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죄죽임 (2)
녹취자 : 장미연
중생, 칭의, 영화와 같은 것들은 인간의 협력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독력적(monergism) 작용이라고 말합니다. 성화, 회개, 회심과 같은 것들은 협력적(synergism) 작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작용인(efficient cause)과 도구인(instrumental cause)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전자는 어떤 사태에 대해 작용을 한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후자인 도구인은 그것이 작용하도록 사용될 원인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은혜이고 성령이며, 후자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믿음을 사용하셔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구원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사용하셔서 우리가 성화될 때 이렇게 자기도 성화되고 싶은 사람의 마음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성령이 역사하셔서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데 자기가 그렇게 되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과 정신과 의지가 도구로 사용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자유의지, 이것은 기독교 신학에서 굉장히 하나의 중요한 신비에 속합니다.
은혜 그 자체가 여러 의미가 있는데 첫 번째 의미는 구원의 길이고 두 번째 의미는 객관적인 호의이고 세 번째 의미는 사랑의 감화입니다. 이 자체가 힘입니다. 사랑의 감화는 의지에 힘을 주어서 예전에 할 수 없었던 선한 것을 하게끔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의지 사이에 신비한 조화의 관계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도 설명했지만 인간이 악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고 인간이 스스로 결정해서 악을 행하는 것이고 선을 행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인간 자신이 선을 행하기에 무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은혜를 주실 때 그 방식이 마치 도저히 하기 싫은 사람을 강제로 손을 빼서 행하시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화) 예를 들어서 내가 이 사람의 손을 들어서 이 형제를 타격을 했습니다. 이빨이 부러졌습니다. 이 형제에게 폭행의 책임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폭행죄가 없습니다.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이렇게 잡은 것을 구실 삼아서 자기가 때렸다면 당연히 책임이 있겠지요. 그러나 내가 때렸다면 폭행에 책임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법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는 굉장히 신비합니다. 설명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힘을 주십니다.
(예화) 그래서 존 화이트라는 사람이 이것을 아주 감명 깊게 설명을 했는데 시골에서 장작을 패봤지요? 장작이 이렇게 됐잖아요. 맨 처음에 도끼를 가지고 장작을 때립니다. 그런데 이렇게 놓고 장작을 때려서 떡볶이처럼 장작을 자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에 맘먹고 한다고 하면 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안 합니다. 대게 놓여 있잖아요. 장작을 잘 자르는 사람은 봅니다. 옹이가 있는 쪽을 때리면 안 됩니다. 옹이가 없는 쪽. 약간이라도 틈이 벌어진 쪽을 놓고 이 지점을 내려치는 겁니다. 이런 각도로. 45도 각도. 그러면 틈이 벌어지겠지요. 몇 번 내려치면 이게 쫙 하고 갈라지잖아요. 중요한 것은 결을 보고 자르는 것입니다. 생선을 회를 뜰 때에도 결을 보면서 잘라야하고 고기를 썰 때도 결을 보고 잘라야지만 맛있습니다. 왜냐하면 결을 어긋나게 자르면 식감이 굉장히 질기게 느껴집니다. 특히 소고기 같은 것이요.
똑같이 하나님이 회개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회개할 수 있게 만들어 주십니다. 성화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성화되게 하십니다. 자기가 끊임없이 성화되고자 노력해야 되지만 그것으로 성화된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책을 한 권 주고 너무 많이 물어 본거 같은데 좀 이해 안 가더라도 꾸준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오늘 총신 신대원 학생들이 존 오웬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해서 오늘 강의하러 밤에 가요. 인터넷에 들어가 보면 존 오웬에 대해서 제가 한 강의가 있습니다. 존 오웬의 죄에 대해서 강의했는데 1시간 쭉 들으면 여러분들이 존 오웬의 책을 놓고 잘 이해하지 않는 것을 몇 칠 동안 씨름한 걸 빨리 방향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다음에 제가 쓴 책 “죄와 은혜의 지배”를 정독하면 인생이 바뀔 것입니다.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세요? 요새 무서운거 있으세요? 두려운거 있어요? 무엇에도 두렵지 않고 누구와도 헤어질 준비가 되어있고 아무리 홀로 나를 내버려 두어도 외롭지 않고 아무리 많은 사람 속에 나를 섞어 두어도 혼란스럽지 않고 내게 모든 것을 가져가도 아까운 것이 없고 또한 모든 것을 갖고 싶어서 노력하는 사람. 죽음의 위협이 자신을 기다려도 아무것에도 충격 받지 않는 사람. 되고 싶지 않으세요? ‘쫄다’라는 말은 표준어는 아닙니다. 속어입니다. ‘두려워하다’ 왜 그럴까요? 자기 자신이 주체적이지 않기 때문이고 자신의 인생을 쓰다 버린 것처럼 인생을 살면 안 됩니다. 작품처럼 살아야 합니다.
