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기도생활에서 벗어나는 길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기도생활에 관한 세 가지 교훈(마6:6上) 2001.10.29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1
2. 은밀한 중에 들으시는 하나님(마6:6下)① 2001.10.30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11
3. 은밀한 중에 들으시는 하나님(마6:6下)② 2001.10.31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19
4. 중언부언하지 말라(마6:7) 2001.11.1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28
5. 있어야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마6:8) 2001.11.2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36
6. 이렇게 기도하라(마6:9上) 2001.11.3 가을기도학교 사경회(새벽) 45
1.기도생활에 관한 세 가지 교훈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上)
성경은 중보 기도에 위대함에 대해서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곳곳에는 이 중보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가르치는 교훈들로 꽉 차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이 타락한 이후로부터 펼쳐지는 하나님의 대 드라마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 앞에 먼저 은혜 받은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하는 간절한 중보의 기도에 힘입어서 전개되어 온 역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성경은 중보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서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멸망하여 거의 산 사람이 없을 정도로 심판을 받는 그때에 롯이 그 성에서 구출 받았던 것이 아브라함의 간절한 기도 덕분이라는 사실을 성경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나타났던 그 수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했던 두 가지 중대한 임무는 하나님의 음성을 그들에게 전달해주는 것과, 또 하나는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중보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무릎을 꿇고 간절히 은혜 받은 백성들과 함께 기도할 때 나라를 이기기도 하였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으며, 도저히 승산이 없는 전투에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승리를 얻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한 일 가운데 가장 우리의 머리를 숙여지게 하는 지상생애 사역 가운데 하나는 기도 사역이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언제나 동행하며 살았고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통곡하시며 기도하셔야 할 이유가 없었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겸비하게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중보 하시기 위해서 우리와 같은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중보 기도의 겸비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교회 확장에 역사를 거듭해온 사도 행전의 기록들도 결국 알고 보면 중보 기도에 의해서 전개되어 온 교회의 확장의 역사라고 말해도 조금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참 사랑과 은혜를 알고 은혜 받은 성도들이 무릎을 꿇는 간절한 기도는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눈물과 탄식을 가져왔고 그렇게 교회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누구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 딱딱한 땅에 전도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 받게 만드셨습니다.
성도가 인생을 모두 끝낸 후에 주님의 나라에 가서 일이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거기서는 전도할 일도 없고 새 가족 반, 헌 가족 반하면서 공부할 필요도 없고 이렇게 고달프게 새벽에 나와서 잠을 못 자면서 사경회를 할 일도 없습니다. 여기서 하던 성도로서 대부분이 거기에 가면 끝이 납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계속되는 섬김이 있으니 그것은 땅에 있는 교회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중보 기도의 역사를 굉장히 섬세하게 말하고 그리고 굉장히 강조하고 그리고 중보 기도의 역사에 대해서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보면 “너는 기도할 때에....” 그러셨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성경이 중보 기도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중보 기도를 아무리 많이 내가 받는다고 할지라도 나 자신이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시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지금 기도에 굉장한 깊이 있는 교훈을 주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네가 직접 기도하라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중보 기도는 우리를 어려움 속에서 건져주기도 하고 그리고 고난과 위기 속에서 우리를 살려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중보 기도가 결코 우리 자신이 기도해야 할 필요성을 감소시킬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중보 기도는 중보 기도고, 내가 해야할 기도는 내가 해야 할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자가 오랫동안 굳어졌던 마음에 다시 하나님의 은혜의 물이 흐르기 시작하고 다시 메말랐던 마음에 그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 무엇을 통해서입니까? 자기가 직접 하는 기도의 은혜가 자기의 마음속에 흐르기 시작할 때 변화가 일어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바짝 가뭄이 와서 연못이고 개울이고 모두 말라버립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근처에 있던 수많은 풀들이 모두 함께 말라서 타들어 갑니다. 그리고 개울 바닥에는 생명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밟으면 먼지가 나는 그런 수로로 변합니다. 그러나 다시 비가 오고 거기에 파란 물이 줄대어 흘러가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황폐한 땅에 물만 흐르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흐르는 물줄기를 따라서 생태계가 다시 복원이 됩니다. 다시 물 속에는 고기들이 놀기 시작하고 수초들이 자라고 그 물을 먹으면서 옆에서 풀들이 자라고 나무들이 자라고 그 열매를 따먹기 위해서 새들이 날라 오고 그리고 거기에서 수많은 풀벌레들이 깃들이고 그러면서 하나의 생태계가 다시 형성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에 한복판에는 우리의 기도의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기도의 물줄기가 흘러가기 시작하면 우리가 아무리 지금은 황폐하고 메말라서 내 인격과 성품도 모질어지고 수많은 사람들과 갈등이 있고 생활이 건조하고 기쁨과 유익,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신령한 은혜,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다시 우리의 마음속에 기도의 물이 흐르기만 하면 그러면 다시 그 사람이 아무리 망가진 사람이라도 다시 소생하기 시작합니다. 이 생명의 역사는 정말 놀랍습니다. 얼마나 생명의 역사가 놀라운지 모릅니다.
리비아가 바닷물을 끌어온 기록을 보니까 대단했습니다. 관을 묻어서 5,600km의 수로를 놓고 바닷물을 끌어들이는데 바닷물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을 끌어들여서 그것을 국운을 걸고 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기름으로 불을 때서 바닷물을 졸이면 거기서 증류수가 나오면 그것으로 담수를 만들어서 5,600km의 수로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가 하면 소금은 소금대로 팔고, 기름은 거기에 있는 것이라고는 기름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때서 발전을 하고 그렇게 해서 하는데 그게 재산 성이 있는 모양입니다. 재산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 수증기로 걷어들이는 그 물을 사막에 뿌리기만 하면 지금이라도 사막에 물만 있으면 그 사막이, 사막이 아니라 다시 풀 돋고 나무들이 있고 생태계가 복원되어서 다시 하나의 커다란 아름다운 들판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꿈꾸면서 20세기 인류역사에 불가사의가 될만한 그런 엄청난 일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인생을 살면서 위기와 난관을 만나고 영적으로 바닥까지 내려갔을 때 항상 하나님 앞에 되뇌었던 말이 있었습니다. ‘기도만 할 수 있으면 살 수 있을 텐데’ 어차피 우리의 인생이 가는 길은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주님의 손에 인도를 받으면서 걸어가는 데도 고난이 오고 어려움이 오는데 우리 자신이 왜 내가 이런 어려움을 당하고 이런 고통을 당하고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다 해답을 찾을 수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조차도 기도할 수만 있으면 살수 있습니다. 그 기도의 물이 우리의 가슴에 흐르기 시작하면 기도의 물이 흐르는 가운데 우리의 신앙생활의 생태계가 다 복원이 됩니다. 생각보다도 굉장히 빨리, 그래서 기도는 소위 이야기하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을 바꾸어놓습니다. ‘일평생동안 내가 이렇게 밖에 살수 없구나’ 생각했던 사람들의 마음속에 흐르는 그 기도의 물이 그 사람의 인생 전체를 완전히 바꾸어놓습니다. 그래서 직접 기도해야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한 신자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속에서 살고 신앙과 인격이 하나님 보시기에 곱게 자라다가 망가지고 황폐한 사람으로 그렇게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제가 요즘도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목회를 이렇게 하다가 보면 일반적인 이런 돌봄만으로는 불가능할 정도로 인간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에서 교회를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잘못하면 정신병적인 증세까지 수반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교회가 무슨 수도시설 같은 곳이 있어서 거기에 집어넣어서 진짜 누군가가 깊이 헌신해서 그래서 그런 자연 속에서 삼 개월이면 삼 개월, 이 개월이면 이 개월 이렇게 지내는 것입니다. 주일날 한번 만나는 것으로는 안 됩니다. 매일매일 만나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와 함께 기도하고 그에게 신앙의 도리를 가르쳐주고 이렇게 하면서 무엇인가 전인적으로 그를 치료하고 고쳐주어야 할 필요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도 결국은 옛날에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더욱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경우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다가 지금은 그렇게 정말 집중적으로 치료를 받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망가진 사람이 되기 전에 한번에 그렇게 되는 일은 없습니다. 먼저 일어나는 일이 무엇인가 하면 자신이 기도하지 않는 일이 먼저 일어납니다. 그래서 기도의 샘이 다 마르고 그리고 남아 있었던 그 은혜의 모든 여력들이 완전히 고갈되어버린 후에 죄가 그를 충분히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완전히 사단의 발아래 들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얼마 전에도 교회에 같이 신앙생활 하다가 그렇게 말씀을 안 들었습니다. 그리고 갔다가 한 3-4년 후에 왔는데 누구라고 하는데 한참 쳐다보고야 그 사람이 그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완전히 영 육간에 병들어서 진짜 죽음을 눈앞에 둔 그런 것을 보면서 제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결국은 기도의 샘이 마르기 시작할 때 결국은 모든 신앙의 생태계가 함께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물론 목회자도 여러분들을 위해 중보 기도할 것이고 여러분 교구에 교역자는 말할 수도 없이 여러분들을 위해 늘 기도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구역장도 여러분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할 것이고 여러분들 중에 여러분들을 교회로 인도한 사람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여러분 자신이 기도하는 것이 여전히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사실 하나님을 위한 봉사라기보다는 여러분 자신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생활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생활을 거의 거두고 고갈된 상태 속에서 판에 박힌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이런 것들이 결국은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신앙생활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 안에 참 생명이 있기 위해서는 본인이 직접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기도의 눈물이 자기 속에 있는 죄 된 본성을 죽이는 제초제가 되고 끊임없이 솟아나는 세상에 대한 욕망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게 만드는 훌륭한 방어 무기가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하면서 항상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가운데 정말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재산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죽기로 작정을 한 사람입니다. 정말 우리가 기도하기만 한다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얼마나 아름답게 드러날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더 많이 기도하고 우리들이 직접 하나님 앞에 생명 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기도하기 시작하면 넘을 수 없었던 수많은 신앙의 벽들을 넘었을 것이고 그리고 우리들이 극복할 수 없었던 수많은 시련,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낭비했던 많은 세월들을 저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복음을 전해도 구원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을 것이며 복음을 전할 수도 없었던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참 사랑을 전해서 그들을 하나님께 인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누구도 대신 져줄 수 있는 짐이 아닙니다.
저는 얼마전서부터 그런 생각을 합니다.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이 길이 쉽지는 않은데 정말 내 삶에 있어서 성경에서 말하는 그런 십자가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 그래서 한번 생각을 해봤습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고 했는데 내 인생에 있어서 그래도 주님 앞에 보여드리면서 주님, 그래도 이것은 십자가입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있겠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없습니다. 무슨 십자가가 있습니까? 그래서 어그제도 동역 자들을 만났는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제 힘들지요. 김 목사님. 교회도 짓고 뭐하고 힘들지요. 어깨가 무겁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그 고생도 안 하고 밥 먹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교회 지체들 중에서 직장에 다니는 사람에게 물어봐도 다 힘든 것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십자가는 아니다. 그 십자가라는 말은 너무나 고상해서 그렇게 쓸 수가 없습니다.
자, 우리가 박해를 받습니까? 물론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진짜 삶과 죽음 사이를 오가는 박해를 받습니까? 예수를 믿기 때문에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무슨 불이익을 받습니까? 정말 우리에게 십자가가 있습니까? 그래도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질 수도 있었을 텐데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져야 하는 마지막 십자가가 남아 있다면 그것은 기도입니다.
제가 거의 새벽기도를 안 빠지는 편인데 어떤 때는 막 토할 것 같고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자, 가다가 쓰러지더라도 일단 가자. 왜 이게 마지막 십자가인데. 이것도 안 지면 하나님 앞에 가서 보여드릴 게 무엇이 있겠는가’ 건강이 넘치고 그리고 얼마든지 여유가 있어서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러운데도 나를 위해서는 안 하고 싶은데 하나님을 위해서는 하는 것,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시옵소서” 그게 십자가입니다.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저는 언젠가 책에도 그런 이야기를 썼는데 한 시대를 움직이는 위대한 설교자로 남을 것인가, 하나님 앞에 깊이 인정받는 기도의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면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택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기도 자를 만들 수 없어도 기도 자는 설교자를 만들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깊이 기도해서 하나님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거의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 십자가입니까? 이 새벽에 나와서 드리는 기도, 매일매일 새벽에 나와서 드리는 기도, 복잡한 살림가운데 낮에 나와서 드리는 기도, 깊은 밤에 하나님 앞에 부르짖는 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 모두 쉬운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것이 자유롭게 주님을 믿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남은 마지막 우리의 십자가라고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들 자신이 기도하지 않으면 이런 십자가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그것이 우리의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기도할 때...”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기도가 아니라 너의 직접적인 기도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 기도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 내가 넘쳐날 때 그것이 흘러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도구들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고갈된 상태 속에서 사는 것은 정말 무책임한 일입니다. 그것은 여러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이고, 그리고 이 세상의 역사의 문제입니다. 내가 넘치도록 사는 것, 내 안에 넘쳐나는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기도의 사랑 속에서 살아서 그래서 슬픔도 이기고 고난도 헤치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이런 신앙의 자세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경회 때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결심을 하지만 그러나 그 결심이 너무 연약하지 않습니까? 오늘도 여전히 그 연약한 결심을 가진 여러분들을 향해 하나님이 촉구하십니다. 여러분 자신이 직접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마지막에 우리의 기력이 쇠해지면 성경을 읽을 수 없을지 몰라도 죽는 그 직전의 순간까지도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 기도 속에서 미끄러지듯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기도하는 것 그 자체가 여러분들의 인격에 특징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이 골방은 기도하기 위해서 정해진 그런 장소입니다. 골방은 사람들의 눈에 띠는 그런 곳이 아니라 사람이 있으리라고 집안 식구들이 생각하지 않는,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그런 곳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무엇인가 하면 기도할 때에 사람을 의식하고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주기 위해서 기도하는 그런 자세는 버려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표기도 할 때도 다른 사람에게 내 기도를 통해 뭔가 감화를 주고 싶고 그리고 평소에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기도라는 형식을 빌어서 말하는 것, 이것은 아주 외식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연설의 목적이지 기도의 목적이 아닙니다.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께 감동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기도하므로 주님의 마음을 끄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참과 거짓에 대한 분명한 판단이 있으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속는 법이 없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무엇인가 하면 진실입니다. 성경에 보면 의로운 사람의 기도를 잘 듣는다고 되어 있지만 그러나 죄인들의 기도에도 귀를 기울이시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그 죄인은 어떤 죄인인가. 죄로 인해서는 그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실 수 없는 분인데 도덕적인 의로움보다도 훨씬 중요한 특성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 한쪽 편에서 못 박혀 죽어가던 강도의 그 탄원, 그리고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기도하러 바리새인과 함께 올라갔던 죄인인 그 세리의 간절한 기도를 주님이 들어주신 증거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하면 죄인이기는 했는데 다른 죄인들과는 틀렸습니다. 진실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지었지만 진실함을 회복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한 것입니다.
6장 시작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하면 “너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러니까 심지어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이런 위험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려고 무엇인가 행하려고 하는 그 속에 기도조차도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부부간에 나눈 은밀한 밀어, 사랑하는 나누는 아주 빛깔진한 대화 이런 것들은 밖에 나가서 발설하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다니면서 아! 우리 남편이 이런 식으로 나에게 사랑을 고백했다고, 잠자리에 누워서 나에게 이렇게 귀에다 대고 이야기를 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좀 가슴에 묻어두는 비밀이 있어야지, 사랑하는 사람사이에 뭐만 하면 다 까발려서 다 이야기를 합니다. 동네방네 다니면서 이야기하면 어떻게 무서워서 밀어를 터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밀어라고 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는 그것이 밀어가 되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들여다보면 닭살 돋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것을 감추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누는 이 대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들이 무엇인가 가슴속에 담아 있는 밀어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을 공개하고 보이고 그래서 자신의 평판을 높이기 위해서 기도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골방을 택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진짜 골방에 들어가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는 무엇인가 하면 이것은 정해진 기도의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을 시키자면 우선 우리의 기도 생활이 원기를 얻는 것은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탄원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부어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기도에 원기를 회복합니다.
기도의 습관을 계속 지켜나가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자기 자신의 규범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규범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자기 스스로를 어떤 원칙을 만들어놓고 그것을 지키며 살려고 하는 노력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새벽 기도에 나온다고 하든지 몇 시에 기도를 한다고 한다든지 어디서 기도를 한다고 한다든지 자기만의 규범과 원칙을 만들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 시간이 정해지지 않은 사람들은 대게 기도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기도 시간이 일정하지 않은 사람들은 상황에 밀리면 기도를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선조들이 많은 경험을 통해서 새벽 기도라고 하는 것이 유용하다라고 하는 것을 입증한 것입니다. 원칙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준수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의 골방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그런 골방이 있습니까? 지금 임시 골방은 만들었습니다. 닷새만 나오라고 사정을 하니까 임시 골방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임시가 아니라 세상 살아가는 날 동안에 기도가 필요 없을 정도로 그렇게 능력 있는 삶을 사는 신자들은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의 손이 우리를 붙잡고 있을 때만 우리들이 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지 한순간이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놓아버리시면 우리는 전혀 쓸모 없는 사람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골방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습관을 쫓아서 기도하러 가셨다” 그랬습니다. 그것을 보며 감동을 받는데 그것은 예수님 자신도 기도하기 힘드셨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왜 육체를 가지신 분이시니까 영적으로 건강해도 육체는 늘 피곤하고 그러면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습관이 그것을 이기게 만들고 가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기도를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잠이 든다고 하더라도 나는 교회에 가리라. 정해진 시간에 가리라. 정해진 시간에 어느 장소에서 나는 기도하리라.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런 골방을 세울 의지가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서 살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의 견고한 기도 생활은 거의 없고 일년에 한 두 차례 나와서 쓰러질듯이 울면서 하나님 앞에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너무 가련한 인생입니다.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능력의 삶을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셨는데도 그것을 살지 아니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어느 한순간에 견디다, 견디다 고갈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으면 나와서 찔끔 기도하고 살짝 은혜를 받고 다시 주님 없이 살아갈 용기를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정말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얼마나 미련한 짐승과 같은 태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만나고 우리 안에 계시기를 원하고 우리 또한 주님 없이 살수 없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그런 식의 삶은 이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새벽기도에 매일 나오는 사람, 밤 시간을 기도 시간으로 정해놓은 사람, 낮 시간에 기도를 정해놓은 사람들이 정해놓기만 하고 항상 기도에 폭포수와 같은 은혜가 쏟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을 보십시오.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골방마저도 아예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사라져버린 사람들은 그 사람들은 매번 회복될 때마다 하나님의 특별한 기적과 같은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정말 건강한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이 정해진 기도의 시간과 장소를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생각하면 우리들이 이길 수 있습니다. 이게 내가 지고 가는 십자가다. 즐겁고 유쾌한 십자가는 없습니다. 그리고 달콤한 십자가는 없습니다. 짜릿한 쾌감이 있는 십자가는 없습니다. 십자가는 항상 우리의 땀을 요구하고 그리고 우리의 눈물을 요구합니다. 십자가를 진 사람에게는 남모르게 흐르는 아픈 눈물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 사람들에게는 남이 놀고먹고 마실 때 흘리는 땀이 있습니다. 마지막에 십자가를 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없는 피 흘린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진 사람들을 하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고 십자가를 진 사람들에게는 아픔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십자가를 진 사람들에게는 그 십자가를 모르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내면에 깊은 기쁨이 있습니다. 그 기쁨의 십자가를 지는 것을 통해서 경험되는 고통과 그 쓰라림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위로와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어느 목사님들을 만나서 그 이야기를 했더니 목사님들이 나보고 웃으면서 가혹하다고 하는데 나는 교역자들보고도 이야기를 합니다. 병원에 실려갈 정도가 아니면 나오라고 합니다. 새벽기도 나오다가 길거리에서 쓰러져버리라고 합니다. 그럼 성도들이 얼마나 은혜를 받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런 정신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진짜 죽을 정도가 아니면 나와야 합니다. 우리 매일 고백합니다.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내가 지고 가오리다
마지막 승전할 때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라 늘 고백합니다.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정말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십자가 정해진 시간, 심지어는 시간의 길이까지 정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으면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는 게 우리의 심리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시간까지 정해야 합니다. 규범을 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그 삶을 살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한시간을 기도해야겠다 하면 한시간 동안 꿇어앉아서 그 시간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서 주님의 은혜와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의 경험에 의하면 육체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굉장히 힘듭니다. 토할 것 같이, 그래서 와서 잠깐 설교나 하고 빨리 올라가서 쉬어야지 만 하루를 시작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설교를 하다가 마음이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그냥 올라가기 섭섭해서 잠깐 엎드릴까 그리고 엎드렸는데 하나님이 기도의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두 시간이고 세시간이고 기도하게 됩니다. 그렇게 한참 앉았는데도 몸이 개운합니다. 어떤 때는 아침에 일어났는데 기운이 씩씩합니다. 그런데 내려와서 기도를 하려고 하면 기도가 영 안 됩니다. 오히려 피곤해집니다.
