전에 대한 유대인의 존경심을 생각해 볼 때,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소란한 행위가 있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다. 제사드릴 장소가 없을 정도로 번잡한 시장이 성전 안에 섰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랬더라면, 성전에 대해 충성심 깊고 경외함이 많은 여러 사람들이 벌써 예수님과 같은 일을 행하고 갔을 것이다.
이 사실은 우리들에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이것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기도는 교회에서 가장 중시되어야 할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이다. 둘째로는, 이런 “매매하는 일”과 “돈 바꾸는 일”이 기도하기 위한 교회의 영성에 심각한 타격을 준다는 것이다. 많이 기도하면서, 좀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해 고민하고 있지 않는가? 기도해도 왠지 그 기도가 능력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 현실을 느끼는가? 먼저 여러분의 마음속에 있는 “돈 바꾸는 상”을 둘러엎으라. “매매하는 자들”을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몰아내라. 여러분의 삶 속에 자리 잡은 탐욕과 심령에 뿌리박은 더러운 것들을 몰아내기 전에는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도의 능력을 결단코 경험해 보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이 기도하는 모습을 잃어버린다면, 여러분의 특징이 단지 기도하는 사람, 아니 기도의 사람이 되고 있지 않다면, 유서 깊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고함치며 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오늘 이 시간 만나라. “회개하라! 네 속에 있는 온갖 더러운 것들을 몰아내라.” 주님의 진노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이다. “너는 만민을 위한 기도의 사람이 되어라!” 우리 주님의 열정에 사로잡힌 눈길과 마주쳐야 할 것이다.
여러분의 눈앞에 가난한 이 시대의 조국의 교회와 초라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보이는가? 영광을 잃어버린 이 시대의 교회는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의 중심이 되고 있는가? 그분의 보내신, 지금도 끊임없이 보내시는 성령을 의지하는가? 기도가 참으로 온 교회의 가장 중심적인 기능이 되고 있는가? 우리가 참으로 기도를 아는가? 여러분들은 기도가 하나님 앞에서 단순한 언어적인 보고(report)가 결코 아님을 아는가? 마음을 다해 하는 기도, 단지 그것이 가장 높은 수준의 기도가 아님을 아는가? 우리가 과연 하나님과의 기도의 진수인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에 대해 알고 있는가? 기도 속에서 영적인 세력들과의 싸움이 있음을 느끼는가? 그들의 칼날과 맞부딪치는 금속의 굉음을 듣는가? 기도가 깊어지면서 언어가 영혼의 신음소리로 바뀌어 가는 것을 이해하는가? 기도가 피할 수 없는 영적인 전쟁임을 느끼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인도받는 대신, 정교한 규칙에 의해 운영되고 성령의 능력주심에 의지하기 보다는 잘 짜여진 조직과 기구들을 믿고, 기도 대신 사람과의 사귐이 교회의 중심이 되고 있지 않는가? 이러한 모습으로는 교회가 그 영광스러움에로 회복될 수 없다. 이것들이 여러분 앞에 놓여있는 묵은 땅이다. 이제는 깨어나라. 일어나라. 기도함으로 자신의 심령과 이 시대의 교회를 기경하라.
그러면 왜, 기도가 교회의 중심적인 기능이 되지 못할까? 주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데 교회는 어째서 그 일에 있어서 이렇게 약할까? 그 대답은 간단하다. 교회가 기도하는 일을 그릇되게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기도하는 일 자체를 교회가 가지고 있는 많은 해야 할 일들 중 하나 정도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장 심각한 무지이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되는 것은 교회가 해야 할, 잘하면 할수록 좋고, 못 해도 할 수 없는 일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교회가 “그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지 아니하고는 민족과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아서 외칠 수 없음을 알라. 예루살렘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되지 못할 때, 민족 앞에 다가온 멸망도 그들 눈에는 가려지게 되었다. 민족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리고, 피할 길을 외쳤던 선지자들의 삶을 보라. 그들은 하나님과의 열린 교재의 창문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조국의 교회를 사랑하고 이 민족을 위해 슬퍼하는 여러분들은 이 시각을 향해 새롭게 눈을 떠야 할 것이다.
