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자를 위한 기도
(2012-2013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12-2013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
목 차
믿는 자를 위한 기도 1 (2012.3.21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2 (2012.5.9. 수요예배)
1. 총명은 어디서 오는가(골1:9) 2012.3.21 수요예배 1
믿는 자를 위한 기도 3 (2012.5.30 수요예배)
2. 하나님 뜻을 알게 하심(골1:9) 2012.5.9 수요예배 12
믿는 자를 위한 기도 4 (2012.6.13 수요예배)
3. 범사에 기쁘게 함(골1:10) 2012.6.13 수요예배 21
4. 하나님이 능력을 주심은 1(골1:11) 2012.6.20 수요예배 31
믿는 자를 위한 기도 5 (2012.6.20 수요예배)
5. 하나님이 능력을 주심은 2(골1:12) 2012.13 수요예배 40
믿는 자를 위한 기도 6 (2012.7.11 수요예배)
6. 어둠의 권세에서 건지심(골1:13上) 2012.7.11 수요예배 50
7. 아들 안에서 속량하심(골1:14) 2012.9.19 수요예배 64
믿는 자를 위한 기도 7 (2012.9.18. 수요예배)
8. 창조주의 속량하심(골1:15-16) 2012.9.26 수요예배 73
믿는 자를 위한 기도 8 (2012.9.26. 수요예배)
9. 창조주와 교회의 머리되심(골1:17-18) 2012.10.24 수요예배 86
10. 모든 충만이신 그리스도(골1:13) 2012.12.12 수요예배 100
믿는 자를 위한 기도 09 (2012.10.24 수요예배)
11. 충만의 비밀, 십자가(골1:20) 2013.1.16 수요예배 111
믿는자를 위한 기도 10 (2012.12.12. 수요예배)
12.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사람들(골1:21) 2013.1.23 수요예배 120
믿는자를위한기도 11(2013.01.16 수요예배)
13. 죽음으로 화목하게 하심(골1:22) 2013.2.13 수요예배 130
믿는자를위한기도 12 (2013.01.23. 수요예배)
14. 죽음으로 화목하게 하심(2)(골1:22) 2013.3.6 수요예배 139
믿는 자를 위한 기도 13 (2013.02.13. 수요예배)
15. 견고함과 신자됨(골1:23) 2013.3.13 수요예배 147
믿는 자를 위한 기도 14 (2013.03.06. 수요예배)
16. 복음의 일꾼이 됨(골1:23) 2013.3.27 수요예배 157
믿는 자를 위한 기도 15 (2013.03.13.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1
믿는 자를 위한 기도 1 (2012.3.21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2 (2012.5.9.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3 (2012.5.30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4 (2012.6.13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5 (2012.6.20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6 (2012.7.11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7 (2012.9.18.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8 (2012.9.26.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09 (2012.10.24 수요예배)
믿는자를 위한 기도 10 (2012.12.12. 수요예배)
믿는자를위한기도 11(2013.01.16 수요예배)
믿는자를위한기도 12 (2013.01.23.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13 (2013.02.13.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14 (2013.03.06.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15 (2013.03.13.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16 (2013.03.27. 수요예배)
1.총명은 어디서 오는가
I. 본문해설
II. 바울에게 들린 소식
- 예수 안에 있는 믿음
-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
III. 골로새교회를 위한 기도
A.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의 충만
1. 아는 것의 충만
- 채워짐: 수동태
- 아는것: ἐπίγνωσιν-전지식
2. 신학 지식의 목적
- 신적 의지를 분별함
- 살기 위한 지식임으로
- 순종할 힘: 은혜를 통해서
B. 신적 의지에 대한 지식
1. 신령한 지혜로써
a. ‘신령한’의미: πνευματικῇ
- 존재: 이성의 추론을 초월하는
- 방식: 물질의 유추를 초월하는
- 인식: 성령의 비췸을 요청하는
b. 하나님의 지혜
- 하나님 경륜의 원인
- 지혜의 대상: 세계와 인간
- 지혜의 발현: 구원의 행동
2. 신령한 총명으로써
a. ‘총명’의 의미: συνέσει
- 종교적, 도덕적 영역의 지식
- 통찰(눅2:47), 이해력(막12:33)
b. ‘총명’의 원인
- ‘신적지혜’를 앎
- 그 인식 결과로 생겨난 판단력
IV. 살려는 것만큼 알고자 함
V.결론
2.하나님 뜻을 알게 하심
I. 본문해설
II. 지혜와 총명의 목적
A. 신적 의지에 대한 지식을 얻음
1. ἐπίγνωσιν: ‘온전한 지식’
- 정확한 지식
–초월적이고 도덕적인 일과 관련
2. θελήματος: 단수 ‘뜻, 의지’
- 많은 목표와 하나인 목적
B. 신령한 지혜와 총명
1. 진리의 기준점을 가짐
–존재와 가치의 허위를 드러냄
–진리: 존재와 인식에 걸쳐있음
–객관적 지식+주관적 인식
2. 성령의 작용에 참여함
–믿게 하시는 성령의 작용
–계시를 경험 속에서 받아들임
III. 우리 자신이 지식으로 채워짐
- 그리스도인의 모든 견고함
-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온전한 앎
- 그 앎은 전존재적 경험에 속함
- 온전한 앎은 범위가 아닌 정도임
- 구원은 창조 위에, 완성은 구원 위에 세월 질 때
가장 온전하게 됨
- 그 지식이 체계를 갖추어 신적의지를 알고 실현하게 함
IV. 결론: 경외함의 진수로 돌아가라
3.범사에 기쁘시게 함
I. 본문해설
II. 지혜와 총명의 결과를 구함
A. 주께 합당히 행함
B. 범사에 기쁘시게 함
C. 선한 일에 열매를 맺음
D.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람
III. 결론
4.하나님이 능력을 주심은(1)
I. 본문해설
II. 능력을 구하는 기도
A. 성도들을 위하여
- 거룩한 생활을 위한 자원
–돌보나 돌봄에서 오지 않음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능함
–영혼의 은혜가 필요함
B. 능력이 주어지는 근원
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 κατὰ τὸ κράτος τῆς δόξης
- “그의 영광스러운 주권을 따라”
- 성령의 능력과 은혜주심의 주권
–겸비하고 통회하는자 기뻐하심
–능력주시면 당신께 순종하기에
2.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심
–ἐν πάσῃ δυνάμει δυναμούμενοι
- “모든 능력으로 힘있게 되어”
III. 능력이 주어지는 의도(1)
- δυναμούμενοι~εἰς: ~에 대하여 힘있게 하다
A. 견딤에 이르게 함
B. 오래참음에 이르게 함
C. 기쁨으로 감당하게 함
- 신령한 기쁨과 사랑
–기쁨, 사랑의 열매
IV. 결론
5.하나님이 능력을 주심은(2)
I. 본문해설
II. 성도에게 능력을 주심은
A. 감사하게 하시려고
- 감사: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함
–신적관계에 대한 행복과 만족
B. 감사하여할 이유들
1. 빛 가운데로 부르심
- ‘그 빛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 신학적 빛과 윤리적 빛 안에서
2. 거룩한 기업에 합당하게 하심
1) 합당하게 하신 방식
–그리스도를 통하려 구속하심
- 그의 몸에 접붙여 지체되게 함
2) 기업을 얻게 하신 방식
–성부가 성자에게 주신 기업
–성자의 신부인 교회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기업을 누리게 함
3. 아버지께 감사함
1) “하나님 아버지”의 두 의미
–위격으로서의 아버지
–신적본질로서의 아버지
2) 삼위가 함께 아버지 되심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시면서도 성도들과 관계 를 맺으심에 있어서 얘지되심
–타락한 인간이 상정한 아버지
–성경의 묘사하는 아버지
3) 그 아버지를 누리며 살게하심
III. 결론: 그 능력을 사모함
6.어둠의 권세에서 건지심
I. 본문해설
II. 신자의 지위와 그리스도의 중보
A. 신자의 지위
- 양자됨: 자유, 명분, 담대함, 징계
–유업에 참여하는 권세
B.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함
- 구속: 유업받음과 누림
–모두에 있어 그리스도를 의지함
–성령을 통하게 하심: 삼위일체적
III. 흑암의 권세에서 건지심
A. “흑암”(σκότους)
- 신학적(무지와 오류, 인간기준)
- 윤리적(무도와 불법: 사랑없음)
B. “권세”(ἐξουσία)
- 어둠은 빛의 없음: 흑암에너지
–빛이 오면 사라짐
–진리의 힘과 어둠의 힘: 객관적인 진리를 마음으로 붙들
때 진리의 힘을 인식하게 됨(악과 어둠도 동일)
- 객관적 어둠을 주관적으로 붙들고 사랑할 때 악의 힘이
생겨남
C. ‘건져내사“(ἐρρύσατο)
- 이끌어내다, 구출하다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심
–진리의 빛 + 사랑의 힘으로
IV.결론
7.아들 안에서 속량하심
I. 본문 해설
II. 우리의 죄를 사하심
A. 속량하심(ἀπολύτρωσιν)
- 속량의 의미
- 속전의 지불
- 희생과 자유
B. 죄를 사하심(ἄφεσιν)
- 용서: 사랑의 흐름
- 피해를 당한 편에서
- 항상 희생을 동반함
C. 그 아들 안에서
- 아들의 희생 안에서
- 아들과의 연합 안에서
III. 적용과 결론
8.창조주의 속량하심
I. 본문 해설
II. 구속주의 정체
A. 하나님의 형상
-‘형상’; 구약 39회, 신약18회
-두 용례: 사물의 형상 + 하나님과의 닮음
-성육신; 하나님의 형상의 가시적 현현
B. 피조물보다 먼저 나심
-단순한 시간적 먼저 나심이 아님
-삼위일체 안에서의 나심과 밖에서의 나심
-하나님의 나심과 피조물의 태어남
III. 창조주이신 그리스도
A. 창조의 삼위일체 사역
-성부에 의하여,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B. 그로 말미암아 창조됨
-보이는 것들: 지상적 사물
-보이지 않는 것들: 천상적 사물
IV. 창조와 구속의 관계
A.구속의 필요성: 타락
- 폐기되지 않는 창조의 목적
- 피조물들이 스스로 돌아갈 수 없음
- 저주 아래 있는 세계와 인간
- 죄에 대한 속량이 회복의 출발
B. 구속의 삼위일체 사역
-성부에 의하여,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죄인을 구속하심
-교회를 만드심
V. 적용과 결론
9.창조주와 교회의 머리되심
I. 본문 해설
II. 세계와 그리스도의 계심
- 만물보다 먼저 계심
- 만물을 창조하심: 존재근거
- 만물을 유지하심: 현존근거
III. 교회의 머리가 되심
- 부활 승천 후에 상급으로 되심
A. 만물의 근본이심: arke
- 아르케: 처음, 머리, 맏이, 원리
- 창조의 근원이시어 그로부터 만물이 유래함
- 재창조의 머리가 되심: 제2아담
B. 죽은자들 중 처음나심
- 초태생(prototokos): 애굽재앙
- 재창조의 생명을 처음 받으심
C. 만물의 으뜸이 되려하심
1. 만물의 완전한 상태를 회복시킴
- 개별적 사물의 완전성
- 보편적 질서의 완전성
2. 완전한 상태의 정점: 머리되심
D. 먼저 교회의 머리가 되심
-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뜻을 따름
- 사랑을 주셔서 사랑하게 하심
- 이기심 없는 사랑 안에서 가장 합당하게 사랑 받으심
- 완전한 머리+이루어 가는 몸
IV. 적용과 결론
10.모든 충만이신 그리스도
I. 본문의 배경
II. 충만이란 무엇인가
A. pleroma의 어의
- plerow에서 옴: 성취하다, 완성하다
- 플레로마: 성취, 완성
B. 신학적 의미
1.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
- 삼위일체 안에서의 작정
- 시간 속에서의 경륜을 통한 실행
2. 충만의 두 범주
- 천상세계와 지상세계
- 지상세계: 교회와 세상+자연계
III. 예수 안에 두신 충만
A. 선재하시는 그리스도
-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의 지성
- 하나님의 로고스이심
- 말씀 성취의 중보자가 되심
B. 창조와 구속의 중보자가 되심
- 창조: 시간과 함께한 충만의 시작
- 구속: 그리스도를 통한 충만 과정
- "한 알의 밀알"이심: 완성의 전개
- 실현 방식: 십자가 죽음+복음
C. 완성의 중보자가 되심
- 두 국면: 구속의 완성+창조 계승
- 의존: 변함 없는 그리스도의 중보
IV. 적용과 결론
- 그리스도 안에 접혀 있는 하나님의 계획
- 그리스도를 앎이 모든 경륜을 아는 길
-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 의존을 배움
11. 충만의 비밀, 십자가
I. 본문해설
- 충만(pleroma)과 그리스도
-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성취
- 창조와 구속 안에서: 인간+자연
- 교회를 통한 구속 계획의 실현
II. 충만과 불화의 해결
A. 창조 목적의 좌절
- 창조세계의 선한상태: 조화, 화목
- 인간의 범죄로 인한 관계의 파괴
- 대신, 대인, 대자연과의 관계에서
- 창조 목적은 좌질 되지 않음
B. 창조 목적의 눈부신 발현
- 불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 관계가 파괴된 순서대로 회복하심
- 눈부신 하나님의 속성들의 나타남
- 십자가를 통한 이신칭의 길을 여심
III. 십자가와 충만의 비밀
A. 화목을 기뻐하신 하나님
- 하나님 자신과의 화목
- 지상과 천상의 모든 것들
- 화목: 의도하신 사랑의 관계회복
B. 십자가로 충만을 이루심
- 그리스도의 피는 생명의 죽음 의미
- 십자가는 충만을 위한 신적계획임
- 우주적 구속을 통한 충만
- 교회적 생명을 통한 충만
- 그리스도의 중보를 의지하게 하심
IV. 적용과 결론
- 십자가는 종교적 도피가 아님
- 우주적 구속의 경륜과 교회의 설립
- 현재 세상과 새로운 세계와의 대조
- 십자가는 위대한 하나님의 지혜임
12.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들
I. 본문해설
- 만물을 자신에게로 화목케 하심
- 인간의 타락으로 도입된 불화
- 하나님, 인간(영육), 자연만물
II. 신적 화목이 필요한 인간
A. 거리감과 원수됨
1. 거리감()
- 분사, 현재완료, 수동태
- 멀리하다, 이간질하다, 정떼다
- 친밀함, 영혼의 익숙함 상실함
2. 원수됨()
- 미움()에서 유래함
- 적의를 품은, 적대적인, 미워함
- 원하는 것을 못하게 하시기에
- 본성 깊이 배어, 연습할 필요×
B. 거리감과 원수된 방식
1. 악한 행실들에 의하여
- 그 악()의 행실들
- 그 악은 단수, 행실들은 복수임
- 타락한 인간의 행실들: 악을 향함
- 대적, 악: 자기 주인 삼아 살아감
2. 마음 안에서 원수됨
- 그 마음(): 생각, 성질, 의향, 이해, 목적, 지각, 뜻
- 와 의 차이
- 확신의 오류: 모든 해석을 지배함
-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 아니함"
- 지성의 화해가 필요: 직관+추론
III. 스스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
- 절망적인 인간의 상태: 영적 측면
- 이것을 감춘 채 살아감: 무시, 회피
- 인생과 인류의 근본 문제: 해결×
- 고통 속에 지혜를 찾음: 철학, 사상
- 궁극적 해결불가, 물질번영, 빈궁
IV. 적용과 결론
-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신적 해결책
- 하나님의 지혜, 십자가로 충만을
- 십자가, 하나님의 우주적 지혜임
- 화목 안에 사는 길: 복음의 삶
13. 죽음으로 화목하게 하심
I. 본문해설
II. 원수들과 화목하심
A. 죽음이 꼭 필요했는가?
- 가설적 필요설: 신적선택
- 결과적 절대적 필요설: 신적필연
- 하나님께 필연 없음, 스스로 매임
B. 죽음이 필요했던 이유
- 엄정한 공의 보임: 두려움
- 무한한 사랑 보임: 사랑
- 구원의 두 성격: 은총성, 의존성
- 거룩하게 살게 하심: 예수와 연합
III. 화목의 계획: 사랑+삶
- 인간이 단절한 관계를 다시 이으심
- 구원에 있어서 은총의 선도적 성격
A. 온전한 인간을 만드심
- 온전한 사람: 창조 목적 실현 위해
- 거룩하고+흠 없고+책망할 것 없음
- 참된 신자됨⇒온전한 사람 되려고
- 은혜, 진리 안에서 자람: 벧후5:18
B.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심
- “세우고자”(παραστῆσαι): 곁에 섬
- 히브리“아마드”(עָמַד): 서리요
- 소극적: 파멸 아닌 기쁨의 대상임
- 적극적: 주 앞에 의도된 삶 살아감
IV. 적용과 결론
14. 죽음으로 화목하게 하심(2)
I. 본문해설
II. 화목의 계획: 사랑+삶
- 인간이 단절한 관계를 다시 이으심
- 구원에 있어서 은총의 선도적 성격
A. 온전한 인간을 만드심
- 온전한 사람: 창조목적 실현위해
- 거룩하고+흠 없고+책망할 것 없음
- 참된 신자 됨⇒온전한 사람 되려고
- 은혜, 진리 안에서 자람: 벧후5:18
B.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심
- “세우고자”(παραστῆσαι): 곁에 섬
- 히브리“아마드”(עָמַד): 서리요
- 소극적: 파멸 아닌 기쁨의 대상임
- 적극적: 주 앞에 의도된 삶 살아감
III. 적용과 결론
15. 견고함과 신자됨
I. 본문해설
- 그리스도를 통한 화목
- 하나님과의 화목의 목적
- 거룩함+흠없음+책망없음
II. 그리스도를 닮게 하심
A. 믿음 안에 거함
-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
- 찬동+의존+신뢰
B. 터 위에 굳게 섬
-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엡2:20)
- 복음의 도리의 기초 위에 있음
- 역사의 흐름 안에 있는 우리 신앙
- 신앙의 보편성과 개별성 생각함
C. 복음 소망에 확고함
-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음
- 복음이란? Jesus died for us.
- 소망이란? 보다 나은 상태을 바람
- 복음의 소망:
1. 소망 곧 부활로 인하여 (행23:6)
2. 하늘에 쌓은 소망 (천국, 골1:5)
3. 열방 다스리는 이에 소망 둠 (그리스도, 롬15:12)
4. 영생의 소망을 위함 (딛1:2)
III. 적용과 결론
- 구원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심
- 믿음에 견고하여야함
- 흔들리는 자에게 열매 없음
- 단호한 결심+하나님은혜
- 지식과 은혜 안에서 자라감
16. 복음의 일꾼이 됨
I. 본문해설
II. 복음의 일꾼이 됨
A. 그리스도를 앎
- 믿음의 중심이신 그리스도
- 구원 계획의 중심, 그리스도
- 모든 창조와 구원의 비밀이심
-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로 드러남
B. 복음의 의미를 앎
- X가 인류의 기쁜소식이 됨을 앎
- 하나님의 일꾼: 복음을 경험함
- 십자가와 부활+예수 주되심을 앎
- 복음전파+복음사상체계에 매임
III. 천하 만민에 전파됨
- 사울의 회심(35년경)후 약 30년
- 위대한 30년의 시기: 복음전파
- 어둠에 있는 수많은 인류를 깨움
- 단순한 회심이 아니라 삶의 체계
- 유대와 이방인: 다른 방식 삶 도입
- 영적부흥+그리스도의 주되심
IV. 적용과 결론
- 복음의 일꾼들이 많이 생겨나길
- 복음의 충만한 영적부흥
-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앎
믿는 자를 위한 기도 1
믿는 자를 위한 기도 1 (2012.3.21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2 (2012.5.9.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3 (2012.5.30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4 (2012.6.13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5 (2012.6.20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6 (2012.7.11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7 (2012.9.18.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8 (2012.9.26.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09 (2012.10.24 수요예배)
믿는자를 위한 기도 10 (2012.12.12. 수요예배)
믿는자를위한기도 11(2013.01.16 수요예배)
믿는자를위한기도 12 (2013.01.23.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13 (2013.02.13.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14 (2013.03.06.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15 (2013.03.13. 수요예배)
믿는 자를 위한 기도 16 (2013.03.27. 수요예배)
1. 총명은 어디서 오는가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 1:9)
녹취자: 김세나
I. 본문해설
골로새서는 사도바울이 골로새에 있는 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골로새 교회는 사도바울이 세운 교회 같지는 않습니다. 많은 학자들은 오히려 그 교회는 사도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졌을 것이라 보고 아마도 에바브로디도가 골로새 교회를 세운 주요 인물이 아니었을까 추측을 합니다.
Ⅱ. 바울에게 들린 소식
사도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보낸 것은 그들로부터 오는 무슨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소식은 나쁜 소식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이 신앙을 지키고 훌륭한 믿음과 무엇보다도 성도를 향한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골로새 지방은 당시 영지주의라고 하는 이단이 아주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역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굳건히 하고 있다는 소식을 사도바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성도들에 대한 사랑, 즉 교회 안에서 많은 성도들이 함께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서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선행을 행한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런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사도바울은 로마의 옥에 갇혀서 고난을 당하고 있었고, 이때가 아마도 61년 주후에서 63년 사이에 되지 않았을까 추측을 합니다. 그렇게 보면 사도바울이 사도가 된지도 상당히 많은 세월이 흘러 이제 그도 노년에 접어들게 되었고 죽음을 눈앞에 둘지도 모르는 옥살이를 하면서 그의 마음에는 골로새 교회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적잖은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여러분에 대한 소문이 목회자에게 들릴 때, 목회자에게 이렇게 소망과 위로를 느끼게 해 주는 성도들입니까? 아니면 근심과 걱정을 불러일으키는 성도들입니까? 우리 주님에게 여러분이 믿음 생활하는 소식이 들릴 때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는 성도들입니까? 걱정을 끼치는 성도입니까? 우리 모두 주님의 마음에 목회자의 마음에 이러한 감사를 불러일으키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III. 골로새교회를 위한 기도
12절뿐만 아니라 뒤에 있는 구절까지 사도가 하나님 앞에 올리는 기도문이며 찬송시와 같은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9절에 나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풀어 보려고 합니다.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여기에서 사도바울이 그러한 소식을 들었는데, 그것을 들은 날부터 사도바울 일행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전에도 물론 기도하였겠지만 이러한 기쁜 소식을 들은 후 목회자인 사도바울의 마음가운데 기쁨이 솟으면서 그들이 더욱 신앙생활을 잘하게 되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는데,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간구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근심과 걱정을 끼쳐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걱정스러운 교회가 아니라 기쁨과 감사로 기도하게 만들었던 빌립보 교회의 경우와 유사한 상황이었습니다. 근심과 염려가 되는 일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지만, 기쁨과 감사의 소식이 들릴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A.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의 충만
1. 아는 것의 충만
이 골로새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내용을 들어가 보십시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번역이 그리 썩 좋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가득 채우게 하시고.” 문제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에서 ‘에’ 가 ‘엔’(εν) 이란 전치사인데 ‘안에’라는 뜻도 되지만, 있다가 해설을 들어 보시면 알겠지만 ‘안에’라고 번역이 되는 것 보다는 성경 많은 곳에서 ‘엔’(εν) 이라는 단어가 ‘무엇 무엇을 가지고’ ‘무엇 무엇으로서’ 이렇게 즐겨 사용하는 전치사입니다. 예를 들자면, 물과 성령으로 라는 말은 ‘물과 성령에’ 가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써’ 라는 뜻입니다. 그러한 번역입니다. 그런데 제일 먼저 그의 뜻을 아는 지식의 충만을 구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써 채우게 하시고.” 아는 것의 충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희랍어 성경에 보면 수동태로 나옵니다. 그래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교인들에게 채워짐을 받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아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희랍어 성경에는 지식이라는 말 앞에 “에피”(επι)라는 말이 붙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전체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아는 것, 혹은 포괄적 지식, 혹은 전체적 지식 아니면 완전한 지식, 이렇게 번역을 해야 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지식으로 가득 채워지게 하시고 라는 뜻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신학지식이라고 말한다면, 다시 말해서 인간이 태어나서 신학이라는 말을 알든지 모르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에 관해서 무엇인가 아는 지식은 신지식, 혹은 신학 지식입니다. 그 신학지식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에 관해서 지식을 갖는 모든 목적은 결국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우리가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왜 기독교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지 못해서 안타까워하는 그러한 종교이겠습니까.
오늘날은 그렇지 않지만, 제대로 된 교회의 시대로 돌아가 보면 교회의 가장 큰 의무는 일생동안 성도를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 교회에 와서 하여야 할 가장 커다란 의무가 봉사가 아니라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성도들은 배우고, 교회는 가르치고, 성도들 중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반드시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에 이바지하여야 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아주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 수 있는 은사를 주신 사람들은 그렇게 영혼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하지 않는 것은 매우 커다란 불순종이고 그러한 삶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기독교 신앙은 신앙을 갖는 그 순간부터 학교에 입학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평생을 하나님에 대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도 뭐라고 말했습니까. 저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더라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을 배우게 하려 하셨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보면 불완전하고 혹시 구원을 받았다 할지라도 여전히 무지와 어두움으로 가득 찬 우리는 끊임없이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단지 책을 펴고 칠판을 펴고 이성을 사용하는 학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기도할 때, 진리의 말씀을 갖고 씨름할 때, 인간의 지성과 지혜로서는 깨달을 수 없는 아주 높은 지식들을 갖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 모든 배움이 학습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가장 의무이고, 인간의 모든 고통의 궁극적인 원인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모르는데 있습니다. 이제 오늘 설교를 통해서 사실은 자기의 삶과 가장 동떨어져 보이는 그 지식이 자신의 삶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여러분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의 고통은 다양해도 그 모든 고통의 궁극적인 뿌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데 있고, 하나님 안에서 인간들이 누리는 행복들은 다양해 보여도 그 뿌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엄중한 심판이 뒤따르는 죄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것은 스스로 알지 아니하기로 선택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가장 뚜렷한 증거이고,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적대감의 가장 확실한 나타남입니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커다란 죄이고, 그것은 하나님께 손해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인생에 가장 현실적인 손해를 끼치는 악행입니다.
