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가운데 드린 기도
(2001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1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절망 가운데 드린 기도(눅5:12-13) 2001.4.9 십자가사경회(새벽) 1
2. 절망 가운데 받은 응답(삼상1:27-28) 2001.4.10 십자가사경회(새벽) 4
3. 회개 가운데 받은 은혜(눅18:13) 2001.4.11 십자가사경회(새벽) 8
4. 끈기 가운데 풀린 원한(눅18:7-8) 2001.4.12 십자가사경회(새벽) 11
5. 환경을 이기는 기도(막1:35) 2001.4.13 십자가사경회(새벽) 15
1. 절망 가운데 드린 기도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눅5:12-13)
구약 시대에 이 문둥병은 절망적인 질병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벤허’라는 영화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그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굴속에서 많은 문둥병 환자들이 기거하고 있는 광경을 여러분들이 볼 수 있습니다. 이 문둥병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은 제가 작년인가 제 작년에 문둥병 환자들이 모여 있는 여수에 있는 곳에 가서 말씀을 전했는데 그들은 물론 이제 완치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그 얼굴을 보면 문둥병이 얼마나 무서운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어떤 형체를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불에 엄청난 화상을 입은 사람처럼 그렇게 다 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때 이런 사람들은 사람들이 사는 도시에 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이 사람이 예수님께 나와 왔는지 아마 예수님께서 그들이 모여 있는 그곳을 지나가셨을 수도 있고 뭐 어째든 사실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을 보면 문둥병에 있어서 초보 증상이 아닙니다. “온 몸에 문둥병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문둥병이라고 하는 것은 한번 감염되기만 해도 절망적인데 그 절망적인 질병이 퍼져서 절망적인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절망적인 상황, 절망적인 질병의 상태가 되어 있는 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예수님께서 손을 뻗어서 만져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고쳐주셨습니다.
한번 잘 생각해보십시오. 이 사람이 온 몸이 문둥병으로 번져 있을 때 그 이후에 계속될 그의 삶과 그 고침을 받은 이후에 펼쳐질 삶을 대해서 생각해보십시오. 그 두 삶의 차이는 상상할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인가 우리의 영혼에 절망적인 질병의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혹은 우리의 삶에 어떤 환경에 있어서 절망적인 질병의 상태와 같이 그 치료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그런 환경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요? 그것들을 그대로 안고 우리가 일생을 산다고 할 때에 펼쳐질 일생과 그것을 고침을 받고 펼쳐질 일생에 차이를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비교할 수 없는 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인가 하면 고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고쳐지면 새로운 인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도 그 못생긴 여자들이 왜 돈을 싸들고 다니면서 턱뼈를 깎고 코를 높이고 그렇게 엉덩이 살을 떼다가 얼굴에다 붙이고 왜 사람들이 그렇게 난리를 하면서 자기 얼굴을 고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외모가 어떻게 고쳐지는가에 따라서 자신의 인생이 달리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람의 얼굴이나 눈에 보이는 외모를 좀 고쳐도 그의 앞에 다른 인생이 펼쳐진다고 믿는데 하물며 절망적인 질병의 상태에 있는 나의 영혼, 내면의 세계, 혹은 나의 삶에 어떤 운명적인 이 결함들 이런 것들을 고침을 받고 우리의 인생이 펼쳐졌을 때 얼마나 다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사모하지 않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렇게 고침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관해서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믿음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는데 이 사람의 믿음이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엎드린 믿음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에 관해서 소문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고쳐지면 고치고 안 되면 말고 그래서 한번 예수님께 한번 부탁을 해본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 달려가서 엎드렸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엎드린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이제 당신께 무엇인가 간청하는데 이 간청을 할 수 있는 마지막 대상이 당신입니다 하고 엎드린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의 이 절망적인 문제를 내어놓고 맡기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데 주님이 내 문제를 해결해주실 수 있는 마지막 분이시다, 유일한 분이시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엎드리는 것입니다. 엎드린 믿음입니다. 전적인 자기 포기, 만약에 나의 이 절망적인 질병만 고칠 수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종류의 엎드림입니다.
편지가 막 날라 옵니다. 거기에는 스피드 포스트라는 우편이 있습니다. 우체국에서 취급하는 아주 급하게 많은 돈을 주어야만 보내주는 그런 우편입니다. 외국까지 불과 2-3일이면 날라 갑니다. 그런 빨간 도장이 찍혀서 오면 음식점 선전, 뭐 헬스클럽 선전, 신문 광고지 그런 것 안 보고 제일 먼저 그것부터 뜯어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이 올려지는 기도는 하나님 앞에 우편물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이 이 기도만 이루어질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습니다. 반대로 이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다른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문둥병 걸린 사람에게 좋은 옷,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굉장히 비싼 금목걸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자세로 엎드리는 사람들의 기도를 주님이 먼저 뜯어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잘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영혼에 절망적인 질병의 상태, 혹은 여러분 자신의 삶에 있어서 절망적인 상태가 어떤지 깊이 돌아오고 그리고 정말 그것을 하나님 앞에 해결 받고 싶습니다 라는 그런 마음으로 주님 앞에 엎드릴 때 그때 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간구 하는 믿음입니다. 그는 성경에 말하기를 “엎드려 간구 하였다”그랬습니다. 하나님 앞에 열렬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도 자신이 무엇을 기도했는지도 모르는 그런 종류의 기도가 아니라 그 하나를 놓고 주님 앞에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구하겠습니까? 치료해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것은 힘든데 다른 것으로 바꾸면 안 되겠니? 그럴 때 그런 주님의 말씀이 이 사람에게 의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그것을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과 자세로 주님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구할 때 그때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중보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런 놀라운 역사를 가지고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자기 자신이 기도하는 사람일 때에 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필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자신의 절망적인 상태를 인식하고 주님이 도와주시면 좋을 텐데 라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거기서 한 단계 진전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직접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주님의 전능하심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엎드린 믿음, 간구 하는 믿음, 전능하심을 믿음입니다. 능력을 믿는 믿음입니다. 여기에서 보여주는 것은 “원하시면 하실 수 있나이다” 이게 무엇인가 하면 이것은 표현 자체가 주님을 당신은 이것을 내게 해주셔야 합니다 라는 방식으로 주님을 기도를 통해서 믿음이라는 미명하에 코너로 몰아 부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가끔 기도하다가 보면 우리들이 주님이 이런다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니까 이렇지요, 그러면 이렇게 해야지요?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건인지, 그러다가 마지막에 계속 코너로 몰고 가서 들어주실 것입니까, 안 들어주실 것입니까? 그래서 주님을 무릎을 꿇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믿음을 가장한 교만입니다. 항상 주님께 무슨 의무가 있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주님을 굴복시키려고 하는 그런 자세는 아닙니다. 기도의 진정한 자세가 아닙니다. 기도는 항상 은총을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저를 고쳐주시지 않으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필요합니다.