요새 컴퓨터 최신 기종이 뭐예요? 아이폰은 최신 기종이 뭐예요? 11이 나왔지요? 그런데 옛날에 7나왔을 때 사람들이 열광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7은 떨어뜨려도 주워가지도 않아요. 6은 업그레이드도 안 됩니다. 그게 상품의 특징입니다. 상품은 새것일 때만 진가를 발휘하지 조금만 있으면 더 높은 사양의 훌륭한 것이 나옵니다. 이 폰에 들어있는 컴퓨터의 칩의 용량이 아폴로 11호가 달나라 갈 때 슈퍼컴퓨터의 용량입니다. 믿어집니까? 1기가도 안 됩니다. 지금은 512기가.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여러분 시대 때 테라기가 핸드폰이 나올 겁니다. 1000테라 금방 나올 겁니다. 상품입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조품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진품의 가치가 높아지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 작품은 값으로 환산 할 수 없는 작품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상품과 같은 인생을 살면 언젠가는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늙고 힘없고 지식을 습득할 수 없게 되고. 떨어지는 겁니다. 그렇게 없어질 것들은 인생을 본질로 생각하며 살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수저 물고 태어났으면 그 돈을 가지고 있는 동안에는 진가를 발휘하겠지요. 남자나 여자나 아름다우면 당연히 기회가 많을 거 아닙니까? 어차피 다 늙어서 결국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자기를 상품과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작품과 같은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도 흉내 낼 수 없고 전무후무한 작품 같은 인생을 살다가 죽는 겁니다. 그것이 반드시 유명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명해지는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거와 상관없이 나는 나로서 뚜벅뚜벅 내 인생을 걸어가는데 그 인생을 작품처럼 사는 여러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주 욕망의 노예가 되고 젊어서부터 쾌락을 추구하고 야비한 삶을 살고 그렇게 자기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 결국 작품과 같은 삶을 살 수 없고 상품가치도 훌륭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보다 더 훌륭한 상품의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C. 죄의 속임: 실재(realitas)와 표상(phantasmata)
자, 43페이지. 실재와 표상의 문제가 나옵니다. 실재는 영어에서 이야기하면 리얼리티입니다. 실재는 있는 것입니다. 철학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하나 넣어 놓으면 일평생 편하게 사는 겁니다. 실재는 있는 것입니다.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 있는 것이냐면 크기, 색깔, 모양, 부피를 가지고 있는 것만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에 예를 들자면 사랑, 그것은 사실 여기서 만질 수 없잖아요. 그런데 실재하는 것입니다. 그런 개념도 실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냐하면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는데 여기에서 이 말을 설명하면서 사용되는 의미는 이게 진짜입니다. 이건 그냥 가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 다음에 실재가 진짜이고 본질과 관련될 것이라면 표상은 가짜이고 현상 혹은 착시와 관련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판타지라는 말이 나온 겁니다. 환상, 환영이라는 말입니다. 판타스마타의 복수가 판타스마입니다. 이건 뭐냐하면 표상입니다. 표상을 번역할 때에 여러 뜻으로 표현하지만 ‘현상, 겉모양’이라는 뜻입니다. 표상과 실재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표상을 만들어 내는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욕망입니다. 욕망을 어떤 실재에 투사시켜서 그것을 사실 이상의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표상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 표상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가치 있는 것을 버리고 가치가 없는 것을 찾게 만드는 것이 표상이라는 것입니다.
(예화) 여기 이렇게 벤치에 누가 놓고 간 겁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인 없으세요?” 찾아도 없습니다. 5백만 원짜리 다발이 꽉 찬 겁니다. 여기 꽉 차면 얼마나 될까요? 한 2억 원쯤 되려나요? 어쨌든 꽉 찼습니다. 그렇게 발견했을 때 이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 2억 원이네. 꺼내서 만져보니까 빳빳한 새 돈입니다. 이 사람은 어떻게 행동할까? “경찰서에 가져다줍니다.” 이 사람은 크게 돈에 대해서 욕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돈에 대해 욕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남의 돈을 착취하면서까지 그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 돈이 남이 두고 간 돈이 되는 것입니다. 표상이 있어요? 없어요? 표상 없습니다. 참고로 2억 원을 주워서 경찰서에 갖다 주면 주인이 나타나면 10퍼센트를 그 주인이 법적으로 그 사람에게 주게 되어 있습니다. 사례금으로. 1년 4일 동안 안 찾아가면 전체를 여러분에게 줍니다. 세금이 40프로 정도 됩니다. 한국은행에서 줍니다. 제가 60만원인가를 40년 전에 주워서 주고 그 돈을 제가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표상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돈을 봤어요. 아무도 없습니다. 샤넬백이 생각이 납니다. 너무 친구들이 가지고 다녀서 너무너무 샤넬백이 사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봐야 그거 5백만 원밖에 안 됩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열어보니까 럭셔리 해외여행이 생각이 납니다. 이 여자의 마음에는 뭐가 많은 것입니까? 욕망이 많은 것입니다. 그 욕망이 표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표상이 산출되었던 대표적인 인물이 어리석은 부자입니다. 곡식을 거둬들이는데 대풍년이 들었습니다. 도저히 창고에 이걸 더 둘 곳이 없는 것입니다. 고민에 빠졌습니다. ‘아, 좋은 생각이 있다. 창고를 크게 짓자. 그리고 이것을 보관하자. 그리고 매일매일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내 영혼아’ 이러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취하면 이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그 사람도 결국은 즐거움 혹은 쾌락이라는 표상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 표상을 꼭 범죄를 구성하는데만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서 공부를 합니다. 공부를 하고 그 다음에 뭐가 될까? 그것도 표상일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뭘 목표로 하겠지요. 예를 들어서 1급 정교사 자격증을 따서 공립학교에 교사가 되어서 61세까지 계속 월급을 타고 싶다. 그럴 수 있지요. 굉장히 좋은 선택이잖아요. 그런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 결혼에 있어서도 상당히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것입니다. 백수로 있는 것 보다. 그것도 서울시내에 있는 강남에 있는 학교를 들어갔다면. 좋은 거잖아요. 그런데 그게 어떻게 인생의 목표일 수 있느냐?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지. 운동선수들이 스타킹을 신고 운동화가 굉장히 좋은 것. 이봉주가 마라톤 한 번해서 쓸 때 신는 9천 8백만 원짜리입니다. 맞추는 겁니다. 대회에서 한 번 쓰면 못 씁니다. 그런데 그걸 하는 이유가 뭐냐면 그 자체로 폼 잡기 위해서 만드는 게 아니라 일등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이 교사가 되고 그 다음에 돈 많은 집에 시집을 가고 아니면 사업을 하고 아니면 장사를 하고 선교를 하고 뭐하고 하는 것도 좋은 인생을 살기 위한 하나의 수단입니다. 살기위한 하나의 방편입니다.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양상을 통해서 얼마나 자기가 좋은 삶을 사느냐에 관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뭐가 끊임없는 표상을 불러일으킬까요? 