2. 신학 지식의 목적
하나님에 관한 모든 앎을 우리들이 신학지식, 혹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라고 부른다면, 그 지식의 목적은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즐거워하는 것에 있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러한 목적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신적 의지를 분별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해 부지런히 탐구하고 아는 모든 목적은 하나님의 의지가 무엇인가. 이 세계를 향한 우리를 향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을 분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뜻을 거슬러 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목적은 살기 위한 목적입니다. 자신이 인간으로서 살기 위한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기 자신으로 하여금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하는 매우 중요한 하나의 도구와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목적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목적인데,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알아도 그렇게 못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비극을 핵심적으로 요약하자면 둘입니다. 그것은 첫째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는데 그렇게 살 힘이 없는 것, 두 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지식 안에서 순종하게 하는 은혜의 힘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알아가는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사람은 항상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목적 자체가 사는 것인데, 아는 것만으로는 그렇게 살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에 관해서 그렇게 알면 알수록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아주 간절히 은혜를 구하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골로새 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하게 되기를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 곧 당신의 의지를 아는 지식으로 골로새 교회 교인들의 마음을 가득 채워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충만하게 채워지도록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한 때는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복음 때문에 감격했을 지라도 그들이 이후로도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사도는 아주 간절히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그들에게 가득 채워 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B. 신적 의지에 대한 지식
1. 신령한 지혜로써
이 하나님의 신적 의지에 대한 지식이 곧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이것에 대해서 사도는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신령한 지혜로써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신령한 총명으로써 얻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신령하다는 말이 아주 많이 나오는데, 이 신령하다는 말, ‘프뉴마티케’(πνευματικη)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시간에 여러분이 배워둔다면 성경을 읽을 때마다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신령하다는 것입니까. 그런 의미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선 제일 먼저 ‘신령하다’는 뜻은 무슨 뜻인가 하면 어떤 존재가 인간이 상식으로 따져서 알 수 없는 그 너머에 있을 때 신령하다고 부릅니다. 예를 들자면, 물질이나 이 세상에 있는 만지고 느낄 수 있는 물건들을 보고는 우리들이 신령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으로 따져서 캘 수 없는 훨씬 그것을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신령하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는 방식인데, 물질들의 경우에 물질들이 작용하고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우리들이 물질의 원리를 터득하고 이해하는데, 이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고 움직일 때, 이것들을 우리들은 신령하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바람이 후~하고 불면 흔들립니다. 바람이 있기 때문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흔드는 방법은 바람이 와서 나뭇가지를 흔드는 방법과는 다른 흔들림입니다. 아무도 부채를 부치거나 선풍기를 틀지 않아도 그것과 상관없이 인간의 마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방식 자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신령하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또 하나는 성령의 비추심이 없이는 인식할 수 없을 때, 이것을 신령하다고 부릅니다. 이러한 의미가 바로 신령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의 지혜를 신령한 지혜라고 묘사합니다. 이 신령한 지혜는 하나님 안에 있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는 신령한 지혜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추론할 수 없고 물질을 보면서 이해하는 정신만을 가지고는 미루어 짐작할 수 없고, 성령의 비추어 주심이 없이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는 거듭난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지혜이고, 성령을 받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지혜이지, 이 ‘신령한’ 의 반대인 ‘육적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어렴풋이 알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존재나 하나님의 신령한 지혜 같은 것들을 이해할 수 없도록 처음부터 차단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삶의 지혜를 갖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그 지혜에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도달할 수 없는 지혜를 기나긴 세월동안 역사속에서 인간들이 맨 지성으로 한번 그 지혜를 찾아보자고 몸부림친 것이 인간의 사상과 철학의 역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거듭난다고 하는 것은 그를 신령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단지 죄를 용서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자신의 육적인 생각과 육신에 사로잡힌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세계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안목과 이해력을 갖게 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비로소 인간이 참답게 사는 지혜가 무엇이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는 신령한 세계에 대한 지혜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의 눈으로 알 수 없고,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힘 있게 전파되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니까 자신들의 종교적인 입지가 흔들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처럼 만들어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로마 사람들은 다수의 유대인들에게 잘 보이려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협조했습니다. 마귀는 그러한 사람들보다 훨씬 영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잠시 있다가 사라졌던 이전의 많은 유대교 이단과 종파의 가르침과 같지 않고 매우 커다란 영적인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여 많은 백성들을 자신들의 지배에서 해방시키려는 계획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이 마귀는 이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유혹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그 일을 못하게 하도록 광야에서 시험을 하였고 그 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로 돌아가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도록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그 끔찍한 일들을 성취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놀라운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마귀조차도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면 그것이 자신으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구원의 역사를 도입하는 것이며, 예수를 죽이는 것이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커다란 실수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럴 정도로 하나님의 지혜는 숨겨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는 오래 전부터 창세전부터 감취어진 것이라 했습니다. 그 감취어진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에 나타낸바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신앙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 안에 있는 지혜를 직접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것은 언제나 후발적 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행동을 보면, 다시 말해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성경 말씀과 연결시키며 그것을 탐구해 가는 가운데 하나님이 무슨 일을 위해서 이런 일들을 경륜해 오셨고, 그리고 경륜하고 계시는가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경륜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가지고 세상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자기의 목적들을 이루어 가는 것을 가리켜 우리는 경륜이라고 부릅니다. 경륜의 대상이 누구인가 하면 세계와 인간들입니다. 세계와 인간들을 향해 하나님이 당신의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경륜을 펼치시면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죄인들을 구원하신 당신의 영원한 계획을 드러내시는데, 그 드러나는 계획을 통해서 창세전부터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가 밝혀지고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도저히 창조 목적으로 돌아올 수 없는 비참한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행동을 통해서 창세전부터 감추어져 있던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죄 짓기 전이라고 할지라도 그가 우리만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 창조의 계획을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령한 지혜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뜻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믿고 성경 말씀을 의지하게 될 때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서 세계가 무엇이고, 왜 하나님이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사람 몸 입고 오시면서 까지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셨을까 하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2. 신령한 총명으로써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는 데에는 지혜뿐만 아니라 신령한 총명을 가지고 하십니다. 총명은 희랍어로 모든 물건들에 대한 지식이라기보다는 종교,와 도덕적인 영력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아는 것을 가리켜서 이 단어를 사용했고, 누가복음 2장 47절에는 ‘통찰’, 마가복음 12장 43절에는 ‘이해력’을 의미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총명은 우리들이 흔히 공부를 잘 하거나 하면, 얘는 참 총명하구나 라고 말합니다. 그런 종류의 총명이 아닙니다. 그 때 말하는 총명은 물리를 깨우치는 지식의 지적인 능력의 크기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총명은 하나님의 지혜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면 그 결과로 생겨나는 판단력입니다. 즉 지식이 많고도 총명이 거의 없을 수 있고, 혹은 지식이 현저히 부족한데도 아주 또렷한 총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지식도 많고 총명도 많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지식이 아주 많아도 총명이 현저히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총명은 하나님의 지혜를 아는 데서 생겨나는 판단력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혹시 이런 경우 보지 않습니까. 남들을 가르칠 때 그렇게 현명하던 사람이 자기가 어떤 상황에 빠지게 되면 바보처럼 행동하고 갈팡질팡 행동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이론으로는 알고 있지만, 판단력이 흐려진 것입니다. 그 판단력이 흐려지게 되면 매우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지적인 능력이 모자라면 잘못하게 되지만, 총명이 부족하게 되면 매우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어느 길을 간다고 할 때 지적인 능력이 모자라면 생각을 잘 못해서 다른 길로 들어설 수 있지만, 판단력이 모자라면 가야하는데 안 가고, 그리 가면 안 되는데 가는 이러한 잘못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총명입니다. 총명은 불변하도록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변적입니다. 총명은 태양과 같아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에 사람이 눈으로 쳐다 볼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게 비추고, 옷을 벗고 있으면 살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탈 정도로 광선이 뜨겁게 강렬합니다. 그러나 구름이 가리어지게 되면 그 빛이 있는지 태양이 떠있는지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움이 들이우고 그 광명이 사라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총명의 가변성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이러한 해석을 토대로 적용을 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잘 하고 싶어 합니다. 좋은 신앙을 갖고 싶어 합니다. 큰 믿음을 갖고 싶어 합니다. 때로는 강한 믿음을 갖고 싶어 합니다.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큰 믿음, 강한 믿음을 갖고 싶어 하는 것입니까. 또한 하나님에 관해 배웁니다. 그래서 교리를 통해 성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우고, 성경을 읽으면서 배운 교리가 어떻게 성경을 이해하는데 적용되는지를 배우고 그 성경 속에서 진리의 말씀을 찾아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찾아내려고 애 씁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매일 매일 알아가려고 힘씁니다. 무엇을 위한 목적입니까. 좋은 믿음에 대해서 하나님이 커다란 보상을 해 줄 것을 기대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최고의 보상은 잘 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 모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사는 것과 아는 것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사실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살려는 것만큼만 사람들은 알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대로 살려고 분투하지 않으면 마음속에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이 이런 분입니다, 저런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저것입니다 라고 가르쳐주는 그 자체가 이 사람에게는 짜증이 나고 아주 싫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데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다, 저것이라고 세밀하게 가르쳐 주면 가르쳐 줄수록 세금내기 싫은 사람에게 날라 오는 고지서 같은 것 아닙니까. 그래서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고자 삶의 실천과 의욕이 없는 사람들은 함께 진리의 빛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알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지난주에도 잠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육체가 꿈지럭 거리고 움직여야지만 배가 고픈 것처럼 영혼이 출렁거리고 움직여야지만 이 진리를 알고 싶은 그 진리에 대한 식욕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욕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고 이런 저런 일로 봉사하고, 이렇게 저렇게 헌신하면서 살아도 영혼은 꼼짝도 안 하고 마음속에 누워 있는 채 그 모든 일들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식으로 살아가면 그 사람이 진리에 대한 진리를 알고 싶고 사랑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열망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가 정말 어리석고 무지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를 깨우쳐 주시고 인도해 주셔야 한다는 절실한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나는 갈 길을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라고 눈물을 흘리며 찬송하는 사람들은 피 나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그 길을 가려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찬송을 부릅니다.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아무렇게나 한 세상 살면 되지 뭐가 이렇게 복잡해 나갈 때 자기 맘대로 다니는 사람들은 이런 찬송 백 번 찬송을 불러도 눈물이 안 나옵니다. 제가 왜 예배 시간에 여러분이 졸거나 딴 생각하거나 심지어는 예배 시간에 여러분이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심하게 타박을 하고 도전을 하는지 아십니까. 앞으로 문제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예배에 나오기까지의 삶이 이미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배의 자리는 문제가 된 그 삶을 갱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이대로 살다가 죽을 거야 하고 돌진을 하는 완고함의 태도라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꿈지럭 거리고 조는 것이 죄이기 때문에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산 것 만큼만 예배드릴 수 있고 예배드릴 수 있는 만큼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미 잘못한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은 회개하고 말씀에 다시 은혜를 받아서 총명과 지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지식으로 마음이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신앙의 대의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치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무슨 거리가 있는 것처럼 내가 순종하고 잘 하면 어떤 보상이 나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기대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 그 자체가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없는 인간들,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불행과 죄의 결과로 말미암는 비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자신의 힘으로는 돌아올 수 없게 하는 인간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한 방법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렇게 구원해 주셨을 때에는 우리의 행복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모순이나 갈등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과 우리의 행복 사이에 있는 모순과 갈등이라는 것은 잠시 다른 사람의 악 때문에 혹은 나 자신의 잘못된 이해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잠시 이 세상에서 악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여도 그들에게는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있지만, 악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가고자 하는 목적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안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가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 자체가 토막토막 나누어 진 것이 아니라 하나로 통일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 뜻을 이해한 만큼만 자기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한다는 사실을 절박하게 느끼고 그렇게 은혜를 받은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고 사는 사람들만이 하나님 안에 있는 행복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갑니다. 사람의 지문만큼이나 다양한 문제들을 만납니다. 이 사람은 돈이 없어서 가난해서 고통을 받습니다. 저 사람은 있는데 질병이 들어서 고통을 받습니다. 이 사람은 돈도 있고 건강한데 또 다른 인간관계의 문제가 있어서 고통을 받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세 가지는 다 있는데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결함 때문에 고통을 받고 다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데 자기 자신이 마음이 일그러져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버림받는다고 생각하고 지극히 남이 부러워하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짓밟히고 학대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왜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향해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이런 이야기들이 들려 올 때 자기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이야기 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자기가 고통 받는 문제에 관한 그 문제를 다루는 그 답들은 대부분 일시적인 진통제이거나 혹은 정확한 답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문제의 몰두를 해도 해결도 되지 않거니와, 해결이 되는 것 같아도 이번에는 또 다른 문제가 붉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한번 우리의 신앙생활의 과거를 회고해 보십시오. 늘 말씀 드리지만, 예수 믿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들은 절대로 믿지 않고 믿어야 될 이유가 있는 사람들, 믿지 않고는 도저히 인생을 살 수 없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믿습니다. 오죽했으면 믿었겠습니까. 왜 인간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내가 죄인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나는 저주 받은 인간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은 자기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자기의 인생을 지탱해 왔던 주권 자체를 포기하고 반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할 짓입니까. 이게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감동 없이는 죽어도 예수를 믿을 수도 없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십자가 앞에서 진실 되게 고백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떠한 말씀이 여러분 인생의 돈, 인간관계, 질병, 무지 이런 많은 요인들로 말미암아서 이제는 도저히 자기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벼랑 끝에까지 내몰려서 이제는 아무데도 더 이상 갈 데 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된 여러분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듣고 현실적으로 그 벼랑 끝에서 무릎을 꿇고 울면서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게 만들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왜 네가 돈을 못 벌었는지 가르쳐줄까?’ 그리고 투자에 실패한 이치를 설명할 때에 무릎을 치면서 내가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까. 질병에 걸렸을 때, 다른 사람들은 건강한데 왜 너는 암에 걸리게 되었는지를 의학적으로 설명을 해서 ‘아, 그것이 나의 가장 큰 실수였구나. 그 나쁜 음식을 계속 먹는 잘못된 식생활 때문에 이렇게까지 왔구나.’ 땅을 치며 눈물을 흘리며 후회할 그 때에 여러분이 죄인 받으소서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깨어진 가족과 인간관계 때문에 괴로워할 때 너희 가정의 불행의 원인이 뭔지, 너희 엄마는 뭘 잘못했고, 개념 없는 너희 아버지는 뭘 잘못했는지 가르쳐주었을 때 아, 이게 우리의 합작품이구나. 죄의 비율로 따지면 엄마가 60%, 아빠가 30%‘ 내가 10%라고 깨달았을 때 죄인이라고 무릎을 꿇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지식 때문에 무릎을 꿇고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돈에 몰려서 미치고 가서 당장 강도라도 할 지경에 있는 사람에게 예수 죽은 것이 무슨 그 자기 삶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문제입니까. 지금 당장 질병에 걸려서 사선을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이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자신의 현실적인 고민과는 멀리 떨어지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지식 때문에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껏 자기 혼자 고집하며 살았던 인생의 길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뉘우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왜 그런지 아주 조금만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리들이 돈 때문에 고통 받는 문제, 질병 때문에 고통 받는 문제, 인간관계 때문에 고통 받는 문제, 무지와 혹은 불결한 환경 때문에 고통을 받는 문제들은 서로 비슷하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돈 없는 모든 사람이 인간관계 때문에 고통 받는 것 아니고 그리고 인간관계로 괴로움 때문에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이 죽을 병 걸리는 것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양새는 각각 달라도 그 뿌리를 내려가면 마지막에는 하나입니다. 이렇게 꽃잎이 막 맺혔어도 내려가면 하나의 뿌리에서 진액을 받아가며 생겨난 것처럼 고통의 열매는 다양해도 뿌리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나는 내 인생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이구나.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죄 이구나. 이 뿌리에 와 닿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인 문제는 이 궁극적인 문제에 관하여 답을 못 줍니다. 나는 이제 정말 내 죄가 나를 삼킬 것 같아서 죽을 것 같다고 할 때, 5만 원짜리 돈다발을 가져다주면서 너 빚 다 갚아 라고 할 때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
(찬양)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 이 말은 그 궁극적인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벼락을 치는 것 같은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아주 현실적인 문제를 비현실적인 지식이 해결해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틀림없이 나는 지금 땅에 코 박고, 돈 때문에, 인간관계 때문에, 이런 저런 문제 때문에 마음 둘 곳 없고 쓰라리고 괴로워 죽겠는데 무슨 도사들 이야기 하는 것처럼 신령한 지식이, 뭐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그런데 사실은 거기에 답이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깊이 회개하고 깨달은 다음에 깨닫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나의 인생의 문제는 돈이 없기 때문에 아니라, 질병 때문이 아니라, 못된 인간들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못 배웠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못 맺었기 때문이고, 결국은 내가 하나님이 누구인지 몰랐기 때문이구나. 그리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라도 가르쳐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깊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 골로새서를 잘 읽어보면 엄청나게 웅장한 철학적인 글입니다. 에베소서와 쌍벽을 이루는 철학적인 글입니다. 그런데 가장 현실적인 편지입니다. 세상을 이길 힘은 세상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은 어디에서부터 옵니까. 그렇습니다. 하늘로부터 나옵니다. 하늘로부터. 그래서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V.결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마지막으로 아주 간절히 내 심장을 배 보자기로 꽉 짜는 마음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인생에서 아주 말초적인 문제 때문에 즉, 돈 때문에, 질병 때문에, 인간관계 때문에, 여러 가지 세상에서 나오는 고통 때문에 도저히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해야 할 일은 문제가 일어난 곳에는 답이 없다고 믿어야 합니다. 문제가 일어난 그곳에는 답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문제가 일어난 곳에서 답을 찾지 말고, 문제 너머에 있는 곳에서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금 여러분이 당하는 그 고통과 괴로움을 놀랍게 사용하셔서 언젠가 여러분이 괴로움과 고통을 당한 것을 하나님 앞에 찬송하게 되는 날이 속히 오도록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놀라운 지혜입니다. 제가 이렇게 강력한 표현을 설교에서 사용한 것도 많지 않습니다. 내 심장을 배 보자기에 넣고 막대기 두 개로 짜는 심정으로 간곡히 말하는데, 여러분으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하는데 쏟지 못하도록 만드는 문제가 일어난 그곳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보 같은 사람들이 거기에 코 박고 거기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는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답이 없습니다. 찾으면 찾을수록 비참하게 짓밟히고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믿음으로 산다는 말의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뭐라고 합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너희가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에 것을 구하라. 답은 문제가 생긴 그 맨바닥에는 답이 없습니다. 내가 문제가 일어난 이 현실에 몰두를 해도 답을 찾을까 말까한데 내가 그런 것을 어떻게 신경 쓸 여유가 있으랴, 거기에 사실은 답이 있는 것입니다. 놀라운 답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입니다.
(찬양) 마지막 피 한 방울 날 위해 흘리셨네
우리가 옛날에 다 그렇다는 사실을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죄와 이 진리로부터의 무관심, 영원에 대한 무관심이 이것을 잊어버리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짐승처럼 문제가 일어난 그 곳에 코를 박고 거기에서 해결의 열쇠를 찾기 위해서 상처받은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을 찌르고 찔림 당한 인간들이 또 다른 인간들을 찌르면서 궁핍에 탐욕을 더하면서 막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눈을 들어서 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해답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사람들이 요즘은 좀 덜합니다. 옛날에는 빙빙 돌려서 나에게 요청합니다. ‘목사님, 현실적인 설교를 좀 해 주십시오.’ 그런데 가장 비현실적인 설교가 가장 현실적인 설교입니다. 그리고 가장 비현실적인 설교에 꺾어질 때, 현실적인 비참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이 그곳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방황하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나서 내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할 때, 돈 버는 방법 터득했다, 병 안 걸리는 방법 터득했다, 사람 처세술 배웠다고 하는 사람 있습니까. 그게 아닙니다. 내가 어리석었습니다. 모든 문제는 나에게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고백을 하면서 주님을 의지하고 살아갈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마지막으로 이렇게 목사님, 당신의 설교는 너무 보편적이고 제 상황은 너무 특별합니다. 당신의 설교는 너무 추상적이고, 제 삶의 문제는 너무 구체적입니다. 당신은 신령한 세계를 해매지만, 나는 비참한 세상을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러는 사람에게 내가 한 마디의 충고를 함으로써 이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말씀에 의지해서 충고 한 마디를 하려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도록 여러분 차원으로 내려오도록 기대하지 말고 오히려 눈을 들어서 이러한 가장 현실적인 문제가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캐 들어가 봐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답이 현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것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던 눈이 열리면서 나는 곤고한 사람이요, 버림받은 사람이라 생각했으나 계속되었던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 나는 주 앞에서 버림 받았다고 생각했으나 주님이 나를 용납하시는 그 큰 구원의 은혜, 이 모든 자비와 사랑이 계속 되어 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기도하면 언젠가 가장 현실적인 곳에서 치열하게 답을 찾으려고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면서까지 찾으려고 했지만 답을 얻지 못할 때 정말 신령한 세계에 답이 있구나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여러분을 구원해 주실 뿐만 아니라 이제 일생을 어떻게 살아야 될지에 대한 놀라운 지혜도 여러분에게 주실 것이니 그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의지하며 구원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 뜻을 알게 하심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 1:9)
I. 본문해설
사도바울은 종종 서신서의 머리 부분에서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기록하곤 하였습니다. 에베소서에서도 그랬고, 빌립보서에서도 그랬듯이 오늘 여기에서도 이들을 위한 자신의 기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미 지혜와 총명을 구하는 기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물론 오래 되었습니다. 3월에 하고 건너뛰었는데 그렇기 때문에 반복하지는 않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9절 하반 절에 주목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중요한 뜻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이제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는데 이 지혜와 총명은 신령한 지혜와 총명입니다.
II. 지혜와 총명의 목적
A. 신적 의지에 대한 지식을 얻음
1. θελήματος: 단수 ‘뜻, 의지’
이 지혜와 총명을 주시는 목적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 바로 지혜와 총명을 주시는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신적 지혜와 총명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라고 할 때, 여기에서 뜻이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델레마토스’(θεληματος)라고 하는 단어인데 성경 전체에서 이 단어는 항상 단수로 사용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은 많은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뜻입니다. 사실 우리의 실제의 경험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환경과 관련된 하나님의 뜻들이 아주 많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여러 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이 드러났고, 저렇게 하는 것이 뜻임이 드러났고,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에 복 주심이 하나님의 뜻임이 드러났고, 세월이 지나고 나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내 마음 속에는 옳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었다는 것으로 결론이 나기도 하고 등등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계신데, 어떻게 여기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라고 나올까. 왜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이 단수로 나올까. 그것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목표들이 많이 있지만, 그 많은 목표는 모두 하나의 목적을 이루는데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예화) 전쟁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전쟁을 하면 수많은 부대들이 적군과 전투를 하게 되고 그 전투를 원만하게 수행하게 하기 위해서 군수품을 만드는 공장부터 시작을 해서 그리고 무기를 생산하는 공장, 그리고 길을 닦고 그리고 도로들을 고치고 하는 그러한 공사와 관련된 일들까지 많은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각각의 현장은 각각의 목표를 갖게 됩니다. 그러면 공병대는 몇 월 며칠까지 활주로를 닦으라는 명령을 받을 때, 그것을 목표로 삼고 모든 자원과 그리고 일력을 동원해서 어쨌든 비행기 활주로를 만들기 위해서 박차를 가합니다. 그런가 하면 탄약을 생산하는 공장에서는 몇 월 며칠까지 몇 십만 톤의 탄약을 생산하라 그러면 그것을 위해서 온전히 수고 합니다. 이러한 식으로 각각의 모든 현장들이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그 많은 목표는 한 가지 궁극적인 목적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전쟁에서 적군을 무찌르고 이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도 하나님이 다양한 시기마다 각각 여러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지막으로 그것들은 모두 연결이 되어서 단 하나,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는 그러한 단 하나의 목표, 목적, 이것을 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작은 목표들 하나하나에 각 사람들이 충성하게 될 때 그 목표들이 어우러지면서 하나의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어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고, 이 세상을 완성하고자 하는 목적일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이 그것을 창조하실 때에 가졌던 그 목적을 반드시 이루고야 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때로는 불순종하게 되면 그 계획이 지연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아주 지혜로운 방법으로 인간의 불순종까지 반역까지 사용하셔서 당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 가지고 계셨던 목적들을 성취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향해 가지고 계신 뜻들이 단수이기 때문에 이 뜻을 알게 하실 목적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하나님이 이러한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주셨으면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발견하지 못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총명하지 못한 사람들은 발견하지 못한 하나님의 의지를 발견하고 그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따라서 살아가서 삶의 낭비가 없게 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을 주신 목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종 하나님은 누군가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그래서 남보다 더 정확한 판단력으로 돈을 벌게 하실 수도 있고, 공부를 더 잘 할 수도 있고, 어떤 사업의 위기를 만나지 않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수많은 목표들 중 하나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아닌 것입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그러한 지혜와 판단력을 주셔서 일시적으로 무엇인가를 잘 하게 하실 수도 있고, 성과를 거두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것으로 만족하게 하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지혜와 총명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오늘 여기에서는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라고 말하면서 본성적인 지혜와 총명과 다르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ἐπίγνωσιν: ‘온전한 지식’
여기에서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동명사로 나오는데 희랍어 성경에서는 명사로 나옵니다. ‘에피그노시스’(επιγνωσις)라고 하는 단어인데 ‘에피’(επι)는 ‘전체, 전부’ 이런 뜻이고, ‘그노시스’(γνωσις)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희랍 사람들에게 정확한 지식, 완전한 지식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이 지식이 자연적인 사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초월적이고 도덕적인 어떤 일들과 관련된 지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라고 했는데 그것이 아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차게 되기를 바란다. 무엇을 사용해서?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사용해서. 그래서 이것을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로 하여금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차게 하시기를 원한다. 채워지는 것이 내 안에 채워지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을 주시는 것은 당신의 의지를 알려 주시기 위함이고, 당신의 의지를 알려 주시는 것은 순종하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그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 어떻게 획득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B. 신령한 지혜와 총명
1. 진리의 기준점을 가짐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의 기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미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지혜 중의 가장 탁월한 지혜가 무엇이라 했습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얻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 2장을 한 20주 정도 강해하는 동안에 아주 깊이 파헤친 적이 있습니다. 이 지혜가 무엇인가 하면 옛날 그리스 시대부터 사람들이 추구해왔던 철학입니다. 오늘날은 철학 하면 사람들이 고리타분하게 따지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는 이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지만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 이것에 대한 답이 철학입니다. 이 문제는 아주 사변적인 문제가 아니라 가장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왜 우리가 악을 행하면 안 되고 선을 행해야 하는가. 이런 등등의 문제들이 아주 실제적인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미 그것에 대한 답을 십자가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왜, 십자가는 단순해 보이지만, 이 십자가가 왜 우리에게 필요했는가를 풀 때 거기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도 나오고 왜, 성부 성자 성령께서 구속 언약을 맺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도 나오고,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도 나오고,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된다는 것도 나오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도 나옵니다. 왜, 거기에서 하나님께로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 사람으로서 이웃을 섬기고 봉사해서 결국은 그들도 예수님 안에서 한 사랑을 누리게 하는 것,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십자가가 단순해 보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로부터 왔고, 그리고 어디로 가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모든 것들이 모두 다 거기에서 해답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자신 있게 사도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철학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지혜는 바로 그러한 의미의 지혜이고, 총명은 판단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을 다 주셨다는 것입니다. 구원 얻은 모든 사람들에게 이 지혜인 십자가의 비밀을 알게 해 주셨고, 또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서 하나님이 아주 명료한 판단력을 갖게끔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그 지혜와 그 총명을 항상 완전하게 간직하고 있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총명이 흐려진 것이고, 지혜가 흐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만약에 그러한 가변성이 없다면 하나님이 이러한 명령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 사도바울이 에베소서에서 에베소 교회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 아니, 하나님이 이미 지혜를 주셨고 십자가를 통해서 지혜를 주셨고, 총명하게 된 사람인데 만약에 그 지혜와 총명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면 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고 경고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의 중심성을 깊이 깨달은 후에 이 십자가가 우리의 인생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는지를 깨달았고 또 성령 충만해서 아주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의 꾀에 속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하더라도 항상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탁월하게 지혜롭던 사람이 미련하게 되고 아주 눈부신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흐려지는 일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 진리의 기준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가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가치가 되어야 합니다. 거기에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그러니까 이제 하나님이 십자가의 비밀을 가르쳐 주시고, 성령 충만하여 아주 분명한 총명을 우리에게 갖게 해 주셨을 때에 진리의 기준점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존재, 하나님이 가장 높으신 분이고 그 다음에 나는 그 하나님 앞에 아주 낮은 존재이고 구원의 은총을 입은 사람일 뿐이라는 판단을 갖으면서 하나님 앞에 온전히 복종하고 순종하는 그 마음의 자세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흐려집니다. 그러면 지혜도 사라지고, 총명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 그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오직 진리가 그의 마음을 환하게 비출 때 그 때에 이러한 순서, 하나님이 가장 높으신 분이고 나는 낮은 존재이고, 사람이 중요한 존재이고 물질은 그 아래라고 하는 이러한 가치의 질서들이 흔들리지 않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무너집니다. 그리고 진리를 발견하게 되고 말씀으로 돌아가면 반드시 이 십자가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의 최종적인 답이고 그리고 이 십자가와 진리의 빛 아래서 우리들이 모든 것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오늘날 보면 심지어 그리스도인조차도 공직생활을 하면서 뇌물을 받아서 그렇게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부끄럽게 하고, 이번에 저축은행 사건을 보면서 아무 개념도 없는 사람입니다. 고깃배를 타고 몇 백억을 들고 밤에 도망갈 생각이나 하고 말이지, 이러면서 자기 돈도 아닌 것을 흥청망청 하며 쓰고 하는 것은 진리의 빛을 현저히 떠났기 때문입니다.
2. 성령의 작용에 참여함
그러한 속에서 불쑥불쑥 솟아나는 인간의 욕망들이 이 어두움을 형성하면서 진리의 따른 올바른 판단의 빛을 거두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이 한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신령한 지혜를 얻고 성령 충만하여 총명을 가졌다 할지라도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끝까지 붙들고 있는 동안에만 이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의한 판단력들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것은 신령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작용에 참여함으로써만 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판단할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영적으로 경험하고 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심령에 감화를 주고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는 체험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다시 하나님의 신령한 지혜와 총명 아래로 돌아가게 되고 여기에서 모든 것들을 올바르게 판단하면서 나의 뜻과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혜와 총명의 빛이 사라지면,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생각하고 혹은 자신의 뜻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알아도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뜻을 굽힐 어떠한 의지도 없이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내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늘 성경에 의하면 그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 자신이 가득 차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교리를 공부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경건서적을 읽고 하는 이 모든 일들은 한 가지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더 알기 위해서. 그래서 이러한 지식의 활동이 필요가 별로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망언입니다. 망언. 아주 커다란 망언입니다. 흔히들 이렇게 말합니다. 어차피 지키지도 않을 텐데 그까짓 것 아는 게 뭐 중요하냐 그럽니다. 물론 사실입니다. 알아도 안 지키는 사람이 많습니다. 모르고도 지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화) 수학에 리먼 가설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수학에서 소수라는 것이 있습니다. 1, 3, 5, 7, 11 이런 숫자입니다. 1과 자기 자신 이외에는 숫자로 나눠지지 않는 것, 그것을 소수라고 합니다. 이 수가 1, 3, 5, 7, 11, 13 이렇게 나옵니다. 사람들은 당연히 여기에 규칙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규칙이 없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72개의 숫자가 지나가도록 소수가 안 나옵니다. 이것을 찾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했는데 못 찾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풀다가 미쳤습니다. 그래서 미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뷰티풀 마인드라고 하는 영화에 나오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존 내쉬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그것을 풀었다고 믿었지만, 자신도 그것을 못 풀었습니다. 그런데 그래서 지금도 거기에 도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주 받은 공식입니다. 그런데 한 수학자가 이야기 합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수십 년을 그것을 풀다가 죽어갔는데 자기들도 풀려고 하는데 못 풀 것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풀려고 하느냐 하는데 대답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못 풀 가능성이 아주 많지만, 도전조차 하지 않으면 아예 아무런 확률도 없지 않습니까.
III. 우리 자신이 지식으로 채워짐
여러분,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대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여기에서 말하는 ‘에피그노시스’(επιγνωσις), 온전한 지식이 아닙니다.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제대로 아는 것이라면 그것을 행하기까지 하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무슨 뜻인가 하면 알고도 물론 안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을 행하는 사람은 모두 아는 과정을 거쳐야 하고 행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안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행하든 행하지 않던 하나님의 뜻이 이것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주 나쁜 운전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호등을 안 지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빨간불은 서야 한다는 것, 파란불은 가도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운전 습관이 나빠도 최악의 경우 빨간불인데도 그곳을 돌진하면서도 이 사람은 최소한 이 옆 편에서 가로질러 오는 차가 올 시간이라는 것은 알면서 위반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면서 위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아예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은 신호등 자체에 대한 개념이 없이 질주하는 사람은 자기가 지금 여기를 지나가도 되는 시간인지 안 되는 시간인지 모르고 지나가기 때문에 좌우에서 차가 나올지 아닌지 조차도 모르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항상 주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안 행할지라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지라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소한 그러면 잘못된 다음에 가책이라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견고한 삶은 지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지식이 없이는 어떠한 견고한 삶도 있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조그마한 믿음으로 사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조그마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큰 믿음으로 사는 게 나을까요? 당연히 후자가 낳습니다. 왜, 믿음으로 살지 않으면 아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 믿는 것이 아무리 열렬해도 아는 것이 적으면 위험한 것입니다.
(예화) 학생들을 데리고 겨울에 수련회를 갖습니다. 기도 많이 하고 수련회를 갔는데 좋은 기도원도 아니고 웬 서울에 있는 순복음 교회 계열에 속하는 교회가 지어놓은 말이 기도원이지, 조그마한 창고처럼 해 놓은 예배당 달랑 하나 있는 기도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관리하는 사람이 정말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주일날 떠나서 월, 화, 수, 목요일까지 4박5일 하고 목요일에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뭐라 그러는가 하면 한참 수련회 마지막 날 밤 수요일에 뜨겁게 준비하는데 뭐라 그랬냐 하면 다 가라는 것입니다. 기도원 문을 잠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4박5일 빌렸는데 어딜 가느냐고 했습니다. 4박5일을 빌렸어도 수요일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했더니, 수요일에 본 교회에서 예배 드려야지, 어디 남의 기도원에 와서 예배를 드리냐는 것입니다. 자기는 본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리러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희들만 두고 갈 수 없으니까 너희들도 본 교회로 가서 예배드리고 다시 오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좋은 것 같습니다. 어디에서 하나를 들은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지만 하나님의 복이 있다는 그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은 것입니다. 그것을 꽉 붙들고 목숨을 걸고 사는 것입니다. 나는 하도 말이 안 통해서 물러섰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집사님이 얼굴이 불그락 불그락 하면서 하나님이 본 교회에만 있냐고, 여기에도 계시지 하는데도 이런 데서는 예배를 드리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월요일, 화요일, 목요일 이런 때만 예배드리는 것이지, 수요일, 금요일, 주일 이런 때는 본 교회에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을 잠그고 가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싸우고 생난리가 났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믿음은 좋고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는 강한데 아는 게 너무 없습니다. 그것은 아닌 것입니다.
모든 견고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탄탄한 지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느 곳을 찔러도 움직이지 않는 탄탄한 지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지식의 체계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아주 분명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야기 해 봅시다. 가끔 상담 받고 싶을 때 있지 않습니까. 나한테는 별로 상담이 안 옵니다. 초창기에는 상담을 하겠다고 많이 왔습니다. 상담 하러 오면, 저는 그럽니다. 무슨 문제냐. 제가 어느 교회에 다니는데 목사님 하고 관계가 복잡하고, 그러면 한 10분 들은 다음에 그러면 목자와 양, 그리고 교회 생활 테이프를 두 세트 내지 세 세트 주면서 여기 답이 다 있으니까 다 듣고 오고 그래도 질문이 있으면 1시간 만나 주겠다고 합니다. 당신이 아는 게 너무 없으니까 이야기가 안 통한다, 듣고 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대부분 다시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인은 그럽니다. 상담 온다더니 왜 안 오냐. 목사님, 다 듣고 나니까 다 풀렸습니다. 대부분 여러분 상담을 하고 싶습니다. 조언을 해 주십시오. 그러면 무엇입니까. 무엇을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그것입니다. 우리 남편이 나를 괴롭히고, 우리 아내가 어떻게 하고 장모님이 나를 힘들게 하고, 그래도 결국은 마지막에는 장모님이나, 남편이나 궁금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것이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그것이 결국엔 모든 온전한 삶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 재미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매일 매일 은혜를 받고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가고 교리적인 지식이 쌓여 가면 상담할 것이 별로 없어집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이 상담을 하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저것도 상담 제목이라고 가지고 왔나. 뻔한 것인데. 상담의 필요성이 줄어듭니다. 상담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필요성이 줄어드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지혜와 판단력이 생겨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압니다. 내가 그것을 못한다 할지라도 압니다. 그러면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부산으로 가는 길을 모르면 어떻게 가야하는가 물어보지만 내가 압니다. 내가 가기 싫어서 안 가게 되면, 안 가면 그만이지 가는 길을 물어보지는 않습니다.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가장 커다란 궁금증은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뜻이, 세계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뜻이, 교회에 대해서 가지고 계신 뜻이 무엇이냐 이것에 대한 앎,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커다란 관건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로마서 12장에서 뭐라고 이야기 했는가 하면 너희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 그리고 하는 이야기가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 이것이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 없는 헌신은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이것이 사도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위해 기도했던 첫 번째 기도제목이었던 것입니다. 참 놀랍습니다. 사도바울은 빌립보교회에게도 똑같이 그러합니다. 지식과 총명함으로 너희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지식과 총명 때문에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풍성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는 자기의 교인들에게 무엇을 해줘야 할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교인들에게 해줘야 할 가장 중요한 봉사는 무엇인가 하면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교인들에게 해줘야 할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앎은 이것이 그냥 지식의 차원에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진정한 앎은 전 존재적인 경험에 속한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해 보십시다. 어떤 사람을 깊이 사랑한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뜻대로 모든 것을 해주고 싶은 기꺼운 마음이 내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나 자신을 다 바쳐서라도 저 사람이 원하는 것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의지의 합치입니다. 너무 사랑하면 그 두 사람 사이에 두 가지 목표가 있을 수 없고 한 가지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매들이 보면 결혼하기 전에는 이것도 해 보고 싶고, 저것도 해보고 싶고 하는데 결혼하는데 너무 좋은 형제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가 선교사 된다고 하면 자기의 것 다 접고 선교사 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반대로 자매가 음식점을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할 때, 형제가 선교사 접고 음식점 할 것입니다. 어쨌든 합치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자기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아, 지금 너무 목이 말라서 물을 먹고 싶어 하는 구나, 병상에서. 이것을 알았다. 그런데 나는 당신의 뜻을 분명히 알았지만 그것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이 원하는 의지를 발견하게 되면 내가 원하는 것은 억제할 수 있어도, 그가 원하는 것은 이루어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의 특성입니다. 그러니까 그 앎은 결코 생각과 사변에서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데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앎이요,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온전한 앎은 모든 하나님의 뜻을 다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범위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의 문제입니다. 깊이 그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기의 어떠한 특정한 상황에서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의지들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의지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것들이 지식이 체계를 갖추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그것을 실현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최고의 행복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그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니 하실 때 자유하다라고 하는 말은 모든 속박과 억압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그 속박과 억압을 벗어난 상태는 하나님을 온전히 향하고 하나님 안에 있는 의지가 나의 의지도 되는 것입니다. 나의 의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그 일을 내가 나의 일을 이루고자 하는 것보다 자연스럽고 치열한 욕망으로 그것을 자기의 소원으로 품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욕망의 차원에서 본다면 성화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소원이 우리의 소원이 되게 하는 것이 성화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나의 소원이 되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그 자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 자리에서 내가 가장 커다란 만족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화의 궁극적인 목표인 것입니다. 모든 우리의 불행과 혼란들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나의 원하는 바와 하나님이 원하는바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내 의지대로 관철하고자 하면 하나님을 거슬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관철하고자 하면 내가 심각하게 그것에 거슬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거슬림이 심하면 심할수록 성화에서 멀어진 것이고, 이 거슬림이 약하거나 거의 없으면 없을수록 우리들이 보다 완전한 성화의 상태에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상태의 문제와도 관련이 됩니다. 충분히 성화되지 못하였어도 어느 한순간 은혜를 확 부어져서 자기가 물같이 녹아지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면서 자기의 뜻을 행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완전한 복종과 순종의 욕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IV. 결론: 경외함의 진수로 돌아가라
그러면 한번 정리를 해 보십시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다른 지식을 얻게 하고 교리를 가르쳐 주시고, 성경을 매일 탐구하고, 이렇게 설교를 듣고 들은 설교들을 외우고 이것들을 정리하고 부지런히 학습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순종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순종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그 분께 순종하는 그것이 경외함의 진수라 이것입니다. 경외함의 진수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간구의 제목은 하나님이 주신 지혜, 신령한 지혜와 총명을 언제나 유지하면서 사는 것, 그러면 그러한 신령한 지혜와 신령한 총명이 가득할지라도 그가 부자가 안 될 수도 있고, 오히려 가난해 질 수도 있고 그가 큰 권력이 없는 연약한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가득 차 있는 동안에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아주 보배로운 존재가 됩니다.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리고 그 사람은 그렇게 의도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살아있는 것 자체가 그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한 이유가 됩니다. 왜, 그에게서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알게 되고 주님의 뜻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미국에 갔는데 형제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는데, “목사님, 절 기억하시겠습니까” 그러는데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하는데 한 20년 전에 자기네 교회에 제가 가서 청년부부흥집회를 했는데 소명을 받고 신학을 했다는 것입니다. 신학을 하고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한국인으로 최초로 하버드에서 신약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7년 동안 박사학위 공부를 했는데 정말 치열하게 공부를 시킨답니다. 그런데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학교수가 되었습니다. 정말 웃긴 것이 신앙을 가진 교수님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신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출신의 교수 한 사람이 아주 경건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그 분 도움과 보호를 받으면서 결국엔 자유주의 시야에서 신학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정말 하버드의 교수들은 자부심이 하늘을 찌른답니다. 최고라는 자부심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지금 하버드대는 학교 장학금을 내놔도 사람을 보고 받는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 돈은 안 받고 어떤 사람 돈은 받고 사람 가려서 받습니다. 돈이 수조원이 쌓여 있습니다. 써도 써도 남을 돈들이 쌓여 있습니다. 지금도 가보니까 사람들이 한 사람이 몇 십억, 몇 백억을 내놔도 학교 건물을 아무 댓가 없이 지어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일에 가보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경영대학원 누가 돈을 냈다고 하는데 보니까 몇 백억 짜리 공사가 되어 보였습니다. 그게 그 사람들의 즐거움입니다. 우리는 돈 모아서 도망가는 게 즐거움이지만, 그 사람들은 기부하는 것이 즐거움입니다. 그게 즐거움입니다. 로마 시대 때부터 내려온 전통입니다. 그런데 세계 최고로 자랑하는데, 교수들 중에 아무도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계 최고이면 뭐 합니까. 주님이 없는데 행복할 수 없습니다.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어린 아이 같이 단순한 믿음으로 그 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 경외함의 진수입니다. 그 안에서 진정한 행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정말 아주 많이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배울 때 마다 항상 목적이 내가 이것을 배웠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기 위해서 배운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식적인 우월을 위해서 배운다, 그러면 안 됩니다. 무엇을 배우든지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더 잘 알기 위해서 그것을 배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나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차서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려고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라는 이 믿음을 가지고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3. 범사에 기쁘게 함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골1:10)
녹취자: 윤은정
I. 본문해설
5월 첫 번째 수요예배시간에 9절 하반 절을 설교했습니다. 계속되는 사도의 기도 중 한 토막이 ‘하나님께서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이렇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10절에서는 그렇게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풍만하게 된 그 결과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면서 하나님 앞에 바로 그것을 간구하고 있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Ⅱ. 지혜와 총명의 결과를 구함
A. 주께 합당히 행함
먼저 사도는 ‘주께 합당히 행하게 해달라’고 골로새교회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을 아는 것이고, 총명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리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을 이해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은 바로, 하나님 앞에 무엇을 하기 위한 것입니까? 남이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을 깊이 터득하고, 또, 선명하게 하나님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났습니다. 자, 이것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요? 무엇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차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일까요? 결국은 하나님 앞에 살기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칩시다. 우리가 예전에는 언젠가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고, 하나님도 모르고 천국과 지옥과 상관이 없는 불신자들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믿지 않던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생소하기 짝이 없는 기독교 신앙에 발을 들여놓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더 행복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고 난 다음에는 나 같은 사람의 행복 같은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렇지만 처음 믿을 때에는 예수 믿고 더 고통스럽고, 더 괴로워지기 위해서 예수를 믿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결국은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천당 가려고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죠. 왜? 살기 위해서!