그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랬습니다. 주님께 간청하니까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다. 이게 무엇입니까? 맞습니다. 그러나 상에서 떨어진 그 부스러기를 주인의 집에 개도 먹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자기를 개처럼 낮춘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게 필요한 것은 주님이나를 무엇이라고 불러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내게 필요한 것은 주님의 은총입니다. 그런 겸비함으로 주님의 전능하심을 깊이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기뻐하시고 마음을 가지시기만 하면 그 일을 이루어주실 수 있다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 사람을 건져준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우리의 어떤 문제가 있고 오래도록 고쳐지지 않으면 우리는 그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삽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것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찬양 언제나 동일하신 주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자기를 전심으로 의뢰하는 사람들에게 그 능력을 보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기도해서 그 동안에 절망적으로 여러분들을 따라다니던 질병과 같은 그 문제에서 놓임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인생이 바뀌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2. 절망 가운데 받은 응답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삼상1:27-28)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역사를 이루어 가실 때 항상 사람을 통해서 자기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특별한 역사를 이루고 싶을 때에는 하나님이 특별한 사람을 준비시키십니다. 사사기를 보면서 우리들이 경험하는 그 현상이 무엇인가 하면 유일신 신앙의 해체입니다. 사사기의 특징을 들으라고 하면 유일신 신앙의 해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멀리 여호수아의 그 설교로부터 이미 예고된 것입니다. 가나안에 정착하고 그리고 그들이 형편이 피게 되면 이 유일신 신앙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예고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 계속해서 순환을 합니다. 그 순환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타락하면 하나님이 징벌하시고 징벌하면 회개하고 회개하면 다시 한번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축복 받으면 다시 타락하고 하는 이 아주 지루한 반복을 계속 하는 것입니다. 사사 시대에 그랬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사시대를 끝내고 이제는 왕정 시대를 새롭게 세우시는데 그 전환기에 선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사무엘입니다. 그리고 그 사무엘이 있기 전에 먼저 한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 한나는 굉장히 괴로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개인적인 인생의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를 아이를 갖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입니다. 더 크게 이루고 싶으신 일들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무엇인가 막히는 것 같을 때 그것이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나를 귀하게 사용하시겠다는 사인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든 그렇게 되어서 이제 아이를 낳고 그리고 그 아이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리고 마지막 내려가는 그 장면에 우리가 읽은 27-8절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나오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한나의 기도에 나타났던 하나님의 세 가지 은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째는 기도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문제가 생겼는데 이 한나가 처음부터 기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가지고 계속 남편은 엘가나와 부딪치고 브린나 하고도 부딪쳤습니다. 그러면서 무시를 당하고 한없이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두드린 것이 어딘가 하면 기도였습니다. 거기서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기도를 생각하면 항상 아파트 열쇠를 생각하게 되는데 왜 집에 열쇠를 대게 근처에 둡니다. 아파트나 연립주택을 뒤지는 도둑은 다 압니다. 우유 주머니에 대게 열쇠를 둡니다. 다음에 요 위에, 창문 옆에, 바닥에 다 뒤져서 문열고 들어갑니다. 닫힌 문 옆에 바로 열쇠를 둡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녀들이 도둑도 중요하지만 자녀들이 언제든지 와서 문을 열 수 있게 하려고 그래서 닫힌 문 옆에 근처에 어디에 열쇠를 나둡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문제가 있어서 그것을 덜컥 닫아놓으시고 열쇠를 강물에 던져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들이 도저히 그 문을 열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문제 옆에는 항상 열쇠가 있습니다. 거기 어딘가 바로 있습니다. 바로 그 근처에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기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한나가 경험한 것은 기도하게 하시는 은혜입니다. 만약에 한나가 브린나와 머리털이나 잡아당겨 싸우고 남편 바가지나 긁으면서 살았더라면 자기 자신도 얼마나 불행했겠습니까?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남편은 그렇게 포악을 떠는 아내에게서 영영 마음이 떠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아끼는 사람 없이 인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잠시 인생의 문제를 인해서 곤고하고 고통스러워했지만 그는 이내 자기가 두드려야 할 문이 어디인지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풀어야 할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택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해질 때로 깊이 가난해진 가운데 성소에 올라가서 그래서 거기에서 엎드려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더니 그 기도가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였습니다. 다 쏟아 붓는 기도였습니다. 얼마나 마음을 쏟아 부었는지 그 영적인 분별력이 떨어진 엘리 제사장이 너 술 먹었니? 그렇게 물어볼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자기의 마음을 다 쏟아 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문제 옆에 해결의 열쇠를 하나님이 놔두셨습니다. 우유 주머니도 뒤져보고, 우유 투입구에도 손을 넣어보고, 그리고 까치발을 들고 문틈 위에도 한번 만져보면 반드시 거기에 열쇠가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다 쏟아 부어지고 나니까 몇 가지 이익이 생깁니다. 사람들을 이제 미워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니까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쏟아 붓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가 생겼을 때에 제일 먼저 이런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의 문제들을 오히려 사용하셔서 우리를 특별한 사람으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아이를 성태하지 못하는 것이 이 여인을 처절한 불행의 이유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했더니 아이를 성태하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의 간섭하심이 놀랍게 하나님 앞에 쓰임 받으면서 한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되 이렇게 기도 속에서 완전히 구우십니다. 그래서 잘 만드셔서 그래서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한나가 받은 은혜는 응답하시는 은혜입니다. “기도하였더니 나의 구하는 바를 그가 응답하시니라” 여기서 우리가 깨닫게 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무슨 노력은 안 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아이를 갖기 위해서 무슨 노력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이 사람이 기도도 안 했을 리가 없습니다.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인데, 여기에서 이것은 무엇인가 하면 특별 기도를 한 것입니다.