제가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어느 형제보고 기도하라고 그랬더니 목사님, 제가 이렇게 바쁘게 사는데 새벽기도까지 나오면 저는 쓰러집니다. 그래도 한번 해보라고 했더니 일주일인가 몇 주일 해보고 나서 고백을 하는 게 그것입니다. 목사님, 놀랍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피곤하고 저렇게 하면 피곤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한가지 빼놓은 사실은 기도를 하면 하나님이 새 힘을 주실 것이라고 하는 계산은 안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심령에 새 힘을 하나님이 불어 넣어주십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자기의 기도의 시간의 규범을 지키면서 그것을 고수하려고 몸부림치면서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학생들이 공부할 때 한시간은 내가 책상에 앉아있어야겠다고 생각하는 학생과, 되면 하고 안 되면 집어친다는 학생이 일년 이년 학교를 다녀보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정말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뜻을 세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여러분들에게는 그런 기도의 시간도 있고 정해진 장소도 되어 있는데 이상하게 기도의 생기가 없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오늘 성경에 보면 골방에 들어간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어떻게 하고 기도하라고 했습니까? 문을 쾅 닫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열어놓으면 골방에 있는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 봅니다. 저기서 저 사람이 기도하네. 다 봅니다. 우리들이 기도의 시간이 정해져있고 장소가 정해져 있어서 기도의 영적 골방이 우리에게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들이 마음의 문을 열어놓으면 기도 시간과 장소는 정해져 있는데 온갖 세상의 근심과 염려 이런 것들이 가슴을 파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기도는 육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가 육신의 힘을 요하지만 그 올려지는 지성소는 마음입니다. 육체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단속을 잘 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의 향불을 계속 해서 끄지 않고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들의 또 다른 별명이 무엇인가 하면 마음 지킴입니다. 일생동안 자기를 부요하게 만들고 자기의 마음을 흩으러 놓으려고 하는 수많은 요소들과 더불어서 처절하게 싸우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매순간마다 주님이 내 마음에 평강을 주시고 내 마음을 지켜주시고 이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가 보면 분노할 일 기뻐할 일, 그리고 미워할 일 수많은 감정적인 동요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시간을 정해놓고 하나님 앞에 규범화해서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타고 여러분들 속에 근심과 염려와 걱정 이런 것들이 파고 들어옵니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은 그런 시간들이 정해져 있어도 사실상 시간과 그 장소, 거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단의 세력들입니다. 우리의 죄악 된 자아가 그 시간 전체를 지배해서 형식은 남아 있지만 사실 속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것이 됩니다.
(예화)옛날 총각 시절에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때 뽑기 놀이를 해서 커다란 상자를 뽑고 너무나 좋아서 뜯어보니 안에 연탄이 들어있었는데 그 이유는 재미로 사람을 놀리기 위한 놀이였 는데 자신은 정성 들여 선물을 준비했는데, 자신에게 돌아온 선물이 연탄이라는 사실에 모 두들 웃었지만 자신은 실망하셨다는 이야기.
그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시간도 정해져 있어서 그것을 싹 기도로 포장해서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뚜껑을 열어보니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게 놀리는 것인지 뭔지. 장난하자는 것인지. 한시간 두 시간 엎드려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데 내내 파고 들어오는 것이 마음 자체가 기도를 드릴 수 있는데 그 마음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점령이 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염려와 근심에 의해서 점령되어 버린 것입니다. 안 됩니다. 기도를 시작할 때는 문을 쾅 닫고 그리고 오직,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을 향해 집중하면서 물론 수시로 파고 들어옵니다. 염려 근심 그런데 그것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아니야, 아니야. 부인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계속 나갈 때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내 염려와 근심이 많은 사람인데 기도를 깊이 하면 이상하게 나도 왜 그런지 모르는데 염려와 근심을 할 사람인데 이상하게 기쁨이 넘치고 그리고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는 모르는데 평화가 넘쳐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무엇인가 하면 마음을 지키는 사람들을 더 많이 기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마음을 잘 지키면서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은밀한 중에 들으시는 하나님①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下 )
여기서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계속되는데 앞부분에 나오는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아라’ 이것이 기도에 대한 어떤 실천적인 요령을 가르친다고 할 것 같으면 그 뒷부분에 나오는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러면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시리라’고 하는 이것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이해와 관계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은밀한 중에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렇게 표현하고 있을까 궁금합니다. 은밀한 중에 계신, 또 은밀한 중에 보시는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그리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리라 이것들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은밀한 것에 대해서 강조하시는 의미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우선 크게 첫째는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은밀함을 강조하시는 이유는 그 하나님이 들으시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바라보는 기도라고 하는 것을 예수님이 강조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교훈을 주실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바리새인들과 그리고 그 바리새인들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의 잘못된 기도 생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외식’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마음에는 없는데 그 마음에 있는 것처럼 밖으로 표출하고 그것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서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그런 것이 외식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는 그 기도를 들으시는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만을 의식하면서 기도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 바리새인과 그들의 영향을 받은 유대인들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거나 과시함으로서 사람들로부터 받는 평판이나 칭찬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중요한 동기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사람을 의식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우리들이 마치 이렇게 다른 사람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그 무아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기도에 깊이인 것처럼 생각하는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경 적으로 보면 구약에서 보면 선지자들의 영적인 경험과 이교도들의 영적인 경험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이 무엇인가 하면 이교도들은 자신의 신과 교통하거나 혹은 자신의 종교에 어떤 깊은 체험을 하게 될 때에 그 의식이 없는 무아경에 엑스타시로 들어갑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뭔가 이렇게 신비한 경험을 하거나 자신의 신들과 교통하면서 그 순간에 거의 의식이 완전히 중지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지자들의 특성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 깊이 교통하면서 신비한 경험을 하는 가운데서도 의식은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생생히 살아 있는 의식으로 주님의 계시를 받고 그것을 기억하고 심지어는 그것을 기록하고 그럴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절히 기도해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으로 들어가면 의식이 거의 사라지고 그래서 주위에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은 영적 깊이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덕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께 집중한다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그 하나님을 바라본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옆에 있고 다른 사람들이 나의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도 내가 기도하는 동기 자체가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 아니라 언제든지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향해서 내가 집중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은밀한 중에 계신 분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하나님 한 분만을 집중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어떻게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집만 해도 골방이 없습니다. 어떻게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나를 지켜보고 계시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내 기도하는 소리를 듣고 경탄해마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주님이 내 기도하는 모습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시면 나는 의미가 없다. 내 기도생활은 의미가 없다. 그렇게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바라는 마음, 그것이 기도 생활에 있어서 절실하게 필요한 제목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먼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는 기도할 때에 은밀한 중에 계신 네 하나님을 의식하라 그 하나님만을 의식하면서 기도하라. 그러니까 골방에 들어가서 네가 기도할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평판이나 기대, 이런 것들 다 버리고 나 여호와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어주신다 라고 하는 한가지 사실만을 기억하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계신 곳도 은밀하고 그리고 그 하나님이 너를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도 은밀해서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탁월한 감각을 갖기 전까지는 내가 너를 지켜보아도 네가 나를 알 수 없고 내가 존재하는 것을 너는 감지할 수 없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그런 사실을 기도할 때는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명시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금식기도를 하면 실제로 기도를 많이 못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힘이 없으니까 어떻게 기도하겠습니까. 그런데도 그런 기도가 상당히 힘이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 하면 그렇게 금식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응시하게 됩니다. 그것도 기도할 때 가끔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금식하는 기간 내내 그 하나님을 응시하게 됩니다. 만약에 한사람이 금식기도를 하지 않아도 마음이 워낙 하나님께로 향한 나머지 먹든지 마시든지 길거리를 걸어다니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응시하는 마음의 상태로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언제든지 아주 깊은 기도 속으로 탁월한 하나님과의 친교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기도는 삶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삶은 기도를 능가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거기에 묶여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 기도하는 만큼 살고 사는 것만큼 기도합니다. 기도가 삶을 변화시키고 삶을 잘 살면 기도가 변화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실제의 기도의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일주일 동안 내내 하나님을 거의 생각도 안 하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주일날 와서 어떻게 한번 기도를 해볼까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응시하는 그 초점 자체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초점을 이동하려니까 그 초점이 이동이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동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기도하고 싶어도 사실 기도가 안 되는 영적인 순발력이 아주 현격하게 뚝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계속 하나님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시시때때로 주만 봅니다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주님이 나의 이 고통을 아실 텐데. 몸이 아프면 하나님 제가 너무
아픕니다. 주님이 내 아픔을 아실 텐데. 감사한 일을 만나면 아! 하나님이나를 도와주셨나보
다 이런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집중됨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도의 순발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늘 그런 하나님을 느끼니까 눈을 딱 감고 오! 주님, 그리고 기도하면 기도가 깊은 속으로 쭉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당시 바리새인들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 순발력이 없었습니다. 없었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의식 속에는 은밀한 하나님을 바라보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영광을 구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순발력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를 이렇게 계속 캐들어 가다가 보면 결국은 기도는 우리 모두가 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도를 그렇게 중요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때로는 영혼의 참다운 변화가 없으면서도 말씀에 귀를 기울일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그 사람의 존재만큼만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엠 바운즈’라는 목사님이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의 사람됨은 그가 무릎을 꿇었을 때에 사람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누굴까? 하나님 앞에 내가 누구일까? 그런데 무릎을 딱 꿇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 모습, 그 상태가 하나님 앞에 그 사람의 상태라고 했습니다. 뭔가 이렇게 기도하기 위해서 무릎을 꿇으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차가운 거절감을 느끼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으면 그런 사람입니다. 무릎을 꿇었는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품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교제를 누릴 수 있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상상을 해보십시오. 한 사람의 신자가 있는데 그 사람에 대해서 성경에서 별명을 붙이기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너무나 많이 사랑해주시는 사람이라고 할 때 그 결정적인 차이를 어디서 느낄 수가 있습니까?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많은 사람이 느낄 수 없을 때 그 사람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느낍니다. 그리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 만납니다. 그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삶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끊임없는 응시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눈을 뜨면 오! 주님 오늘 하루가 밝았습니다. 도와주시옵소서.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응시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게 하루의 삶 속에서 매순간 계속되어야 합니다.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는 하나님 조건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응시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지 말고 사람의 평판에 매달리지 말고 네가 진짜 기도하기를 원한다면 그 하나님이 은밀한 중에 계시고 또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넌 기억을 하라. 그리고 하나님께 집중된 삶을 살아라.
두 번째로 여기서 “은밀한 중에 계시는 네 하나님이 은밀한 중에 보시리라” 그러면서 “은밀”을 강조합니다. 은밀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감추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강조하시는 첫 번째 이유가 하나님에 대한 응시 내지는 집중이 기도에 있어서 필요하다라고 할 것 같으면 은밀한 중에 기도하라는 두 번째 의미는 무엇인가 하면 기도할 때 진실해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그 기도에 관심을 가져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의미가 있지, 간절히 기도했는데 하나님은 들은 척도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들은 척도 안 하시는 게 내게 느껴진다. 사실 기도의 영광은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할 때에 그 수많은 사람들이 나와 함께 같이 기도하는데 그 수많은 사람이 함께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마음을 나의 기도를 향해서 집중하도록 그렇게 끌어들이는 강력한 무기가 무엇입니까? 진실입니다. 육체적인 열심히 아닙니다.
그러니까 언젠가 교회에서 기도원에 갔는데 거기 집사님이 나중에 권사님이 되셨는데 기도원에 갔는데 기도원에서 기도를 하는데 기도할 수 있는 자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봄에 기도원에서 심어놓은 묘목을 흔들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소나무 묘목이었습니다. 그것은 다 육체적인 열심입니다. 왜 기도할 때가 많고 많은데 왜 하필이면 성도들 헌금 걷어서 산에다 묘목 심어놓은 그 나무를 흔들면서 나무를 괴롭히는지,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기도를 하다가 소나무를 뽑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빈말로 야,
그 소나무라도 하나 뽑아야지 그게 응답이 오겠는가 합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너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는데 눈을 감고 기도하다가 손을 휘어잡으니까 앞에 소나무가 있었는데. 그게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 모르고 붙들고 하나님 앞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렇게 기도를 한참 하나님 앞에 하고 나서 기도가 끝나고 나니까 자기 손에는 뿌리가 뽑힌 소나무가 있었더라 그 이야기지. 뭐 소나무 뿌리를 뽑는 것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에 내가 분명히 여러분들에게 말하는데 우리 교회 교인들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 우리 교회는 정말 열린 교회입니다. 새벽 4시 반부터 시작해서 밤 12시까지 열어놓습니다. 그러니까 참 좋은 교회입니다. 언제든지 들어와서 누구든지 곤고하면 기도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낮이고 새벽이고 이렇게 지나가다가 보면 괜히 그렇게 덜덜 떱니다. 그런데 성령이 흔드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흔듭니다. 뭐 하러, 왜 그렇습니까? 심지어 의자를 막 흔들면서 덜컹덜컹 흔듭니다. 그게 다 무엇인가 하면 넓은 의미에서 보면 외식입니다. 그렇게 소나무를 잡고 아무리 흔들어도 하나님은 주목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이 무슨 벌벌 떨고 막 이것을 덜컹덜컹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런 열심을 보면서 하나님이 주목을 안 하십니다.
제가 총각 때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되었는데 교회에 철야만 하러 가면 할아버지 목사님이 손들고 기도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손을 들고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팔이 아픕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팔이 이렇게 자꾸 내려옵니다. 그러면 막 야단을 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도 지셨는데 그 팔도 못 드는가 합니다. 물론 말은 됩니다. 그런데 아픈 것은 아픈 것입니다. 그러다 나중에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도 제목은 잊어버리고 팔 아픈 것만 생각이 났습니다.
나는 예배 시간에 사람들이 막 일어섰다가 앉았다 하는데 어느 교회에 가니까 설교할 때까지 서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게 왜 그렇게 미련한지. 예배드리면서도 온 생각은 어느 순서에서 앉을까 그것밖에 없습니다. 왜 그런지. 앉아서 예배드려도 괜찮습니다. 진짜 일어서려면 설교 시간에 일어서야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어디 감히 턱 앉아서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도 부족합니다. 아니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물구나무서기를 해서 예배를 드린다고 한들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불 판에 올라가서 예배를 드려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모두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을 향한 육적인 생각입니다. 제발 하지 마십시오. 내 부탁하는데 제발 하지 마십시오. 아주 그렇게 천박해 보일 수가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시선을 끌고 싶으면 진실해지십시오. 마음에 없이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수만 마디의 말보다는 너무나 진실해져서 하나님 앞에 자기의 모습을 보니까 말을 이을 수가 없어서 가슴만 두드리던 그런 세리의 진실함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래야 진짜로 인생을 잘 사는 것입니다.
아주 훌륭한 사람이라도 그런 사람이 와서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자기를 비쳐보는 자세가 없이 기도하면 잘 살았는데 하나님은 잘 살은 것이 생각이 안 나고 못산 부분들을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정말 삶 전체가 죄악 투성이었고 하나님 앞에 실패 투성이었어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무릎을 꿇으며 주님의 이름을 부를 때 진실해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나의 입술에 모든 말과 나의 마음에 묵상이
주께 열납되기를 원하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그렇습니다. 진실하지 않고는 이런 식의 탄원을 하나님 앞에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의 입술의 모든 말과 그리고 나의 마음에 온갖 묵상의 하나라도 주님이 받으심 직한 것이 없기를 원합니다.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 깊은 심사를 통촉해주시옵소서. 진실하지 않고 그런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 진실의 자세가 없으면. 그 시인이 지금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 심사를 통촉해주시옵소서. 그렇게 할 때 하나님 앞에서 나만큼 잘난 사람이 있으면 한번 나와보십시오. 그렇게 뻐기는 것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잘 살고 잘못 살았고, 내가 있고 없고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내 마음속에 있는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것이든지 간에 지금 내 영혼이 하나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으면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는 내 마음은 사실인지 아닌지 주님이 오셔서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진실하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로운 사람들만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하면 진실한 기도의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 그런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기도 속에서 하나님이 여러분들의 깊은 속 사람을 만져주시기를 원한다면 기도 그 자체가 깊은 속 사람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합니다. 사람들이 기도하면서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내밀한 은혜를 기도 속에서 만족스럽게 경험하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진실한 기도가 안 나오기 때문입니다. 깊은 마음의 밑바닥에서 나오는 그 기도는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실 때에는 그 솟아나는 마음의 깊이만큼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응답해주십니다. 덜렁덜렁 기도하면 그것은 표피적입니다. 기도 속에서 기도를 맛보는 하나님의 은혜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표피적입니다. 표준적입니다. 그런 기도 생활을 가지고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들이 성화 되기 힘듭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표피적으로 경험하는 이런 가벼운 신앙의 경험을 가지고는 우리가 깊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깊이 변화되기 위해서는 아주 깊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하나님이 누구에게 주시는가 하면 진실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진실하게 하나님을 찾는 사람,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할 때도 답답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이 기도하면 우리들은 영적인 존재들이니까 즉각적으로 느껴집니다. 말은 술술 나오는데 그 사람 깊은 내면의 세계 속에서 어떤 진액이 묻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항상 하나님의 만져주시는 그런 깊이 있는 은혜를 거의 경험하지 못한 기도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래된 사람들이 이런 덫에 걸립니다.
