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신학적 기초(1): 인간의 의존을 경륜하심
I. 천지창조와 의존관계
A. 하나님의 절대자유: 비의존적, 고유적 자유
B. 인간의 자유: 의존적, 비고유적
1. from coaction
2. from physical power
3. from slavery
C. 자연만물과 하나님께 대한 의존
무생물
식물
동물
사람
< the Pyramid of being>
II. 창조세계의 질서와 의존의 아름다움
창조세계 전체는 하나의 신적인 계획 아래 있으며 모든 사물들의 어울림의 질서는 곧 창조세계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아름다움이다. 우주적인 아름다움을 이루는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은 다음 세 가지 요소로써 이루어진다.
A. 미학적 질서
첫 번째 요소는 미학적 질서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들은 크기와 넓이, 모양과 색깔, 길이와 높이 등을 가지고 있다. 이것들은 만물이 창조된 사물로서 부여 받은 각각의 한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질료 상태에서는 이러한 것들이 없지만, 형상을 부여 받아 존재하는 사물이 될 때 이러한 한정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가시적 사물들은 다른 사물들과 어울리도록 창조되었으니, 그것들의 어울림을 통하여 연출되는 자연적 아름다움(自然美)은 하나님의 아름다움(神美)을 보여준다. 개별사물의 내적 상호교통이 구성요소 간의 어울림의 질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내적 영광(internal glory)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외적 상호교통은 다른 만물들과의 어울림의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외적 영광(external glory)을 드러내는 것이다. 사물의 가시적인 요소들을 통하여 다른 사물들과 이루는 어울림이 바로 미학적 질서이다. 이러한 미학적 질서의 완전성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가 성령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진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최고의 미학자로서 스스로 모든 아름다움의 기준을 정하시고 그것을 따라 세계만물을 창조하셨다. 이러한 자연세계의 미학적 질서는 도덕세계의 미학적 질서와 함께 하나님의 내적 영광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미학적 질서를 창조세계 안에 도입하셨다고 할지라도 인간에게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미적 감각이 없다면, 그 질서의 아름다움을 보고 창조주의 아름다움을 기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는 지성의 능력을 주셨는데, 이것은 사람들 안에 있는 공통미감(共通美感)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세계 안에 있는 미학적 상호교통의 질서들을 이해하도록 인간에게 부여하신 영혼의 능력이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개별본성에 따라 각기 다른 미감도 주셨지만, 또한 보편적으로 공통미감을 주셔서 자연세계 안에 있는 미학적 질서를 이해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움을 당신 홀로 바라보며 즐거워하지 않으시고, 인간들도 그러한 심미적(審美的) 희열에 동참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인간이 이해하기 원하셨으니, 이는 인간이 창조세계를 통치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위대함은 영혼이 하나님을 닮음에 있고, 영혼의 위대함은 창조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지성에 있다. 성령 안에서의 완전한 창조는 상호교통을 통하여 이처럼 완전한 미학적 질서를 도입하였다.
B. 역학적 질서
두 번째 요소는 역학적 질서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은 다른 사물들과의 역학적인 어울림을 갖는다. 크게는 태양과 달을 비롯한 천체의 운동에서 시작하여 작게는 생물체 안에 있는 세포나 물질의 분자 구조에 이르기까지 힘의 관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힘의 관계는 곧 역학적 관계이다.
사물들이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은 소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체성’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사물의 소성(塑性, solidity)에 대해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논문「존재에 관하여」(Of Being)에서 ‘물체의 저항하는 힘’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소성이라 함은 저항인데 접촉에 대한 저항이며 공간에 속한 어떤 부분들의 저항이다. 이것이 우리가 감관에 의해 소성에 대해 얻는 지식의 전부이며 확신하건대, 다른 어떤 방법에 의해서도 우리는 그 이상의 지식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소성은 또 다른 것이 아님이 앞으로 좀 더 충분히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운동이 없다면 저항도 있을 수 없다. 물체들 사이에 완전한 멈춤이 있을 때 물체는 다른 물체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물체의 소성이 단지 저항하는 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한 물체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요소들 간에 상호작용하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물체를 허물려는 힘이 있기에 저항한다기보다는 구성요소들 간에, 그것을 하나의 물체를 이루도록 결속하는 힘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저항력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그 사물과 다른 사물과의 관계에서 생각해보자.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일정한 궤도를 따라 돌고 있는데, 이는 태양에 대한 지구의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 달은 지구의 주위를 일정한 궤도를 따라 돌고 있는데, 이 역시 지구에 대한 달의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둘 사이에는 힘의 관계가 있으며 우리가 보는 조수간만의 차이 같은 것이 바로 이러한 힘의 작용에 기인한다. 이처럼 모든 물체는 다른 사물들과 힘의 작용에 있어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러한 힘의 관계들이 온 우주의 역학적 질서를 이루는 것이다. 미학적 질서가 가시적인 아름다움이라면 역학적 질서는 존재의 힘과 작용의 어울림이다. 성령 안에서 창조된 모든 사물들은 이처럼 완전한 역학적 질서 안에서 일치를 이루며 상호작용하고 있다. 이처럼 성령 안에서의 완전한 창조는 상호작용을 통하여 완전한 역학적 질서를 도입하였다. 모든 만물은 그 안에서 쉼을 얻도록 지정되었다.
C. 도덕적 질서
세 번째 요소는 도덕적 질서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들은 모두 이처럼 미학적 어울림과 역학적 어울림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탱하며 함께 작용함으로써 자연세계 안에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피조물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나 이 모든 자연적 질서 안에 있는 아름다움은 보다 더 궁극적인 목적을 가진 아름다움에 종속된다. 그것이 바로 도덕적 질서의 어울림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궁극적인 목적을 향하여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도덕적 목적을 위한 질서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러한 도덕적 질서의 어울림이 드러나는 곳은 이 세상에서 오직 인간 밖에 없다. 물론 인간이 그 질서를 이해하든지 못하든지 그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 질서는 엄연히 존재한다. 이는 마치 자연세계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이 그것을 보든지 보지 아니하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자연세계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는 도덕적 질서의 어울림을 따라 일정하게 행사된다. 그리하여 이 질서를 이탈하는 악한 사람들은 자신이 그것을 인지(認知)하는 여부와는 상관없이 고통을 받고 하나님의 징벌을 당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분은 바로 이러한 창조세계 안에 존재하는 도덕적 질서의 어울림을 이해하고 그 질서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그 질서에 끊임없이 합치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실 때 인간을 지으시며 이미 그 도덕적인 질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영혼과 지성을 주셨고, 그 질서를 사랑하고 그것을 따라 살 수 있도록 의지를 주셨다. 성령 안에서 완전한 창조는 이처럼 도덕적인 질서를 기초로 하여 형성되었다.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도덕적 질서를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이바지하게끔 창조된 것이다.
자연만물은 이러한 미학적, 역학적 질서 안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 창조의 도덕적 목적을 이루도록 존재하고 작용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러한 자연사물의 질서만을 가지고 자연적 본성의 빛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창조계획과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구원계획을 알 수 없지만, 성경의 진리를 통하여 성령의 도움으로 창조와 구원계획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신자들은 이러한 질서들을 보다 더 잘 이해함으로써 모든 피조물 안에 충만하게 계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경배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의 질서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던 17세기 과학자 요한네스 케플러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우리 주님은 위대하십니다. 주님의 탁월하심은 놀라우시며 주님의 지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대들이 어떤 감각으로 인식하든지, 무슨 언어로 그대들의 창조주를 말하든지 간에 하늘들이 그분을 찬양하며, 해와 달과 행성들이 그분을 찬양합니다. 하늘의 조화들이 그분을 찬양하며 드러난 그 조화들의 판단자들이 그분을 찬양합니다. 내 영혼아 그대 또한 사는 날 동안 그대의 창조주이신 주님을 찬양하라. 이는 만물이 그분으로부터 비롯되며 그분을 통하며 그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물은 ‘인식할 수 있고 지성으로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양쪽 모두에 전적으로 무지하며 우리가 아는 것들 중 아주 사소한 부분조차도 여전히 저 너머에 있습니다. 그분께 찬양과 영광을 세세 무궁토록 돌립니다. 아멘.”
III.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의존
A. 창조와 인간의 의존
B. 구속과 인간의 의존
1.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경륜
2. 구속을 통한 총체적 의존을 배우게 하심
IV. 구속 사역과 인간의 의존
A. 모든 선(善)의 근원이신 하나님; Bonum, bonitas
B.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는 구속
C. 구속 받은 자들이 누리는 선(善)
1. of God: 하나님의 모든 은혜는 선물임, 원의(原義)와 전가(轉嫁義)
2. through God
3. in God
D. 구속 받은 자들의 총체적인 의존 안에서 영광을 받으심
V.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의존
A. 존재적 초월성
B. 도덕적 완전성
C. 인간의 의무: 하나님께 대한 절대의존 속에서 살아감
1. 일반 섭리에서 뿐 만 아니라
2. 영혼과 마음에 있어서도
Ⅵ. 결론: 기도- 하나님께 대한 의존의 최고 표현
천지창조의 목적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천지를 창조하셨을까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뜻을 찾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를 앎으로써만 인간의 영혼과 마음의 자질이나 경향성, 그리고 행동들에 대하여 선악을 판단하는 도덕적 기준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 밖에 있는 다른 무엇 때문에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스스로 완전하시고 충족(充足, self-sufficient)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비록 당신의 존재에 부족을 느끼지 않으시지만 당신이 존재하시는 효과는 나타내십니다. 그분의 의지와 지성은 당신 밖에 있는,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에 끊임없이 넘치도록 전달됩니다.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그 모든 창조계획의 원인이시며 원천이십니다. 존 오웬(John Owen)의 지적과 같이 하나님은 ‘당신 밖에 존재하여 당신을 움직이는 어떠한 원인도 없이’ 당신 자신의 지혜(知慧)와 의지(意志)를 그 모든 계획의 원천으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세상 만물의 제일원인(第一原因, causa prima)이십니다. 그분은 아무 것도 없는 ‘무(無)로부터’(ex nihilo) 인간을 비롯한 천지만물을 지으셨습니다.
I. 창조와 하나님의 충족성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 자체가 하나님이 창조된 세계 없이 지내던 시간과 비교해서 무엇인가 부족을 느끼신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합니다. 그래서 창조는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충족하신 존재가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반론에 의하여 그것이 억견(臆見)임이 드러납니다.
A. 창조 행위에 대한 반론
첫째로, 창조행위와 관련해서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진술하면, 이는 하나님이 천지 없이 홀로 존재하시는 것에 대해 하나님 자신이 부족함을 느끼신 것이니 하나님과 함께 만물이 영원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고 진술해야만 하나님께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성적인 판단이 아닙니다.
세계의 창조는 하나님이 스스로 무엇이 부족하시므로 실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창조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존재이기 때문에 생겨난 효과입니다. “하나님은 불변하시다.”는 교리적인 진술은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 이외에 아무 것도 산출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고, 사랑하시고, 당신 자신 안에 있게 하시려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조나단 에드워즈는 전통적인 신학에서의 하나님의 불변성(不變性, immutability)이 단순한 의미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불변성이 문자 그대로 ‘절대적인 불변성’이라면, 하나님 안에는 어떤 새로운 행동이나 노력이 없을 텐데, 세상에는 언제나 새로운 결과들이 생기기 때문에, 모순이 발생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불변하신다고 할지라도, 세계에는 하나님 자신 때문에 일어나는 새로운 효과는 있을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당신 자신의 존재 효과를 시공간의 세계 안에 드러내심으로써 세계 안에 존재하십니다.
그분이 세계를 존재케 하신 것이 그분의 불완전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의 원천적 본성은 ‘현실태’(actuality)일 뿐 아니라, 또한 ‘영원한 경향성’(eternal disposition)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경향성에 있어서 불변하십니다. 지상세계와 천상세계의 창조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적 완전성으로부터 비롯되는 역동성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자신 안에서 영원히 완전하시지만, 시간 안에 있는 세상을 통하여 당신 자신의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확장시키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으로서 존재하시는 효과입니다.
B. 창조 시간에 대한 반론
둘째로, 창조시간과 관련해서 입니다. ‘시간’(時間)은 사물이 존재함으로써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고 ‘만물이 없이 존재하던 시간’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만물은 언제나 존재하였고, 만물 없이 존재한 시간은 없습니다. 이것은 그 모든 만물이 창조된 시점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과 전혀 모순되지 않습니다.
만물이 창조되지 않고 하나님 홀로 계셨던 ‘시간’(時間, time)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거기는 영원(永遠)입니다. 그리고 그 영원은 시간을 초월한 세계이니 거기에는 ‘있음’과 ‘없음’으로 이어지는 시간적이고 계기적인 발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께서 시간 자체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시간을 만드시기 전에는 시간이 흘러갈 수 없었습니다. 만일 천지 이전에 어떤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때 당신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느냐는 질문을 어떻게 던질 수 있겠습니까?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을 적에 ‘그 때’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시간을 시간으로 앞서지 않으십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당신은 모든 시간을 앞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항상 현존하는 영원의 높음으로 모든 과거를 앞서시고, 모든 미래를 넘어서십니다.”
시간은 세계창조와 함께 존재합니다. 천상세계도 초시간적 세계는 아니지만, 시간의 의미는 한시성을 가진 사물들의 세계인 가시적 지상세계에서 더 잘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시간은 무형의 질료를 하나님의 지성 안에 있던 형상을 따라 존재로 전환하심으로써 도입됩니다. 시간은 ‘무’(無)의 상태로부터 존재가 나오기에 존재하고 또한 존재가 ‘무’(無)로 돌아가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시간으로써 영원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마치 평면으로 이루어지는 2차원이 공간을 구성하는 3차원을 수용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무한차원의 존재이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은 시간으로 시간을 앞서는 분이 아니시며 시간적인 개념을 가지고 시간을 아시는 분도 아니시며 또 시간적 운동을 가지고 시간적 사물을 움직이시는 분도 아니십니다.
II. 창조와 하나님의 경향성
하나님은 천상나라와 지상나라를 창조하셨습니다. 천상나라는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고 천사들로 수종하게 하셨으나, 지상나라는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대리하여 통치하게 하셨습니다(창 1:28). 이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의 지위가 얼마나 존귀한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천사들의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영광스런 지위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천상과 지상의 두 나라를 창조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의 신성의 영광의 충만을 세계 안에 드러내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은 ‘있음’(esse)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로서의 ‘있음’은 당신만의 경향성으로서의 ‘있음’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充足)하심에도 그 충만하심을 창조세계를 통하여 증대하시는 성향을 가지십니다. 내재적(內在的)으로는 삼위일체 안에서 서로 교통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을 행사하시고, 외출적(外出的)으로는 하나님 스스로 당신의 영광이 밖으로 넘쳐흐르도록 행사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교통하시려는 경향성을 가지고 계시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교통의 본질을 ‘사랑’(愛, amor)으로 보았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것을 ‘생명’(生命, life)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기 부족에서 오는 새로운 행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성향 자체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불변성’(immutabilitas Dei)은 하나님의 본질로서의 ‘있음’의 경향성의 불변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오히려 하나님 자신의 존재의 완전함과 충만함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존재의 완전성에서 비롯되는 창조적 역동성은 희미하게나마 인간 존재에게서도 발견됩니다. 인간이 만든 많은 도구들은 그것 없이 지내는 인간 존재의 완전성의 한계를 설명해 주지만, 재화의 생산 활동이나 의식주와는 상관이 없는 인간의 많은 예술행위들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모든 동물들로부터 구별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예술 창조행위는 인간 존재가 무엇을 결핍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밖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인간 안에 있는 상대적인 완전성, 곧 창조를 위한 역동성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예술작품의 창조로써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완전성을 입증합니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지성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시공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피조물들과 함께 나누심으로써,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들로 하여금 당신의 존재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시공간 안에서, 세계가 그 유한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의미를 주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하지 않은 지상세계 안에서 이 세계의 영원한 존재의 창조목적을 관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창조된 모든 세계는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과 교통하시려는 속성의 결과입니다. 삼위의 교통은 곧 하나님 자신의 교통이시며, 모든 피조세계 안에서 나타나는 만물의 ‘상호 교통’(communication)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는 교통의 모상(模像)입니다. 도덕적이고 지성적인 피조물로서, 영혼을 가진 인간 사이의 교통은 삼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본질로서의 상호 교통의 모상이 됩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존재의 완전성으로 말미암아 창조세계 안에서 당신 자신을 확장하시고, 시공간 안에 있는 피조물들과 교통하심으로써 궁극적으로 당신 자신과 교통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것이 세계창조의 고유하고 ‘궁극적 목적’(窮極的 目的)이라면, 이러한 창조목적 안에서의 피조물의 행복은 결과적이고 ‘의존적 목적’(依存的 目的)입니다.
III. 창조와 하나님의 아름다움
청교도 신학자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는 하나님의 창조를 ‘능동적인 창조’(active creation)와 ‘수동적인 창조’(passive creation)로 구분하였습니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사물들을 직접 창조하신 행위를, 후자는 이미 창조하신 생물들의 변이(變移)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지혜안에 있는 형상(形相)을 만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어떠한 사물도 스스로 자기를 형성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만물은 이미 정해진 형상을 통하여 만들어지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물의 형상은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셨습니다.
A. 존재의 원리: 아름다움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물의 존재원리는 ‘아름다움’(美, pulchrum)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존재(存在)와 선(善)의 일치입니다.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 자신의 지혜와 사랑 안에서 고유한 아름다움을 갖게 되는데, 이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개별적 사물들이 하나님의 창조적인 선과 일치하는 데서 나오는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은 거기에서 나오는 그 빛 이외에 다른 모든 것은 어둡게 만들어서 보이지 않게 하는 효과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가지는 영광의 효과입니다. 그러므로 세계가 하나님의 신성(神性)의 영광의 충만함으로 가득 찼다는 것은 곧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것을 의미합니다.
1.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와 조나단 에드워즈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존재와 선의 일치’가 아름다움이라고 할 때, 존재에 선이 일치하는 방식이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저는 사물이 두 가지 조건을 갖춤으로써 그 사물의 존재가 선에 일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아름다움의 두 요소로 지적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즉, ‘개별적인 사물의 완전성’과 ‘보편적인 질서 안에서의 완전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물은 그 사물로서의 자기에게 한정된 ‘있음’(esse)을 충만히 소유함으로써 개별적인 완전성을 지니게 되고, 다른 것들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보편적 질서 안에서의 완전성을 소유합니다. 이것을 통하여 사물은 고유한 아름다움을 갖습니다.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은 신미(神美), 곧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이 투영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원천적 아름다움이며, 모든 다른 사물들의 아름다움은 파생적 아름다움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만물이 참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를 의존하고 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존재하도록 덕 입히시는 한에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있음’의 덕(德)이며 아름다움은 바로 ‘있음’의 본질(本質)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독립미’(獨立美, independent beauty)이며,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모든 피조물들의 아름다움은 ‘의존미’(依存美, dependent beauty)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아름다움이 의존적 아름다움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는 그 피조물의 아름다움이 원천적인 아름다움이신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에서 비롯된다는 점입니다. 둘째로는 어떤 사물의 아름다움은 질서 안에서 그것과 어울리는 다른 사물들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아름답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아름다움의 본질은 완전성(完全性)입니다. 그것은 자연적 아름다움에 있어서도, 그리고 도덕적 아름다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조세계 안에서 인간에 의해 지각되는 두 아름다움, 곧 자연미(自然美)와 도덕미(道德美)는 원래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만물은 개체로서 완전성을 소유하고 또한 하나님이 지정하신 자리에 있음으로 선함을 갖게 되는데, 이에 대한 미학적 평가가 바로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 사물은 탁월함(excellency)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선하지 않은 것들 중 아름다운 것이 없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뛰어난 것일 수 없습니다. 아름다움을 이루는 두 완전성을 좀더 상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a. 개별적 사물의 완전성
첫째로, ‘개별적 사물’(個別的 事物)의 완전성입니다(약 1:11). 이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안에서 보편적으로 유지되어야 할 미학적 목적에 기여하기에 충분한, 개별적 사물들 안에 있는 존재의 완전성입니다. 꽃은 그것이 봉오리로 있을 때에도, 활짝 피었을 때에도, 또 거의 시들었을 때에도 꽃입니다. 하지만 그 꽃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언제입니까? 그 꽃이 활짝 피었을 때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가 그 꽃이 ‘꽃임’으로 가득 차 있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꽃이 ‘꽃임’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가 꽃으로서 개별적인 완전성을 소유한 때입니다. 이처럼 사물이 그 자신을 그 존재가 되게 하는 ‘있음’(esse)으로 가득한 상태를 가리켜 ‘전일성’(全一性, integritas)으로 충만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물이 완전성을 소유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인간에게 적용하면 더욱 잘 이해됩니다.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구원받고 성화되어 가는 과정은 곧 죄로 말미암아 상실한 인간으로서의 참된 ‘있음’, 곧 전일성을 회복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사람이 되기 위해 참된 신자가 되어 갑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 되기 위함입니다.
b.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
둘째로, ‘보편적 질서’(普遍的 秩序)의 완전성입니다(창1:31, 시133:1).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의 요소는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절제’입니다. 조화(調和)는 다른 사물들과의 어울림을 의미하며, 균형(均衡)은 다른 사물들과의 대칭을 뜻합니다. 또한 절제(節制)는 어떤 존재가 본래의 자기로서 존재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성향입니다. 모든 존재는 홀로 다른 사물과 관계없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러한 단절 속에서는 아름다움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개개의 사물들은 다른 사물들과의 연관 속에 존재하고 어울리는 것을 통해 아름다움을 갖습니다. 이러한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은 ‘위치(位置)의 완전성(完全性)’으로 나타납니다. 자연세계 안에는 물리학적 위치의 완전성과 미학적 위치의 완전성이 있습니다. 창조된 자연세계의 만물은 자기에게 지정된 위치에 있을 때, 그의 고유한 작용을 함으로써 다른 존재들의 작용과 어울려 자연세계 안에서 아름다움을 이룹니다. 또한 만물은 거기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자리에 위치하는데, 이것을 저는 ‘미학적 위치의 완전성’(perfection of aesthetical place)이라고 부릅니다. 물리학적으로 완전한 위치는 곧 미학적으로도 완전한 위치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주의 질서입니다.