교회가 기도하는 일에 충실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이 기도가 영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영적인 일인 동시에 영적인 투쟁이다. 그러나 육적인 교회, 잠들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무리한 영적인 일을 꺼려한다. 왜 기도가 육신에게 무리한 일일까?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 죄악이 보다 선명히 인식되고, 하나님의 면전 의식이 우리 마음을 교차한다. 이 같은 의식은 우리로 하여금 정직해지도록 요구하고 피상적으로 속여 왔던 많은 문제들 앞에 서게 된다. 육적인 교회, 잠들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 같은 일이 영혼에 무리한 부담이 된다.
그래서 잠잠히 간절히 기도로 섬기기보다는, 몸으로 때우는 육체적인 노고를 택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이것은 깊이 성찰해 보아야 할 일이다. 열심히 봉사하는 것 가지고는 그의 헌신이 진정 하나님만을 향해 있는 것인지를 알 수 없다. 기꺼이 희생하고 노고를 치루는 것만 가지고는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께만 헌신된 사람인지를 알 수 없다. 오직 그의 기도의 세계가 그것을 말해 준다. 그의 보이지 않는 골방에서 드려지는 깊은 기도의 세계가 그가 진정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헌신된 사람인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오늘날 경박한 사람들은 기도하는 것에 대해 “기도만 하면 다냐”고 비아냥거린다. 그것은 기도에 대해서 아는 바가 별로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는 기도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다.
기도! 그 기도의 세계를 생각할 적마다, 나는 드넓은 바다를 생각한다. 푸르고 끝없는 기도의 바다, 나의 기도생활은 그 바다 가장자리에서 가랑잎 배나 띄우고 있는 형편에 불과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바다보다 하나님을 확실하게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 말씀은 우리에게 그분을 깨닫게 하여 주지만,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깨달은 그분을 더 깊이 경험하게 한다. 성경을 읽을 때 문자 이상의 하나님의 인격을 만나는 일도 기도를 통해 가능해진다. 기도! 그 드넓은 기도의 바다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까지나 바닷가에서 모래성이나 쌓는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기도의 바다 한 가운데로 나아오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기도의 바다로 나아갈 때, 우리는 남들이 듣지 못하는, 포효하는 격랑의 회오리바람을 본다. 그 시대를 향한 진노의 폭풍소리를 듣는다. 그 넓은 기도의 바다로 나아갈 때, 우리는 그 바다에서 이 시대의 조국 교회를 향한 주님의 애통하시는 눈물을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는 한없는 사랑을 만나기에 그 바다에서 우리는 소망을 얻는다. 때로는 그 잔잔한 바다와 갈매기들의 노래 속에서, “내가 너와 함께 하노라”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는다. 지금이야말로 조국의 교회가 깨어나야 할 때이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우리를 묶어 온 온갖 얽매인 닻줄을 끊고 기도의 바다로 나아가야 할 때이다. 무엇보다도 마음과 온 힘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하여야 할 때이다. 기도가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긴다는 믿음을 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기를 쉬지 아니하는 특별한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할 때이다.
나는 이 시간 기도에 관한 그 많은 진리들을 다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러분이 각성되고, 이 조국의 교회가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고, 이 민족이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원한다면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무도 보지 못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시고, 아무도 문제로 느끼지 못하던 예루살렘의 잠들어 있는 성전을 영적으로 통찰하시기까지, 그리고 지금 백성에게 싫어버린 바 되어 십자가에 못박히시러 올라가는 그 시간까지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 앞에 살아오셨던 삶의 방식을 보라. 그분의 생애는 피의 생애였다. 그분의 생애는 땀의 생애였다. 그분의 생애는 눈물의 생애였다.