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에스더의 고백처럼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 인생을 살다가 보면 그렇게 결단을 내리고 기도해야 할 때가 있는데 그런 때에 잘 기도를 해야지 됩니다. 그렇게 해야지 우리의 인생이 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여튼 그의 기도를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신 것입니다. 이 한나가 응답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부르짖는 모든 기도의 응답을 해주실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 구한다고 할지라도 마음을 다 쏟아 부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 묵묵부답 하시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잘못된 기도라도 마음을 간절히 쏟아 부으면 하나님이 응답해주십니다. 왜 그런지 이제 설명을 드리겠으니 보십시오. 기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엄밀한 의미에서의 기도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건성으로 덜렁덜렁 기도하는 사람은 아무리 기도하는 모습을 해도 절대 그 사람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한나처럼 자기의 마음을 쏟아 부으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잘못된 것을 기도해도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면 반드시 하나님이 그의 잘못된 기도라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의 마음속에, 마음속에 깨닫게 하십니다. 그것이 중요합니다. 올바른 것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간절히 기도를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간절한 기도에 응답이 없는 기도는 없습니다. 다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응답되지는 않는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간절히 마음을 쏟아 붓고 기도하면 자기가 이런 식으로 하나님 앞에 응답 받아야 된다라고 하는 고집이 기도를 시작할 때는 있지만 마음을 쏟아 부으면서 기도하면 그 고집이 사라지고 결국은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한나가 하나님 앞에 가서 무엇을 기도했겠습니까? 제가 주님의 모습을 닮게 해주시고 성화의 교리에 따라서 뭐.... 다 쓸데없었습니다. 이 여자에게 있어서 오직 하나는 통속적인 기도와 같이 아들 하나만 점지해 주시옵소서 기도하러 올라가는 이 여자의 마음은 아들 낳기 위해서 망부석 코를 잘라 산에 올라가는 여자들과 코를 깨트려서 그것을 삶아먹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망치를 들고 올라가는 여자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쏟아 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한나 자신 속에 있었던 모든 미움과 원망, 그리고 자신이 인생에 대한 비뜨러진 기대 이런 것들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더러운 피가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고 응답을 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하는데 뭐 사람을 차별하나. 차별합니다. 차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누가 기도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세계 평화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늘 기도해도 꼴 같지 않은 사람이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우습게 생각하십니다. 그러나 한 조각의 빵과 한잔의 물을 구해도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소중하면 그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심각한 기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응답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자 얼마나 놀랍습니까?
마지막 세 번째는 무엇인가 하면 서원을 갚게 하신 은혜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집에 가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품에 안고 뒤에 보면 한나가 기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리고 그 어린것을 끌어안고 젖을 먹이면서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꿈꾸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애가 젖 뗄 때가 되었다고 했는데 얼마나 예뻤겠는지 생각을 해보십시오. 아이들은 못생겼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그냥 아이라는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다웠겠습니까? 그런데 젖 뗄 때쯤 되었을 때에 그 엄마의 마음에 이 아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그렇지요? 그런데 그 아이를 데리고 가서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입니다.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데 하나님 앞에 바치는 것입니다. 내 생각에는 한나가 성소에 올라가서 아이를 바치고 혼자 돌아갔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아이를 데리고 가서 그 아이를 성소에 바친 다음에 한나는 혼자 집에 돌아간 것이 아니라 예전에 없었던 하나님과 함께 돌아간 것입니다. 그렇게 변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기도의 제목이었는데 그것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기도하게 하시는 은혜, 응답 받게 하시는 은혜를 경험하고 나니까 이제는 서원을 갚게 하시는 은혜를 받을 정도로 그렇게 놀랍게 그 사람이 변한 것입니다. 아들을 갖고 나서 하나님 앞에 바치고 그 아들 대신 하나님과 함께 집에 돌아가는 여인이었습니다. 참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 서원을 갚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어서 그것에 대해서 마음을 쏟고 기도해서 주님이 응답해주시면 뜻이 없는 기도 응답은 없습니다. 그 기도 응답을 통해서 하나님이 뭔가 여러분의 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을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내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라
하나님이 뭔가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때에는 뭔가 하나님께서 꼭 이루고 싶으셨던 일이 있으신 것입니다. 그 계획에 집중하는 마음이 응답을 받은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왜 큰 응답을 받고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진전이 없거나 혹은 무너집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되는 이유는 그런 응답을 받고 나서는 응답해주신 계획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그때에 그 기도의 응답이 우리의 신앙을 견고하게 하는데 기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별 것을 다해보았지만 그러나 아직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여러분 인생의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닫힌 문을 머리를 들이박고 발로 차고 눈으로 부릅뜨고 이제 지쳤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말고 손을 펼쳐서 뒤져보시기를 바랍니다. 우유 주머니, 우유 통 다 뒤져보십시오. 반드시 거기에는 응답의 열쇠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응답의 은혜를 경험하고 또 그 서원을 갚는 신앙 속에서 살아서 여러분들이 꼭 극복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3. 회개 가운데 받은 은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눅18:13)
많은 사람들이 공통된 고백이 기도에 있어서 어려움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기도의 문이 닫혔을 때에 그것을 여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열려진 기도의 문을 계속해서 닫히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 그것이 기도 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인 어려움입니다.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어려울까, 어느 것이 더 어려울 것 같습니까? 전자는 한번의 힘을 많이 쏟아 부어서 이 기도의 문을 열어야 한다는 것 때문에 힘들겠고, 그 다음에 열려진 기도의 문을 유지하는 것은 이제 그것을 잘 지키려고 애를 쓰는 것이 한 두 번 갖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하자면 전쟁에 있어서 한번 승리를 하는 것도 어렵지만 승리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항상 적군보다 위에 있어야지 되니까 그렇습니다. 이게 그렇습니다.