표상의 근원.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이 끊임없이 표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일 경우에는 표상을 끊임없이 벗겨 버립니다. 그 표상을 끊임없이 벗겨 버리고 표상이 사라지고 나면 본질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사랑일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 세상은 그냥 객관적인 세상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거역하며 자기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데 세상 자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결국은 세상을 사랑하고 만족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의 돈을 가지고라도 명품 백을 샀다. 그렇게 갖고 싶었다라고 하는 것은 명품 백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명품 백을 들었을 때 만족해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 논리가 별로 없습니다. 아까 이영재가 이야기한 뭔가 논리적으로 죄가 다가온다고 하는데 자기 사랑일 경우에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어떤 예쁜 것을 봤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거의 좀비처럼 똑같이 그런 식으로 자기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노예가 되다 시피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야 합니다. 자기사랑은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를 만족시키기 때문에 그걸 하는데 자기가 왜 만족하는지도 모릅니다. 논리 모릅니다. 정교하게 자기가 왜 만족을 하게 되는지를 모릅니다. 설명 듣고 싶지도 않습니다. “너 왜 그렇게 하는데?” “뭐 내가 좋으니까.” “왜 너는 사랑해서 안 될 사람을 사랑하니?” “내가 좋기 때문에.” 논리가 필요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관점이 멀어질수록 인간은 상대적으로 표상에 사로잡히기에 아주 좋은 조건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이라는 것이 그런 표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표상을 깨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개가 있는데 한 친구가 이걸 가지고 가서 한 다발 꺼내서 샤넬 백을 하나 사고 구찌 구두를 하나 사서 신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돈이 남아 있어서 럭셔리 여행을 꿈꾸는데 옆에 있는 자기보다 훨씬 더 가난한 애가 경찰에 전화를 했습니다. 이거 여기 있으니까 와서 가져가시라고 전화를 한 겁니다. 그 모습을 보니까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 판타스마에 걸렸다는 것을 생각나게 해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의 가치입니다. 아무도 두려워하는 사람 없이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겁내지 말고 무엇에도 충격 받지 말고 ‘이 세상 내가 가엾어 하는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내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화) 선생님 이상해요. 병원에 좀 가봐야겠네. 그래서 일찍 조퇴하고 갔는데 “암 말기입니다. 한 달 정도 남으셨습니다. 병원에 오실 필요 없고 집에서 드시고 싶은 것 드시면서 인생을 정리하십시오.” 이야기를 어느 저녁에 들어도 나를 흔들어 놓을 수 없는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뭐든 게 잘 될 거야.” 거짓말입니다. 그런 사탕발림에 속지 마십시오. 끊임없이 인생은 꼬이게 되어있고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저 원래 영문과 교수가 되는게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대게 꼬였습니다. 한 두 번이 아니라 수없이 꼬였습니다.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꼬였습니다. 그래서 여기 서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을 내 맘대로 안 되게 해주신 하나님을 오늘 아침에도 찬양했습니다. 인생은 꼬이는 게 겁나는 게 아닙니다. 뭐냐 하면 무서운 게 겁나는 것입니다.
적용을 하면 결국에는 이런 표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성경에서 얘기하는 총명입니다. 지식과 총명이 이 표상에서 벗어나게 해줍니다. 표상은 욕망의 문제와 관련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표상이 궁극적으로 해결되는 가장 좋은 길은 저런 표상을 내 안에 수시로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사랑의 싹을 끊임없이 자르면서 사는 것입니다. 싹이 잘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이 아닌 다른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 그 사랑의 싹을 잘라내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예를 들자면 주전자가 있다고 칩시다. 빈 주전자입니다. 거기서 공기를 모두 빼버리라고 지시를 받았을 때 빼버리는 방법은 뭐예요? 봉해놓고 아무리 불어도 빨아들여도 안 됩니다. 물을 부으면 공기는 그냥 나가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울 때 우리가 이러한 표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표상이라고 하는 것이 나는 표상에 시달리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는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없습니다.
(예화) 제가 회심한 해에 있었던 일인데 새벽기도가 4시 30분이었습니다. 아주 굉장히 가난한 동네였습니다. 아주머니들이 풀빵 만들어서 팔고 길거리에서 고구마 구워서 팔고 그러면서 장사를 합니다. 요즘 같으면 코트도 입고 오리털 파카도 입고 그러잖아요. 너무 추운데 사람들이 그런 외투를 번듯하게 입고 다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덜덜 떨면서 왔는데 밤 11시까지 일하고 새벽기도도 갈 정도니까 얼마나 신앙이 뜨거웠겠습니까? 실화입니다. 찬송을 부르는데 이 여자가 자꾸 방석에 앉아서 좌로 이동을 하는 겁니다. 이상하다 그러는데 마지막 부른 찬송이 ‘우리들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찬송을 부르는데 이 여자가 막 땅을 치면서 회개를 하는 겁니다. 방석 밑에 5천 원짜리가 있었습니다. 새벽 기도에 믿음으로 살기 위해 나왔는데 저기 5천 원짜리가 떨어져 있는 겁니다. 계속 찬송 부르면서 그걸 딱 깔고 앉았어요. 그런데 하필이면 가사가 ‘나의 맘은 연약하여 범죄 하기 쉬우니 ’그래서 방성통곡하면서 회개 했습니다.
그렇게 믿음과 표상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위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언제나 인간의 일생은 믿음과 표상 사이에서 이미 나는 그 갈등을 끝냈다 그렇게 말할 수 없이 그렇게 끊임없이 살아 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이렇게 해서 45페이지까지 끝냈습니다.
IV. ‘죄 죽임’이란 무엇인가?
죄 죽음이란 무엇인가? 지난번에도 설명했지만 이제는 crime이 아니고 sin입니다. 전자는 형법상 죄를 지은 것입니다. 형법 혹은 민법상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게 crime입니다. 이것은 사회적인 범죄를 구성 합니다. sin은 내면의 죄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 하나님을 위한 신앙의 자리가 어디일까요? 마음입니다. 신앙의 자리가 마음입니다. 그럼 물어보겠습니다. 죄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마음. 따라서 죄와 신앙 혹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끊임없이 마음에서 풍요하고 가장 넓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싸웁니다. 우리가 인식을 못 합니다. 인식하려면 상당한 지식의 빛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화) 여러분들이 텔레비전에서 가끔 조명탄 쏘는거 보잖아요. 구조하거나 적이 침투했을 때 조명탄 쏘잖아요. 눈부시도록 밝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됩니다. 떨어져가지고 불과 한 20초? 30초도 안 될 겁니다. 천천히 떨어지면서 빛을 발합니다. 그런데 한 대 쏴가지고 안 되고 수십 발 쏴야지만 어느 지역에 비추어 주고 때로는 수백 발을 쏴야지만 빛을 내는데 대낮처럼 환하게 비추는 겁니다.