제가 몇 차례 간증했지만 회심하기 직전에 가장 눈뜨면 제일 힘들었던 것은, 내가 사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짐승이면 그렇게 괴롭지 않을 텐데, 사람으로서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은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고 괴로움이었습니다. 결국은 인간들이 생을 마감하고 자살을 하는 것을 보면, 사실은 살기 싫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말고 너무너무 다르게 살고 싶은데 그게 안 되니까 죽는 것입니다. 인간의 최고의 관심사는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 놀라운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지식을 가득 채워서 예전에 보지 못한 은혜의 세계를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과 은혜와 변화, 이런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께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주님께 합당하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생각! 그것을 지성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 그것은 반듯이 우리에게 의지의 방향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성으로서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우리의 의지로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서 그 계획대로 힘껏 살아드리도록, 그렇게 하기 위하여 지혜와 총명, 그리고 충만한 지식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하나님께 합당한 삶이라고 하는 이것은 결코, 우리의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우리의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를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감화시키시는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둘 중에 하나로 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모두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발견한 후, 그 은혜에 붙잡혀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하는 진실한 신앙생활, 그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구했던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교리도 배울 만큼 배웠고요. 책도 꾀 많이 읽었고요. 기도도 하려고 애쓰는데, 왜 그런지 내 마음은 건조하고, 그리고, 무엇인가 하나님 향하여서 갖는 나의 믿음생활이 무엇인가 만족스럽지 않고 마음에 넘치는 기쁨과 충만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삶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매일매일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고 거의 순종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작게 깨닫고 깨달은 그것만큼 온전히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총명은 더 충만하게 빛나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 이것은 우리의 결심과 결단, 용기, 의지, 이런 것들을 필요로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때는 비장하리만치 이렇게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고 결심을 품어도 안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무엇을 깨닫느냐 면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에게 살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잘 아는 것만 으로도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가 선명하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는 사람에게 부어질 때, 그 때에 하나님께 합당하도록 인생을 실제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래서 이 은혜와,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과, 인간의 의지의 작용은 이렇게 두부를 자르듯이, 하나님의 은혜 몇 퍼센트, 인간의 의지 몇 퍼센트, 할 수 있는 그런 일의적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 그리고, 인간의 의지가 모두 함께 역사하는데, 어떻게 보면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인간의 의지는 완전히 수동적이고 하나님의 은혜 하나에 의해서만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왜? 어제까지는 내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오늘 나에게 용서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지의 방향을 악한데서 선한 데로, 힘이 없는 의지를 강하게 하여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끔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은혜는 항상 같이 가는 것입니다.
B. 범사에 기쁘시게 함
둘째는 범사에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기준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쁨을 드린다는 것은 단순히 순종한다는 것 이상입니다. 그 이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분명한 계명이 있고, 그 계명에 순종하며 사는 삶은 훌륭하지만,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넘어서서 무엇을 해야지만 그분의 마음에 기쁨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사랑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해주고 싶겠죠. 내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인데 목표가 무엇이냐면 ‘저사람 성질을 안 건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관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관계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건들면 폭발이다. 그러니까 제발 건드리지 말자.’ 사랑하면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로 말미암아 저 사람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믿음장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 무슨 뜻이냐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단지 순종하는 정도가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려고 했던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와 총명, 그리고 그것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우리가 충만하게 채워지게 되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더 많은 지혜와 총명을 주십시다. 이것은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그래서 주인이 달란트를 맡깁니다. 그 달란트를 가지고 주인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이익을 남겨드리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주인은 더 많은 것을 맡기고 그리고, 그것보다 더 큰 것을 그들에게 줍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많은 계명과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를 향한 위대한 약속들은 우리에게 우리가 그것을 따라 살고, 실천하고, 경험하며 살아갈 때에, 그때에 그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충심으로 섬기고, 그 하나님을 정말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매일매일 사는 사람들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주 실제적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핍박 속에서도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경만 읽어서는 잘 모릅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런데, 나에게 핍박이 옵니다. 핍박을 받으면서 고통을 받습니다. 사람들을 미워해요.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려고 합니다. 주님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그것들을 이기고 극복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 실천을 통해서 정말 핍박을 이기며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호기심으로 당신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진리를 잘 보여주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따라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기 원하는 사람들이 그 진리를 알고 싶어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진리를 많이 깨닫도록 그를 축복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도 나타낼 것이다.’ 그것이 바로,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주시는 기쁨의 최고의 표시가 당신이 어떤 분인지를 그들의 마음속에 깨닫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이 성숙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장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이미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가지고 그분의 마음에 기쁨을 드리며 섬기려고 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와 총명, 그 지식을 구하는 이유입니다.
C. 선한 일에 열매를 맺음
셋째는 하나님이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해 주시도록 이 지혜와 총명의 결과를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하나님의 선악간의 올바른 판단을 인식할 수 있는 마음에 생겼을 때에 그 때에 그 사람의 인식과 판단 앞에서 항상 선한 것을 택할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선은 멀리는 하나님이 자기를, 이 세계를 창조하고, 교회를 세우시고, 자기를 구원하신 목적이고, 그리고 아주 가깝게는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그 선한 일을 행하며 살고자 하는 변화를 하나님이 이런 지혜와 총명으로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아는 사람들에게 충만하게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어린 아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악하게 살지 않고, 선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최고로 받들면서 살려고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누구도 무엇으로도 이 마음이 악을 향하는 그 마음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는 그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때로는 우리 인간의 상상과 모든 것을 초월해서 아주 놀랍게 변화를 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커다란 범죄를 저지른 중 죄인들을 조사를 해봤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나? 그리고, 마지막에 내린 결론은 ‘홈 메이드 크리미널’ 이라는 결론입니다. 집에서 만든 범죄자! 그런 뜻이겠죠. 쿠키! ‘홈 메이드 쿠키!’ 집에서 엄마가 구운 쿠키잖아요. ‘홈 메이드 크리미널’ 범죄자! 70% 가까운 사람들이 상처가 많은 가정에서 부모의 폭력과, 폭언, 무관심, 그리고, 폭행 등에 시달렸습니다. 자녀들이 그렇게 자라면서 어려서부터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 마음, 그 다음에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이 성격의 파괴, 이런 것들이 생겨나서 실제로 그런 집안에서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폭언을 할 때, 상당히 많은 수의 자녀들이 아버지를 죽이고자하는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실제로 13살, 이렇게 밖에 안 된 아이들이 자기 아버지를 죽이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런데, 이렇게 인간의 마음이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그 다음에 올바른 영향을 받지 못하면서 감정 조절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마치 유리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그렇게 자기 자신이 조절이 안 되면서 악으로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선은 하나의 점과 같아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 인간을 구원하신 목적, 교회를 세우신 목적, 나 한사람을 구원해주신 목적,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많은 계명, 이것들이 한 가닥으로 선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악은 이 하나에게 모두 벗어난 것이 악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선은 하나의 점과 같고, 나머지는 그 점에 미치지 못하는 모든 것들이 다 악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의해 지배되지 못하고 그렇게 자의적으로 미끄러지고 하나님을 향해 악한 마음을 품게 될 때, 인간이 선한 일을 향하여 살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입니다. 또, 혹시, 어느 순간에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아도 선한 일을 시작은 할 수 있겠죠. 그러나 그것이 열매를 맺기까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 열매를 맺기까지는 못하고 성령으로 시작은 했으나 육체로 마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기쁨으로 받아드린 것,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뿌리가 말라서 비틀어져서 쓰러져 버리는 것, 악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혜와 총명을 주시고, 그것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계속해서 가득 채우고 그 채우는 과정을 통해서 성령의 은혜를 받아 우리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뜻대로 살도록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격려하고 우리를 붙들어주시면 이 선한 일을 시작하실 뿐 아니라, 지속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그리고 이것들을 지속적으로 마지막까지 해서 결국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를 통해서 신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 생활입니다.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선한 일들을 하려고 진지하게 결심한 적이 아주 많고, 그리고, 꼭, 이것을 이렇게 해야 되겠다고 맘먹고, 아주 강하게 마음속으로 결단하고, 자신과 약속한 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할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 이었을까요? 어떤 것 때문이었죠?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다름이 아닌 우리가 계속해서 그 일에 힘쓰지 못했기 때문에, 시작은 했으나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종종 우리가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끝까지 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어떤 일을 시작했을 때, 끝까지 내가 이 일을 하리라고 생각 못했습니다. 그런데 해냈습니다.’ 정상적인 모든 사람들은 이렇게 ‘모든 일들을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 해낼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라 나를 붙들고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누구나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단지 그분의 은혜의 손에 붙들린 도구였을 뿐이었고 그분이 나를 사용하셔서 그래서 당신이 원하는 대로 그 모든 일을 행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길을 따라서 살았고 걸어갈 수 있는 그런 신앙생활을 해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를 구하고 총명을 구하며, 하나님의 교리에 대해서 더 알고, 성경에 대해서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항상 생각해야 됩니다. 모든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합니다. 그래서 내가 강의 나가는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어느 학생이 자기 간증을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주 어려운 책을 몇 권 읽고 나면 가슴이 뿌듯해지면서 사람들이 우습게 보이기 시작한답니다. 그런데, 나는 그 학생이 정말 정직하게 그것을 표현했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슨 지식이든지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의 성경말씀이나 당신의 은혜의 세계를 아는 지식을 가지고, 그 성경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 눈 어두운 사람들을 향하여 교만하고 자만한 마음이 되라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항상 나보다 없는 사람을 만나면 ‘하나님이 저 사람을 섬기라고 나에게 물질을 주셨구나!’ 지식이 모자란 사람을 만나면 ‘아! 저 사람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저 사람보다 더 지식이 있게 하셨구나!’ 그리고, 나보다 약한 사람을 만나면 ‘바로 저런 사람을 붙들어 주라고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셨구나!’ 라고 생각할 때에 그 사람의 가난함, 그 사람의 무지함, 그 사람의 연약함이, 나의 무지요, 연약함이요, 아픔인 것처럼 내 마음속에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아웃리치를 했잖아요. 그죠? 오늘도 누가 얘기를 들으니까 그럽니다. 청년들이 갔는데, 우리교회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청년이 따라 간 것입니다. 장년부들이 열심히 섬기는 것을 보면서 ‘저분들은 밥만 먹고 전도만 했나? 어쩜 저렇게 군대처럼 기계적으로 착착 움직이나?’ 자기도 한 3년만 다니면 그렇게 되는데……. 그죠? 그런데, 우리가 벌써 14년, 15년째 됐거든요. 정말 오래됐죠. 처음에 이 아웃리치가 이렇게 지하실교회 작은 교회, 처음 아웃리치 파송할 때에 14명 파송했고, 그 속에 나도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14명 간 그게 십 한 삼사년 지난 다음에는 그것이 1300명이 되리라고 하는 것은 그 때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중간에 하다가 그만 둬야지!’ 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때도 끝까지 해야 된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이것이 이렇게 많은 성도들이 눈물로 참석해서, 이번에도 교회마다 보면 10명도 안 나오던 교회에 90명씩 100명씩 모여서 그리고 그 후에도 막 이렇게 새롭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생기고 세례 받는 사람들이 생기고 했다는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이것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끼리 이런 이야기를 하면은 우습지만은 누가 가겠어요? 그것을……. 그 고생스럽게 차를 타고 가서 그것도 한 사람 앞에 7만5천원인가 8만원씩을 내고, 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남의 것 까지 내 줘야 되니까 그렇게 해가지고 가가지고 죽도록 고생하고 그러고 돌아오는데, 이놈의 신학생도 안하는데, 교역자도 아니고, 평신도가……. 여기도 할 일이 많은데, 그런데, 그것을 가서 그 고생스럽게 하는데 그것을 기쁨으로 하게하는 그 놀라운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선한 일을 마지막에 결국은 열매를 맺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가 어디에서 나오는가? 그게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채워주신 후에는 그것을 가지고 남들에게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그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D.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람
마지막으로 넷째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이미 지난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반복하고 싶지는 않지만 한 가지만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사람처럼 얼굴과 모양을 가진 인간이 아니니,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사람의 얼굴과 모양을 안다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은 들리는 소리와 음성도 아니고, 또, 코로 냄새를 맡거나, 만지거나, 혹은 살갗을 다 느낄 수 있는 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감각적인 사물들을 아는 것처럼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고 할 때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것입니다. 속성을……. 하나님의 성품! 두 번째는 그 하나님의 성품, 혹은 속성의 시행방식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알아요. 그런데, 이 두 지식은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자, 우리가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언제 깊이 최초로 깨닫게 되나요? 불쌍한 사람을 돌보아 주시는 것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나중에 깨닫고, 제일 먼저 깨닫게 되는 것은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시기까지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그 놀라운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용서의 과정은 하나님의 사랑이 시행되는 방식입니다. 막돼먹은 죄인을 하나님이 끝까지 찾으시고, 부르시고, 그래서 그를 뉘우치게 하시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다시 그를 품으시사 용서하시고 감싸시는 이 모든 과정을 통해서 신자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나면 그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성품이 어떻게 자기를 위해 역사하시는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어디 사람뿐이에요? 하나님의 정의도 그렇게 배우겠죠? 하나님의 자비,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많은 속성들을 그렇게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사도가 이 골로새 교인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바입니다. 자, 저는 종종 주일학교 학생들 속에서도, 혹은 중고등부 학생 속에서도, 청년들 속에서도, 아니, 장년들 속에서도, ‘아! 저렇게 하고 어떻게 살까? 내가 목사지만, 저 사람 상황에 내가 있다면 나라도 정말 못살 것 같다.’ 그런 상황에 놓여있는 사람들인데 훌륭하게 삽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이죠?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 직원예배 하면서도 설교를 했는데, 요새 제가 ‘자네, 정말 신학생인가?’라는 책을 쓰고 있습니다. 한 450페이지 썼어요. 그래서 한 500페이지 안에 끝내려고 하는데 양이 점점 늘어져서 걱정입니다. 그런데 그러다보니까 내 옛날 얘기가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신학생 때의 얘기! 전도사 때인데, 처음 전도사가 됐을 무렵입니다. 목사님이 “김전도사!” 그럽니다. “네” 그랬더니 “야, 교회를 이전을 했는데 사찰을 못 구했으니까 네가 들어와서 사찰 구할 때까지 석 달만 좀 교회 안에 들어와서 살아주면 안되겠냐?” 뭐, 하늘같은 담임목사님이 말씀하시는데 어디라고 거역을 하겠어요. “네, 그러겠습니다.” 그러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매일 새벽마다 성경을 한 장씩 읽고 새벽기도를 하십니다. 그런데, 창세기 할 때 들어갔거든요. 그러면 석 달 이면은 창세기, 출애굽기 할 때 쯤 나와야 되잖아요? 예레미야 애가 할 때 쯤 나왔어요. 그리고 중간에 목사님이 6개월인가 8개월을 몸이 아프시니까 새벽설교를 못하시고, 또, 주일날 새벽에 못 나오시고 등등 해서 예레미야 애가까지 갔는데, 3년 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도 없을 때인데, 신장이 너무 안 좋았습니다. 그래서 막 한 300미터만 걷고 나면은 철갑을 짊어진 것 같이 두러 눕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겠는데, 뇌를 면도칼로 도려낸 것처럼 아픈 것입니다. 정말 견딜 수가 없을 만큼 아픈 것입니다. 그런데, 신대원 들어가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런데 공부는 해야지만 이제 대학원에 가야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교회에서 일을 많이 맡겨주는지 주일학교, 고등부, 그 다음에 장년 성경공부 2개반, 제자훈련이라고 그래서 뭐 그런거 있잖아요. 그 다음에 구역 4구역, 교회 청소, 그 다음에 담임목사 심방 동행, 눈코 뜰 새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장이 안 좋아 지니까 물을 그렇게 많이 마시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여러분 물을 많이 마시게 될 때 건강검진을 받아보셔야 돼요. 왜 이렇게 물이 당기는지……. 물을 많이 먹는 것은 좋은 거지만……. 그래서 머리맡에다가 컵도 없었고, 그냥 이렇게 사발에다가 대접에다 떠 놓고 머리맡에 두고 자는데 언제쯤 새벽에 잠이 깨는데 너무 목이 말라요. 그래서 이제 손을 뻗어서 사발로 이렇게 마시는데 물이 안 나옵니다. 그래가지고 불 키고 보니까 꽝꽝 얼었어요. 그러고 보니까 어떻게 추운지, 이렇게 보니까 우리 집사람은 그때 시집 온지 얼마 안 되서 여기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코가 새빨개가지고 콧김이 새 하얀 김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번은 여름인데 밤에 자는데, 빗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져요. 그래서 사발 하나를 받쳐놨어요. 조금 뒤에 저쪽에서 떨어져요. 그래가지고 계속 사발하고 바가지를 받쳐놨는데 9개였어요. 크기가 다르니까 다 다른 소리가 나는 거예요. 밤새도록 쭈그리고 앉아가지고 잠도 못자고……. 그때 만약에 그것이 고생이라고 생각이 되었으면 벌써 그만 뒀죠. 나 아는 교수님이 “야, 거기 왜 그러고 있냐? 우리 교회로 오면 월급 3배로 주마.” 기도해 보면 하나님이 가지 말래요. 그런데 가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래서 말이죠. 그 고생을 많이 했던 곳은 가고 싶지가 않아요. 그 동네 근처도 별로 지나가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그때는 안 그랬어요. 그때는 어디 멀리 가있다가도 그렇게 고생을 하는데도 교회가 눈에 보이면 가슴이 막 뛰었어요. 마치 애인 만나러 데이트 나가는 사람처럼 막 가슴이 뛰는 거에요. 나는 한 번도 전도사 때 담임목사님이 나보다 더 교회를 사랑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고생스러웠다는 생각이 들 때 얼마나 서럽겠어요. 그게……. 그 시절이 그래도 옛날이긴 하지만 그래도 1980년대 중반인데, 어디 사발 물이 꽝꽝 얼어서 마실 수 없는 방에서 사는 사람이, 글쎄 모르겠어요. 몇 명이나 됐을까? 비가 오면 구멍이 뚫어져 가지고 비가 9군데 세서……. 여러분, 내가 늘 말씀 드리는데, 그래서 교역자들, 저도 교회 사택에 13년인가 살았지만은 그런데 정말 돌아봐야 합니다. 그것은 정말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생할 때는 고생이라는 생각이 안 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은 정말 고생이라는 생각이 다가오고, 그때도 못 느꼈던 고통스러운 생각이 지금은 나에게 느껴지는 거예요. 충분히……. 그래서 정말 그런 고통이 느껴지는 겁니다. 그러면 왜 그랬을까?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일이 없는 것은 아닌데, 아픈 것은 당연히 아프죠. 아픈데, 위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위로……. 그 위로는 하나님이 삶의 모든 결핍과 가난, 고통, 괴로움, 쓰라림, 이런 모든 것을 통해서 그런 것을 안 만났더라면 하나님이 결코 알게 하셨을 리가 없는 그런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빛, 은혜에 관한 지식들을 주시는 것입니다.
(찬양) 신실하신 하나님 실수가 없으신 좋으신 나의 주
그리고 그 교회에 8년이 있다가 나올 때에 2가지 자신이 생겼어요. 첫째는 모든 가난을 이길 것 같은 용기, 다음에 두 번째는 어떻게 아무리 이 세상에서 이상한 사람하고도 목회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두 가지가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하고 이렇게 잘 지내잖아요? 그래서 그 이후로는 아무도 내게 충격을 준 사람이 없습니다. 막 치열하게 하나님이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보면 시리즈 가운데에 이번 달에 내가 추천 시리즈로 해달라고 해서 내가 해줬는데 ‘연단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시리즈가 있습니다. 그거 한번 들어보세요. 그런데, 정말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을 아는 것에서 자라는 기쁨이 있을 때에 그 기쁨 때문에 모든 것을 이기며 살아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돈 때문에 고생하면 하나님이 돈을 줘서 문제를 해결한다고 이렇게 생각하거든요. 그 다음에 핍박을 받으면 핍박하는 사람을 죽여 버리시든지, 아니면 반쯤 짓밟아 가지고 그래서 핍박을 멈추게 하신 다든지 그렇게 생각을 하거든요. 아니에요. 그냥 그대로 다 당하게 하시면서도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그것을 이기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어렸을 때 보면 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온갖 환난과 풍파를 다 만나고,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엊그저께도 신문에 보니까 어느 정치인이 자기 엄마를 회고하면서 그렇게 눈물겨운 이야기를 썼더라고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자녀들을 길러야 되니까 어머니가 똥지게까지 짊어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똥을 퍼다 나르는데 돈을 받고 했겠죠. 그러는데, 그러면서 이제 야채밭도 가꾸고 하는데, 똥이 발등에 떨어져가지고 똥독이 올라가지고, 똥독 오르면 퉁퉁 붓거든요. 그런 것을 어린 시절에 다 그렇게 부모가 당하게 되는 것을 다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이기게 하는 힘은 사랑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뭐, 상상도 못하는 힘이 어머니에게서 쏟아져 나오더랍니다. 살아야 한다고 하는 무서운 현실감, 이런 것들이 솟구쳐 올라오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한한 힘을 주는 하나의 강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 때문에 어려우면 하나님이 돈을 톡 줘서 해결하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그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돈이 필요한데 돈 달라고 기도해야지, 돈이 필요한데 돌이나 달라고 기도할리는 없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를 다루실 때에는 아주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다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돈은 있다가도 없어지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후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말이 있잖아요? 부흥회하면 옛날에 회개했던 사람들이 회개합니다. 옛날에 깨졌던 사람들이 또 깨지는 거지,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던 사람들이 깨진 적은 너무 드물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아주 놀라운 방법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번 이 설교를 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라고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속에서 정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에는 감사할 조건을 모두 외형적인 데서 찾는 것입니다. 돈 주셔서, 좋은 직장 주셔서, 승진하게 해주셔서, 좋은데 시집가게 해주셔서, 등등, 그러나,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정말 베풀어주시는 정말 놀라운 은혜는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까 그 청년이 그렇게 놀랬던 거, 무엇 때문일까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구석구석에서 충성하며 살아가는 것, 사람들이 나를 보든지, 안보든지,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의식하든지, 안하든지, 그것과 상관없이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무엇 때문이에요? 돈 때문이에요? 아니에요. 젊음 때문에? 아니에요. 무엇 때문이에요?
(찬양) 내 생에 가장 귀한 것 주 아는 것
III. 결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나로 하여금 그런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신자는 얼마나 예쁜 옷을 입었느냐, 높은 지위를 가졌느냐, 그렇게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이 좋은 신자인데, 한 사람은 그저 가난하게 살고, 한 사람은 그렇게 높은 지위에 있을 때 더 빛나겠죠. 왜? 높이 있으니까 사람들 눈에 잘 뛸 것 아니에요? 그렇지만은 본질적으로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그래서 한 3년 전을 생각하면, ‘아, 그때 내가 정말 어린 아이 같았어.’ 생각할 때에 얼굴이 뜨거워 지도록 그렇게 내가 오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장해 가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사람은 날마다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날마다 아주 아름다워져서 귀엽고, 예쁜 사람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우리의 삶 전체를 드려서 그분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것, 우리가 이 세상에 없는 것보다도, 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살아있기 때문에 주님이 이 세상을 보실 때 더 예쁜 세상이 되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가 헛되지 않을 것이니 이렇게 세월이 많이 흘러갈수록 아름다운 영혼으로 가진 사람으로 자라가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4. 하나님이 능력을 주심은 1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골1:11)
녹취자: 윤은정
Ⅰ. 본문해설
열매를 맺는 삶을 위해 사도는 기도했고,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가도록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11절에 와서는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는 기도를 올리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해 주시며’ 라고 말입니다. 이 기도는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Ⅱ. 능력을 구하는 기도
A.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성도를 택하신 것은 예수 믿고 천당 보내게 하시기 위해서 택하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택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이 너무 어둡고, 캄캄하여져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삶인지를 알 수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진리의 빛을 비추는 등불로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택하신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겠지만, 이 세상에 살아있는 날 동안에는 어두운 이 세상에 한줄기 빛으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 빛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는 생활이 바로, 거룩한 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잘 믿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 앞에 신실하고 아름다운 삶을 삶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이 빛의 자녀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런데,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서 거룩한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대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이 완전하신 분이신 것을 알고 자신도 모든 일을 행하고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성적인 의지, 우리의 본성에 있는 우리의 경향과는 반대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아주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에 붙잡혀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이렇게 자기의 육체의 본성을 거슬러서 사는 것은 항상 고통과 어려운 희생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 수 있는 자원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골로새의 교회에 편지하면서 골로새 교회의 목회자들이 목회를 잘 해주기를 바랐겠죠. 또, 자신도 성도들을 목양하면서 온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하여 열심히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성도들을 목양 적으로 돌보았지만, 성도들로 하여금 이렇게 거룩한 생활을 하게 만드는 그 큰 자원은 돌보는 그 목양의 행위 자체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도구일 뿐입니다. 심지어, 성경을 읽고, 성경을 공부한다고 해서 거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탈북자 한 사람을 만났는데, 대화를 했는데, 신앙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100독을 했답니다. 여러분 가운데 100독을 하신 분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했는데, 어떻게 100독이 그게 말이 됩니까? 100독이? 성경이 어느 정도 분량이냐 하면요?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것도 안하고 저녁때까지 성경만 읽고, 저녁 먹고 밤에 또 성경 읽고, 이렇게 읽어도 8일이 걸립니다. 그런데, 그렇게는 안했을 것 아니에요? “어떻게 100독을 하게 됐냐?” 그랬더니, 거기 탈북자 선교를 하시는 선교사님이 있었는데, 100독을 하면은 남한을 보내주겠다고 그랬답니다. 그러면 오직 목표는 남한을 가는 게 목표입니다. 그래서 먹여주고 재워 주면 오직 목표가 빨리 100독 하고 남한에 가서 돈을 버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이 마음을 다해서 성경을 100독을 했다면 믿음이 엄청 좋아 졌겠죠. 그런데 이 사람은 별로 믿음이 없습니다. 이것도 역시 도구입니다.
결국은 이런 거룩한 생활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영혼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그 은혜로 말미암는 사랑의 힘, 이러한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를 위해서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어주시고, 저들에게 능력으로 덧입혀 달라고, 모든 능력으로 저희들을 능하게 만들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입니다. 교회에서 사라지지 말아야 할, 어떤 경우에도 결코 꺼지지 말아야 할 기도의 불꽃이 바로 이것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 주님의 교회에 거룩한 능력으로 채워주시옵소서. 그래서 사람들을 하나님이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라고 하는 강력한 은혜, 이것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도구입니다. 그 도구들 하나하나를 사용할 때에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하게 깃들어서 그 도구를 사용하여 사람들이 변화되고 새로워지고, 또,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사도는 하나님 앞에 성도들로 하여금 거룩한 삶을 영위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충만히 채워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교회에 그치지 말아야 할 기도의 제목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많은 일들, 주님을 위한 섬김들, 물질이 들어가고, 우리의 수고가 들어가고, 땀이 들어가고, 우리의 마음이 들어가고, 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시간을 내어서 주님을 위해서 봉사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하기는 하지만 그냥 일일 뿐이지, 그 자체가 어떤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그런 것 같습니다. 집안의 살림을 편하게 해주는 많은 가전제품들이 있어도 전기가 나가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섬김 속에 가득 채워질 때, 그때에 성도가 성도답게 살 수 있는 큰 능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B. 능력이 주어지는 근원
그러면, 그 능력이 주어지는 근원이 어디입니까?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영광의 힘을 좇아’ 혹은, ‘힘을 따라’ 라고 말합니다. 옛날 성경에는 ‘힘을 좆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뜻인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여기에 나오는 영광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형용사를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사람’ 그러면, ‘경건한 사람’ 그런 뜻이고, 또, ‘능력의 사람’ 그러면, ‘능력 많은 사람’ 이런 뜻입니다. 여기에도 소유격으로 나옵니다. 그래서 무슨 뜻이냐 면은 ‘영광스러운 힘을 따라’ 이렇게 되어있는데, 이 힘이라는 것은 ‘크라토스’라는 단어인데, 지배하는 것입니다. 지배! 그래서, 우리가 ‘크라티아’ 혹은, ‘데모크라시’ 그러면은 정치를 가리키잖아요. 지배하는 것, 많은 사람이 지배하는 것은 ‘데모크라시’가 되는 것입니다. 몇 명의 사람들이 지배하면 ‘뷰러크라시’가 됩니다. 이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올바로 번역을 하면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영광스러운 지배를 따라’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면 주권이에요. 주권! 그러니까, ‘그 분의 영광스러운 주권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어느 교회에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고, 어떤 개개인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시고, 어떤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를 베푸셔서 은혜를 주셔서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 새로운 삶을 살게 하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주님이 자기가 기뻐하는 데로 하나님께서 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그 은혜를 주셔서 그 능력을 갖게 하시고, 그리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살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말이죠. 교회를 잘 할 줄을 모르고 어떻게 교회가 잘 하면 될지를 잘 모를 때에는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은 주님을 많이 의지합니다. 그러다가 이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봉사를 하다 보면 요령이 생깁니다. 많이 터득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덜 의지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교사생활 아니에요? 교사생활! 여기 교사들 많이 있으시겠죠. 주일학교 교사입니다. 처음에 주일학교 교사를 시켜주면 한 없이 감격합니다. ‘나 같이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다니’, 그리고, 어디서도 못 들어본 말인데, 교회에 오면 조그만 애들이 “선생님, 선생님” 그러는 것입니다. 너무 영광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냥, 토요일이면 일찍 들어가서 공과공부를 하고, 또, 잊어버릴까봐 버스타고 오면서 외우고, 암기하고, 그러고 와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뭘 좀 잘못 가르치면 자기가 부족해서인가 하고 또, 자기를 돌아보고 뉘우치기도 하고, 토요일이면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러다 이제, 1년, 2년, 3년쯤 지나가고 나면은 이제, 공과도 몇 번 가르쳤고, 부딪혀야할 많은 상황을 경험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이제 요령이 터득이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공과 책은 돌아가면서 계속 1년에 똑같은 것을 가르칠 경우에는 이제 아침에 공과책 들고 나오면서 버스 안에서 하품하면서 넘겨보면서 오는 것입니다. 이러면 일은 잘 하도록 숙달 되었을지는 모르지만은 거기에 하나님이 자기의 영광스러운 주권을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해 주시는데, 이 공급해 주실 때에 하나님이 아무런 신경 없이, 아무렇게나 뽑기 하듯이 그렇게 은혜를 뿌리시는 게 아닙니다. 겸비하고, 통회하고, 당신 자신의 얼굴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시고, 그렇게 자신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이 세상의 기준과는 상관이 없이 하나님은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요즘은 그렇게들 잘 안하잖아요? 옛날에는 방언을 못 받으면 그 무슨 죄를 진 것처럼 기도원에 가면 특히, 말이 돼요? ‘우리 기도원에는 개도 방언을 한다’고... 오죽 신앙이 그지 같으면 이 기도원은 이렇게 올라오고도 방언을 못하냐고 말이죠. 그러면 막 심경이 괴롭습니다. 사람들이 막 하나님께 은사를 달라고 막 기도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 섬기고 열심히 있는 어른들이 방언을 못 받아도 초등학생, 아니면, 중학교 1, 2학년 이런 학생들이 엄마, 아빠 따라서 기도원에 왔다가 은사를 받고 내려갑니다. 제 눈에는 참 기이했습니다. 그런데, 기도원에 자주 다니면서 이렇게 아이들을 보니까, 뭘 하나 발견할 수 있었냐 하면은, 확실히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의 지위나, 신앙의 연조나, 이런 것들을 보고 하나님이 그런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지위와 상관없이, 신앙의 경륜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어느 교회에 집회를 갔는데, 하여튼 동네에서 핍박을 무지하게 받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하여튼 목사님이 수시로 피난을 갈 정도였다고 하니까 하여튼 아주 모질게 교회를 그렇게 핍박을 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행정적인 문제도 걸려있긴 했는데……. 한 50명 정도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데 설교에도 은혜를 주셨습니다. 교회 개척하기 전일 꺼 에요. 앞자리에 머리를 빡빡 깎고, 체구도 쪼그맣고, 빼짝 마른, 정말 시골 아이입니다. 나중에 물어보니까 중학교 1학년이랍니다. 그런데, 무릎을 꿇고 빼작 마른 그 어린 소년이, 무릎을 꿇고 그렇게 눈길 한번 떼지 않고 설교에 집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은혜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런 애 처음 봤습니다. 하나님이 진짜 그 시간에 그 아이 한 사람을 위해서 예배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처럼 그렇게 은혜를 쏟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따라서 당신이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능력을 주셔서 영광스러운 힘을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이 주권을 따라서 하나님이 능력을 부어주시는데 어떤 사람입니까? 당신이 기뻐하는 사람, 겸비하고, 통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영혼의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시킨 사람, 죄가 있으면 용서해 주실 것이고, 능력이 모자라면 주실 것이고, 환경이 막혔으면 열어줄 것이고, 무엇인가 자원이 부족하면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입니다. 왜 그러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이 능력을 주실 때에 당신께 순종할 사람에게 능력을 주시지, 반역할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한 나라의 재왕이 되어서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데,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그럴 때에 여러분의 뜻을 잘 알고 순종할 것 같은 사람들에게 그 권세를 주지, 권세를 주면 그 권세로 군인들을 동원해서 내 뒤통수를 칠 것 같은 사람들에게 그런 권력을 주겠어요? 어림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영광스러운 주권을 따라서 사람들에게 능력을 주시는데, 정말 당신에게 순종하려고 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가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은 순종하기 위해서 능력을 구할 때, 하나님이 그 기도를 매우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를 할 때에는 힘이 자기도 모르게 솟아나면서 기도 속으로 우리의 마음이 쏟아져 들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기도면 한 두 번은 그렇게 하실지 모르는데, 인간의 감정으로 비슷하게 경험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기도하면 할수록 그렇게 마음이 쏟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게끔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응답해 주셔서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주권을 따라서 능력 있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Ⅲ. 능력이 주어지는 의도(1)
그런데 이런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는데, ‘모든 능력으로 힘 있게 되어, 힘 있게 하여’ 이런 뜻입니다. ‘모든 능력으로 힘 있게 하여 하나님께서 이러 이러 이러한 일들을 하게 하신다.’ 이 얘기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성경은 하나님이 그렇게 능력이 주어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능력이 주어지는 의도에 대해서 11절과 12절에서 각각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11절만 하려고 합니다.