그런데 닫혀진 기도의 문을 여는 중요한 열쇠가 오늘 예수님에 의해 소개되고 있는데 그것은 회개입니다. 그 회개가 문을 연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고 하나는 세리입니다. 그 당시에는 유대인들에게 하루에 세 번씩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는 기도 시간이 있었는데 이제 이렇게 두 사람이 그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 앞에 옳다고 인정을 못 받았고 세리는 주님이 옳다고 인정을 해주셔서 내려왔습니다.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사실 객관적으로 본다면 세리는 바리새인보다 훨씬 불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누구였는지 우리는 잘 쉽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저 우리 문맥에서는 일제 시대의 앞잡이나 아니면 공산당의 앞잡이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참 돈을 가지고 세금을 거두면서 민족에게 못할 짓을 하지 않고는 이 일을 해서 밥을 먹고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에서는 완전히 내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객관적으로는 바리새인이 훨씬 의로운데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이 그 의로운 바리새인보다 이 사람을 더 쳐준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에는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없습니다. 토색, 불의, 간음 이런 것을 안 하고 그리고 내 소득의 십일조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사실이었습니다. 사실인데도 하나님이 이 사람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지를 않고 죄인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가장 커다란 것은 이 사람의 기도가 사실이었지만 그러나 그 속에는 더 중요한 것이 빠져있었습니다. 그것은 첫째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갈망이 빠졌습니다. 이 세리의 경우에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그러니까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마음입니다. 기도를 할 때 왜 가슴을 치는지 아십니까? 성경에 보면 그런 것이 많이 나옵니다. 너무 아프니까. 의학적으로는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너무 아프니까 이렇게 긴장되면서 심장에 압박이 오니까 두드리는 것입니다. 두드리면 훨씬 나아지는 것입니다. 이 세리가 비록 죄 가운데서 살았지만 얼마나 하나님께 간절히 필요로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응답하시면 이 회개를 통해서 기도의 문을 여는 가장 주요한 열쇠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도움이 없이도 넉넉히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열렬한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가짜입니다. 주님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간절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꼭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세리가 가슴이 아팠던 것이 그것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살았던 날도 사실인데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다시 한번 새롭게 살고자 하는 그 마음도 주님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마음도 진실이었습니다. 그 두 사이에 논리적으로 안 맞습니다. 주님을 필요로 하면 그렇게 세리로서의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세리로서의 삶을 살았으면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말아야지, 그런데 이것도 진실이고 이것도 진실입니다. 그 사이에서 세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나는 하나님 정말 주님 없이 살 수 없으니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그런 갈망이 배어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그 기도의 능력을 무엇인가 어떤 한 개인에게 지속적으로 따라 다니는 은사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옳지 않는 생각입니다. 항상 기도의 접근하는 사람들은 열등의식 이런 것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나 같은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시겠는가, 능력이 더 많은 사람이 있겠지’ 그런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기도의 제일 큰 무기는 기도의 온 경력이나 아니면 신분이나 아니면 하나님께로 받은 능력이나 이런 것들보다도 진실합니다. 백 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칩시다. 어떤 사람에게는 기도의 큰 능력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작은 기도의 능력을 주시고 나에게는 아주 손톱만큼 주셨다고 한다면 백 번 양보해서 그런 일이 있다고 칩시다. 그럼 어떻게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게는 그만큼 밖에 안 주셨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없으면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누구나 그런 상황에서도 공통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진실한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진지하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세리의 기도가 보여주는 것은 자기의 비참함을 아는 기도입니다. 자기의 비참함을 아는 마음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여기에는 조금이나 위시되거나 뽐냄, 이런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생각하기에 그럼 당연하지 자기가 그렇게 죄인으로서 살아오고 하나님 앞에 위시될 게 뭐가 있는가. 그러면 내가 묻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 어떤 모든 세리들이 이렇게 모두 하나님 앞에 자기의 그 죄를 고백을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 이렇게 모두 세리들이 자기를 낮추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죄인일수록 자기의 참 모습을 모릅니다. 의롭고 경건한 사람일수록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죄 가운데 사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누구인지 분수를 모릅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비참하리 만치 낮아져서 주님을 구하는 마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온통 자신의 외면적인 삶에 집중되어 있었지만 이 사람의 기도는 자신의 내면적인 세계를 바라보는데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수많은 악, 그리고 불결, 견디기 힘든 더러움 이런 것들을 내면의 세계에서 다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아파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는 이런 진실한 기도입니다. 