내가 오늘 여러분들에게 한번 질문하겠으니 여러분이 한번 답변을 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다른 사람보다 낫습니다. 옛날에 하나님의 은혜도 경험했고 말씀의 감화도 받았고 새벽 기도도 나오고 다 좋습니다. 그런데 제가 묻는 말에 한번 답변해보십시오. 여러분, 진짜 여러분들이 다른 신자보다 신앙생활이 더 나은데 그렇게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깊이 여러분들을 만져주시는 것을 느끼는 면에서도 처음 믿기 시작한 사람보다 낫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기도에 있어서 진실함에 있어서 결핍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의로운 삶을 살았다고 할지라도 진실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상대해주시지 않습니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올라갔는데 두 사람 중에 누가 의로운 사람입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바리새인이 의롭게 살았습니다. 의롭게 산 것에 대해서 예수님이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의롭게 살았다는 자부심 때문에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진실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죄만 지으면서 살았던 이 세리는 어느 한순간에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진실해지고 나니까 그 진실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기도 속에서 진실해지는 것을 잊어버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진실은 대부분 여러분에게 고통을 가져다주지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 자신의 참모습을 인정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이 기쁘겠습니까? 사람들은 너 예수에만 미쳤구나. 너 만한 신앙을 가졌으면 좋겠다. 어쩌면 너는 그렇게 기도도 잘하니. 어쩌면 그렇게 좋으니. 이렇게 말하는데 본인 자신이 진실해지면 하나님 앞에 내가 얼마나 아무 것도 아니고 남들 보기에 그럴 듯 해 보이는 신앙생활 속에 깃들여있는 그 오만과 그 자만심,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 같았던 신앙을 잃어버린 무감각 그리고 우리의 죄, 불순종 이런 것들을 발견합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실제 삶에 있어서 진실한 삶의 자세를 견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항상 고난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고난이 많고 고통이 많습니다. 요령부리는 삶을 살지 않으니까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시선을 끄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진실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마디의 기도를 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그 기도를 끌어내리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뭔가 어려운 일이 있기만 하면 사람들이 기도를 조직화하고 운동화 하는 경향들이 있습니다. 캠페인을 벌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이 아무리 썩어도 썩은 이 세상이 변화되는 것은 무슨 캠페인이나 무슨 궐기 대회 같은 것으로 변화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심각하게 느끼면 다른 사람 이야기하면서 투덜거리지 말고 자기 신앙이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 주님이 피로 사신 교회, 그리고 주님이 사랑하셔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 사는 백성들이 너무나 많이 타락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자기부터 그렇게 진실한 자세로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것이 바로 은밀한 중에 하나님이 계시다라고 하는 그 신앙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한 자세입니다.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늘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그 기도를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마음을 실은 짧은 기도가 훨씬 낫다. 마음에 없는 그 기도는 깊은 기도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마음을 실은 짧은 기도는 긴 기도를 필요로 하게 만들고 그래서 결국은 우리를 깊은 기도의 세계 속으로 데리고 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은밀한 중에 기도하는 가운데 여기서 나오는 세 번째 이야기는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과 기도하는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하면 네 아버지께 네 아버지께 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희랍어 성경에 ‘파테르’ 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가족관계에서 부르는 아버지의 호칭입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아빠라고 그럴까? 아빠와 아버지의 그 중간정도입니다. 가족관계에서 부르는 이름입니다. 깨뜨려진 가정에서 별개 문제지만 어린아이들에게서 이 아빠는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모든 것을 용납하고 또 자기를 사랑하고 그런 것입니다. 그런 친밀한 그런 관계 속에서 기도하라는 것을 오늘 성경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밀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볼 수 없고 쉽게 느낄 수 없지만 그 하나님이 내 아빠라고 하는 관계를 가지고 그 친교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언제나 보이는 사람처럼 더 가까이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족 관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기도하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갚으시리라’ 다시 말하면 기도에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상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간구 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상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해도 우리가 못 가는 곳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헌신할 기회를 주셔도 건강이 따라주지 않으면 헌신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갈 수 없는데도 가게 만들고, 바칠 수 없는 것도 이루어지게 만들고, 내가 헌신할 수 없는데도 기도를 통해서 헌신하면 다른 사람을 통해 그 일을 이룰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섬김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섬김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은밀한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은밀한 중에 들으시는 하나님②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下)
어제 설교하다가 보니까 시간에 몰려서 세 번째와 네 번째를 그저 황망히 덮었습니다. 오늘 그 부분을 자세히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세 번째 우리들이 살펴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친교입니다. 여기에 보면 “네 아버지께 네 아버지께” 라는 표현이 이 짧은 구절 속에 두 번이나 되풀이되어 나옵니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여기에 아버지, 아버지 하는 것은 희랍어로 ‘파테르’인데 이것은 우리로 말하자면 가족관계에서 부르는 아버지의 호칭입니다. 아빠,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격의 없이 아버지를 부르는 호칭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이미 친밀함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 앞에 “네” 라는 말이 나옵니다. “네 아버지께, 네 아버지께” 은밀한 중에 거하시는 그 하나님도 네 아버지, 그리고 그 기도를 들으시는 분도 네 아버지, 그리고 너의 기도를 아뢸 곳도 네 아버지.
기도가 힘들어지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평소에 살아가는 이 삶에 있어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교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사실 기도가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적합한 비유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계가 항상 기름에 잘 묻어있을 때는 언제나 힘을 가해도 기름이 윤활유 역할을 해서 기계가 원만히 돌아가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러나 만약에 윤활유가 다 빠져나가 버리면 그 다음에 막 기계가 움직이면 거기서 마찰열이 생기면서 기계가 손상이 되든지 하여튼 무슨 문제를 불러일으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힘든 이유는 기도라고 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과의 친교를 타고 흐르는 간구입니다. 그런데 친교 그 자체가 없거나 아니면 거의 무너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때는 이 기도라고 하는 자체가 흐르기가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뒤편에 보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기도가 나오면서 이방 사람들은 많이 기도해야 하나님이 들으시는 줄 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기도에 대한 생각을 바로잡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당시 이방 신들을 섬기는 이교도들에게 있어서는 그런 식의 인격적인 친교를 강조하는 고도의 도덕적인 종교가 없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그런 무당들이 자기 신을 섬긴다고 그럴 때 심지어 자기가 신내림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무슨 신들에 매여서 사는 것이지 그 신과 무슨 교제를 누리면서 신들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고 고도의 기쁨을 누린다든지 그 친교 속에서 산다든지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신앙의 세계에서는 다릅니다. 하나님과의 친교는 기도가 흘러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당연히 그런 하나님과의 친교가 막혔으니까 기도가 흘러갈 때 그 기도가 잘 흘러갈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안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제 언제든지 그 하나님을 나의 아빠, 우리 아버지, 이렇게 부르면서 기쁨과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그런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로서 갖는 탁월한 친교, 이것들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기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기도에 있어서 순발력이라는 것을 가끔 말씀드립니다. 그런데 그 순발력도 결국은 친교가 살아 있을 때 순발력이라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친교가 있는 사람들은 낙심 안 합니까? 하나님과 친교가 있는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없습니까? 하나님과 친교가 있는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실망하거나 이런 일이 없습니까?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친교가 확실한 사람들은 잠시 낙심하고 잠시 좌절할지라도 순발력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친교가 있으니까 기도하면 다시 자신의 마음속에 밀려오는 낙심이나 실망, 좌절, 공포 이런 것들이 순간의 느낌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실체가 아니라 무엇인가 가공의 두려움이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순발력을 발휘해서 그 친교를 타고 다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로 흘러 들어가게 되면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이 경험한 것 같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친교 문제, 하나님을 이렇게 내 아버지라고 가깝게 부를 수 있는 그런 것, 그런 것이 기도에 있어서 꼭 필요한데 그런데 왜 그런 것들을 우리들이 잘 유지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가르쳐주신 예수님은 예외였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과 탁월한 친교 속에서 사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면 하나님이 항상 나와 동행하신다. 그렇게 고백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친교가 정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언제 강력하게 느끼는가 하면 기도할 때 느낍니다. 평소에 살아갈 때는 덜 느낍니다.
그런데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라치면 우리가 하나님과 불화 하다는 것이 아주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자주 거절감을 느낀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기도할 때를 염두에 두고 그 말을 하는 것이지 평소에 그런 것 거의 느끼지 못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는 사람이라도 밥을 꾸역꾸역 먹으면서 오늘은 하나님이나를 싫어하시네. 그리고 밥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레크레이션을 하고 운동을 하고 그러면서 왜 이렇게 내 마음이 컬컬하지. 하나님이 아마 날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 나도 별로 안 좋은데. 서로 안 좋네.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 속에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형태를 가만히 보면 정함이 없고 안정감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조용히 앉아서 하나님을 묵상한다든지, 좀 깊이 기도한다든지, 그 다음에 말씀에 은혜 속에 깊이 들어간다든지, 자기를 성찰한다든지 하는 그런 안정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왜 사람들이 오래 기도하라고 애를 쓰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못하는지 아십니까? 잘 들으십시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여러분들이 하나님과의 친교가 없기 때문입니다. 없거나 아주 현저하게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잘 생각해보십시오. 누구네 집에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는데 계십니까? 그렇게 하는데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빨리 돌아오는 게 낫지. 계십니까? 그렇게 하는데 아무도 없습니다. 계십니까? 그렇게 하는데 아무도 없다니까. 이 녀석이. 계십니까? 그러니까 난 너 상대 안 해. 그런 말을 계속 세 번 네 번 다섯 번 되풀이해서 들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과의 친교가 없는 사람들이 무릎을 꿇을 때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느끼는 것은 반복되는 하나님의 거절감 뿐이니까 그것을 못 견디고 발딱 일어나서 다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하듯이 밥을 퍼먹을 때는 하나님의 거절감 같은 것 못 느낍니다. 그러니까 그런 하나님과의 거절감을 느낄 수 없게 하는 일에 종사해버리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아십니까? 그게 기도의 영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심리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래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오래만 엎드려 있으면 최고인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 오래 엎드려서 기도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친교가 있든지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거절감을 극복하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의 친교를 회복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든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둘 다 훌륭합니다. 첫 번째가 아니고 두 번째의 대안이 뭐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러니까 거의 기도하지 않고 기도시간이 있다고 할지라도 앉았다가 발딱 일어서서 가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친교가 거의 없는 속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아주 진지하고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의 요체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우리의 기독교 신앙의 요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좋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 안에서 친교를 누려서 주님이 내 안에 있어서 기쁘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서 주님이 기쁜 그런 관계가 신앙생활의 요체가 아닙니까? 그것을 다 잃어버린 사람들이 다른 방면에서 보이는 그런 다양한 삶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을 절망시키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산다라고 하는 것은 마치 불피우는 것과 똑같습니다. 추운 겨울날에 어머니들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구들장도 다 식고 창호지 바른 그 문으로 황소바람이 들어와서 추워서 식구들은 이불 속으로 오그리고 들어가는데 어머니가 부뚜막에 내려와서 부엌에서 불을 피우십니다. 어떻게 피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처음에는 작은 솔가지들을 갖다가 놓고 종이로 불을 붙여서 작은 나무 가지를 놓고 불을 피웁니다. 잘 안 되면 훅 이렇게 불어서라도 피웁니다. 좀 커지면 약간 큰 나무, 불이 확 붙고 이제 아궁이가 더워지기 시작하면 좀더 큰 나무로 올려놓습니다. 불이 이글이글 타면 눈을 잔뜩 뒤집어쓴 나무를 갖다가 넣어도 마르면서 다 타버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을 절망시키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들이 궁극적으로 가야 할 목표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마음속에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을 향한 이 영적인 순발력을 잃어버렸다고 할지라도 진짜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사는 행복을 정말 간절히 원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친교를 잃어버린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그것을 어떻게 하든지 회복하려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그런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슬프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는 자녀이고 주님이 내 아빠인데 내가 그 아빠에게 무엇인가 거의 기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라고 하는 것이 원통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누구에게 호소할 수 있습니까? 우리들이 고난이 찾아오고 그 마음이 괴로워서 눈물을 흘릴 때 우리들이 가서 도움을 청할 곳이 어디입니까? 일용할 양식을 우리가 누구에게 구합니까? 우리가 우리도 견딜 수 없는 죄에 쌓여서 견디지 못해 아파할 때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소연 할 곳이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우리의 숨이 끊어지면 내 영혼을 누구의 손에 부탁한다고 기도하겠습니까? 그 하나님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차가운 거절감 이상 아무 것도 못 느끼고 산다라고 할 때 그 사는 것이 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아니 제 이야기가 틀립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리고 나면 삶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상을 당한 집에 찾아가서 기도할 때 제일 가슴아픈 집이 어디인가 하면 아직 부부가 젊은데 부인이 남편을 여위거나 남편이 아내를 여윈 그 집은 정말 할 말이 없습니다. 아직 젊은데 말입니다. 그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같이 살다가 남편이 혹은 아내가 먼저 갔습니다. 그러면 화장도 안 합니다. 사람 만나기도 싫습니다.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립니다. 사진만 어루만지면서 세월을 보냅니다.
언젠가는 한번 아주 젊은 사람인데 벌써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고시까지 패스해서 유망한 관리가 될 사람인데 그만 동료들과 모여서 축구 하다가 뇌출혈로 쓰러져서 즉사했습니다. 부부는 너무 사랑하는 사이입니다. 그러니까 아내가 그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결국은 서울 시내에 있는 어느 호텔에 가서 17층에서 떨어져 투신자살해서 죽어버렸습니다. 그 방이 신혼여행 첫날 밤 잔 그 방입니다. 얼마나 남편이 그리우면 남편이 죽은지 한 두 달만에 올라가서 투신자살해서 죽어버리는지.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뭐 잘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데 그 사람이 없다면 그리워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렸으면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가슴아픈 일이지만, 우리의 죄와 불순종, 혹은 다른 일로 인해서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커다란 죄와 불순종만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제 지적했던 그 게으름, 그 속에서 서서히 하나님을 향한 기도의 은혜를 잃어버릴 때 친교의 은혜도 함께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애석한 일이지만 죄 많은 세상에서 죄인인 인간이, 바탕이 악한 사람이 보이는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가다가 보니까 애석한 일이지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친교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 너무 슬퍼해야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좋은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남녀가 둘이 죽고 못삽니다. 하루에도 골백번전화를 하고 그리고 매일 찾아가서 선물을 안기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다음날도 일어나서 밥 먹고 뛰어 놀고 무슨 사업하러 다니고 친구들 만나고 그러다가 일주일만에 새로운 여자 친구가 생겼습니다. 옛날에 그 사람이 사랑했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사랑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일주일 후에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면 그 사랑하는 사람과의 친교를 잃어버리면 그는 그의 생에 모든 목적과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가지고 있을 때 사랑이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렸을 때 그 사랑이 입증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 특히 시편에 보면 이러한 상사병 적인 사모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친교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다시 그 친교를 회복하기 위한 갈망의 노래로 가득 찬 곳이 이 시편입니다. 그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주 내 마음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 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렇게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는가. 그런 모든 것 다 잃어버려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친교입니다.
좋은 비유가 또 하나 생각이 났습니다. 도덕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서로 결혼을 했다고 칩시다. 내 아내가 있습니다. 이 아내가- 용서하십시오. 좀 기분 좋은 표현은 아닙니다. -자꾸 바람을 피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딱 억누르면서 정숙한 아내로 살아가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만약에 바람을 피게 되면 그 나라에서 사형입니다. 형벌이 무서워서 바람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못하고 정절을 지키면서 남편과 함께 살아갑니다. 사실 그 남자에게 아내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그런 것이 아니라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면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더럽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성경 적으로 볼 때 순결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깨끗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독점적인 사랑의 마음으로 자신의 마음이 꽉 차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결입니다. 그런 것이 결국은 독점적인 사랑이다라고 하는 그런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친교를 극대화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가 그것입니다.
우리들이 인간이기 때문에 다양한 욕망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욕망이 워낙 강렬하게 불타서 하나님의 법도 밟아버리려고 하고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그런 잘못된 욕심이 있습니다. 욕심이 있는데 그것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면 단지 내가 이것을 행하면 하나님이나를 요절내시리라고하는 그 두려움 하나로 그것을 억제하며 산다는 것은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고 하나의 이념이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리거나 하나님과의 친교를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의 신앙은 어째든 간에 성경이 이야기하는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른 것에 의해서 대치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과의 친교를 누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면 모든 문제들이 해결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은혜와 사랑이 너무나 깊어서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내 마음과 그리고 내 생각, 나아가서 나의 이 전 삶이 주님께만 소유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소유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을 누구에게도 자신의 마음과 이 삶을 나누어서 하나님과 사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친교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런 친교를 유지하지 못하는 그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기도할 때만 그 친교가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그런 생각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 가고 싶은 데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소에는 친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욕망이나 자기의 생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자기의 대적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말하기를 “저희의 신은 배요” 무슨 뜻입니까? 이 배입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인간을 움직이는 그 마음의 자리가 배에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을 해봐라. 그 사람들 입장에서는 배에다 손을 대고 생각해봐라. 그렇게 이야기하는 문화적인 문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의 신은 배요” 무슨 뜻인가 하면 제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인생의 제일 목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제일 가는 목적이 무엇인가.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제일 가는 목적입니다. 그들은 다른 신앙고백을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제일 가는 목적은 우리 내키는 대로 살아서 우리의 마음에 만족을 많이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과의 친교를 잃어버리고 나면 가장 커다란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망이 자기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소 살아가는 삶에 있어서는 그 욕망을 따라 막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의 정신과는 안 어울리는 삶입니다. 그렇게 기도의 정신과는 안 어울리는 삶을 살다가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려니까 될 리가 없습니다. 되면 기적입니다. 안 됩니다. 안 되면 자기의 가난한 상태를 헤아리면서 깊이 참회하려고 애를 쓰든지 둘 중에 하나인데 이것을 못하는 사람은 대부분 이것도 안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깊게 생각하고 자기가 이것을 극복하고 어떻게 하든지 내가 하나님의 탁월한 친교 속에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그런 식의 인생을 왔다갔다가 하다가 하나님 앞에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인생을 마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과의 이런 친교를 누리기 위해서는 기도 자체가 삶과 모두 연관이 되었다 라고 하는 그것을 우리들이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상기시키시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그 하나님을 ‘내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삶을 살 때 기도에 있어서도 그런 순발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과의 친교를 새롭게 회복하는 이것이 정말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회복된 친교 속에서 살기 위해서는 단지 기도만을 손대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해서 하나님과의 친교를 획득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여러분들의 모든 삶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이 뒤따를 때 기도의 은혜도 견고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마지막 네 번째, “은밀히 계신 하나님이 갚으시리라” 결국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기도에 있어서 상급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기도에는 반드시 보상이 있습니다. 사실 이런 믿음이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그것은 정말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장시간을 기도 속에 자기를 바친다고 하는 것은 내가 탁월한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 있을 때는 그렇지 않지만 그렇지 못할 때 씨름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애를 쓸 때는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애쓰고 몸부림치는 그것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하는 그의 갸륵한 소원을 이미 표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어려운데 그 어려움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내가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기도에 은혜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기도에 은혜를 잃어버리기 위해서 별로 노력한 것이 없습니다. 그냥 생긴 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요즘 새벽기도에 여러분 많이 나오시는데 특별히 결심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대답을 안 하십니까? 특별히 결심을 했지요?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특별히 결심을 해도 안 나오면 그러면 예전에 왜 못 나왔는가가 설명이 안 됩니다. 그러니까 특별히 결심을 안한 것입니다. 그런데 매일매일 나와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어떨까요? 미안하지만 새벽기도는 3-4년이 지나도 습관은 안됩니다. 습관이 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날마다, 날마다 싸우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죄악 된 습관도 그렇게 빨리 들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 어렸을 때 담배 배울 때 처음에 담배를 필 때 캑캑거리면서 사람들이 왜 배우나. 커피를 마실 때도 세상에 돈 내고 이 쓴 물, 한약과 똑같이 생겼네. 이것을 왜 마시나. 그렇게 말합니다. 처음에는 담배를 왜 갖고 다니는가 하면 폼잡고 다른 사람에게 하나씩 나누어주는 재미에 넣어서 다닙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인에 배겨서 그 담배와 친교를 누릴 때쯤 되면 6개월 이상은 흘러야 합니다. 커피도 한 3-4년 마시니까 겨우 맛을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10년 마시고 나니까 좋은 커피, 나쁜 커피를 알게 됩니다. 그런 것입니다. 죄악 된 습관도 늦게 몸에 배는데, 경건한 습관이, 새벽 기도가 습관이 됐다고 하는 것은, 아니 그래도 무릎에 관절염에 걸릴 정도로 그렇게 오래 기도하고 머리가 하얗게 된 후에 이야기지, 습관 아닙니다.