창조세계는 그저 겉으로 보기만 해도 아름답지만 그 만물의 작용을 깊이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아름다움을 지각할 수 있습니다. 온 우주는 미학적 디자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비율, 색깔, 빛, 그리고 위치 등으로 아름다움을 연출하는 인간의 디자인 능력은 이러한 보편적 질서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본뜨는 능력에서 온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은 물질세계에서뿐 아니라 정신세계에서도 나타납니다.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능력과 경향성,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정신세계의 작용을 생각해 보십시오. 영혼의 경향성들이 마음에 작용하고, 감각하는 만물에 의하여 발생하는 마음의 정동(情動, affection)을 보십시오. 그 많은 작용들은 너무나 심오하고 은밀하지만 질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사람은 자신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심오하고 아름다운 질서, 곧 영혼과 마음 안에서의 다양한 작용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2. 창조의 미학적 질서
자연세계 안에서나 도덕세계 안에서나 모든 존재의 원리는 ‘아름다움’(美, pulchrum)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곧 ‘존재(存在)와 선(善)의 일치’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심으로써 존재하게 된 모든 것들이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 안에서 함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질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연역될 수 없는 우연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세계는 반드시 거기 있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 없이 그냥 거기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우연성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들의 존재의 무근거성(無根據性)을 의미합니다. 자연세계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자연스럽게 세계의 도덕적 필연성에 대한 거부로 이어집니다.
자연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아름다움은 이 세계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창조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가시계(可視界)의 이러한 자연적 질서의 아름다움은 가지계(可知界)의 도덕적 질서의 아름다움의 모상입니다. 이처럼 존재와 선의 일치는 아름다움의 본질을 이루고 이것이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따르는 질서입니다. 이 질서는 화이트헤드(A. N. Whitehead)가 언급했듯이 ‘미학적 질서’(美學的 秩序, aesthetic order)입니다. 그는 창조세계의 모든 질서는 미학적인 질서이며, 인간세계에서 구현되는 도덕적 질서 역시 이러한 미학적인 질서의 한 국면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창조세계 안에 있는 이러한 미학적인 질서는 만물 안에 계신 하나님의 ‘내재성’(內在性, immanence)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칸트(Immanuel Kant) 같은 사람은 자연적 질서가 도덕적 질서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의견에 대하여는 거부하였습니다.
B. 영원한 하나님의 아름다움
자연세계 안에서나 도덕세계 안에서의 모든 아름다움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神美, pulchrum Dei)입니다. 이 아름다움은 하나님의 존재원리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성삼위 안에서 각 위의 개별적 완전성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십니다. 각 위는 개별적으로 완전한 인격을 가지신 완전한 존재이시기에, 한 위가 다른 두 위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를 규정하지 않으시며, 한정이 없으신 무한한 완전성을 가지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름다우십니다. 둘째로, 성삼위 안에서 삼위의 통일적 완전성입니다. 삼위는 개별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각 위(位)는 삼위 안에서 질서를 가지고 존재하시며 일하십니다. 성부는 성자와 성령이 계심으로 삼위로서 아름다운 하나님이시며 나머지 두 위(位)도 각각 그러합니다.
이러한 삼위의 아름다움은 위격 간의 사랑의 근거가 됩니다. 하나님 당신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에 삼위의 완전성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근거가 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외부로부터 영향을 받아 사랑이 되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심을 보여 줍니다(요일 4:16).
C. 창조세계의 아름다움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은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모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성부에 의해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창조하심으로 당신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만물에 새기셨습니다.
1. 창조세계의 아름다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선하고 아름답고 탁월하였습니다. 모든 개별적 사물들은 그 각각의 존재에 있어서 아름다울 뿐 아니라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상호 교통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은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첫째로,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은 개별적 사물의 완전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을 당신이 한정하신 대로 완전하게 창조하셨으며, 각각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부합하는 존재의 위치와 적합한 기능을 갖게 하셨습니다. 둘째로, 창조세계의 아름다움은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입니다. 이 보편적 질서의 아름다움은 ‘최종적 아름다움’(最終美, the final beauty)이며, 개별적 사물의 아름다움은 그 궁극적인 아름다움에 이바지함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으니, 저는 이것을 ‘기여적 아름다움’(寄與美, contributory beauty)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의 질서와 가치의 질서가 하나인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이 일치할 때, 미학적 질서를 형성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만물 가운데 계시다는 증거가 됩니다.
학문을 통해 발견되는 진리나, 예술을 통해 구현하는 아름다운 것들 중 단 하나도 하나님 안에 없었던 것은 없으며, 그분이 보여 주시지 않은 것들 가운데 인간이 보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 아름다운 모든 것은 신미(神美)의 반영이며, 하나님은 최고의 심미안을 가지신 궁극적 미학자로서 무엇이 아름다운지 결정하셨습니다. 미학적 아름다움은 도덕적 아름다움과 일치를 이룹니다. 창조목적을 지향하는 자연적 질서 안에서 만물은 자연적 아름다움을 가지며 도덕적 질서 안에서 도덕적 아름다움을 갖습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미학적 완성으로써 창조세계를 영광으로 충만하게 하여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인간은 창조목적을 따라 모든 사물들을 사용하며 살아감으로써 그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2. 심미적 경험: 정동과 경향성
하나님은 세계를 아름답게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인간이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있도록 인간을 심미자(審美者)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상세계에 창조하신 피조물들 중 인간만이 유일하게 아름다움을 알게 하셨으니, 아름다움을 아는 것은 곧 영혼에 속한 능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러한 심미능력(審美能力)을 주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주이신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들을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의 의지행사나 경향성은 정동(情動, affection)에 있고, 이러한 정서의 변화는 인간의 감각(感覺, sensibility)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정동의 반복적인 경험은 인간의 영혼과 마음 안에 그와 일치하는 경향성을 갖게 합니다.
인간이 육체의 감관(感官)으로 어떤 사물을 접하게 될 때, 그 사물을 존재하는 것으로서 인식하는 것은 지성에 관계하고, 선한 것으로서 인식하는 것은 의지에 관계합니다. 따라서 아름다움의 감정은 사물 자체에 대한 이해와 함께 의지적인 결정을 하도록 정서를 움직입니다. 정서의 움직임이 의지행사(volition)를 불러온다는 점에서 볼 때, 정서는 이성처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기능이라기보다는 지성과 함께 작용하는 의지의 일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성과 정서,’ ‘마음과 머리’는 구분되지만,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동(情動) 경험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인간의 정신 작용을 지(知)․정(情)․의(意)로 설명하던 전통적인 설명방식을 버리고 지성과 의지로 설명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재를 지성과 의지로 설명하는 것에서의 일치를 도모하였습니다.
사물에 대한 인간의 판단작용은 두 가지 정신작용으로 이루어집니다. 사물에 대한 ‘인식’과 ‘마음의 기울어짐’(mindedness)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좋아함과 싫어함 없이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원이 둥글다고 인식하거나 선이 삐뚤어졌다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물에 대한 단순한 인식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성에만 관련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물이나 그것의 움직임을 보고 마음이 좋아하는 쪽으로 기울 수도 있고, 싫어하는 쪽으로 배척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정동(情動, affection)에 의한 작용으로서 인간의 의지에 관련됩니다. 이러한 정동의 결과로서의 감정의 움직임은 곧 의지행사(volition)의 근거가 됩니다. 정동의 발생은 객관적으로 인식한 정보와 인식하는 인간 주체 안에 있는 마음의 경향성에 의하여 방향과 크기가 결정됩니다. 인간의 마음 안에 거룩한 것들에 대한 지성의 인식으로 신령한 정동경험이 반복된다면 그것은 그의 영혼과 마음에 거룩한 경향성을 강화할 것이며, 속된 것들에 의한 정동경험이 반복된다면 세상을 사랑하는 경향성들이 심겨질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를 파괴하고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 안에서 이루어지는 죄의 경향성과 은혜의 경향성 간의 갈등입니다.
아름다움이 ‘존재(存在)와 선(善)이 일치’라는 에드워즈의 설명은 새로운 철학적 개념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그의 저작을 공정하게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성실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학생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신세계의 반대편에 있는 존재로서의 물질세계를 악한 것으로 보던 플라톤주의를 배격하고, 존재와 선을 아름다움의 본질로 보았습니다. 그는 ‘존재와 선’이라는 틀을 사용함으로써 미학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을 종합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유의 틀을 이용해 마니교의 ‘선악 이원론’(善惡 二元論)을 극복할 수 있었으니, 악을 ‘선(善)의 결핍’(privatio boni)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악의 가원에 대한 기독교의 난제를 풀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조나단 에드워즈의 미학적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와 18세기 영국 캠브리지에서 신플라톤주의자(neo-platonist)들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던 도덕심미주의(道德審美主義)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이 아름다움을 감각하게 될 때, ‘미학적 정동’(美學的 情動, aesthetic affection)을 경험합니다. 인간이 이러한 아름다움을 감각하게 될 때, 내면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정동들은 인간의 의지행사와 경향성 형성에 영향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름다움을 창조세계에 새기신 것은 그 자연적 아름다움을 통하여 창조주이신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심미’(審美)를 통하여 도덕적 아름다움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적 사물의 개체적인 완전성과 보편적 질서 안에서의 완전성을 보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통치의 아름다움을 관상하게 됩니다. 이러한 아름다움의 경험을 통하여, 인간은 ‘종교적 정동’(宗敎的 情動, religious affection)을 경험하고 그 모든 아름다움의 원저자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창조의 목적을 따르는 영혼의 경향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이러한 미감(美感)으로 인해 생겨나는 정동의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경향성의 정체는 ‘사랑’(amor)입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유일한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미학적 정동의 경험은 인간으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존재를 사랑하게 만들어 줍니다. 사랑은 ‘어떤 대상을 최종적인 즐거움의 대상으로 삼고 그것에 고착하여 누리려고 하는 영혼과 마음의 경향성’입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면 하나님과 사랑에 빠지고, 세상이면 세상과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아름다움의 정동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사랑의 경향성이니, 이러한 정동의 경험이 반복될수록 더욱 강한 사랑의 경향성이 자리 잡게 됩니다.
인간의 참된 덕은 영혼의 올바른 힘, 혹은 아름다움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덕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창조목적을 사랑하는 영혼의 경향성입니다. 인간이 끊임없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의 아름다움과 도덕세계의 아름다움을 감각함으로써 거룩한 정서의 변화를 경험할 때, 그런 덕(德)을 소유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름다움을 지니지 못한 사물들을 인식의 착오로 인해 아름답다고 여겨 정동을 경험할 수 있는데, 이런 경우에도 그것을 감각하는 인간의 내면에는 사랑이 불러일으켜질 수 있습니다.
타락 후 인간은 죄의 경향성을 가지고 태어나며, 신자라 할지라도 그것이 잔존하고 있기에 그러한 인식론적인 착오와 타락한 경향성이 일치하여도 사랑의 정동을 가져옵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창조목적을 떠나게 만듭니다. 왜냐하면 창조목적을 따라 사는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 자신에 대한 지순의 사랑, 곧 까리따스(caritas)로써 가능한데, 그렇게 정동된 사랑은 육욕적인 자기 사랑, 곧 꾸피디따스(cupiditas)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IV. 창조와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창조주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성의 충만함을 피조물들을 통하여 드러내심으로 창조세계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셨고 피조물들과 교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시간세계 안에서 더욱 점증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창조되었고, 특별히 인간은 이 일에 주도적으로 이바지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A. 영광이란 무엇인가?
창조세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관하여 논의하기 전에, 먼저 ‘영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간략히 말하자면, 영광(榮光, gloria)은 하나님 자신이 존재하시는 효과입니다. 이러한 교리적 사실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습니다.
1. 영광의 의미
성경에서 영광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첫째로, 어떤 물질적 소유나 신분, 혹은 기타 무형의 장점 자체를 가리킵니다(삼상 4:21, 왕상 3:13, 대하 18:1, 32:27, 시 49:16). 즉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특징이나 사물 자체를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구약성경에서 히브리어로 ‘카보드’라고 불렀는데, 이는 원래 ‘무겁다’라는 의미를 가진 상태동사 ‘카베드’에서 나온 것입니다.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 사람들의 주의를 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이 단어는 그것들을 가진 인간이나 사물이 중요한 존재로 대우받는 효과를 가리킵니다(출 33:18, 대상 16:29, 에 8:16, 욥 19:9, 시 108:5, 계 21:13) 이것은 사람들이 중요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소유함으로써 그것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이 그 소유자, 그의 다른 담지물(擔持物)까지 중요하게 생각하는 효과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후자의 영광은 전자의 영광에 의존하는 영광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성경은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2. 세 종류의 영광
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합니다. 본체적 영광과 발산적 영광, 그리고 효과적인 영광이 그것입니다. 첫째 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고, 나머지는 하나님의 임재와 도덕적 통치로 말미암는 영광입니다.
첫째로, ‘본체적인 영광’(本體的 榮光, essential glory)입니다. 이는 하나님 존재자체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지성과 의지를 가지신 하나님의 존재가 지니는 영광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영광은 피조물들의 도덕상태에 의해 영향 받지 아니하니, 이는 마치 땅에서는 눈비가 오고 안개가 끼고 우박이 내려도 구름 위에는 언제나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창조하신 세상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불변하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둘째로, ‘발산적 영광’(發散的 榮光, radiatory glory)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장소적 임재가 주는 신성(神性)의 효과로서의 영광입니다(출 3:1-5, 19:16). 그것은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임재가 거기 있는 것을 알게 해줍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광을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거기 계신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본체적 영광은 아닙니다. 본체적 영광은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하나님 자신으로서의 영광입니다(출 33:20).
셋째로, ‘효과적 영광’(效果的 榮光, effective glory)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을 비롯한 지성적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받아들임으로써 드러내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러한 영광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정하게 한 결과이며, 또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받아들이는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 영광’이라 칭할 수 있습니다.
B. 창조의 영광
하나님은 천지를 당신의 지혜(知慧)와 능력(能力)으로써 창조하셨습니다. 무한한 능력으로 창조된 만물은 그분의 탁월한 지혜 아래 상호교통(communication)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완전히 선하게 창조하셨으며, 창조된 모든 것들의 전체도 선하고 아름답게 질서 잡혀 있었습니다. 그 피조물들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러움에 적합하도록 완벽한 조화와 균형과 절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모든 만물은 개별적으로 완전하게 창조되어 자기의 실체와 거기에 부합하는 고유한 작용(作用)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다른 모든 피조물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탁월함과 아름다움을 이룸으로써 창조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충분히 기여하고 있었습니다. 그 탁월함과 아름다움을 통해서, 그것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형언할 수 없이 놀라운 지혜와 능력, 곧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가 찬란하게 드러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인간을 비롯한 만물은 그렇게 자신의 고유한 자리에 배열되어 우주의 질서(秩序)를 구성하며, 그 질서에 맞게 작용하여 창조주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영광은 너무나 찬란하여, 인간은 모든 사물들을 통해 만물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기 전, 창조세계가 그러하였습니다.
창조된 세계는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 선함, 그리고 탁월함을 찬란하게 드러내고 있었으며, 인간은 그 안에서 점증하는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지식으로 인해 기쁨을 누렸습니다. 모든 피조물들은 자신의 존재의 본성에 부합하는 복된 상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창조된 피조물들은 서로의 존재를 위해 도움을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해 의존적으로 작용하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단일한 계획 아래 창조되었고, 하나의 목적을 향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만물의 존재와 작용들은 모두 이러한 목적을 향하여 기여하는 경향성(傾向性)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최종적 목적이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세계창조의 원인론적 동기인 동시에 목적론적 동기도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충만한 신성의 영광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확장하려는 경향성이 세상을 창조하는 동기가 되었고, 또한 그렇게 창조된 세상과 만물이 당신 자신과 교통하게 하심으로써 충만한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창조된 세계의 영광은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본래의 광휘를 잃었지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알고 사랑해야 할 인간의 본분으로 돌아간 사람들의 눈에는 여전히 찬란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빛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높이고 사랑하게 하여, 나아가 추루한 자기사랑을 버리고 지순의 사랑으로써 그 창조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도덕적 질서를 따라 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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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인간의 상태와 구원
I. 타락한 인간의 상태
A. 원죄(original sin)
1. 죄책(罪責, guilt): 칭의로 즉각적인 해결
2. 오염(汚染, corruption): 성화로 점진적인 해결
a. 선천성
b. 전적 부패성
1) 전적 타락(total depravity)
2) 전적 무능(total inability)
B. 실행죄(actual sin)
기도와 내재하는 죄
I. 본문 주해: 롬 6:14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이 부분을 희랍어 성경에서 직역을 하면 다음과 같다. “왜냐하면 죄가 너희의 주인이 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니라.”
사도는 로마서 5장에서 시작하여 본문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으로부터 벗어나 영적 생명에 이르게 된 것과 그 생명이 어떻게 신자로 하여금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살게 하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는 생명을 얻는 신자의 영광스러운 구원에도 불구하고 지상에서의 그의 삶이 더 이상 긴장할 필요가 없으리만치 낙관적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긴장을 말한다.
그것은 바로 거듭났음에 불구하고, 더 이상 죄의 종으로 살아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그를 구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신자 안에 남아서 역사하고 있는 죄 때문이다. 거듭남과 함께 성령으로 말미암아 심겨진 생명의 원리와 함께 죄가 살아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II. 신자의 삶: 은혜의 통치 아래 있음
우리는 개혁주의 성화론에 있어서 결정적인 유산인,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진 이 영광스러운 교리를 탐구하기 전에 먼저 서론적으로 살펴볼 내용들이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감격적인 어조로 피력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사도에 의하면, 신자는 죄를 영원히 단 번에 용서 받은 자이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시켜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는 이런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에게 있어서 죄는 무엇인가? 과연 신자 안에 죄가 거할 수 있는가? 만약 죄가 신자 안에도 거한다고 하면 그것은 신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또 그 죄가 신장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을 훼방한다면 그것은 곧 해방된 죄와 사망의 법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만약 죄와 은혜가 신자 안에 함께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신자가 받은 구원의 실재는 무엇인가?
원리적으로 거듭난 신자는 죄 아래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 여기서 은혜란 신자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 방법이다. 즉, 죄인을 용서해주시는 객관적인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거룩한 영향력이다. 예를 들어 보자. 신자가 죄 가운데 살다가도 어느 순간, 깊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마음속에 다시 부어진다. 그리고 그러한 은혜를 받게 되면, 그의 마음은 은혜가 없었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마음으로 바뀐다. 그리고 그렇게 은혜로 말미암아 변화된 마음은 변화된 삶을 살아가게 한다. 그것은 외적인 환경의 변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혼과 마음의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면 그에게는 은혜 받기 전이나 은혜 받은 후에나 상황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집안도 그대로이고, 다니던 회사도 그대로이며, 갑자기 승진을 하거나 돈을 많이 벌게 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자기를 괴롭게 하던 삶의 상황들이 변함없이 그대로인데도 은혜를 받고 나면 신기하게 마음속에 기쁨과 평강이 넘친다. 매일 원망과 불평 속에서 살았던 사람인데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사랑과 감사 속에서 살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다. 은혜를 받고 나면, 예전에는 멀리 하늘에 게신 분으로만 느껴지던 하나님이 이제는 자신 곁에, 자신 안에 살아계신 것으로 느껴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을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강권함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은혜 받기 전에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던 사람이 불쌍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정말 사랑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 이처럼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란 상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영향력이다.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런 은혜가 심겨진다. 그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순간 생명의 성령의 법이 심겨지면서 이러한 은혜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비록 여전히 부패한 성품이 남아 있고, 그것이 죄로서 잔존하고 있고 영향을 받지만, 그 사람 안에는 그 보다 더 큰 지배력을 가진 생명의 성령의 법이 존재한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죄의 다스림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의 통치 아래 있다. 그는 그 은혜를 따라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기에 필요한 하늘 자원을 공급 받으며 살게 되는 것이다.
III. 불신자의 삶 : 죄의 절대적 지배 아래 있음
그러나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들은 여전히 죄가 그 사람 안에서 주인 노릇하는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의 상태를 본문은 ‘법 아래 있다’라고 말한다.
신자는 은혜 아래 있기 때문에 죄의 영향을 받거나 지배 아래 놓이게 될지라도 은혜를 통해 그 상태를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불신자는 그럴 수가 없다. 그가 율법 아래 있기 때문이다. 율법은 그가 지은 죄와 또한 그의 죄인 된 상태를 보여주고 정죄할 뿐이다. 율법은 그 이상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따라서 불신자는 죄의 지배 아래 있다. 그것은 상대적인 지배가 아니다. 불신자는 죄의 절대적인 지배 아래 있다. 당연한 이치지만, 여기서 말하는 불신자는 사실상의 불신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거듭나지 못한 채 단지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이 포함된다. 비록 기독교적인 문화와 종교 환경 속에서 살아가지만, 실질적으로 거듭나지 아니한 모든 형식적인 교인들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지금은 신자가 된 여러분들도 예전에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기 전에는 모두 은혜가 아닌 죄의 지배 아래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 반항하고 인간의 창조의 목적에 반항하는 죄의 경향성을 대항할 어떤 통제력도 소유하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자신들의 인생을 불행하게 만드는 궁극적인 원인이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얻으면 그것이 곧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욕망을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려고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적대시한다.
이러한 사고의 경향은 인간을 모든 우주의 중심에 있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을 가진 커다란 가치로 여기는 것인데, 이것이야 말고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대신 갖다놓은 우상숭배적인 자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죄이다.
우리가 흔히 죄라고 하면 구체적인 실행죄를 생각한다.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며 시기하는 등 마음으로 짓는 죄와 도둑질과 간음, 살인과 거짓말하는 것과 같은 악행을 생각한다. 그러나 죄의 본질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모든 옳지 않은 태도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죄는 단순히 실행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이 세상의 중심이 인간인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 없이도 넉넉히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곳에 인간을 두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그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게 하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기대하신 삶은 하나님을 온 우주의 중심으로 생각하며, 인생의 참된 가치를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데서 찾는 삶이다. 그러한 삶이야말로 하나님께 만족이며, 인간에게 행복이요 보람이다. 이러한 삶을 사는 것 이외에는 인간을 궁극적으로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아는 방법이 없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러한 창조의 목적을 외면한 채,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라 믿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한다. 이것은 곧 하나님을 향한 멸시이자 반역이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려는 것 자체가 죄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한다. 온 우주의 중심은 하나님이시고,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를 의존하고 순종하며 경배하며 살아가야 할 존재라고 가르친다. 이 목적을 떠나는 모든 것이 곧 죄이다.