A. 견딤에 이르게 함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무슨 뜻이냐면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는데 무엇 무엇을 유의하여, 혹은 무엇 무엇을 할 수 있도록 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견딤입니다. 견딤! 썰렁하지 않아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께서 어려움들을 확 치어버려 주시도록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잖아요.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으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어도 하나님이 산을 옮기신다고 했는데…….’ 기도하잖아요? 그런데,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가 처한 어려움과 난관을 물론 물리쳐 주시지만, 사도는 오늘 이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많은 능력을 너희들에게 주셔서 견디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왜냐하면 이 골로새 교회가 편지를 받을 때의 상황이 목회 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었어요. 영지주의라고 하는 이단들에게 에워 쌓여 있었고, 성도들은 많은 사상적인 박해를 받고 있을 때입니다. 이러한 곤경 속에 있을 때에 사도는 이 골로새 교회를 위해 빌기를 ‘하나님이 능력을 많이 주시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 능력은 많은 시련과 어려움들을 견디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그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능력은 도대체 무엇이기에 견딤에 이르게 하는 능력일까요? 견디게 하는 능력일까요? 보십시오. 우리들이 영적인 세력을 대적할 때에는 하나님 앞에 파멸을 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저 사단의 세력들을 파멸해 주십시오. 악한 마귀의 권세들을 하나님이 부숴주십시오. 저희들을 멸망시켜 주십시오.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을 향해서는 그렇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기도할 수 있다면, 왜 예수님이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 그러셨을 이유가 어디에 있겠어요?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모든 견딤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뭘 가리 키냐 하면요? 사랑의 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랑의 힘! 사랑의 힘을 가리킵니다.
시련과 핍박, 교회를 괴롭히고,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 악의적인 소문을 내면서 그렇게 복음의 길을 훼방하는 사람들에 에워 쌓여 있습니다. 그들의 파멸을 구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선교의 정신이 아닙니다. 그들을 움직이고 배후에 역사하여 하나님의 복음의 능력을 대적하는 모든 영의 세력들에 대해서는 파멸을 구하고, 파괴를 구하고, 하나님의 강력한 심판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견디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견딜 수도 없고, 견뎌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 이미 맺어진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사랑이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랑이 마음속에 가득차면, 나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고, 사랑이 식으면 나 이외에는 나와 상관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이 교회에 많이 주셔서, 하나님. 골로새 교회가 핍박을 당하고 많은 어려움이 있는데 하나님 견디게 해 주시옵소서. 골로새라고 하는 이 지방에서 그리스도의 교회가 빛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이 골로새와의 관계가 끊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죠? 견뎌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골로새 교회에 능력을 주시옵소서. 그래서 그 능력으로 견디게 해 주시옵소서.’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일평생 그분과 함께 그 능력이 동행했고, 어느 한 순간도 그 능력이 쇠퇴하신 적이 없으신 분이시니, 왜냐하면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넘치는 사랑을 그분에게 한량없이 성령의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으로 표현해 주셨습니다. 바로 그 한량없는 성령의 능력이 부어질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늘로부터 들려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정말 능력이 있는 자처럼 사셨습니까? 물론,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고 준엄하게 꾸짖어 물리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죄인이라도, 심지어 자기를 판 가롯 유다조차도 예수님이 그가 악한데 떨어지기를 바라며 저주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그 비범한 능력으로 예수님은 종처럼 견디며, 노예처럼 당신의 사람들을 섬기시면서 일생동안 봉사하시는 삶을 사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능력은 이기고, 밟고, 지배하고, 복종시키는 능력이지만, 기독교의 능력은 섬기고, 참고, 견디고, 또, 견디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로부터 의심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무슨 사도냐?” 그것에 대해 사도가 자신의 처지를 변증하면서 말했습니다. “내가 사도가 맞다. 내가 사도인 것은 인내와 기사와” 그러니까 “내가 정말 예수님이 불러주신 사도가 아니라면 이렇게 오래도록 모든 것을 견디면서 참을 수 있었겠느냐? 그런데, 나는 그렇게 참았고, 그럴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주셨던 것과 같은 그런 능력을 내게 주셨기 때문에 나는 너희들을 향하여 참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내가 사도라고 아니할 수가 없다.” 고백을 했던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지리멸렬하게 느껴지는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래도록 기도를 했는데도 우리의 환경이 나아지는 것이 없을 때, 혹은 우리의 가족들, 혹은 남편과 그리고 자녀들을 위해 기도해도 무엇인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때 우리들은 낙심하게 됩니다. 그때, 배워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견디게 하는 힘입니다. 은혜가 없을 때에는 못 견딥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견딥니다. 왜? 왜 견딜까요? 그럼요. 사랑의 힘으로! 사랑의 힘으로! 만약에 내게 은혜가 없다면 내가 이렇게 고통을 받으면서 시련을 당하면서 이 자리에 있어야할 이유를 찾지 못했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마음속에 부어지니까, 고통은 줄어들지 않았지만은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속에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와 같은 인간을 구원하고 섬기기 위해서 당하는 고난, 그 고난을 당하면서 견디셨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깊은 고통에 대해서 동참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환경을 열어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보다 그 환경을 이기도록 영적인 은혜를 주신 것이 우리의 영혼에 양약이 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모든 능력을 교회와 성도들에게 부어주셔서 그들을 능력 있게 하시는 이유인 것입니다.
B.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함
두 번째는 오래 참음에 이르도록, 오래참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오래 참음은 사랑의 가장 대표적인 특성입니다.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데, 시련과 고난이 끝없이 밀려옵니다. 덜 사랑하는 쪽이 먼저 떠나는 것입니다. 더 사랑하는 쪽이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있는 것입니다. 왜? 오래 참는 것은 사랑의 가장 중요한 특성입니다. 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고, 오래 참는 이유는 사랑의 대상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당신의 주권을 따라서 모든 능력으로 이들을 능력 있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래서 이들로 하여금 오래참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즐거움이 되고, 기쁨이 되고, 유익이 되는 것을 참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 오늘 정말 즐거운 파티, 두 시간 동안 참았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참는다고 하는 것은 본성상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자기가 거기 있음으로 고통을 받을 때에 그것을 우리들이 참는다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오래 참는다고 할 때에는 시간적으로만 오래 참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를 이탈하지 않을 것처럼 굳게 붙들고 참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람들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시구요, 변함없이 당신이 주신 소명의 자리에서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아주 금쪽 같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이 아니면 그렇게 오래 참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순간의 용기, 솟구치는 열정이 아니라,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시련과 고난을 이기고, 혹은,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의 모든 핍박을 견디면서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며 복음의 영향을 미치고 있다’라고 하는 그것은 ‘그 마음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지속적이고 컸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가 지속적이고 클 수 있었던 것에는 물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주권이 그 일을 기뻐하셨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이 부어주신 것이지만은, 그와 함께 자신이 하나님이 이끌고 가시려고 하는 그대로 끌려가려고 하는, 자기 자신의 의지의 화합이 있었던 것입니다. 은혜가 의지를 그렇게 바꿔놓았지만, 또, 그 은혜 때문에 기꺼이 자신의 의지를 하나님 앞에 드리는 성도의 그 은혜에 대한 화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래 참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래는 이렇게 오래 참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하죠? 성격이 불같고, 독선적이고, 그런 사람이었는데, 교만한 사람이었는데, 주님을 만나고 오래 참음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사도가 이 골로새 교회가 오래참기를 바랬을 때에 무엇을 생각하면서 이들이 오래 참기를 바랐을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하나님 앞에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거스르는 모든 죄인을 향하여 일체의 오래 참으심으로 고난을 받으신 그 본을 따라서 사도는 사랑의 사람이 되어갔고, 그 사랑이 사도로 하여금 오래 참고 견디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사랑의 비밀을 터득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골로새 교회를 위해 빌면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큰 능력을 이들에게 주셔서 오래 참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벼가 가을에 벼가 익잖아요. 그런데, 햇빛이 벼 베개를 할 때쯤 돼서 햇빛이 쨍쨍하게 내려쬡니다. 그러면은 아주 튼실한 곡식이 맺습니다. 그런데 이제 단단한 쌀알이 벼 잎사귀 속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거기에 물이 생깁니다. 물이! 쌀 물이 생깁니다. 꽉 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쌀 물이 꽉 차서 그때 누르면 하얀 즙이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때에 거기서 햇빛을 강렬하게 비춰서 한 두주정도 지독하게 햇빛이 비추면 이 물컹물컹했던 쌀 즙이 아주 단단해집니다. 두 세주정도? 한 세주정도? 그런데, 만약에 그때 날이 흐려서 비가 계속오고 햇빛이 안 나면, 마지막에 썩어버리든지 아니면 꽉 차지 않은 쌀 물이 그냥 굳어버리면서 쓸모없는 쌀 알갱이들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흉년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흉년!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을 당하고 오래 참는 길을 걸어가는 그 자체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놀라운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것들을 오래 참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환경도 허락을 하시고, 또, 참을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치 볍씨가 영글어 가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사랑이 영글어 가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아주 소중한 사람으로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한 번, 한 해의 절반이 가는 이즈음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내가 더 참았더라면, 내가 더 사랑했더라면, 더 긍휼이 여겼더라면, 변화되었을 사람들! 더 오래 참았더라면 깨지지 않았을 관계들, 더 인내했더라면 하나님의 의의 열매를 이루었을 일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오래 참아야 됩니다. 그것이 힘들 때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서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향해 한 없이 오래 참으사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본 받아서 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여기가 내 자리입니다. 이 사람이 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것을 잘 견뎌야 되겠습니다. 이겨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오래 참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에게 영적인 능력을 주십시오. 당신이 나에게 능력을 주시면 은혜를 주시면 내가 더 많이 참고, 더 많이 희생하겠습니다.’ 할때, 하나님께서 얼른 은혜를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스럽겠습니다. 고난과, 힘든 어려운 환경 속에 내가 있을 때, 나만 아는 게 아니라, 주님도 아시거든요. 그런 상황에 있을 그 때에 하나님이 그래도 그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꼭 붙들고 능력을 주셔서 내가 이 자리에 계속 참으며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얼마나 그 사람이 기쁘시겠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리에서 하는 기도는, 원하시지 않는 자리에서 기도하는 것보다 훨씬 큰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력 있는 기도의 비결은 순종하는 삶입니다. 거기 있으라는 자리에서 기도를 할 때에 그 기도가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이 있으라는 자리에 떠났을 때에는 목숨을 걸고 기도하려고 해도 그 기도가 목숨이 걸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마, 금식기도 한다고 열심히 했는데, 동네방네 소문까지 냈는데, 슬그머니 저녁에 들어가서 찬밥에 김칫국 말아 먹은 적 있죠? 이게요. 신비입니다. 신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해야지만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지,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자리에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가 안 나오는 것입니다. 능력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C. 기쁨으로 감당하게 함
그런데 이러한 견딤과 오래 참음을 어떻게 하게 해달라고 그랬어요? 기쁨으로! 기쁨으로! 이게 결국은 기쁨이라는 것은 신령한 기쁨이거든요. 이 신령한 기쁨은 사랑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랑! 그 기쁨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러니까 뭐 사랑을 느끼고 막 그 만나서 반갑고 좋은 사람들이 있어봐요. 그러면 이 안에서 생각만 해도 막 기쁨이 솟아오르잖아요. 그것이 사랑의 열매에요. 기쁨이! 결국은 여기서 ‘하나님이 모든 능력으로 능력 있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능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 곧, 하나님의 사랑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사랑을 구하는 기도!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최고의 기도제목은 신령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 신령한 교회가 된 최고의 표징이 은사로 넘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넘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하고, 그 사랑이 나로 하여금 시련을 이기게 하고, 그 사랑이 나로 하여금 나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고, 그 사랑이 나로 하여금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혹은 멸시를 받으면서도 하나님 의지하며 그 자리에서 주님을 섬기게 만들어 주는 힘! 파워! 이것이 바로, 지상에 있는 교회에 하나님이 부어 주셔야 할 가장 커다란 말하자면은 자원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신령한 교회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IV. 결론
주님의 사랑이 나의 마음속에 가득 있어서 이 사랑이 없을 때에는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게 해주시고, 이 사랑이 없을 때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으로 참게 해 주시고, 이 사랑이 없다면 진작 여기까지만 참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그때에, 더 참고 견디고 이기도록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이런 큰 능력을 당신의 교회에 덧입혀 주시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사랑의 능력을 나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교회에 가득 채워서 우리들이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에 세워 주시든지 정말 충성스럽게 살도록 도와달라고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5. 하나님이 능력을 주심은 2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골1:12)
녹취자: 윤은정
I. 본문해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능력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성경 우리가 읽은 12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 문장으로만 보면 ‘하나님이 그 큰 능력을 주시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감사하게 하기를 원하다’라고 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히랍어 성경에서 보면 원래 11절과 12절이 한 문장으로, 10절부터 되어있고, 그리고, 12절은 분사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하자면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면서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사 우리로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심이라’ 이렇게 나옵니다. 뭐, 큰 차이는 없지만 어쨌든 12절에 나오는 이 내용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면서 주님이 주신 능력으로 오래 참음과 그리고 모든 견딤에 이르기를 원하노라’고 한 그 내용이라는 점에서는 우리들이 눈여겨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 얘기입니다.
II. 성도에게 능력을 주심은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능력 없을 때 힘들게 하던 일도, 능력을 받아서 쉽게 한다. 생각을 하고, 또, 능력이 없는 사람은 고생 고생하는데 능력이 많으면은 그저 편안하게, 아주 가볍게 능력을 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능력을 주시면 반드시 주신 능력만큼, 능력을 받은 그 사람에게 요구하는 수준과 높이가 다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직 신앙이 어리고, 주님의 은혜의 세계를 잘 모르던 때에는 잘 못해도 하나님이 너그럽게 다루어 주셨는데, 은혜를 많이 받고 여러분들이 주님을 아는 지식이 쌓여가게 되면, 여러분들이 그 지식을 배반하고 올바르게 살지를 않거나, 하나님이 큰 능력을 주셨는데도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아드리지 않으면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을 매우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는 가운데 ‘너는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랬습니다. ‘좇아’라는 말이 ‘따라서’라는 말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내 명령을 따라서 너는 이 일을 하거라” 할 때에는 그 명령에 자기를 맞추면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주어지면 그 능력에 맞추어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아라.” 또, “받게끔 된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성경에서 보면 그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평범하게 살다가 간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께 능력을 많이 받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신약의 사도들과, 구약에서 특별히 선지자들이 이런 능력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깨달아 아는 지식이 있었구요. 성령의 능력도 충만하게 많이 받아서 악한 영들의 세력을 밟고 그리고, 꾸짖으며, 아주 힘차게 자기의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재능을 많이 주셔서 그래서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그 재능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은사를 주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모두 넓은 의미에서 보면은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큰 능력을 다방면으로 준 사람 치고, 아주 그 능력이 많이 주어졌기 때문에 못 받은 사람들은 고생고생 하면서 주님의 일을 하는데, 능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아주 편안하게 호강하면서 주님을 섬겼던 사람들이 어디에 있어요? 어떻게 보면, 능력을 많이 받은 사람들은 그 능력을 따라서 더 많이 힘에 넘치도록 고생을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말씀도 깊이가 있게 전했을 뿐만 아니라, 죽은 자도 살려내는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큰 권능을 행하던 사도 중에 사도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뭐라고 말합니까? ‘죽을 고비를 수 없이 넘겼고, 만물의 찌끼와 같이 여김을 받아서 살 소망이 끊어져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을 알았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급기야는 고린도 교회에 고린도 지방에 복음을 전하러 갈 때에는, 그 마음이 심히 두렵고 떨려서 견딜 수 없는 그 떨림과 두려움 속에서 복음을 전하러 가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과연, 여기에서 관록에 빛나는 위대한 사도의 어떤 위엄이나 기개, 확신, 이런 것들이 보입니까? 아닙니다. 오죽했으면, ‘내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부득불 나는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 왜? ‘그 약한 데서 하나님의 강함이,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정도로 너무너무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약했다기 보다는 그렇게 고난을 많이 받았던 것입니다.
이 설교를 했더니 어떤 사람이 그러더랍니다. 이제까지는 “하나님이 능력 좀 주십시오. 기도 많이 했는데, 하지 말아야겠다.” “왜요?” 그랬더니 “아니, 그렇게 고달픈 삶이 기다리는데, 무얼 그렇게 가늘고 길게 살지, 큰 능력 받아서 그렇게 고생하면서 그럴까?” 그런데, 거꾸로 생각을 해봅시다. 그렇게 능력을 받은 사람은 정말 고달프게 삽니다. 그래서, 능력이 없다고 칩시다. 여러분들이 능력이 없는 삶은 신나도록 살아봤잖아요. 매일 사는 삶 아니에요? 그래서, 행복합니까? 묻는 거에요. 진지하게... 즐거워요? 아멘이면 그렇게 하구요. 받은 능력도 반납하겠네? 뭐, 별로 없지만?
고난을 받는데 종류가 다릅니다. 능력도 없고 받은 게 없어서 고난을 받는 것은, 고난이라고 그러는 게 아닙니다. 그건 그냥 고생이라고 그러는 것입니다. 고생! 그냥 고생하는 것입니다. 머리가 나쁘면은 제일 고생하는 것이 손과 발이죠? 그죠? 그래서 머리가 나쁜 사람들의 손과 발은 험합니다. 왜? 고생을 많이 하니까... 그냥, 고생을 하는 겁니다. 고생! 하기는 해야 되는데 능력이 없으니까 겨우 생존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 하나님을 위해서 가슴 벅차는 일 같은 데는 도전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서부터 그것은 자기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생동안 고생을 하면서 살았는데, 그야말로 고생을 했을 뿐이지, 하나님을 섬긴 적은 한 번도 없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고난을 받더라도 하나님 앞에 능력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얘기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큰 능력을 주셔서 우리로 능하게 하시는 것은, 모든 것을 견디고, 오래 참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이죠.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지만은, 후에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의 마음이 변해서 사도바울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하나님도 믿지만, 그러나, 좀 철저히 믿지 말고 적당히 타협해서 고달프지 않은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따르던 복음은 물로 탄 복음이었고, 엄격한 삶을 요구하지 않는 느슨한 복음이었고, 사도바울은 피 뭇은 복음을 전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의 정신에 부합하는 삶을 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니까 그 사람들이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어떻게 하든지 깍아 내릴려고 생각을 하다가 떠오른 아이디어가 ‘그 사람이 진짜 사도일까? 뭐,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 만났다고 그러는데 우리가 그걸 봤냐? 그 사람은 예수님도 직접 만나서 사도로 임명을 안 받은 사람인데...’
이 사도바울이 그 얘기를 들었을 때에 마음 속에서 크게 분노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도바울이 고린도서를 쓸 때쯤 되어서는 그 젊은 날의 혈기가 많이 죽고, 그래도 성화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에 편지를 쓸 때에 이랬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보고 사도가 아니라고 그러지만, 나 사도 맞거든? 내가 사도라는 증거를 보여줄까?” 그리고 고린도 후서 12장 12절에서 두 가지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큰 기적이 일어나는 것과, 그리고” 그것은 동의할 수 있잖아요. 사도 아니라고 그러는데, 한번, “귀신아 물러가라!” 그러면 귀신이 나가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 이 외에는 그런 일을 할 수 없거든요. 그런데, 이것을 먼저 앞세운 것이 아니라, 더 먼저 앞세운 것이 뭐냐하면은 “인내와, 기사와” 그랬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너희들은 나보고 사도 아니라고 그러는데, 사도 맞거든? 그래도 내가 사도 아닌 것처럼 의심이 되냐? 그러면 생각해 봐라. 내가 이렇게 오래도록 참았다. 내가 사도가 아니었다면 참을 수 있었겠느냐? 이게 내가 사도인 증거다. 지금 너희들도 참고 있지 않느냐? 사도인 증거다. 그리고, 또, 하나가 내가 이적을 행한 것이다.” 두 개를 얘기 합니다.
그 오래 참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무엇이냐 면은 오래 참음이 사랑의 제일가는 속성입니다. 그러면 오래 참는 게 왜 사랑의 제일가는 속성이냐? 둘이 서로 사랑할 때에 뜨거운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뜨거운 사람보다 덜 뜨거워도 진짜 그 사랑이 참된 사랑이면 그 사랑은 오래 참음을 동반합니다. 사랑에는 세 가지 국면, 혹은 요소가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자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은 오래 참음,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긍휼입니다. 긍휼! 자비와 긍휼과 오래 참음, 이 삼각형이 사랑의 삼각형입니다. 그런데, 이 오래 참음은 어떤 측면을 보여 주냐 하면은요. 원래 사랑이라고 하는 그 마음의 성향 자체가, 그러니까 도덕적인 피조물 혹은 지성적인 피조물! 하나님, 인간, 그리고,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 천사도 물론 있지만, 이런 지상에서는 하나님, 혹은 인간에 대한 사랑만이 사랑이라고 부르고, 우리는 이런 표현을 합니다.
“난, 꽃을 사랑해!”, “나는 등산을 사랑해!”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선택!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혼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두기를 여기다 선택을 하고, 이렇게 만져보기를 선택을 하고,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선택입니다. 사랑이 아니라... 우리는 그런데서 용어 사용이 불분명합니다.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과 인간 뿐입니다. 인간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사랑은 관계를 계속하고자 하는 성향입니다. 두 사람이 있어도 누가 더 사랑하는가 하는 것은, 누가 더 열 받았는데, 더 뜨겁게 사랑을 표현하느냐는 순간적으로는 사랑의 크기를 감정의 크기를 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둘이 둘 중에서 먼저 헤어지는 사람이 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끝까지 그 관계를 없는 관계는 수립하고, 수립된 관계는 더 친밀하고 더 돈독하게 유지하려고 하는 것, 그리고, 그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에 고통을 느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을 가지고 있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시편에서 시인이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날에 불안하고 떨면서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 눈물로 간구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사랑하는데 주님은 나에게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이게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나오는 반응입니다. 그러면, 사도가 ‘오래 참았다’라고 하는 그것은 뭘 의미하냐면 하나님 앞에서 받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아주 수준 높은 영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성의 신령적 증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으로 그 사람이 특징지어지는 것, 그것이 아주 탁월한 영적인 인물이 된, 영적인 사람이 된, 떼어놓을 수 없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이 큰 능력을 주셨다고 할 때에 그 능력이, 우리에게는 실망스럽지 않아요? “내가 너 능력 많이 줄게. 그래서 너에게 협조 안하는 사람들 요절을 내고 마귀의 권세를 다 떼려 부수고, 안되는 게 있으면 무조건 되게 하는, 그래서 예전에는 니가 작은 삽을 들고 삽질했지만, 이제는 내가 너에게 응답해준 커다란 트랙터를 줄 테니까 말 안 들으면 밀어버려.” 이런 게 능력이 아니라, 이런 것만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을 많이 주시면, 그 능력이 사랑의 능력으로 나타나서, 주님의 일을 하면서 교회를 섬기면서, 성도를 섬기면서, 이 세상에 있는 불쌍한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오래 견디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래 참는 것입니다. 능력을 안 주셨으면 못했을 그런 일인데, 하나님이 능력을 많이 주셨기 때문에 견디고, 오래 참는 것입니다.
오늘, 분당 중앙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고 왔습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라는 설교를 잔뜩 준비해가지고 기도를 하고 갔는데, 교인들이 다 할머니만 모였습니다. 아무리 설교해도 효도할 부모가 없잖아요. 그래도 젊은이들이 한 30% 왔길래 그래도 했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주셨는데, 그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김목사님! 나는 이제 오래 목회 한 사람은 무조건 조경스럽습니다.” 왜 그러나 그러니까, ‘얼마나 참았을까? 얼마나 참았을까?’ 그러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사랑은 그렇게 우리로 하여금 오래 참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할 수 없이 크신 사랑이 어떻게 나타난 것이에요? 오래 참음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으셔서가 아니라 너무 능력이 많으셔서 우리같이 못난 인간들을 끝까지 참으시는 것입니다. 이게 사실은 지난주에 한 얘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이 이 능력을 주신 이유를 오늘 성경은 ‘감사하게 하시려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고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을 얻게 하신, 얻게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면서’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크신 능력을 주신 것은, 감사하면서 오래 참고, 모든 견딤을 감당하도록 그렇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감사는, 자기가 처한 형편과 처지를 초월하여 거기서 자신과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 당신을 즐거워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다시 한번 하겠습니다. 자기가 처한 환경을 초월하여 자기와 관계를 맺고 계신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게 감사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행복과, 만족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물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많은 축복을 받아서 환경적으로도 내가 너무 좋아하는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오랫동안 시집가게 해달라고 그랬는데, 자기보다도 훨씬 어리고, 예쁘고, 돈도 많고, 신앙도 좋고, 집안도 훌륭하고, 인격적으로도 그런 아름다운 형제가 나타나서 양가의 모든 축복 속에서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뭐, 불만 있어요? 좋아요. 나빠요? 얘기를 크게 해야지만 다른 사람들이 듣고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좋아요. 나빠요? 좋아요. 그러나, 그때 감사한다고 하는 것은 그것 자체 때문에 즐거워서 감사하는 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 모르는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들이 일어났을 때 너무 좋은데 사실은 더 가슴 벅찬 것은 나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그래서 이러한 일들을 나를 통해 행해주셨다. 이것은 겉으로 이만큼 들어난 것이지만, 사실은 들어난 이 조그만 은총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잊어버리지 않고 이렇게 많이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나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즐거워하는 것은 사실은 그렇게 결혼하게 된 것 때문에 즐거운 게 아니라, 그 일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이 나를 아직도 기억하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 때문에 감사하니까, 이것은 하나님 자신 때문에 즐거워 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그게 진정한 의미의 감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환경과 상황에만 달린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신앙에만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분에 넘치도록 큰 영광을 누리면서도 하나님 앞에 감사를 못하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남이 볼 때에는 조금도 감사할 것이 없는 정말 비참한 속에 살면서도 거기에서 하나님이 자신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더 가슴 벅차서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감사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정말 자신의 모든 삶에 환경을 초월해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하는 최상의 표지입니다. 사랑과 함께 최상의 표지입니다. 감사가... 그런데, 우리는 감사가 없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적은 없습니다. 항상 문제는 감사하지 못하는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요즘 감사할 만한 일을 안 하고 계시는 우리 주님께 문제가 있죠? 누가 그러더래요. ‘주님이 나를 감동만 시켜봐. 나도 열심을 내지 않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끝까지 하나님께 불순종하니까 하나님이 꽝 하고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다 멸망당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다 훼파되고,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바로, 폐허가 된 터 위에서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렇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찬양)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주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왜 그럴까요? 왜 그는 '주의 인자하심은 끝이 없고, 그의 성실하심은 아침마다 새로우십니다.'라고 모두 멸망당하고 파멸되어버린 예루살렘의 황폐한 터 위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가슴이 벅차도록 찬양을 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 이었을까요? 하나님의 성실하심 때문에... 왜? 하나님은 분명히 ‘너희는 망하리라’ 하셨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이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오직 분노하기만 하는 복수의 심정으로 행하신 일이 아니라, 그렇게 불신앙으로 절고, 불의와 죄악이 섞여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 환난을 통해서 깨끗이 씻으셔서, 다시 연단된 아름다운 순결한 백성들로 만드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셨으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래서 남이 볼때는 감사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곳에서 가슴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신문을 보니까 요즘 어린 학생들의 폭력이 아주 심해지잖아요? 그런데, 그 학생들의 이야기를 목소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뭐라 그러냐면은 차라리 때려달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학교 가서 제일 괴로운 것은 선생님이 줄을 딱 긋고, ‘너희는 교육시켜도 안 될 놈들이니까 줄을 딱 긋는다.’ 여기 있는 애들이 말을 안 들으면 야단도 치고 때리기도 하는데, 얘네들은 재껴 놓은 애들입니다. “선생님! 나 오늘 늦었습니다.” “알았다.” “나, 빨리 가야되요.” “알았다.” 말도 안하고 수업시간에 봇다리를 들고 나가도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하면은 차라리... 옛날의 선생님들이 좋았다고 그러면서 옛날의 선생님들은 막 때리고는 항상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줬다는 것입니다. 요즘 선생님들은 때린다고 뭐 한다고 그러니까 줄을 딱 그어놓고 상대를 안 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아이들 속에서 분노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모든 환경을 초월해서 하나님과 맺은 관계 때문에 행복하고 만족하고 하나님 자신을 즐거워하는 데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충분한 만족, 그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하게 하시려고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감사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오늘 회개하고, 이제는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께 감사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에 감사하여야 할 이유들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빛 가운데로 부르셨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게 하셨다. 첫째는 빛 가운데! 우리를 향한 부르심은 빛 가운데로 부르신 부르심이었습니다. 히랍어 성경에는 정관사가 나와서 ‘그 빛’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성경에는 이 빛, 빛에 관해서, 이미 공과공부 했으니까 뭐 박사시겠네요. 그죠? 빛에 대한 용례가 세 가지 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물리적인 빛, 그냥 이런 빛입니다. 햇빛, 달빛, 별빛, 뭐, 불빛, 뭐 물리적인 빛이에요.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냥 빛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하면, 신학적인 빛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는 빛입니다. 세 번째가 윤리적인 빛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빛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셨다.’ 그 얘기는 무슨 뜻이냐면, 신학적인 의미와 윤리적인 의미를 함께 갖고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럼, 신학적인 의미의 그 빛으로 부르셨다는 것은 무슨 뜻이죠? 예전에는 인생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힘들게 인생을 살아가는 지에 대한 아무 의식이 없었습니다. 먹을거 있고, 그냥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일이 있으면 내일은 어떻게 되든지 간에 던져주는 개뼈다구 먹으면서 꼬리를 치는 강아지처럼, 그렇게 말초적인 삶만 살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변할 수 밖에 없는 이 세상을 보면서 기뻐하고, 좌절하고, 분노하고, 행복해하고 하는 이렇게 끊임없이 요동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찬양) 천국과 지옥도 나는 몰랐네
고집대로 영죽을 험한 세상이
왜 이리 더러운지 이제야 아네
그러고 깨달은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나 같은 인간을 지으시고, 교회의 한 지체가 되게 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구원 계획 때문 이었구나!’ 아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빛 가운데로 부르셨다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하면, 윤리적인 빛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막돼먹은 인간으로 살았습니다. 경우도 없고, 부도덕하고,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큰 영광인줄을 알고 이렇게 살았는데, 예수님을 만나고 ‘아, 그것이 아니구나! 내가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언제, 설교시간에도 내가 두 번 얘기 했는데, 하두 오래되서 한번 더 하겠습니다. 처음 들은 것처럼 그렇게 들으세요.
아우구스트누스가 가슴이 참 뜨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성 편력도 아주 많았습니다. 회심하기 전입니다. 한 때 동거생활 했던 여자가 아우구스트누스가 사진이 없으니까 모르겠지만은 꽤 그래도 교양이 있고, 지성인이고, 얼굴도 잘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만났습니다. 너무나 반가운 것입니다. 이 여자가... “어거스틴! 어거스틴! 저에요. 절 몰라보시겠어요? 당신과 함께 사랑을 나눴던 여자, 저에요.” 이 어거스틴이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대는 예전의 그대이지만, 나는 이제 예전의 어거스틴이 아닙니다.” 이게 바로 어두움 가운데서 빛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항상, 이 마음속에 갈등을 느낄 때마다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되냐면,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말을 스스로 대뇌면서 자기를 다스려야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 그게 바로 빛 가운데로 부르신 것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거룩한 기업의 합당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게 감사해야 할 이유라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서 무슨 뜻이에요? 우선, 거룩한 기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누리게 되는 모든 좋은 것들이 기업입니다. 어떤 것이 있을까요? 우선, 제일 먼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이것이 유업입니다. 양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법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니까 그 집안에 입양이 되어서 양자가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명분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자녀다.’ 어디에 가든지 그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 인식됩니다. 그것을 갖는 것입니다. 정주영씨가 살아계실 때 몇 번을 자랑을 하더라구요. “우리 현대는 신용이 있는 회사입니다. 수 십년동안 그것을 일궈왔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지금 당장이라도 현대라는 이름 하나를 가지고, 아무 담보 없이 국제 시장에서 2조원을 빌려올 수 있답니다. 그런 회사는 많지 않습니다. 그게 뭐죠? 명분이에요. 명분! 어디가도 우숩게 보지 못하는 명분! 명분입니다.
또, 그뿐만이 아닙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징계도 이런 하나님의 자녀됨의 유업’이라고 말합니다. 징계! 아까 얘기했듯이 딱 그어내는 게 아니라, 한 싸데기 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바로 해! 선생님은 아직 너를 포기하지 않았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이 바로, 그런 것 뿐만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서 누리는 생명의 큰 능력,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으면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유업입니다. 물론, 이 다음에 천국에 가서 누리게 될 영원한 행복까지 모두 포함한, ‘이런 모든 기업을 하나님이 얻기에 합당하게 해 주셨다.’ 이 얘기입니다. 이 기업은 원래, 성부가 성자에게 주신 기업이고, 또, 성자는 신부인 교회에게 함께 누리게 하신 기업인데,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짐으로서 함께 누리게 되는 것, 이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합당하게 하신 방식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영광스럽고, 거룩한 기업은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기업이 아닙니다. 족보가 다른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기업입니다. 그렇게 죄 가운데 살고,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처럼 행했던 자들은 그 영광스러운 기업을 누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누리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누리도록 합당하게 해 주신 방식이 있었을 것 아니에요? 그게 뭐냐하면,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대신 고난을 당하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끔찍한 형벌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용서를 받고 그 기업을 얻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주님께 인정이 받게 해 주신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구원을 얻은 우리를 즉시,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 한 몸이 되게 하심으로서, 마치, 심장에서 출발한 피가 온 몸을 휘도는 것처럼, 그렇게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까지 미치게 하셨고, 그래서 그 영광스러운 기업에 참여하게 해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번, 하나님의 진노아래에 살아가고, 구원과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던 때에 그 비참한 백성의 삶과 한번 비교해 보라는 것입니다. 아무 희망 없이 그렇게 죽어가던 비참한 인간을 일체의 공로가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을 하나님이 큰 능력으로 살려내셨습니다. 구원해 주셔서,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게 하셨습니다. 아멘. 이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여야할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것입니다. 충분히...