그 한 예로 여러분, 여름 휴가 갔을 때도 새벽기도에 갑니까? 안 갑니다. 그 습관이 왜 안 됩니까? 그러니까 날마다, 날마다 싸우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 힘이 시간이 지나면서 노력이 좀 덜 들기는 합니다. 그러나 날마다, 날마다 싸우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는가 하면 늘 기도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매일매일 싸우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요즘 제가 이야기하는 게 그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우리에게 십자가가 있는가. 무슨 십자가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 십자가라고 할 것이 없습니다. 무슨 십자가가 있습니까? 자유로운 신앙의 시대에 남은 마지막 십자가가 바로 이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싸우면서 가는 것입니다.
뜻을 정하니까 이렇게 되잖아요. 다음주에도 또 뜻을 정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서 일평생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동기가 무엇입니까? 주님을 사랑하니까 하나님 앞에 내가 새벽에 육신의 안락함을 잃어버려도 하나님의 기도의 은혜 가운데 살고 싶다라고 하는 그 소원이 강렬하니까 이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실 때는 믿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실 때는 당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보실 때는 자기의 육신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 삶이 어떻게 일주일이나 삼일동안만 계속되어야 하는 삶인가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러니까 아무리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복을 많이 주셔도 ‘우리는 이 세상이면 충분합니다’ 라는 고백은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나라를 갈망하고 그 은혜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여튼 그렇게 어렵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보상이 있습니다. 그 보상이 어떤 식으로 오는가.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는데 우선 하나는, 기도하면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심으로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보상해주십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모두 새벽에 여러분이 이렇게 나왔을 때 여러분 모두가 그냥 다른 것은 하나님 도와주실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내 영혼에만 만족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우리의 삶의 상황을 놓고 기도하면 그것이 여러분들 자식의 수능의 문제이든지 무슨 문제이든지 하여튼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주위에 보면 정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자녀 앞길을 연 부모도 많습니다. 사업에 위기가 왔을 때 하나님 앞에 겸비해져서 엎드려서 기도하며 도움을 받은 이야기들을 우리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간증들입니다. 실제적인 길을 열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정말 열어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상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정말 감사한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그 상황에 있으니까 어느 목사님 생각이 납니다. 기도원에 갔는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중이라고 해서 무슨 기도제목으로 그렇게 기도하시느냐고 그랬더니 교회를 짓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특별기도를 위해서 산에 올라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엇이라고 기도하시는가 했더니 자기는 기도할 때 제일먼저 그렇게 말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3억입니다. 일주일 기도하러 올라왔는데 20억이 필요하답니다. 그래서 20나누기 7하니까 3억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제가 하루에 무릎을 꿇는데 3억씩입니다. 그래서 내가 대게 비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해주십니다. 은혜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함으로서 갚아주십니다. 보상해주십니다. 그게 얼마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인가 생각을 해보십시오.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일이 이루어질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작년에 우리 교회가 땅을 살 때 계약금을 마련하지 못해서 종종 걸음을 치면서 목사인 제가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서 돈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진짜 생전 처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일주일동안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고 가슴아파하고 하니까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일주일만에 그 땅을 계약하게 하시고 결국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 땅이 지금 우리 것이 되어서 공사를 기다리고 있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일년동안 그 땅값이 많이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그 땅을 얻기까지 하나님 앞에 성도들이 많이 기도했는데 사실 하나님이 얼마나 큰 보상을 주셨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불의한 재판관이라도 우리들이 간절히 호소하면 과부가 간절히 호소하니까 그것을 보상해주었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어떠시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면 이것이 헛수고다’ 그런 생각은 진짜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 기도에 대해서 보상하십니다. 우리의 실제적인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심으로 보상해주십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우리의 영혼에 유익을 주심으로서 우리의 기도에 보상을 해주십니다. 어떤 남편의 간증입니다.
(예화)부인이 불치의 병에 걸려 남편이 아내를 위해 산에 올라가서 1년 넘게 기도를 하면서 산에 서 내려올 때는 아내를 고쳐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아내가 죽어버리자 처음에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이해가 안 갔지만 나중에 깨달은 사실은 아내로 인해 자신이 기도 하는 그런 순간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해갔다는 이야기.
그 하나님이 그 아내를 데리고 갔기 때문에 그 기도에 헌신, 기도의 부르짖음은 결국 아무 보상도 못 받았다. 허무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잠시 생각이었지 결국은 나는 확신합니다. 제 제자이지만 일평생 살아가는 날 동안 그 사람은 그 일년 이년 동안 고통 받으며 하나님 앞에 부르짖은 그 기도를 통해서 보상이 해주신 그것이 일생을 살아가면서 아마 그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기초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우리를 보상해주십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하나님이 갚아주십니다. 더군다나 은밀한 중에 계셔서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도록 하나님이 갚아주십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그 형제가 뭐 남은 것이 있습니까? 일년 이년동안 고통을 받으면서 밤마다 산 기도를 다니면서 그렇게 진짜 땀이 흐르도록 기도해서 마지막에 얻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죽은 아내와 그 다음에 덩그러니 남은 어린아이 둘, 이십대 나이에 홀아비가 되었다는 것 외에 남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이 생각하는 판단입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그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이 도저히 알 수 없도록 그렇게 부르짖어 기도하는 그에게 은밀히 주신 그 무엇이 있습니다. 그것이 보상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보상을 베풀어주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4.중언부언하지 말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6:7)
“중언부언”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한다면 같은 말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런 기도를 드리는 것은 이방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이방인들은 말을 많이 해야지 만 자기의 신들이 그것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개념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우리의 기도 생활에 적용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여기에서 중언부언한다는 그 말이 문자 적으로는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뜻이지만 성경에 보면 같은 기도를 반복한 예가 많이 나옵니다. 엘리야의 경우 비가 오지 않았을 때 반복해서 계속 기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세 번이나 같은 말로 기도하셨습니다. 바울이 무슨 질병인지 모르지만 자신의 몸에 사단의 가시라고 불려지는 질병이 있어서 그것을 물러가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처럼 뛰어난 하나님의 사람들의 기도 속에는 오히려 반복이 많이 나옵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중언부언과 그 반복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문자 적으로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이지만, 진실한 그 의미는 우리의 기도 따로, 그 다음에 우리의 마음 따로 가는 이런 종류의 기도는 모두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이 반복한다고 할지라도 그 기도 속에 그 기도와 우리의 마음이 하나로 묻어서 가면 그것은 아무리 많이 반복되어 가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중언부언하는 기도도 아니고 이방인들의 잘못된 기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에 하여튼 마음을 기도 내용에서 빼앗기게 되면, 그러니까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집중하는데서 우리의 마음이 이탈하게 되면 모두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언부언하는 요소들이 어떤 것이 있는가 한번 보겠습니다. 우선 첫째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스쳐 가는 잡된 생각들은 우리의 기도를 중언부언하게 만듭니다. 기도는 그러니까 처음에는 스쳐 가는 수많은 생각들과의 싸움입니다. 수많은 생각들이 막 스쳐 갑니다. 그때에 생각은 A가 스쳐 가는데 기도는 B가 나옵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됩니다. 그러면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그것은 끊임없이 기도 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순간 지나가고 나면 그런 것들이 모두 사라집니다. 마치 안개 낀 길을 쭉 달리다가 햇살이 떠오르고 나면 안개가 사라지면서 깨끗한 시야가 나타나듯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이제 해도, 해도 이 생각이 안 쫓겨날 때가 있습니다. 생각이 쫓아내려고 해도 쫓아 내지지 않고 점점 더 강하게 떠오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생각대로 기도가 가버립니다. 그것이 하나의 퇴치의 방법입니다. 무슨 뜻인지 아실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교회를 위해서 기도를 하려고 시작을 했는데 자꾸 자녀의 문제가 스쳐갑니다. 그러면 이제 자꾸 치우면서 자기가 정한 기도에 스케줄을 따라서 가는데 이게 도저히 할 수 없도록 가로막습니다. 그러면 이 기도 제목 잠시 접고 생각이 계속 지배하고 있는 그 기도 제목을 따라 갑니다. 그것이 하나의 아주 훌륭한 잡생각의 퇴치 법 중에 하나입니다.
또 그런 건전한 생각이 아니라 좀 나쁜 생각이 이렇게 기도 중에 올 수 있습니다. 쫓아내려는데 안 쫓아내질 때 그 나쁜 생각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나쁜 기도를 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나쁘다고 고백을 하면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그러면서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회피하지 않고 정면 대결하는 것입니다. 이열치열과 같이 그렇게 말입니다. 그러니까 잡생각이 밀려올 때 그때 오히려 그것을 피해가려고 하다가 안 되면 정면으로 대적을 해서 그래서 그것을 무너트리면서 기도를 하면 아주 놀랍게 기도가 열립니다.
그런 잡생각이 있고 그 다음에 또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되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이 무엇인가 하면 다른 사람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것, 이런 것들이 됩니다. 가끔 보면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그 소리나 내용이나 모습을 보면 현저하게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할 때에 웅변가 같이 하는 것, 그런 것들은 모두 중언부언하는 가능성이 아주 많습니다. 일단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보좌를 향한 이 집중에서 멀어지기만 하면 즉시 중언부언하는 기도로 떨어집니다.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는 자신을 과시하기 위한 그런 것일 수 있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지체가 저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어떤 부탁을 간절히 했는가 하면 작년 기도학교 사경회를 회상하면서 목사님이 기도를 열렬히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해서 내가 존중하고 그 뜻을 따라주는 중인데, 그래서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다른 사람들이 기도 사경회 끝나고 나서 좀더 기도했으면 좋겠는데 사람들이 쫙 빠져나가고 불이 켜지더랍니다. 더 기도하고 싶은데 자기 혼자 기도하려고 앉아 있으면 사람들이 꼭 그런 표현은 안 썼습니다만, 편지의 의미가 평소에는 기도도 안 하던 사람이 자기 혼자 열심히 기도하는 것처럼 폼을 잡나. 그렇게 생각할까봐 자기도 묻어서 나갔다고 합니다. 그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그렇게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삶이 기도한다고 폼잡는지 말든지 간에 나는 하나님 의식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며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모두 기도의 생활에 있어서 미성숙할 때 나타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든지 기도를 시작하면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는 그런 하나님을 향한 집중,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말씀드렸듯이 교회의 덕을 세우지 못하는 그런 다른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는,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워낙 집중한다는 것인데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그런 무례한 기도, 이런 것들은 옳지 않습니다.
(예화: 어느 교회에서 집사님이 대표 기도를 하시는데 자기 목사님의 부족한 점들을 놓고 기도했 다는 이야기)
그것은 벌써 시작자체가 사람들에게 자기의 기도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선동하고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어필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것이 정해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아니 말하려면 정당하게 대놓고 본인에게 이야기를 해야지, 그게 하나님 들으라는 기도입니까, 아니면 목사 들으라는 기도입니까? 끝나고 나서 목사님이 혼내주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리새인 적인 기도입니다. 아니 떳떳하게 편지를 보내든지, 기도 좀 더 많이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라든지, 아니면 제가 기도 제목이 많이 있는데 목사님 더 많이 기도해주십시오 라든지, 목사님 교회를 운영함에 있어서 이런 것들은 세속적인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런 생각이 계속 드는데 목사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든지 아니 정식으로 그렇게 해야지 기도 시간에 나와서 그런 것은 가증한 것입니다. 거룩한 기도의 형식을 빌어서 그렇게 하는 것은 다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지금 마음속에는 언어를 털어 내고 있지만 그 마음은 어떻게 하든지 그 목사님의 결함을 기도를 통해서 표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바보 같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것들이 이제 하나의 중언부언의 하나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또 세 번째는 어떤 것인가 하면 기도 그 자체를 미려하게 만들기 위해서 쏟는 그 관심이 하나님 자신을 주목하지 못하게 만들 때 그때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기도 그 자체가 아주 아름다운 것, 그런 것 저는 별로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 앞에 언어를 구사할 때는 사람 앞에서 언어를 구사할 때와는 좀 달라야 합니다. 사람 앞에 언어를 구사할 때는 다분히 선동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여러분들에 같은 말을 할 때에 그냥 말로만 쭉 설교를 합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묘사적 서술, 무엇인가 하면 당신의 마음은 굳어져 있습니다. 차갑군요. 이렇게 말하는 것보다 나는 당신의 마음을 볼 적마다 하얗게 얼어붙은 그 계곡의 얼음 덩어리가 생각이 납니다. 당신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려서 식었고 차가워졌으면 무엇으로도 녹지 않은 얼음 덩어리 같습니다 그러면 똑같은 이야기를 했는데도 후자의 이야기는 당신의 마음은 굳어졌습니다. 내 마음 딱딱하데.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이렇게 서술하면 막 그림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에 있어서 그런 묘사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을 향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사람을 마음을 향해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 그 설교가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 경험에 의하면 성경을 읽다가도 은혜를 깊이 받으면 성경 구절이 외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 구절이 내 안에서 찰칵 하며 그림 같은 것이 머리에 찍혀집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그림 같은 것이 콱 찍혀지면 일평생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그림이 찍혀집니다. 그래서 그림같이 찍혀진 하나님 말씀의 사진을 한 장 뽑아서 설교할 때 그 설교가 풍부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의 설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저 나름대로의 독특한 견해입니다. 그래서 설교에 있어서 ‘묘사적 서술’이라고 부는데 그런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말을 할 때에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그러면 아무리 진심이 담겼어도 사람이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이야기할 때 그 묘사를 다듬고 그리고 생각을 많이 하고 훈련을 많이 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그림같이 찍히는 그런 것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고린도 전서 13장 강해를 할 때 지하실 교회에 있을 때, 13장 그 위대한 장을 설교할 때에 두 주에 걸쳐서 서론을 먼저 했습니다. 서론을 하는데 사람들이 쫙 빨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90분이 지나고 100분이 되는데 계속할 수가 없어서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다음주에 계속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전부다 아이!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설교 시간에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데 다음 시간에 한다고 하면 가만히 있어야지,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묘사적 서술에 쫙 빨려 들어온 것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조지 윗필드’ 같은 사람인데 그 사람이 죄인의 위험에 대해서 설명하다가 어디다 설명했는가 하면 배가 조난을 당하는 것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배를 탔습니다. 뭐 그러면서 배가 다 난파되었습니다. 그리고 선실에는 물이 들어오고 사람들은 갈팡질팡 하고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막 묘사를 하면서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그 절망적인 상태의 묘사를 하니까 설교를 듣던 사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구명보트를 던져라. 야, 나는 진짜 얼마나 묘사를, 그게 평면적인 서술, 우리들이 흔히 하는 언어구사에 평면적인 서술을 가지고는 그렇게 못 나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주위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개에 의해서 이끌리고 지팡이를 집고 가던 소경이 지팡이도 놓치고 개도 도망가고 그래서 안 보여서 걸어가는데 벼랑 끝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벼랑 끝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앞에 있던 사람이 귀족이었습니다. 점잖은 사람이 거기 특별석에 앉아서 듣고 있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벌떡 일어나서 안 돼. 가지마. 그러니까 그것입니다. 나는 오늘날 설교자들이 그런 사실을 알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묘사적 서술, 그런 것들이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기독교의 교훈을 가르쳐줄 때 비유나 이런 것들을 써서 어떤 교훈을 주거나 할 때 팍 하고 사진이 찍히게 만듭니다. 기가 막힙니다.
여러분 제가 몇 주전에도 어떤 펭귄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무엇을 하다가 그 이야기를 했는지는 잊어버렸는데 ‘펭귄’ 그러면 생각이 날 것입니다. 이쪽은 기도하고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식의 어떤 묘사적 서술이 사람에게 이야기를 전달할 때는 아주 강력한 수단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기도할 때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물론 진심을 담아서 하나님께 기도하다가 어떤 좋은 표현이 내 안에 있는 진심을 표현하는데 적합하기 때문에 그럴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의 묘사를 매끄럽게 하고 그리고 그 묘사를 현란하게 하기 위해서 수식하는데 마음을 빼앗길 상황이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어떤 묘사에 있어서도 계속해서 반복되는 그런 것 있습니다. 별로 가슴에 와 닿지 않으면서도 그 어떤 묘사에 구사를 위해서 반복되는 그런 서술들은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내가 다시 한번 여러분들에게 말하는데 기도를 아름답게 하려고 하지 말고 진실하게 하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시선을 끄는 중요한 방법입니다. 누구의 시선을 끌고 싶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서 야! 어쩌면 저렇게 화려한가. 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까? 아니면 야, 정말 너의 기도 속에는 너의 탄식하는 마음이 묻어있구나. 이런 시선을 받고 싶습니까? 어떤 것을 끌고 싶습니까? 그러니까 기도하기도 힘든데 어쩌다 기도를 하면 이렇게 헛방을 치니까 그러니까 대부분 상당 부분이 손실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무사가 화살을 쏠 때, 장인이 만든 그 화살, 뾰족하게 갈아서 만든 그 화살을 휙! 하고 날리지 화살을 갖고 와서 그래도 적군에게 날아가는 화살인데 그래도 폼이 나야지 그리고 거기에다가 털도 달고 실도 달고 방울도 달고 기왕이면 핸드폰 줄도 달고 그렇게 해서 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면 이 화살이 제대로 안 나갑니다. 아주 슬림 하고 가느다래서 그래서 탁 잘라서 휙! 하면 날라서 퍽! 꽂히는 그게 무사가 가지고 다니는 화살이지,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중언부언하게 하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기도에 있어서 졸음은 우리로 하여금 중언부언하게 하는 아주 대표적인 요인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어떤 전도사님이 경상도에 교회를 개척하고 이제 서울에서 통학을 하는데 죽을 맛이었을 것입니다. 장난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밤에 집에 들어가면 새벽1시 이렇게 되는데 그리고 새벽에 일어나서 교회에 나오는데 그야말로 비몽사몽 하면서 나와서 교회를 위해 기도하다가 잠깐 잠이 오락가락합니다. 하나님, 자전거포 하나만 만들어주십시오. 도와주십시오. 그렇게 하다가 갑자기 아니 목회 하는 사람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다가 자전거포 하나만 내달라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애원을 하나. 이런 것이 다 중언부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졸리면 찬양이나 이런 것을 통해서 졸음을 쫓고 그리고 집중된 가운데 기도를 하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중언부언을 면하는 길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중언부언하지 않는 기도는 그럼 무엇인가? 그것은 마음이 묻어나는 진실한 기도입니다. 항상 그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묘사에 너무 많이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청산유수 같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누가 뭐라고 합니까? 기도하다가 좀 더듬으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것이 그 사람의 진심이 모자란다고 하는 것에 대한 것입니까? 나는 오히려 청산유수 같이 쏟아놓는 기도 속에서 아무 의미도 없이 왜 반복되는 표현들에 거의 마음이 안 담긴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 뭐 이런 이야기라든지, 그 다음에 존귀와 영광, 세세 무궁토록 있으시고. 자기 마음속에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계속 보고 그것이 귀에 익어서 그냥 자동적으로 흘러나오는 그런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다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마음속에서 신앙의 고백으로서 나오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기도 생활에 있어서 진실한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따릅니다. 그러니까 진실해져야 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보물 상자가 있는데 그 상자 앞에 열쇠가 3개가 있습니다. 금, 은, 쇠 세 개가 있습니다. 어느 것으로 열면 열리겠습니까? 1번 금, 2번 은, 3번 쇠, 번호대로 어느 것으로 열면 열리겠습니까? 왜 대답을 안 하십니까? 3번? 맞는 것이 열리지. 아니 3번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맞는 것이 열리는 것입니다. 금으로 만들었든지, 은으로 만들었든지, 쇠로 만들었든지, 플라스틱으로 만들었든지 맞는 열쇠가 열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기도는 현란하고 화려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딱 맞춘 그 기도,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입니다. 그런 진실한 기도 생활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어린애들이 드리는 기도를 보면 배울게 참 많습니다. 그 애들은 마음과 말을 따로 해야된다라는 그런 개념이 없습니다. 마음에 있으면 하고 없으면 안 하고 마음에 있는 대로합니다. 어떤 작은 여자아이가 기도하는데 기도를 들으니까 그렇게 기도를 하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오빠는 참 못되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정직한 표현입니까? 뭐 복잡하지 않고 우리 오빠는 참 못되었습니다. 오늘도 오빠 때문에 속이 너무 상합니다. 이렇게 진짜 기가 막히게 그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는 기도를 합니다. 어린아이들의 기도를 들어보면 진짜 그 마음이 묻어나는 그런 기도를 합니다. 있으면 하고 없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런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결국 기도 자체가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같이 꾸밈이 없는 순수한 그 마음이 순수한 기도를 가능하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일상적으로 계속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 있어서 진실의 가치는 능력보다도 훨씬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실한 신앙의 자세가 없으면 성화도 없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무슨 뉘우침이 있겠습니까? 그 기도에 있어서도 역시 그런 자세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깊은 기도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진실합니다. 그 속에서 부단한 자기 성찰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깨트려지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한마디의 기도를 해도 진심을 실으려고 하는 그런 태도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계속 노력을 해야지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몸에 배이게 되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면 진실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도 가만히 보십시오. 거짓말도 계속하면 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거짓말이 처음에는 아주 사악한 방식으로 유도된 것이기보다는 거짓말은 대게 편합니다. 해명하고 설명하지 않고 그냥 싹 비껴가니까 아이들이 그것을 편하게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진실로부터 멀어진 언어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실하게 마음이 담긴 기도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주님은 우리로부터 그런 기도를 받으실 자격이 있으시다 그렇게 하고 마음이 항상 담겨져 있는 기도를 하려고 애를 쓸 때 그때 우리의 기도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기도를 하다가, 하다가 너무나 안 되면 기도를 쓰십시오. 그런 가운데 자신의 마음이 묻어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가운데 오히려 기도의 문이 열리고 하나님 앞에 교제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대중기도를 하시는 분들이 써 가지고 와서 기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써 가지고 나오는 기도가 아니면 안 시켜준다고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겠는데, 써서 나와서 하는 기도를 저는 간절히 바랍니다. 써서 나와서 하는 기도도 이제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써서 나와서 읽을 때는 사람 앞에 낭독하는 것처럼 읽을 때는 그것도 하나의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써서 나와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쩌면 그렇게 진실하게 기도하는지 모릅니다.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뜻도 없이 기도하다가 다음구절이 생가 나지 않기 때문에 반복되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뭐 그런데 뭐 우리의 모든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가 끊어진 문장과 문장을 잇기 위해서 후렴 구처럼 계속 등장합니다. 마음에 없는 기도들입니다. 그런 것들보다는 오히려 써 가지고 나오는 것이 굉장히 좋습니다. 여러분들은 기도 시간에 눈감고 있으니까 모르시겠지만 전 가끔 눈을 뜹니다. 마이크 문제도 있고 해서 보는데 눈물로 기도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저 사람이 지금 즉흥적으로 기도를 하나보다 하는데 손에는 항상 원고가 들려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주일 남겨놓고 이번 주일날 내 기도지. 하나님 앞에 기도 자체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기 혼자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많은 사람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올라가서 막 예의 없이 5-10분씩 기도하면 내가 예외 없이 종을 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절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는 자기가 혼자 있을 때 많이 하고 여기 와서 예배 시간에 절제를 해서 기도를 해야지 하나님이 인도하셔도 어느 정도 절제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올라와서 기도할 때 자기 개인적인 관심사를 가지고 막 기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난센스입니다. 그것은 자기 개인적인 기도이고 여기는 지금 모든 사람들을 대표해서 이 사람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니까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며들어야 합니다.