결국 그 어두움의 일부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죄와 신앙이 끊임없이 싸웁니다. 이 죄라고 하는 것의 정체가 뭐냐하면 죄를 짓는 이유는 자기가 좋아하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도 사랑이고 이것도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건 하나님 사랑이고 이건 자기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내 마음에 지배적인 위치에 계실 것이냐 내가 지배적인 위치에 있을 것이냐의 끊임없는 갈등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데 이것이 결국은 죄와 신앙이고 혹은 죄와 은혜의 갈등이고 본질적으로는 자기 사랑과 하나님 사랑의 갈등입니다.
그러면 왜 죄 죽임이 필요한가? 사실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은 논문입니다. 제가 그래도 상당히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신학 공부를 하고 책도 많이 읽었던 땐데 어느 해에 말씀 준비하러 금요일마다 강원도를 갔는데 숙소에서 깨끗하게 씻고 앉아서 논문을 읽었는데 두껍지도 않습니다. 한 30페이지 40페이지 정도 밖에 안 되는데 읽었는데 새로운 세계를 봤습니다. 그래서 온 몸이 부르르 떨린다는 그런 전율 같은 경험을 나는 그때까지 책을 읽었지만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렇게 빛나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신학자를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유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옛날 내가 읽은 많은 신학자들이 나를 고치는 방식이 마루위에 눕혀놓고 부엌칼로 수술을 하려고 하는 거였다면 이 사람은 최신 수술 기구를 놓고 우리 몸에 대해서 설명 하면서 나 자신의 몸을 보여주면서 수술을 하는 건데 헤아릴 수없이 수많은 칼들로. 수술할 수 있는 칼들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런 전율에 가까운 중독이었고 난 아직도 이 정도로 인간에 대해서 심오하게 이해하고 있는 깊이 면에 있어서. 인간을 그렇게 깊이 이해하고 있는 그런 철학자를 못 만났습니다. 여러분들이 읽는다면 대박 일겁니다. 나는 안 읽으리라고 확신합니다. 영어가 우선 읽히질 않고 400년 전에 그 글을 영국사람 보고 읽으라고 해도 무슨 소린지 잘 모를 겁니다. 그런데 코페르니쿠스에게 발견이 되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 충격이 한 2년 이상 갔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부터 수없이 그의 책을 읽으면서 전집이 16권인데 14권정도 읽은 것 같습니다. 10년 정도 걸렸습니다. 읽으면서 그의 세계를 알게 되었지요. 세상에서 오웬을 전공한 누구와 마주해도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해서 나는 내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로 오웬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러한 죄 죽임을 사람들은 거의 모릅니다. 그리고 관심이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몸에 해로운 음식을 마구 먹어대고 자기 안에서 지금 심각하게 병 들었다는 암의 증거들이 생활 곳곳에서 나타나는데 이게 왜 나타나는지 이미 대장암이 번져서 계속해서 혈변이 나오는데 ‘왜 내가 변 볼 때마다 초콜릿이 쏟아지지?’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심각성을 모릅니다. 그러다 어느 한 순간에 죽는 겁니다.
IV. 죄 죽임의 필요성: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그럼 왜 mortification이 필요한가?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대게 두 가지 자원들을 필요로 한다고 그랬지요? 우리의 육체는 지상의 자원을 필요로 하고 우리의 영혼은 천상의 자원을 필요로 합니다. 기원 자체가 몸은 지상에서 왔고 영혼은 하늘 하나님께로 왔기 때문에 천상과 지상 자원을 필요로 하고 이것을 동등하게 누려서 육체도 영혼도 모두 만족한 상태가 되는 것이 구원의 모습입니다. 가난한 사람도 열심히 돕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의 욕망은 육체에 치우칩니다. 얼마나 현란한 음식을 먹고 얼마나 우아하게 입고 사람들의 눈에 띄고 얼마나 좋은 음료를 마시고 결국 이 모든 것들은 대유법의 일종으로써 우리 육체의 만족을 떠나 모든 걸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우리의 온 관심이 쏠려 있어서 우리의 인생의 본질적인 목적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본질적인 목적이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이 세상에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식하지 않습니다. 그런 거에 관심이 없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남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나도 저렇게 되어야 될 텐데 될 수 있어? 결국엔 못 됩니다. 된다고 하더라도 별거 아니라는 사실을 마지막에 깨닫습니다.
구원파로 넘어간 가수 박진영. 박진영이 나와서 인터뷰를 하는데 26살 될 때까지 20억을 버는 게 꿈이었다고 합니다. 미친 듯이 일해서 20억을 손에 넣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었대요. 난 그랬습니다. 쟤가 언젠가 예수 믿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랬는데 구원파가 됐습니다. 구원파 성경공부 가르치러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그렇게 허무할 수가 없더라는 겁니다. 한때 섹스를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서 매스컴에서 문제가 된 적도 있었잖아요. 인간의 사고라는 것이 갈 길을 못 찾으면 그런 쪽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허무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을 다 소유하고 누림으로써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것을 가져본 사람들은 더 높은 목표를 가짐으로 허무를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재벌 3세, 4세들이 한결같이 마약을 빠지느냐고 했잖아요. 결국은 인생의 허무를 이길 수가 없는 겁니다. 해보는 겁니다. 해보는데도 그 허무를 극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은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그런데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얼마나 일생에 걸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으며 사느냐 거기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죄를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서 회복해 가는 것입니다.