그런데, 그 감사를 누구에게 드리게 하려고 했냐하면,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랬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아버지가 누굴까? 그래서 오늘 여러분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하나 가르쳐 드리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은 ‘하나님 아버지!’라는 호칭이 많이 나옵니다. 때론 하나님 빼고, ‘아버지!’라고 많이 나옵니다. 거기는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이 아버지는 모두 같은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두 아버지로 나누어집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에 이게 어느 아버지에 해당이 되는지를 잘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자, 예를 들자면, 첫 번째는 이런 경우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으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은 이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성자를 낳으셨느니라’ 할 때에는 위격으로서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 중에서 한 위이신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성령도 아니고, 성자도 아닌, 성부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로부터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격으로서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훨씬 많은 경우의 아버지가 나오는데, 그것은 뭐냐하면은 성부, 성자, 성령은 위격은 셋이지만, 본질은 하나입니다. 하나! 하나의 신적 본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에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신적 위격이 아니라, 본질로서의 아버지입니다. 그러면, 여기에는 성부, 성자, 성령이 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잘 들어보세요? 이런 기도는 전적으로 잘못된 기도입니다. ‘예수님, 우리의 예배를 받아주세요.’ 그런 기도는 잘못된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대상은 예수님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가 성부가 아니라, 신적본질로서의 아버지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삼위일체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아주 재미있는 해석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하나님께 많이 기도하셨잖아요? ‘하나님 아버지, 이 양떼들을 보살펴 주시옵소서.’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그때에 부르신 아버지가 자신을 포함하는 신적인 본질로서의 아버지입니다. 성령 뺀 성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인성으로서는 여기에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제한된 장소에 오셨지만, 신적 본질에 있어서는 무한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계신 거기에도 있는 것입니다.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위격으로서는 아버지께 간구하지만, 간구를 들으시는 아버지 안에는 당신도 포함하는 신적 본질로서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가 지금 ‘이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기를 원합니다.’ 라고 할 때 이 모든 구원의 은혜, 성도로서 이 모든 영광스러운 기업을 누리게 하시고, 결국은 이 모든 기업을 얻기에 합당하게 해주신 것이 성부나 성자, 성령, 어느 한 분이 하신 그 일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여기에서 지극히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타락한 인간이 머릿속에서 그리는 그 아버지는, 이 하늘에서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고 하는 그 아버지하고는 현저히 다릅니다. 이 땅에서의 아버지는 때로는 불친절하고, 폭압적이고, 자상하지 않고, 위압적이고, 권위적이고, 이기적이지만, 하늘 아버지는 마치, 차라리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위엄과 자비, 공의와 사랑, 율법과 복음을 함께 가지고 계신, 그런 아주 넓고 자애로우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아버지에게서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마다 쉼을 누렸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그게 아버지입니다. 결국은 뒤집어 보면, 우리가 이렇게 감당할 수 없는 많은 하늘의 기업을 얻고, 영광스러운 구속의 은혜를 얻고, 진리의 빛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의 빛 가운데서 살게 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감사함이 없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깊이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여야 합니다. 맨 처음 주님을 믿고, 그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고,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성령의 은혜의 우리의 마음이 강하게 되던 그 때에, 얼마나 우리의 마음속에 감사가 넘치고, 하나님께 대한 기쁨이 충만했는지를 기억하면서, 떨리고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그리고, 항상 마음속에 ‘잘못한 것이 있으면 우리가 있지, 주님은 우리에게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이 충만한 영적인 은혜를 받고, 다시 한번 그 능력 안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사는 복음적인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6. 어둠의 권세에서 건지심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골1:13)
녹취자: 윤은정
Ⅰ. 본문해설
사도는 12절에서 성도의 기업을 누리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하나님 앞에 성도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3절과 14절에서 우리를 그렇게 성도가 되게 하셔서 기업을 얻게 하신 본질이 무엇인지를 두 절에 걸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워낙 많은 내용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13절과 14절을, 우선 13절을 두 주에 걸쳐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Ⅱ. 신자의 지위와 그리스도의 중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자의 지위와 그리스도의 중보에 대해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앞서서 사도는 우리를 성도의 기업의 한 부분을 누리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기업을 누리는 것은 신자로서 하나님의 자녀의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A. 신자의 지위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구원에 있어서 매우 중한 결과라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을 뿐 아니라, 우리를 의롭게 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를 영적으로 당신의 몸인 교회에 접붙이실 뿐 아니라, 그렇게 접붙임바 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수양, 혹은 양자됨 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이런 양자됨의 4가지 특권이 따른다는 사실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유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누리는 첫 번째 특권은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신분에 있어서 죄인이었던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준 신분의 자유이고, 또 하나는 신분만 자유롭게 해주셨을 뿐 아니라, 영혼과 마음의 상태를 이전에 얽어매고 있었던 모든 사슬로부터 끌려주시고 속박과 억압으로부터 그를 구출해 내심으로서 자유를 누리며 살게끔 만들어 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유가 된 첫 번째 특권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할 수도 없지만, 혹시 양심을 따라서라도 율법의 어떤 선한 것을 행하려고 할라치면 마음과 영혼에 자유가 없기 때문에 스스로 악에 굴러 떨어지고 아우구스트누스가 말했듯이, 익숙해지지 않은 선보다는 이미 익숙한 악을 따르는 부자유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부자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그 모든 사슬에서 끊어 자유를 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첫 번째 특권입니다.
두 번째는, 갈라디아서 4:5 에 보면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명분을 주십니다. 타이틀입니다. 전에는 진노의 자식이었고, 저주의 자식들이었지만, 본질상 진노의 자식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 언약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서의 명분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특권입니다.
세 번째는, 담대함입니다. 히브리스 4:16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속죄함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우리들이 하나님앞에 잘못하고, 불순종하고, 때로는 죄를 지었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에 나의 이 모든 불순종과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즉, 언제든지 내가 진실하게 나의 죄를 뉘우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은 나의 죄와 오류 때문에 영원히 나를 파멸에 버려두시지 아니하신다고 하는 확고한 특권을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우리의 선행 때문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혈 때문인데 그분의 보혈의 가치가 무한하기 때문에 그 어떤 죄인의 끔찍한 악도 속량할 수 있고, 무한하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인류의 죄를 속량해도 그분의 십자가의 공로는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가 징계인데, 히12:7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과 같이 대우해 주시나니 우리가 징계를 받는 것이라. ‘징계가 없으면 그것은 친 아들이 아니요. 사생자라’ 그래서 이 징계가 특권입니다. 특권!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시고 치시는 것, 그래서라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 올바른 자리로 돌아오고 하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누리는 네 번째 특권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로서 이 모든 것을 유업을 누리는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자, 양자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집안에서 태어난 애가 그 집안의 자녀가 되는 것을 가리켜서 양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양자는 남의 집 아이를 내 집에 들이는 것입니다. 원래는 피가 안 섞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법적인 행위로서 남의 아들을 자기 아들이라고 인정해주고 그 집의 한 가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한 가족이 되는 순간부터 아버지와 그 집안의 모든 식구들이 누리는 그것을 자신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 이게 하나님의 자녀 됨의 유업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누릴 수 있도록 권세를 부여해 주셨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자유와 명분, 담대함, 징계, 이런 것들을 자신의 삶으로서 하나님 앞에 자신이 복되게 살고,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는 모든 일들을 위해서 이 유업들을 충분히 누리며 알고, 충분히 알고 그것을 누리며 살 때에, 그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쁜 것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이런 것들을 현실적으로 자기가 영적인 생활 속에서 누리면서 인간으로서 사는 그 모든 삶의 원동력을 삼지 않으면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 말따나 십원만 약간 못한 구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자기의 책속에서 신자가 짓는 가장 심각한 죄 중 하나가 구원을 하찮게 여기는 것입니다. 구원은 누구나 얻을 수 있고, 그저 내게 기본적으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자의 커다란 죄라는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 고난을 이기면서 믿음을 지키게 하는 힘, 어디서 나올까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역경과 고난을 인내하면서도 자신에게 주시는 사명을 붙들고 살아가게 하는 큰 능력이 어디에서 나올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자녀 삼으셨고, 환난이나, 위험이나, 적신이나, 칼이랴,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가 없다라고 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에 대한 굳은 믿음,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됨의 현재적인 체험, 그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는 놀라운 힘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B.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함
그런데, 그런 놀라운 신자의 지위, 그리고, 유업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훌륭하게 율법을 준수했기 때문에?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디에서부터 이 놀라운 하나님의 자녀됨의 유업의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요? 결국은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속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율법의 정죄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시고, 죄를 지은 죄의 비참함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시고, 죄에게 팔려 속박되어있는 거기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시는 것이 구속인데, 그 구속의 결과는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유업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어서 우리가 지은 많은 죄들을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이 씻어주신 다음에 “자, 이제 너희의 죄는 깨끗케 되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를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준 구원이다.” 이렇게 말씀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왜?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케 씻으시는 것은 구원의 소극적인 측면이고, 죄를 차마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하고 깨끗이 씻기시는 것은 우리를 당신과 다시 실제적인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시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베푸시는 힘이고 또,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인인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죽어도 씻을 수 없는 죄를 깨끗이 씻어서 죄의 책임으로부터 우리를 깨끗케 해주시는 칭의, 죄책으로부터의 해방이 칭의입니다. 그리고, 죄를 지은 이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자녀에게 누리게 해주시는 그 모든 특권들을 실제적으로 누리게 하신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중보는 구원을 얻는 한 순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그리스도인의 중보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올려지고, 또, 하나님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도할 때에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라고 할 때 그것은, 토레이 목사님의 설명에 의하면은 싸인 입니다. 싸인! 여러분들이 만약에 수표를 일 억원 짜리 수표를 받았는데, 그 밑에 지점장의 도장이 찍히지 않았더라면 그것은 종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어디에 가져가도 돈을 줄 리가 없습니다. 싸인 하나면, 혹은 도장 하나가 거기에 찍혀있는 것과 찍혀있지 않은 것 사이가, 하나는 휴지조각이고, 하나는 유가증권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서 우리가 비는 모든 소원은 우리가 하나님께 올리는 소원이지만,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보증으로 아버지께 올려지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가장 선하고 순수한 섬김조차도 거기에는 인간의 불순물과 더러움이 섞여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를 통해서 우리 하나님 앞에 신실한 섬김으로 올려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섬김, 심지어는 우리의 마음의 묵상까지도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께 올려지는 것입니다. 어디 그것 뿐이겠습니까? 세계에 있는 모든 만물들이 기동하고 역사하고 움직이는 것도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고, 이 역시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모든 말씀과 성령의 능력, 각종 좋은 은사와 우리의 마음속에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의 정동까지도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밀려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찌하든지 구원받을 때만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이후,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뿐만 아니라, 된 이후, 주님의 자녀가 될 뿐만 아니라, 되어서 그 특권을 행사하고 누리며 살아가는 이 모든 삶의 과정 전체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지겠끔 하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덜 의지할 사람들로 우리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불신자로 살아갈 때에 우리는 예수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몰랐기 때문에 의지하지 않았고, 알았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이 진실하게 영혼이 거듭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의지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의 죄고, 교만이 그 모든 죄의 근원적인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나서도 흠이 없는 사람일수록 그리스도를 더 많이 의지합니다. 은혜가 충만한 사람일수록 더 많이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퍼지면 정말 회개할 사람이 회개하는 일은 드물게 일어납니다. 그리고 오히려 남들이 볼 때에 비교적 신실하게 신앙생활하고, 온전하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성도들이 더 많이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애통해 하며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고 뉘우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교회사에서 통계를 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교회사에서 큰 부흥을 누리면서 교회가 순전한 교회가 될수록 죄에 대한 설교들이 훨씬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죄가 많아질수록 죄에 대한 설교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 보고 있는 하나의 놀라운 증거입니다. 그 이유가 뭔지 가르켜 드릴까요? 설교에서 약간 옆으로 나갔지만은... 싫으면 관 두시구요. 이유가 무엇때문이냐면 이것 때문입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관심사가 죄입니다. 왜냐하면,자기의 최고의 행복은 예수를 닮는 것이고 그의 형상을 따라서 온전해가는 것인데, 이 세상의 환란이나, 핍박이나, 늙음이나, 못생김이나, 배고품이나, 고난이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자의 일은 우리의 영혼에 관한 일이고, 후자의 일은 우리의 육체에 관한 일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은혜 많이 받고 새벽기도하고, 저기에서 ‘정말 주님 사랑해요.’ 그러고 걸어가는데, 누가 우리를 핍박한다고 똥바가지를 확 끼얹었다고 칩시다. 우리의 몸은 순식간에 더럽혀질 수 있겠죠. 그리고, 우리도 굉장히 불쾌하겠죠. 똥을 뒤집어써서 좋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사실 똥은 더러운 것이 아니데, 어쨌든 뒤집어 썼을 때 별로 상쾌하지는 안겠죠.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리의 정신이 더러워졌습니까? 우리의 영혼이 불결해 졌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관심사가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더 온전해지고 싶은 것입니다.
저도 가만히 이렇게 돌아 보면은 나의 죄를 인해서 가장 많이 울고, 아파하고, 고통스러워 했을 때가 있었거든요. 상당한 기간 동안에, 신학교 다니는 동안에, 그때 보면은, 지금 생각해보면은 지금보다는 훨씬,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이렇게 신앙을 아는 지식이나, 신학을 아는 지식이나, 이런 것들이 미천했지만, 나는 그때가 훨씬 더 순수했다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랬기 때문에 매일 새벽기도 나가면 3분의 2 이상은 나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부족하고 더러운 인간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일생동안 계속되는 것입니다. 은혜에서 떠나게 되면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관심사 자체가 진실하고 거룩해 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죄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닙니다. 왜? 관심사는 그 죄를 미워하고 처리하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순결해지고 거룩해지려고 할 때에 그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이미 마음의 소원자체가 그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번영하고, 이 세상에서 자신이 스스로 향락을 누리고 즐거워하면서 사는 이것이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되어 있을 때에는 관심사가 그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설교하면 사람들이 다 떠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성경학자가 책을 썼는데 처음 시작하면서 탁 넘기니까 ‘현대 사회에서 목회가 성공하는 법! 잊지 마십시오. 부정적인 것을 말하지 마십시오.’ 그 부정적인 것 중에서 가장 부정적인 게 죄입니다. 죄! 죄에 대해서 말하지 말고 은혜에 대해서 말하십시오. 죄를 얘기하자고 은혜를 얘기하면 그것은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낮에는 별이 있어요? 없어요? 어디 가겠어요? 하늘에 붙어있지. 그런데 환하기 때문에 별 볼일이 없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내려야지만 하늘의 별들이 초롱초롱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똑같이 죄를 사람들에게 말함으로서 그게 정말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은혜의 진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부흥의 시기에 바로 그런 죄의 설교들이, 누가 아예 통계를 냈는데 55%였다고 하더라구요. 죄라는 주제에 대한 설교들이... 영국 청교도시대 때에... 굉장한 것입니다. 오늘날 죄에 대한 설교가 없는 것은 바로 오늘날의 관심사가 거룩함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변화되지 못한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의 관심사는 행복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자의 관심사는 거룩함입니다. 거룩함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의 모든 유업을 얻고 누리게 하시는데, 성부에 의해서, 성자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이 일을 이루심으로서 우리의 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살아가는 이 모든 삶을 이렇게 삼위 일체 하나님과 연관해서 이해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이 구원의 본질을 ‘흑암의 권세에서 건지신 것이다’라고 표명합니다.
Ⅲ. 흑암의 권세에서 건지심
A. “흑암”(σκότους)
제일 먼저 흑암이라고 나옵니다. 히랍어 성경에 스코투스라고 되어 있는데 이 흑암입니다. 성경에서 이 흑암은 크게 세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그냥 물리적인 흑암입니다. 물리적인 어두움입니다. 두 번째는 신학적인 어두움입니다. 이것은 뭐냐하면 무지와 오류 속에서 인간이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상태, 이것을 가르켜서 흑암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6 에 보면은 ‘어두운 세계를 빛이 비춰라’ 하나님이 말씀하심으로서 진리의 빛이 비추게 되는 것을 사도가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어두움은 무지 속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류는 그 무지를 어떤 판단으로 옮겼을 때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의 진리인데, 이 진리를 기각해버리게 되자 그 다음에는 무엇을 가지고 이 사태를 판단할 것인가 함에 있어서 진리가 아닌 다른 기준을 가지고 들어오게 되는데 그것을 기준으로 채택한 것은 인간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결국은 이 진리의 기준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냐, 하나님이냐, 둘 중의 하나지, 제 삼의 무엇이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근대주의를 가르켜서 모더니즘이라고 이야기하잖아요? 모던하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말이죠? ‘현대적이다.’ 원래 라틴어로는 ‘새롭다’라는 뜻입니다. ‘모데르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게 무슨 뜻이냐하면, 11세기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사물을 보는 관점들의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예전에는 여기에 어떤 사물들이 있으면 이 사물은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 이 사물에 대한 관념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여러분들이 학교 다닐 때 배웠던 이데아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아주 불완전한 형태로 비슷하게 시간과 공간속에서 이렇게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 졌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사실은 가짜입니다. 이것은 저 위에 것을 보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동기지만, 이것을 거꾸로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떡하냐면, 이것들을 비평하면서 저 위에 하나님 마음안에 있는 그 이데아는 무엇일까라고 생각하면서 모든 판단을 위에서부터 내려서 이렇게 연역하는 방식으로 위에서부터 시작해서 아래로 내려오는 이것이 바로, 이세상의 모든 사물들을 보는 관점이었고, 시작하는 그 위에는 항상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계신 것입니다.
그러다가 11세기서부터 커다란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13세기, 14세기에 와서는 더 격렬한 인류 역사에서 지축을 뒤 흔들 것 같은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뭐냐하면,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나온 학문의 방법을 새로운 방법이라는 ‘비아 모데르나라’라는 말을 씁니다. 새로운 방법으로 학문을 하는데 그 새로운 방법이라는 게 뭐냐하면은 윌리암 오카미나, 두스 스쿠트스나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저 위에 그런 것, 우리가 확신할 수 없다. 여기에 만약에 이런 풀이 있다면 이 풀을 보면서 이것이 ‘풀이구나’라고 우리가 직관하는 것, 이것만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이렇게 존재하는 것이지, 이것을 토나라는 저 위에 무슨 것들이 따로 있다고 우린 확신할 수 없다. 증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주 중대한 발언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을 통해서 진리를 찾는 것은 이것이고, 우리가 아무리 순순하게 학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이성의 진리는 따로있다.’ 소위 얘기하는 이중진리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새로운 방식으로 학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아세요? 잘 들어보세요.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전에는 인간 앞에 펼쳐진 이 모든 자연세계가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서 ‘후’하고 하나님이 콧김을 불어넣으시는 것 같이 구름이 생기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은총으로 비를 내리시고, 그러니까 식물들이 기뻐하면서 확 깨어나고, 그래서 사람들 앞에 이 자연의 세계는 신비롭고, 하나의 통일된 세계로서 하나님을 증거하는 거대한 하나의 살아있는 신비체로서 인간들에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느끼고 교감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안보이고 어떻게 보이냐면은 이것이 아주 엄격하게 법칙이 있어서, 원인-결과-원인-결과-원인-결과로 이어지는 거대한 고리로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거기에 우연이라든지 하나님께서 직접적으로 간섭하시는 기적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제외되는 것입니다. 세계를 이런 식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처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렇게 체계적으로 새로운 체계에 의해서 세계 전체를 하나님의 생명체가 아닌 기계처럼 얽혀있어서 원인과 결과만이 작동하는 세계로 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던한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 것이고 그런 세계관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모더니즘에서는 최고가 뭐냐하면은 인간의 이성이 되는 것입니다. 세계는 기계적이고 규칙적이기 때문에 무엇인가 신비한 것이 있는 것은 아직까지도 인간이 똑바로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시간을 가지고 좀 더 연구해 보면은 거기에는 정확한 규칙이 있고 그것으로서 신비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세계를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그 다음에 어떻게 돼죠? 모든 판단의 기준을 인간의 이성을 기준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성을 초월하는 것은 없다’고 부인하거나, 혹은 ‘시간을 기다리고 규명을 하면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을 때가 온다.’ 하고 규정을 하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기준으로 규정을 삼는 것을 버리고 인간이 이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 역사에 커다란 어두움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밝음은, 밝음도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밝음은 뭐냐하면은 물질의 세계를 착취하고 이용해가지고 끊임없는 물질을 생산해내는 것입니다. 왜? 이것은 법칙가지고 되니까, 끊임없이 이것들을 생산해서 인간들이 오늘날의 중산층이 누리는 삶을 17세기의 왕족들의 삶과 같다고 그랬잖아요? 그 이상을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편리하게 이를 때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면서 인간은 결국은 물질의 노예가 되고 속박이 되어버려서 정신과 모든 영혼의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두워지면 집에 가서 자야지... 전기를 누가 만들어서 불을 환하게 켜놓고 밤 12시고, 1시, 2시까지 일하는 것입니다. 가족들과의 관계도 다 깨집니다. 심지어는 양계장에 불을 환하게 켜서 닭이 항상 낮인 줄 압니다. 계속 먹으면서 계속 알을 낳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창조의 섭리가 아닙니다. 이런 쪽으로만 치열하게 발전을 하면서 인간의 정신은 핍폐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들이 이 물질주의에 대해서 금욕주의나 아니면은 물질 이탈주의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주의에 대해서 물질 속에 살면서도 무엇인가 정체를 하고 경계를 하는 태도를 우리들이 지니지 않으면은 기계와 문명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 없는 그런 삶을 살기에 아주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이 현대문명에는 막 몰입해 들어가는 것이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기도하기 싫고, 성경읽기 싫은 사람에게 핸드폰의 게임 같은 것들은 기가막힌 말하자면은 장난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거기에 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거기에 몰입을 하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은 흑암의 어두움입니다. 어두움이 내리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것을 밝음이라고 말하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밝음이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보는 이 신학적인 의미에서는 어두움이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어두움이 있는데 이것은 윤리적인 어두움입니다. 요한일서 1:6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두움을 행하면 거짓말하는 자라.’ 이때에 이 어두움은 뭐냐하면은 윤리적인 어두움입니다. 무도와 불법입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옷매무새가 흐트러져도 챙피 할 일이 없고, 어두워서 보지 않으면 화장 안했다고 누가 흉볼 사람이 없습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적당히 기준이 무시되고 법도가 짓밟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엔 성경에서 이 불법, ‘아모니아’ 이 사랑 없음이 바로 불법입니다. 이게 흑암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잊지 말아야할 것은 우리가 언젠가는 바로 이런 어두움 속에 있던 자라는 사실을 기억을 해야 합니다. 물리적으로 어두움 속에 있던 것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이런 어두움 속에 있었고, 윤리적으로 이런 어두움 속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바로 그런 어두움 속에서 건져내어 우리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어 우리로 하여금 나를 내 인생의 주인을 삼고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잘못인가 하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예전엔 내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었고 나의 행복이 이 세상 모든 가치의 최고봉이었습니다. 때로는 그것을 얻기 위해서 이웃의 행복을 짓밟아도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고, 이렇게 악을 행함으로 오는 보응보다는, 악을 행함으로 앞으로 받게 될지도 모르는 보응 보다는, 지금 손안에 있는 이게 훨씬 더 집착했던 사람들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던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얼마나 큰 것인지 드러났고, 또, 그리스도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이 극심하고 처참하면 처참할수록 우리의 죄의 크기가 무한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세상이, 내가 기준이 될 수 없고, 나의 이 모든 무지하고 불법한 모든 삶은 하나님 없는 삶이었다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참되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찬양)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에 비친 찬란한 빛이었습니다. 그 빛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어리석고 무지한 인간이었는가 하는 것을 뼈저리게, 뼈저리게 깨달으면서, 내가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 이 세상이나 인간이 기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연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정절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뭐냐하면은 ‘남들이 인간의 기준으로 삼아서 괜찮다고 하는 것을 나는 하나님을 기준삼아서 안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사람들의 기준삼아서 안된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하나님의 진리를 삼아서 이 세상 모두가 비웃어도 나는 상관없다.’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이 신앙의 절개의 핵심이고, 그것을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끝까지 그렇게 살도록 밀고 나가는 것이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과 은혜의 놀라운 빛이 아니면 누구도 신앙의 정절을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구원은 이런 신학적인 어두움, 윤리적인 어두움으로부터 우리를 건져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절대적인 의미에선 이 흑암에서 완전히 우리가 벗어났습니다. 그런데, 상대적인 의미에서 보면, 우리는 이런 총명이 가리면서 무지와 오류에 빠지고 사랑이 식으면서 다시 무도와 불법에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이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끌리어 그것을 선택을 하는 모순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B. “권세”(ἐξουσία)
그런데 오늘 이 흑암을 권세라고 부릅니다. ‘액수시아’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건 형식적인 권세가 아니라 실제로 무엇인가 집행할 수 있는 힘입니다. 이 단어가 어디에 쓰여졌냐면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0장에서 12제자를 사도로 임명하시면서 그들에게 모든 병든 것과 약한 것을 고치는, 귀신을 쫒아내는 권세를 주시는데, 그때 쓰여지는 단어가 바로 ‘액수시아’라고 하는 이 단어입니다. 그런데, 원래에 이 어두움이라고 하는 것은요. 사실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보거든요. 이게 물리학에서도 해명하기 어려운 난제입니다. 자, 잘 들어보십시오. 어두움 속에 빛이 있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새로운 빛을 발하는 무엇을 도입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어두움은 그냥 빛을 차단하면 어두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어두움은 만드는 무엇을 가져올 수는 없습니다. 어두움을 만드는 기계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빛을 끄거나 가리우면 어두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다시 가리운 것을 치워버리면 밝아지고, 환해지는 것 아니에요?
그런데, 최근에 물리학에서 놀라운 발견을 했는데, 우주를 움직이는 이 커다란 힘이 어디에서 나오겠는가? 하는 것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뭐라고 말하면 돼요? 하나님이 그 모든 것들을 붙들고 계시고 역사하고 계신다고 말하면 간단한 것입니다. 궁극적으로는... 그런데, 연결고리가 되는 설명이 발견되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어두움 속에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1년전에 나사에서 실증된 것은 아닌데, 가설을 내 놓았습니다. 빛보다 빨리 갈 수 있는 우주선을 이론적으로는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가설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 가설을 설명했는데 그게 뭐냐하면은 어둠속에서 흑암에너지를 빨아드려서 그것을 이용해서 앞으로 추진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학적인 계산으로 빛의 속도를 능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는 신뢰하지 않습니다. 신뢰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이론적으로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에너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에너지가 사실은 우주를 움직이는 하나의 커다란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이 비치면 에너지는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빛이 없을 때는 엄청나게 에너지를 담고 있는데, 신기하게 빛이 비치면 그 어두움의 에너지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빛이 비치면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창조하셨고, 당신 자신이 진리이시지만,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셨고, 당신 자신이 진리이시지만, 하나님이 그 진리를 아무도 보는 이 없는 허공에 매달린 별처럼 달려있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필요 없으셨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당신 자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왜? 그 진리는 인식될 때에 그것이 참으로 진리임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객관적인 진리가 인간의 마음으로 붙들릴 때에 그때에 진리는 그 사람 마음 안에서 커다란 힘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당연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이것이 진리다’라고 꽉 우리의 마음으로 그것을 붙들 수 있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면, 다른 방법으로 일생동안 끊을 수 없었던 것들을 끊어버리는 놀라운 일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어느 한 사람을 상담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어느날 교회에 와서 매일 행패를 부립니다. 나 만나게 해달라고... 그런데, 맑은 정신으로 찾아 왔으면은 우리 교회에 직원들이 진정 나를 만나게 했을텐데 항상 술 취한 상태로 찾아온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술 취한채로 만났습니다. 그래서 ‘뭐냐?’ 그랬더니 자기 얘기를 술 취했는데도 아주 조목조목 이야기를 잘 하더라구요. 그 사람이 뭐라 그러냐면은 알콜 중독자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보기에는 감옥소에, 수용소에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하도 골치 아프니까 현재상태보다 더 나쁘게 진술을 해가지고 법에 의해서 아예 그냥 거기다 집어 넣어버린 것입니다. 그래가지고 3년 동안 보호시설에 집어넣도록 결정이 난 것입니다. 자기는 아니라고 막 그래도 잡혀온 사람들이 다 자기 아니라고 그러지, 자기 여기 들어와야 되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래서 들어간 것입니다. 그래서 3년 동안을 거기서 술을 안 먹고, 알콜을 끊고 재생 하는 교육을 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3년 만에 내보내 줬습니다.
그 사람이 나한테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 3년 만에 알콜 치료소에서, 알콜 중독자 수용소에서 나와서 제일 먼저 간 데가 어딘지 아십니까?” 나는 당연히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갔겠다.’ 그랬는데, 그분이 제일 먼저 간 데가 술집이었답니다. 술을 먹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1%도 치료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그 안에서 독하게 가족들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나가기만 하면은 내가 가만히 안 내버려둔다.’ 이런 마음을 먹고 버틴 것입니다. 그리고, 치료된 것처럼 다 연기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와서는 술을 먹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러고 산 것입니다. 10병을 먹어야지만 맨 정신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맨 정신이라고 그러지만, 우리는 맨 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10병을 먹어야 된데요. 그게 기본이랍니다. 나도 참 못 말리는 목사였죠... 그 술주정 하는 사람한테 테잎을 이만큼 주면서 이것을 들어보라고... 그러고 줬습니다. 회심 시리즈부터 시작 해가지고 줬습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일이 생겼습니다. 뭐냐하면은 한 한달 있다가 이 사람이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술 안 먹은 모습을 봤습니다. 그런데, ‘저런 인간이 뭐 듣긴 들었을까?’ 맨날 10병씩 뭐 술에 취해 있는데 그게 들려 지겠어요? 술 안 먹고? 정신 차려도 설교가 어렵다는데, 술 주정뱅이가? 그런데, 두 번 놀랬습니다. 노트, 스프링 노트를 한 권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거기에 테이프 시리즈마다 다 요약을 한 것입니다. 정말 놀랍더라구요... 써내려간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으로 맑은 정신의 그 사람 얼굴을 봤습니다. 그런데, 정말 똑똑한 사람 이더라구요. 그 질문을 하는데, 예리합니다. 그 사람을 끝까지 돌보지 못한 게 안타까운 일이었는데, 그 다음서부터는 교회에 안보입니다. 어디서 재생의 삶을 찾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뭐냐하면, 악과 진리가 아주 유사합니다. 거짓과 진리, 악과 선이 아주 유사합니다. 그래서 뭐냐하면은 거짓이 객관적으로 존재할 때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내 마음이 거짓된 것을 굳게 붙들 때 진리를 붙든 사람과 견줄 수 있을 정도의, 경우에 따라서는 그것보다 훨씬 더 강하고 큰 능력이 그 거짓된 것을 붙든 올무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담대함이 그 안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객관적인 어두움을 주관적으로 굳게 붙들고 사랑하게 될 때 악의 힘이 이 안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실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은 사실 우리가 당장 해야 될 일은 전도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숙명적으로 거기에 메여있기 때문에 잘 살게 된다거나 뭐 다행히 그 사람이 돈이 많아서, 그런 사람들이 모두 돈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돈이 많아서 어쨌든 얼굴을 다 긁어 내가지고 새로하고, 안되면 뒤에다가라도 얼굴을 새겨서라도 하여튼 미인만 만들었다고 치자, 그게 뭔 상관이 있느냐 이 얘기입니다. 인생이 바뀌겠느냐? 이 얘기입니다. 본질을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어두움의 권세들이 그것을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어서 거기서 그를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 후서에서는 그것이 이 세상 힘이 믿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에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한다고 그랬습니다. 이러면서 강력한 권세를, 마치 흑암에서 에너지가 나오듯이 그런 힘들을 이 사람들 속에서 막, 강하게 행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권세를 가지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이나, 칼이나, 혹은 죽음의 위협이나, 고문이나, 이런 것들로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놀랍게 그 무엇으로도 고칠 수 없는 그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비칠 때, 수 십년 동안 지배했던 흑암이 순식간에 사라지면서, 그러면서 찬란한 빛이 들어오면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게 해 주는 인생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한 6년 전에 설교 속에서 한 두번 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거의 잊어버렸으니까... 다시 재탕을 해도 될 것입니다. 모두 여러분들은 처음 듣는 것처럼...
신학교 교수 시절이었는데, 학생 한 사람이 매주 수업이 끝나면 교실 문 앞에 서서, “교수님! 제가 점심한번 대접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가 “학생들하고 밥 안먹습니다. 괜찮습니다.” 나중에는 너무 간절하게 청합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얼굴을 쳐다봤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 후에는 점심을 대접받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칼자국이 여기에(얼굴) 이렇게 나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어쨌든 갔습니다. 그런데 일식집에 갔는데, 초밥을 하나 시켜주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별로 내키지 않는 마음이었지만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만 시키고 자기 것은 안 시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러니까 자기는 금식이랍니다. 그게 뭐에요. 그래도 어쨌든 한 시간 정도 먹고 있는데 “교수님! 제가 교수님 강의에 은혜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뭐라 그러냐면은, “교수님은 절 모르시겠죠?” 보니까 모르겠습니다. 조폭의 보스였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면은 전라도 쪽에서 꽉 잡고 있던 세력가였는데, 자기가 데리고 있던 똘마니 하나가 부하들을 소집을 해서 반기를 들은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뚜드려 엎고, 그리고, 자기를 쫒아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올라온 부하가 김태촌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사람 죽었죠?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는데,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렇게 됐냐?” 그랬더니, 자기가 그렇게 개망나니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뭐, 조폭의 보스였으니 얼마나 나쁜일을 했겠어요? 그런데 12월 24일날 성탄 이브 밤에, 어느 호텔을 갔다 오고 있는 중이었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그때부터 알았습니다. ‘빠찡코가 뭐가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빠찡코 하는 업자들이 모였는데, 거기에 요즘 말로 말하자면은 수금을 하러 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싹 수금을 해가지고 오는데, 술이 완전히 취해서 차에서 내려서 집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불쑥 교회 가서 기도하고 싶더라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독실한 그리스도인 할머니로서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눈물로 기도를 하셨답니다. 그날 밤에 성탄 이브 때에 예배당에 가고 싶더라는 것입니다. 비척비척하면서 예배당을 걸어가는데, 문이 항상 잠겨있는데 크리스마스 이브이니까, 내가 보기엔 이브인데 저녁때 간 게 아니라, 이미 25일이 돼서 새벽에 이제 들어간 것입니다. 술 먹고, 돈 걷고, 이러다가... 교회당은 조용한데, 문이 닫힌 게 아니라, 확 여니까 문이 확 열리더라는 것입니다. 열려서 예배당을 들어갔는데 5걸음도 못 들어가고 거기에 고꾸라져버렸습니다. 딱 고꾸라졌는데, 갑자기 겆잡을 수 없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생각이 밀려오면서, 술 취했는데, 그래서 술 취했다고 오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가 무시하면 안됩니다. 술 취한 사람 복음을 들어서 뭐하냐고 그러는데 아닙니다.