IV.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세력
A. 지배는 불가, 영향은 가능
신자가 거듭나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그 사람 안에 심으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그 생명은 사라지는 법이 없다. 하나님께서 심어주신 생명의 원리는 신자의 안에서 존재하던 죄와 사망의 법을 타파하시는 것과 함께 역사하기 시작한다. 이제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죄의 지배 아래서 종노릇하면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한 죄의 통치는 거듭남과 함께 종식되었다. 오히려 마음과 영혼에는 새로운 주도적인 성향이 심겨졌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순종하며 살려는 성향이다. 그것은 마치 나무처럼 심겨져서 점점 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심겨진 하나님의 은혜의 생명은 저절로 자라는 것이 아니다. 거룩한 마음과 성경한 생활 속에서 자라난다. 나무가 양분이 충분히 공급되고 비가 내리고 햇빛이 비치고 적정 온도가 유지되어야만 땅 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줄기 가지 뻗어 성장하게 되는 것과 같이, 거듭남과 함께 겨진 하나님의 생명도 순결한 마음과 죄를 죽이는 생활 속에서 아름다운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따라서 신자의 경건은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 생명이 풍성히 자라게 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이러한 진리를 적용시켜 보라. 그가 오래도록 교회를 다녔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안에서 심겨진 하나님의 은혜의 생명은 성화의 이치를 잘 깨닫고 죄를 죽이는 경건한 생활과 거룩한 삶의 실천을 통하여 풍성해 질 수 있고, 영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다. 비록 커다란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고 회심하였다고 할지라도,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죽이는 삶에 대하여 무지하거나 그를 실천함에 있어서 게으른 삶을 산다면 그는 결코 영적인 생명력을 지닌 풍성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결코 참 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B. 죄의 영향력의 극대는 지배와 방불함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에게 죄와 그 죄의 결과인 비참으로부터의 구원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단지 영혼만의 구원이 아니라 전인적인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영혼의 구원 여부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구한다. 그리고 그 도우심으로 날마다 살아간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하여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구원 받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부패한 본성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구속 받아야 할 죄인이라고 할 때에 그것은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첫째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와 우리가 지은 자범죄, 혹은 실행죄(actual sin)이다. 아담의 타락은 언약적으로 그와 하나로 연대되어 있는 우리에게 두 가지 악한 효과를 가져다준다. 첫째는 원죄의 죄책의 전가이고 둘째는 타고난 부패성이었다.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책의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선천적이고 내적인 부패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비록 예수 안에서 거듭남으로 우리에게 심겨진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이전처럼 우리에게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파괴되었지만, 여전히 잔존하는 죄의 세력으로 남아있다. 타락으로 인한 원죄의 죄책은 그리스도를 믿을 때 칭의를 통하여 해결되지만, 잔존하는 부패성은 구원 받은 이후에 성화의 삶을 통하여 성령의 은혜로 거룩해져 갈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과 함께 신자 안에 심겨진 생명의 성령의 법은 성화의 삶을 통하여 성장이 촉진되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비록 신자 안에서 예전과 같은 절대적인 통치력은 상실했지만, 여전히 잔존하는 죄의 잔존 세력은 신자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리고 그 죄는 은혜처럼 생명을 가지고 신자 안에서 견고하게 자리 잡고 성장하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신자가 이러한 원리를 무시하고 정욕을 따라 살면서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신자 안에 있는 악의 경향성인 죄는 더욱 강한 힘으로 가지고 자라게 된다. 비록 신잔 안에서 치명적인 해를 입고 거의 궤멸되었으나 다시 신자 안에서 견고하게 자리 잡을 채비를 갖추게 되고 세력을 얻게 된다.
필리핀에는 민다나오라는 커다란 섬이 있다. 합법적으로 정부가 엄연히 존재하는 필리핀임에도 불구하고 민다나오섬에는 반군들에 의하여 세워진 또 다른 정부가 있어서, 합법적인 정부의 통치를 거절하고 자기들끼리 세금을 거두고 그 지역을 다스려 간다. 필리핀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불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이 일어났다. 신자 안에 잔존하는 죄의 세력도 또한 그렇다. 그것은 불법이다. 이제 신자는 하나님의 생명과 성령의 법이 다스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시 죄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신분의 자유와 마음과 영혼의 자유를 아울러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불법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
신자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믿음의 원리를 따라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면, 비록 그 안에 죄가 잔존한다할지라도 하찮은 존재로서 신자 안에 제대로 거할 자리를 얻지 못한 채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할 텐데, 신자의 불순종과 죄를 죽이지 않는 삶, 성화의 삶을 살지 않는 죄악 된 삶이 죄에 힘을 더해주고 융성하게 만들어서 신자 안에 민다나오섬의 예처럼 불법한 세력들을 구축하게 하는 것이다. 신자에게 있어서 죄의 지배는 분명히 종식되었고, 그는 이제 죄의 통치 아래 사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신자가 자기 안에 있는 잔존하는 죄의 실재와 계획을 알고 그것을 적절히 죽이는 성화의 삶을 살지 아니하면, 죄의 영향이 극대화되어 죄의 지배 받으며 살아가는 이상한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거듭난 신자에게서 이렇게 심겨진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적으로 사라질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불순종하고, 말씀을 멀리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은혜의 힘은 약회되고 죄의 세력은 강해진다. 자신의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부지런하고, 거룩한 삶과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게으른 사람의 마음이야말로 정욕을 먹으며 자라는 죄가 힘을 얻으며 성장하기에 좋은 환경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죄의 나무는 그 마음과 영혼 안에 울창한 숲을 이루며 자라게 되고 마음에 있는 정욕을 통하여 자양분을 공급 받으며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신자에게는 이러한 일이 불법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원칙적으로 신자는 죄가 통치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은혜의 우군이 소수가 되고, 죄의 반군들이 절대 다수가 되는 것 같은 상황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결국 신자임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죄의 세력에 지배를 받는 상황이 되고 만다. 그럴 수 없도록 하나님께서 신자 안에 생명의 성령의 원리를 심으셨는데,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은혜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야 할 신자의 내면을 죄가 불법으로 지배하는 상황이 되었다. 더욱 정도가 심해져서 불신자로서 죄의 지배를 받으며 살던 때와 유사한 상황이 되었다. 이처럼 거듭난 신자가, 도덕적인 삶에 있어서 불신자보다 더 악하게 사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신자가 오랫동안 죄를 멀리하고 경건한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죄를 짓고자 하는 부패한 본성까지 사멸된 것은 아니다.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지고 죄가 세력을 얻게 되는 상항으로 들어가 보라. 오히려 그는 오랫동안 경건하게 살면서 저지르지 못한 죄에 대한 욕망이 한 번에 고개를 들면서 융성해지는 정욕을 경험할 것이다. 성경이 만물보다 심히 악하고 거짓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고 죄의 맛에 길들여지고 나면 무서운 속도로 그 죄에 빠져들어 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 적절하게 그 죄의 세력을 약화시켜 주시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러한 죄의 궁극적인 계획은 신자를 죄 가운데 사로잡아 두어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배교에 가까운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신자가 죄의 지배를 받게 될 때에 그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한 죄의 영향력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불신자였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종류의 것이다. 불신자는 죄 아래 살아가기 때문에, 마치 인간이 만유인력의 법칙 속에서 살아가면서 중력의 힘을 거의 느끼지 못하듯이, 거의 죄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 따라서 그 때에는 죄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도 그것을 죽이고자 몸부림치지도 않는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은 다르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살아 보았기 때문에 죄 아래서는 그러한 은혜가 끊어진 삶의 비참함을 안나. 따라서 본성적으로 죄에 대항하고자 하는 성품이 있다. 그리고 어느 대에는 그 죄에 대하여 치열하게 고민하고 죄를 죽이고자 몸부림친다.
우리가 흐르는 강물을 따라 헤엄을 칠 때에는 도도히 흐르는 강물의 힘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 강물을 거슬러 수영하고자 하면 비로소 그는 흐르는 물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이것은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쉽게 경험할 수 있는 바이다. 신자가 자신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고갈되고 죄가 장성할 때에 얼마나 괴로워하게 되는지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 사도 바울 역시 죄를 따라 살지 아니하고 항거하려고 하는 분투하는 가운데서 죄의 힘을 느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영적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영적생활이란 그의 영혼 안에 새롭게 심겨진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사는 삶이다. 호시탐탐 우리 마음 안에서 자기의 세력을 키우고 지배권 확보하려고 노리는 잔존하는 죄의 세력들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건강한 영적 생활을 이어가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영적생활이란 복음의 원리를 따라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신자 안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심으신 하나님께서는 어떨 때 그 은혜와 생명이 무성하게 자라고, 또 어떨 때 죄와 정욕이 급속히 자라는지에 대한 법칙도 정해 놓으셨다. 그래서 그 법칙을 따라서 살면 풍부한 영적 생명을 누리며 승리하는 삶을 살고, 그렇지 않으면 예외 없이 핍절하고 가난한 영적 생활을 이어가게 된다. 영혼과 마음은 죄의 지배로 가득 차게 되고 삶은 불순종과 악으로 뒤덮인다.
만약 신자의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생각들이 이처럼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방식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신자 안의 주신 은혜와 영적 생명력은 점점 쇠퇴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죄와 벗하여 지낼 때는 잠시 즐거울지 모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하거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갈증을 느낄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에 따르는 영적생활을 하지 않고 있는 데도 불만족이나 고통 없다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니다. 신자가 진지하고 부지런한 경견 생활을 잃어버리고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될 때에는 반드시 마음에 고통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과거에 어떠한 회심을 경험을 하였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지금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기 위하여 힘쓰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다.
V. 은혜 아래 있는 신자의 의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원리를 따르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가 예전에 아무리 죄를 많이 짓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용서와 은혜와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 사도는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다고 했습니다.(롬 5:20). 그러나 거기서 사도가 말하는 죄는 신자가 지금 사랑하며 붙들고 있는 죄가 아니다. 오히려 그 죄는 예전에 그것을 저지른 자는 자신이었다고 할지라도 지금은 미워하고 있고, 맞서 사우고 있지만 아직도 남아 있는 죄이다. 따라서 죄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 위해서는 단지 죄만 많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죄 가운데 있던 사람이 어느 한순간 결단하고 은혜의 원리로 돌아와서 다시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들이 필요하다. 그에게는 은혜의 원리를 따라 죄를 대적하고 죽이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신자는 이제 더 이상 죄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주신 은혜 아래서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힘써야 한다. 끊임없이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살피며, 하나님의 은혜를 거슬러 살게 하는 죄를 죽임으로써 자신에 주님이 충만히 사시도록 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며 신실하게 살아가려고 애쓰는 우리 안에도 잔존하는 죄가 있음을 깊이 깨달아 하나님 앞에 겸비하여야 한다. 우리가 알면서도 비호하거나 무지로 인하여 우리 안에 안전히 거하고 있는 죄는 없는지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죄에 대하여 진실한 참회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여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가 이미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 받은 우리에게 여전히 죄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경건한 슬픔과 거룩한 자기 비하 속에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만을 소망하기를 힘써야 한다.
기도와 죄죽임(mortification)
I. 죄의 형이상학
존 오웬은 어느 신학자보다도 더 명쾌하게 죄의 본질을 설명한 신학자이다. 그리고 죄에 대한 이러한 명쾌한 설명은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되고 중세 철학에서 기독교 사상으로 정제된 방대한 층차의 형이상학적 담론들을 배경으로 이루진다. 인간의 죄에 대한 존 오웬의 담론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존재론과 관련되고 다른 하나는 윤리론과 관련된다.
A. 존재하는 경향성으로서의 죄
첫째로, 그는 죄를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으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경향성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성향을 갖게 하며 이로써 마음 안에서 혹은 행동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오웬은 신자 안에 있는 죄와 행동으로 드러나는 죄를 명확히 구분한다. 후자는 악에 속하는 인간 행위의 죄이며 전자는 그것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으로서 작용하는 마음의 성향이다. 신자의 죄에 대한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담론은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물려받았다고 여겨지며 존재와 죄를 직접 연결시키는 이러한 철학적 담론들을 방대하게 구축함으로써 계몽주의에 항거하였던 조나단 에드워즈에게로도 이어진다. 실제로 존 오웬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에 있어 중요한 원천 중 하나였다.
죄의 본질은 실재적인 면에서와 도덕적인 면에서 각각 다르게 정의될 수 있다. 실재적인 면에서 보면 죄의 본질은 경향성이고 도덕적인 면에서 보면 하나님께 대한 적의이다. 실재론적인 측면에서 볼 때 죄의 본질은 경향성인데 이것은 도덕적인 면에서의 본질과 분리될 수 없다. 즉 경향성으로서의 죄가 흐르는 물이라면 작용하는 적의의 성향으로서의 죄는 물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경향성은 그것으로 하여금 사물을 끊임없이 같은 방향으로 작용하는 성질로 나타난다. 죄에 대한 오웬의 형이상학은 철학과 관련이 있다. 존 오웬은 추상적이고 올바른 이성이나 인간 지성의 생래적 원리로서의 철학이나 자연신학을 정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의 활동 때문에 그것들은 오류가 있는 것이 되었으므로 그는 이성과 철학은 특별계시에 의해 교정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존 오웬은 죄를 설명함에 있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의 틀을 사용한다. 그의 죄의 존재와 작용에 대한 설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과 연관을 갖고 있다. 즉 죄를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으로 본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로 존재와 경향성의 문제는 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가 되어 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랍어 ‘헥시스'(ἕξις, 문자적으로 ‘실천에 의하여 이루어진 어떤 상태 혹은 항구적인 상황에 놓여있는 것’)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라틴어 ‘하비투스’(habitus)를 가지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존 로크와 흄으로 이어지던 영국 경험주의를 거치면서 경향성이 단지 존재의 특성이 아니라 곧 존재의 본질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존 오웬은 죄를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으로 보는데 이 경향성은 도덕적으로 작용하게 하는 힘, 곧 마음의 성향으로 나타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경향성은 그것의 본질적 요소이며 그 사물의 고유한 작용은 이 경향성이 운동하는 발현이라고 보았다. 그에게는, 죄의 존재와 작용을 영혼과 마음 그리고 행동과 관련하여 설명함에 있어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존재론의 틀이 매우 유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틀의 사용은 이미 중세의 교부들을 거치면서 세련되게 기독교 사상으로 정제되어 있었다. 죄에 대한 담론이 지배적이었던 청교도들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성화에 관한 작품들이 탁월하게 느껴지는 것도 바로 성경과 복음적 신앙 경험의 질료를 이러한 틀을 형상으로 사용하여 개혁 신학의 성화론을 빚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틀의 사용이 존 오웬의 성화론에 준 큰 유익 중의 하나는 죄의 본질, 신자의 마음 그리고 외적인 삶과의 관련을 통합적으로 다룰 수 있었다.
B. 작용하는 성향으로서의 죄
둘째로, 작용하는 성향으로서의 죄이다. 존 오웬은 죄의 작용의 본질을 마음의 성향이라고 본다. 이러한 죄의 성향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죄의 작용하는 성향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적의(敵意, enmity)이다. 그리고 이 적의는 다시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반감(aversion)이고 다른 하나는 대적(opposition)이다. 그리고 이 죄는 인간의 영혼과 마음 안에서 속임(deceit)과 강압(force)이라는 두 가지 수단을 가지고 역사한다. 이러한 죄는 다음 세 가지 특성을 가지고 인간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는데 첫째로 미친 기운 곧 이성의 판단을 뿌리치고 역사하는 광기(madness)이다. 둘째로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데 있어 드러나는 맹렬함(rage)이다. 셋째로, 죄의 성향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때 그는 담대함(boldness) 내지는 무모함으로 행동하게 되는 바, 이것이 바로 죄가 신자의 마음 안에서 역사하는 특성들이다.
존 오웬의 성화론의 강조점은 이러한 죄의 역사하는 작용을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다룰 수 없다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물론이고 중생한 신자라고 할지라도 이러한 죄의 강력한 작용과 역사를 스스로 처리할 수 없다고 본다. 그리하여 신자는 비록 구원받고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이 죄를 다룸에 있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구원의 과정 뿐 아니라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도 인간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보여주심으로써 그 모든 과정을 하나님을 인정하는 과정으로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투쟁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한 가지를 회복하고자 경륜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의존 안에서의 절대적인 사랑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화될수록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게 되며 이러한 사랑의 교통 안에서 인간은 인간으로서 가장 훌륭한 존재가 되고 거기에 합당한 작용을 하게 되어 그의 모든 삶이 덕스럽게 되는 것이다.
II. 죄의 본질에 대한 역설적 개념
존 오웬은 죄의 개념을 밝힘에 있어 장황하게 신정론의 문제를 다루지는 않는다. 선하신 하나님이 왜 죄를 이 세상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셨는가 하는 논쟁보다는 죄의 본질적인 개념을 밝힘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신자의 성화의 과정에 필요한 논리의 토대들을 놓고 있다.
A. 죄에 대한 적극적 정의
첫째로, 죄에 대한 적극적 정의이다. 존 오웬은 죄를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지 않으려는 인간의 반항과 또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이라고 규정한다. 율법을 따라 살지 않으려는 반역과 살지 못하는 무능은 구별되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형이상학적인 개념으로서의 죄의 성향은 인간의 영혼 안에 힘으로 존재하고 그것이 마음에 영향을 미침으로 실제의 삶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오웬의 신학이 가지고 있는 강점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다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외적인 모든 행동과 삶은 그의 영혼과 마음 안에 있는 경향성이나 성향과 도덕적으로 필연적인 연결을 이루고 있으며 이것들은 구분되기는 하지만 나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주의는 외부적으로 드러난 행실을 율법에 맞추려는 노력이지만 복음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변화시켜 율법을 기뻐하고 거기에 부응하는 삶을 살게 한다는 것이 이 문제에 대한 오웬의 입장이다. 사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총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인간의 영혼과 삶에 미치는 복음의 효과의 총체성도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런 점에서 오웬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의 가르침과 사도 바울의 신학에 나타나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지만 존재와 작용에 있어서는 그 둘이 통합을 이루는 일원론적인 인간관을 제시한다.
B. 은혜의 결핍으로서의 죄
둘째는, 죄를 설명함에 있어 아우구스티누스의 윤리론과의 관련이다. 존 오웬은 죄의 실재성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는 악을 선의 결핍으로 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담론을 따르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영적 선을 행하는 것은 은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악을 행하는 것은 악한 의지를 통해서인데 이것은 곧 선한 의지의 결핍이며 은혜의 결핍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선을 행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적극적인 요인으로 작용을 하지만, 악을 행하는 것은 선을 행하게 하는 그 요인이 결핍됨으로 악한 의지에 굴복하여 발생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전자를 작용인(causa effectiva)그리고 후자를 결함인(causa defectiva)라고 보았다.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은 플라톤의 해석과 차별성을 가지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플라톤적 사유인 ‘선의 결핍(privatio boni)’ 이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죄에 대한 이러한 부정 신학적인 해석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적 전통을 따른 것이다.
1. 악: ‘선의 결핍’(privatio boni)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모든 만물은 일자를 시점으로 하여 그 존재도에 따라 인간으로부터 동물과 식물 그리고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층위를 이룬다. 이것이 바로 존재도의 개념이다. 하위의 사물은 상위의 사물에 비해 있음을 결여하고 있으며 있음을 결여한 것만큼 그것은 선의 결핍(privatio boni)이 된다. 그리고 이것을 악으로 보는 것이다. 일자는 완전하고 무한한 있음이지만 인간은 그보다 덜 한 있음을 가지며 동물은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은 있음을 결여하여 그만큼 더 악을 지니게 되는데 신플라톤주의의 ‘모든 물질은 악이다’라는 견해 곧 물질개악설이 여기에서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인으로 회심한 이후 이 같은 명제를 가지고 씨름하면서 악을 선의 결핍으로 보는 점에 있어서는 신플라톤주의의 존재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도 선의 결핍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도입함으로써 이원론의 문제를 극복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조된 모든 만물이 선하였다는 성경의 진술을 진리로 받아들이며 이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였다. 즉 만물이 하나님만 못한 것은 하나님이 각각의 사물들에게 지정하신 바이며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피조물이 창조주만 못하지만 하나님은 있음의 정도의 다양성을 통해 당신의 세계를 아름답게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만물은 하나님만은 못하지만 자신에게 지정된 있음을 존재 안에 소유함으로써 선함을 갖는다고 보았다. 사물에 있어서 악은 하나님의 있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지정된 있음을 상실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인간 역시 하나님에 의해 지정된 있음의 정도 안에서 선한 존재가 되며 그것을 상실할 때 악이 되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악과 관련하여서는 자연적 사물이 지정된 있음을 결핍함으로 초래하게 되는 자연악이 아니라 영혼이 고유한 있음을 결핍함으로 이르게 되는 도덕악으로 설명된다.
2. 죄: 은혜의 결핍(privatio gratiae)
이처럼 존 오웬은 죄의 존재 원리를 설명함에 있어 그리스 철학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적 신학의 도움을 받았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은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를 다룸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이론적인 기초가 된다. 그는 개혁파 정통 스콜라주의자들의 전통을 따라 자신의 신학 속에 과다한 형이상학을 그 자체로서 개진하는 것을 삼가고 있다. 그러나 내재하는 죄에 관한 교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모든 탁월한 교리의 진술은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담론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의 성화론은 이러한 성향으로서의 죄를 어떻게 약화시키고 소멸에 가깝도록 무력화함에 있어서 복음과 성령이 어떻게 지혜롭고 능력 있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주고 인간은 이의 촉진을 위해 무엇을 하여야 하는지를 드러내 보여준다. 존 오웬은 바로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적인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부정 신학적 방법으로 죄를 설명하였다. 중세신학에 있어 부정신학이라는 방법론은 결코 신학적으로 긍정의 반대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것들을 설명하는 방식이었다. 존 오웬은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죄를 은혜의 결핍으로서 설명한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선악론의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토대로 은혜를 설명한 것인데 존 오웬에게 있어 결핍으로서의 죄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첫째, 외적인 삶에 있어서 영적으로 선한 행위들이 결핍된 것이다. 둘째, 내적인 마음에 있어서는 이러한 영적인 선을 가진 행위들을 산출하기 위한 힘의 결핍이다. 셋째, 영적인 생명의 원리의 결핍이다. 곧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생명을 누리고 영적인 힘과 행위들을 산출하는 성령의 원리가 결핍된 것이다. 따라서 이 셋째는 앞서 언급한 두 가지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 결핍은 절대적인 결핍과 상대적인 결핍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비중생자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원리가 절대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반면에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하는 신자들의 경우에는 이러한 원리의 활동이 약화되므로 상대적인 결핍 상태에 있는 것이다.