우리 주님의 생애는 십자가에 달려서 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다 쏟으신 피의 생애였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이 드리는 십자가의 보혈을 받으시기 전에 땀과 눈물의 기도를 먼저 받으셨던 것이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한 번도 아버지와 떨어져 보신 일이 없이 그분과 동행해 오신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가 어떤 모습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셨는지 말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참으로 그분의 생애는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기 이전에 기도의 눈물로 얼룩진 생애였다. 광야의 40일 기도가 그분에게 얼마나 많은 희생을 요구했는가? 그 바쁜 일과와 수많은 논쟁과 봉사 속에서도, “새벽 미명”과 “깊은 밤”을 하나님의 것으로 따로 떼어 놓으시던 예수님의 기도의 삶이 우리의 메마른 가슴에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겟세마네 동산을 올라보라. 잠들어있는 제자들 곁에서 하나님께 매달리시는 우리 주님의 신음어린 기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VI. 기도-하나님의 능력
교회의 역사가 성령이 역사한 역사(history)라면 이 성령의 역사 뒤에는 보이지 않는 기도의 역사가 있다. 교회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를 기록하고, 선교의 역사만을 전해도, 하나님은 그 권능을 가져오게 했던 기도의 역사를 기록하고 계신다. 선교의 역사 속에서 구원받은 무리들과 함께 천국에 설 때, 비로소 우리는 이름 없는 그리스도인들, 교회의 역사가 기록하기를 빼 놓았던, 그러나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던 기도의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무릎이 약대다리처럼 굳어지고, 아직도 그 뺨에 눈물 자욱이 지워지지 않은, 교회와 역사를 움직였던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얼마나 큰 영광스러운 존재들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교회가 역사 속에서 각성되고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게 되기까지는, 특별히 깨어 일어선 기도의 사람이 있었고, 이들이 기도할 때,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이어서 깨어났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교회는 다시 한 번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회복되었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오 분, 십 분 기도하는 것으로 여러분의 영혼을 위안하지 마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거절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기도하라. 여러분이 떨쳐 깨어나기를 원하시고, 교회가 그 약속된 영광스러움을 회복하기를 원하면 먼저 하나님께 매어 달리는 일에 있어 헌신된 그리스도인이 되어라.
진정으로, 이 조국의 교회와 여러분의 공동체가 이 민족을 이끌 영적 지도력을 회복하기를 원한다면 더 오래도록 무릎으로 싸우라. 여러분의 교회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게 하라. 여러분의 교회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게 하라. 기도의 헌신이 없는 눈물은 종교적 감상주의에 지나지 않으며,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지 못한 채, 민족을 지도하고자 헌신하는 것은 무모한 모험주의에 다름이 아닐 것이다. 교회의 영광스러운 회복 뒤에는 생명을 건 기도의 사람들이 있었다. 영혼을 쏟아 부으며 그 시대를 짊어지고 중보자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간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은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애통함과 진노의 사랑을 미리 알게 되었다. 그것은 차라리 기도의 투쟁이었다. 만족과 조국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전투였다.
교회의 역사는 미국의 제2차 대각성운동에 사용되었던 찰스 피니(C. Finny)의 생애를 상세히 기록해 두고 있다. 그는 19세기 미국을 움직인 위대한 복음전도자이다. 그러나 그를 위해 기도하던 아벨 클러리(Abel Clary)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는 피니를 위해 기도로 헌신한 사람이었다. 하루 14시간 이상 계속되는 살인적인 기도로 피니의 각성운동과 전도 사역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가 병약한 몸으로 자신을 기도의 싸움에 드렸을 때, 1830년 로체스터(Lochester) 시에서, 피니가 복음을 외쳤을 때 교회는 각성되었고, 교회 밖의 사람들은 교회 안으로 회심해 들어왔다. 세 교회에서 피니가 집회하기로 당초에 계획되어 있었는데, 그 중 한 교회는 목사를 내어 쫓으려고 궁리하고 있었고, 나머지 두 교회는 목사끼리 서로 고소해서 법정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 해 피니가 그 도시에서 복음을 외치자 이 잠들었던 교회들이 깨어났고, 10만 명이 넘는 잃어버린 영혼들이 회개와 각성의 물결에 떠밀려 그리스도의 품에 안겼다.