자기를 깊이 낮추는 그래서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 말고는 내게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진실한 고백과 마음,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간절히 필요로 하시는 마음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기도가 막힌 기도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누구의 기도를 받고 단숨에 문이 열릴 것 같은 그런 기대보다는 자기가 인격적으로 하나님 앞에 주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그리고 자기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없이 살 수 없다라고 하는 마음으로 그 은혜의 문을 두드리는 것, 이것이 기도의 문을 여는 가장 중요한 비결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세리의 기도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는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깨닫는 사실이 있습니다. 실제로 의로운 사람은 세리가 아니라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랬는데 예수님께서 의롭다 하신 사람이 이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잘 사는 것도 훌륭한 의인데 인간이 그렇게 얻는 그 의는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 주시는 은혜의 의에는 비할 수 없이 작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언제나 부담입니다. 세리는 죄 가운데서 일생을 살아왔는데 한번에 자기를 낮추고 통회하며 하나님을 갈망하는 기도로 주님이 그 죄를 싹 씻어주셔서 너는 이제 의롭다. 그리고 돌아가게 만드셨는데 바리새인은 그런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불공평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불공평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은혜의 법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의롭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 이것은 기도에 있어서 가로막고 있는 모든 죄를 치워주시고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법으로 교통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셨다고 하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리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이래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의 문이 막힌 사람들에게 주님이 이렇게 우리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향한 갈망으로 자기를 겸비하게 낮추고 주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그 의를 갈망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 오늘도 기도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4. 끈기 가운데 풀린 원한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18:7-8)
이 비유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불의 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입니다. 옛날부터 과부에게는 억울한 사연이 많습니다. 정말 억울해서도 그랬겠지만 또 마음에 남편이 없이 사니까 이렇게 나를 막 대하나 하는데서 오는 그런 설음도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많이 억울한 일을 당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때부터도 이 과부들을 특별히 잘 이렇게 돌봐주는 그런 사역이 교회에 늘 있어왔습니다.
뭔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억울한 사연을 당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판관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불의 합니다. 불의 할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가서 계속해서 내 원한을 풀어달라고 이 재판관에게 계속해서 끈질기게 간청했더니 재판관이 내가 비록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저런 여자쯤 무시할 수 있는 재판관이지만 그러나 만약에 이것을 안 풀어주면 계속 와서 나를 귀찮게 할텐데 어떻게 하나. 그렇게 해주어야지 되겠다. 이게 이제 스토리의 전부입니다. 간단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싶으셨던 것이 두 가지였습니다. 그것이 오늘 1절에 나타나고 또 7절에 설명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여기에서 이제 우리들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기도에 있어서 두 가지 적이 있는데 하나는 낙망하는 것과, 그리고 또 하나는 기도를 쉽게 포기하는 것 이것이 기도 생활에 있어서 두 가지 커다란 적이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낙망한다”라고 하는 것은 기도에 있어서 아주 치명적입니다. 기도할 때에 아무리 그 기도가 열렬하다고 할지라도 그 열렬함이 믿음에 기초한 열렬함이 아니면 이교도의 열심과 방불한 것입니다.
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왜 절에서 “삼 천 배”라고 하는 것을 합니다. 상상도 안 갑니다. 결혼한지 얼마 안 된 자매들이 요즘이야 누가 그렇게 합니까 만은 옛날에는 큰절을 했습니다. 왜 이렇게 다리를 모으고 뒤로 털석 앉아서 하는 옆에서 도와주어야 하는 그 절을 대소가에 인사를 하고 나면 앓아서 눕는다고 하는데 삼 천 배, 그것도 하루에 10번씩 해서 일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연속해서 삼 천 배인데 그것을 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온 몸에 땀이 비오듯하면서 삼천 하고 그 자리에서 개구리처럼 퍼져버리는 것입니다. 이교도의 열심입니다. 뭐 삼 천 번을 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말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그런 결심을 가지고 새벽 기도를 나와도 아마 교회가 많이 부흥할 것입니다. 삼 천 배는 이교도의 열심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있는데 기도가 열렬하다고 할지라도 그 열렬함이 기초가 무엇인가 하면 믿음입니다. 믿음은 우리들이 기도할 때에 꼭 가져야 된다라고 하는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내가 기도하면 이게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 믿음입니다. 그래서 안 믿어질수록 사람들이 믿는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그리고 아예 하나님이 들어주실 생각도 안 하는데 들어주신 것을 믿고 감사헌금까지 드립니다. 하나님께 족쇄를 채워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잘 들어보십시오.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이 주실 것이다 고 굳게 믿는 믿음보다도 더 주요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관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 하나님은 아버지 시고 나는 그의 자녀라고 하는 관계에 대한 믿음이 견고할 때에 그 하나님이 내게 주실 것이라고 하는 그 믿음이 의미가 있는 것이지, 그것을 잘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면서 여러분들이 믿었는데 안 된 적이 굉장히 많을 것입니다. 별로 동의를 안 하시는데 믿었는데 안 된 적이 많은 적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 기초가 되는 믿음은 없고 그것입니다. 