C. 실효적인 힘으로서의 죄
셋째로, 죄는 실효적인 힘이다. 죄는 영적인 선의 결핍이지만 그것은 실효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오웬이 죄를 실효적인 힘으로 묘사하는 것은 욕망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존 오웬은 칼빈과 동일하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내재하는 죄를 필연성으로 설명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심리철학적 설명을 계승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그 지성이 계명되어 하나님의 진리를 어느 정도 의식하고, 마음이 선에 이끌리면서도 온 마음을 다해 이것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내재하는 성향화된 악한 욕망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것을 ‘영혼의 무게’라고 표현하였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악을 행함으로써 만족을 누리지만 그 사람의 마음 안에는 지속해서 악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이 생겨나게 되는데 이 성향이 그로 하여금 또 다른 악을 행하게 하는 필연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물리적인 힘은 물리의 법칙을 따르는 운동력이지만, 도덕적인 힘은 인간의 영혼의 경향성 안에서 작용하는 욕망의 힘이다. 따라서 물리적 필연성은 사물의 운동에 있어서 전건(前件)과 후건(後件)사이에 피할 수 없는 힘의 관계이지만, 도덕적 필연성은 마음의 운동에 있어서의 그것이다. 즉, 인간이 외부의 사물을 육체의 감관으로 감각하고 마음으로 지각하며 지성으로 인식하게 되는 과정뿐만 아니라, 그렇게 인식한 것에 대해 행동으로 반응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죄는 도덕적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그 영향은 바로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죄의 성향의 크기가 힘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며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의 전건과 후건 사이를 필연성으로 연결하는데 이것이 지향하는 방향이 바로 악이다. 곧, 하나님께 대해 적의를 품고 반감과 대적으로 역사하게 하는 경향성인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 밖에 있는 힘이 아니라, 선택하는 인간의 의지 안에 있는 힘이다. 그리하여 신자는 자신 안에 죄가 융성하게 될 때, 원하지 않으면서도 악을 향하여 이끌리게 되고 그러면서도 또한 싫지 않은 상반된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죄가 그 사람의 마음 안에서 불러일으키는 수많은 ‘모순율들’(contradictions)을 반영한다.
마음의 성향이 악함으로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은 필연성으로서 신자로 하여금 죄를 향하여 몰아붙이며 작용하는 힘인데, 의지 안에서 강제력을 지니게 된다. 성화의 과정에서 신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든지 죄의 이러한 힘을 경험한다. 만약 이러한 죄의 힘을 전혀 경험하지 않는다면 그는 중생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오웬의 판단이다. 그래서 사도바울도 죄가 악을 향하여 자신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죄의 힘을 크게 경험했던 것이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2-24).
신자가 죄를 발견하고 거룩해지고자 할 때, 신자 안에 있는 죄는 성령의 조명에 의해 객관화된다. 이 때 신자는 자신이 내재하는 죄의 힘에 의해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하지만, 존 오웬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죄의 필연적인 성향은 그의 의지 자체에 있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하여 신자가 자신이 선택한 이전의 죄로 인하여 죄의 필연성을 자신 안에 스스로 형성한다고 보았다. 성화에 있어서 이러한 죄를 죽이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필요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존 오웬은 죄가 가지는 실효적인 힘을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라고 보았다. 그 힘은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경향으로서 인간의 마음 안에서 구체적인 힘을 행사하는데, 끊임없이 인간의 지성을 속이고 정서를 부추기며 의지의 동의를 받아 죄를 행동으로 산출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죄에 대한 오웬의 ‘인격화’(personification)의 설명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죄의 인격화된 설명은 기독교의 전통을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잠언 8장에 나오는 죄에 대한 인격화의 설명은 같은 책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인격화된 죄의 화법을 통해 성경의 전통 아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이러한 묘사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D. 역설적 개념의 종합
존 오웬의 성화론의 토대가 되는 죄의 형이상학에는 종합하기 어려운 역설의 개념이 있다. 즉, 죄를 은혜의 결핍으로 보면서도, 결핍인 그 죄가 그토록 강력한 실효적인 힘을 인간의 마음 안에서 행사한다는 상반된 사실이다. 이것은 그의 신학 안에서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신학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철학적인 문제이다. 존 오웬은 자신의 저작 다른 곳에서도 이 죄의 역설의 문제를 풀어보이지는 않았다.
이 결핍의 상태는 결핍임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힘을 갖는다. 이것이 바로 죄의 역설이다. 이처럼 은혜의 결핍은 오히려 강한 힘을 갖는다. 따라서 영혼이 죽어 있는 자는 아무 일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행실들’을 산출한다. 그리고 그것은 강한 힘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은 비중생자 안에서 가장 강력하게 나타나며 성화의 은혜가 결핍된 신자 안에서도 부분적으로 재연된다. 은혜의 결핍으로서의 죄가 갖는 강력한 힘의 역설을 오웬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다. 은혜의 결핍을 통해 역사하는 죄의 힘은 은혜의 결핍의 단순한 결과가 아니다. 이것은 은혜 자체가 인간의 마음 안에 역사하는 강력한 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자라 할지라도 여전히 부패한 죄성이 남아 있는 무능한 존재이기 때문에 은혜가 거두어지거나 혹은 약화될 때 본성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의 경향성의 힘이 발휘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장 훌륭한 신자에게 가장 치열한 성화의 실천을 강조하는 것도 오웬의 신학에서는 정당성을 얻는다. 왜냐하면 성화된 신자의 거룩한 생활과 선한 경향성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성화는 내재하는 죄의 본성을 근원적으로 거룩하게 하는 총체적 작용이지만, 진전된 성화가 성령 없이도 그 거룩함의 결과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성화된 신자의 본성은 오직 내주하시는 성령의 끊임없는 은혜의 작용에 의해서 변화된 본성을 유지한다. 그리하여 존 오웬의 성화 신학의 틀 안에서 보자면 어떠한 성화의 진전을 이룬 신자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와 성령의 은혜를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덜 의지할 근거를 발견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신자일수록 그 자신이 더욱 그리스도와 성령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 없이는 진전된 자신의 성화의 상태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화의 신학을 전개하면서 오웬은 철저히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론을 전개한다. 그리고 그 모든 의존을 통해 누리는 신자의 복음적 이점과 은혜의 유익이 그리스도의 중보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죄의 본질에 대한 역설적인 설명을 근거로 오웬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접근을 뒤집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웬은 궁극적으로 실효적인 힘으로 신자 안에 역사하는 죄의 현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은 성령을 통해 그치지 않을 것이며 결국 참된 구원과 영화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확신하였다.
III. 죄의 작용과 은혜의 작용
오웬의 인간론에 있어서 중생한 신자는 죄의 작용과 은혜의 작용 사이에서 갈등하는 존재이다. 신자 안에 있는 죄는 내재하는 법으로서 반감과 대적으로 역사한다.
A. ‘마음의 틀’의 개념
존 오웬은 성화를 다루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한 강조를 늦추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과 세계에 대해 단지 피동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성으로 알게 되는 계시와 감각을 통해 접하게 되는 외부 세계와의 접촉 속에서 끊임없이 자기에게 고유한 영혼의 반응을 보이는 존재라고 생각하였다. 특히 도덕적인 문제와 관련해서 인간의 영혼의 작용은 자신 안에 이미 내재하고 있는 경향성을 따르게 되는데 이것이 마음 안에서 성향으로 나타난다.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이해하여야 한다.
1. ‘프로네마’(pronema)와 ‘마음의 틀’
인간의 영혼의 경향성은 작용하는 마음 안에서 성향으로 나타난다. 이 성향은 사물을 인식하고 감정을 느끼고 또 의지로써 행동하는 영혼의 모든 활동에 일관된 영향을 주는데 이것을 가리켜 존 오웬은 ‘마음의 틀’(the frame of heart)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명백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있어서 ‘프로네시스’(pronesis)의 개념을 차용한 설명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프로네시스는 영혼의 기능에 속한다. 그는 자신의 책, 『영혼에 관하여』(peri pshyches)에서 이러한 사실을 말하였는데 모든 사물은 자신의 고유한 존재와 작용을 유지하는데 그 힘이 곧 영혼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는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과 식물, 심지어 무생물까지도 영혼을 가진 존재이다. 그리고 그 영혼은 곧 경향성이다.
그러나 신학자 존 오웬이 성화와 관련하여 프로네마의 교리를 진술할 때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을 따랐다기보다는 사물의 존재와 경향성을 설명하는 방식을 차용한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놀랍게도 신약성경 안에 성화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6-8). 여기에서 ‘생각’이라고 번역된 희랍어 단어가 ‘프로네마’(φρόνημα)인데 이것을 정확하게 표현하면 ‘생각되어지는 성향’이다.
인간은 누구이든지 이러한 ‘프로네마’를 가지고 있어서 마음 안에서 스스로 발생하는 ‘상상’(imagination)이나 외부 사물과의 접촉으로 말미암는 인식과 ‘정동’(情動, affection)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것이 바로 존 오웬이 성화론에서 자주 거론하는 마음의 틀의 개념이다. 이것은 외부의 사물들을 인식하거나 상상을 통해 건져 올린 인상들이 도덕적 결정에 미치는 구조이다. 성화와 관련하여 이 문제들을 더 적극적으로 다룬 작품이 바로『신령한 생각의 틀』(Spiritual Mindedness)이다. 존 오웬에게 있어 인간의 마음의 틀은 죄의 성향의 지배를 받으면 죄스러운 틀을 지니게 되고 은혜의 성향에 의해 지배를 받으면 은혜스러운 틀을 지니게 된다. 전자는 자기사랑과 정욕을 통한 육욕의 만족을 지향하고 후자는 하나님 사랑과 거룩한 열심을 통한 하나님의 기쁨을 지향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행복해지기보다 거룩해지기를 원한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이러한 마음의 틀을 염두에 둔 언급이다. 이러한 마음의 틀이 인간의 지성에 관여하게 되면 생각이 악한 것들에 대한 상념으로 가득 차게 되고, 감정에 관여하게 되면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의지에 관여하게 되면 그 욕망에 굴복하기에 좋은 이점을 얻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틀은 결국 그 틀에 적합한 외적인 삶의 행동을 산출하게 된다.
2. ‘마음의 틀’의 심리철학
존 오웬의 성화론에 있어서 ‘마음의 틀’ 개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에게 있어 이것은 신자에게 이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즉 인간의 마음은 한편으로는 자기 밖의 외부 세계에 접하여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안의 내면세계에 접하여 있다. 인간의 마음 안에서 이 두 세계는 만난다.
첫째로, 자기 밖의 세계와의 접촉이다. 이 세계는 둘로 나뉘는데, 감각적인 물질의 세계와 지성적인 사유의 세계이다. 인식의 주체로서 인간은 자기 밖의 세계와 접촉하는 두 종류의 창문을 갖는다. 육체의 감관과 오성이 그것이다. 물질적 세계는 전자를 통하여 들어오고 영적인 세계는 후자를 통하여 들어온다. 신자에게 있어서 성경의 진리는 영적인 세계를 만나는 가장 중요한 통로이며, 믿음의 행사를 통하여 이러한 인식이 활발해진다. 이렇게 들어온 인상들이 마음에 투영되는데, 이 때 마음은 이러한 인상들을 파악하고 느끼고 인식할 때 일정한 방향으로 작용한다. 성화론에 있어서 마음의 틀에 대한 설명은 이러한 성향적 작용을 도덕과 관련하여 생각한다. 신자의 마음 안에 죄의 성향이 우세하면 그 영향으로 말미암아 악을 지향하는 쪽으로 프로네마가 형성된다. 이 프로네마는 단지 생각에 영향을 주는 프로네마가 아니다. 생각뿐 아니라 감정, 의지에까지 미치는 총체적인 영향력의 틀이다. 그러나 존 오웬이 ‘마음의 틀’로 표현한 프로네마는 본질적으로 여러 방향을 향해 작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두 방향, 즉 ‘육신’과 ‘영’이다. 여기에서 육신은 죄된 육체를 가리키는데 신자 안에 있는 옛 본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은 곧 성령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신자 안에 있는 새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프로네마가 작용하는 방향으로서의 육신과 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심리철학을 생각나게 한다. 그는 인간의 사랑의 대상을 궁극적으로 둘로 보았다. 인간은 자기를 사랑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든지 둘 중 하나이다. 하나님 아닌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은 자신의 만족을 위한 수단이라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그 사랑은 자기사랑으로 수렴된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들의 자기사랑은 자신의 존재를 공정하게 사랑할 수 없으니 영혼은 도외시하고 육체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존 오웬은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심리철학에 깊이 동의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시한 “인간은 진리의 밝은 빛에서 멀어질 때 필연적으로 자기의 육체밖에는 사랑할 수 없는 존재다.”라는 명제는 존 오웬에게서 “인간이 죄의 속임에 떨어질 때 그는 필연적으로 죄의 욕망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라는 명제로 전환된다. 이 명제의 전환이 의미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이 글의 논지를 벗어나는 것이다.
둘째로, 자기 안의 세계와의 접촉이다. 인간은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서만 마음의 프로네마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만 독특한 정신의 작용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상상이다. 존 오웬의 성화론에서 이 상상의 작용은 자주 언급된다. 왜냐하면 이 상상의 작용이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결과들을 통해 그의 프로네마의 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신자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징후를 거론하면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다루었던 내용이 바로 상상의 방향과 관련한 것이다. 즉 어떤 특정한 죄가 신자의 사고 기능에 깊이 관여할 때 그것은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징후라는 것이다. 천상적인 것이든 지상적인 것이든 어떤 사물이나 가치에 대한 상상이 죄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한쪽으로 방해를 받거나 격려를 받을 때 그것이 악한 방향이라면 그 사람의 프로네마가 악으로 기울어 있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명백하게 이미 그 사람 안에 내재하는 죄의 우세한 영향력의 결과이다. 인간은 바로 이러한 마음의 틀의 작용을 통해 자신의 내면의 상태에 부합하는 정서를 갖고 행동하게 된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일치하는 것이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5).
B. 죄의 활동: 반감과 대적
이러한 마음의 틀은 죄가 적합하게 활동하게 하거나 혹은 그 반대가 되게 한다. 죄가 활동하기에 적합한 마음의 틀이 형성되면 죄는 자신의 경향성을 발전시킬 좋은 환경을 갖게 된다. 죄는 신자 안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면서 자기의 계획을 이루어 간다.
1. 반감과 대적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는 두 가지 방식으로 활동하는데 하나님을 향한 ‘반감’(aversion)과 ‘대적’(opposition)이 그것이다.
첫째로, 하나님을 향한 반감이다. 존 오웬은 죄의 일차적인 활동을 하나님을 향한 총체적인 반감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반감은 지성과 정서 안에서 작용하는데 동일한 감정 안에서 행동으로 산출하도록 내재하는 죄와 더불어 나타난다. 죄의 활동으로서의 반감은 신자의 마음의 생각과 감정의 움직임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싫어하거나, 혹은 소극적으로 싫증내는 것을 가리킨다.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가 융성할수록 반감은 더욱 높은 강도로 나타난다. 신자 안에서 하나님을 혐오하고 싫증나게 하는 죄의 활동은 인간에게 주신 생각과 정서가 작용하는 목적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다. 존 오웬은 인간의 영혼의 기능을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성을 주신 것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발견하게 하기 위함이며, 정서의 기능을 주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또 사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죄는 지성과 정서 양면에 있어서 총체적인 반감을 깃들게 함으로 인간 본연의 의무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둘째로, 하나님을 향한 대적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죄의 반감이라는 활동이 의지와 함께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자 안에 있는 죄가 마음과 삶의 모든 방면에서 의지를 사용하여 하나님께 자신의 본질인 적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는 행동할 때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서도 작용한다. 어떤 생각들이 스쳐지나갈 때 그것은 대부분 인간의 의지의 선택을 넘어서는 일이지만 특정한 생각이 마음에 착상될 때 그것은 반드시 의지작용을 거친다. 의지의 작용은 소극적으로는 선택하는 작용이고 적극적으로는 선택한 것을 유지하거나 발전시키는 힘의 행사이다.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대적하는 활동은 인간의 의지 안에서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정서를 지배한 죄의 성향은 의지를 밀어부처 하나님을 향해 맞서게 한다. 이로써 신자는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 모든 죄의 작용은 죄가 얼마나 뛰어난 속임과 강압으로 역사하는지를 보여준다.
2. 반감과 대적의 대상
죄는 그것이 어디에 있든지 동일한 본질이다. 존 오웬이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특성과 활동 그리고 힘을 입증하기 위하여 비중생자들 안에 역사하는 죄의 능력을 예로 든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본질은 불신자 안에 역사하는 죄의 본질과 동일하다. 배교자 안에 역사하는 죄와 동일한 본질의 것이 신자 안에 내재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러면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대적하는 활동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답변될 수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존재와 지위이다. 내재하는 죄는 하나님의 존재와 지위에 대하여 반감을 품고 대적한다. 내재하는 죄는 결국 신자의 자기사랑의 경향성이니 자기사랑의 최종적 목표는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다(창 3:5). 인간은 의식 안에서 최종적 지위에 오직 하나의 존재만을 원한다. 자신이 최고의 존재이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최고의 존재이신 것을 견딜 수 없어 한다. 이것은 지위와 관련이 된다. 최고의 존재는 최고의 지위이며 최고의 지위는 하부의 도덕적 질서를 만드는 원인자이다. 인간이 최고의 존재가 되면 이하에 이루어지는 모든 통치의 질서들은 육욕을 따라 살기에 가장 적합한 것이 되지만, 반대일 경우에는 끊임없이 자신이 배척당하는 질서를 도입하게 된다. 이것이 내재하는 죄가 하나님의 존재와 지위에 대적하는 이유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심이다. 내재하는 죄는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심에 대하여 반감을 품고 대적하게 한다. 하나님의 성품은 그분의 행하심과 필연적인 관계이다. 사랑의 성품에서 사랑의 베풂이 나타나며 공의의 성품에서 심판과 상급이 드러난다.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직접 바라볼 수 없다. 그분의 성품에 대한 모든 지식은 그분의 행하신 개별적인 일들을 통하여 생겨난다. 내재하는 죄는 그분의 통치의 결과로 발생하는 개별적인 일들 안에서 죄가 궁극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커다란 계획에 역행하는 것들을 탁월하게 발견해낸다. 그러한 역행의 방향이 크고 분명할 때에는 죄가 더욱 강력하게 대적하게 되고 그것이 작고 덜 분명할 때에는 죄는 적게 대적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질서이다. 내재하는 죄는 하나님에 의해 지정된 질서에 대해 반감을 품고 대적한다. 이 질서는 이미 이루어진 질서와 앞으로 이루어질 질서를 포함한다. 이 질서는 도덕적인 질서로서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는 방식으로 정위된다. 나아가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유사한 추론이 필요하다. 그러나 내재하는 죄는 이 모든 질서를 거스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서는 자신에 의해 수립된 질서가 아니며 죄의 욕망을 따라 살게 하고자 하는 죄의 계획에 전면적인 도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부의 질서들은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하나님의 존재와 도덕적인 성품에 맞닿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 자신에 대한 반감과 대적이 그 모든 대상들에 대한 적의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는 것이다. 존 오웬은 이러한 구도에서 인간의 죄의 존재론적인 의미를 찾는다. 그러므로 오웬에게 있어서 이 죄는 참으로 심각한 것이다. 죄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어떠한 성화의 진전도 기대할 수 없다고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관심과 죄에 대한 관심은 정확하게 비례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그만큼 신자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갈망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며 거룩한 삶을 갈망하는 것만큼만 죄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고, 또한 죽이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C. 죄의 속임: 실재와 표상
존 오웬의 성화론에 있어서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속임’(deceit)은 인식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에서 오웬은 사물의 ‘실재’(realitas)와 ‘표상’(phantasmata)을 구분하는 플라톤적인 인식론을 따르면서 존 칼빈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다. 실재와 표상의 문제는 한편으로는 존재론과 관련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식론과 관련된다. 특히 데카르트 이후 사물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 넘어온 다음에는 이 문제가 더욱 중요하게 되었다. 오웬은 이러한 철학사의 담론들을 이해하는 가운데 자신의 성화의 교리를 사용할 때에는 죄의 속임과 관련하여 이 문제를 풀어간다. 존 오웬은 실재와 표상의 문제에 대해 철학적인 설명을 시도하지 않는다. 다른 여러 경우에서처럼 그의 관심은 경건과 실천에 있다. 바로 그러한 목적을 위해 죄의 문제를 다루어간다.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가 영적인 것들과 물질적인 것들을 인식할 때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지 설명한다.
죄는 하나님께 대한 적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는 신자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그 사람 안에 내재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키워간다. 죄의 이러한 활동은 신자의 마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서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는 마음의 악한 성향의 원인이기도 하고 또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 둘은 끊임없는 순환관계를 이루는데 이는 마치 인간의 순종하는 행동과 은혜의 경향성이 순환관계를 이루는 것과 유사하다. 죄의 활동은 결코 객관적인 죄 자체의 작용일 수 없다. 주관적인 의미에서의 죄는 항상 인간의 마음과 떨어져서 작용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악한 마음의 성향을 가지고 끊임없이 죄의 성향으로서 하나님께 반감을 품고 대적하였다고 치자, 그가 죽었을 때 그렇게 강력하게 역사하던 죄는 어디로 갔는가? 이런 질문은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와 마음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죄의 활동은 단지 객관적인 죄 자체의 활동이 아니라 -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지만 - 주관적으로 그것을 애호하는 신자의 마음의 작용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스스로 속임을 당하는 것이다.
존 오웬은 이 작품 속에서 죄가 인간의 영혼을 속이는 것에 대해 마치 의사가 환자를 수술하기 위하여 집도하는 것 같은 세심함으로 설명해 나간다. 그의 성경적인 경험 신학의 진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는 마음 안에서 작용하면서 정서를 육욕으로 물들게 하고 의지를 육욕에 굴복하게 준비시키는데 이런 모든 파괴적인 작용의 첫 걸음은 ‘생각’(mind)을 속이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인식론에 관한 체계적인 설명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성화론을 살펴보면 일관성 있는 논리의 틀로서 인간의 인식작용을 설명한다. 그는 ‘오성’(understanding)과 ‘이성’(reason), ‘생각’(mind), ‘정신’(spirit)등의 인식론적인 용어를 질서정연하게 제자리에 배치하며 성화론을 전개한다. 그래서 철학에서 정리된 인식론을 가지고 그의 성화론을 대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정신과 심리작용에 대한 그의 설명이 놀라운 일관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탄하게 된다.