그러더니 확, 어떤 강한 성령을 느끼면서 자기가 얼마나 죄인이고, 하나님의 진노아래에 있다는 것이 느껴지면서, 부흥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막 벌벌벌벌 떨면서 하나님앞에 막 회개를 하는데, 갑자기 코에서, 입에서, 귀에서, 막 피가 쏟아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이제 거기서 술 취한 상태에서 회심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그 사람이 모든 생활을 접고 신앙생활 하다가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게 뭐냐하면 한 순간의 빛입니다. 그 어머니가 간절히 드리는 오랫동안의 그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겠죠? 갑자기 빛이 들어오면서 어렸을 때 말로만 듣던 그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내가 죄인이고, 나는 하나님 앞에 형벌 받을 끔찍한 죄인이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 순간적으로 믿어지니까 그 작은 빛이 그 오랜 세월동안 자기를 장악했던 이 흑암의 권세에서 자기를 건져내 주는 것입니다.
C. ‘건져내사“(ἐρρύσατο)
여기에 ‘건져내사’ 라는 단어가 있는데, ‘엘수라토’라는 단어인데 그게 뭐냐하면, 이런 것입니다. 원래 단어의 뜻이 웅덩이 같은 데에 빠진 사람들에게 줄을 던져서 그 사람 스스로 못 올라오는데, 바깥에서 잡아 땡겨 주는 것입니다. 그런 단어에서 이게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끌어내다’ 라는 ‘드래곤’, ‘이끌어내다’ ‘구출하다’ 어떤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그것이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그렇게 건져내신 것입니다. 진리의 빛으로 건져내셔서 그래서 은혜를 주셔서 그 은혜가 주는 힘으로 그 모든 윤리적인 어두움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님이 강하게 힘을 주어서 우리가 스스로 걸어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이끌어서 그 불법과 어두움 속에서 우리를 하나님이 이끌어주시고, 건져내주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바로, 이런 흑암의 권세에서 건지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신앙과 생활의 상태가 만족스럽지 않은데, 스스로 이것을 개선해 보려고 애를 많이 썼는데도 잘 안돼서 실패하고, 낙심하고, 좌절하였기 때문에, ‘이젠 나는 해도 안돼.’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예고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개선할 수 있다고 믿어서 그 일이 성공하면 성공한 즉시, 실패해도 문제고, 성공해도 문제입니다. 실패하면 좌절할 것이고, 좌절하면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고, 성공하면 성공하는 즉시, ‘아, 내가 해냈다. 나는 그래도 쓸모 있는 인간이구나. 여전히 이런 어두움 속에 있는 인간들과 나는 무엇인가 차별화된 존재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될 거고, 이 생각을 하는 순간, 존 오웬의 표현에 의하면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의존의 마음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게 뭐죠? ‘자기 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일을 언제나 진리의 빛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신학적인 어두움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어떤 나쁜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두 가지를 명심하면 됩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내게 나쁜 일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혹시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나면, 이것은 내가 잘못해서 일어난 일이거나, 혹은 하나님이 더 좋게 하시기 위해서 이것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믿어서, 상황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폐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언제나 굳게 믿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진리의 말씀의 빛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우리를 그 어두움과 위기 속에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그 두가지 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의 상황이 혼란스러우면 혼란스러울수록 우리들은 모든 생각을 단순화해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라는 확신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만이... 그래서 제일먼저, 하나님이 우리의 지성에 진리의 빛을 비춰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이 돼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란이 오고, 시험에 들고, 어려움에 닥치고, 견디기 힘든 일들이 막 생겨날 때에, 그 불을 끄기 위해서 막 허우적 거리면서 다니면은, 그 불도 꺼지지 않고, 우리의 정신과 우리의 육체도 모두 피곤해지고 손해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럴 때에 조용히 하나님을 향하고, ‘주님이 결국은 나의 이 모든 상황을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나이까?’ 그러면서 하나님을 앙망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은 하나님이 진리의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은혜의 힘으로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할 수 없었던 그것들을 이길 수 있는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결국은 우리의 선한 의지를 강화시키고, 악한 의지를 소멸시키는 유일한 힘입니다. 이게 놀라운 은혜의 힘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거기에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해야 돼냐하면, 우리들이 숙명문제가 저절로, 처음부터 숙명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일을 계속 실패하면 마지막에 안된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굳게 믿는 것이 비관론자이고, 숙명론자입니다.
여러분 시골에 가면은 왜 이렇게 싸리로 만들어가지고 병아리 기르던 바구니 기억나죠? 이렇게 탁 놓고 병아리들이 자라잖아요? 요만한 병아리들이 거기에서 위에다가 모이를 뿌려주면 먹으면서 자랍니다. 한참 내버려두면 한 한달 쯤이면 커져요. 그 안에 있기에 몸이 커지는 것입니다. 좀 갑갑했겠죠. 운동도 하라고 한번 슬쩍 듭니다. 그런데, 얘네들이 안 나가요. 그 원 주위를... 한참동안 안 움직여요. 왜? 수시로 나가려고 시도를 했었는데 한 번도 못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속에서 체념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이 없어져버렸는데도 눈으로 보면서도 저기에는 못나가는 장막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 속에서 실패와 불가능이라고 하는 벽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을 도전할 용기를 못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가서 흩어버립니다. 막 내 쫒습니다. 확 나온 다음에 뚤래뚤래 쳐다보면서 그때부터 이제 뭔가 개념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와도 되는구나.’ 그러고 이제 돌아다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태까지 할 수 없었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은혜가 부족했기 때문에 언제나 실패로 끝나는 일입니다. 주님이 은혜를 부어주시면 놀랍게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여러분 자녀들 공부 안 하는 애들 여기도 많죠. 기도제목 있는 사람들 여기도 많죠. 걔네들이 책 사달라고 그럴 때 기뻐요? 안 기뻐요? 기쁘잖아요. ‘아, 얘가 공부하려고...’ 그런 생각 들지 않아요? 물론, 책만 사달라고 하고 공부 안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하나님께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면 성도들에게 은혜를 기쁨으로 주시는 것은, 결국 그 은혜를 받으면 이 사람들이 모두 당신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런 은혜를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해야 되는 것입니다.
Ⅳ. 결론
하나님이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건져내신 것은 겨우겨우 살아내라고 건져내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를 그 어두움에서 건져내게 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어두움의 나라에서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흑암의 권세가 아무리 커도 주님이 우리를 건져내실 수 있는 분이니, 그분을 의지하면서 구원의 은혜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녀의 유업을 충만히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7. 아들 안에서 속량하심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골 1:14)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 해설
오래전이기는 합니다만 7월 11일 날 제가 1장 13절을 설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영적인 상태는 하나님이 흑암의 권세에서 그들을 건져내어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긴 상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이렇게 우리가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게 된 직접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속량함을, 죄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하나님이 사하셨는데 오늘 성경은 이것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II. 우리의 죄를 사하심
A. 속량하심(ἀπολύτρωσιν)
첫째는 속량하심입니다. 이 속량하심이라고 하는 의미는 예전 성경에 구속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새로된 번역이 훨씬 원래의 의미에 가깝습니다. 이 속량이라고 하는 이 말은 희랍어로 아폴뉴트로신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값을 지불하고 무엇인가 팔린 것을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쓰여지던 신약시대에 로마의 노예제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그림과 같은 묘사입니다. 자유인이라 할지라도 노예가 되곤 하였습니다. 우선 전쟁을 해서 적국의 포로들을 잡아오게 되면 노예가 됩니다. 또 죄를 짓거나 잘못해서 신분이 강등되면 노예가 될 수 있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기 스스로 자기를 팔아서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즉, 가족을 위해 자기 자신을 팔아 노예로 들어가고 그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노예는 그 집안의 소유이고 그 노예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았다 할지라도 그 아이까지도 역시 마치 가축이 새끼를 낳으면 그것도 주인의 것인 것처럼 노예의 자식도 그 소유가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이런 그림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노예를 파는 시장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노예 상인들이 노예를 사가지고 와서 좀 싼 값에 노예를 사가지고 와서 시장에 와서 비싼 값에 원하는 사람에게 팔아서 차익금을 챙기는 것이 노예 상인들의 일이었습니다. 이제 어느 집에서 돈이 아쉬워서 노예 넷 정도를 내 놓았습니다. 엄마, 아빠, 그 집 아이들 둘, 이렇게 딸려서 한 식구가 모두 노예 시장에 나왔습니다. 시장에 나온 노예는 원하는 사람들이 와서 사려고 할 때, 종종 이 노예는 과연 힘이 좋습니까라고 물으면 노예는 힘이 좋다는 것을 자기를 사갈 사람에게 과시하여야 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노예 상인이 모질게 몽둥이로 때리거나 채찍을 쳐도 끄떡하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여야 했다고 합니다. 이 여자 노예는 바느질도 잘하고 음식도 잘합니까 등등의 것을 물었습니다. 끌려 나온 노예 네 식구의 간절한 소원은 해방되는 것은 꿈에도 꿀 수 없고 오직 마음씨 좋은 사람이 자기 네 식구를 나누지 않고 한 번에 사가서 가족이 한 곳에서 살 수 있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시간이 지나는데 좋은 호사스러운 마차를 타고 가던 돈 많은 부자가 노예 시장을 지나가면서 노예 넷이 있는 광경을 봅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그 노예를 흥정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애들은 필요 없으니까 여자와 남자만 가지고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이들이 울기 시작합니다. 엄마, 아빠만 팔려가고 자신들은 부모와 생이별을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엄마 노예는 무릎을 꿇고 자기를 사려고 하는 사람에게 애원을 하기 시작합니다. 주인님이 만약 우리를 모두 사 가신다면 제가 분골쇄신하여 주인을 섬길 테니 우리 가족을 헤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합니다. 매정하게 그래도 이 아이들은 가져가지 않겠다고 승강이를 하고 있을 때에 호사스러운 마차를 타고 있던 부자가 노예 상인에게 물어봅니다. 이 노예가 얼마인가. 그러자 값을 불렀습니다. 그러자 이 마음씨 좋은 사람이 충분한 돈을 주고 노예 넷을 모두 샀습니다. 그리고 집에 데리고 와서는 노예로 삼는 것이 아니라 노예 해방 증서를 써 주면서 너희 네 식구는 이제 자유인이 되었으니 내가 너희를 해방시켜준 문서를 품에 품고 너희는 가서 자유롭게 얽매이지 말고 살아라 하고 보내줍니다. 이것을 바로 속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노예를 사기 위해서 지불했던 그 돈을 속전이라고 하고 그렇게 하는 행위를 속량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속전을 성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죄를 지어서 죄 때문에 마귀에게 팔려가는 형벌을 당하였는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속전으로 지불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당신 자신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 때문에 팔린 사람을 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속량의 개념입니다. 이 속량을 위해서는 반드시 희생이 뒤 따라야했습니다. 노예로 사로잡고 있는 사람이 대가를 지불받지 않고 자기의 소유인 노예를 놓아줄리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속량하실 때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생명을 주시는 속전으로 삼으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B. 죄를 사하심(ἄφεσιν)
두 번째 요소는 죄를 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용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팔려간 것은 죄 때문에 팔려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죄는 사람 앞에 지은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죄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입니다. 죄를 지은 대상은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끊어졌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끊어지자 우리 사이에 끊임없이 공급되었던 하나님의 거룩한 생명은 인간의 영혼 안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생명이 사라지자 인간의 영혼에는 인간을 참답게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능력이 그 힘이 상실되었고, 거의 동물적인 힘 밖에는 남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 인간은 죽은 행실을 반복하며 죄짓고 타락하고 하나님께 도전하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러한 일들을 되풀이하면서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은 충분히 있지만, 그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짓고 그 죄를 해결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그 죄는 또 다른 죄를 낳고, 또 다른 죄를 인간을 끊임없는 죄의 올무에 사로잡혀 끊임없이 파멸로 데려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비참한 처지는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황폐화 시켰고 그래서 육체는 건강하고 올바른 영혼의 지도를 받는 대신 망가지고 병들고 고장 난 영혼에게 끌려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원하지 않으면서도 그리로 이끌리고 또 이끌리면서도 그 안에서 번민하고 고통 하는 처지를 반복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을 고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다시 인간과 영적인 관계를 맺고 인간의 영혼에 참된 생명을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인간의 허물을 용서해서라도 인간과 관계를 지속하셔야 하는 하나님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아무리 그러한 사랑이 많으셔서 인간과 다시 화목하여 당신의 생명을 교통하게 하신다 할지라도 죄를 범한 인간에 대한 응분의 대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받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지은 인간의 죄의 크기가 무한했기 때문에 이미 죄로 물들어버린 더러운 인간의 생명으로서는 자신이 지은 그 죄의 값을 어떠한 식으로든 치룰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서 대신 그 죄값을 치루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심으로써 공의는 아들에게 갚으시고 사랑은 우리에게 갚으시도록 경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용서는 사랑의 흐름입니다. 다시 말해서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시킨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서로 관계가 깨뜨려져서 인간의 경우 서로 서로 잘못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깨졌을 때 먼저 용서를 빌고 용서해 주는 사람은 사랑의 크기가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보다 훨씬 큰 사람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나와 관계가 깨뜨려진 가운데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데 나는 그렇게 깨어진 관계 속에서 단절하고는 살 수가 없기 때문에 그에게 나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고 또 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것을 내가 나에게 용서해 준 것처럼 그 사람을 용서해 주어서 다시 사랑이 흘러가는 관계가 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용서의 동기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은 항상 죄가 있는 곳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죄를 인간이 주관적으로 붙들고 사랑하는 곳에서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뉘우칠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강력하게 나타납니다.
여러분은 호세아 선지자의 가정생활에 대한 기록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내 고멜은 이름난 음란한 여자였고, 그리고 남편이 그렇게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을 떠나 외간 남자에게서 아이를 배고 와서 집에 와서 낳고는 또 다시 남자의 품으로 떠나고 또 다시 돌아오고 떠나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끊임없이 그 여자를 속전을 주고 가서 사오는 것입니다. 노예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 여자를 끊임없이 다시 불러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보여 주는가 하면 그 아내의 죄가 크고 극단적이면 극단적일수록 선지자가 이 아내에 대해서 품고 있는 사랑이 무엇으로도 끌 수 없는 불붙는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있는 바로 그 곳에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찬란하게 드러나고 이는 마치 어두운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이야말로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달은 모든 사람들은 죄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용서를 통해서 깨닫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 용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반역하고 주님 없이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주님과의 관계를 단절했던 죄인의 악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없이 살 수 없다고 죄인을 친히 찾아오시고 관계를 맺으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선이 함께 만나는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용서는 하나님 안에 있는 강한 사랑의 흐름입니다.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을 향해 흘러가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함으로 피해는 당신이 당하셨는데 바로 피해를 당한 당신 자신이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시는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의 진수인 것입니다. 이러한 죄의 용서를 위해서는 항상 희생을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이 지은 죄와 악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명예를 더럽히셨고 당신의 외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우리의 죄 때문에 그렇게 비참한 죽음으로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아들을 죽게 내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당신께 죄를 범한 이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용서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죄인이 하나님 없이 살아가다가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도록 그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그는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없습니다. 어찌하든지 인간은 악을 행할 때를 제외하고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 선한 것을 할 수 있는 어떠한 가능성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의존성을 설명하면서 참으로 우리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우리의 죄 밖에는 없다, 그것만 고유하게 우리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나머지 모든 좋은 것들은 우리 하나님께 의존하여 있고 그 분께 기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멀리 떠날 때에는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라 자기 발로 배반하고 떠납니다. 그러나 돌아올 때에는 자기 발로 걸어서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 있었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실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돌아오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돌아오기 전 먼저 그 마음을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바로 당신의 용서를 받아들이도록 당신의 구원의 은혜를 수납하도록 그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죄를 짓고 당신을 멀리 떠나 배반했던 그 인간 없이 살 수 없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인간이 그렇게 필요한 존재이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의존합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태어났고 그분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지금 생명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분이 우리를 도와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것들을 누리며 생명을 영위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존해 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 없으면 인간답게 살 수 없는 존재이지만, 주님은 우리 없어도 언제나 하나님다우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분이 우리를 의존하시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를 그렇게 끝까지 관계를 맺고자 하시고 또 우리 없이도 당신이 사실 수 없는 것처럼 위대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눈물 많은 육신의 부모처럼 우리에게 당신께로 돌아오라고 능히 당신이 우리를 치실 수도 있고 때리실 수도 있고 심지어는 우리를 가루로 만들어 허공중에 후 불어 흩어 버리실 수 있는 위대한 주권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이 왜 우리 같은 사람을 마치 의지하시기라도 하는 것처럼 우리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와의 관계에 집착하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정말 우리가 하나님께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그토록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반로입니다. 사랑이 그것을 시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우리가 지은 모든 죄, 그러나 스스로 그 죄에 대해서 책임은 질 수 없는 바로 그것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우리의 죄 값을 치루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노의 불을 끄시고 우리에게 용서의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C. 그 아들 안에서
세 번째로 바로 이러한 죄 사함이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아들 안에서 라고 하는 이 말은 아주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특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그 분 안에서 라고 할 때에는 이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품, 또는 아들을 보내시고 궁극적으로 우리와 연합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순수한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들 안에서 혹은 하나님 안에서 성령 안에서 라고 하는 이 표현은 신자가 영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사하실 때 그저 우리의 가변적인 선행이나 착한 성품을 보고 용서하신 것이 아니라 아들이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고난을 통해서 그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받을 자들 사이에 이루어진 영적인 연대 안에서 하나님이 그 아들이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당하신 그 형벌적인 죽음이 당 신안에서 영적으로 연합되어 있는 모든 구원받는 자들의 죄를 위한 대가가 충분히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받아들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신 후 다시 살리실 그 때에 구원받을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혼도 그 부활에 참여하게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혼자의 힘으로 인생을 살 수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구원의 초청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는 이 우리들의 마음에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아들의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게 하시고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2천 년 전의 부활의 그 새 생명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마음속에 영적으로 전달되게 하신 것입니다. 왜, 이미 부활하고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그 아들의 희생 안에서 그가 십자가에서 치루신 모든 죄에 대한 대가와 그 구속 안에서 그들을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커다란 정체성은 바로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용서받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단지 용서받은 죄인이 아니라 당신에게 입양된 자녀로 여겨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실 수 있었던 기초이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만약 우리를 얽어매고 있었던 모든 사단의 권세,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모든 부자유로부터 벗어나서 참 자유를 누리고 있음을 우리가 안다면 그리고 우리같이 포악하고 못된 인간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랑의 나라로 옮겨져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또 그 하늘나라의 모형인 교회에서 사랑하는 지체들의 섬김을 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으면서 우리들이 생활하고 있다고 치면 바로 이 모든 은택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행하셨는가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고 또 너무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를 온전히 내어 주어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바로 그 무한한 아들의 희생 안에서 끝없이 커다란 우리의 죄는 용서를 받게 되었고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셔서 다시 우리를 사랑하는 사이로 엮어 주시고 당신이 그 놀라운 은혜의 생명을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 공급해 주심으로 짐승 같은 삶을 사는 대신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매일 우리 자신의 신분이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백성이요, 당신의 사랑하는 친 아들이라 불러주신다 할지라도 이러한 주님의 불러주심에 대해서 이것을 인하여 교만해 지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불러 주시고 대해주실 때조차도 우리는 우리의 참된 정체성이 바로 죄인이었던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하나님 앞에 용서받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가슴에 새기며 겸손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어도 그래서 그 은혜에 깊이 감격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렇게 용서받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을 언제나 간직하며 하나님이 원하는 완전한 삶을 살 수 있는 처지에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을 우리가 배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고 촉구하지 않았을 것이며, 사도바울 같은 사람들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지 않았을 것이고 ‘내 안에 사는 이가 그리스도니 내가 죽는 것도 유익한 것이라’고 고백하지는 더더욱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항상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나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매일 매일 자각하는 사람들처럼 예수의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하루에 두 번씩만 펑펑 울 수 있다면 그의 인생은 많이 빗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한번은 나같이 쓸 모 없는 죄인을 위해 왜 예수님이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 주님이 나 같은 죄인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그 원인이 되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대해서 이 더러운 인간이 그러한 긍휼에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를 생각하며 그 하나님의 사랑에 목매여 펑펑 울 수 있다면 그는 잠시 미끄러질지라도 다시 일어날 것이며 하나님 앞에 잘못했을 지라도 그는 잘못한 것보다도 더 잘할 수 있도록 깊이 회개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우리를 위협하고 양심은 우리를 고발할지라도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의 하루에 한 번씩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놀라워서, 그리고 이 더러운 인간을 구하려고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사랑이 너무 커서 펑펑 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 번은 나 같은 인간을 하나님이 이렇게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셨는데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는 이 사랑을 모르고 살아가는 곤고한 영혼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불쌍해서 눈물 흘릴 수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충분히 울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울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 진실하게 우는 사람이야 말로 자신의 영혼이 아프고 잘못되었을 때 그 비참함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과 다른 사람의 영혼은 분명히 다른 영혼이지만 영혼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주기 때문에 결국 인간의 영혼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에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결핍된 것이 바로 이러한 복음적인 정신입니다. 성경이 그려내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할 말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어느 한순간도 자신이 구원받은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성경이 그려내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언제나 이것이 부자연스러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왜 나같이 더러운 인간을 위해서 좋으신 주님을 못 박고 나를 살리셨을까. 과연 그 분이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그렇게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면서 까지 당신을 값 주고 사실만큼 내가 가치 있는 존재인가 하는 복음적인 사실이 언제나 부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신 이 은혜에 대해서 깊이 감격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아버지의 크신 십자가 사랑 앞에서 우리같이 더러운 죄인을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이 날마다 부자연스러워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몸 둘 바를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고 그 때 주님이 나를 위해 당신을 버리시기까지 희생하셨으니 내가 하나님 앞에 무엇이 아까우랴 하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 우리들이 내가 죄인인 줄을 알고 이 죄인에게 유일한 소망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인 줄을 알아서 그 십자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내가 정말 희망이 없는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 그 때에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당신의 주되심 앞에 우리를 전적으로 낮추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두 가지를 내포하는데, 소극적으로는 무한대의 순종, 그리고 무한대의 헌신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그 분을 나의 주라고 부르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을 생각하고 그리고 그 분이 나를 위해 죽으신 그 큰 고난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져서 하나님, 무엇 때문에 당신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까 라고 통곡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에 동참하게 될 때에 실제로 그 순간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순종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무제한의 순종을 우리의 마음속에 기꺼이 원하고 있고 주님을 위해서 주님이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그것을 받아들일 무한정의 순종을 상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과 그 하나님께 모질게 대적하는 나의 더러운 죄와의 대조선상에서 내가 아무 가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십자가의 구원에 감격할 때 ‘나’라고 하는 인간은 무한정의 헌신을 이미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마음이 얼마나 갑니까. 정말 그 마음이 얼마나 오래 갑니까. 우리 중 아마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나 같은 인간이 필요해서 아골 골짝 빈들에도 소돔과 같은 거리에도 가라고 하신다면 가겠다고 고백을 하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변심하고 또 하나님을 원망하고 그리고 주님께 고통을 드리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오히려 행복하고 안일한 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이기심들이 얼마나 많이 우리들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십자가의 체험은 우리 안에서 날마다 언제나 반복되어야 할 체험이지, 한번 그러한 경험이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영구히 우리의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는 오늘 새벽에도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도대체 우리에게 밀려오는 이 많은 정욕과 그리고 우리의 정신을 분산시켜 놓는 이 세상의 많은 염려와 걱정, 그리고 우리의 심령을 녹일 것 같은 나에게 악을 행한 사람들에 대한 미움과 원망, 이런 것들로 인하여 우리의 온 마음과 정신이 갈갈이 찢길 때 도대체 무엇으로 이것을 이기고 흔들리지 않고 주님이 우리에게 한번 주신 구원의 의도대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정말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손에 놓고 우리의 욕심을 채우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눈은 아무리 보아도 차지 않고 우리의 마음은 욕망에 끊임없이 굶주려 있습니다. 원하는 모든 것을 가져도 마음의 이 찢어짐은 사라질 수 없고 우리에게 악을 행했기 때문에 우리의 미워하는 사람이 우리의 눈앞에 갈기갈기 찢어져 사지가 조각조각 떨어져도 그렇게 모든 것이 만족되었기 때문에 영혼이 하나님을 앙망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이 모든 것에 대한 해결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우리에게 제시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나에게 악을 행한 사람도 내가 용서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깨닫게 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악을 행한 사람보다도 우리 하나님 앞에 더 악한 사람이었고, 그 하나님이 나같이 더러운 인간을 온전히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욕망을 만족시켜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갈증 나는 여름철에 설탕물을 마시면서 기갈을 면해보려고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며 배고픈 날에 모래를 퍼먹으면서 허기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으로는 해결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들을 모두 내버려 둡니다. 모자라는 것은 모자란 대로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악을 행하는 그대로 그리고 우리를 유혹하는 모든 사물들은 있는 그대로 버려둡니다. 그리고 우리는 보혈을 지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갑니다. 바로 거기에서 맨 처음 주님 없이 살아가던 우리의 인생의 날을 깨달을 때,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께로 돌아오도록 주신 이 구원의 길을 받아들였을 때 우리의 마음에 밀려왔던 그 큰 사랑과 은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그 십자가 앞에서 이 세상이 잠시 지나가는 헛된 일들로 에워 쌓인 세상이며, 바로 그 십자가 안에서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격할 수밖에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그래서 나는 나를 하찮게 여길 수밖에 없어도, 하나님은 내가 하찮게 여기는 나조차도 소중하게 여기고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시는 아버지의 그 큰 사랑을 십자가 아래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가 아무리 환란을 많이 당하고 이 세상에서 슬픔을 만나고 때로는 주님을 위하여 사는 동안에 고난과 시련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 분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고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십자가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멀리 떠난 우리의 자존감과 나 자신을 높이는 교만함으로부터 내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고난과 역경을 이기며 올곧게 살았던 원동력이었고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면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놀라운 하나님의 위로였던 것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신념을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심어주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래서 핍박을 앞두고 있는, 그리고 이미 실제로 핍박을 겪고 있는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눈물로 말했습니다. 자기의 아들을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선물로 주셔서 우리를 구원받게 해 주신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들을 은사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놓을 수 없다고 사도바울이 로마에 흩어진 핍박받는 형제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귀는 끊임없이 이러한 사랑을 의심하게 만들고 그리고 때로는 우리의 허물과 죄에 대한 기억들, 때로는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시련 속에서 하나님이 너를 버린 증거를 읽어내라고 요구하고 소리칩니다. 어느 청교도가 묘사했던 것처럼 한쪽에서는 율법의 정죄가 또 한쪽에서는 양심의 송사가 끊임없이 소리칠 때 잠시 하나님과 관계도 끊어진 것 같고 주님께로부터 버림받은 수많은 증거들이 여기저기에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완전한 고립과 두려움 속에 떨고 있을 때 그것은 참으로 사단이 의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의 자녀들을 행해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당신을 멀리 떠났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고통을 받는 시간들을 통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신의 의지를 따라 방탕하게 살고 하나님 없는 삶을 산 결과가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경험하게 하심으로써 다시 하나님 앞에 돌아왔을 때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품 안에서 살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마음을 다 드려 하루에도 여러 번씩 아니, 생각나는 모든 순간 동안에 하나님이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의 죄를 속량하셨도다. 우리를 자유자로 만드시기 위해 당신이 형벌을 받으셨다는 사실을 매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느 한순간도 우리가 받은 이 구원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도록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하나님의 그 큰 사랑에 감흥하며 매일 매일 아침에 눈 뜰 때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몸 둘 바를 모르는 그러한 교인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거룩한 생활이, 모든 성별된 마음이 바로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비틀거리며 살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 우리가 주님이 주신 사명을 외면하고 뺀질거리며 살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언제 하나님 사랑보다는 이 세상 사람의 마음에 들떠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좋으신 그 마음에 못을 박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매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눈물 흘릴 수 있을 때 그리고 나같이 더러운 죄인에게도 알려주신 이 십자가의 사랑을 아직까지도 모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굶주리고 핍절한 영혼 때문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눈물을 흘리는 동안에는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의 정절을 지켰고 역경과 아픔 속에서도 우리는 충성스럽게 거기에 서서 우리의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힘에 지나도록 모든 것을 이루어 놓은 후에도 마지막에는 언제나 우리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익한 종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쁜 것은 모두 나 때문에 된 것이었고 좋은 것은 모두 하나님이 도와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십자가 아래에서 숨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죽음은 얼마나 친근한 것이었습니까. 그래서 그 휘장을 지나고 나면 이 슬픔과 눈물의 시간들이 지나고 찬란한 영광의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불 타 올랐고 그래서 우리는 시련과 핍박도 이기고 고난도 견딜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헬을 사랑했기 때문에 7년을 하루처럼 생각했던 야곱과 같이 그 나라에 대한 사랑 때문에 우리가 넉넉히 이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도 기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눈물이 메마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하면 이 교회당에 죽음을 눈앞에 둔 노인들로부터 이제 어린아이들에게 이르게까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흐르는 눈물을 볼 수 있을까. 강철같이 굳어졌던 뺨에 뜨겁게 흐르는 눈물을 보고, 그리고 그렇게 연약한 자가 되어서 녹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울고 난 후에는 고사리 같은 주먹을 불끈 쥐고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그러면 십자가 앞에서 약한 그 교회는 얼마나 강한 교회가 될까 생각했습니다. 가슴에 새깁시다. 우리는 주님이 당신의 아들 안에서 속량하신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이기며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것이니 주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 그 사랑을 기억하며 범사에 예수를 위해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8. 창조주의 속량하심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4)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성경은 지난 시간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곧 속량, 죄 사함을 얻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이 15절과 16절에서 우리를 그렇게 속량하신 그 분이 어떠한 분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동시에 창조주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이 본문은 창조에 있어서 모든 것들이 성자로 말미암아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Ⅱ. 구속주의 정체
제일 먼저 우리에게 속량하신 구속주의 정체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A. 하나님의 형상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말 성경으로 기준으로 할 때 형상이라는 이 단어는 구약에서 39회, 신약에서 18회 정도 나타납니다. 구약만 해도 여러 가지 형상을 가리키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만, 종합해서 정리를 해 보면 이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성경에서 세 가지의 범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가장 흔하게 쓰인 ‘형상’ 가운데 하나는 사물의 모양을 닮은 꼴 이것을 가리켜서 형상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살구꽃을 그대로 조각하여 만들어 놓은 것을 살구꽃의 형상이라 불렀고 혹은 무엇인가 녹은 금속 같은 것을 부어서 그 모양을 그대로 나오게끔 만드는 다이케스트, 즉 주조물을 가리켜서 형상이라 부른 적도 있습니다. 즉, 황금 송아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조각으로 황금 송아지를 파야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 황금을 녹인 물을 부을 때 금송아지가 나옵니다. 그렇게 황금녹인 물을 부을 수 있는 다이케스트를 가리켜서 형상이라 불렀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사물과 관련된 형상입니다.