A. 성화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하면 많이 들어봤지요? 형상은 질료와 함께 등장합니다.
(예화) 여러분 어디를 가든지 간에 안 믿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을 볼 때 참 멋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품위가 있고 돈이 없어도 돈이 있는 사람에게도 꺾이지 않는 어떤 위엄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절대 굽신 거리지 말고. 여기에 똑같은 종류의 빵 반죽이 다섯 개가 주어졌습니다. 다섯 명의 제빵사가 자유롭게 빵을 굽는 겁니다. 내가 이걸 떼어내서 그걸로 코끼리 빵을 만들었습니다. 이 사람은 고래 빵을 만들고 옆에 있는 사람은 꽃 빵을 만들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물을 타서 풀빵을 만들었습니다. 이 밀가루 반죽은 질료(material)입니다. 형상(form)은 밀가루를 담아 찍은 틀입니다. 코끼리를 닮은 그 위에 달콤한 크림이 얹어진 빵을 만들어야지 라고 하는 또렷한 관념이 형상입니다. 그 질료위에 형상이 부어짐으로써 그 질료는 드디어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와서 구체적인 형체를 갖춘 개별 사물이 되는 것입니다. 코끼리 빵, 고래 빵, 꽃 빵, 저 사람은 풀빵이 나오는 겁니다. 그게 형상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형상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수많은 물리적인 것들을 만납니다. 예를 들면 돈을 벌 기회를 얻고 이성을 만날 기회를 얻고 여기서 명예를 얻게 될 기회를 얻고 여기는 자기가 거주지를 바꿀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주어집니다. 모두 다 질료입니다. 이 사람이 이 속에 형상은커녕 똥만 들어있으면 이 돈 갖고 죄 짓고, 쾌락의 도구로 삼고, 교만의 도구가 되고, 자기 이름을 날리는 쪽으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존재자체가 민폐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것이 세계평화에 이바지 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묻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고 싶으냐? 이것입니다. 내가 그런 삶을 살므로 남에게 칭찬을 받고 스팩을 쌓아서 대학 진학하는데 도움을 얻고 고등학교 때 그렇게 해서 대학에 학점에 유리하게 한 주 올라가고 하는 그 문제가 아니라 진짜 그렇게 살고 싶으냐? 묻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돈이 있으면 죄를 짓고 이성을 만나고 쾌락의 도구로 삼습니다. 이렇게 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없고 똥만 들어있으면 이것을 만나도 죄를 짓고 없으면 없어서 죄를 지을 거 아닙니까? 강도짓을 왜 합니까? 자기가 충분히 돈이 있는데 왜 칼로 사람을 위협하고 돈을 훔치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유가 있어도 죄를 짓고 여유가 없어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상을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표는 바로 그 하나님이 주신 인간이 참 인간다운 형상을 이루어 가는데 우리의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며 사는 것입니다.
(예화) 우리 교회에 비혼인 자매들이 너무 많습니다. 나는 화나는게 뭐냐면 시집 못 간 것을 자신이 무슨 커다란 가문의 죄를 지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느냔 말입니다. 자매가 어느 교회를 갔는데 그 교회에서 목사님이 자기를 쳐다보면서 한숨을 지으시면서 너희들이 시집을 못 간게 다 내 죄다. 그러시더래요. 목사님의 죄가 저렇게 큰데 내 죄는 얼마나 클까? 생각을 했는데 열린교회 왔습니다. 결혼을 안 한 것. 삶의 한 양상일 뿐이지 인생에 있어서 본질이 아닙니다. 결혼 한 것. 그것도 인생의 본질이 아니라 양상일 뿐입니다. 82년생 읽었습니까? 읽으십시오. 책을 읽으면서 화가 났습니다. 저는 페미니스트는 아닌데 성 평등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입니다. 너무 화가 나는 겁니다. 여자를 어떻게 이렇게 졸로 볼 수 있나 사회 고발하는 일은 받아들일건 받아들이는데 너무 화가 났습니다. 너무 많은 크리스찬 여성들이 그 영화를 보면서 공감을 하는 겁니다. 12월 14일 날 우리 교회에서 북 콘서트를 하기로 했습니다. “김남준 목사가 해설하는 82년생 김지영” 어떻게 읽고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없으면 웃으면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행복이 아닙니다. 행복은 자기만 행복하다고 행복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45페이지 끝냈습니다.
B. 죄 죽임의 필요성
46페이지. 구체적으로 그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될 것이냐. 첫째는 죄의 본성과 작용의 힘입니다. 겸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물의 성질의 그러함. 그것이 본성입니다. 다시. 본성이란 어떤 사물의 성질의 그러함. 동양 철학에서 특히 동북아 철학에서는 자연이 두 개가 있다고 봅니다. 인간 밖에 있는 자연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자연입니다. 자연이라고 말했을 때 스스로 그러하다 표현으로 기록을 합니다. 그 자연이 인간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게 본성입니다.
(예화) “무슨 색깔 좋아해요?” “핑크색이요.” “그래서 립스틱을 핑크색을 칠 했나요?” “네” “왜 핑크가 좋아요?” “기분이 좋아져요.” “왜 핑크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보라색을 보면 기분이 안 좋아져요?” “보라색을 보면 안 좋아지고 핑크색은 저한테 색깔이 잘 받고 환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이유가 아니잖아요. 계속 현상을 설명하고 있고. “왜 모든 색깔보다 핑크가 좋아요?” 질문하면 이렇게 대답 합니다. “제가 좀 원래 그래요.” 이게 답입니다. 그것이 본성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죄 죽임이 필요합니까? 죄의 본성 때문입니다. 죄가 무슨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죄가 가지고 있는 본성은 그것의 품고 있는 것에 의해서 포장되지 않은 것. 그래서 죄는 그 본성 자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이 죄의 본성입니다.