존 오웬에게 있어 ‘오성’은 - 이 말은 우리말 개역성경에서 자주 ‘총명’으로 번역되었다 -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지성의 능력을 의미한다. 그런데 정서가 육욕으로 물든 신자의 마음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수많은 사물들이 남긴 정욕적인 인상으로 더럽혀지게 되는데 그러한 더러움이 바로 신자의 총명을 흐리도록 오성에 작용하는 혼란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죄의 속임이다. 신자의 생각이 죄의 속임에 지배당하게 되면 마음은 신속히 죄를 향하여 경계를 풀게 되고 정서의 사랑을 받으며 거기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 뿌리를 내린 악한 생각들은 정욕의 도움을 받으며 죄가 성향을 강화하도록 먹이를 제공한다는 것이 오웬의 생각이다. 그가 성화론에 있어 생각의 중요성을 수없이 강조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서 지적되는 ‘바른 생각’의 중요성은 그의 신학에 있어 간과할 수 없는 강조점이다. 왜냐하면 신자의 마음의 모든 미끄러짐은 바로 생각의 이탈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각 지킴은 곧 신자가 생각하여야 할 바를 생각하고 그리하지 말아야할 바를 의지적으로 떨쳐버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존 오웬은 이것이 마음지킴보다 앞서야 할 경건의 실천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잠시 마음의 자유를 위해 생각을 죄에 개방하는 신자는 자유보다 더 큰 구속을 맛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더 큰 영혼의 자유를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을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집중하고 복음의 진리들을 묵상하는 가운데 죄의 속임으로부터 매 순간 자신을 지켜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구원해주신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충실해야 할 신자의 의무이다.
D. 죄의 강압: 욕망론
존 오웬의 성화론에 있어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강압은 곧 거칠게 신자를 밀어 붙이는 내적인 힘이다. 그리고 이러한 힘은 신자의 욕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신자는 자신 안에 내재하는 죄를 단지 내재하게 함으로써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신 안에 있는 죄가 실제의 삶에 있어서 산출될 때 가장 큰 희열을 맛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희열을 향한 욕망은 증대되어 이 욕망을 사용하여 죄는 지성에서 용납되고 정서의 강한 후원 아래 의지의 동의를 조르며 산출되려고 신자의 내면을 몰아붙인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경험했던 내재하는 죄의 법이다.
존 오웬은 법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첫째는, 객관적인 규범으로서의 법으로 이것은 인간이 제정한 규칙이나 혹은 하나님에 의해 객관적으로 주어진 율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둘째는, 주관적인 성향으로서의 힘이다. 이것은 원인과 결과에 있어 필연성을 구성하는데 이는 이것이 다양하지 않고 한 가지 방향으로 일관되게 몰아붙이는 내적인 강제력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울이 고백한 바와 같이 신자 안에서 몰아붙이는 강제력을 지닌 이 죄의 법의 정체는 무엇인가? 존 오웬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신자 안에는 거듭난 새 본성과 옛 본성이 내재하며 죄는 바로 이 옛 본성에 작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는 신자의 옛 본성에 기생하며 거듭난 새 본성에 반항하는 것이다. 그러나 옛 본성은 신자 안에서 중생하기 전과 같은 유리점을 갖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중생과 함께 자신을 힘쓰게 하던 ‘죄와 사망의 법’이 괴멸되고 ‘생명과 성령의 법’이 심겨졌기 때문이다(롬 8:2). 내재하는 죄가 융성하여 신자를 밀어붙이는 힘으로 작용할 때 그것은 양심을 거스르는 강력한 욕망의 힘이다. 이러한 욕망은 앞에서 설명한 프로네마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마음 안에 악한 성향이 충분히 형성되었을 때 분출하는 욕망은 가공할 힘을 가지고 지성 안에서 양심을 거스르며 정서와 의지 안에서 강압으로 작용한다. 이 때 신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명백한 양심의 판단에도 불구하고 죄를 산출하도록 ‘조르는’(agitating) 정서와 지성의 동의를 기다리는 의지로부터 총체적인 강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 죄를 산출하고 나서야 일시적으로 강제력이 해소되는데 그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마음의 더 큰 악한 성향을 강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존 오웬은 이런 갈등 속에 있는 신자의 존재를 결코 비관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충분히 부주의하고 게으를 정도로 낙관적으로 다루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신자 안에 역사하는 죄의 작용은 끊임이 없지만 언약 관계를 토대로 하나님이 신자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두 가지 작용의 무한함 때문이다. 그것은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와 은혜의 힘에 대한 무한한 공급이다. 신자는 믿음과 성령 안에서 온전한 순종을 통해 은혜 언약 안에서 약속된 유업들을 가지고 죄와 더불어 싸워 이길 수 있다.
IV. ‘죄 죽임’이란 무엇인가?
존 오웬에게 있어 죄 죽임(mortification of sin)은 영혼 안에 있는 죄의 경향의 약화이며, 마음 안에 있는 죄의 성향의 소멸이다. ‘죄 죽임’이란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으로서의 죄를 약화시키고 소멸함으로써 그의 고유한 작용을 수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신자의 영혼 안에 있는 죄의 경향성의 약화는 마음 안에서 작용하는 죄의 성향을 죽임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러나 신자가 죄를 죽인다는 것은 완전히 죽여 존재하지 않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을 지향점으로 삼을 수는 있지만 현세에서는 불가능하다. 그가 아무리 성령 충만하여도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존재하지 않도록 괴멸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죄를 죽인다는 것은 죄의 성향을 감추거나 방향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연적인 본성을 개선함으로써 삶을 고칠 수 있는데, 이것은 죄 죽임을 통해 도달하려는 거룩한 변화가 아니다. 죄를 죽이지 않은 신자도 종종 죄의 유혹을 뿌리치거나 죄악된 행동을 그칠 때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죄 죽임의 실천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간헐적이고 우연적인 실천이기 때문이다. 죄 죽임은 곧 하나님을 거스르며 살고자 하는 인간 마음의 성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안에서 정욕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도록 그 힘을 죽이는 것이다. 죄 죽임의 실천은 거룩한 삶을 위한 신자의 필수적 의무이다. 이러한 교리를 입증하는 명백한 성경구절로 다음을 제시함으로써 죄 죽임의 교리를 전개한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V. 죄 죽임의 필요성: 하나님 형상의 회복
존 오웬은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가 죄 죽임인 것을 강조한다. 그는 죄 죽임이 없는 모든 선행과 봉사도 하나님을 향한 적대감을 지닌 채 이루어지는 것들이므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며 그러한 행실들이 주는 복음적인 유익도 영혼과 마음 안에서 누리지 못한다고 단언한다.
A. 성화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존 오웬은 구원받은 신자의 영적인 실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것은 구원 받은 신자가 성화를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기초와 환경이 된다. 오웬의 신학에 있어서 성화의 목표는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다.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形狀)은 하나님을 닮은 영혼과 정신 안에서 발견된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에서 인간의 지성이 핵심을 이룬다고 보았다.
인간에게 고유한 하나님의 형상은 도덕적인 형상으로서, 타락 이후로 상실되어 없는 것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영적이고 정신적인 기능 안에 남아 있기에 모든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본다. 그러나 고유한 의미에서는 오직 중생한 신자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 중생과 함께 회복된 신자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잔존하는 죄로부터 끊임없이 정결케 되어 완전함에 이르도록 작정되었는데 이 형상이 완전하게 회복될 때 그의 지상에서의 삶은 그리스도를 더욱더 닮게 될 것이다. 그의 성화론에서 하나님 형상의 회복 개념은 목적론적인 인간관을 기초로 하고 있다. 세계의 창조는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하여 창조되었고,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이러한 목적을 따라 살기에 적합하도록 부여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목적이며, 인간은 그 안에서 완전한 안식과 행복을 누린다고 본다. 그러므로 신자가 성화를 통하여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당시의 인간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웬에게는 성화를 통하여 진정한 신자가 되는 것이 곧 창조 목적에 부합하는 진정한 인간이 되는 유일한 길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소유한 사람이다. 그래서 존 오웬은 아담과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창조 목적을 연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부여받은 성향적인 은혜(habitual grace)와 원의(original righteousness)는 그 사람 자신에게 책임 있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창조하신 목적을 이루기에 적합하였다.” 그러나 존 오웬은 신자가 회복하여야 할 하나님의 형상을 제시할 때에, 그 모본을 아담에게서가 아니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찾았다.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존 오웬의 신학은 칼빈의 것과는 유사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 이론을 전개한 목적이 달랐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가 인간 존재의 본질을 규명하고자 형이상학적인 담론으로서 그것을 다루었다면, 존 오웬은 지극히 목회적이고 경건적인 목적에서 다루었기 때문이다. 즉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는 영혼이라는 존재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다루었고, 존 오웬은 칼빈과 함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한 삶을 살기에 적합하도록 회복되어 가는 인간 본성의 변화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다루었다.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형상 개념을 본질적으로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 존재의 역동적인 원리이며 그것이 주로 인간 지성의 기능 안에 있다고 본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의 신학적 개념을 계승하고 있다.
죄는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의 온전한 회복을 가로막는 유일한 방해물이다. 신자는 죄의 영향을 마음으로 지각하며 삶의 실천 속에서 보게 된다. 또한 거듭난 신자 안에는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고자 하는 중생한 본성이 있다. 그리고 이 본성은 하나님의 은혜가 공급되기를 갈망하게 되는데, 죄 죽임의 실천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신자 안에 더욱 풍성하게 역사하게 되는 하나님의 방법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의무는 중생한 신자가 일평생 실천해야 할 의무이다. 비록 적극적으로 어떤 악을 행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죄 죽임의 일상적인 실천이 멈추면 그 마음은 잔존하는 죄의 영향력과 인간 본성의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죄의 지배의 상태로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죄 죽임의 실천에 자신을 드리는 모든 신자들은 은혜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의 공로를 믿음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매달리게 된다. 이러한 삶의 반복을 통해 신자는 정욕을 이기고 은혜의 원리를 따라 살게 된다는 것이 오웬의 의견이다.
B. 죄 죽임의 필요성
존 오웬은 신자에게 있어서 죄 죽임이 필요한 이유를 여섯 가지 이상으로 제시하는데 이것들은 크게 두 범주로 나누어진다. 신자가 죄 죽임을 실천하여야 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죄의 본성과 작용 때문이며 또한 신자의 중생한 본성과 소명 때문이다.
1. 죄의 본성과 작용 때문에
첫째로는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의 본성과 작용 때문이다. 비록 중생한 신자라 할지라도 내재하는 죄가 항상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죄가 신자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죄는 지금 신자에게 내재하는 것 이상의 보다 원대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죄의 이러한 목적과 계획은 하나님께서 신자를 구원하신 목적과 계획에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 안에 내재하는 죄를 죽이지 아니하면 구원받았다 할지라도 구원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없다. 결국 그는 내재하는 죄의 융성한 작용으로 말미암아 마음과 삶까지 모두 하나님을 대적하는 데 바치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는 회심하는 그 순간부터 자기에게 내재하는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진지한 열심으로 죄 죽임을 실천하여야 한다.
2. 중생의 본성과 소명 때문에
둘째로는 중생한 신자 자신의 본성과 소명 때문이다. 중생한 신자는 자기 안에 새로운 본성을 부여받은 사람이다. 이 본성은 거룩한 본성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본성이다. 또한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파악하고 그것을 애호하는 본성이다. 신자는 중생과 함께 새로운 본성을 부여받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그에게 내주하시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 되는 것이다. 또한 신자는 중생한 본성으로 말미암아 죄를 죽이지 않으면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울 수 없기 때문에 죄 죽임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신자의 내면이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여지고 그것이 거룩한 삶을 위한 성향이 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내재하는 죄를 죽이는 정도에 비례한다. 죄를 죽이면 은혜는 반드시 융성해진다. 정확히 말하면, 은혜가 살아나지 않고서는 죄가 죽지 아니하는 것이니, 죄를 죽이는 과정에서 이미 은혜의 살아남을 동반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신자는 구원과 함께 이루어야 할 거룩함이 있기에 죄 죽임을 실천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본받아 신자도 거룩해져야 하는데 이것을 가로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신자 자신에게 내재하는 죄만이 이 거룩함을 방해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거룩함에 이르기를 사모하며 자기 안에 있는 죄를 원수처럼 여기며 죽여야 한다. 완전한 파멸은 불가능할지라도 마치 그것을 목표로 하는 것처럼 죄 죽임을 실천하여야 한다. 이 의무는 평생에 힘쓸 의무이니, 중생한 신자에게 있어 거룩함에 이를 의무가 평생에 계속하여야 할 의무이기 때문이다. 죄 죽임이 없다면 그의 거듭난 본성은 서서히 고사할 것이며 은혜는 쇠잔하여질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정욕에 지배를 받게 될 것이며 급기야 유혹을 만나 죄를 산출할 적당한 기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은밀하게 혹은 공개적으로 악한 행동을 산출할 것이다. 그러므로 죄 죽임이 없는 부덕한 삶은 자신을 파멸로 이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문을 불러 일으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신자는 자신을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욕을 돌리며 그리스도를 현저히 십자가에 다시 못 박는 배교에 가까운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자가 죄 죽임을 실천하여야 할 이유이다.
존 오웬 뿐만 아니라 모든 청교도들은 진정으로 거듭난 신자는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기보다 거룩해지기를 열망한다고 판단한다. 죄 죽임이 없이는 이러한 거룩함을 삶 속에서 이루어 하나님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도 없고 창조주이시고 구속주이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C. 죄 죽임에 대한 약속
존 오웬은 죄 죽임의 실천을 통해 신자가 약속받고 있는 영적 생명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은혜의 보증과 성장 그리고 평안의 향유이다. 신자의 죄를 죽이는 삶은 꼭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름다운 약속이 있다. 그러나 모든 죄 죽임의 실천이 즉시 그 약속을 현실화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끊임없이 죄를 죽이는 삶을 살면서도 여전히 고통 가운데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하나님은 신자 각 사람이 얼마나 진실하게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죄를 미워하고 죄 죽임을 실천했는지 알고 계신다. 어떤 사람은 많이 실천했는데도 죄를 적게 죽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적게 실천했는데도 좀 더 나은 도덕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전자의 사람이 훨씬 더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신자가 죄를 죽이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중생과 함께 그들 안에 주신 은혜는 보존된다. 죄의 역사는 영혼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죽지 않은 죄의 역사는 영혼을 어둡게 하나 죄 죽임의 실천은 날마다 새로운 생기를 영혼에 불어넣고 영혼에 밝은 광명을 준다.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죄 죽임의 실천은 하나님께서 신자 안에 주신 거룩한 은혜를 성장하게 한다. 신자 안에 있는 성화의 은혜는 시작과 발전과 퇴보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죄 죽임의 실천에 달려 있다. 죄 죽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도구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신자는 중생과 함께 심겨진 은혜 안에서 자라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자신 안에 내재하는 죄를 죽이는 신자만이 평안을 누리게 된다. 이 평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누리는 평화이니 끊임없이 죄 죽임을 실천하는 신자의 마음은 그리스도께서 거하시기 가장 좋은 집이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그들 안에 함께 계심으로 그들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누리는 하나님과의 평화 안에서 온전한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이 하늘 평안은 죄 죽임 없이 누릴 수 없는 평안이니 성도의 끊임없는 하늘 위로가 여기에서 나온다.
IV. 완전한 구원과 불완전한 완성 사이에 있는 인간
이 논문의 기초 본문인 로마서 8장 13절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는 구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의 완전한 해방과 그리스도 안에서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로마서 8장의 문맥 안에 있다. 여러 성경 해석가들이 정죄에서 벗어난 그리스도인의 실존, 곧 결코 정죄함이 없으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상태를 다루고 결국 어떠한 시련과 환란에 의해서도 단절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만, 그 사이에 단층처럼 관입되어 있는 이 중요한 교리를 담은 본문은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구절은 신자가 성화에 있어서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 사이에 있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중요한 구절이다. 이 짧은 구절은 신자가 받은 구원은 완전하지만 그는 아직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하는 데까지 완성되지 못한 존재라는 현실성과 그 원인이 되는 죄의 실존 그리고 그 죄의 소욕대로 살아갈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신자의 내적 상태 등에 관한 교리를 담고 있다. 더욱이 그러한 내면의 상태에서 반드시 나타나게 될 육신의 악한 행실을 근절하는 방법은 육체를 괴롭히는 경건의 모양에서가 아니라 오직 성령님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강조한다. 인간은 의지를 가지고 이 일에 협력함으로써 영적인 활기와 은혜의 생명력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존 오웬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는 신자의 자유를 이중적으로 말한다. 첫째는 외적 신분의 자유이다. 이것은 법정적 칭의와 관련이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죄인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진노의 자식에서 아버지의 후사로 신분이 바뀌게 된다. 사도 바울의 단언,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신분의 자유를 가리키는 것이다. 둘째는 내적 상태의 자유이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중생의 효과이다.
존 오웬에게 있어서 중생(regeneration)은 인간 전체에 대한 재창조(recreation)이다. 이것은 도덕적 개선이 아니다. 소키누스주의자들은 중생한 신자들이 살아야 할 도덕적인 삶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내적 원인을 혼동하였다. 그러나 존 오웬의 판단을 따르면, 중생은 도덕적 개선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새롭고 신비한 내적 성향이며, 권세인 동시에 영적인 능력이다. 그래서 존 오웬은 이렇게 말한다. “영으로 났다는 것은 영적으로 새롭게 되었다는 것이며 곧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은 어디서나 활동적이며 활기차게 살아간다. 왜냐하면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이 새롭게 살아났기 때문이다(엡 2:1, 5). 그래서 지난날과는 다르게 살게 되는데 이는 사람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신자는 중생과 함께, 이전에 숙명적으로 그의 영혼과 마음을 얽어매던 죄의 원리와 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여전히 죄는 잔존하고 있으나 신자를 향해서는 절대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 안에 융성해질 수 있는 죄의 상대적인 지배를 경계하며 부지런히 죄를 죽이는 삶으로써만 현실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VI. 죄 죽임과 오웬의 언약 교리
죄에 관한 다른 논문들과 마찬가지로 『죄 죽임에 관하여』는 오웬의 언약에 대한 이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언약, 특별히 은혜 언약에 대한 이해 없이는 죄에 관한 그의 논설들을 바르게 알 수 없다. 얼핏 오웬의 성화론을 대하는 사람들이 그의 글을 율법주의라고 판단하는 것도 이러한 잘못에서 비롯된다. 당시 청교도들은 몇 가지 그룹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토마스 카트라이트와 같은 율법주의적 청교도, 토마스 굳윈과 같은 이성주의적 청교도, 루스와 같은 신비주의적 청교도가 그것들이다. 이 분류에서 존 오웬은 복음적 청교도에 속한다.
죄 죽임을 비롯한 죄에 관한 논문의 배경이 되는 언약에 관한 존 오웬의 생각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개혁 신학 안에서 언약은 구속 언약, 행위 언약 그리고 은혜 언약으로 구분된다. 그러나 존 오웬은 모세의 언약을 제 4의 언약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모세의 언약은 그 안에 이 세 언약의 영속적 성격과 함께 율법적이고 일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시내산에서 주어진 모세의 율법 중 구원을 약속하고 있는 일차 원리들과 십계명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후손들과 언약 백성의 거룩한 삶을 위한 행위 언약들은 본질적으로 은혜 언약에 속하지만, 이것들의 특별한 적용인 시민법과 의식법은 행위 언약에 속하게 되어 전체적으로 모세의 언약은 은혜 언약과 행위 언약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오웬은 구원받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아래 있고, 성화와 관련하여 두 가지 이점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오웬의 성화론에 있어서 신자가 죄와 싸울 때 보증 받는 은혜 언약의 약속들은 언약 관계의 쌍방성을 기초로 신자들을 의무로 불러내는 강력한 동기로 사용된다. 첫째로, 은혜 언약은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를 보증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자는 범죄했을지라도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여 믿음으로 진실하게 간구하면 무한히 용서해주신다는 것이다. 이 용서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일방적인 시여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성화 과정에 참여하는 죄 죽임의 실천을 통해 용서 이상의 은혜를 주심으로써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마음의 틀을 회복하고 죄의 성향을 극복하게 하시는 것을 목표로 이루어진다.
존 오웬이 자신의 논문, 『죄 죽임에 관하여』에서 죄로 말미암아 영혼의 깊음 속으로 들어간 신자들에게 죄의 용서를 기도하지 말고 내재하는 죄의 세력을 약화시켜주시도록 기도하라고 권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은혜 언약 안에 있는 신자의 유익이다. 둘째로 은혜 언약은 구원받은 신자들에게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무한한 은혜의 공급을 약속한다. 이 은혜의 공급 역시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의한 일방적인 시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성화의 과정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죄 죽임의 실천을 통해 당신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 마음으로 돌아오게 하시고 또한 내재하는 죄 자체를 소멸하시는 과정 자체가 은혜의 성향을 강화시키는 수단이 되도록 만드셨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은혜는 내재하는 죄의 작용과 같이 마음의 성향이 복음적 거룩함으로 기우는 것을 항구화하고자 하시는데, 하나님의 은혜 베푸심의 지혜는 바로 그러한 성령의 의도와 일치한다. 이 은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며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이러한 은혜의 무한한 공급과 최종적 구원을 확증하는 보증이 되신다. 신자가 의지로써 선을 선택하고 그것을 행할 수 있는 은혜를 전심으로 구한다면 하나님은 그 일을 행하기에 적합한 은혜를 신자들에게 무한히 공급하신다는 것이다. 은혜에 대한 존 오웬의 이러한 신학적 입장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다음 기도를 생각나게 한다. “명하시는 바를 제게 주옵소서, 그리고 원하시는 것을 명하시옵소서(Da quod iubes et iube quod uis).”
기도와 열렬함(Fervency)
일시적으로 열렬한 기도로는 충분히 죄를 죽이지 못한다. 오래도록 그 열렬함을 유지하여야만 우리 안에 있는 죄를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다. 순간의 열렬한 기도로 죄를 움츠러들게 하거나 정신을 잃게 할 수는 있지만 치명적으로 공격하여 죽이지는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화를 위한 기도의 실천에 있어서 열렬함과 지속성을 함께 숙제로 부여받게 된다. 오늘날 신자들이 열렬한 기도를 계속하고자 하여도 실제에 있어서는 너무나 많이 그러한 열렬함을 쉽게 잃어버리고 다시 예전의 능력 없는 기도 생활로 돌아간다.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I. 열렬한 기도를 잃어버리는 이유
신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하여 성화의 효과를 가져오는 열렬한 기도를 잃어버리게 된다. 첫째는 영혼의 싫증 때문이고, 둘째는 실천의 규칙이 없기 때문이며, 셋째는 마음을 쏟지 않기 때문이고, 마지막 넷째는 힘없는 짧은 기도의 습관 때문이다.