또 어떤 때는 와서 기도는 못하고 계속 하나님 앞에 눈물만 흘립니다. 그런 것도 어떻게 보면 무책임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데 자기 혼자 감격하는데 우리는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대표 기도 자로서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이런 무절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쓰는 것은 굉장히 바람직합니다. 정해진 자기의 원고를 다 써서 나와서 그것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사람을 의식하지 아니하고 글 사이, 사이에 담긴 진심을 하나님 앞에 호소하며 그 아버지를 의식하면서 눈물로 기도하는 그것이 정말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기도하고 나가면 야! 정말 내 기도보다 훨씬 낫다. 어쩌면 그렇게 기도할까.
그래서 오히려 신앙이 좀 얕은 사람들이 깊은 기도를 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공 기도를 시켜보면, 왜냐하면 그렇게 준비해서 마음을 담아 기도하려고 하니까, 그리고 신앙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기도를 능수능란 하고 현란하게 해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야지 되겠다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이런 진실한 자세가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로 또 하나 여기서 기억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부복하는 자세를 드리지 않는 기도가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저는 제일 싫어하는 기도 중에 하나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닦아세우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닦아세우는 것, 하나님, 이렇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셔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계속 하나님을 코너로 몰아서 딱 하나님을 무릎을 꿇게 하려는 그런 어떤 논리적인 힘만 남아 있는 그런 기도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아니 아무렴 하나님이 자기만 못하겠습니까? 아무렴 하나님이 자기의 논리적인 사고만 못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논리적인 그 따지고 드는 그런 태도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야, 내가 참 네 기도를 듣고 보니까 내가 생각을 미처 못한 게 많구나. 참 회개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까? 언제든지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시는 처사가 옳지 않다고 생각될지라도 하나님을 깨우쳐야 된다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버려야 합니다. 오히려 겸비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자기의 비참한 형편을 주님께 생각나게 만들어드리는 그런 부복하는 자세가 시종일관 유지되어야 중언부언하는 것을 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항상 굉장히 기도해서 자기 잘난척하고 내가 충만하기 때문에 하나님 위에 있다라고 하든지, 내가 충만하기 때문에 내가 말만하면 하나님께서 모두 꿈적 못하고 움직여주실 것이라고 하든지, 내가 워낙 세게 기도하고 믿음이 있기 때문에 내가 말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수밖에 없다든지 이런 자세는 모두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겸비하게 엎드려서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셔도 이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일뿐입니다. 주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아니하셔도 나에게는 억울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가치 없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자기 비하의 정신이 시종일관 기도 속에서 가득 배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여러분들의 기도 생활에 윤기를 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듣고 보니까 여러분들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정말 많이 했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5. 있어야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이방인들의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본받지 말라는 그런 뜻입니다. 여기서 “본받지 말라”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첫째는 중언부언하는 그 태도 자체를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음과는 상관이 없는 기도, 마음이 전혀 담기지 않은 그런 기도, 그런 기도를 되풀이해서 많이 하는 것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진실성이 없는 그런 기도를 본받지 말라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터인데 사람들은 그런 생각들을 잘 하지 않습니다. 진실이 없는 열심에 하나님이 감동되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떤 열심보다도 진실에 감동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진실하기만 하면 어린아이도 어른을 능가하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예화:오래 전 성경공부를 가르쳐주신 목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어린 시절에 유치부에서 성경 을 열심히 배우면서 자라가고 있었는데 그 동리에 큰 나무가 있어 동리 사람들이 그 나무 에 제사를 지내는 모습을 보며 어린 마음에 아픔이 되어서 그 나무 아래 가서 하나님께 어른들의 행동을 보며 마음 아프다고 하면서 나무를 없애달라고 기도를 했는데 며칠 후 벼락이 떨어져 그 나무가 박살이 났는데, 작은 아이의 기도라 할지라도 그 기도가 진실한 기도이면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이야기)
기도에는 연조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청산유수처럼 기도하다가도 불순종하거나 범죄해서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트려지면 어제까지 기도 대장이었는데 오늘 한마디의 기도도 못하고 돌아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의 대가, 기도의 용사, 기도의 조예가 깊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이 날마다, 날마다 기도의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진실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끄는 것이,
제가 말씀드리는 게 열심히 기도하려고 애를 써야 되는데,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십시오. 쓸데없이 열정적으로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실해지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한마디의 기도를 해도 진심이 담긴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괜히 쓸데없이 뭔가 이렇게 육체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시선을 끄는 게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대적하던 바알 선지자들이 어떻게 기도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자기의 몸을 긋고 상처를 내고 피를 내고 그렇지만 그들의 신은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엘레야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어떤 소란도 거기에서 볼 수가 없었습니다. 막 북을 두드린다든지 어떤 소란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그냥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불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니까 진실한 기도가 불같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그런 기도에 있어서 진실성이 결핍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 그 기도가 바로 올려 들여야 할 기도라는 것, 그런 면에서 본받지 말라는 것이고, 본받지 말라는 것에 두 번째는 어떤 것을 본받지 말라는 것인가 하면 이방 사람들의 기도는 자신의 번영에 대한 기도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러니까 기도의 중심 그 자체가 철저하게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 뒤편에 보면 너희는 그렇게 기도하지 말아라. 그리고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해라. 그리고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유명한 주기도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라” 이렇게 계속되는 주기도문입니다. 관점을 놓고 보면 그 주기도문을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은 사실 예배 끝날 때 그것을 하라고 외우라고 가르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그대로 외우라고 가르쳐주신 것이 아니라 그런 패턴을 따라서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가 예수님의 평소에 기도의 제목들을 농축하는 것이고 그 기도의 제목들은 예수님이 평소 살아가는 삶의 우선 순위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삶의 요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보고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복음을 볼 때에 그때 우리들이 원만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엄청나게 다른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위한 기도, 이방인들의 그 기도는 철저하게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이기적인 욕망에서 비롯되는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어제도 어느 기독교 방송국에서 수능시험 기도회를 하는 것에 대해서 인터뷰를 하자고 그러면서 자기는 그런 기도회를 안 하는 교회를 찾았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서 열린 교회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해서 제가 시간이 없어서 정중하게 거절을 했는데 그런데 이해가 가는 측면은 있습니다. 사실 그 자녀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또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그런 기도회를 계기로 해서 기도의 응답에 대한 어떤 확신을 갖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그런 간증들이 많이 나올 수 있습니다. 충분히 인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하는 교회를 나는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 하나만 보지 말고 다른 것도 한번 생각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도 있는데 그런데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공부는 자기 자식들이 하는 것이지, 어느 사람은 사십 일씩 헌금봉투를 가지고 와서 수능을 위한 기도회를 한다고 하는데 그럴 시간이 있으면 가서 한자라도 더 가르치십시오. 그리고 야단을 쳐서 한자라도 더 배우게 만들고 그렇게 해서 어디로 가서 글공부 선생에게 집어넣어서라도 한자라도 더 배우게 만들어야지 와서 기도로 그 문제를 다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것들이 사실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타당할까? 또 하나님이 보실 때에 정말 중요하고 안타까운 일이 있을 때는 거의 기도하지 않던 사람들이 자기 자식들 대학에 들어갈 문제가 되니까 그때서야 봉투 들고 와서 하나님 앞에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그 모습이 사실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것과 그 심리가 무슨 차이가 있을까?
물론 우리들이 수능을 보러 가기 전에 마지막 주일날 제가 한번 기도해줍니다. 그 기도는 평소에 공부를 안 하던 애들이 그 기도를 힘입어서 가서 왕창 다 맞으라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이 공의를 베풀어주시도록 그래서 공부를 많이 했는데도 억울하게 몸에 컨디션이 안 좋다든지 도착하지 못해서 시험을 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그렇게 도와달라는 것이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해도 좋은데 그렇게 가슴에 시원하게 필요성들이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방인들의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하신 것은 기도의 동기입니다. 구심점이 철저하게 자기 번영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자기의 신들에게 간절히 기도하는데 그 간절하다고 하는 것도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인격적인 간절함이 아니라 말을 많이 해서 그래서 자기의 신들에게 뭔가 얻어내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본받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필요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가난하고 굶주릴 때 하나님 앞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이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부채에 시달리면서 빚쟁들에게 독촉을 받고 견디기 힘들 때 하나님께서 그 부채를 갚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지 않으면 누구에게 기도하겠습니까? 몸이 아파서 견디기 힘들어 고통을 받을 때 주님께 내 몸을 완쾌시켜달라고 기도하지 않으면 어디에 가서 그런 간구를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그런 모든 것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데 그것이 다라면 우리의 기도생활은 이방인들이 자기의 번영을 위해서 자기의 신들에게 기도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과정에서 많은 필요들이 생깁니다. 그런 것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잘못될 리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방인들의 기도는 철저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번영에 집착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런 태도들을 너희들은 버려라 그런 것입니다. 그 당시에 그런 태도들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에 열심히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자신이 깨트려지지 않은 모습,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기도’라고 하는 생수의 근원 되신 하나님께 접붙여 살 수 있게 하는 그런 은혜의 수단들을 단순히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고 이 세상에서 자기의 번영을 도모하기 위한 수단으로 삼고 그리고 그런 것들을 통해서 점점 더 자신의 욕망을 강화하는 그런 것들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크게 두 번째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는 이야기가 여기 나옵니다. 어떻게 나오는가 하면 이렇게 나옵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야고보서에 보면 뭐라고 하면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그래서 거기서는 우리들이 필요한 모든 것들을 광범위하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데 오늘 여기에서는 오히려 있어야 할 것,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먹고 입고 마시고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뒤편으로 넘어가면 그 문제가 염려와 근심의 문제와 맞물려 떨어지면서 이제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그리고 쭉 나옵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두 번째로 보여주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기도 속에서, 그런데 사실 우리의 기도를 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변화 받은 사람인가 하는 정도는 그 기도가 마치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의 지문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기도하면 그것을 보면 얼마나 그 사람이 깊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인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깊이 들어가서 그 사람을 변화시켰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숨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기도가 이 당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유대인들이 하던 기도가 대부분들이 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위한 기도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특별히 먹고, 입고, 마시고, 생활하는 그런 것들이 아주 중요한 기도의 제목들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사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가만히 보면 사실 우리의 육신적인 부분들, 그리고 우리의 육신의 필요, 이런 것들이 우리의 기도 생활에 있어서 얼마나 많이 중심자리에 와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주기도문의 패턴을 따라서 예수님이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지만 실제로 우리들이 기도생활 하는 것과, 주님의 기도생활에 기도하라고 하신 그 패턴을 비교해보면 웬만큼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 패턴이 거의 이상하게 맞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얼마나 우리들이 예수님의 삶의 관심과는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기도의 패턴과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패턴이 가깝게 다가가면 갈수록 사실은 우리들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사셨던 삶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삶 자체와 인생의 관심이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 가지셨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주기도문과 우리들의 기도의 패턴은 상당히 거리감을 두고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지금 먹고 마시고 입고 누리면서 살아가는 대부분의 것들은 우리들의 기도를 통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알아서 우리에게 공급해주신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도 여러분 날이 좀 추워지니까 반 팔 차림으로 나오신 분이 아무도 없습니다. 따뜻하게 자기의 몸을 보호하고 나옵니다. 그 옷을 누가 주셨습니까? 간절한 기도 끝에 여러분이 얻으셨습니까? 이것도 생활비 가져가서 사 입은 것인데 그냥 사 입었습니다. 옷 한 벌만 주세요. 네. 하나님. 그렇게 며칠을 간구해서 추운데 어떻게 해요. 나보고 이 추위를 다 감당하라는 말입니까? 하나님 어떡해요. 옷 한 벌주세요. 그래서 구걸해서 얻어 입은 옷이 아닙니다. 오늘 먹고 입고하는 모든 것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아서 공급해주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요즘 때면 엄마인 여러분들이 여름옷 다 집어넣고 그리고 가을 옷을 꺼냅니다. 빨 것은 빨고, 다릴 것은 대리고, 말릴 것은 말리고, 세탁소에 줄 것은 세탁소에 주고, 찾아올 것은 찾아오고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날이 추어지면 어련히 반 팔 차림으로 뛰어나가도 이리 와라. 안 된다. 외투입고 가라. 그리고 옷 입혀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고 가을이 깊어지면 이제 아이들 부츠라도 사주려고 구두 가게를 기웃거리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아무려면 하나님이 우리만 못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시시때때로 공급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주기도문에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시며” 라는 그 기도를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서 그것은 나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 그것도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타적인 기도가 상당히 많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먹는데 다른 사람들은 못 먹습니다. 식탁에서 그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잘먹어도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이 굶주리면 우리의 기도는 완전히 응답된 것이 아닙니다. 같이 잘먹고 살아야지 혼자 잘먹고 살면 그게 무슨 재미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 영역이 믿음이 깊어질수록 넓어지고 더 넓어져서 이제는 우리와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굶주림조차도 하나님 앞에 그 필요를 위해 기도할 정도까지 펼쳐 가는 것입니다. 물론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언약공동체 안에 있는 그 하나님의 백성들의 필요를 위한 기도지만, 그것이 우리라고 일차적으로 부르고 있지만 그렇게 확장되어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는 그것도 사실 이방인들의 자기의 신에게 자기의 번영을 위해서 기도하던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종류와 차원이 다릅니다. 하여튼 자세한 이야기는 주기도문 강해를 참고하십시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여기서 우리들이 아주 은혜를 많이 받은 대목입니다. 그런데 어째든 그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미리 아신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그런 인격적인 신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를 먹이고 입히실 것이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살기만 하면 주님이나를 굶기고 나를 헐벗게 하시고 그렇게 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또 그렇게 하신다고 할지라도 내가 살아가는 삶의 목표 자체를 내 번영으로 바꿀 수는 없다. 그리고 나의 삶의 목표는 바로 주님이나를 구원하셔서 이 세상에 두신 그 소명을 따라서 사는 것이다. 그런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기도를 다 비판하시면서 너희들이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 이렇게 가르쳐주시면서 마지막으로 제시하신 그 가르침이 무엇인가 하면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라” 그러면서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그 주기도문은 처음부터 시작해서 마지막까지 한번 천천히 살펴보십시오. 거기서는 이방인들이 기도하던 관점과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관점은 완전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드리던 그 기도에 관점은 자기입니다. 그리고 목표는 자기의 번영입니다. 그런데 이 주기도문을 통해서 보십시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루어지리라. 우리에게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해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이 들게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이 전체를 보면 철저하게 거기의 관점은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목표 그 자체가 무엇인가 하면 왕국의 소명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도록 부름 받은 소명이 있습니다. 그 소명을 성취하는 내용의 핵심이 예수님의 주기도문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이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기도할 때에 아! 나에게 더 많은 먹을 것을 주십시오. 저 사람보다 나를 더 부요 하게 해주십시오.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좋은 옷 입게 해주십시오. 이런 것들을 위해서 기도하지만 너희들이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다. 너희들의 관심을 갖고 기도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하면, 죄 많은 세상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왜 이 땅에서 이렇게 멸시를 받는 것일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왔는데 많은 사람들이 불순종으로 대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정말 인간의 모든 불순종과 죄악을 딛고 임하기를 정말로 원합니다. 그런 간절한 고백, 그리고 천국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는데 천사와 모든 성도들이 거기에 순종하는데 이 땅에 있는 우리들은 왜 하나님을 거슬리면서 사는 것일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주십시오.