(예화) 제가 손녀 하나, 손자 하나가 있는데 손녀는 우리나라 나이로 6살이고 손자는 4살입니다. 저는 결혼하고 7년 만에 아들을 낳았고 아들은 29세에 아이를 낳았습니다. 저는 몰랐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주를 너무 좋아한다고 해서 그 얘긴 알았는데 손녀를 낳았는데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겁니다. 아이들하고 잠깐 같이 살았는데 집에서 새벽기도 나오면 집에 들어가는 법이 없습니다. 아주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저녁 때 퇴근하거나 아니면 밤늦게 까지 일을 하거나 그랬는데 점심 때가 되면 너무 보고 싶어서 안 들어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점심 먹으러 간다고 핑계를 대고 들어갔습니다. 아이가 그림 같이 생겼었습니다. 할어버지를 그렇게 좋아합니다. 끌어안고. 잠깐 동안이지만. 그런데 모든 걸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사랑하니까. 그런데 얘가 독감이 걸렸습니다. 나는 몸에 저항력이 굉장히 없는 연약한 상태였거든요. 너무 예쁜데 우리 집 사람이 경고를 주는 겁니다. “얘 독감 걸렸으니까 독감 걸릴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그러는데 예쁜 아이가 나를 그런 식으로 간염 시킬 거라는 걸 몰랐어요. 그 연약하고 예쁜 어린 아이가 “할어버지”하고 볼에다가 뺨을 비비고 뽀뽀를 하는데 즉시 감기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2주 동안 감기가 안 낫는데 죽는 줄 알았습니다. 링거를 달고 살다시피 했습니다.
죄가 괴물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게 아니라 그렇게 다가오는 겁니다. 그 아이에게서 그런 균이 나와서 나를 2주 동안 거의 링거로 살게 할 거라는 건 상상치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죄는 위장의 천재입니다. 죄의 본성 자체가 무엇으로 위장하든지 간에 목표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인간을 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살지 못하도록 최대한의 작용을 인간에게 가하는 것이 죄의 목표인 것입니다. 그것을 선교적으로 끊임없이 확산시켜서 더 많은 사람이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살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죄의 목표입니다. 그런 죄의 본성 때문에 죄를 죽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중생의 본질 때문입니다. 중생의 본질과 소명 때문입니다. 중생의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 아닙니까? 위로 태어난다, 라는 뜻도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태어난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태어난다’라고 하는 것은 뭘 의미하냐면 생명체가 태어나는 것을 의미하잖아요. 우리의 영혼이 ‘거듭난다’라고 하는 이 중생은 의미 자체가 ‘생명을 갖게 된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당연히 살아남길 원합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신 새 생명의 본질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그 생명대로 살아남기 원할 뿐만 아니라 그 생명도 우리 안에서 점점 더 풍성해져서 선교적으로 이 생명을 확산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그 생명 때문에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중생의 본질입니다. 그 자체가 죄를 죽이지 않고는 그런 생명을 충만하게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화) 예를 들면 어린아이를 키울 때 어린 아이는 저향력이 약하고 모든 게 약하잖아요. 다 자란 다음에는 엄마에게 “엄마 그릇에 뭐가 묻은 거 같아.” “아유, 그냥 먹어. 괜찮아.” “엄마 이거 내가 너무 매울 거 같아.” “괜찮아. 먹어. 아무 상관없어. 먹어.” “엄마 이거 덜 익은 거 같아.” “그거 덜 익은 게 더 맛있어. 그냥 먹어.” 그런데 아이들은 그렇게 안 먹습니다. 갓난아이들에게 꿀을 먹이면 죽습니다. 치명적입니다. 그리고 강아지에게 먹여도 안 됩니다. 개는 죽을 때까지 꿀을 먹으면 안 됩니다. 그 이유가 꿀 속에 균이 있습니다. 꿀 속에 박테리아 같은 균이 있습니다. 그게 우리에게 유익하게 하는 균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의 몸으로써는 그걸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게 그 속에 들어가서 변종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꿀을 먹이면 안 됩니다. 그러면서 아이가 자라잖아요.
똑같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주셨지만 끊임없이 이 생명이 번성하기 좋은 조건을 만들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잘 자랄 수 있는 생명의 조건으로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환경과 마음이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회 가보면 한 일주일 동안 금식하면서 기도원에 있으면 진짜 죄를 지을 일이 훨씬 줄어듭니다. 핸드폰도 안 터져, 텔레비전도 없어, 잡지도 물론 없고, 가지고 간 거라곤 성경 하나 밖에 없습니다. 금식하면서 기도하니까 죄를 지을 힘도 없습니다. 맑아지는 게 느껴지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적 생명의 본질도 그렇게 보호를 받음으로써 번성할 수 있기 때문에 죄를 끊임없이 죽여야 합니다. 마치 뭐와 같냐면 곡식을 쭉 심었습니다. 내버려두면 되잖아요. 그런데 농부는 끊임없이 비오는 날인데도 우산을 쓰고 가서 물이 다 빠지면서도 벼 사이사이에 있는 잡초를 손으로 다 뽑아내잖아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이 있으면 실한 곡식을 맺을 수가 없습니다. 양분을 빨아들여서. 다 뽑아내는 것입니다. 하루만하고 끝나는게 아니라 끊임없이, 끊임없이 매일매일 그 일을 반복하면서 결국 이 벼는 아주 실한 벼로 자랄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 죽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는 사람이 살면 영적인 생명은 계속 고사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어느 순간에 은혜를 받고 나면 충만한 기도 생활 하고 싶잖아요. 그런데 시작 하면 안 되잖아요. 왜 안 되는지 비밀을 모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죄가 무성하기 때문에 마음을 먹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죄를 죽이는 삶은 어떻게 해요? 어떻게 보면 대게 피곤한 겁니다. 왜냐하면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깨닫는다고 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비교를 하자면 죄는 어둠속에 떨어진 물건이고 깨닫는 것은 그것을 인지하는 것인데 칠흑 같은 어두움 속에 떨어지는 물건이 거기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인지할 리가 없지요? 그걸 인지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그 사물이 거기에 있다고 비추어주는 빛. 그리고 빛이 거기에 있어서 그걸 보여주어도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내가 그것을 그것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작용이 내 안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그분이 크리스천이었는데 해병대 사령관이었습니다. 별 셋입니다. 별 셋이 자기 집까지 운전병이 차를 타고 오는데 좀 늦게 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장관이 길 거리로 나간 겁니다. 길거리에서 자기 집으로 차가 들어오니까 길거리에 나가서 기다리는데 육군 중위가 앞을 왔다 갔다 하면서 경례를 안 하는 겁니다. 군대에서 중위와 별 셋의 차이가 어느 정도 됩니까? 감히 눈을 못 맞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평생 군대 다녀도 별 셋을 못 보고 제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별 셋이 왔다 갔다 하는데 중위가 계속해서 인사를 안 하는 겁니다. “어이, 중위” 하고 불렀습니다. 딱 보여주니까 별 셋이 보이는 겁니다. 그때서야 “충성” 하고 경례를 하는 겁니다. “자네는 내가 장군인데 자네 앞을 계속 왔다 갔다 하는데 왜 경례를 안 했나?” “장군님, 죄송합니다. 제가 여기서 여자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하도 안와서 기다리다가 여자 친구에만 눈이 팔려서 별 셋이 안 보였습니다.” 그럴 수 있다? 없다? 그럴 수 있다. 별 셋은 거기 있고 내 눈에 그걸 봤습니다. 그런데 이 안에서 인식 기능이 작동을 안 하는 겁니다.