A. 영혼의 싫증
첫째로, 영혼의 싫증 때문이다. 전혀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어도 열렬한 기도의 은혜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은 너무나 소수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의 은혜를 잃어버린 채, 고장난 영혼 속에 깃들인 죄가 이루어 놓은 고통의 열매들을 부여안고 냉랭하게 살아간다. 사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에 있어서 총체적인 싫증 속에 빠져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기도하지 않는다. 정해진 기도 시간도 없으며 기도의 의무 자체도 무시한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살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기도의 의무를 총체적으로 무시한 채, 정해진 기도 시간도 없고 기도의 실천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미 마음 안에 죄가 득세한 사람이다. 그가 외면적으로 어떤 경건한 삶을 흉내 내고 있든지 간에 그는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이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건강한 성화의 삶을 이어가는 신자의 뚜렷한 특징은 하나님을 향한 열렬함과 자기 깨어짐이다. 교회에 착실히 출석하고 있더라도, 교회에서 어떤 중요한 직분을 맡아서 섬긴다 할지라도, 예전에 받은 말씀의 빛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렇게 기도하지 않고 있다면 그는 지금은 은혜에서 멀어져 부패한 사람이다. 그의 마음의 세계는 죄에 대한 모든 저항력을 상실한 상태이다. 그리고 영혼이 그런 상황에 떨어지기 전까지 여러 단계를 거쳐 열렬한 기도 생활로부터 물러가는 일이 먼저 있었다.
B. 실천의 규칙이 없음
둘째로, 정한 규칙이 없는 기도 생활 때문이다. 신자가 기도한다 할지라도 기도 생활에 있어서 스스로 마음에 정해 놓은 규칙이 없으면 열렬한 기도 생활에서 물러나기 쉽다. 이런 사람들은 기도가 되면 하고 안 되면 안하는 사람들로, 기도를 안 해도 기도에 대한 간절한 필요성을 지식적으로 거의 느끼지 못하는 상태로까지 미끄러진 사람들이다. 따라서 영혼의 갈급함 같은 것은 전무하다. 스스로 기도하지 않으며, 말씀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끊어졌는데도 갈급할 줄 모르는 질병적인 상태로까지 들어가고 만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불은 의무라는 화로에 담길 때, 지속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직도 기도의 실천을 위한 자기 규범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너진 기도의 세계를 다시 회복할 기회를 주셔도 활용하지 못하고 또 다시 뒤로 물러가고 만다. 스스로 의무를 부과하여 기도하는, 정해진 기도의 실천 규칙이 없는 신자의 영적 생활은 견고함에 이르기는 어렵고 실패에 이르기는 쉬운 것이다.
C. 마음을 쏟지 않음
셋째로, 마음을 쏟아 붓지 않는 형식적인 기도 생활이다. 비록 기도 생활의 규칙이 정해져 있다고 할지라도, 거기에 마음을 쏟지 않으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를 할 수 없다. 새벽 기도, 혹은 저녁 기도라는 형식이 아무리 굳건하게 남아 있다 할지라도, 그 정해진 기도 시간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를 드리지 못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기도 시간에 오랫동안 엎드려 있기에 남들은 굉장히 많이 기도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기도 가운데 죄를 죽이는 영혼의 작용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경우이다. 이것은 기도의 형식은 있으나 기도의 능력은 사라진 상태이다. 그렇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의 실천이 없이 육체적인 성실함으로 기도 시간만을 지키는 사람들에게서 죄가 죽는 은혜의 역사를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가 아니면 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기도자 안에서 역사하는 죄를 죽이는 역사가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너진 은혜의 세계를 다시 세우는 회복의 역사도 없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도가 아니면 진실할 수도 없고 간절할 수도 없으며 하나님의 마음을 전수받을 수도 없다.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마음을 드리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특히 신령한 의무일수록 심령의 헌신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무가 가져다주는 신령한 효과를 누릴 수 없다. 기도는 이러한 사실의 대표이다. 마음을 쏟지 않는 기도 생활이 습관화됨으로써 신자 안에 죄가 쉽게 깃들이게 되고, 한번 깃들인 죄는 떠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D. 짧은 기도
넷째로, 아주 짧은 시간밖에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기도 시간을 약속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지키며 살려고 노력하며, 기도 가운데 마음이 실리기도 하지만, 아주 짧은 시간밖에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경우에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도를 한다 할지라도 신자 안에 있는 죄를 효과적으로 죽일 수가 없다. 마음 쏟는 깊은 기도는 신자로 하여금 오래도록 기도하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그런 기도 속에서 신자 내면에 깊이 자리 잡은 죄는 효과적으로 죽임을 당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마음을 실은 기도라 할지라도, 아주 잠시 그렇게 기도할 뿐이라면 이러한 일이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없다.
이런 경우에는 죄를 죽인다 해도 설 죽일 뿐이다. 죄가 칼에 찔리기는 했는데, 치명적인 타격을 입지는 않은 것이다. 그래서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이 칼에 찔린 채 날뛰는 것처럼, 기도를 하면서 죄의 기세가 누그러지는 것을 경험하는 대신 도리어 죄가 은혜의 자극을 받아 강력하게 날뛰는 것을 본다. 뜨겁게 기도하는 것 같은데도 성화에 있어서 진전이 없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열렬히 기도할 수 있으나, 그것을 오래 지속할 수는 없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자기 깨어짐이 없는 사람들이다.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장시간 깊이 기도할 수 없도록 계속 방해를 받기 때문에 점차 열렬히 기도할 수 있게 하는 영적인 욕구를 상실하게 되고 만다.
올바르지 않은 기도의 실천은 성화의 진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올바른 기도라고 할지라도 오래도록 꾸준히 실천하지 않으면 죄 죽임의 능력이 약화된다. 성경을 보면, 짧고 열렬한 기도의 실천으로 커다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러나 열렬하기만 하면 짧은 기도라 할지라도 모두 그러한 능력을 불러오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 순간만을 본다면 그들의 기도가 짧았지만, 그 이면에는 언제나 그렇게 짧은 기도로 위대한 능력을 불러올 수 있기까지의 지속적이고도 긴 강렬한 기도 생활이 있었다. 그래서 기도의 사람 E. M. 바운즈(Edward McKendree Bounds)의 지적은 두고두고 가슴에 새길 만하다. “개인 기도는 짧아야 하겠고, 특히 대표 기도는 반드시 짧고 간결해야 한다. 종종 예정에 없이 마음에서 우러나와 즉각적으로 기도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영적 교제에서 시간의 길이는 본질적으로 가치 있는 특성이다. 하나님과 대면하고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은 모든 성공적인 기도의 비결이다. 강한 능력을 느끼게 하는 기도의 실천은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하나님과 많은 시간을 교제하는 데서 오는 산물이다. 짧은 기도로도 충분히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은 그 이전에 이미 드려진 오랜 시간의 기도의 효과와 요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짧고 능력 있는 기도는 오래 지속된 보다 강력한 투쟁으로 하나님과 씨름하여 승리한 자에 의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기도 생활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열렬한 기도에 많은 시간을 헌신하는 것이다. 이런 기도를 통하여 자기 안의 죄는 죽고, 마음이 성결해지며, 기도자 자신은 변화되어 가기 때문이다.
II. 열렬한 기도생활
A. 당신의 기도 생활은 열렬한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으로 앉아 있는 때 중에서, 마음이 출렁거리면서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최근에 거룩한 슬픔이나 갈망으로 뼈아픈 통곡의 눈물로 혹은 신령한 기쁨이 주는 감사의 눈물로 자신의 기도 자리를 흥건히 적신 적이 있는가? 가장 최근의 경험이 언제인가? 성령의 은혜 안에 사는 사람들의 기도의 영은 마치 많은 물을 가득 담고 있는 댐과 같다. 수문이 열리면 거침없이, 누구도 막을 수 없게 쏟아져 나온다. 그러므로 열렬히 기도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기도가 가득 차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마치 지하수를 끌어올릴 때 수맥을 건드리자마자 물이 하늘 높이 분출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마음속으로부터 기도가 용솟음치며 터져 나온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기도할 때, 그런 영혼의 상태를 가지고 있지 못한다. 그들의 마음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갈망보다는 세상에 있는 것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일쑤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매일 기도해도 그렇게 열렬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때가 거의 없는데, 나의 기도 생활은 아무것도 아닌가?” 이러한 반문에 대하여 이렇게 답하고 싶다.
기도에는 지성적이고 관념적인 기도가 있고, 실천적이고 경험적인 기도가 있다. 전자는 우리가 생각으로 기도하고 우리의 말로 하나님께 우리의 구할 것을 아뢰는 것이다. 그것은 영적인 경험이 동반되지 않는 관념적인 기도이다. 마음 깊은 곳의 움직임이 없는 냉랭한 기도, 의무적인 기도의 실천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기도는 그 안에 영적인 기운이 없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실천 과정에서 죄를 죽이는 신령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그러나 후자는 열렬하고 뜨거운 기도이다. 의무감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의 실천이 아니라 내적인 욕구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기도이다. 이러한 기도는 전 인격적인 체험을 동반한다. 그런 기도의 실천 안에는 영혼과 마음의 틀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 있다. 그래서 기도에 관하여 초대 교회의 교부들은 신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쏘자. 쏘자. 하늘 높이 우리의 기도의 활을 쏘자. 우리 마음의 시위를 떠난 기도의 화살이 새들 날아다니는 첫째 하늘을 지나고, 악한 영들이 권세 잡은 둘째 하늘을 가로질러, 거룩하신 하나님 보좌가 있는 삼층천에 이르도록. 오늘도 힘차게 기도의 활을 쏘자.”
바로 여기에 교회 역사 속에 살았던 기도의 사람들의 영적인 비밀이 있다. 우리와 꼭 같은 성정을 가진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갈망하였고, 전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기를 추구하였다. 그들은 땅엣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대신에 위엣것을 사모함으로 그 분의 은혜를 갈망하였다. 그들의 지성은 경건한 명상과 신령한 욕구, 하늘엣것을 바라는 목마름으로 가득 찼고, 그래서 그들의 기도의 실천은 열렬하였다. 기도 속에서 그들은 더욱 거룩한 갈망의 불을 지폈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는 그 갈망은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타올랐다. 이 모두 기도의 열렬함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는 것이다. 한 사람이 어떻게 기도의 사람이 되는지 생각해 보라. 열렬함이 없이 머리에서 맴도는 지식적이고 관념적인 기도,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지 않는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실천으로는 일평생을 기도해도 그는 기도의 사람으로 변화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기도할 뿐이다. 그러나 열렬한 기도는 먼저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를 하나님 앞에서 열렬한 사람으로 만들고, 그래서 토혈(吐血)의 삶을 살게 만들어 준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있어서의 열렬함은 초기적 신앙의 특징이라고 생각한다. 영적으로 깊이가 더해 갈수록 그런 열렬함이 점점 사라지게 된다는 식의 바보 같은 생각을 한다. 그러나 기도에 있어서 정서적인 열렬함이나 마음 쏟아 부음은 결코 신앙의 초보적 증상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참된 기도의 진수이다.
B. 열렬함의 기원은 성령님
여기에서 열렬함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육체적인 열렬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싣지 않은 채 고성으로 부르짖는다든지, 아니면 손바닥을 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육체적 열렬함의 기도 행위들의 가치는 높게 평가될 수 없다. 마음을 바치는 기도가 더욱 중요하다. 물론 억제할 수 없는 내면의 욕구가 있을 때 신자는 부르짖어 기도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기도하셨다. 그렇다고 묵상 기도만을 좋은 기도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온 마음을 드리는 것이다. 기도할 때 영혼의 간절한 열렬함으로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응시하는 것이다. 깊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듯이, 마음 깊은 곳에서 진심을 길어 올리는 기도가 진정한 기도이다. 마치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이 육체적으로 열렬해지고자 몸부림을 치는 기도 행위는 순결한 영이시고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만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기도의 실천이다. 마음이 실리지 않은 고성의 기도, 자신이 드리는 기도의 의미도 알지 못한 채 중얼거리는 방언 기도로 대부분의 기도 시간을 채우는 것은 참된 기도의 열렬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기도의 열렬함이란 기도자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맹렬하게 타오르는 것이다. 따라서 열렬한 기도란 마음의 피어린 펌프질을 통해 우러나오는 마음 깊은 곳의 사연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열렬함의 정체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의 보다 완전한 연합을 위한 진지한 열중이자 거룩한 열의로서, 하나님을 향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열렬함의 기원은 무엇일까? 이 열렬함의 기원은 성령님이시다.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는 성령님을 매개체로 해서 하나님의 인격과 교통하게 된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강력하게 역사하기 시작하실 때,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일은 우리의 죄와 죄의 비참함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밝혀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작용은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서 우리의 눈을 뜨게 해주시면, 이전에는 한없이 중요하게 여겨지던 우리의 생각들은 덜 중요해지고 대신 하나님의 생각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내 인생과 내 마음과 내 신앙을 보게 된다. 예전에는 내 감정과 이익이 훨씬 더 중요했는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가지고 계신 생각을 더욱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내 뜻이 훨씬 더 중요했는데, 성령님께서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이 부어지자,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고 소중한 일이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고, 그래서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진다. 깊고 열렬한 기도의 사람이 순종의 사람인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C. 사모하는 자에게 부어지는 열렬함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는 이런 의문이 생긴다. “우리가 기도 속에서 열렬해지는 것이 성령님께서 역사하시는 효과라고 한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일반적으로 성령님께서는 간절하게 기도하려고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렬하게 만드신다. 즉,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 드려서 기도하고자 하는 사모함을 가지고 그렇게 실천하려는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으로써 그들의 기도에 열렬함을 부어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의 실천에 있어서, 열렬한 기도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 없이 기도가 되면 하고 안 되면 말겠다는 식의 자세를 가진다면 이러한 열렬함에 이를 수 없다. 이처럼 성화의 영역에 있어서는 성령님께서 항상 우리의 순종을 통해서 역사하시는데, 기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III. 열렬함에 대한 그릇된 접근
그러나 여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면 실질적으로 그렇게 열렬해지는 비결이 무엇인가?” 이때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잘못된 선택이 바로 기도의 실천에 광적이고 미신적인 요소를 도입하는 것이다. 자신이나 혹은 다른 사람의 주관적인 경험을 객관화하여 기도에 있어서 열렬해지는 수단으로 삼는 것도 바로 이런 시도이다. 그래서 마음을 싣지 못한 채 단지 큰 소리로 기도한다든지, 의미도 알지 못하는 언어로 기도한다든지, 기도 속에 고행적인 요소를 도입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기도의 영역만큼 성령과 악령의 대립이 첨예한 곳도 없다. 그래서 기도의 실천 속에서 악한 영들의 역사를 경험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열렬함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 기도에 대한 참된 지식이 부족하거나 그릇된 방식으로 열렬해지고자 육체로 힘을 쓰는 것은 우리를 점점 참된 기도의 비밀로부터 멀어지게 할 뿐이기 때문이다.
IV. 열렬한 기도에 이르는 길
성령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열렬하게 하신다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오류에 빠지지 않고 순종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기도할 수 있을까?
A. 정직한 기도
첫째로, 정직의 빛이 필요하다. 정확하게 말해서,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성찰하는 정직함이 필요하다. 이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러므로 열렬하게 기도하고 싶은 사람은 먼저 진실해져야 한다. 과거에는 어떻게 살았든지 지금 마음을 쏟아 붓는 열렬한 기도를 하고 싶으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지적받는 일에 솔직하여야 한다. 그것에 대하여 정직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 결국 진실해진다는 것은 자신의 전 존재를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이며, 그 앞에서 드러난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진실한 사람들은 대부분 온전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그가 오늘 진실해진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을 해왔기 때문에 그런 과정들이 성화의 동기가 되는 가운데 삶이 점점 온전해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 사람의 삶은 그 사람의 사람됨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신자가 거의 기도하지 않을 때, 기도의 영을 거의 잃어버린 채 총체적인 게으름에 빠지게 될 때, 결코 그를 그냥 내버려 두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계기를 통해서든지 그의 상태가 망가져 가고 있다는 것과, 기도에 태만한 것이 영혼의 적신호라고 하는 것과, 그 기도의 태만함으로 말미암아 몰려오게 될 영혼의 두려운 재앙과 위기에 대해서 깨닫게 하신다. 이때 사용되는 가장 주된 수단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기도하지 않는 신자는 이미 은혜의 세계가 많이 무너지고 죄의 지배의 그늘 속으로 들어가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이 아예 들리지 않거나, 또 들린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서 정직하게 반응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상태에서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 버린다든지, 혹은 세상을 사랑하는 일에 열심을 낸다든지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어두워진 영혼이 빛을 받는 것인데, 그들은 그런 기회 자체를 자꾸 피한다. 그리고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어도 거기에 정직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이렇게 반응해서는 결코 기도의 열렬함에 이를 수 없다. 성령님께서는 결코 그런 이들의 기도를 열렬해지게 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정직해지고 진실해지는 것이다.
B.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기도
둘째로, 마음으로부터 기도해야 한다. 기도가 죄를 죽이기 위해서는 마음의 욕구가 충분히 반영된 기도가 하나님 앞에 드려져야 한다. 입술에서 나오는 기도가 있는가 하면, 마음 깊은 밑바닥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도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의 기도 시간이 입술의 기도로 채워지고 있다. 이렇게 되면 기도자는 죄를 죽이는 데 있어서 효능을 나타내는 열렬하고도 신령한 기도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따라서 기도를 할 때는 항상 많은 기도를 하려고 하기보다는 머리에 떠오른 기도의 제목을 마음에 잠기게 하여야 한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길어 올려진 기도가 되어서 그 기도 내용에 자신의 진액이 피같이 배게 하여야 한다. 기도의 은혜가 메마른 상태에 있을 때, 처음에는 잘 안 되겠지만 몇 번에 걸쳐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고, 기도의 열렬함에 불을 붙이시는 분이 성령님이시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붙들고 기도하면, 딱딱하게 굳어졌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동화되어 있던 자기 안의 죄가 객관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거기까지 인내하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는다.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라. 그분은 진액을 쏟아 부으시면서 기도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는 씨름하는 장면으로 표현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도 기도 제목이 있으면 그것을 그냥 입술로만 흘려보내지 말고 마음의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기를 애써야 한다. 뜻도 없고 마음도 실리지 않은 채 암기된 상태로 흘러나오는 기도의 공식화된 수사어구들은 모두 기도의 영을 말리는 것들이다. 기도 하는 단어 하나하나에 마음을 실어 올려야 하는 것이다.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지배 아래 있으면, 늘 자신의 기도의 언어에 마음을 쏟아 부어서 기도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가 솟구치고 쏟아져 나오는 과정을 통해서 기도가 강력한 힘을 얻게 되면, 하늘 보좌로 살처럼 쏘아 올려진다. 또한 마음을 길어 올리는 펌프질을 통하여 내면의 더러운 죄들이 죽기 시작한다. 그런데 입술로만 기도하는 일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미 마음의 펌프 자체가 녹이 슬어 버렸다. 그래서 굳어진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의 차가운 거절감과 거리감으로 메아리 되어 돌아온다.
이런 경우, 처음에는 신음 소리가 날 정도로 기도하기가 너무나 힘이 든다. 물론 그렇게 기도가 안 될 때 쉽게 기도하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은 힘들 이유가 없다. 그러나 기도가 안 되는데도 마음으로부터 기도하려고 몸부림칠 때 기도자는 내적으로 많은 고통을 경험한다. 인내로 자신의 악한 고집에 맞서다 보면 탄식이 절로 나오고, 가슴은 금방 오그라들 것처럼 조여 오며, 등에 땀이 맺히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기를 다 버리시기까지 낮아지신 우리 주님께서는 기도하실 때마다 자신의 진액을 쏟으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만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그렇게 기도하셨다. 빈 들에 엎드려서, 광야에 홀로 서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그렇게 기도할 수 없는 세상을 위해 헌신하셨다. 우리의 기도 생활은 어떤가? 쏟아지는 마음의 피도 묻히지 않은 채 머릿속에서 흘러나오는 기도 제목들을 입술로 허공에 날려 보내고 있지 않은가? 아예 언어조차도 잃어버린 가운데 죽은 듯 엎드려 시간만 보낸 적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라.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는 것은 예수님의 기도와 얼마나 거리가 먼가? 우리의 기도가 충천하는 화염과 같이 타오를 수 있다면, 그래서 이 시대와 조국교회를 위한 주님의 마음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C. 온전한 믿음
셋째로, 온전한 믿음으로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성경은 믿음을 두 가지 측면에서 함께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로서의 믿음이고, 또 하나는 믿고자 하는 인간의 활동으로서의 믿음이다. 두 가지 관점 모두 중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성찰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의 본질을 주목하도록 만들어 준다. 기도 실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전제는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갖는 것이다. 하나님을 대적하던 우리의 죄를 돌이키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변화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기도를 위한 가장 중요한 선행 조건이다. 누구도 성령님의 주권적인 역사가 없이는 믿음을 행사할 수 없다(요 3:8).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진실하고 열렬한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신 그리스도의 공로를 깊이 생각하고 그 사실을 기도의 실천에 적용할 수 있게 하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도 믿음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많은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양심의 송사와 율법의 정죄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하며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간다.
그래서 성경은 말한다.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엡 3:12). 그러므로 기도의 열렬함의 기초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뢰의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것만이 기도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진지하고 열렬한 기도의 실천 속에서 우리가 성령의 작용을 통하여 순결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믿음 때문이다. 하나님 이외에 다른 어떤 곳에도 소망이 없다는 절대 의존적인 믿음의 행사가 기도를 실천하는 동안 계속해서 우리를 주장하여야 한다. 그래서 간절한 기도에는 항상 하나님만 바라는 마음의 가난함이 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자의 열렬함은 모두 허위이다.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의존의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열렬함은 모두 이교적이고 자의적일 뿐이다. 마치 바알 선지자들이 자기들의 신을 부르며 몸에 상처를 내었던 것같이 말이다. 그러므로 기도에 있어서 신적인 열렬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기도자가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만을 앙망하는 경배자들이 되어야 한다.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하고 그분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은총이 자신의 존재와 삶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믿음, 자신은 공로 없으나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그분이 자신을 긍휼히 여겨 주시리라는 믿음이 열렬한 기도를 가능하게 한다.