내가 지금 뭐가 갖고 싶은데 하나님이 그것을 주실 것을 꼭 믿습니다. 그런 믿음은 허공에 매달린 믿음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그것을 갖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이 나에게 확신을 갖도록 스스로 강요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암시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그런 식의 믿음을 가르치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꼭 믿었는데, 믿으면 꼭 된다고 가르침을 받았는데 믿었는데 별로 된 것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 해답을 찾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겨자씨 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산을 명하여 옮기라 하여도 그 산이 옮겨질 것이오.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결국은 무조건 저 산이 사라질 것을 나는 굳게 믿는다. 믿기만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관계에 대한 믿음이 먼저 기초를 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산을 옮긴다면 그 산을 누가 옮겨줍니까? 왜 대답을 못하십니까? 산이 있는데 그 믿음으로 옮긴다고 그러면 누가 옮겨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못해도 하나님이 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믿음이 선행되고 그 위에 하나님이 그 관계에 대한 확신 속에서 나에게 이런 것들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내게 이런 것을 주실 것이다 라고 하는 그 믿음이 정상적인 믿음이지, 아버지와 자녀로서의 관계는 다 파괴되었는데 어느 한순간에 눈이 번뜩 떠져서 그것이 갖고 싶으니까 하나님이 꼭 주실 것을 믿습니다 고 하면서 믿습니다 를 연발하고 또 시인해야 한다고 이 사람, 저 사람을 찾아다니며 하나님이 꼭 주실 것이라고 감사헌금까지 낸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 족쇄에 채어지실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낙망의 정체가 바로 그것입니다. 낙망의 정체가 무엇인가 하면 관계에 대한 믿음이 심하게 약화되거나 깨트려진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그가 아무리 열렬히 기도한다고 할지라도 그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관계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시고, 나는 그의 사랑 받는 아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하는 관계에 대한 깊은 믿음, 이것이 모든 열렬한 기도 생활에 기초입니다. 그것을 계속 유지해 나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보십시오. 어제 설교와 연결을 지어서 말씀드리자면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낼 때에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런 화목을 좀 잃어버리고 살아갈 때에도 내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기도가 열렬함을 얻게 되는가 하면 내가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 속에서,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그런 것이 있을 때에 그때에 비로소 우리의 기도가 아주 열렬하고 뜨거운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낙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용돈보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당연하기에 물어보는 것 자체가 바보 같은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용돈 주는 현금 인출기입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런 관계가 기초가 될 때에 열렬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관계가 쉽게 낙망하면 결국 그런 관계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자기 혼자 있다라고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상황을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털썩 주저앉는 것이 낙망입니다. 낙망은 믿음과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 생활에 있어서 잃어버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대적입니다.
그래서 아주 좋은 기도 생활을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기초는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것인데 그것은 단지 기도하는 한 시간에만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전체적인 삶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어느 한 기도하는 그 시간에서만 문제가 아니라.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하나님과의 관계를 늘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낙망하지 않습니다. 누구 말대로 얼마나 담대한 표현입니까. 나를 하나님이 사셨는데 주님이 지켜주시겠지. 그렇지 않아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어서 고난을 당하다가 죽으면 이 힘든 세상을 마감하고 하나님께로 가니까 감사하지. 이렇게 하셔도 저렇게 하셔도 내 인생은 어차피 손해볼 것이 없는 인생입니다. 얼마나 담대합니까?
그것은 어디에서 나오는 확신인가 하면 기도 응답이 이루어지건 이루어지지 않건 내가 이런 처지에 있던 저런 처지에 있던 아무래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소원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도 그래도 하나님은 내게 계시다. 그때 사람은 낙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데 낙망하지 않습니다. 그것입니다. 낙망하는 것이 우리에게 늘 이 기도 생활에 힘을 잃어버리게 하는 주요한 첫 번째 요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인데 하나님도 안 두려워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데도 이렇게 들어줄 수 있었다면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너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 관계를 계속 붙들며 살면 하나님이 왜 너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가 무엇인가 하면 항상 기도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열정적으로 기도하는 어떤 계기를 갖는 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감격과도 유사합니다. 어느 한순간에 십자가의 감격을 맛보는 사람이 있지만 맛보는 것 가지고는 안 되고 계속해서 그 감격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도하며”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이따금씩 하나님 앞에 열렬히 간구 하는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언제나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하나님께서 마음에 주신 기도에 제목이 성취될 때까지 간절히 부르짖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입니다.