그런데 형상이 이러한 사물 말고 이제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 이것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이 닮았다고 할 때, 또는 인간의 형상을 인간이 닮았다고 할 때. 그런데 인간이 인간의 형상을 닮았다고 할 때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특성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특성까지도 포함합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할 때 하나님은 크기와 모양과 같은 제한적인 성질을 가지신 분이 아니기 때문에 이 때에는 순수하고 영적으로 말하자면 닮은 꼴, 이것을 가리켜서 형상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형상이라고 하는 단어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말할 때에는 순수하게 하나님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특성을 가리키는 것이고, 인간과 관련하여 말할 때에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특성과 육체적인 특성도 아울러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기에 보면 성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의 몸을 입고 오기 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실 그 때에 성자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성자는 성부의 형상, 즉 성부의 영적인 특성을 그대로 닮은 그러한 성자이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때에는 우리와 비슷한 키에, 우리와 똑같은 살과 피, 뼈를 가지고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비록 몸으로는 사람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인격으로는 사람의 인격이 아닌 하나님의 인격을 취하셨다는 점에서 모양은 사람과 같았지만 완전히 모든 것이 사람과 똑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할 때, 크기나 색깔이나 모양을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성육신하신 신체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인격과 영혼, 정신적인 특성이 하나님 아버지와 닮았다는 뜻이고 인간의 눈으로는 직접 알 수 없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특성들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게끔 행하시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섬기고 봉사하시고 하는 이 눈에 보이는 모든 일들과 행동,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형상을 보이는 예수의 성육신 가운데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이 성육신의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B. 피조물보다 먼저 나심
우리가 읽은 이 15절에서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그랬습니다. 즉, 구속주의 정체는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문자 그대로의 말이 아닙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마리아의 몸에서 우리에게 오셨을 그 때에 이미 많은 피조물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고 자기에게 육신을 빌어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마리아조차도 하나님의 한 피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라고 할 때 이것은 단순한 시간적 먼저 나심 즉,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성육신의 먼저 나심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은 성자가 삼위일체 안에서 성부로부터 나은바 되신 그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자,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어떠한 물건들을 만든다고 해 봅시다. 아니, 그것보다도 더 좋은 비유가 있습니다. 닭이 알을 낳았다고 칩시다. 어느 날 닭이 꼬꼬댁 하고 일어나 보니까 하얀 달걀이 뚝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닭 몸속에 있었던 달걀이 이제 충분히 성숙되어서 어느 시간이 되니까 딱딱한 달걀을 가지고 태어난 것입니다. 그 몸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닭은 낳는 암탉을 잡아 배를 갈라보면 거기에 아주 저 위에서부터 수백 개의 알이 매달려 있습니다. 아래에는 내일이면 태어날 하얗게 껍질이 말랑말랑한 달걀까지 그 속에 들어있는데 그 모습이 무엇과 같은가 하면 얇은 비닐 종이에 액체를 넣은 것과 같이 아주 말랑말랑 합니다. 하루쯤 있으면 딱딱해 지면 그러면서 쏙 하고 나옵니다. 그러면 닭이 계란을 낳는다고 하는 그것과, 그러면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생각이 꼬리를 무는 적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글짓기, 작문하는 훈련을 돕는 것 중의 하나가 연상법입니다. 커다란 종이를 주고 연상을 하게 합니다. 솜사탕 그러면 구름, 구름 하면 비, 비하면 연꽃, 그 다음에 연꽃 그러면 동그라미, 그 다음에 풍성, 계속 연상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떠한 생각이 있을 때 생각이 생각을 낳는다고 할 때 닭이 계란을 낳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닭이 계란을 낳으면 계란은 닭에 대해서 완전히 타자입니다. 닭은 계란이 아니고 계란은 닭이 아닙니다. 너무 어렵습니까. 먹을 땐 참 쉽게 먹었는데, 치킨도 먹고 후라이드도 먹었는데, 어쨌든 태어나면 타자입니다. 이 속에서 생각이 생각을 낳았다고 할 때, 이것은 구분은 되지만 완전한 타자는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성자께서 성부로부터 나셨지만 그 나으심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닭이 계란을 낳거나 사람이 자식을 낳는 것 같은 그런 종류의 나으심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성자는 성부에게로부터 나으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십니다. 그런데 나으심과 나오심의 차이가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쉽게 설명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나으심과 나오심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신 것은 동일한 신적인 본질이다. 몇 년 전에 거의 6시간에 걸쳐서 삼위일체에 관해서 강의를 했었습니다. 가서 더 들어보시고, 진도를 나가보겠습니다. 그렇게 성자는 성부에게서 낳은바 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셨는데 이것이 순서로 보면 성부 다음에 성자, 그리고 성령이 그 다음이지만 누가 먼저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이 모든 사건들이 시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이 없는 영원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는 성부에게서 나오셨으나 성부는 성자 없이 계신 적이 없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바 되셨으나 성부와 성자는 성령 없이 계신 적이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성을 초월한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원 안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이러한 논리가 가능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여러분들에게 비유를 들어 드렸습니다. 한번 만 더 하면 여러분들이 이해될 것 같습니다. 우리들이 정상적인 이차원의 평면에서 하나의 동일한 크기의 네모가 두 개가 겹쳐질 수 있겠습니까. 겹쳐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의 네모는 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선의 공리는 두께도 없고 부피도 없습니다. 우리가 그릴 때 줄로 그어서 면적을 차지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기 때문에 그리는 것이지, 실제로 수학에서는 두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 위에 똑같은 직사각형을 얹어 놓는다 할지라도 크기가 없는 줄 위에 크기가 없는 줄이 얹어 놓는 것이니까 그것은 겹쳐지는 것이 아니라 겹쳐서 그것이 두 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크기가 없는 것 위에 크기가 없는 줄이 올라가니까 또 다시 크기가 없는 줄이 되기 때문에 하나의 사각형이 되어서 평면에서는 똑같은 크기의 사각형이 그 위에 올라간다는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차원의 생각에서는 그러할 수밖에 없는 삼차원의 세계를 아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올려놓으면 이것이 말하자면 사각형 위에 사각형이 이렇게 올라간 것이 3차원에서는 가능한 것인데 2차원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2차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3차원에서는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똑같이 시간의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그 일이 영원의 차원에서는 가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 보다 먼저 나신 분이시다. 그러니까 성자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시다고 하는 것은 문학적인 표현일 뿐이고 바꿔 이야기 하면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계신 분이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주의 정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속하신 그 분이 바로 창조주가 우리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아니 어떻게 해서 그 예수 그리스도가 창조주가 되실 수 있으실까 질문할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Ⅲ. 창조주이신 그리스도
A. 창조의 삼위일체 사역
창조는 삼위일체 사역에서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고, 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구분되는 위격이시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 성부, 성자, 성령은 다른 한 위가 있는 곳에 두 위가 없거나, 두 위가 있는 곳에 한 위가 배제되는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가끔 드는 예이지만, 아주 정확한 예입니다. 자, 삼각형이 있고 이해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각각의 모서리를 성부, 성자, 성령으로 묘사한다면 이 세상과 관계를 맺으심에 있어서 그 일이 어떠한 일이냐에 따라서 성부가 우선적으로 관여하시고 성자와 성령이 부차적으로 관여하시든지, 혹은 성자가 우선적으로 관여하시고 성부와 성령이 부차적으로 관여하시든지, 아니면 성령이 나머지 두 위와 그렇게 관여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의 창조, 그 다음에 구속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 해봅시다. 창조는 성부 하나님이 우선적으로 관여하십니다. 그리고 성령과 성자가 동참하시는 것입니다.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래서 이 창조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면 세 개의 전치사로 설명할 수 있는데, 성부에 의해서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창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창조의 기본적인 디자인은 성부에 의해서 그리고 창조되는 모든 만물들은 성자 때문에 그리고 창조되는 모든 만물들은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창조에 있어서 이 성부, 성자, 성령은 어느 위도 배제되지 않고 창조가 이루어지기에 성자를 창조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만물이 그로말미암지 않고는 지은바 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들은 성자를 아주 분명하게 창조주라고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이 세상을 성자로 말미암아 창조하셨고 모든 피조물들을 성령 안에서 창조하셨습니다. 모든 피조물들 세계에 있는 이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 일치, 이 세계에 펼쳐진 이 아름다운 것들은 성령 안에 있기 때문에 그 모든 사물들이 연관관계를 가지고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이 자연의 세계 속에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를 들면 구속의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구속하심에 있어서는 성자께서 우선적으로 개입하시고 그리고 성부와 성령이 함께하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구속이 이루어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루신 구속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에는 다시 성령님이 제일 우선적으로 간섭하시고 성부와 성자가 함께 참여하심으로 우리가 믿음을 받아들이고 구속함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부, 성자, 성령은 떼어놓을 수 없는 완전한 일치 속에서 이 창조로부터 구속, 그리고 완성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경륜을 전개해 가시는 것입니다.
B. 그로 말미암아 창조됨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 창조된 것들이 크게 두 가지였는데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면 보이는 것들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지상세계 속에 있는 지상적 사물들입니다. 이것들은 보이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지상에 있는 창조된 모든 것들은 보이는 것들입니다. 물론 눈이 나쁘면 혹은 너무 작은 것은 못 보겠지만, 못 보는 것이지 사실 볼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모두 보이는 것들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보이는 것들은 지상적 사물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은 천상적 사물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왕권들과 주권들과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등등 이야기 하는 모든 것들은 이제 영적인 피조물들, 즉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래서 천사들에게도 다양한 등급이 있어서 그 다양한 등급의 이름을 성경이 이렇게 주권, 통치자, 권세 등등으로 묘사하는데 정확하게 그것이 무슨 랭킹을 가리키는지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쳐 주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천사들의 종류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해석의 일치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이는 이 모든 세계만 그리스도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천상의 사물, 영적인 세계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 두 개의 세계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는 천상의 세계, 또 다른 하나는 지상의 세계로 창조하셨습니다. 천상의 세계는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 당신이 직접 다스렸지만, 이 지상의 세계는 하나님이 인간을 대리자로 두셔서 그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알며 천상의 세계와 교통하는 가운데 이 지상의 세계를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가꾸고 돌보고 다스리도록 위임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인간의 지위는 대단한 것입니다. 천사들이 일시적으로는 우리보다 능력이 뛰어나고 지식이나 권능의 면에 있어서는 우리보다도 탁월할지 모르지만 지위의 면에 있어서는 인간과 비교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천상을 직접 통치하시고 지상의 세계를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대리자로 세워서 더 고상하게 표현하면 대리적인 왕으로 임명하여 이 세계를 통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분 앞에서만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이 모든 세계를 자애로운 임금과 같이 다스리고 질서를 지으며 그 왕국을 왕국의 원주인이신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인간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하면서 죄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제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르게 인식하고 천상세계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천상세계에 대해서 올바른 지식을 가져야지만 지상세계를 올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세계가 창조되었는데 두 세계가 두 목적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는 아주 밀접한 유기적인 관계에 있게끔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 두 세계가 꼭 모와 같은가 하면 인간의 영혼과 육체와 같은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는 보이지 않는 세계, 보이는 세계, 영적인 세계, 물질의 세계, 똑같이 인간의 물질인 육체, 그 다음에 영적인 피조물인 인간의 영혼, 이 두 개가 짝을 이루어 사람다운 사람이 되듯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육체의 존재에 대한 목적이 따로 있고 영혼에 대한 창조의 목적이 따로 있습니까. 아닙니다. 육체와 영혼이 하나로 만나서 소위 이야기하는 네페쉬하야, 살아있는 사람이 되고 하나님은 그 살아있는 인간존재에 대해 하나님이 창조세계와 관련된 목적을 지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두 세계가 이렇게 하나는 천상의 세계, 지상의 세계가 있다고 할 때 이 두 개는 아주 밀접한 연관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 대한 올바른 지식은 언제나 천상세계에 대한 지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 평범한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아주 쉽게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많은 철학자들은 이 세상에서, 철학자들의 근본 동기는 이 세상에서 신을 찾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How to live'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지만 내가 행복하고 내가 행복한 것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을 끼치며 살 수 있겠는가. 이것을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다보면 반드시 도덕이라는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충동적으로 먹고 마시고 범죄하고 두들겨 패고 욕망을 채우기 위해 그렇게 살아서는 아무리 실험을 해봐도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왕들 중에는 미치광이가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돌아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을 돌게 만드는 것은 자유입니다. 완전한 자유가 인간을 완전하게 돌게 만듭니다. 그러니까 완전한 자유의 개념은 문자 그대로 완벽한 자유는 자유가 아니라 구속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그대로 고백합니다. 인간의 무한한 불안은 무한한 자유로부터이다. 인간은 모든 신과의 관계를 절단하고 나면 인간은 완전한 자유에 들어가게 된다. 도덕과 인간이 쌓아올린 경험과 단절하고 나면 인간은 완전한 자유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뭐라고 합니까. 그러나 그 자유는 무시무시한 자유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도덕적 문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덕이 도대체 근거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연일 데모하는 것은 ’동성애가 왜 안 되는가‘.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동성애는 아주 뿌리가 깊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때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역사적으로 아주 뿌리가 깊으니까 갑자기 생겨난 것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동성애가 안 된다고 이야기 하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인가. 그럴 때에 이 세상에서는 그것에 대한 확고한 근거를 말할 수 없습니다. 확고한 근거라고 말해 봐야 인간의 본성에, 본성이 무엇입니까. 사람마다 본성이 다르다고 이야기 하는데 공통된 것이 없는데 왜 그래야 하는 것입니까. 피터 징거라고 하는 학자는 결혼이 도대체 사람과 사이에만 성립하는가. 짐승과 인간 사이에도 가능하다고 그렇게까지 이야기 하는 사람도 나오는데, 그러면 동성애는 되고 짐승과의 결혼은 왜 안 되는가 할 때에 답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볼 때 모든 도덕 교육은 종교 없이는 성공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의 존재에 대한 명쾌한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은 도교와 노장사장 같은 데에서도 이 신은 자연으로 투사시키면서 천리를 이야기 합니다. 하늘의 이치를 이야기 합니다. 천륜과 인륜을 이야기 하면서 이 도덕적인 가치의 기준 자체를 상층세계에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구나 하면서 무릎을 칠 수 있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 열심히 설명해 준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들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여 주는가 하면 분명하게 하나님이 천상세계와 지상세계를 창조하셨고 이 두 세계는 영혼과 육체처럼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 그 희미한 흔적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모두 남아있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세멘 릴레기오즈'라고 해서 종교의 씨앗들이 이 속에 남아있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것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무신론자도 갑자기 어려운 일을 만나면 ‘오 마이 갓’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천상과 지상 세계를 만드신 것입니다. 지상세계에 대한 지식은 천상세계에 대한 지식의 조명을 갖으면서 지상세계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가 종교에 대한 탐구를 그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물질에 대한 문명이 고도로 발달되면 발달될수록 인간의 종교에 대한 갈망은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과학만능주의로 가면 갈수록 종교에 대한 갈망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참 종교를 싫어하고 거짓된 종교를 좋아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타락하면서부터 가장 먼저 눈이 멀어서 볼 수 없게 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천상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천상세계에 대한 찬란한 빛, 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영적인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피조물들을 쫙 보면서 이 피조물들의 높낮이가 어떻게 되어있고, 이 피조물들을 어떠한 목적으로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것들에 대해서 확고한 이해를 가질 수 있었는데 천상세계에 대한 눈이 멀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지상세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모든 사랑과 열정, 이러한 것들이 뒤틀리기 시작하면서 혼란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결국엔 사랑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올바르지 않은 사랑, 질서가 올바르게 잡히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이러한 것들 때문에 인간이 불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합니다. 오늘날 가장 커다란 문제는 사랑이 없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사랑이 많습니다.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모자라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지 않아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올바르지 않음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영혼에 떼가 끼어서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초보 운전 때였는데 인천에서 중고를 몰고, 돈이 없을 때였으니까 중고를 샀습니다. 그런데 성산대교인가 쭉 건너오는데 비가 막 내리는데 와이퍼가 막 이러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탁 하더니 안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 와이퍼가 그렇게 중요한지 알았습니다. 앞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비가 계속 쏟아지는데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창문을 열고 바깥으로 얼굴을 내놓고 유리창을 닦으면서 운전을 했습니다. 굉장히 위험했습니다. 둘 다 한꺼번에 파업을 했습니다. 더 이상 안 움직여서 깜짝 놀랐습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항상 점검을 하고 다녀야 합니다. 안 보이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이, 인간이 바로 그렇게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인간이,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이 발견을 한 것입니다. 인간이 성경의 발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떠한 존재인가 하면 죄가 들어와서 부터는 두 가지가 필요한 존재입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천상의 세계, 하나님을 향해서는 영혼이 계속해서 정화되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에 의해서 영혼이 계속 정화되어서 죄악에 찌든 눈을 가지고는 볼 수 없는 천상의 세계의 아름다움과 의미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있던 성도 가운데 한 분이 너무너무 예쁘고 사랑하는 아들을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인데, 교통사고로 잃었습니다. 어머니의 슬픔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리고 이제 거의 인사불성으로 있다가 교회에 나왔습니다. 온 그날에 설교가 무엇이었는가 하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라’, ‘The Country that I love best',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라’라는 설교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구원과 하나님의 계획> 마지막 시간 천상의 영광과 아름다움에 대한 설교였는데 그 설교를 듣고 엄청나게 울고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자기 아들이 자기는 여태까지 눈물을 흘리며 우울증이 걸릴 정도로 괴로워했는데 그 영광스러운 세계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천상의 세계에 대해서 눈을 뜨니까 인생에 대한 생각들이 확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훌륭한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두 가지 중요한 과제를 안고 있는데, 하나는 천상세계를 향하여 불결하고 더러운 영혼이 깨끗하게 정화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인간인 동시에 지상인 세계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창조적인 행위로써 노동을 보태어 지금 있는 세계 보다는 훨씬 나로 말미암아 아름다운 세계가 되게끔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보람과 그 다음에 기쁨을 느끼실 수 있게끔 그렇게 이바지해서 살아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그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두 번째 과제인데, 이 두 개의 과제는 천상세계와 지상세계가 나뉘어질 수 없는 것처럼, 이 두 개의 과제는 하나 없이는 다른 하나가 성립될 수 없는 짝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항상 이 신앙이 천상세계와 지상세계, 영혼과 육체, 그 다음에 영혼의 정화와 창조적인 행위의 섬김, 이 두 개가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두 개가 아주 이상적인 균형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 사람의 영혼도 건강하고 그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쪽으로 쏠리면 어떻게 됩니까. 아, 이 더러운 세상, 썩을 세상. 교회에 나올 때에는 우울하게 나오고 끝난 다음에는 또 우울해 집니다. 왜냐하면 이 깨끗한 영혼이 더러운 세상으로 가는구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내세만을 생각하면서 이 세상에서는 아주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가장 기쁜 것은 조속한 시일 내에 죽는 것, 그것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반대인 것은 무엇인가 하면 천상세계, 지상세계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세상에 코 박고 여기에 끈끈이에 달라붙어서 잘 먹고 잘 살고 쾌락을 즐기고 오늘 만족하면서 사는 짐승 같은 생활을 하는 것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이 둘 다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한 구조를 가지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지상의 세계도 천상의 세계도 모두 성자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경배는 우리 지상에 있는 우리들만의 경배가 아니라 이 모든 피조물과 심지어는 하늘 아래 있는 것들이나 땅 아래 있는 것들이나 하늘 위에 있는 것들이나 하나님을 제외하여 피조된 모든 것들이 자신들을 이렇게 창조하게 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높이고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 인간이 가장 말하자면, 모든 것들이 경배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지만, 인간이 경배할 때 하나님은 천사가 경배하는 것보다 더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천상의 세계는 당신이 다스립니다. 천사들을 심부름시켜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상의 세계는 당신과 비슷한 위치에 인간을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 모든 것들을 통치하고 다스리게 하시는데 그 때, 이러한 비유가 웃기는지 모르는데 갑자기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황제가 주위 나라들을 쳐들어가서 와 공격을 해서 싹 평정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복된 모든 나라의 백성들이 왕 앞에 나와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은 없습니다. 그 정복한 황제가 그 경배를 기뻐하겠습니까. 아니면 모든 백성은 없어도 왕이 나와서 그분을 주인으로 맞으면서 경배하는 것을 기뻐하겠습니까.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두 말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인간의 경배는 하나님 앞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그 인간이 그 모든 경배하는 것들 가운데 최고의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항상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할 때, 물론 겸손한 마음으로 나 같은 사람이 주님께 경배하는 것이 주님께 무슨 기쁨이 될까. 나 같은 인간이 하나님을 경배할만한 가치가 없는 인간이야.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에게 자격을 주셨지. 그것은 칭찬할 만합니다. 그러한 겸손의 정신을 계속 유지하십시오. 그러면 신앙생활 잘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경배하지만, 내가 경배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이 하나님께 무슨 차이가 있을까. 왜, 나는 어차피 시편 78편에 기록된 것처럼 가고는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과 같이 허무한 존재인데, 아닙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수천 마리, 수백 만 마리의 원숭이들 침팬지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구관조 새 칠천 마리를 교육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찬송을 하고 앵무새 수천만 마리가 노래를 해서 동해바다에 울려 퍼져도 여러분 한 사람이 주님을 경배하는 것에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경배한다는 것은 정말 굉장한 행위입니다. 굉장한 행위입니다. 경배를 하는 이것이 엄청난 공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렇게 경배할 때 하나님은 절대로 그것을 하찮게 여기시지 않으십니다. 한 영혼이 받는 것을 천하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한 생명입니다. 무슨 생명입니까. 하나님을 경배하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하면 항상 하나님, 주님은 온 땅과 만물위에 뛰어나시고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시옵나이다 라고 기도할 때 60억 인구의 대표기도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60억도 넘지 않습니까. 천지창조 이후 지면에 살았던 인구가 1천 억 명쯤 된다고 합니다. 1천 억 명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경배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온 우주가 수백억 광년이 되는 끝이 없는 어마어마한 우주이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빛나는 수천 억 개의 별들에 반짝이는 이 모든 아름다운 빛도 인간의 어린아이의 마음 하나가,
(찬양) 사랑의 하나님 귀하신 이름은 내 나이 비록 어려도 잘 알 수 있어요
이만한 크기도 안 되는 눈깔사탕 크기도 안 되는 어린 유치부 아이에게서 받으시는 영광이 사람 없는 온 우주에 빛나는 수천 억 개의 별들의 반짝이는 것들에 의해서 받으시는 영광보다 탁월하게 뛰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것은 지겨운 의무입니까. 감당할 수 없는 특권입니까. 그렇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특권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마음으로 경배하는 이 시간은 신성불가침의 시간입니다.
(찬양)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Ⅳ. 창조와 구속의 관계
그러면 오늘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드는 의문은 이것입니다. 왜, 왜, 구속주가 곧 창조주이신가. 왜 모든 세계가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창조된 것이 없으신 바로 그 분이 우리를 속량해 주셨을까. 곧 창조와 구속의 관계의 문제입니다.
A. 구속의 필요성 : 타락
우리는 여기에서 제일 먼저 구속의 필요성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구속의 필요성은 타락 때문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구속의 필요성이 대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목적 없이는 이 세상에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에 목적 없이는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교회당 안에 수많은 사물들이 있는데 이게 원래 생겨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인간이 모두 만든 것들입니다. 물론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자연의 재료들을 사용해서 만든 것들입니다. 만든 하나하나는 그 하나하나마다 개별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매달린 등은 빛을 비추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이것을 꺼버리면 캄캄해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여기에 있는 이 마이크는 작은 사람의 작은 목소리를 저 끝까지 울려 퍼져 듣게 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스피커는 내보내기 위해서, 방송실에 있는 앰프는 그 음성을 증폭시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있는 것은 예배의 시작을 알리기 위한 종소리를 내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아무 것도 의도 없이 만들어진 것이 하나도 없고 모두 하나하나가 개별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고 개별적인 목적을 가진 모든 것들은 이 공간에서 하기에 꼭 필요한 일들을 하도록 서로 연관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이곳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기 위한 용도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모두 맞게끔 모든 것들이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당은 술집 같지 않고 극장 같지 않고 음식점 같지 않고 예배당 같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을 창조하실 때에도 하나하나마다 모두 목적이 있으셔서 창조하셨고 하나하나의 목적을 전부 다 연관을 이루면서 그것들을 모두 아름답게 조직해서 하나의 큰 목적을 가지고 성취하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이 천상과 지상의 세계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합니다. 인간의 타락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영적인 관계를 끊어놓았고, 관계를 토대로 하여 생명을 누리면서 다른 사람과 사랑하고 함께 협력하며 살 수 있는 관계를 끊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의도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하나를 집단으로 만들어서 뗄감처럼 사용하시려고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창조하셔서 하나님이 서로 모든 인류가 모든 다른 이웃들에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 세상의 인류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고 하면, 아담과 하와 사이에만, 남녀 두 사람 사이에만,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만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식을 향해서도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이웃 사람에게도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하는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 세계를 하나님이 구속의 완성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레굼 까리따띠스’-사랑의 나라입니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3장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이고, 누구도 이러한 하나님의 창조와 세계의 경륜에 대한 인식 없이는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고 나는 여러분들에게 분명하게 이야기 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고자 하는 목적들이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죄는 끊어짐을 도입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영적인 관계가 끊어지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끊어지고, 사랑의 관계가 끊어지고,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 까지도 파괴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속에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내버려 두시면 창조의 원래의 목적대로 피조물들이 스스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위대한 존재이고 탁월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탁월하기 때문에 너무 많이 망가졌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스스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갈 수 없어 저주 아래에 이 모든 세계와 인간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속량하시는 일, 지난주에 설교한 죄에 대한 속량, 죄 사함을 우리를 위해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래서 우리들이 구원을 받을 때 창조 목적으로 돌아갈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조의 목적과 구속의 목적은 완전히 일치하고 구속의 목적은 창조의 목적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 구원의 계획을 이해하면 창조에 대해서 깊이 감격하게 되고, 창조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를 가지면 가질수록 눈물 없이는 구속의 이해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B. 구속의 삼위일체 사역
그런데 이 구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면 창조와 똑같이 삼위일체 사역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창조가 성부에 의해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구속도 똑같이 성부에 의해 성자로 말미암아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부가 타락한 인간을 위해 구속의 드라마를 기획하시고, 그 아버지의 뜻을 잘 받아들인 아들이 이 세상에 순종함으로 내려오셔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살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보이는 육신 속에서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사는 가운데 인격과 삶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는 방법으로 나타냈는데 이것은 이전 세대에 조상들이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몸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인류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눈먼 자의 눈을 뜨게 하고, 병든 자의 병을 고치고 저는 자의 다리를 온전케 일으켜 세우시고 헌데를 어루만지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모습 속에 그것은 한 인간이 종처럼 그 일을 하고 있지만 그 종처럼 섬기고 있는 그 인간 등 뒤에서 뿜어져 나오는 찬란한 광채, 이것은 바로 천상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광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된 세상과 완성될 세상의 아름다움 사이에 정중앙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성육신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 한 분이 그렇게 탁월한 것입니다.
모든 종교는 중심인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교는 석가모니, 이슬람은 마호메트, 모두 중심인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중심인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호메트 교도들 마호메트 없어도 됩니다. 불교 믿는 사람들과 이야기 해 보니까 진정한 불교는 부처를 초월하는 것이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렇지 않고 창조와 완성의 지평에서 빛들이 뿜어져 나오면 그 빛이 뿜어져 나오는 중심 자리에 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러나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나 인격으로는 하나님이신 그 분 때문에 그 분에게서부터 확 빛들이 뿜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셨는데 믿음 없는 인간들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자비로운 손을 보면서 믿음 없는 사람들은 그 분이 단순한 사람의 사랑이 아니라 이제껏 우리가 말로만 들었던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 그 사랑의 화신이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의 발 앞에 엎드려 그 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성자로 말미암아 이 세계가 창조된 것처럼, 성자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구속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세계가 성자를 통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망가진 것은 인간들 때문에 망가졌지만 망가진 것이 제대로 돌아오려면 창조의 똑같은 기획을 따라서 성부에 의해 성자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이것이 구속을 통해서 성령 안에 있게 된 모든 새로운 피조물들, 구속을 이루었지만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저주가 풀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저주가 풀립니다. 맨 처음 창조될 때에는 성부에 의해, 성자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 성령 안에서 이 모든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성령 안에서 였습니다. 이 모든 자연 세계의 아름다움의 원인이었고 모든 인간들 마음 안에 있는 도덕 세계의 아름다움의 원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다음에 성부에 의해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구속되었을 때, 이것들이 모든 세계를 끌어안는 구속을 바라보고는 있지만 이미 일어났으나 아직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시범적으로 먼저 하나님이 구원받은 인간들을 성령 안에서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에 접붙여 짐으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은 순간 우리는 공동체로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언약의 공동체, 계약의 공동체로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모두 성령 안에서 연결을 이루며 존재하는데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이러한 방식으로 신비하게 내주하시는 형식의 이러한 종류의 영적인 연합은 예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탁월한 연합이니까, 이것은 어떻게 보면 죄 때문에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면서 이 안에서 사랑과 아름다운 조화의 일치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 가운데 최고, 타락한 다음에 하나님이 바라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이 뭐냐 하면 성령에 의해서 하나 된 아름다운 교회가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보실 수 있는 최고의, 최상의 아름다운 작품입니다. 그 아름다움은 그 구성을 이루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신자의 영혼의 아름다움의 총합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더 심하게 예를 들면, 은혜를 많이 받고 성령 충만하며 진리와 사랑으로 한 덩어리가 된 교회는 쓰레기통 같은 타락한 세계위에 핀 한 송이의 장미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기쁨을 교회에다 두시는 것입니다. 그 교회는 아들의 신부입니다. 아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베푸셔서 교회가 그 사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비와 아름다움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V. 적용과 결론
하나님이 이 모든 일들을 이루시기 위해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속량, 곧 죄 사함을 얻게 하시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우리를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창조의 비추어보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 지상의 세계를 임금처럼 맡기셨다는 사실, 그리고 그가 타락하였을 때 비참한 인간을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주시면서 까지 구원하셨다고 할 때, 구원받은 우리들을 통해 이루시려고 하는 그 위대한 일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육신으로는 80년 70년 살다가 이 세상의 한 줌의 흙이 되어 돌아가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찮은 존재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높이 들어 주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분의 이름을 높이는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단순한 사건일 수 없고, 가장 못난 죄인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다하여 그 분의 이름을 찬송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은 바로 거기에 와서 경배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위대함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나님을 참답게 경배하는 그것에 인간의 아름다움과 탁월함, 영광과 뛰어남이 있다면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인간을 돋보이게 만드는 아름다운 자리에서 이탈하여 허망하게 살고 인생을 낭비하고 그리고 주님께 불순종하고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 없이 행복해지려 하지만 더 불행한 처지에 떨어지는 그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성부, 성자, 성령 모두 하나님이신데 그렇게 온 마음을 다해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그것을 성경이 인정하는 이유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영광을 받아도 그것 때문에 시기하시지 않으십니다. 당신은 그 아들의 뒤에 숨으시고, 그 아들을 통해 아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찬송을 돌릴 때, 하나님은 아들을 통해 당신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이 모든 세계의 머리로 주신 이유이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또한 창조에 있어서 머리이실 뿐만 아니라 새로 이루어지는 그 다가올 하나님의 완성된 세계의 머리로 삼으신 이유이고, 그 때가 될 때까지 교회의 머리로 삼으신 이유가 또한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해서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이 쓸모없는 인간을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위대한 존재로 창조하셨구나. 그렇게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쓰레기더미를 뒹굴며 살던 그러한 막대 먹은 인간에게 깨달음을 주셔서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우리를 이렇게 아름다운 존재로 회복시키셨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때에 우리가 어떻게 그 분을 배반하고 그 분의 은혜에서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세상에는 시련이 그치지 않고 고난의 파도와 역경들이 언제나 있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초월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주님을 경배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신 목적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려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그 분이 우리를 구속하셔야 했던 이유인 것입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9. 창조주와 교회의 머리되심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1:17-18)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저는 지난 시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사해 주셨는데 그런데 그 분은 사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고 피조물보다 먼저 계신 분으로서 모든 만물이 그 분에게서 창조되되 영적 세계와 그리고 이 지상의 세계의 모든 피조물들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도바울은 다시 한 번 우리가 읽은 이 17절에서 그 분이 이 세상 모든 만물보다 앞서 계신 분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계와 그리스도의 계심의 관계를 논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Ⅱ. 세계와 그리스도의 계심
그는 제일 먼저 이 세계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심을 비교하면서, 그는 만물보다도 먼저 계신 분이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람의 몸을 입고 2천 년 전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실 사람의 몸을 입고 태어나셨지만 그 분은 그 본질이 사람이 아니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참 사람이며 또 하나님이셨지만 두 인격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오직 사람의 인격을 갖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인격을 갖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그 분의 본체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하여 인격 없이 사람의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우리를 위해서 대속 제물로 죽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함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이제까지 듣기만 하였던 하나님의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인간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도록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물을 것입니다. 어차피 예수님이 계시던 삼십 몇 년 동안만 그것도 예수님의 사적인 생애에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드러내는 삶을 사시지 않고 감추어진 생애를 사셨으니 기껏 해봐야 3년 동안 공생애 사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셨는데, 그 후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어차피 보지도 못할 텐데,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우리에게 큰 유익이 되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신약성경이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이 몸을 입고 이 세상에 계신 것은 33년의 해 밖에 안 되지만, 예수님께서 그 공생애 동안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모든 사건과 기록들 중 가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남겨 주셔서 오늘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할 때 사람의 몸을 입고 온 예수 그리스도는 잠깐 있다가 육체와 함께 사라지신 것이고, 오히려 예수님은 참 하나님으로서 사람의 몸을 입기 전에도 계셨고, 입은 후에도 계셨고, 사람의 몸을 잃어버린 후에도 계셨고, 그 몸을 부활로 다시 찾은 후에도 계신, 그래서 성경이 말하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만물보다 먼저계신 영원한 하나님이셨고 그리고 바로 그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의 모든 만물들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를 통하지 않고는 단 하나도 창조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사실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들은 그것이 영적인 피조물이든지 혹은 물질적인 피조물이든 상관이 없이 그 모든 피조물은 그 존재의 근거를 그리스도에게서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만물이 함께 서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서 있다고 하는 의미는 유지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될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만물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서 있고 유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만물의 존재의 근거일 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이 현 상태로 존재하는 현존의 근거가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세계와 그리스도를 관계 지으셨기 때문에 결국 이 세상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이 그리스도를 의존하여 생겨났고 그 그리스도를 의존하여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해서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모든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들이 그 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고 또 그 분으로 말미암아 유지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오늘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Ⅲ. 교회의 머리되심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제일 먼저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시고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마지막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그리고 돌아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어떠한 의미를 가진 것이었겠습니까. 빌립보서 2장에서 이 기독론을 묘사하는 가운데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신 그 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고,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마지막에 십자가를 지신 그것 까지가 동기가 하나님께 대한 아들의 온전한 순종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강요된 순종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을 아신 아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아버지의 기쁨을 위해 이 세상에 있는 당신의 형상을 닮은 모든 인간들을 위해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당신 자신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위해 고난의 십자가를 지신다는 말씀을 여러 번 남기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하나님과 영생의 관계를 누리며 살아야 할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었고 이 죄는 반드시 죽음을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죄는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한 범죄이기 때문에 파멸로서밖에 갚을 수가 없는데 이미 죄로 더럽혀진 인간의 파멸은 수없이 반복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 죄를 지은 그 대가를 갚는 그러한 보상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 있는 상태에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죄 없는 상태에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러한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죄 없는 상태에 있는 인간이 그 죄를 지은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는 바와 같이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들은 죄 아래서 태어났고, 죄를 지음으로 죄인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태어날 때 죄인의 더러움과 악함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우리의 죄를 대속할 희생의 제물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죄 없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인격도 취했더라면 예수님이 다중인격이 되셨을 것이기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격만을 가지셨지만 사람의 몸을 취하심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일생을 사시며 마지막에 복종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이루어드리는 아들의 헌신이었고, 하나님께서는 아들의 이 완전한 복종을 기뻐하시면서 그에게 상급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여 당신의 보좌 우편에 앉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을 거드시는 분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실 하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갖으신 그 모든 이 세상의 주인이 되시는 권세와 특권을 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시고 난 후에 모든 만물을 그 분의 발아래 꿇어 그를 주라 시인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라고 불리워진 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주라 불리우신 것입니다. 물론 누가복음 5장에서 보면 이미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 종교적인 커다란 의미를 갖은 그 주님이라기보다 당시에 자신이 존중하는 사람들을 향해 쓰던 일반적인 칭호의 성격이 훨씬 더 강합니다. 그래서 집안의 아녀자들도 자기의 남편에게 주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종들도 상전에게 주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에서 만물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그 발아래 무릎을 꿇게 하시고 그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다고 할 때 이 주는 그러한 사회에서 사용하던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주가 아니라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에 여호와 주님으로 불리웠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들 성자에게 주신 일종의 커다란 상급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가 되실 때, 그래서 그 주가 그리스도의 교회의 머리가 되셨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당신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이 모든 세계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고 망가졌을 때 다시 이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 세계를 새롭게 완성하여 하나님이 이 모든 창조의 계획들을 실행해 가실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위하여 먼저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그 후에는 두말할 필요 없이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시는 것은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입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는 만물을 창조하실 때 모든 만물들의 머리가 되셨고, 그리고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었던 당신의 영광을 거두시고, 이제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과 생명적인 관계가 끊어지게 하셨습니다. 이때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되심도 이제 처음 창조 때처럼 그러한 모습으로 남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전히 만물을 다스리시고, 다스리신 만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통치하시기는 하셨지만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오르신 후에는 여호와로서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고 이 모든 세계를 타락하기 이전에 아름다운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이었는데, 일에는 순서가 있으니 먼저가 교회이고, 그 다음이 이 모든 세계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를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기를 네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A. 만물의 근본이심
우선 첫째는 만물의 근본이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근본이라고 번역된 희랍어 단어는 ‘아르케’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이 처음, 혹은 히브리어의 ‘로쉬’라고 하는 단어와 같은 말인데, 머리, 시초, 시작, 맨 처음, 기원,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르케라는 이 단어가 요한복음 1장에 나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지어졌느니라”라고 할 때 그 때, ‘태초에’라는 말이 정확히 창세기 1장 1절에서 나오는 태초라는 말과 정확하게 똑같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는 히브리어로, 그리고 다른 하나는 희랍어로 되어 있다는 차이 뿐입니다. 이처럼 아르케는 처음, 원천이라는 의미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어 성경에서 이것을 beginning 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에서 근본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근본은 beginning, 시작이라는 의미도 있기는 하지만, 그냥 시작이 아니라 이후에 따라오는 모든 것들의 근거, 혹은 원천이 된다는 의미에서의 처음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이 번역이 영어성경의 번역보다 훨씬 더 좋은 번역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의 처음이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만물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계셨고 하나님으로 먼저 계셨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아르케이셨고 먼저 계셨을 뿐 아니라 모든 만물들이 그로 말미암아 이 세계에 창조되었기 때문에 사실은 그 분이 그 모든 창조의 근원이 되시고 원천이 되신다는 의미에서 예수는 아르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맨 처음 만물이 창조될 때 머리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만물들이 창조되었고, 창조된 모든 만물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아름다운 영적인 연결을 이루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탁월한 생명의 질서, 존재의 질서를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바로 이 창조하신 세계가 아름다운 이유이기도 하였고, 또 아름다운 그 세계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있는 상태이기도 하였습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이렇습니다. 한 도시 전체의 건물에 아주 아름다운 크리스마스트리를 연결했습니다. 크고 작은 등을 달고, 반짝이는 별을 달고 모형을 달고 해서 아주 아름답게 연결해 놓고 색 색깔의 등을 달고 깜빡이고 빛이 나게 만들었습니다. 간격과 거리, 밝기와 빛깔을 조절해서 아주 예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전기를 연결하여 코드를 꼽아서 전기가 흘러나오게 했습니다. 그러자 점등하게 되자 반짝이는 불빛들이 현란하게 빛났고 사람들은 엄청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빛나고 아름다운 것은 바로 전기가 들어와서 그 모든 것을 그렇게 아름답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만약에 하나님의 통치라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것들을 이 모든 피조세계와 연결시켜주는 인입선의 스위치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들을 존재하게 하신 원인이 되었고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원인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모든 세계, 만물 위에 가장 탁월하게 뛰어나셔서 그로 말미암아 창조된 세계의 영광을 아름답게 드러내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 분이 머리이심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창조세계가 머리이신 그 분께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분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으로 이 모든 미학적이고 역학적이고 도덕적인 질서 안에서 저 발아래 구르는 돌맹이로부터 시작해서 창공을 나는 새들과 바다를 노니는 물고기들과 그 위에 도덕적인 판단을 가지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들에게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 모든 세계를 뛰어넘어 물질의 세계와 우주천체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하자 이 모든 연결들은 거의 끊어져 버렸고 이 연결들 속에 있던 세계를 지극히 아름답게 하던 그 중요한 영광들을 하나님께서 대부분 자신에게 거두어 가 버리셨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이 모든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리셨다면 이 모든 세계는 어마어마한 혼돈과 파괴가 발생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찬란한 영광은 거두셨지만, 사물들의 질서를 남겨두셨고, 특별히 노아의 홍수가 일어난 후에는 하나님이 약속을 하시면서 이제 이 모든 세계가 지속되는 동안에 추위와 더위, 심음과 거둠, 이 모든 것들이 그치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서 만물들의 질서를 굳건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 흔적들이 아주 희미하게나마 남아있기 때문에 오늘도 여전히 사람들의 인간관계 속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것 보다는 이 자연과 그리고 드넓은 그 웅장한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더 쉽게 발견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의 영혼에 대해서 많이 배우게 된 경우에는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 속에 사는 것이 사람을 떠나는 것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는 데 더 큰 도움을 주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예수 그리스도는 그렇게 창조의 머리이셨고 그래서 그 분이 다시 죽고 부활하사 승천하신 후에는 하나님이 그 분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심으로써 예전에 이 창조세계를 머리가 되어 모든 영적인 연결로 그 아름답게 하여 붙들고 계셨던 그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제일 먼저 교회에 대하여 하게 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언제부터 있었느냐, 학자들마다 그 교회를 규정하는 바에 따라 각각 다릅니다. 아예 창조 때부터 있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구약에서부터 있었다고 보고, 아담부터 있었다고 보기도 하고, 혹은 아브라함부터 있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부터 교회가 생겼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 교회라고 하는 지평을 어느 차원에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지금까지 한 모든 이야기는 다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구약의 이스라엘이라는 껍질을 깨고 나와서 진정으로 하나님이 이루시려고 했던 하나님의 왕국으로서의 영적인 나라인 교회와 관련시켜서 이야기 하자면 이것은 성령이 오신 다음에 그러한 의미에서의 교회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이 이러이러한 잘못이 있을 때에는 교회에 말하고, 여기에서 이미 교회가 있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써 그 교회는 앞에까지 있었던 교회의 연속성을 이어오면서 사실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교회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이미 있었던 교회가 흙으로 빚은 사람이라면 오순절을 통하여 하나님이 성령을 부으신 것은 흙으로 빚은 사람을 영혼을 주입한 것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교회는 이제 그 이전의 시대와는 구별되는 영적인 교회가 되고 성령의 시대의 주역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 되게 하실 때 심지어 그 성령조차도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계에 교회 위에 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머리가 되신 것이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심으로 말미암아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이 교회 사이에 영적인 연합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면 아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 주일날도 말씀 드렸듯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초월적이고 초자연적인 일들이 사람들 속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져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되었고, 그래서 영적인 연결을 통해 하나님이 아들에게 주신 놀라운 생명과 사랑이 그리스도의 교회 속에 충만하게 흐르고 그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우리들이 이 세상 자원으로만 살았습니다. 그래서 돈과 권력과 육체의 건강이 있으면 자원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면서 사람들을 지배하고 그 사람들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봉사하게끔 강요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인생의 문제는 이 세상의 자원의 결핍을 통해서도 생기지만, 그것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의 결과일 뿐입니다. 즉, 우리가 병원체에 감염이 되면 이런저런 질병이 생겨나듯 그렇게 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남의 것을 빼앗고 포악하게 강탈하여 자기의 것으로 모은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지상의 자원들을 모으는 것이지, 결코 자기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영적인 자원에 속한 것은 그러한 식으로 강탈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주셔야지 받을 수 있는 것이었는데 우리는 그러한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스도의 교회에 한 몸의 일부가 되면서 이 생명이 흘러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우리에게 돈이나 권력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한 식으로 복음을 가르쳐 주신 적이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성령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에 이루어진 이 연합 안에서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은혜를 가져다줍니다. 그러면 그것으로서 우리들이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는 놀라운 힘을 얻게 됩니다.