D. 간절한 기도
넷째로, 간절하게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기도에 있어서 간절함과 열렬함은 다르다. 기도에 있어서 열렬함은 맹렬하게 뜨거운 것을 의미하고, 간절함은 자신의 기도가 반드시 이루어지길 바라는 하나님을 향해 매달리는 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참된 열렬함 안에는 언제나 간절함이 있고, 지속적인 간절함은 열렬함을 불러온다. 은혜의 지배 아래 있고 기도의 은혜가 충만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한다. 나와는 아주 먼 관계에 있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에도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그 심령의 아픔과 연약함이 내게 전해진다. 그래서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내 마음이 아프며, 그의 고통을 내 것처럼 여기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된다. 이는 그 기도 속에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죄가 그러한 간절함을 죽인다. 하나님을 향해 집중하지 못하게 한다. 세상의 염려와 근심,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엉클어진 마음으로는 간절해질 수 없다. 신자가 은혜의 지배 아래 있고 기도의 영으로 충만할 때, 그에게는 사소한 기도 제목이라는 것이 없다. 모두 다 간절하고 열렬히 기도할 수 있는 제목들이다. 그의 영혼은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고 그래서 온전한 신자가 되기를 갈망한다. 이것은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열렬한 기도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를 생각해 보라. 어떤 기도 제목이 사소하다는 것은 객관적인 판단일 뿐이다. 은혜 안에 있는 기도자의 주관적인 입장에서는 아무리 작고 사소한 문제라 할지라도 절실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 자체가 절실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면 좋고, 무시하시면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제목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간절한 기도의 실천 속에서 기도자의 마음의 틀은 재편되기 시작한다. 간절한 기도의 반복을 통하여 주관적으로 붙들고 있던 죄는 영혼에 의하여 객관적으로 파악되기 시작하는데, 마음은 그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마음을 바치는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성령님께서는 기도자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시고 마음을 거룩한 방식으로 고양시키신다. 그리하여 본성을 따라 움직이던 육체(natural flesh)를 성령을 따라 순종하는 육체(spiritual flesh)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1. 간절함의 정체
그러면 기도의 실천에 있어서 간절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우리가 어떤 기도 제목을 가지고 간구할 때에는 항상 그에 대한 응답을 소망한다. 그러나 기도를 실천하는 중에는 그런 소망을 갖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들이 계속 나타난다. 그리고 그런 상황들은 우리로 하여금 응답해 주실 것을 믿지 못하게 한다. 간절함은 그런 방해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응답의 소망을 붙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도에 있어서 간절함이다. 그러므로 간절함은 상황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인격적인 존재와 성품에 대한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곧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그렇게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 안에 있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기도 응답에 대한 믿음보다도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인격과 성품에 관한 믿음이다.
가엾은 수로보니게 여인이 어떻게 예수님께 나아갔는지를 기억해 보라.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막 7:25-30). 여인은 귀신 들린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그것은 간절한 것이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대답하셨다. 예수님의 그러한 반응은 딸의 치유를 바라는 여인의 소망에 충격적인 장애였다. 그녀의 모든 희망을 뭉개 버리는 발언이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뭐라고 말했는가? "맞습니다. 그렇지만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주님의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내게 주시면 내 딸은 낫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라고 했다. 이것은 기도 응답에 대한 믿음을 넘어서서 기도의 대상이신 그리스도의 긍휼히 여기시는 성품과 인격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 믿음을 붙잡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의 실천에 있어서 간절함이다. 그렇게 기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성령님께서 기도를 도우시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께만 강력하게 달라붙어서 연합된 그 기도의 열렬함은 사람이 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께서 그렇게 기도하게 하신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통상적으로 아무나 그렇게 기도하게 하시지 않고 간절히 기도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도우신다. 이것이 기도에 있어서 간절함이 가져다주는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어떤 소망을 가지고 기도할 때 그 기도 응답의 소망을 갖지 못하게 하는 상황은 언제든지 생겨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생겨나기 전까지만 간절한 것은 우리를 성화시키는 능력 있는 기도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간절할 수 있을 때까지만 간절해지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간절함이 아니다. 진정한 간절함은 그것을 지속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것이다(롬 4:18). 모든 장애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응답을 바라는 간절함을 유지할 때, 그 기도의 실천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은 성결하게 되고 내면의 죄는 죽임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기도의 실천에는 항상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이 요구된다.
V. 왜 열렬함이 필요한가?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그렇게 간절하고 열렬해져야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는 신자 안에 있는 죄의 특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것은 대담함과 광기와 맹렬함이다. 그런데 그 맹렬함은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은혜의 세계를 공격함에 있어서 가장 잘 드러나는 특성이다. 죄는 우리의 영혼에 직접 달라붙어서 맹렬하게 공격을 한다. 아직까지도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은혜들을 고갈시키고 자신의 지배력을 견고하게 확보하기 위해서 말이다. 불이 났다고 소방서에 전화를 하면 소방서에서 무조건 수 십 대의 소방차를 몰고 오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불이 났는지를 물은 뒤, 제일 먼저 화재진압 지휘본부차가 소방차를 이끌고 출동한다. 이어서 화재의 크기에 따라 소방차가 더 이상 안 오기도 하고 수십 대의 소방차와 사다리차, 심지어 소방 헬기까지 동원되기도 한다.
죄를 화재라고 생각해 보라. 죄가 그런 맹렬함을 가지고 우리를 공격한다면, 우리가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로 죄의 공격에 대응하지 않으면 죄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은혜들을 모두 잠식해 버릴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공급되는 은혜의 통로들도 막아 버릴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 59:2). 이처럼 죄는 우리의 영혼을 집요하게 공격해서 우리를 완전히 무장해제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 대항하는 우리의 무기는 바로 마음을 쏟아 부으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다. 열렬한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 안에 있는 죄를 죽일 수 있다.
성령님께서 죄를 죽이심에 있어서 가장 즐겨 사용하시는 도구가 바로 그러한 진실하고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의 실천이다. 기도를 통하여 거룩해지기를 원한다면, 스스로 자기 안에서 발견된 죄와 더불어 싸우려고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진실해지지 않고 어떻게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볼 수 있을까? 우리가 간절하지 않고 어떻게 죄를 이기는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을까? 우리가 열렬하지 않고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맹공격하는 죄의 맹렬한 작용을 파할 수 있는가? 죄는 우리를 향하여 적개심을 가지고 공격하는데 우리가 그것에 대하여 친화적인 마음을 가지고 그 공격의 맹렬함을 파할 수 있는가?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를 지속할 때 그때 비로소 실제적인 죄와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정직해지고 평판 좋은 사람이 된 것이 곧 죄와 싸워서 승리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은 복음적인 생각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내면의 죄를 죽이지 않고도 도덕주의에 의하여 길들여진 짐승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많고, 이념의 머슴이 되어서 자신의 신념에 충성하기를 하나님께 충성하기보다 더 충실한 사람들도 많다. 그렇게 죄의 맹렬함에 대항하여 마음을 쏟아 붓는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는 치열한 공격을 퍼붓는다. 그렇게 진실하게 간절함으로 열렬히 드리는 기도는 하늘을 향해 쏘아 올린 화살처럼 힘있게 올라간다. 이렇게 간절하고 열렬한 믿음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의 전쟁터에 은혜의 원군을 보내어 죄에 지던 영혼의 싸움의 전세를 뒤집어 놓는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통하여 신자들에게 주신, 은혜로써 죄를 이기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A. 예수님의 열렬한 기도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시는 동안 항상 자신의 진액을 모두 쏟아 부으시며, 간절함으로 열렬히 기도하셨다. 성경은 말한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이것은 우리에게 한 가지 의문을 던져 준다. 우리에게는 죄가 있고 게으름이 있고 부패성이 있어서 입술의 기도와 마음이 다르다. 그래서 자기의 마음을 깨뜨리는 자기 깨어짐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기도는 간절하고 열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죄와 부패성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간절하게 피어린 통곡의 기도로 온 생애를 사셨을까? 죄가 없으시고 죄를 지으실 수도 없으신 주님께서 대체 왜 그렇게 뉘우치는 죄인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가슴을 찢는 간절함과 열렬함으로 기도하셨을까?
이것은 예수님의 성품을 미루어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의 가슴을 찢는 간절한 기도는 모두 자신 안의 죄와의 싸움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용서받아야 할 죄인들인 우리를 위한 중보 기도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우리가 죄와 싸우면서 받는 영혼의 고통이 예수님께 느껴지셨던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셨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중에도 자신의 고통받는 육체를 생각지 아니하시고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죄도 없고 흠도 없으신 그분의 생애가 가슴을 찢는 기도와 피로 물든 통곡이 어우러진 간구의 연속이었던 것은 우리 때문이었다. 우리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무릎으로 사셨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 곳 중에 어느 한 곳도 그분이 무릎 꿇지 않으신 곳이 없고, 흘러내리는 땀과 쏟아지는 피가 흥건히 고이지 않은 곳이 없다. 한적한 곳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요단강에서, 산에서, 광야에서, 마지막에는 우리를 위해 매달리신 그 십자가상에서까지, 주님께서는 그렇게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아무리 우리가 스스로 생애적인 소원이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해도, 그것이 입술의 고백일 뿐이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마음의 피어린 펌프질을 통해서 기도의 실천에 마음을 쏟고 피를 적셔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순례길이 무릎으로 걸어간 길이 되게 해야 한다. 주님이 엎드리신 곳에 우리도 엎드리고, 주님이 흐느끼신 곳에서 우리도 울어야 한다. 이것이 제자의 삶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실천에 얼마나 약한가? 입술로는 주님의 고난을 본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우리에게 정말 고난이 있는가? 예수님처럼 아프고 가슴을 찢는 거룩한 희생이 있는가? 더욱이 이 세상에는 주님께서 우리더러 자신처럼 살아서 그들에게 주님을 보여 달라고 부탁하신 잃어버린 영혼들이 너무나 많은데, 우리가 주님을 본받아 그들을 위하여 대신 울어 주는가? 우리가 회심하지 못한 영혼들과 죄 가운데 미끄러진 자들을 위하여 울며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군가가 위하여 울어 주어야 할 만큼 불쌍한 사람들이다. 교회의 영광이 무엇일까? 행복해지기를 바라기보다는 거룩한 나라에서 살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회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을 위하여 주님을 대신해 기도하는 집이 되는 것이 아닌가?
조국교회에 성도들의 애끓는 기도 소리가 밤마다 가득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회개할 줄 모르는 이 세상을 위하여 가슴을 찢으며 애통해 하는 성도들이 가득한 조국교회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 우리는 멀리서 들리는 하늘나라 응원군의 말발굽 소리를 들을 것이며, 악한 세력들은 혼비백산할 것이다. 처처에 피 흘리며 쓰러진 악한 영들의 시체를 보게 될 것이며, 우리 주님의 이름은 드높여질 것이다.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우리는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에 동참했던 사람들은 모두 거룩한 사람들로 나타날 것이다.
B. 열렬함과 마음의 쇄신
이렇게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가 우리의 영혼을 맹렬하게 공격하는 죄들을 효과적으로 죽인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령님께서는 이렇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하고 간절하며 열렬한 기도를 통해서 죄를 죽이신다. 그런데 이러한 기도의 실천은 죄를 죽이는 효과만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신자 안에서 다시 죄가 쉽게 융성하지 못하도록 하는 효과도 가져온다. 그러면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의 실천이 어떻게 죄를 죽일 뿐 아니라 다시 죄가 융성하지 못하도록 돕는 효과를 가져올까? 이것은 마음의 틀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마음의 틀'(frame of heart)은 마음의 지배적인 경향성, 내면에 자리 잡은 습관 내지는 지향성(志向性)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 사람이 기도에서 미끄러질 때를 생각해 보라. 처음에는 시간을 정해 놓고 열렬하게 기도한다. 그러다가 열렬함은 아직 남아 있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기도의 시간이 짧아진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열렬함이 사라지고 기도의 시간의 형식은 남지만, 나중에는 기도의 시간이라는 실천의 형식까지도 무너져 버리고 만다. 이러한 모든 변화의 과정에는 기도하기에 적합하던 마음의 틀이 기도와 같은 영적인 일을 실천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마음의 틀로 바뀌는 일이 있다.
일반적으로 기도의 은혜가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을 때, 그래서 간절한 기도가 쏟아져 나올 때는 시간이 없어서 기도를 못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래서 시간이 없어서 기도하지 못한다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맞지만 전체적으로는 사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도의 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반나절만 기도하지 않아도 갈급해서 견딜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신자가 기도의 영으로 충만할 때는 장소에 매이지 않고 기도한다. 어느 자매가 이런 고백을 했다. 자신이 기도하지 않는 것은 가정의 일로 기도가 방해받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알고 보니 가정의 일이 방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기도를 방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자매는 은혜를 받고 보니 아이 기저귀 갈면서도, 설거지하면서도 기도할 수 있더라고 말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무시로 기도하라고 당부한다. 죄가 우리의 기도의 세계를 공격할 때는 먼저 기도 실천의 형식을 겨냥하지 않는다. 새벽 기도를 수십 년 동안 다녔는데 내일부터 당장 집어치우라고 유혹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열렬한 기도가 쏟아져 나오기 위해서는 마음이 그런 기도를 쏟아내기에 적합한 질서들을 가지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마음을 공격한다. 육체의 부지런함은 기도의 의무를 실천하게 하지만, 그러한 실천을 열렬하게 하는 것은 은혜 안에 있는 영혼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죄는 마음을 공격한다. 은혜의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신자의 마음의 틀을 공격한다.
신자의 마음의 틀이 죄에 의하여 무너지고 나면, 그것은 마치 현이 풀어진 바이올린과 같다. 제 아무리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연주자라고 할지라도 현이 풀어진 바이올린을 가지고 예전처럼 연주할 수는 없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백전노장과 같이 기도의 바다를 헤쳐 온 신자라고 할지라도, 기도에 있어서 영원한 전사는 없다. 은혜 안에서 형성된 마음의 틀이 죄로 말미암아 무너지고 나면, 기도자는 그 사람이어도 기도는 예전의 그 기도가 될 수 없다. 그런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 이르지 못한다. 풀어진 현으로 나오는 기도의 곡조가 예전의 그 아름다운 곡조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올리는 기도의 내용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도하는 영혼의 진지하고 열렬한 투쟁의 과정을 보시며 감동을 받으신다. 그러한 열렬한 기도의 실천 과정을 통하여 영혼과 마음에 들러붙어서 맹렬하게 공격하는 죄를 죽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도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바람이다.
그런데 죄가 잠시 물러가지 영원히 물러가는가? 지금은 물러가지만 다음에 오면 그 죄가 이길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오랫동안 죄 가운데 살면서 무너진 마음의 틀들이 다시 세워지기를 바라신다.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의 과정을 통하여 죄가 쉽게 침투할 수 없는 견고하고 굳건한 마음의 틀이 다시 세워지기를 기대하신다.
이것이 기도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또 하나의 바람이다. 이러한 기도 회복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가 보다 더 많이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기도의 지속성(Continuance)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려서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의 방향 설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기도할 때에 우리의 마음의 깊은 곳에서 그 열렬함이 흘러나와,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진액과 땀과 피로 적셔야 한다. 그래서 죄가 거하기에 적합했던 마음의 틀은 변화되고 거룩한 생활은 성숙되어 가야 한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간절함과 열렬함으로 길어 올린 기도가 아니면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 열렬한 기도만이 가지는 성화의 작용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열렬함이 있다고 해서, 성화를 가져오는 기도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기도를 통해 죄를 죽이고 거룩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열렬함뿐 아니라 지속성도 필요하다.
I. 기도의 지속성과 성화의 진전
바리새인들도 많이 기도했다. 그러나 그 기도는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하나님께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그들은 사실상 거의 기도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기도라고 하는 은혜 수단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변화된 적이 거의 없으면서도 자신들이 많이 기도했다고 하는 생각 속에서 산 것이다. 이런 잘못들은 오늘날 우리에게서도 반복될 수 있다. 오늘날 성화의 진전이 없이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이어가는 냉랭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것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마음을 드리며 기도한 적이 있는데 왜 성화에 있어서 이렇게 진전이 없을까?" 그것은 지속성의 부족으로 인해, 그러한 기도를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죄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도 간헐적으로 하나님 앞에 마음을 드리는 기도가 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마음이 전체적으로 굳어지고 마음의 틀도 변했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종종 죄인의 마음을 각성시키셔서 마음이 흔들리게 하시고 마음으로부터 기도가 흘러나오게 하신다.
기도에 있어서 이러한 경험의 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험을 통하여 신자는 기도하지 못하던, 수렁에 빠진 영적 생활로부터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인 기도의 씨름으로 나아가게 되고, 그 기도의 씨름을 통하여 죄를 죽이는 데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과대평가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기도가 순간적으로 어떤 진지함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실천되지 않으면 죄는 거의 죽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신자가 일시적으로 기도의 열렬함을 회복하였을 때에는, 영혼이 각성된 상태라 순간적으로 죄를 회개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수 있지만, 사실 이때 죄는 죽은 것이 아니라 움츠러든 것이다. 마치 집안에 들어와 활개를 치던 도둑이 어두운 집안에 환한 불빛이 들어오자 적당한 은신처를 찾아서 숨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 도둑은 불이 꺼지고 주인이 들어가면 다시 자기 일을 계속할 것이다. 죄도 그렇다. 따라서 열렬하다 할지라도 일시적이고 간헐적인 기도로는 죄를 죽이는 효과를 가져올 수 없다.
우리 주위에 일시적으로 진지해지는 습관적인 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생각해 보라.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죄 죽임을 열렬하고 진지하게 드리는 한두 번의 기도에 대한 응답을 통해서 이루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복음의 원리를 전적으로 오해한 것이다. 죄 죽임은 그러한 기도의 응답의 형태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의 원리에도 어긋나고 믿음의 원리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새 언약은 본질적으로 그러한 식의 죄 죽임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랬더라면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말하지 않고 “나는 한번 죽었었노라."라고 고백했을 것이다.
II. 기도에 대한 그릇된 통념
그런데 신자들은 한순간 기도가 간절해지면서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는 듯한 경험을 하고 나면, 그렇게 기도했으니 반드시 응답될 것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그러나 성화는 한두 번의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를 향한 매우 큰 미움의 감정 때문에 영적 생활이 지장을 받고 죄책감을 느낀다고 하자. 그런데 어느 한순간 마음이 쏟아지면서 회개의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제가 여태껏 누구를 미워했는데 용서해 주십시오. 미움의 감정들이 자꾸 생겨나는데, 하나님, 이 모든 것들을 제 마음에서 싹 씻어 주시고 제가 그를 사랑할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렇게 기도하는 순간, 마음에 깊은 감동이 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해 주셨고, 미워하는 마음도 씻어 주셨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기도가 응답되어 미워하던 사람을 저절로 사랑하게 되는 일은 일반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이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그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을 죽이려고 애쓰며, 그 사람을 사랑하려고 오랫동안 힘쓰지 않는 한 말이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恨)은 자기 땅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그 땅을 얻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제적으로 믿음의 원리를 따라 순종하며 가나안 사람들과 싸워 이겨야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싸움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투력에 달려 있었던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복은, 서로 팽팽하게 피를 흘리고 싸워 대부분의 군사들이 목숨을 잃은 후, 그래도 살아남은 사람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가 많았기에 승리를 선언한 일반적인 개념의 전투가 아니었다. 여리고 성은 빙빙 도니까 와르르 무너져 버렸고, 요단강은 들어가니 물이 말랐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믿음으로 순종하였고, 이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방식으로 승리를 주셨다. 즉, 하나님께서 확인하고 싶으셨던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병력이나 군사의 힘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능력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약속을 믿고 순종하는지를 보고 싶으셨다.
이것은 우리의 기도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으로 구하라',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라고 한다. 사실 이렇게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응답받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심리적인 믿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의뢰이자, 절대적인 순종을 포함하는 영적 활동으로 반드시 영혼의 변화를 불러온다. 참된 믿음은 늘 삶 속에서 부단히 실천되며, 순종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미움의 죄를 짓던 신자가 어느 날 마음을 쏟아 부어 기도했고, 그 순간 하나님께서 마음을 녹이시면서 기도를 열납하시는 것을 체험했다. 그래서 자신을 옭아매던 미움의 문제가 모두 해결된 줄 알았다. 그런데 얼마 후, 자신 안에 미움의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음을 발견하였다. 이때 대부분의 신자가 혼란을 경험한다. 하지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복기를 근거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을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혼란에 빠질 이유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성화는 한번 뜨겁게 기도해서 획득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저 사람을 미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내게서 미움을 다 지워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그 기도가 마음으로부터 열렬히 우러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는 증거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들으심은 "오냐, 네게서 미움을 다 지워 주겠다."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이러한 의미이다. "그래, 네 기도를 내가 듣는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순종하면서 그 사람을 용서하려고 애쓰고 사랑하려고 노력하거라. 그러면 내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은혜의 힘을 공급해 주마. 그러면 너는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나를 의지하거라." 그런데 한두 번 그렇게 기도할 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실천이 없다. 그래서 다시 미워하는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성화에 대하여 전적으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응답해 주셨으니, 자기를 독수리처럼 잡아채서 미움의 절벽에서 사랑의 둥지로 옮겨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비성경적인 생각이다.
III. 지속적 기도의 필요성
A. 마음과 영혼의 자유함을 얻기 위해
여기서 우리는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의 필요성을 본다. 진실하고 간절하며 열렬한 기도라고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를 성화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오랜 세월을 두고 떨어지는 물방울로는 바위가 패이지만, 한번 들이붓는 바가지의 물로는 그렇게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오히려 그는 매일 매일 기도하면서 아직까지 마음속에 남아 있는 미움과 끝까지 남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본성을 죽여 가야 한다. 이것이 성화의 방식이다. 이것은 마지막 시대를 살면서 수많은 유혹과 죄의 열렬한 공격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지켜서 지속적인 성화의 길을 걸어가는 데 있어 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명령이다. 마음을 드리는 그 열렬한 기도,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그 진지하고 정직한 기도가 지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신분의 자유는 단번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개떡같이 살아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분명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그러한 신분의 자유만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상태의 자유도 필요하다. 즉, 우리의 내면세계인 마음과 영혼이 죄로 말미암은 얽매임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한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는 내 아들이라.'고 불러주셔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다운 사람들이 됨으로써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우리도 행복할 수 있다. 지속적이고 열렬한 기도는 마음과 영혼에 이러한 자유를 준다.