인간이 그냥 생각 없이 살면서 죄를 깨닫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더구나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 죄를 깨닫는 것은 진리의 빛 없이 불가능한 것이다. 진리의 빛과 함께 그것을 포착하는 정신의 기능이 있을 때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를 죽이는 삶은 어떻게 보면 피곤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피곤하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그 일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피곤하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예화) 선물을 받았는데 아주 네모반듯하게 생긴 궤짝 같은 것이었습니다. 껍데기를 까보니까 이렇게 두꺼운 그림과 설명이 붙어있는 책인데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보디빌딩”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펼쳐보니까 어떻게 호흡을 하고 우리 몸에 있는 각 근육을 발달시키는 구체적인 행동 요령이 조직 신학 책 보다 더 상세하게 나왔습니다. 그렇게 두꺼운 조직 신학 책 많지 않을 거예요. 그런데 그걸 쓴 사람도 재밌게 썼을 거고 그것을 어떤 사람들은 아주 재미있게 읽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그렇지요. 나는 별로 재미없습니다. 왜냐면 건강을 위해서 헬스를 해야 한다는 것은 깊이 동의하지만 이 나이에 내가 어디 가서 상체를 벗고 그렇게 할 게 아니기 때문에 더군다나 올리브유를 바를 건 아니기 때문에 나의 관심을 끌지는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죄에 대해서 거룩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리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대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끊임없이 죄를 죽여야 되는 삶은 너무 비인간적이고 자유를 속박하는 삶이라고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끊임없이 죄를 죽입니다. ‘죽인다’라고 하는 것은 지난 시간에 설명했던 put to death 죽게 하는 것. ‘죽음에 두다’ put to death, mortification의 뜻입니다. mortal, mortify가 다 거기서 나온 겁니다. 그렇게 죽이는 건데 ‘죽인다’라고 하는 것은 ‘죄를 죽인다’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예를 들어서 우리들이 ‘어떤 동물을 죽인다’, ‘사람을 죽인다’라고 할 때는 목숨을 끊어버리는 거잖아요. 그런데 죄는 그런 사물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그 주체가 무엇이고 목적어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동사의 의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얘기 했잖아요. ‘여기에 마카펜이 있다’ 와 ‘내 안에 사랑이 있다’는 다르듯이 ‘죄를 죽인다’라고 할 때도 ‘사람을 죽인다’라는 말하고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인다’라는 의미는 ‘목숨을 끊는다’라는 의미보다는 ‘더 이상 활동을 못하게 하다’ 혹은 ‘그 영향력이 힘이 약화되어서 나로 하여금 죄를 짓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입니다. 신자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에는 자신의 죄를 완전히 제로로 만들 수 없습니다. 불가능 합니다. 예수님은 원래 죄가 없으신 분이었지만 우리 인간에게는 불가능 합니다. 누구에게나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어느 정도 크기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긴 합니다. 죄를 죽이는데 끊임없이 성경 말씀을 들으며 자기 죄를 깨닫고 그 죄를 회개하고 다시 은혜를 받고 그 다음에 거기에서 벗어난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믿음으로 그렇게 살려고 하고 순종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끊임없이 자신의 죄를 죽이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가져다주는 유익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C. 죄 죽임에 대한 약속
우선 첫째는 가장 중요한 것은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히브리어에서 ‘샬롬’은 원래 ‘하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침에 빵집에 가서 ‘텐 샬롬’이라고 하면 빵집 주인이 온전한 빵 하나, 전체를 줍니다. ‘텐’은 ‘달라’는 뜻이고, ‘샬롬’은 온전한 하나입니다. ‘텐 미 하치’하면 칼로 빵을 절반을 잘라 주는 겁니다. 이처럼 ‘샬롬’이라는 것 자체가 아무것도 손상되지 않은 온전한 상태가 ‘샬롬’입니다. 그래서 ‘샬롬’이라고 하는 것은 ‘온전하다’라는 뜻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고 사람과의 관계가 온전하고 자연과의 관계가 온전하고 자신 안에서는 영혼과 육체가 온전합니다. 영혼 안에 있는 다양한 기능들이 조화를 이루어서 평화를 누리고 있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면, 정의에 대한 감각과 사랑에 대한 욕구가 조화를 이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대부부의 사람들은 깨집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은 사람들은 대충 묻고 가자는 겁니다. 잘못이 있어도 굳이 들추어 내지 말고 다 지난 거니까 묻고 가자고 합니다. 세월호 사고 난 지가 언젠데 그걸 다시 이야기 하냐고 합니다. 사랑 때문에 그런 게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감 넘치는 사랑은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서 갈등을 만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또는 진짜 정의감이 충만한데 사랑으로 균형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항상 정의감으로 포장된 원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 설명했잖아요. 정의감이 분노라는 핵심 감정의 조절 받을 때에는 마음속에서 ‘싹 쓸어버려. 다 죽여 버려.’ 이런 속삭임이 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게 ‘샬롬’입니다.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에이레네라는 말 속에 담겨진 것이 이것입니다. peace입니다. 라틴어 pax에서 왔습니다. 팍스는 전쟁과 갈등이 없는 상태가 팍스입니다. 죄를 죽이는 삶을 살 때에 죄 죽이는 것은 끊임없이 죄인데 본성에 반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이런 놀라운 평화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 그래서 천둥과 벼락이 쳐도 무섭지 않고 사자가 나타나서 ‘왁!!’해도 눈썹하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죄 죽이는 신자의 삶에 가져다주는 실재적인 유익입니다.