주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굶주림을 받는 우리들의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들도 먹여주시옵소서. 우리만 먹고사는 것으로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많은 사람들, 우리들이 용서한 것처럼 또한 우리의 죄도 용서해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쫓아 살지만 우리는 죄인일 뿐입니다. 그렇게 기도합니다. 우리가 시험에 들 위험이 있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시험에 들면 우리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을 따라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 우리가 시험에 들지 말게 해주시고 그리고 우리를 악에 빠지지 않도록 그래서 우리가 한 입으로는 주님을 사랑하면서 우리가 삶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그런 어리석은 존재가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나라와 권세와 그 영광은 오직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원합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그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보탬이 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까? 이런 관점을 유지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진짜 쉬운가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가 영혼의 변화를 받지 않으면 그런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 하나님을 만나고 그 처음 헷세드와 아하바의 사랑으로 돌아가고 그리고 생수의 근원이 되신 주님께 접붙임을 받고 그리고 정말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그 정신을 가슴에 가득히 담고 살아가면 그는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의 모든 관심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유익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이 도처에서 멸시를 받는 것을 인해서 견디기 힘든 고통을 당하면서 그 어두운 시대를 흐느끼면서 정말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히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그렇게 아버지 앞에서 기도하면서 사는 그런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적인 변화가 우리에게 정말 필수적입니다. 새 사람이 새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지 헌 사람이 새 기도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입에서는 육적인 기도가 나오지 신령한 기도가 나올 수 없습니다. 신령한 기도는 신령한 사람에게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기도를 드릴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보다 육신에 집착하는 기도를 드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간절한 소원이 생겨나서 급기야는 하나님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고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도 좋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서 우리의 소명이 완수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이 된다면 우리의 기도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사람으로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그런 사람으로 변화되라고 하는 하나의 암시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서 살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면 이방인들의 기도하던 자신의 육신을 위한 모든 필요들은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같은 장에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은 정금 같게 하시네
이 찬송을 부를 적마다 은혜가 됩니다. 시편 2편, 마태복음 6장 19절 이하 하반 절 설교하면서 우리 참 많이 울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그런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인격적인 신뢰,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야지 만 우리들이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의 그의 의를 구하라” 그것을 추구하면서 살아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 그게 무엇입니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관점 자체가 자기의 번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변해야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여기에 보면 두 줄 사이에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네 아버지”라는 단어입니다. 여기도 예외 없이 또 나옵니다. 뭐라고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시면서 아버지는 똑같이 나오는데 여기에 보면 아버지 앞에 무엇을 하나 더 붙였습니까? “하나님 곧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럼 뭔가 예수님께서 그 앞에 아버지께, 아버지께 하시다가 여기서는 그 아버지가 사실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힘주어서 강조하시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런 것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하면 이제 이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아버지께” 나오는데 하나님과의 친교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가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육신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하지 아니하면 해결할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의 육신의 필요는 오직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기만 하면 내 삶은 어떻든지 간에 나의 육신의 필요, 육신의 번영을 하나님께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 안 합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친교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저는 인생을 살면서 참 그런 기도에 관한 교훈들을 많이 받는데 그렇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해도 누가 기도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은 분노하기도 하고 그냥 너무 감사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이렇게 구하는데 그 사람이 나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그것에 따라서 똑같은 것을 나에게 구해도 그 사람이 나와 특별한 관계에 있을 때는 그것이 오히려 기쁨이 되고 그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나에게 구할 때는 불쾌한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생각이 났습니다. 예를 들자면 교회와 관계된 일입니다. 평소에 그냥 말씀을 잘 듣고 교회를 뜨겁게 사랑하면서 눈물로 섬기는 사람이 목사님, 우리 교회는 왜 이런 것도 없습니까? 그리고 물어보면 그리고 그런 것 좀 해주세요. 그러면 즉시 무슨 생각이 드는가 하면 ‘아 이 사람이 교회를 그렇게 뜨겁게 사랑하고 영혼들을 섬기다가 보니까 그것이 있어야지 만 영혼들을 더 잘 섬기고 싶어해서 그것을 달라고 그렇게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기도도 안 하고 교회도 잘 안 오고 그래서 말썽만 부리는 사람이 목사님, 왜 우리 교회는 이것도 없습니까? 그러면 탁! 생각에 ‘저 인간 또 불평하는구나.’ 그렇게 생각이 들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엇을 구하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누가 구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엎드린 것이 문제가 아니라 누가 엎드렸는가 그것이 문제입니다.
여러분, 아합의 시대에 삼 년 육 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을 때 기도를 안 했다고 볼 수 있습니까? 삼 년 육 개월이면 그것은 이미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를 안한 사람이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많은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해도 하나님이 그 사람들의 기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한 사람이 기도하기를 기다리시는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왜 엘리야가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탁월한 친교 속에서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꼭 필요할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려면 평소에 잘 살아야 합니다. 평소에 하나님과의 친교를 유지하고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때 친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기도가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친구처럼 생각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그렇게 생각하셨고, 그리고 모세를 하나님께서 친구처럼 대면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아모스 선지자에게 자기가 비밀스러운 일을 하나님이 행하실 때에 자기의 종들에게 그것을 숨길 리가 있는가 하고 반문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탁월한 친교 속에서 산 사람들이 하나님을 움직이는 강력한 기도의 사람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 자체가 무슨 신비한 은사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기도 그 자체는 인격을 통해 흘러 들어가는 호소이기 때문에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진실한 신자가 될 때 그때 진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그런 기도의 능력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에 덧붙여서 하나 더 여기에 보면 “아버지께서” 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 그리고 우리와 친교를 나누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그의 능력, 우리의 기도를 성취하실 수 있는 권능에 있어서는 우리와 비교되지 않는 천지를 창조하신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친교를 나누시면서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와는 다릅니다. 우리 육신의 아버지는 우리를 너무 사랑하는데 사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안 될 적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안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시일 뿐만 아니라 능력이 모자라서 우리를 돕지 못하시는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께 전심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지금 이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6.이렇게 기도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上)
이번 사경회에 정말 신나고 감사했던 것은 여러 가지가 많이 있었지만 새벽기도에 여러분들이 참 많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평소에 다른 교회에 집회를 가도 새벽기도는 딱 15분 설교합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설교를 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기도하고 가라고 그렇게 설교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랬는데 사경회 하기 전에 누가 그랬습니다. 새벽이라도 나오라고 그래서 멀리서 차를 타고 나왔는데 오니까 15분 설교로 끝나는데 허무감이 밀려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밀려와야지 허무감이 밀려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설교를 길게 해달라고 그래서, 그거야 나야 좋습니다. 나야 좋은데 오는 사람들이 기도도 못하고 허둥지둥 갈텐데, 그래도 하여튼 그것이 좋다고 하니까 1시간 가까이 설교하겠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월요일 날 평상시 사경회를 해도 오는 숫자는 뻔해서 제가 와이셔츠를 입고 오면 기도하기가 너무 불편하니까 티셔츠에 단정하게 차리고 나오니까 수요일처럼 사람이 가득 모였습니다. ‘내가 교회를 잘못 찾았는가’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매일 이렇게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진짜 주일날 예배 많이 나오는 것보다 새벽기도 때 그렇게 많이 나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왜냐하면 주일날 여기가 터질 듯 모여도 기도하는 사람이 없으면 여기가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고, 주일날 여기 사람이 얼마 안 모여도 새벽에 많이 나와서 기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어째든 새벽설교에 하루나 나오고 말려나 그랬더니 이틀, 삼일, 사일 계속 나왔습니다. 대단하다고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내일도 잘 나오시리라고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 바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무엇인가 하면 진짜 여러분들이 할 수 있으면 평생 소원을 하십시오. 내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 새벽기도회를 하겠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내가 아는 목사님 한 분은 외국으로 유학을 가서 아무도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사람이 없으니까 둘, 셋이 매일 새벽기도회를 했다고 합니다. 삼 년인가 몇 년을, 그런 각오를 해야 되고 내가 심지어 새벽기도회를 안 하는 외국에 이사를 가도 내가 새벽기도회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그게 내가 남은 인생의 마지막 십자가입니다. 그렇게 탁! 정해놓고 하면 하지 왜 못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살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정말 그 분투하는 기도생활을 잘 이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어째든 여러분 기도생활을 해야지 됩니다.
그래서 이제 8절로 마치고 나니까 사실 아쉬웠습니다. 18절까지 해야지 만 사실 맞습니다. 그런데 이미 주기도문은 했으니까 또 시작하면 6개월을 해야하니까 그러니까 9절 상반 절까지 딱 하면 맞아떨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1시간만 9절 상반 절을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생각해볼 본문은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성경에서 “그러므로, 그러나” 이런 것들이 나오면 일단 동그라미를 치고 도대체 이 글이 어디에 연결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가 두 번이 연결이 되는데 앞에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부터 시작을 하고 그 다음에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으로 그렇게 계속 이어지는데 잘 들어보십시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그 가르침, 그러니까 6절부터 시작되는 이 가르침은 이렇게 됩니다. “너는 기도할 때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한 토막이고, 또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는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을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게 한 토막입니다. 그러니까 6절에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바리새인을 비롯한 유대인 안에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기도에 습관을 염두에 두면서 바로잡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고, 그 다음에 7, 8절에는 이방인들이 소위 기도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방식의 그 기도를 빌어서 그와 똑같은 이교도적인 그런 기도의 자세를 여호와를 믿는 이 신앙에 적용시키지 말라. 그러니까 하나는 잘못된 유대주의에 기도 방식, 또 하나는 잘못된 이교도들의 기도의 방식, 이 두 가지를 다 비판하시면서 대응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못된 유대주의에 외식하는 기도 방식에 대한 대응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실한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식하며 진실하게 기도하라. 이것이 외식을 척결하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실한 사람들에게는 외식이 가장 구역질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식은 진실하지 못하면 아주 외식을 담기 쉽습니다. 그것을 퇴치하기 위한 방법은 진실입니다. 그 다음에 이제 이교도들의 말을 많이 하는 육적인 열심히 자기의 기도를 효능 있게 하는 그런 것들은 해결책이 무엇인가 하면 중언부언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대응책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생각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는 분이시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교도들의 기도의 관습을 배척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오늘 나오는 이 구절에 “그러므로”는 이것 전체를 말씀하시면서 “그러므로” 에 이어지는 결론은 앞에 말씀드린 잘못된 유교주의와 그 다음에 그릇된 이교도들의 기도의 습관, 총체적으로 다 비판하면서 마지막 내리는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그러니까 이런 기도의 잘못이 있으니까 너희들이 기도할 때는 이렇게 기도하라. 그러면서 그 유명한 주기도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들이 몇 가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우선 첫째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그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면서 나오는 것이 주기도문이기 때문에 첫째 이것을 통해 우리가 받는 교훈은 무엇인가 하면 기도의 패턴에 대한 강조입니다. 기도의 양식, 내지는 기도의 골격에 대한 강조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것은 예배 끝날 때 그것을 외우라고 가르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주기도문 그 자체는 짧게 기도하든, 길게 기도하든지 간에 그 자체가 기도의 한 패턴이 되어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들이 예수님께서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실 때에 이것을 듣던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맨 처음 우리들이 주님을 믿을 때에는 소위 기도라는 것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맨 처음에 우리들이 주님을 믿으면서 기도를 배울 때에는 사실은 신앙을 시작하자마자 처음부터 이런 기도의 골격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정말 어떤 놀라운 변화를 받기 전에는 쉽지 않습니다. 대게 여러분들이 신앙의 길에 발을 들여놓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는 사실, 그리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가장 뼈저리게 경험했던 것은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라든지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기도라든지 이런 엄청난 기도를 하면서 사실은 하나님의 응답을 구했던 것이 아니라 아주 지극히 작은 것, 뭐 어린아이가 아파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더니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그런 간증 같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오히려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 라는 확신 같은 것,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고 나의 기도에도 하나님이 귀를 기울여주신다는 이런 기도 응답에 간증 같은 것들은 대게 보면 우리의 아주 일상적인 필요와 관계된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그런 기도 응답에 확신을 하나님께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들의 기도의 출발은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다양한 것들을 통해서 우리로 기도하게 하시고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응답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기도에 응답해주셔도 기도하면서 그 기도가 이루어져야 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셔도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자, 기도는 합니다. 기도는 하는데 그냥 건성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 나라와 민족을 보호해주시고...’ 응답이 되었습니까, 안 되었습니까? 한번도 확인한 적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냥 마음에 없이 되풀이되는 그런 기도들은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셔도 그것이 응답이라고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 없이 되풀이되는 기도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기도에 응답에 대한 필요성을 자신의 마음이 절실하게 의식하지 못할 때 그런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가 응답되었는지, 안 응답되었는지를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자기가 그 응답 여부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그런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일은 아닙니다.
(예화: 어느 개척교회에서 성도 한사람이 병이 들어 목사님이 지극한 중보 기도로 섬기 기를 위해 모든 성도들이 늘 기도를 하는데 어느 성도가 알지 못하는 그 성도를 위해 늘 기도를 하는데 알고 보니까 그 성도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는 이야기)
그런 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마음이 담기지 않은 그런 기도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담기지 않아도 그렇게 오랜 동안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응답이 되어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분명한 느낌이 없습니다. 대부분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의 응답 여부에 대해서 예민해지는 것은 자기 자신이 예민한 필요를 느끼는 기도의 부분들, 그것들이 응답되지 않으면 자기가 불편하거나 어렵게 되는 그런 부분들, 그런 것들을 통해서 주님의 응답이 확실히 느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들이 어디가 너무 아픕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자기의 고통스러운 부분을 좀 치료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데 그런데 아직 응답이 왔는지 안 왔는지 글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아픈 것은 아직 응답이 안 온 것이고, 나았으면 하나님이 고쳐주셨구나 하고 응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처럼 자기가 가장 강력하게 필요를 느끼는 그 부분에 대해서 응답 여부를 가장 확실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민하게 필요를 느끼는 부분이 믿음을 처음 시작할 때는 자기의 개인적인 유익과 관련된 것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거기서 응답의 간증을 갖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비난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이제 제대로 자라면서, 성장하면서 그 어린아이의 그 기도가 같이 성장해야 합니다. 그때 주님이 보실 때에 가장 모델이 될 수 있는 기도의 패턴이 무엇인가 하면 주기도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제일먼저 우리들이 한번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우리의 기도의 패턴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의 성숙의 문제를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패턴은 어떠한가. 여기서도 두 가지 문제가 함께 생각되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하나는 우리의 신앙의 성숙여부가 주기도문과 우리의 기도를 흡사하게 만들 수 있고, 또 하나는 이것은 또한 우리들이 신앙이 성숙한다고 하더라도 이 틀대로 기도하려고 하는 의지를 아울러 가져야지 만 우리들이 이런 기도에 틀을 우리 속에서 견고하게 세울 수가 있습니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 원인이 영적 미숙의 문제이든지, 혹은 영적으로는 그렇게 미숙하지 않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누가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수준 높은 영성을 소유하고 하나님에 대한 풍부한 경험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기도의 패턴이 저급하든지 간에 어떻든지 간에 원인이 무엇이든지 간에 지금 여러분들이 하고 있는 그 기도의 패턴과 주기도문의 그 기도의 패턴이 어느 정도나 일치하고 어느 정도나 불일치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완전히 그대로 모방해야 할 틀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우리들의 이 기도의 틀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틀로 가깝게 다가가야 할 필요가 있다라고 하는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외식하면서 기도하는 잘못된 유대주의자들도 타파하라고 명령하시고 또 어떤 인간적인 열심히 말하자면 중언부언하고 말을 많이 하고 그 이방인들 더욱이 그 이방인들은 기도 자체가 어디에 집중되어 있는가 하면 이방 신들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육적인 필요를 채우는 이기적인 기도의 동기와 결별하지 못하고 있는 그런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잘은 모릅니다. 남의 종교를 비방할 생각은 없지만 제가 학교에 다닐 때 중동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 옆에 엄청나게 큰절이 있습니다. 거기에 초파일이 되면 사람들이 새카맣게 모이고 수레를 들고 다니면서 돈도 거두고 등도 달아놓고 합니다. 그때가 되면 항상 우리는 놀러갑니다. 놀러 가면, 사람들이 그때만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떡도 주고 밥도 주고 고깃국은 없지만 하여튼 다 줍니다. 애들이 떼거지로 가서 이 애가 절에 열심히 다니는 애라고 하면서 앉아 시루떡이니 뭐 하여튼 과일이니 뭐니 하여튼 실컷 퍼지게 먹습니다. 잘 보이면 돈도 줍니다. 그렇게 하고 오면 길하나 건너 우리 학교였습니다. 와서 공부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가끔 이렇게 가만히 보면 이 구절이 생각이 납니다. 이방인들의 기도입니다. 그것을 보면 그냥 뭐든지,
(예화: 남쪽 지방에 집회를 가셨는데 그곳에 유명한 절이 있어 구경을 할 기회가 있어 절에 가셨는데, 스님이 질문하는 사람에게 대답을 하시면서 기도의 여러 종류에 따라 달라지는 금액을 설명하시는데 우리의 신앙의 방식은 그 사람의 영혼과 종 교의 상태를 헤아려서 가르쳐주는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절에서는 모든 소원성취 를 위해서 빌어준다고 하는 이야기)
사람을 고치는 것이 만약에 종교의 도리라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사실 망가진 그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소원하면서 살아야될지를 제대로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을 오히려 가르쳐주어서 그 사람이 무엇을 빌어달라고 그러면 인생이 무상한데 그까짓 것 위해서 기도하면 뭐 하는가 하고 다른 것을 기도하라고 이렇게 가르쳐주어야만 그것이 종교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내가 그것을 비방하는 것은 아닌데 내 입장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에서는 사실 제대로 된 기도가 되려면 자기가 다 무너져야지 만 제대로 된 기도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이방종교에 가서 열심히 심취했던 사람들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타락한 이래 인간은 모두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에 대해서 가장 예민한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죽을병에 걸려도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내가 지금 감기에 걸린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예민하게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다들 종교, 혹은 기도라고 하는 이 수단을 빌어서 자기의 이기적인 어떤 욕망이나 개인적인 야심들을 채우고자 하는 동물적인 욕구가 인간 모든 사람 안에 비뚤어진 종교심과 함께 야합이 된 이런 심리가 다 존재합니다. 그것을 기독교에 와서도 적당히 환경을 조성해주면 그게 다 옛날에 친하게 지내던 것이니까 그게 살아나서 막 이렇게 일어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무슨 일 천 번씩 기도를 하는데 기도하면 하지 뭐 할 때마다 헌금을 한다고 하는데 그것을 비난할 것은 없습니다. 헌금 많이 하는 것을 목사가 뭐 화를 내겠습니까. 여러분도 하려면 하십시오. 말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간절하게 일 천 번씩 그렇게, 일 천 번이면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루에 한번씩 기도를 해도 삼 년을 해야지 되고, 일주일에 한번씩 와서 기도하면 21년을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삼천 번을 그렇게 기도를 하는데 자꾸 그렇게 불교에서 삼 천 배, 천 배 그렇게 드리는데 대부분 그것을 까뒤집고 들어가 보면 전부다 개인적인 문제들입니다.