1613년 아일랜드에서 이름조차 전해지지 않은 일곱 사람이 무릎으로 헌신할 때, 그 유명한 올스터(Ulster)의 대각성운동이 부패 속에 잠들어있는 죽음의 땅 아일랜드를 강타했다. 병들어 쇠약한 제임스 그랜드닝(J. Glendenning)은 기도가 하나님의 교회를 영광스럽게 하고, 그리스도인들을 깨우는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역사의 산 증인으로 남아있다. 허약하고 병이 많은 몸을 이끌고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 시대에 잠든 교회와 부패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부르짖을 때 올드스톤(Oldstone)의 집회에서는 그의 선포 앞에 12명의 악한 자들이 졸도해서 들것에 실려 나가는 역사가 나타났다. 무명의 그리스도인 요한 웰치(J. Welch)가 그의 사위, 요한 낙스(J. Knox)를 위해 하루에 7-8시간씩 기도하면서 3,000명의 영혼의 중보자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더럽고 타락한 땅 스코틀랜드 위에 역사적인 장로교회가 서게 하셨다.
교회사 속에서 한 시대를 깨우고 하나님의 교회를 영광스럽게 한 사람들은 운동가이기 이전에 설교자였고, 설교자이기 이전에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한 시대를 깨우시고, 교회가 영광스러움을 회복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들을 너무나 다양하다. 요한 웨슬레와 같이 탁월하게 건강한 육체를 가진 사람들을 사용하시는가 하면,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와 같이 곧 쓰러져 죽을 듯 연약한 사람들도 사용하셨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예일 대학의 수재를 사용하셨는가 하면, 드와이트 무디처럼 초등학교를 중퇴한 무학자를 사용하기도 하신다. 유명한 목사를 사용하시는가 하면 무명의 평신도를 전도자로 사용하셔서 한 시대를 깨우기도 하셨다. 하나님은 다양한 사람들, 질그릇 같이 연약한 사람들을 사자처럼 사용하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하루에 세 시간씩 기도하던 루터, 바쁠 때 더 무릎을 꿇기로 결심하던 기도의 사람 마르틴 루터(M. Luther)를 들어서 독일과 유럽의 교회를 깨워서 성경으로 돌아가게 하셨다. 얼어붙은 땅, 눈 덮인 숲 속에서 폐결핵 3기의 몸으로 기도하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 Brainerd)를 통해서 수백 년 동안 우상숭배로 잠들었던 아메리카의 하늘 아래 영광스러운 십자가가 서게 하였다. 화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기도하던 보헤미아의 요한 우스(J. Huss)를 칠흑같이 어둡던 중세 암흑의 교회사를 밝히는 종교개혁의 새벽별이 되게 하셨다. 일주일에 하루는 오직 기도에만 바쳤던 보스턴 신학교의 수재 아도니람 저드슨(A. Judson)을 들어서, 생명 없는 죽음의 종교, 불교에 잠들어있던 버어마를 깨워 60,000여명의 가슴 속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셨던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으로 회복되는 일 없이는 이 세상을 위해 하나님은 당신의 위대한 일을 이루는 도구로 교회를 사용하시지 않는다. 여러분들이 “기도의 사람”이 되기 이전에는 결단코 이 민족과 조국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애통하시는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 여러분의 공동체가 이 민족을 위해 아무리 많은 비전을 가슴에 품고 이것을 위해 뜻을 모은다 해도, 여러분의 공동체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회복되어지지 않는다면, 그 모든 충성스러운 도모에도 불구하고 “멸망을 앞둔 도성 속에 잠들어 있는 예루살렘 성전”의 처지를 면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의 공동체가 깊은 잠에서 깨어나기를 원하는가? 이 치욕스러운 시대 속에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나타나기를 소망하는가? 정녕 이 민족이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는가? 오래도록 무릎을 꿇어라. 교회가 “기도의 집”이 되게 하라. 기도가 여러분의 신앙 인격의 특징이 되게 하라. 여러분이 다시 하나님을 섬기기로 결심할 때, 여러분의 공동체는 깨어날 것이며, 교회는 영광스러움을 회복할 것이다. 조국의 교회들이 “그 백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될 때, 강퍅한 이 불신의 시대, 강철같이 굳은 이 백성들의 뺨에도 십자가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감격의 눈물이 흐르게 될 것이다. 민족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고, 세상은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하여 교회의 선포 앞으로 나아올 것이다.
“내 집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예수님의 외치시는 이 음성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결단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