평화만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힘을 가져다줍니다. 힘은 사랑의 힘입니다. 셀린디온의 <The power of love>라는 유행하던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가 한 편의 아주 아름다운 시입니다. 헬렌 피셔가 부른 노래를 좋아하는데 헬렌 피셔를 치고 들어가서 power of love를 찍고 가사를 잘 읽어 보십시오. 그 뜻이 뭐냐면 사랑의 힘입니다. 이 사랑의 힘으로 모든 인생의 두려움과 남은 불안을 극복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 사랑의 힘이 우리로 하여금 그 모든 것을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대담함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래서 솔직히 말해서 세상에서 누가 그렇게 가슴이 터질 정도로 재미있는 일이 있어요? 묻고 싶은 게 그 재미가 삼일을 가요? 안 가잖아요. 그런데 이런 진리를 깨닫는 기쁨은 아무도 뺏어갈 염려가 없고 사라질 위험도 없이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개는 이런 일을 못합니다. 인간만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도 이런 일을 모릅니다. 신자인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책을 안 읽는 사람은 모릅니다. 책을 읽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진리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사는 기쁨입니다. 허무한 세월을 살았지만 이런 허무한 세월을 헤치며 살게 했던 힘이 바로 이런 진리를 깨닫는데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준 저 책은 전적인 나의 창작품입니다. 저 책을 삼일 만에 썼습니다. 그리고 각주는 책을 펼쳐놓고 쓴 게 아니라 내가 어디서 기억이 나는데 도용했다고 하면 안 되니까 ‘내 기억에 끝자락을 찾아가보자’하고 ‘아마 이 책에서 읽었을걸. 이 책에서 읽었을걸.’ 그러고 ‘찾아라.’ 하고 한 달 넘게 찾은 겁니다. 물론 그 중에 몇 줄은 나중에 책을 찾아서 본 것도 있지만 그러나 초본은 그냥 앉은 자리에서 삼일 만에 썼습니다. 그 자체가 우리 인생의 즐거움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강의 처음 들어온 날 부터 여태까지 나는 여러분들을 보면서 느낀 것이 도대체 이 강의를 들으면서 나의 강의가 최고의 강의라는 뜻이 아니라 이 중요한 문제들을 강의를 들으면서 이게 흥미가 없다면 나는 묻고 싶은 것입니다. 그럼 뭐가 흥미가 있느냐 물어보고 싶습니다. 두 번째 묻고 싶은 게 그 흥미가 네 영혼을 살리는 흥미냐? 라고 나는 묻고 싶습니다. 나는 상관없습니다. 1시간 동안 강의하고 끝나면 그만입니다. 여러분 다시 볼 일도 없을 겁니다. 아마. 나는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학교에 와서 2년, 3년 혹은 4년을 다니면서 강의 시간에 가슴이 뛰었던 적이 있습니까? 모두 내용이 별로여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그래서 그랬을까요? 나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엎드려 자도 되고 나가도 상관없습니다. 그 학생들 보면서 강의하지 않습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강의하는 내가 피를 흘리면서 살아온 깨달은 말씀이지 어느 책에서 한 줄 읽고 따라 사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의 모든 공부는 살기 위한 공부였습니다. 왜?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행복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나는 세상에 미련을 없애기 위해 이런 공부를 했고요 끊임없이 하늘나라에 대한 미련을 갖기 위해서 이 공부를 했습니다. 이 공부를 내 살점을 떼어서 여러분 입에 넣어주듯이 강의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세요? 예수를 믿으면 뭐 합니까? 안 믿는 사람이 훨씬 행복해 보이는 겁니다. 사실 그래요? 안 그래요? 많잖아요. 그럼 그걸 파고 들어가야 되잖아요. 하나님도 모르는 사람이 저렇게 행복한데 나는 하나님을 알고 예수 믿고 구원받아서 지옥에서 건짐을 받았던 내가 왜 이렇게 우울한 삶을 사는가? 나는 왜 이렇게 행복하지 않은가? 고민해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못 찾으면 여러분들은 예수의 복음을 전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 자기도 써봐서 효과가 없는 상품을 누구에게 선전을 하는 겁니까?
IV. 완전한 구원과 불완전한 완성 사이의 있는 인간
48페이지 4번으로 넘어 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죄를 끊임없이 죽여야 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불완전 하다, 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완전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확실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것은 이 세상이 모든 심판이 끝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고 구원 받을 사람들을 그 육체와 결합시켜서 영광 속으로 들어가게 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은 끝나는 겁니다. 그 때까지는 어떤 의미에서 과정입니다. 문제는 오늘 우리가 그 때는 내일일지도 아니면 우리 인생이 끝날 일지도 우리가 믿고 천년이 흐른 다음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어쨌든 분명한 사실은 오늘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이 여전히 구원 받았지만 죄에 시달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도 불완전하고 죄에 가득 찬 세상이라는 사실이 엄연합니다. 그 속에서 어떻게 하늘의 생명을 보다 더 충만하게 누리면서 내 인생을 하나님 앞에 행복하게 살 수 있겠느냐 그건 우리의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고 그 구원은 취소 될 수 없지만 그렇게 성실하게 성화생활에 힘쓰는 사람은 행복하게 하시고 개판 치면서 사는 사람은 불행하게 하심으로써 사람들은 불행을 통해 교훈을 받고 행복을 통해서 또한 가르침을 받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이렇게 죄를 즐기는 삶은 너무 복잡하고 비인간적인 삶이니까 내버려둬. 나는 나대로 살다 죽을 거야. 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그 삶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실제로 행복한 삶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요동치고 흔들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뭐가 달라지는 것이 있겠습니까? 만약에 다른 사람들이 여러분만큼 그 정도로 살아가면서 여기에 새로운 행복이 있다고 말하면 여러분들은 위선이라고 얘기 할 겁니다.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난 가장 중요한 사명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세상의 물질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행복하게 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6번에 언약교리는 생략하겠습니다. 집에서 읽어보시고요 다음 시간에는 51페이지 기도와 열렬함 나가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