이 교회 성도들이 진실한 성도들로 변화되기 전까지는 제가 식음을 전폐하겠나이다 그런 사람 없습니다. 정말 교회가 교회다워지기 전에는 제가 일 천 번의 기도가 아니라 일만 번의 기도라도 내가 쉴 수 없습니다 라고 매일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이 나라에 정직과 공의가 가득 차게 해달라고 일 천 번의 번제를 드리면서 한번 기도할 때마다 만원씩 갖다내는 사람들, 있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문제는 모두 자기 자녀들의 대학 진로의 문제, 자기 가족들의 질병이 낫는 것, 과년한 딸들을 시집보내는 것, 또 가정생활의 위기에 있는 자기 자녀들, 집을 사기 위한 일이라든지 하여튼 다양한 기도의 제목입니다. 그런 기도가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해야 할 기도의 제목들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을 가르쳐주시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는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모두 아시느니라” 우리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기도의 패턴을 따라가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부족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우리에게 제시해주시는 기도의 패턴대로 기도하고 그것을 우리의 인생에 중요한 관심사로 삼으면서 살아가면 비록 우리가 먹고 입고 마시고 우리 자녀들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열렬하게 기도하고 그것으로 거의 우리의 기도시간으로 가득 채우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채어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 믿음과 확신의 부족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패턴들이 유지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생활의 패턴을 한번 비교해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이 기도에 열렬한 은혜 속에서 살면 단지 기도가 된다는 것 때문에 만족하지 말고 여러분 자신의 기도에 패턴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던 그 기도의 패턴을 따라가려고 노력하고 고칠 것을 고치고 보탤 것을 보태면서 주님의 기도의 패턴을 따라 살아갈 때 그 기도가 여러분들의 삶의 방향이 되고 또 그렇게 산 여러분들의 삶이 그 기도의 패턴에 새 힘을 불어넣어서 그래서 입혀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골격이 있어도, 사람들의 골격은 다 비슷합니다. 머리통이 있고 그 다음에 팔다리가 있고 등뼈가 있고 다 비슷한데 그런데 거기 붙은 살의 정도에 따라서 다양합니다. 배 쪽에 특별히 근육이 많이 붙은 사람들, 그래서 윗몸 일으키기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알통이 나와서 배가 튀어나온 사람이 있고, 그리고 어째든 다양한 형태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오늘도 여러분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도 그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헷갈리지 않고 이 사람이 누군지 알아볼 수가 있습니다. 붙은 바 살에 따라서, 마찬가지로 기도의 골격은 주님의 기도의 골격을 본받아도 그 기도의 모습은 각각 다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이 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여러분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나타나는 그 기도의 표현은 다양하고 그 기도의 모습은 여러 가지지만, 골격은 하나이지만 그렇게 다양한 모습의 기도가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다 자기 지문처럼 다양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든지 간에 이 기도에는 패턴이 필요하고 그 패턴의 기본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그 기도를 따라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패턴을 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이 여김을 받으시오며”, 두 번째는 “나라에 임하옵시며”, 세 번째는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라” 모든 것이 이 세 가지 다 하나님의 명예,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에 성취와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벌써 관심사가 무엇이어야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주기도문은 예수님이 일생동안 하신 기도의 요약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예수님의 삶의 요약이고 그 삶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기도가 패턴, 그의 존재, 그의 삶 이모든 것이 함께 연결이 되어서 하나로 파악되어져야지 만 이 주기도문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 개를 가르쳐주셨는데 그 다음에 가르쳐주신 것이 무엇인가 하면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래서 양식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내 양식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일차적으로는 신앙공동체 안에 모든 가족들이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는 것이고, 더 확대해서 이야기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으면서 사는 그것이 기도제목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단순한 기도가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이 전 인류에게 모두 내려주셔도 우리 개인적인 이기심들이 타파되지 않으면 그러면 일용할 양식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전문적인 통계숫자는 제가 안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지금 전 세계 곡창지대에서 농산물가격과 상관없이 농사를 지으면 아직도 전 인류가 실컷 먹고삽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전 세계의 80%의 부를 전 세계 인구 10%가 흥청망청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하게 누리고 살아갑니다. 고품질에 부를 누리면서 살아가고 나머지 90%가 20%의 부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결국 먹을 것이 없어서 흙을 파서 벌레를 잡아먹고 나무뿌리를 캐다가 그것을 뜯어먹으면서 진짜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무리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쌀이 남아 돌아가도 균등하게 배분이 안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용할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이것이 우리에게 공급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시면 내 양식이 아니라 우리의 양식입니다. 같이 나누어먹어야지 그게 공동체지, 혼자 잘먹고 살면 그것이 무슨 재미가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주기도문 그 자체는 말하자면 네 번째 기도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그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달라는 그런 기도가 공동체적인 기도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저 형제가 굶고 있는데 내가 두 배 번 것이 저 형제의 기도의 응답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 다음에 그것들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나누어 가지면서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네 번째 기도 자체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개인적인 필요를 위해서 기도해서 그것을 이렇게 받아서 누릴 수 있는 그런 이기적인 기도를 허락하셨다고 해석을 하면 안 됩니다. 전혀 문맥이 다릅니다. 저 형제가 하나님 앞에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 양식을 저 형제가 아니라 나에게 주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주면 저 사람에게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주위에 있는 일용할 양식, 이것은 단지 정부미로 밥해먹고 사는 생존을 위한 양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을 유지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모든 문화적인 혜택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 있어서 아주 결핍 속에 살아가면서 고통을 받는 지체들이 있는가 하는 것을 돌아보는 것은 그것은 성도들의 아주 기본적인 의무이고 주기도문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아주 기본 화되는 의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그 물질이 형제에게 주신 일용할 양식에 대한 응답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시고” 그 다음에 무엇입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기도를 다 보면 뒷부분에 나오는 기도는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나라의 파괴를 막는 기도입니다. 즉 무엇인가 하면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끼리 원수를 맺으면서 살아가면 그 자체가 굉장히 무섭습니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싸움보다 더 무서운 것은 교회 안에서 기독교인과 기독교인이 싸우는 것입니다. 정말, 이슬람과 기독교는 그래도 화해의 가능성이 있어도 기독교인과 기독교인의 싸움에는 대를 물려가면서 계속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공동체를 파괴시키는 아주 강력한 힘입니다. 그것을 청산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주신 것처럼 저희들도 용서해주시고” 희랍어 성경에 보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이렇게 나옵니다. 거꾸로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이야기하면 그렇게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께 용서를 빌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렇게 하면서 용서를 배우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시험에 들면 은혜 안에서 멀어지면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악에 빠집니다. “다만 악에서 건져주시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이게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이방인의 기도와는 비슷하지도 않고 잘못된 유대주의 종교지도자들이 가르쳐주는 기도하고 흡사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전혀 질적으로 다른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 패턴을 통해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 패턴 그 자체가 그 패턴을 가지고 유대주의 지도자들을 들여다보면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한번 우리 자신이 생각해보십시오. 유대주의자들이 경건한 것처럼 행세했지만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잘못된 기도 속에서 일평생 살면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도에 반복은 결국 그들을 그런 사람으로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참된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 사람들이 오히려 그 기도에 대해서 수긍하지 못하고 반발하는 그런 상황까지도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자신이 제일먼저 기도의 패턴을 점검하고 어떡하든지 간에 주기도문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여러분들의 관심사가 되어서 그 관심사를 따라서 기도의 패턴들이 재편되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기도의 패턴을 우리 인위적인 힘으로 바꾸어놓으려고 애를 쓰는 것만으로는 좀처럼 이 기도의 패턴을 따라서 바뀌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알 수가 있습니다. 물이 흘러갈 때물이 아무 곳이나 막 쏟아 부었고, 혹은 이제 온 땅에 비가 가득히 내려도 물이 아무 곳이나 가는 것이 아니라 낮은 곳으로 흘러서 자꾸 골을 만들고 개울을 만들면서 흘러갑니다. 그것이 개울이 되고 그것이 강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태초에 누가 강을 봤겠습니까? 그렇게 하면서 물이 흘러가면서 땅이 파이고 그러면서 강에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습니다. 기도가 한 패턴으로 굳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담긴 기도를 동반하여 우리 속에서 한 패턴으로 고정되기 위해서는 마음이 함께 흘러가야지 만 그 기도의 패턴이 고정이 되어서 여전히 우리의 마음이 담긴 기도가 되지, 마음이 흘러가지 않는 기도는 잠깐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정말로 그 기도가 우리의 마음속에 한 패턴으로서 고정되기는 힘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마음속에 흘러가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려고 했던 기도의 패턴을 따라 우리의 마음이 흘러갑니다. 관심사는 모든 생각이 다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들이 이 두 번째 그럼 왜 그런 기도의 패턴이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는가. 첫 번째 답이 무엇인가 하면 영적인 변화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관심사는 결국 무엇과 직결되는가 하면 그 사람의 마음의 변화와 직결됩니다. 그 마음의 변화는 영혼의 변화와 직접적으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찬송 가운데 그런 노래가 있습니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분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
그러니까 여러분도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나서 놀라운 신앙의 영혼의 변화를 받으면 관심사가 다 바뀝니다. 예전에는 그저 무슨 취미생활, 그 다음에 시간만 나면 친구들과 밥이나 먹고 술이나 먹으러 다니는 것, 직장에 다닐 때는 사람들이 누가 죽었다고 그러면 그렇게들 좋아했습니다. 그 집은 슬픈데 그렇게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그 집을 애도하고 위로하고 그런 것은 없습니다. 전부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꺼내서 오늘 가서 한판하자. 그리고 우르르 몰려갑니다. 그러면 또 그 집사람들은 자기네 위로를 해주러 온 줄 알고 좋아합니다. 사실 돈을 따러 온 것인데, 그리고 막 칩니다. 누가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누구래? 자기네 아버지야, 장인이야. 누구라고 하면 지난번에 돌아 가셨잖아. 그렇게 막 화투치고 합니다. 그렇게 살다가 예수를 믿고 주님이 마음을 만져주셔서 놀랍게 변화되면 그렇게 싫어집니다. 모임도 싫고, 그런 분위기도 싫고 정말 싫습니다.
제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가니까 그런 것을 싫어하는 것이 당연하겠다고 하는데 제가 예수 믿고 나서 아주 확연하게 싫어지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예수 믿고 변화되기 전까지는 제가 20대였으니까 생기발랄하던 때였습니다. 신앙도 없으니까 관심사가 어떤 것이겠습니까 뻔합니다. 어떻게 하든지 공부라도 열심히 해서 출세하는 것이 꿈이었고, 또 뭐 얼굴도 잘 생기고 예쁜 자매를 만나서 그저 알콩 달콩 사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때는 사실 소득수준이 높지 않으니까 양식집이 별로 없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곳은 레스토랑 그 중에서도 불빛이 은은한 곳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참 놀랍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놀랍게 변화를 받으니까 그런 곳을 별로 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한 3-4년 흐르고 나니까 그런 곳이 정말 싫었습니다. 몇 가지 싫은 것이 있는데 우선 컴컴한 것이 싫고, 그 다음에 그곳에 가득한 담배 연기가 싫습니다. 전에는 그것이 향긋하고 좋았습니다. 내가 피었으니까. 좋고 그리고 뭔가 이렇게 공간에 들어갔을 때 좀 담배냄새가 안 나면 뭔가 향수를 안 뿌린 화장실같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그렇게 싫어졌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싫은 것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도 싫었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낭만적으로 보이고 그랬습니다. 그 다음부터 좋아지는 것은 환한 집, 오죽했으면 내가 교회당을 할 때 그렇게 환한 곳을 한다고 했습니다. 난 교회당마다 갈 때 컴컴한 곳은 질색입니다. 장로님이 많은 교회는 여기에 형광등을 켜놓고 다른 곳에는 다 안 들어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절전’이라고 했는데 절전이 아니고 다 끊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예배를 드립니다. 다른 곳에 좀 아껴 쓰지.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내가 이 다음에 목회 하면 우리 교회는 24시 편의점처럼 만들어서 얼굴에 주근깨까지 다 보이게 만들어야지’ 왜 환한 게 제일 좋습니다. 음식점도 그저 비싼 음식점이건 싼 음식점이건 그게 문제가 아니라 햇빛만 많이 들어오고 깨끗하기만 하면 그저 감사합니다. 우선 감사의 조건을 채웁니다. 그렇게 환한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교회당을 짓는데 사람들이 ‘지하’ 그래서 말도 꺼내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지하에 예배드려서 진짜 좀 돈이 절약되고 그 속에서 진짜 금이 쏟아져 나온다고 그래도 난 싫다. 거기는 차나 집어넣고 그리고 창문으로 햇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나는 가능하면 전체 유리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햇빛이 환하게 내리쬐는 곳에서 그렇게 예배드리고 싶습니다. 왜 나는 빛 가운데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바뀝니다. 정말 주님을 만나고 영혼의 변화를 받으니까 싫어집니다. 옛날에 그런 가락들, 뭐 약간 컬틱하고(?) 그래서 막 그때는 마리화나가 유행이었습니다. 마리화나들 피고 막 전축에 귀를 대고 듣는 그런 음악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 게 다 싫어집니다. 지금도 저는 음악도 언 클러드 뮤직을(?)을 좋아합니다. 전기 음 같은 것, 이것은 괜찮습니다. 교회 안에 있으니까. 전기를 꽂지 않은 자연 음 같은 것, 그게 얼마나 좋습니까? 하여튼 뿐만 아니라 굉장히 많이 바뀌어집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시야나 모든 것들이 다 바뀝니다.
그럼 보십시오. 사람의 마음의 경향성들이 바뀌게 되면 소원도 바뀔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사람의 마음의 경향성이 바뀌게 되면 그 다음에 사람의 소원도 바뀌게 됩니다. 아주 놀랍게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력을 해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의 패턴으로 다가가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럼 무엇인가. 예수님의 영혼 안에 있었던 그 어떤 상태로 우리들이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우리의 기도의 제목은 놀랍게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인 변화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자 했던 기도의 패턴을 따라서 기도하는데 있어서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마 그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자기는 예수 믿으면서도 그저 늘 사람들이 부처 앞에 가서 빌고 그리고 거기 뭐 이렇게 평소에 와서 비는 것이 아니라 무슨 때만 되면 사람들이 그렇게 몰립니다. 사실 그런 것이 종교의 입장에서 보면 상당히 어떻게 보면 불명예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고 영적인 놀라운 변화를 받고 나면 우리의 존재 자체가 마음의 경향성 자체가 바뀌었기 때문에 기도의 제목 자체도 아주 놀랍게 바뀌는 것입니다.
차를 이렇게 타고 지나가다가 건널목에서 섰는데 다 창문을 닫았는데 옆에서 얼마나 오디오를 크게 틀어놓았는지 내 차의 문짝이 들썩들썩 하는데 도대체 무슨 음악을 그렇게 크게 틀어놓는가, 그런데 자꾸 쳐다보니까 창문을 여는데 소리가 나오는데 완전히 쿵쾅 쿵쾅 그렇게 하는데 내가 가만히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런데 차 자체가 음악 소리에 의해서 이렇게 꺼떡꺼떡 거리며 춤을 추고 가는 것입니다. 야, 세상에 뭘 저렇게 하나. 우연히 기회가 있어서 그런 곳을 하는데 가게 되었는데 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그런 것을 하나 장착하는데 1,300만원정도가 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아! 저게 1,300만원 짜리 구나. 그런데 어떤 정신나간 사람은 1,000만원 짜리 차에다 1,300만원 짜리를 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있는가 했더니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 이상한 사람들이지요. 자기가 공사를 하면서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800만원 짜리 에다 1200만원 자리를 달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째든 그렇게 달고 다닙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헤비메탈이나 랩 음악 같은 것들은 그렇게 강력한 파워를 베이스로 쾅쾅 때려야 한다고 합니다. 베이스 스피커가 의자 뒷좌석에 있는데 진짜 한번 앉았는데 자동 안마기입니다. 쿵쿵 합니다. 진짜 자동 안마기입니다. 진짜 배 살까지 떨렸습니다. 그것을 다 타고 다니는 것입니다. 안 흔들리면 이상한 것입니다. 그런 것을 만약에 나를 주면서 사실 한 달에 백만 원씩 주겠으니 달고 다니라고 그래도 싫습니다. 그런 음악과 결별한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전혀 좋지 않고 만약에 그런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아마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그 젊은이들에게는 그렇게 다니는 것이 아주 열렬한 선망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달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끄고 다니면 못 알아주니까 뒤에다 오디오 상표를 붙이고 다닙니다. 이 차에는 이것이 달렸습니다. 나도 틀기만 하면 꺼떡꺼떡합니다. 그리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 전혀 소원이 안 되고 전혀 부럽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또 그 사람들은 우리를 바라볼 때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가지고 있는 소원이나 이런 것이 그 사람들에게 그렇게 좋아할 리가 뭐가 있는가. 아니 자기네 옆집 사람이 예수를 믿는데 왜 그 옆집에 사는 네가 그렇게 좋아하는가. 그럴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 앞에 주님을 믿고 변화 받은 사람들 속에는 영혼의 변화를 통한 소원과 삶의 경향성에 대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변화는 노력만으로 일어나기 쉬운 것이 아닙니다. 노력도 물론 끊임없이 해야지 되겠지만 고민해야 합니다. 왜 내 기도의 패턴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것과 다를까? 노력은 해야지 되겠지만 노력만으로는 안 됩니다. 영혼의 참된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주기도문이 정말 주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을 경험하게 되면 사람들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던 이 주기도문과 완벽하게 가슴에 스며드는 그런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기도문이 있는데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제목이고, 하나는 주기도문, 내 기도문 무엇인가 하면 주기도문은 주님이 가르쳐주신 것이고, 내 기도문은 변화 받기 전에 내가 기도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살아가다가 주님을 크게 만나고 내 영혼에 아주 근본적이고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이었는데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할 때 바뀌어진 사람보고 이 기도를 하라고 그러면 안 됩니다.