오늘날 조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생활의 큰 문제 중 하나는 기쁨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감격이 너무 희미하기 때문에 자신의 하나님 자녀 됨에 대한 확신이나 복음에 대한 담대함이 부족하다. 그래서 정말 필요한 것은 마음과 영혼의 내적 자유이다. 이러한 내적인 자유가 있으면 생활하면서 환경에 대해 불평하거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게 기쁘고 감사할 수가 없다. 이전에는 세상 유혹이 밀려오면 불안하여 떨었고 시련이 오면 괴로웠는데, 이젠 그렇지 않다. 우리 마음과 영혼 속에 있는 복음으로 말미암는 자유 때문이다. 신자가 이러한 자유를 누리면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기 안에 남아 있는 죄를 죽이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은 이러한 죄 죽임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의 실천을 통해 거룩해지기 위해서는 짧게 기도하려는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청교도 루이스 베일리(Lewis Bayly)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길고 간절한 기도는 악마에게는 불쾌한 것이고, 죄 된 육체에게는 지겨운 것이다. 열렬한 기도의 실천이 오래도록 지속되어야만 우리가 그 기도를 통해서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때는 그 마음을 삶을 위하여 준비하고 살아갈 때는 그 마음을 기도를 위하여 준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의 정서가 언제나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하며, 우리 자신의 마음을 잘 추슬러 기도하기에 적합한 상태를 유지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가 기도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됨을 능가할 수 없는 것이다.
B. 기쁨을 누리는 기도를 위해
이렇게 복음적인 성화의 원리를 가르쳐 주면 사람들은 부담스럽게 생각한다. '아아, 이거 정말 예수 믿는 것이 장난이 아니구나. 마음으로 기도를 짜서 드릴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그런 기도를 실천하라는 거잖아. 죄를 죽이고 내적인 자유 속에서 복음의 약속들을 누리며 사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구나.' 그러나 그것은 죄의 지배를 받으며 그 결과인 악과 고통 가운데 사는 것보다는 훨씬 쉽고 가벼운 짐이 아닌가? 더욱이 죄 가운데 사는 사람에게는 멸망 밖에 주어지는 것이 없지만, 이렇게 죄를 죽이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예수의 생명의 나타남이 있다. 여러분은 지금은 비록 기도가 메말라 있다고 할지라도 언젠가 하나님 앞에 열렬하고 진지한 기도의 은혜를 소유했던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기간이 짧았을 수도 있고 길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바쁜 생활을 하면서도 새벽 기도 나가고, 밤에도 예배당에 가서 기도하고, 집에서는 건넌방에서 문 잠그고 간절히 기도했다. 기도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조금만 기도해도 기도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은혜 가운데 있어서 마음과 영혼의 틀 자체가 기도하기에 적합하고 죄가 거하기에 좋지 않은 은혜로운 틀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묵상하면 바로 기도가 시작되었었다. 기도만하면 눈물이 나오고, 간구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때는 기도하는 것이 행복했을 것이다. 그때에 그렇게 마음을 주님 앞에 쏟아 붓는 그 기도 시간은 얼마나 달콤한 시간인가?
그러므로 열렬히 기도하되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무거운 부담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지금 그 기도의 감미로움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의 틀들이 너무나 육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지속적인 기도가 놀라운 기쁨과 행복이기보다는 무거운 노동과 희생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IV. 지속적인 기도 실천의 장애, 게으름
그러면 그런 기도 생활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근본적으로는 죄 때문이다. 죄는 기도를 죽이고 기도는 죄를 죽인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두 가지,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앞에서 영혼의 싫증은 열렬함으로 극복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여기에서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은 육체의 게으름으로, 이것이 바로 기도 생활을 지속적이지 못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이 게으름의 정체는 빗나간 자기 사랑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기는 부패한 본성을 가진 옛 자아(sinful flesh)를 말한다. 새사람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고 땀 흘리고 피 흘리기까지 예수님을 위해서 살기를 원한다. 그런데 옛 본성은 여전히 자기 자신이 주인이며 왕이고 싶어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성령님을 근심시키면서도 자기 자신의 좋은 것은 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명백한 불순종이라도 하지 않으려 한다. 이것이 바로 게으름의 정체이다. 따라서 게으른 본성은 늘 하나님께 대항한다.
하나님: "이렇게 살거라."
우리: "싫어요."
하나님: "왜?"
우리: "힘드니까요. 내가 싫으니까요.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게으름을 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죄가 게으름의 탈을 쓰고 들어오면 영혼의 경계를 받지 않는다. 게으름은 거룩한 의무를 태만히 하고 자기의 육체를 하나님보다 더 위하게 한다. 그리고 죄는 그런 게으름을 이용하여 우리 안에 들어온다. 마치 적군의 병사들이 아군의 복장을 하고 문지기들이 서 있는 성문을 유유히 통과하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육체의 게으름을 없애고 대적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육체의 게으름은 영혼의 싫증과 손잡고 우리 마음속에 있는 기도의 불을 끈다. 그 이유는 기도가 영적인 것이긴 하지만 육체가 영혼의 요구에 응하여야 실천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의 실천에는 부지런한 육체와 열렬한 영혼이 하나같이 필요하다.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을 위하여 반드시 육체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육체가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그렇지 않지만, 은혜로부터 멀어지면 신령한 일에 대해서 호의적이지 않다. 예수님의 육체는 죄 없으신 육체였지만 우리의 육체는 이 세상에 남아 있는 동안 구석구석 죄성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육체는 우리의 영혼을 다루는 것과는 다르게 다뤄야 한다. 그러면 죄를 죽이는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을 위하여 육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그것은 세 가지로 대답될 수 있다.
A. 게으름을 물리치는 비결
1. 육체를 가혹하게 다룸
첫째로, 육체를 가혹하게 다루어야 한다. 이것은 아무 때나 육체를 가혹하게 다루라는 것이 아니다. 선하고 신령한 목적을 위하여 복종하지 않는 육체를 다룰 때에 한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성경은 우리에게 영혼을 어떻게 다루라고 말하는가? 시인의 경험을 생각해 보라.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 낙심한 영혼과는 이런 대화가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 스스로 추스르는 방법 중 하나이다. 그러나 게으른 육체는 그렇게 다루어서는 안 된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단호한 모본을 가슴에 새기라.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여기서 사도가 고백한 바 '몸을 쳐 복종하게 하는 것'은 당시 로마 시대에 무자비한 상전들이 노예를 다루던 방식이다. '복종하게 함'이라고 번역된 희랍어 단어는 '둘라고고'(δουλαγωγω)인데, 이는 문자적으로 '노예를 삼다, 노예라고 주장하다, 노예를 다루듯이 엄한 규율을 따라 다루다'라는 뜻이다. 신자가 죄악의 게으름에 빠지려 하는 육체를 다룰 때에 노예에게 하듯이 가혹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영혼: "기도하러 가자."
육체: "힘들어, 나 잘래."
영혼: "그래? 많이 힘들어? 그러면 어떻게 하지....... 기도하러 못 가겠네. 할 수 없지."
영혼과 육체 사이에 이러한 대화가 오가면 그 사람의 기도 생활은 이미 끝난 것이다. 죄가 이기도록 길을 열어 주는 셈이 된다. 오히려 이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영혼: "기도하러 가자."
육체: "힘들어, 나 기도하러 안 갈래."
영혼: "뭐라고 이 망할 자식 같으니. 당장 일어나지 못해? 두들겨 맞을래?"
노예 제도가 있던 시대에 엄격한 주인과 게으른 노예 사이에 인격적인 대화 같은 것은 없었다. 주인은 노예를 무섭게 길들일 뿐이었다. 악하고 지혜로운 주인은 자유롭던 사람을 노예로 삼기 위해서 먼저 그에게 노예의 마음을 심어 주었다. 철저하게 채찍으로 다루어서 주인이 나타나면 두려움 때문에라도 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묻고 싶을 것이다. "당신의 주장은 신학적으로 약간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영혼과 육체를 통일적으로 봐야 하고 육체의 욕구도 들어주면서 돌봐야 하지 않는가?" 당연하다. 육체가 정상적인 상태에서 자야 될 시간에 자고 싶다고 한다든지 먹어야 할 시간에 먹고 싶다고 한다든지 병이 났으니까 약을 달라고 한다든지 하는 욕구는 우리들이 계속 들어줘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한번 쓰고 말 일회용 육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보배로운 영혼을 담고 있는 질그릇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이야기하는 바는 육체가 하나님을 거스를 때를 이르는 것이다. 성령의 소욕을 거스를 때 말이다. 육체가 주일날 교회 가기 싫어서 텔레비전 보고 놀겠다고 하는데, 분명히 기도하러 가야 할 시간인데 누워서 책 보다가 자겠다는데, 방탕하고 싶어서 술 먹으러 가겠다는데, 그것을 그런 식으로 돌봐 주어서는 안 된다. 신자가 그렇게 육체에 진다면 그것은 육체에 종 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 삶을 사는 자들을 가리켜서 사도 바울은 "저희의 신은 배요"(빌 3:19)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 육체는 혼을 내주어야 한다. 그것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의 의무를 실천하며 사는 것에 대해서 육체는 순종적이지 않을 때가 많다. 목사가 되었는데도 어느 날 새벽에는 그냥 자고 싶을 때가 있다. 어찌 이것이 나만의 경험이겠는가? 새벽에 기도하러 가려고 일어났는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그러면 환경과 육체의 게으름이 딱 만나게 되고, 게으름을 합리화한다. '비가 쏟아지는데 이 빗길에 자동차 사고라도 나면 주의 영광 가리지.' 게으른 육체의 설득에 은혜에 싫증난 영혼이 휴식이라는 카드를 선택한다. 그 날은 새벽 기도 못하는 것이다. 내가 『새벽 기도』라는 책에서도 밝혔듯이, 다시 한 번 그러한 상황을 이기는 비결을 소개하고 싶다. 나는 오랫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새벽 기도가 힘들게 느껴지는 때에 피곤을 이기고 일어나는 효과적인 방법을 터득하였다. 그것은 새벽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기에 너무 힘들고 괴로울 때, 마음속으로 '충성' 크게 외치고 벌떡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께 거수경례하는 심정으로.......
2. 그리스도와 하나 됨
둘째로,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이다. 이것은 기도의 지속적인 실천을 가로막는 육체를 쳐서 복종시킬 때 경험하는 자신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투영하는 경건의 기법이다. 이것은 교회 역사상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의 교리(The doctrine of conformity to Christ)로 알려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순전한 성도로 만드시기 위하여 때로는 고난의 풀무에서 단련하시고, 은혜의 생수로 위로하신다.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 받으며 그분 안에서 자신이 죽는 것이 실제적으로 무엇인지를 경험하는 사람들에게만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신다. 게으른 육체의 끈질긴 간청을 뿌리치기 위하여 고통을 감내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신의 삶 속에서 실재화되는 것을 경험함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렇게 죽을 때에 성령님의 위로 속에서 영혼의 소생을 경험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부활이 자신의 삶 속에서 다시 실재화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부활이 자신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 오면서 실재화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이 실재화되어 가는 과정을 통하여 신자는 부패하고 죄 된 성품에서 벗어나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육체의 게으름을 복종시키기 위하여 노예처럼 내 육체를 쳐서 다루어도 한계가 있다. 어느 상황에 가면 육체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계속 나를 이렇게 몰아가면 당신의 육체인 나는 죽는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긍휼을 구하며 자비한 마음에 호소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육체를 아주 비정상적인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다 준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속게 되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의 경험이다.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그리스도께 이입시키면서 그리스도와 성례전적으로 하나 되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 예수님의 생애는 어떠한 생애였는가? 마가복음 1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는데, 그 바로 앞을 보면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주시고, 베드로의 장모의 집을 심방해서 고쳐 주신 사건들이 나온다. 이 모든 일과를 끝내시고 숙소에 돌아오시니 각색 병든 사람이 가득 있는데 그 많은 사람을 위해서 하나하나 기도 해 주시고 고쳐 주셨다고 나온다. 아마도 오늘 우리 시각으로 새벽 두 시는 넘어서 잠드셨을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한다.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 1:35).
나는 약 십오 년 전에 이 성경 구절을 읽고 많이 울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구절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예수님의 고단한 지상 생애가 가슴에 밀려오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에 일어나셔서 기도하러 가셨다. 흠 없으시고 죄 없으신 그분이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안식과는 거리가 먼 생애를 사셨고, 그렇게 육체를 쳐서 복종시키시면서 우리 잘 때 안 주무시고 우리 먹을 때 굶으시고 우리가 쉴 때 기도하셨다는 사실이 해일처럼 가슴에 밀려왔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곤히 잠들어 있는 제자들이 깰세라 발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걸어 나오셔서 아직은 어두움이 도망하지 못한 캄캄한 들판 저편으로 기도 처소를 찾아서 사라지시는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에게 '나는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다. 내게 있는 고난은 고난이 아니다.' 하고 말했다.
새벽 기도에 대한 생각도 떠올랐다. '왜 예수님께서 새벽에 기도하셨을까?' 성경을 살펴보니 별 큰 뜻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새벽 시간에 기도를 안 하셨으면 오전이나 오후에 하셨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도하시는 시간만큼 복음을 전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실 시간을 축내셔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불쌍한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 기도하시고 그들이 깨어 있는 시간에는 자신도 깨어 있어서 그들을 섬기셨던 것이다. 어디서 하나님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가? 오히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섬기러 오신 노예처럼 사셨다. 얼마나 마음 아픈 일인가. 금마차 타고 왕의 대로로 다니셔야 할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사 그렇게 고단한 생애를 사셨다. 그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며 다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고난의 길을 가심으로 구원을 얻었으니 살아 있는 동안 뼈 갈고 살 깎아 주님을 섬기리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때에 종종 사용하던 나의 아호(雅號)를 버리고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노예'로 칭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만을 생각하는데 예수님의 지상생애들을 많이 묵상하면 우리가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을 주는지 모른다. 육체가 게을러서 쳐서 끌고 가면 눈물 흘리고 사정하면서 기도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도록 우리 맘을 약하게 하는 때가 있다. 그때 가장 훌륭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이다. 아무리 뻔뻔스러운 육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뵈면 그렇게 게으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영혼은 게으른 육체에게 말할 수 있다. "봐라, 이놈아.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를 봐라. 이렇게 자기를 아낌없이 주심으로 널 구속해 주셨는데 게으름을 피워? 이 망할 놈 같으니라고. 당장 나오지 못해!"
우리 예수님의 생애는 고단한 노역과 몸부림의 연대기였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희생적인 지상 생애를 묵상하면 단숨에 게으름이 죽는다. 우리의 대장 되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다. 이것이 바로 앞에서 말한 그리스도와 하나 됨의 교리를 쉽게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신령한 사유를 통하여 육체는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게 된다. 기억하자. 성화에 이르는 지름길 같은 것은 없다. 쉽게 참된 신자가 될 수 있다고 제시된 길은 대부분 거짓이었다. 그런 길이 있었으면 예수님께서 왜 우리보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겠는가? 그렇게 쉬운 길이 있었으면 예수님께서 왜 우리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겠는가? 그런 길은 없다. 여러분들이 나의 책을 읽었다면, 가장 자주 들었던 화두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참다운 신자가 되어가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동참할 수 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그 체험이 우리가 의식적으로 붙들려고 한다고 해서 붙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전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고, 자신의 전 삶이 십자가의 정신을 구현하는 일 없이는 그 체험이 유지되지 않는다. 자신의 전 삶이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를 갈망하고 추구하는 삶을 살 때 그런 삶의 틀 안에서 십자가의 경험이 현재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라고 고백한다(빌 3:10-12).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아는 일'은 하나였다. 그리고 그 모든 신비는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있었다.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인격의 비밀을 알아갔는지 그 지식을 얻는 방식을 보라. 그는 그리스도께 대한 현재적인 체험을 유지하면서 그리스도를 알아갔다.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신의 온 생애를 건 추구였다. 좇아가고 달려가야 할 추구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리스도와 하나 된 경험을 유지하면서 그리스도의 인격의 비밀들을 알아갔다. 그 은혜와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만큼 거룩에서 자라갔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는 것은 무한한 감화를 준다. 그리고 자기를 게으름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열렬하게 살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한 묵상은 게으름을 퇴치하는 또 하나의 특별한 비결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신의 서신서 속에서 항상 상기했던 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생애와 죽음, 부활과 이후에 나타날 그 재림의 영광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삶에 예수님을 위한 희생이 있는가? 예수님이 아니었으면 절대 그렇게 수고하지 않았겠지만 오직 예수님 때문에 감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희생이 우리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기도는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십자가이다.
3. 기도의 습관을 확립함
셋째로, 규칙적인 습관을 확립하는 것이다. 게으름에 빠지려는 육체를 다루는 또 하나의 효과적인 방법은 기도 실천에 있어서 규칙적인 습관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예수님과 제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눅 22:39). 유대인들이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한 것도 바로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사실, 기도가 잘되고 열렬히 기도를 실천하고 있을 때에는 그런 습관의 틀 같은 것들이 별로 필요하지 않다. 영혼의 열렬함이 육체의 게으름을 이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이런 기도의 욕구가 열렬히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를 지탱해 주는 좋은 방법이 습관이다. 습관을 수립함으로써 기도를 실천하는 일을 의무로 지워 주는 것이다. 견고한 의무의 틀은 경건이라는 내용물을 보호하는 그릇이 된다. 내용물이 없을 때에는 견고하고 질 좋은 포장이 쓸모없지만, 좋은 내용물이 있을 경우에는 그러한 포장재가 내용물에 대한 아주 좋은 보호막이 된다.
육체가 다소 게으름을 피우려 하는데, 새벽에 기도하러 나가는 건강한 습관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에 육체는 가혹하게 다루지 않아도 고분고분하게 영혼의 요구에 순종한다. 그러나 그러한 습관 자체가 저절로 열렬한 기도를 유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습관만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하다. 기도의 습관조차도 형성하지 않은 것은 태만한 것이다. 나는 외국에 가서도 한국의 새벽 기도 시간이 되기만 하면 저절로 잠이 깬다. 날짜선이 바뀌어도 몸이 기억하는 시간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기도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영영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는 발판으로 삼게 된다. 성경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기도의 사람들은 모두 기도 실천에 있어 규칙적인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아직도 기도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가? 아직도 기도하는 장소가 확정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그대들은 갑옷을 입지 않고 전쟁을 하는 것이다. 지금은 열심 있는 기도가 우러나오기 때문에 기도를 실천하실 것이지만, 조금만 환경이 어려워지거나 육체가 게으름을 피우면 그대들은 꼼짝없이 당할 것이다.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기도 생활을 원한다면 규칙적인 기도의 습관을 굳건히 하라. 그 단련된 굳건함이 여러분에게 성숙된 경건을 가져다 줄 것이다.
V. 열렬함과 지속성을 잃어버린 기도 생활의 비극
교회에는 연약한 사람도 있고 강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기도에 있어서 규칙적인 습관이 없는 사람 중 영적으로 강한 사람은 없다. 그들은 참 신자 되기를 포기한 사람이다. 자신에게 기도의 세계가 없는데, 규칙적인 기도의 시간도 없고 기도의 실천을 결심하지도 않는데, 그리스도와의 하나 됨에 대한 실천적인 경험도 없는데, 가끔 교회에 우르르 모여서 받는 은혜에 참 신자가 되는 기대를 모두 거는 것은 옳지 않다. 광야에서 죽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라. 그들이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다. 홍해를 건넜고, 만나를 먹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야에서 엎드러졌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도 그와 같은 다수의 무리 중 한 사람이 될 것이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하고 열렬한 기도, 그리고 그 기도의 지속적인 실천 없이는 결코 성화의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이렇게 기도하지 않고는 결코 온전하고 진실한 신자가 되어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지 못한다. 이제 마음에 결단을 할 때이다. 살아있는 기도로 살아 있는 삶을 살겠는가? 아니면 죽은 기도로 죽은 것과 방불한 삶을 살 것인가?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신앙생활의 이치는 변하지 않는다. 죄의 강압을 이기기 위해서는 은혜의 힘이 필요하고, 죄의 속임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얼음 같은 총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과 그 깨달음을 신자의 마음속에 살아 있게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은혜를 기도하는 자에게 베풀어 주신다. 한 신자의 마음이 그리스도를 찾고 있을 때, 그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신자의 어두운 마음에 찬란한 진리의 빛이 비칠 때, 그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의 욕구가 마음 안에서 솟아나기 시작하면, 그 기도의 열기를 끄고자 하는 죄의 대적의 활동도 더욱 열렬해진다. 그러므로 신자는 기도할 수 있을 때에는 기도할 수 있기에 기도하여야 하며, 기도할 수 없을 때에는 기도할 수 없기에 더욱 힘써 기도하여야 한다.
VI. 기도 생활의 대적을 처단하라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기도를 통해 성화되기를 원하는 신자들은 기도의 실천을 가로막는 두 대적을 인식하여야 한다. 그 두 대적은 첫째로 기도의 열렬함이 없는 것이고, 둘째는 열렬함으로 지속해서 기도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 생활을 나태하게 만드는 주범은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으로, 영혼의 싫증이 열렬한 기도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육체의 게으름이 지속적인 기도의 실천을 방해한다. 따라서 거룩해지고자 하는 모든 신자는 일평생 이 두 대적과 싸워야 한다. 이 두 대적에 대한 이김 없이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기도도 없기 때문이다. 그토록 순종하며 살기를 원해도 그렇게 살 힘이 없었는데, 열렬한 기도를 지속적으로 실천 할 수 있게 되자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하늘로부터 공급받게 되었고,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견고하게 세워진 기도의 통로로 무한한 하늘 자원이 흘러들어오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메마른 대지를 가로질러 흐르는 한 줄기 강물이다. 그가 존재함으로 메마른 땅에 풀이 돋고 숲이 우거진다. 그가 살아감으로 황량하던 대지에 꽃이 피고 새들이 노래한다. 기도의 사람들은 얼마나 복된 사람들인가? 메마른 벌판에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통로가 되니 말이다. 보고 싶지 않은가? 울창한 숲 속 하늘 향해 곧게 뻗은 수많은 나무들같이 기도 사람들이 세워져서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라고 외치는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로 살아가는 세상을 말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시려는 그 기도의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