그 뒤편의 7절에 보니까 무엇이 나오는가 하면 하물며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시지 않겠는가. 똑같이 반복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은 택하신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에 있는 소원을 들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밤낮 부르짖는 자, 그래서 결국은 그 기도의 제목이 간절해지다가 못해서 그것을 들어주시지 않으시면 이 가슴에 맺힌 멍울이 풀어지지 않을 것 같은 원한이 되는 것, 그런 상태를 여기에서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믿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보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보겠느냐 할 때에 예수님께서 마지막 시대에 보고 싶으셨던 믿음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않는 그런 믿음이 주님이 보시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예화: 어린 소년이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를 통해 산에 금이 많이 묻혀있다는 전설을 듣고 어른이되어 금을 캐러 갔는데 그 산에는 많은 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고 금을 캐러 왔으나 발견하지 못하고 갔는데 이 소년이 금을 캐러 가서 오랜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인부의 소리를 듣고 갱도에 내려가 보니 곡괭이가 땅속에 묻혀 있었다는 이야기)
앞에 있는 사람들이 파다가, 파다가 금이 안 나오는데 한번 찍었는데 금속으로 쑥 들어간 것입니다. 빼다가 안 빼지니까 나와버렸고 세월이 흐르면서 지각의 변동이 일어나면서 갱도가 무너지면서 완전히 꽉 채워진 산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거기까지 파고 안 팠는데, 그것만 잡아당겼으면 옛날 사람들도 금을 캘 수 있었는데 그러다가 그만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끈질기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면 그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응답되고 나면 우리 자신도 놀랍게 바뀐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 속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5. 환경을 이기는 기도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예수님의 생애의 기록 가운데 특별히 기도에 관한 기록들이 풍부하게 나옵니다. 그 중에 마가복음 1장 35절에 나와 있는 이 기도의 대한 기록은 우리에게 특별한 감명을 줍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여기에 나오는 기도는 그 바로 앞부분에 보면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고 그리고 병든 자를 치료하고 또 복음을 전하고 하는 사역의 내용들이 앞에 쭉 나오고 틀림없이 이것은 이제 시간적으로 그 다음에 일어났던 사건을 묘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앞부분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베드로의 장모를 심방 하시고 고치시고 그리고 수소에 돌아왔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여러 가지 병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에는 오늘날과 같이 의학이 발달되지 않을 때니까 아마 더 많이 예수님을 의지하여야 했을 것입니다. 그 병자들을 오늘 성경에 보면 일일이 고쳐주셨다 그랬습니다. 아마 밤늦은 시간, 심하면 새벽까지 그렇게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돌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이제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예수님 홀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환경을 넘어서는 예수님의 기도 생활입니다. 우리가 환경을 넘어선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예수님은 기도의 열심히 그 환경들을 뛰어넘으시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그러나 또한 인간이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오늘 날 경험하고 있는 이런 연약함을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과 상관이 없이 모두 겪고 계신 분이었습니다. 잠을 안자면 피곤하고 많이 일하면 힘들고 주리면 배가 고프시고 물 마시지 않으시면 목마르신 그런 평범한 인간의 몸을 가지셨습니다. 그런 분이 그 전날에 많은 노고를 딛고 이처럼 새벽 시간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장면은 우리에게 커다란 감동을 줍니다.
늘 능력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산유수와 같이 가르치시던 예수님의 기름진 사역 이면에는 늘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세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정말 우리에게 안타까운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지만 소낙비처럼 기도합니다. 은혜를 받았을 때는 열렬히 기도하지만 그러나 이런 특별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자연스럽게 기도를 잊어버립니다. 그러니까 다른 방면에서 아무리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이런 기도의 성실함이 없으니까 하나님께로부터 한번 받은 은혜를 계속 간직하면서 죄와 유혹을 이기고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게 되는 이런 복된 생활들이 계속해서 이어지기가 힘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 힘든 것입니다.
육체의 건강을 꾸준히 유지하며 사는 것도 보통 부지런한 성실함과 인내를 요구하게 합니다. 오늘처럼 우리들이 새벽 기도에 나오는 시간에도 어떤 사람들은 관악산에 오르고 어떤 사람들은 헬스클럽에서 부지런히 자기의 몸을 다집니다. 한 시간씩 혹은 두 시간씩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기의 건강을 위해서 일합니다. 하물며 육체보다도 훨씬 더 정미하고 그리고 신기한 영혼의 건강을 유지하면서 사는 그 일이 결코 쉬울 리가 없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들이 매일매일 쉼 없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리고 바쁘고 고단한 생활 가운데서도 우리 하나님과 이렇게 홀로 주님을 대면하며 대화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의 많은 환경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새벽같이 7시면 나갔다가 저녁 밤 10-11시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씻고 일어나면 밥 먹고 직장에 가기 바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사업도 그렇습니다. 집안에 살림, 아이들 그렇습니다. 그것은 모두 이야기하는, 저는 여러분들의 목자로서 참 그럴 수밖에 없겠다 그렇게 동의를 해주지만 영적 생활의 건강함이라고 하는 것은 목회자가 심정적으로 동정해준다고 해서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적으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데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이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것은 아주 분명한 것입니다.