마치 그것은 내가 예수 믿고 완전히 변화되어서 이제는 찬송가가 좋고 그리고 이 찬송에 기본이 되는 명곡이 좋고 이렇게 음악이나 이런 것들에 대한 경향성이 다 바뀌었는데 여전히 나보고 그 컴컴한 레스토랑에 가서 담배연기 가득한 곳에 있으면서 그런 헤비메탈이나 아니면 랩 음악을 즐기라고 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변화를 받고 보면 내 기도문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하던 기도생활도 내 영적인 변화와 함께 사장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하면 내가 새로운 변화를 받아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이 된 것처럼 나에게 있어서 신령한 기도가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기도문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도 정말 주님을 만나고 놀랍게 변화되면 어른들도 하지 못하는 이 주기도문에 가장 가까이 가는 기도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여기서 우리들이 하나 깨닫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한 그 말씀은 사실은 이렇게 변화되어라 하는 그 말씀과 아주 유사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변화를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영혼에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그 기도의 패턴으로 우리도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 영혼의 변화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 주기도문의 패턴과 기도의 패턴이 현격한 차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정말로 영혼의 변화를 받아서 그래서 기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보십시오. 영혼의 변화와 기도생활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흔히 결심한 기도생활을 계속 이어가지 못하는 것을 단순히 게으름이나 나태만으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물론 그것이 아주 중요한 원인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어렵습니다. 한 사람이 기도를 결심하고 살아가는데 계속해서 열렬한 기도를 한다 그것은 그 자신의 영혼이 가만히 있지 않고 끊임없는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만 이 기도에 열렬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그 영혼의 변화가 어떻게 그렇게 자주 일어납니까? 자주 일어나야지 일생에 한 두 번 일어나는 것이 이상합니다. 자주자주 일어나야 합니다. 물론 우리들이 워낙 캄캄한 무지 속에서 살 때에는 완전히 지옥을 향해 가다가 천국을 선회하는 엄청난 사건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단 하늘을 향해 가는 길을 들어서서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안전합니까? 우리들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활 습관과 그리고 우리의 편견이 항상 성경 편에 서 있습니까? 우리가 항상 잘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고, 잘못된 것들이 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죄가 있고, 그리고 우리가 알면서도 바르게 살지 않는 모든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무리 많이 변화를 받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흠을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우리 속에는 새롭게 도전을 받고 바뀌고 변화되어야 할 부분들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것들이 끊임없이 깨트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의 초기에는 하나님이 큼직큼직한 것을 가지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하나님이 아주 사소한 것을 가지고 심하게 우리를 다루십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결심할 때는 교회에 계속 안 나가니까 하나님이 혼내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교회 안나가고 제멋대로 이렇게 해서 안 되겠구나. 그리고 각성을 하고 그 다음에 돌이켜 섭니다. 그러면 소위 커다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누구 간증같이 십일조를 떼어먹으니까 진짜 돈이 저축되어서 그 돈이 저축되는가 했더니 저축을 다 해놓으니까 한꺼번에 털어먹는 사건이 생기더랍니다. 어째든 하나님이 그런 식으로 해서 우리에게 큰 문제를 가지고 심하게 다루십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또 변화되지 않은 영혼의 문제를 하나님이 다루시면서 네가 계속해서 그렇게 패역하게 살 것인가 말씀하시면 돌이켜 섭니다. 그리고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 속에 결함이 남아 있습니다. 아주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다루십니다. 처음 예수 믿기 시작할 때 이제 신앙 생활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아주 성숙하고 신령한 은혜의 상태에 들어간 그리스도인들이 막 고뇌하는 것, 왜 내게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목마름이 없을까, 왜 나는 이 세상에 이루어지지 못하는 하나님 나라의 미완성을 보면서도 가슴을 찢으면서 슬퍼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을까? 이런 것들에 대한 미세한 문제에 대한 고민이 왜 없는가 하고 따지는 것은 무리한 것입니다. 수준대로 하나님이 다루시니까 나중에 깊어지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들이 볼 때는 진짜 저 사람은 보기 드물 정도의 모범적인 크리스천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진실하다고 그렇게 말하고 기도하고 그래도 하나님이 그 갈피 속으로 들어와서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찌꺼기들을 겨냥하시면서 거기를 말씀으로 찌르시면서 우리를 감화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이 자극을 받으면서 작은 죄의 지적에 깊이 거꾸러지면서 하나님 앞에 감화를 받고 깨트려지는 정도가 처음 예수 믿으면서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살다가 주님을 향해 돌이켜 설 때 그때 우리들이 깨트려지는 그것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동질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생활의 열렬함을 유지해나가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영혼의 변화가 뒤따라야합니다. 그러니까 그런 영혼의 변화, 말씀을 통한 영혼의 깊은 자극, 그리고 영혼의 깊은 도전,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자아가 깨트려지는 그런 아픔, 그런 것들을 통해서 열렬한 기도의 영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의 은혜가 사라지면 이런 열렬한 기도의 은혜가 유지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어떤 인위적인 그런 불러일으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처럼 영혼의 변화가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패턴을 유지하며 살아갈 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무엇이 필요한가 하면 삶의 더 없는 분투가 이런 예수님의 주기도문을 유지하며 살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기도는 무엇인가 하면 삶의 고민이 전혀 묻어나지 않는 기도, 다시 말하면 평소에 계속 살면서 거의 관심도 가져보지 않은 문제를 기도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고민을 하는 것처럼 가장해서 기도하는 것은 아주 불량한 위선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들은 기도하면서 이런 우를 얼마나 많이 범하는지 모릅니다. 특별히 사람들 앞에서 대표기도 할 때 이런 우를 굉장히 많이 범합니다. 적어도 나는 이 기도를 통해서 내가 평소에 이런 정도로 고민하고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한다라고 하는 그런 충동들, 그런 것들이 굉장히 많이 흘러나옵니다. 이런 것들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주기도문이 어느 교부의 말처럼 예수님 이래 최고의 순교자라고 그랬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예수님의 기도 그 자체가 예수님의 삶의 농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오늘 우리의 가슴에는 쉽게 묻어나지 않는 그런 간절함을 가지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고 그 다음에 공동체 안에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의 양식을 위해 가슴아파 기도하시고 그리고 그 다음에 뒤에 이어지는 모든 기도 제목들을 가지고 그렇게 안타깝게 기도하셨는데 예수님께서 그런 기도의 열렬함을 유지하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그 기도가 바로 예수님의 삶의 관심사와 일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주기도문이 성경에 쓰여있습니다. 모든 성경의 부분이 그렇지만 예수님의 주기도문은 액체에 절은 주기도문입니다. 피와 땀과 눈물에 흠뻑 젖은 주기도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주기도문은 결국은 성도로서의 모델이 되는 이상적인 성도가 살아야 할 삶의 세계와 기도의 세계, 그가 꿈꾸어야 할 이 지상에서의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희망을 한번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모델이 되는 삶을 예수님께서 사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보십시오. 전도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그렇게 하는데 전도하지 않은 사람이 전도를 위해서 얼마나 열렬하게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전도하러 나와서 열심히 전도를 하다가 아파트 경비원에게 쫓겨나가기도 하고 그리고 동리 사람들에게 욕을 먹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위에서 침도 뱉는다고 합니다. 그런 침 뱉음도 당하고 심지어 개에게 뒷다리도 물려보고 그렇게 하면서 복음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것을 알고 그렇게 전했는데 영혼 하나 하나가 나와서 주님을 영접하고 새사람이 될 때 감격을 해보는 그런 삶의 배경이 있는 사람이 전도를 위해서 열렬히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또 자기가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삶을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자기가 온전하게 살지 못하는 것을 기도할 때 항상 눈물이 흐릅니다. 그리고 진실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진실하게 살고 싶어하는 강력한 소원을 가지고 진실하게 살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요소와 부 정직과 불의와 더불어 싸우면서 고난을 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항상 마음속에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사람과 기도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변화뿐 아니라 살아가는 삶 그 자체의 방향성이 예수님의 기도가 제시하고 있는 삶의 방향과 일치할 때 이 주기도문에 불이 들어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기도의 틀이 틀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틀 속에 생명이 들어오고 불이 들어옵니다. 아주 뜨겁고 열렬한 하나의 기도의 뼈대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주기도문은 항상 우리 앞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네가 주기도문을 한다고 애야 이 주기도문은 주님처럼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란다.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그것입니다. 주님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언제나 주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지 못하는 것이 간구의 제목이었고, 그 나라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 고뇌의 이유였습니다.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 때문에 통곡하셨고,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나누지 못해서 여전히 결핍 가운데 있는 사람들, 그들을 보시면서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 그분의 마음에 고통이 되셨습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의 삶이 주기도문 그 자체를 지향하는 그런 초점이 있는 그런 삶을 사셨기 때문에 이 주기도문이 예수님의 마음에 있었고 그리고 이것이 또한 그분의 삶으로부터 온 기도였고 또 그분의 삶은 이 기도로부터 흘러나간 삶이었습니다.
기도와 그 사람의 삶은 항상 연관 관계가 있습니다. 사는 것만큼만 기도하고 기도하는 것만큼만 살아갑니다. 삶이 기도 속에 잠기고 그 기도가 삶 속에 갇힙니다. 항상 이 속에서 같이 돌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여기서 배우는 교훈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이렇게 기도하라는 이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렇게 살 수 없으면 이렇게 살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때 너희도 비로소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씀하시는 기도에 대한 교훈을 이렇게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니까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기도에 대한 생각은 무엇인가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 세상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빌어서 취하는 길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렇게 기도해주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찬송을 불러준다면 싫어해도 기도를 해준다고 그럴 때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옛날에 한번 병원에 한 사람을 문병을 갔는데 여러 사람이 누워있는 곳에 기도하는데 나도 위해서 기도해주시라고 나는 교회 안 다니는데 기도해줄 수 있습니까? 기도해줄 수 있습니다. 다 기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찬송은 큰소리로 못 불러도 기도는 큰 소리로 해도 거기 모인 병자들이 다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 기도는 자기의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관심사를 가지고 예수님의 기도에 다가오는데 잘못된 유대주의의 기도도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기도도 책망하시고 그러면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는 무엇이 너희에게 필요한지 다 안다. 너희들의 먹고 입고 마셔야 할 것들을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잘 안다. 너희들이 누리는 대부분의 것도 기도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은혜로 주신 것들이 아닌가. 이것 말고 너희들이 진정으로 해야 할 기도가 있다고 하면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주기도문을 부르는데 그것은 결국 무엇인가 하면 너희들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라. 그러니까 영적인 변화로 부르고 완전히 다른 삶, 즉 육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넘어오는 이런 세계로 들어가도록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아주 진지하고 심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오늘의 말씀을 종합해보면 여러분들이 사경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기도의 은혜를 회복시켜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기도의 은혜를 회복시켜주셨다고 할지라도 너무 자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겨우 아궁이에 불쏘시개에 불을 붙인 것뿐입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조금 나무 가지에 불이 붙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부슬부슬 비가 오는 밖에 불을 피어놓고 그 불을 전혀 돌보지 않으면 이 세상을 근심과 염려, 그리고 기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여러분들의 방향이 다른 삶으로 그리고 게으름과 나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깨트려짐이 없는 여러분의 안일한 삶이 정말 부슬비가 되어서 금방 그 비를 꺼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아궁이에는 더 연기가 나서 불을 때지 않았을 때보다 더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불을 안 땔 때는 춥기만 했는데 불때다가 꺼지니까 연기만 나서 눈물도 나고 콧물로 나고 코에다 뭐도 묻고 그러니 얼마나 볼 상 사납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겨우 이제 기도의 불을 새롭게 지펴주셨습니다. 그러면 나무를 이렇게 벌려놓고 겨우 붙여주셨으니 마른 장작도 골라서 올려놓고 그리고 그 불을 잘 간수하고 비가 올 것 같으면 뭘 좀 치고 그렇게 하면서 계속해서 좋은 나무를 집어넣어서 연료를 공급해 주어야지 만 그 기도의 불들이 유지됩니다. 그 연료가 두 개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깨달음을 통해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계속해서 변화 받는 것, 또 하나는 분투하는 삶을 통해서 기도의 관심사와 여러분들의 삶의 관심사가 일치되게 하는 것, 여러분들이 만약에 진정으로 이것이 기도 제목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변화시켜달라고 기도했으면 그러면 변화를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혼의 변화를 정말 갈망하는 구도자의 삶이 어떤 것인가. 여러분들이 만약에 성결을 위해서 기도를 했으면 부지런히 성결의 비결을 배우고 성결하게 살기 위해서 분투하면서 노력을 해야 합니다. 교회의 부흥과 변화를 위해 기도했으면 내가 어떻게 나를 던져서 교회의 부흥과 그리고 성도들의 변화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 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삶이 어떤 것이어야 되는가. 그것을 부단히 노력하고 그 기대를 따라 살지 못하게 하는 자기와 더불어 지독하게 분투하면서 살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가야지 됩니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여러분들의 삶의 변화가 기도의 변화가 저절로 올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기도문의 기도를 갖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주기도문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여러분들을 그런 사람들로 만들고 싶으셔서 이 기도에 관한 교훈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사경회를 끝마치고 이제 마지막 남은 두 달입니다. 한해의 두 달입니다. 지난 열 달 동안 보면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많은 은혜에 갚은 것이 너무 적습니다. 이 두 달 동안에 열매맺지 못하는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면서 마치 십 개월 동안 하나님 앞에 진 빚을 갚으려는 듯이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더 간절히 기도하고 열렬히 매달리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십시오. 육체와 야합하지 말고 끊임없이 열심을 내면서 기도생활을 하십시오.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분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생활은 누구에게나 어렵습니다. 목사인 저에게도 설교가 기도보다 훨씬 쉽습니다. 기도는 늘 언제나 어렵습니다. 그것을 분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결국은 이런 기도생활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영혼의 변화를 받기를 거부하고 분투하는 삶을 살기 싫어합니다. 무엇보다도 기도에 있어서 게으름, 오랫동안 몸에 배인 이 게으름이 뭔가 기도의 세계 속에서 깨어나는 것 같아도 마치 커다란 괴물을 쿡 찔러보니까 고개를 들고 눈을 게슴츠레 뜨다가 다시 푹 꼬꾸라지면서 잠이 드는 것처럼 그렇게 되기가 십상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진짜 열심 있는 기도생활을 해야 합니다. 가정주부들은 아침을 기도시간으로 삼아서 나와서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은 새벽에 기도를 규칙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그리고 만약에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하는 것이 너무 힘들면 하나님 앞에 정하십시오. 교회에 오는 날은 교회에 일찍 와서 하고 교회에 오지 않는 날만이라도 새벽기도에 나오겠습니다. 이렇게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세우고 아침에 일어날 때 너무 힘들어서 나올 수 없으면 뭐라고 하라고 했습니까? ‘충성’ 그렇게 하고 ‘나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나라의 군사다. 내게는 상관이 계시고 내게는 내 주인이 있으니 나는 그분의 종이오 노예일 뿐이다’ 생각하고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루 이틀에 이런 삶이 아니라 지속적인 이런 삶을 살면 여러분들에게 정말 말할 수 없는 축복을 가져올 것입니다.
지금 기도의 제목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교회의 이전과 건축과 이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건축위원과 저는 요즘에 진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선하게 인도해주시는 데도 정말 장이 녹는 것 같은 그런 위기를 느끼면서 이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의 전적인 기도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교회의 이전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시작한지 9월 지금 벌써 일년이 지났습니다. 아직 땅도 못 팠습니다. 그런데 단 하루도 쉰 날이 없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단 하루도 쉰 날이 없이 분투하면서 시간을 다투면서 노력을 했는데 겨우 여기까지 왔습니다. 앞으로도 갈 길이 멀고 여러분들에게 언제쯤이면 교회를 완성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라고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고 그렇다고 무슨 우리의 계획이 어떤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우리들이 산맥에 들어가는 초입에서는 우리들이 미처 볼 수 없었던 그런 산들이 산맥으로 들어가 보니까 우리들이 전혀 볼 수 없었던 골짜기도 나오고 계곡이 나옵니다. 건너가려고 다리를 매어놓고 건너가면 뒤돌아갈 수 없게 다리가 떠내려가는 상태도 생기고 가끔가다가 곰도 만납니다. 이렇게 이런 상황들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게 결국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라고 주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여러분들은 (?)매년 여러분 신년 사경회 하면서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되고 싶다고 그랬는데 벌써 세월이 열 달이나 흘러서 그 동안에 설교한 것을 다 풀고 그 동안에 제가 연구한 자료들을 다하고 해서 일년 가까이 글을 써서 책이 나왔는데 여러분 정말 육적인 그리스도인에서 신령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겠다며 눈물을 흘리며 결심하고 기도했는데 여러분 열 달 동안 정말 신령함에 있어서 얼마나 진보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노력은 정말 일관성이 있었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가 절박하게 필요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의 변화를 위해서도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영혼들을 보내어주셨는데 그 영혼들을 돌보기 위해서라도 누군가가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기도의 헌신이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오늘날도 교회에 사람들이 가득 찼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입니까? 무엇인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뭔가 그 영혼들이 정말 변화되고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기도에 어떤 열렬한 기도의 헌신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앞에서 있는 목회자도 여러분들의 기도의 도움이 요즘처럼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느낀 적도 흔치 않습니다. 정말 필요합니다. 이제는 여러분 혼자만 잘 사는 것 가지고 충분하지 않고 저를 위해서도 기도를 많이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의 기도 제목은 갚지 않은 외상값처럼 계속 쌓여갑니다. 그런 속에서 언제 우리들이 그것을 청산하겠습니까? 누구도 아니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 기도의 수많은 짐들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짐에 비례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그 기도의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어두움 속을 헤치면서 그 기도로 이겨가면서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다른 은혜를 주셨습니다. 남이 보지 못한 세계도 보여주시고, 남은 깨닫지 못한 말씀 깨닫게 하시고, 그리고 남이 경험하지 못하는 그 깨어짐의 놀라운 은혜를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제는 무엇인가 한 알의 밀 알이 되어서 그래도 미력이나마 주님께 뭔가 자기를 드리는 삶을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거액의 헌금은 기본적인 돈이 있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간절하고 열렬한 기도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심지어는 움직이지 못하고 병들어 누워있는 사람도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전도 나오라는 사람들은 다리도 튼튼하고 육체도 어느 정도 건강해야지 만 나와서 헌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병든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 우리가 다른 것에 있어서는 모르더라도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우리가 변명할 수 있겠습니까? 적당한 구실을 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주님 앞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핑계될 수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바쁘고 고단하고 어려운 삶을 살아갑니다. 정말 허덕거릴 정도로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 살아가도 된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가 얼마나 큽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의 필요를 채우는 일상적인 삶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살아가야 할 우리의 의무를 외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 결국 우리의 희생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 아들을 주셔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주님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우리와의 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주님 자신은 완전하시고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창조하신 세계가 없어도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에 기대어서 겨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보내는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런 희생을 해야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는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하기 때문에 당신을 버리시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보다 더 살을 깎고 피를 말리며 뼈를 부수는 생애를 산 사람이 아마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분의 생애는 노역과 견디기 힘든 고통과 그리고 박해와 그리고 가난, 그리고 누구나 쉽게 질 수 없는 무거운 이 세상의 죄의 짐을 짊어지고 사신 피곤하게 이를 때 없는 삶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풍랑이 이는 고물에서 잠이 들어버리셨습니까? 그런 삶이 예수님의 기도의 불을 끌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그날 밤에도 처절한 기도 속에서 자신의 진액을 짜서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었고 하나님 아버지는 아들로부터 십자가에서 흘리는 피를 받으시기 전에 그렇게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기를 짜서 드리는 기도의 헌신을 먼저 받으셨던 것입니다.
정말 우리는 강해져야 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생각하고 주님께 진 빚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여러분들에게 편지 쓸 때 자주 쓰는 ‘노예’라고 하는 표현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그 순간 이제 우리의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물론, 우리의 몸은 물론, 우리의 소유는 물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것입니다. 주님은 마땅히 우리를 그분의 것으로 삼으실 수 있으니 그분이 당신 자신을 우리의 것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것이고 우리는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정말 우리들의 안일한 삶, 미워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저는 지금 이 설교를 하면서도 마음이 너무나 아픕니다. 조금만 열심을 내어서 기도생활을 유지했더라면 분명히 주님이 주신 은혜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매를 많이 맺었을 텐데. 게으름 속에서 기도와 작별하고 그리고 건조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지체들을 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깊은 기도 속에서 그를 통해서 자기의 뜻을 이루고 싶어하셨지만, 차가운 교회 생활로 은혜 받은 사람의 의무를 대신하는 것을 볼 때에 메마른 그의 영혼만큼이나 저의 마음이 아픕니다. 사실 그런 부분은 목회자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예화: 이전에 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자매가 다시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면서 자 기를 좀 도와달라고 하는데 그 자매에게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는 이야기)
내가 여러분들에게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서 기도를 못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깨닫지 못해서 전혀 기도의 방향도 못 잡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온다는 사실을 잘 모르니까 기도의 의무를 태만히 합니다. 알잖아요.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새 사람으로 돌아섰는지 알고 있습니다. 많이 맡은 사람들에게는 많은 것들을 기대하시고 두루 파서 거름을 준 실한 포도나무에는 더 많은 실과를 기대하시는 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정말 주님이 여러분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이 여러분들의 육체도 이길 수 없는 그런 정도의 사랑이었습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이 여러분들에게 지속적인 기도 생활을 하라고 요구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희박한 은혜였습니까? 여러분들을 보고 주님이 죽을 사지에 가서 피를 흘리고 당장 순교하라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들에게 재산과 모든 소유를 팔고 하나님 앞에 바치고 가족들과 작별하고 그리고 폭탄이 퍼붓는 선교지 에 가서 나를 위해 장렬하게 전사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힘주는 대로 내가 너에게 준 기도의 제목을 따라 기도하고, 기도함으로서 너의 영혼과 그리고 너의 가족들과 그리고 목회자와 그리고 교회와 이 민족의 교회와 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섬기라고 그래서 뭔가 하나님의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인간이 되라고 주님이 당부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 그런 정도의 권한이 없으시겠습니까?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깊이 결단하고 하나님 앞에 내가 기도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리라 그렇게 생각해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이렇게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메마른 기도생활에서 벗어나는 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