(예화: 체질적으로 건강하셨는데 체중이 불어서 스포츠 센타에 회원이 되어서 다니시는데그때 막 교회를 개척하신 후라 너무나 힘이 들어서 다니시다가 그만두신 이후로 시간이 없어서 운동을 하실 수가 없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벌써 현저하게 나타났습니다. 밤마다 생각에 해야지 되는데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가 하면 교인들도 이렇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밤마다 기도해야지 되는데 기도해야지 되는데, 그러면서 실제로는 안 하는 것과 똑같이 그럴 수 있겠구나 그러면서 나도 못 내리는 결단을 누구보고 내리라고 하는가. 어제 밤에도 잠을 한숨도 못 잤습니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나서 교회를 하고도 몇 년까지 집회를 굉장히 많이 다녔습니다. 진짜 살인적일 정도로 많이 다녔습니다. 그래도 다 버텼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그 전통적 부흥회, 새벽, 그 다음에 오전, 밤 하는 곳에 한번 가면 한 이틀정도 집회를 하고 나면 코에서 단내가 납니다. 침대에 드러누워 있으면 다리가 덜덜 떨립니다. 그래서 생각을 합니다. ‘야 늙는다는 것이 이렇게 현저하구나. 한 5년 전만 해도 펄펄 날랐는데 벌써 이제 50을 바라보는데 이렇구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이제느끼는 것은 ‘아! 내가 만약에 좀더 운동을 하고 체력을 잘 관리하는 것을 매일매일 투자를 하면 이보다 훨씬 나을텐데’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기도 생활도 역시 똑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은 펄펄 나는데 실제로 우리의 영적인 삶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결국은 매일 하는 기도 생활, 그래서 우리는 성격자체가 화끈합니다. 정말 화끈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 화끈한 것은 세계에서 알아줍니다. 고추를 좋아하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참 화끈합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영적 생활에 있어서 좋은 점도 아주 많은데 나쁜 점도 아주 많습니다. 기도를 할 때도 항상 매일매일 영적인 건강을 위해서 자기를 쭉 쏟아 붓는 일정 시간을 갖는다는 그런 경건 생활보다는 뭔가 한번 생애 적인 기도를 해보고 싶은 이런 화끈한 생각만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화끈한 사람이 평소에는 많이 개기면서 사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주님오기 괴롬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세월이 흘러갈수록 아주 뼈마디까지 파고 들어오는 그 간절함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이렇게 약하구나. 정말 아무 것도 아니구나. 인간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신앙이 없으면 허무주의에 빠지지만 신앙이 있으면 주님밖에는 의지할 분이 없다라고 하는 믿음이 굳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 정말 주님밖에 없구나. 참 이렇게 연약한 것이 인간입니다. 주님밖에는 의지할 분이 없고 하나님의 은혜, 위로부터 내리는 아버지의 은총 말고는 우리가 정말 기대할 수 없구나.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면서도 그 아버지의 은총을 의지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그 표현이 이렇게 이른 새벽마다 고단하고 고통스러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는 기도 생활을 통해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가는 그 날까지 우리는 긴장을 풀 수가 없습니다. 그대로 그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만큼이면 됐다 하는 믿음, 이 만큼이면 이제 괜찮지 하는 이런 신앙, 그런 영적 생활 안전함은 없습니다. 죽는 그날까지 매순간 우리는 너무나 약하고 하나님의 은혜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다라고 하는 마음으로 매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매일매일 기도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부탁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면 내친김에 계속해서 새벽기도 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나오고도 생활이 되잖아요. 갑자기 무슨 과로해서 코피를 흘리고 쓰러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어떤 것을 삶에 있어서 희생을 감수해야 할 중요한 원칙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이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경험은 새벽, 이때 기도하는 시간을 놓치면 거의 기도하기가 힘든 것이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공통된 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새벽에 이렇게 기도하신 이유는 오늘 성경에도 보십시오. 새벽에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서 기도하고 계신데 제자들이 거기까지 쫓아옵니다. 일이 생기니까. 일이 이만큼 예수님을 계속해서 따라다니면서 놓아주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아직 일이 당신을 찾아오지 못하는 새벽 미명의 시간에 주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서 하루를 여시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도 그 예수님 생각을 했습니다.
(예화: 잠이 오지 않아 새벽에서야 잠이 드셨는데 경비 업체에서 비상벨이 울렸다며 전화가 온 내용)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없이 살면서도 이렇게 새벽에 기도하기가 힘든데 예수님은 일생을 사시면서 편한 것과는 거리가 멀고 안락함과는 거리가 먼 일생을 사셨는데 그러면서도 그 힘든 복음 사역에 자기를 다 소진하시고 이 새벽에 당신보다도 더 어린 제자들은 지쳐서 잠들고 있을 때에 조용히 걸어나오셔서 새벽에 들판으로 나아가시며 기도할 처소를 찾으시는 주님이 이슬을 맞으시는 그 뒷모습을 생각하니 우리들이 얼마나 쉽게쉽게 살아가고 싶어하는가. 정말 우리에게 십자가가 있는가.
중국에 갔을 때 성도가 한국에서 온 교인들에게 물어보는데 우리는 이러이러한 십자가를 지고 있는데 그렇게 모든 믿음의 자유가 보장된 거기에서도 십자가가 있습니까? 당신의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할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보니까 십자가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없는 것이 아니라 안 진 것입니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기 싫을 때 예수님 생각을 해보십시오. 하루종일 자신을 쏟아 붓는 사역을 하시고 새벽에 제자들이 잠들어 있는 밤 살며시 일어나서 그래서 이슬이 내리는 새벽 벌판으로 나아가는 그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이렇게 모범을 보여주신 것은 우리도 그 뒤를 어느 정도 따라오게 함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하는 솔직한 말씀은. 제가 거짓말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아실 것입니다. 나는 주일날 여기가 꽉 차는 것보다 새벽에 여기가 꽉 차면 춤을 추며 다니겠습니다. 정말 춤을 추며 다니겠습니다. 새벽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도례와 자신의 변화와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이 여기저기 가득하다면 여기에 몇 배 가득 찬 주일의 교인,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서의 정체성도 오락가락 하는 그런 사람들로 교회당이 가득 차는 것보다는 그런 사모함이 기도에 은혜로 가득 찬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매달릴 때 지옥의 권세는 새벽마다 흔들릴 것이고 이 땅의 어두움의 세력들은 새벽마다 성도들의 기도 소리에 벼락을 맞을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이 메마른 교회에 시대에 이런 일들이 너무나 필요합니다. 더욱이 오늘 조국의 교회에서는 교회 중심이 되어야 할 일군들조차도 기도에 게으른 것을 보면서 우리 주님이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파하실까. 그래서 기도할 때에 우리가 항상 십자가를 지는 마음으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새벽에 기도하러 나와서 천국의 이슬로 우리의 영혼이 흠뻑 젖으면 하루의 승리는 80%는 보장됩니다. 여러분이 꼭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새벽을 주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돈도 별로 없고 특별한 재능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뼈가 부스러지도록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일도 없으니 하나님 내가 새벽마다 기도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겠습니다. 이런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도의 놀라운 기쁨을 주십니다. 그래서 지치고 곤고할 때에 기도하면서 영혼의 놀라운 소생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위로 속에서 살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그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절망 가운데 드린 기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