(예화) 우리 어제 교구가 모여서 이쪽 지역 교구가 모여서 지역 심방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제 각 교구의 식구들이 자기 간증을 영상을 하는데 그 중 한 형제의 간증을 듣고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결혼하고 신혼 때인데 아내가 암에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암에 걸린 그 아내를 간호하면서 살아가는데, 한참 신혼의 단 꿈에 있어야 할 때 항암치료를 받게 되니 가정이 얼마나 어둡고 항암치료로 인하여 아이를 가질 수도 없습니다. 이런저런 근심으로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형제가 하나님을 몰랐더라면 몇 가지 중 하나 아니겠습니까. 깊이 좌절하고 낙심하든지 아니면 아내를 버리고 도망가든지, 아니면 함께 모여 한숨을 쉬며 술을 마시든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더 믿게 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아내를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으니 이것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이 준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들이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은 세상의 돈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근본적인 문제들, 이것들은 사실 이 세상의 자원이 아니라 하늘의 자원을 통해서 공급받는 것입니다. 그 신비한 방법으로 하나님은 이 자원을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교회를 통해 당신의 교회에 접붙여진 우리에게 아주 신비한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 이외에는 있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는데 예수님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교회에 접붙이게 하시니까 우리의 생각이 지성이 놀랍게 변해서 정말 아름다운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 분의 은혜, 하나님의 말씀, 진리, 그 경륜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이 세상의 모든 현상들을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눈들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짐승처럼 즐거우면 헤헤 거리고, 괴로우면 괴로우거나 그 괴로움을 준 사람들에게 복수를 꿈꾸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예화) 신문을 보면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까. 신문을 보니까 1억 원 만 주면 아무나 죽여주는 심부름센터가 있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킬러들이 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주고 가 버린다는 것입니다. 1억 원이랍니다. 우리가 여러 해 전에 미국 같은 곳에서 한 사람을 죽이면 3천 불이다, 5천 불이다, 만 불이다 그랬을 때 아 정말 별천지구나 했는데,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구나. 병신 만들어 주는 데에는 5천만 원이라고 합니다. 발을 부러뜨리든지, 팔을 하나 없애는 것은 오천 만원이라고 합니다. 누가 고객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고객입니다. 저 인간 저렇게 걸어 다니는 사람 볼 수가 없고, 나는 저 사람을 그렇게 만들 능력이 없다고 할 때 그래서 열심히 벌어서 5천 만 원 가져다주고 죽이는 것은 가엾으니까 ‘다리 하나만 잘라 다오.’ 그러면 다리 하나 끊어줍니다.
보십시오. 그러한 것들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해결을 못 합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의 특징은 참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공중전화로 전화 걸다가 뒤에서 ‘빨리 좀 쓰시오’ 그랬더니 때려 죽였다고 합니다. 주차하다가 ‘차를 왜 여기에다가 댑니까?’ 하니까 그 사람을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세상이 된 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가 하면 물질이 많아지고, 문명이 많이 진 것들이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문제들이 인간들 속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 이렇게 큰 건물을 아름답게 지어놓고 완공되기 직전에 이 교회 건물과 비교를 해 보십시오. 얼마나 부자이겠는가. 결국 자살했습니다. 투신자살. 그 분이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모르지만 그 분이 아무리 빚이 많고 하더라도 다 정리해도 우리보다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원래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러한 것은 인간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20억을 비관을 하고 자살을 했다고 하는데 죽은 다음에 재산을 정리해보니까 40억이랍니다. 우리 생각 같으면 20억 정리하고 그래도 20억이 남는데 은행에 넣어 두면 얼마인데 그러니까 그런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그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자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선에 대한 관념이 예전에는 자기가 좋으면 선이고 나쁘면 악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새로운 질서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나면 사실 하나님의 진리대로 살지 않았을 때 괴로움과 고통을 겪고 죽을 고비를 넘긴 그 자체가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여러분이 자기 자식이 있는데 그런데 여러분이 선한 부모입니다. 정말 핏덩이를 낳아서 길러서 여러분이 부모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식이 다른 길로 갑니다. 그런데 조용히 집에 앉아서 기다린다면 그게 친부모이겠습니까? 기껏 한다는 것이 나를 자율적인 것을 좋아해,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 인격적인 방법 아니겠어? 그러면서 기다리면 자기자식 아닙니다. 가서 뺨을 때리고 작대기로 두들겨 패서라도 끌고 와야지, 일단 끌고 오고 밧줄을 묶어 못 도망치게 하고 빌든지 때리든지 무엇을 하든지 사람을 만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집사님들이 모여서 토론을 하는 가운데 제가 우연히 있었습니다. 뭐라 그러는가 하면 애들이 죽어도 공부를 안 한다고 애 아빠들이 모여서 투덜거립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 소용없어요. 자기가 하기 싫으면 백번 해도 소용없습니다. 자기 팔자지.’ 하고 한 사람이 발언을 했습니다. 그 옆에 있던 사람이 ‘시키는 데 까지는 시키지만 안하겠다고 하면 별 일 있습니까?’ 옆에 있는 한 사람은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갖은 분이었습니다. 학교도 좋은 곳에 나온 분이었는데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그러한 것은 애들 판단에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만한 나이에는 공부를 해야 하니까 때려서라도, 밧줄을 묶어서라도 시켜야 된다’ 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공부하기 싫은 마음이 죽을 때까지 가는 사람은 없고, 잠깐 몇 달 지나면 제정신을 차리는데 그렇게 밧줄이라도 묶어놓고 때려주고 하면 정신 차렸을 때 제대로 할 수 있는 바탕이 있는데 그냥 자율이다, 아니면 너 인생 네가 사는 거지 하면서 내버려두고 그냥 중요한 시절 1-2년 탱탱 거리고 놀면 그 다음에 정신을 차려서 이제는 다시 해야지 그러는데 딛고 올라갈 때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지만 소수이고, 그렇게 올라가지 못해서 결국 뒤쳐져서 공부 영영 못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때려서라도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하나님이 정말 선하시다면 우리들이 그 선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 하나님의 마음에 맞게 살면 그래서는 안 되지만, 하나님이 정말 선하시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어긋나서 행하게 될 때 고통을 받는 것이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위대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너무 너무 선하시니까 그렇게 하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당연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의 고통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셔서 새로운 감각을 주셨으니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지,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태어나게 하셔서 우리의 지성에 진리의 빛을 주지 않으셨다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을 가지고 예수를 안 믿는 사람을 설득해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받고 진리의 빛이 들어온 사람과 들어오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소경과 눈뜬 사람의 차이입니다. 아무리 눈 뜬 사람이 설명을 해도 눈을 감은 사람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어디 그 뿐입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구원해주셔서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 주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그들의 의지에 놀라운 힘을 주십니다. 나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이 미운 사람을 용서하게 하시고 그리고 자기에게 악을 행한 사람을 섬기게 하시고, 그리고 자기는 절대로 그럴 수 없는 사람인데 자기의 이익을 남을 위해 기꺼이 포기하게 만드는 일들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엔 하나님이 영적인 교회를 당신의 사랑과 생명으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차원은 각각 다르지만, 불신자였을 때 예수님과 상관없이 삽니다. 아무상관이 없다고는 말 못합니다. 예수 믿은 다음에 나중에 보면 기도도 안 하고 하나님 없이 내 마음대로 살았는데, 사실은 하나님이 내 인생을 계획하시면서 이끌어 가셨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모릅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렇게 예수 없이, 하나님 없이 살 던 때와, 예수에 접붙여져 살게 된 그 때의 방식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슬프고 괴로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예수를 모를 때에는 짜증이 나고 고통이 오면 술한 잔 먹어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들어가고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고 나면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예배당에 찾았다가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면서 생명을 경험하면서 근심과 염려로 죽었던 나 자신이 다시 살아나게 됨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초월적인 비밀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생겨나지 않습니까. 그 때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가 현저히 다르듯이 이 모든 세계도 죄가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안 다스리시는 것은 아니지만, 그 다스리시는 관계가 예수 모르고 살았을 때와 같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어서 이 모든 세계를 완성하실 때에는 우리가 신앙 안에서 충만한 가운데 하나님의 힘을 입어 사는 것처럼 그렇게 모든 만물들이 예수와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하신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근본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B. 죽은 자들 중 처음 나심
두 번째는 죽은 자들 가운데 처음 나셨다고 하였습니다. 처음 나셨다는 것이 ‘프로토토코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초태생입니다. 초태생이라고 할 때 생각나는 것 없습니까.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탈출할 때 하나님이 내리신 마지막 재앙이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들, 바로의 맏아들로부터 시작해서 짐승의 처음 난 새끼까지 다 죽는 것이 바로 애굽의 내린 열 개의 재앙 중 마지막 최고의 재앙이었고, 그 재앙이 있고나서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죽은 처음 것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예표가 되었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 속에 처음 것들이 거룩하다는 전통이 생겨난 것입니다. 물론 이전에도 있었지만, 그것을 통해서 초태생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구속적인 의미를 가지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앙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나님의 처음 맏아들로서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이 사단의 권세로부터 풀어 탈출하여 빛의 나라, 진리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오게 하셨고, 두 번째는 바로 그 죽음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모든 인류를 위한 그리고 이 모든 세계를 위한 재창조의 생명을 맨 처음으로 받으시는 첫 번째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 그리스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 처음 나셨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물론 예수님 오시기 전에도 죽음을 보지 않았던 사람들 있었습니다. 에녹, 엘리야가 있었고, 확인 되지 않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승에 의하면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믿고, 모세도 죽었으나 부활하여 승천하였다고 믿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험하신 완전히 죽으셔서 장사되어진 상태에서 그 죽음을 능히 이기고 살아나심과 같은 그러한 종류의 부활은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셨는데, 이것은 재창조의 생명을 맨 처음 받으셔서 그래서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아담이 첫 번째 창조된 사람이었다면, 예수님은 처음으로 재창조된 인류의 시조이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자들 가운데 처음 생명을 부어주신 그 분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누구를 통해, 그리고 어디에 주어져서 그 생명으로 인류를 살리고 마지막에는 이 세계를 완성하실 지에 대한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은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에게 부어지고, 그리스도에게 부어주신 생명은 교회에 부어지고, 교회에 접붙여진 신자들은 그 생명을 함께 누리고, 그 생명은 그 생명의 힘으로써 우리들이 이 세상에 나아가서 예수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그 진리를 전하고 그리고 예수의 생명을 힘입어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삶을 아주 날카롭게 대조함으로써 그들을 그리스도의 나라로 돌아오게 하는 일에 사용하시고, 결국 그렇게 그리스도와 교회를 통해 부어진 생명이 흘러들어가서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모든 인류의 수가 가득차기까지 그 생명은 계속 확정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처음 나셨으니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재창조의 생명을 처음 받으신 것이고, 그렇게 재창조의 생명을 처음 받으신 그 분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생명과 사랑을 당신의 교회에 부어주실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아무리 형편이 없어도 교인들이 질이 나쁘고 목회자가 역량이 미달되고, 혹은 진리의 빛이 아주 희미해서 꺼져가는 것처럼 깜빡거릴지라도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 그 교회는 당신의 위대한 재창조의 생명을 이 모든 세계 속에 전달하는 하나님의 기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작다고 무시하거나, 교인들이 숫자가 얼마 안 된다고 깔보거나, 심지어는 목회자가 지식이 많지 않거나 좀 신령하다고 해서 교회를 아주 얕잡아보고, 깔보는 것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교회에 대한 신령한 생각에 무지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C.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
세 번째는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 머리가 되신 이유는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입니다. 그러면 만물의 으뜸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도 아까 이야기 한 것과 결국엔 같은 의미입니다. 맨 처음이 되고 처음 위치, 혹은 처음 지위를 가리키는 의미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창조하실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 창조의 중보자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해서 창조되는 것입니다. 창조되었을 뿐 아니라 만물들이 모두 다 영적인 연결이 끊어진 상태에서 모든 만물들을 원래 죄가 들어오기 전 창조시대처럼 모두 연결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들 위에 머리가 되시는데 그것이 바로 만물의 으뜸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만물의 으뜸이 되신다는 것은 인간의 구속이 모두 완성될 때 이 땅의 저주도 풀립니다. 이 땅은 잘못이 없습니다. 이 땅 위에 사는 인간들이 죄를 짓고 하나님께 대항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인간들 때문에 모든 세계를 만들고 창조하시고 복주셨는데, 모든 만물을 통치하고 다스려야 할 인간들이 하나님께 도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인간을 징벌하시고 이 인간과 당신과의 관계가 깨진 것을 이 피조세계에 반영되게 하셨는데 이것이 바로 그 땅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먼저 이 모든 자연의 세계를 회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죄가 들어와서 망가진 순서대로 다시 그것을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죄가 사단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사단의 머리를 먼저 깨시고 그리고 그것들을 인간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인간들을 구속하시고, 그 인간들을 다 구속하셔서 구속이 완성될 때 그 때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던 그 분이 이 모든 교회가 완전히 사람들의 구원을 완성하셨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마침내 이 모든 세계에 맺힌 저주를 풀고, 교회 뿐 아니라 모든 만물의 머리로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 인간 뿐 아니라 모든 만물의 머리이시던 그 상태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모든 만물들은 완전한 상태를 회복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들이 완전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첫째는 인간을 비롯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 하나하나를 이 죄와 그리고 자연계에 내린 저주 때문에 잃어버렸던 완전성을 다시 회복하도록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인간의 몸의 불멸입니다. 인간은 원래 처음 창조될 때 불멸의 몸을 입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창조된 인간들이 각기 육체와 영혼으로 만들어지기는 하였지만 시간과 공간 속에 있기는 하였지만, 쇠하지 않는 그러한 인간으로서 노쇠하지 않는 인간으로서 그러한 육체로서 하나님이 영원히 존재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할까 묻습니다. 우리들이 태어나서 이제까지 결국 죽음과 그 다음에 늙음, 병듦, 이러한 모든 것에 종속되면서 살아가는 인간 밖에는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화) 의학 중에 안티 에이징 의학이 있습니다. 그것은 노화방지 의학입니다. 거기에서 부단히 연구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머지않은 시일 내에 인간의 수명은 지금과 같은 조건의 자연 환경 가운데에서도 인간의 수명이 120세까지 연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을 합니다. 아마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옛날에 35세, 40세는 노인네였습니다. 35세면 지금 시집, 장가 안 가고 있는 청년들이 있어서 상처 받을지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정말 그랬습니다. 아주 늙는 것입니다. 땡볕에서 화장품 하나 안 바르고 사니까. 그런데 도시에서 지금 얼굴이 계속 관리하고 운동하고 사는 사람 보십시오. 출입국 사무소에서 가끔 승강이를 한다는 것입니다. 여권을 놓고. 이게 어디 당신이냐고. 아주머니가 짜증을 내면서 그러면 성형수술 하기 전이라고 한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연적으로 젊음을 연장할 수 있다면 하나님이 특별한 자연의 힘을 주시면 그것이 왜 불가능하겠습니까. 얼마든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죄로 말미암아 모두 다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얼굴 판 자체는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근심이 없고 기쁜 일이 생기면 사람들이 보고 다 젊어졌다고 하고 환해졌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얼굴이 수십 개의 근육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얼굴이 걱정이 있고 근심이 있으면 근육들 사이사이에 피로 물질들이 쌓이면서 쉽게 배출이 안 됩니다. 그러면서 피곤하면 쑤시듯이 얼굴도 그러한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쁜 사람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푹 쉬고 즐거운 마음이 충만하면 피로 물질이 점점 없어집니다. 근육이 얼굴이 확 풀어지면서 본 판은 못 바뀌겠지만, 사람이 선해 보이게 됩니다. 생긴 판 안에서 선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 사랑에 깊이 빠져서 정신 못 차리는 자매의 얼굴과 교회 와서 은혜 많이 받은 성도의 얼굴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그 비슷한 얼굴로 성도는 진리에 눈이 반짝반짝하고 눈물이 흐르지만,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얼굴은 반짝반짝 할지 모르지만 진리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한번 콩 커플이 씌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하나의 사물들을 원래 가지고 있었던 완전성을 회복시킴으로써 이 모든 세계를 완전한 상태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물 사이에 있는 관계들을 회복시키심으로써 아주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지난주에 한 주간 동안 유치부가 있는 앞의 뜰을 25평정도 되는 곳에 어거스틴 파크 공사를 해서 완공을 했습니다. 다다음주 쯤 뉴스에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없는 사이에 나무를 심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아닙니다. 그래서 ‘저것은 위치가 잘못되었다. 두 번째 나무, 세 번째 나무 위치를 바꾸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날에 올라갔는데 내가 어제 잘못 본 것 같았습니다. 너무 예쁜 것입니다. ‘내가 어제 왜 그랬지? 정말 예쁘다. 이것 옮기면 돈도 들고 힘들텐데 그냥 내버려 두라 그래야지.’하는데 집사님이 걸어오시면서 ‘목사님, 어제 말씀하셔서 목사님 말씀하신 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옮겨놔서 그렇게 예쁜 거였구나.’ 그러니까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아주 아름다울 수도, 예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올라와서 요새 싸이처럼 하고 올라오면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아마 설교 듣기 굉장히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한 차림은 공연장에나 어울리는 것이지, 성스러운 예배당에는 안 어울립니다. 그렇게 하나하나의 모든 만물들의 연결을 아름답게 만드심으로써 이 모든 세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시는데, 이 모든 것들이 완전하게 이루어진 상태의 정점에 면류관처럼 계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완전하고 아름다운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다툼과 미움도 없고 결국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과 같이 어린 아이들이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그리고 사자와 양떼들이 함께 어울리는 질서들의 관계들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D. 먼저 교회의 머리가 되심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생명을 주셔서 당신의 교회를 생명의 공동체로 만드시고 그 생명 안에서 이 자기의 뜻을 따라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사랑을 주셔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십니다. 결국 이와 같은 모든 생명과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은 끊임없이 교회를 깨끗케 하셔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고 모든 구원받을 인류가 이기심이 없는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거기에서 하나님이 가장 합당하게 사랑을 받으시도록 경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완전한 머리이시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를 완성해 가시기 위하여 부르신 교회는 완전한 몸이 아니라 완전하게 되어 가는 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가 되셔서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와 진리를 끊임없이 당신의 몸에 공급함으로, 당신의 몸을 이 세상 끝 날까지 완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의 머리이셨던 그 분은 교회의 껍질이 깨어지고 이 모든 세계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면서 그래서 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의 실질적인 머리가 되셔서 다시 이 모든 세계를 아주 아름다운 질서 안에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셔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잠시 멈추는 것 같았던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향해 다시 이 세계를 운행하게 하시고 그래서 무한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으로써 인간들이 하나님을 알고 영광을 돌리며 사랑하기를, 마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것처럼 사랑하게 하시고 자연의 모든 세계들은 인간들이 그러한 아름다운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사랑의 공동체처럼 일체의 모순이나 갈등 없이 아주 아름다운 자연의 질서 속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영광을 오늘날에는 볼 수 없는 것, 아주 탁월한 방법으로 눈부시게 드러내어 이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시고 그 사람들을 천상에서 하나님이 바라보시면서 기뻐하시는 그러한 세계를 만들어 가시면서 당신의 충만한 영광을 점점 더 찬란하게 비추셔서 그래서 인간들로 하여금 더 아름답고 행복한 상태가 되도록 만물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보다도 시간이 흐르면서 노쇠하거나 후패하거나 망가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 아름다운 세계로 발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드셔서 당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 이 세상 피조물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그리고 은혜인지를 찬란하게 드러내시는 이러한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드시려고 당신이 창조주이심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Ⅳ. 적용과 결론
그러니 우리가 이러한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하여 그 분에게 접붙여서 그 분의 지체로 살아가게 되었으니 우리의 운명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이 하나님의 세계를 향한 위대한 완성의 계획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어서 그래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아직까지도 죄와 죽음으로 고통하는 이 세상 속에 흘려보내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 안에서 우리들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쓰시려고 하나님이 당신의 머리이신 교회의 지체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교회와 함께 우리의 운명을 같이 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인 것입니다.
10. 모든 충만이신 그리스도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9)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의 배경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라는 것을 언급한 다음에 사도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거하게 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나오는 충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II. 충만이란 무엇인가
A. pleroma의 어의
희랍어 성경에는 이 충만이라고 하는 것을 'pleroma'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pleroma는 ‘플레로오’라는 희랍어 동사에서 온 명사입니다. 의미는 ‘성취하다, 완성하다, 이루다’ 혹은 ‘완전하게 되다’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 pleroma는 성취, 완성, 이러한 의미입니다. 대게 완성, 혹은 성취 혹은 극치라고도 번역이 됩니다. 이 pleroma라고 하는 이 희랍어 충만이라고 하는 단어는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B. 신학적 의미
심하게 이야기 하면 이 충만의 의미를 모르면 골로새서나 에베소서를 이해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이 충만이라고 하는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이것은 사도바울이 고유하게 사용한 신학용어였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잠깐 말씀 드린 후에 예수 안에 두신 충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이 충만의 신학적 의미는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pleroma 이것은 성취,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가.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라고 하는 신학적 의미를 가지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가. 언젠가 세계가 창조되었습니다. 창조와 함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시점 이전에는 이전이라고 하는 시간 자체가 없는 것입니다. 영원입니다. 거기에는 오직 하나님 한분 밖에 없습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아무것도 없는 영원 그 자체입니다. 그 영원 안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의 지성과 의지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후에 마지막 이 창조된 세계가 어떻게 당신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위대한 뜻들을 드러내어 마지막에 완성하시겠다고 하는 하나님 자신의 관념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 관념들은 잡다한 관념들의 개별적인 나열이 아니라 그 관념들은 서로 연결들을 이루면서 아주 아름다운 질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어려운 말로 하나님의 작정이라고 말합니다. 혹은 신적 작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하나님 자신의 작정이 당신의 관념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이 작정은 시간 세계 속에서 펼쳐질 인간의 운명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하나님 안에 있는 작정은 필연적으로 이 세계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고, 쉽게 말하면 이 세계가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청사진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관념과 작정들이 삼위일체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영원 전에 영원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런데 이 영원 속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작정이 창조와 함께 경륜으로 도입이 됩니다. 이 경륜이라는 말은 그 의미 자체가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생각을 실재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하나님이 펼쳐 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경륜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경륜은 신적 작정의 실행입니다. 그래서 신적인 작정은 영원 속에서 일어났지만 그것이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것인데, 그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것을 경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륜은 신적 작정의 시간 속에서의 실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영원한 경륜이라고도 말하는데 그것은 시간 세계 속에서 펼쳐진 경륜이 영원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 영원한 경륜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륜을 실행하는데 이 모든 경륜들이 실행될 그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그 계획이 완전히 실현되고 성취되는 그것을 pleroma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충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충만은 어떤 의미에서 완성인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창조된 세계를 쭉 펼치시면서 당신의 경륜을 나타내 보이시는데 우리들이 물리적으로만 생각하면 이 우주는 얼마나 드넓습니까. 상상할 수 없이 어마어마하게 드넓은 세계입니다. 항성만 일천억 개나 넘는 것이 은하계이고 그러한 은하계가 우주 안에 일천억 개 내지 이천억 개가 있고 하나의 은하는 짧게는 몇 십만 광년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의 별들의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별들이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을지 모르지만 우리 은하의 일천억 개의 별들이 있고 일천억 개의 항성들 가운데 태양이 하나 있고 태양 주위를 지구가 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천억 개가 넘는 별들이 태양이 있고 위성들은 그렇게 돕니다. 위성인 지구를 도는 별도 있는데 그것이 달입니다. 어마어마한 질서를 이루고 있는 별들이 이러한 질서를 유지하면서 초속 220km의 속도로 은하 전체가 이동하는 것입니다. 어떠한 학자는 650km로 이동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우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합니다. 그러니까 이 지구는 바다에 떠 있는 어마어마한 플랑크톤 중에서 단 하나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리적인 크기가 곧 의미의 크기는 아닙니다. 인간 하나, 생물체 하나 살지 않는 지구보다 태양은 백만 배나 큰 별인데 이 어마어마한 별들이 움직이고 폭발하는 이 모든 것들은 이 세상의 인간 하나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의 크기에 있어서 인간과 비교되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의미는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이 의미를 갖는 것이지 하나님과 상관없이 동떨어진 것일수록 의미는 적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떤 식으로든 접촉되는가에 따라서 이 의미는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별들과 하늘과 이 우주는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는 면에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어마어마한 밤하늘에서 지구보다 수백만 배 큰 별들에서 폭풍이 일어나고 폭발이 일어나서 불기둥이 수천 킬로를 치솟고 하는 그것이 인간 작은 어린아이 하나가 갖고 있는 인생의 의미보다 더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는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창조되었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놓고 보면 결국 여기에서 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계와 모든 우주의 운명에 관계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세계를 창조하신 이 위대한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 좀 더 확장하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적인 피조물인 천사들과 관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천상세계와 지상세계, 두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두 세계를 창조하시되 두 세계의 존재의 목적은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결국 하늘나라가,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의 목적이 동일한데 그 목적은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죄인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이 작은 지구에서 드러날 영광이 아무 영적인 피조물들이 없는 우주 공간과 어마어마한 물질의 세계 속에서 드러내는 그 영광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연의 세계가 아무리 위대하고 신비하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세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충만의 핵심은 단지 이 모든 세계의 물질의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을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종교와 도덕의 질서의 완성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충만의 두 범주를 생각하게 되는데 그것이 천상세계와 지상세계입니다. 물론 인간의 타락과 함께 천상세계에서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지상세계에서도 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지상세계에서는 인간이 사는 세계와 자연사물들이 있는 세계로 나눠집니다. 인간이 사는 세계는 결국 하나님이 교회와 세상의 구도를 가지고 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는 이 세상을 하나님이 원래 창조한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는데 이 계획의 완성을 충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결국 이 충만은 하나님의 교회와 세상 속에서 실현될 충만이고 나아가서 인간과 인간이 아닌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에 모든 운명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그 타락에 참여하지도 않은 이 모든 자연의 세계들이 인간과 더불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 앞에 구속이 되고 하나님이 이 구속을 통하여 창조의 모든 목적으로 우리를 완성시키실 그 때에 자연계 속에 내린 하나님의 저주도 함께 풀리게 되어서 이 자연은 인간과 함께 하나님 앞에 창조된 자신의 목적을 실현해 가는 피동적인 위치에 있는 피조물이 바로 이 자연의 세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 pleroma, 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 창조한 이 세계를 향해 가지고 계신 최종적인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으로서의 충만이고 이 계획은 천상세계와 지상세계, 지상세계 안에서 교회와 세상, 그리고 자연의 모든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완성으로서의 충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Ⅲ. 예수 안에 두신 충만
그런데 오늘 놀랍게도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충만을 예수 안에 두셨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하고 위대한 계획의 완성인 충만을 예수의 위격 안에, 예수의 위격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두었다라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은 이러한 식의 종교관을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종교는 없습니다. 불교는 부처 없이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 종교이고, 그 사람들이 부처를 본받는 것은 초급적 신앙이고 결국 자기 안에서 부처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마호메트 없는 마호메트 교도 가능합니다. 공자고 없는 공자교도 얼마든지 존속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희 없는 성리학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종교도 이렇게 한 사람의 인격 안에 종교의 생사를 걸리게끔 이룩된 종교는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인격 안에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 하나님의 위격 안에 종교의 모든 존립의 기반이 거기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러한 충만이 없다고 믿고 하나님을 직접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그것을 기독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 하나님이 이러한 충만을 두셨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갖습니까. 다시 말해서 모든 충만이 예수 안에 거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A. 선재하시는 그리스도
첫째는 선재하시는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2천 년 전에 마리아의 몸에서 남자와의 성적 관계없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사람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카네이션, 혹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성육신 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는 어디에 계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심으로써 인성을 부여 받으셨고 이 인성은 부활하고 승천하신 후에도 영원히 유지하시는 인성이십니다. 그러면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기 전에도 예수 그리스도는 계셨습니다. 다만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자로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자를 가리켜서 우리들은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그 그리스도는 성육신하시기 전에는 다른 상태로 계셨는데 인성 없이 신성으로만 계셨던 하나님의 제 두 번째 위격이십니다. 물론 인격은 성자로서의 인격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 인격은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개별 인간을 만드는 독립적인 의미에서의 인격이 아니라 삼위일체 안에 있는 인격은 성부와 성자, 성령이 교통하기 위한 교통적인 인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삼위일체 안에서의 삼위에 관한 인격을 이야기 할 때에는 혹은 위격을 이야기 할 때에는 나와 다른 사람을 구별시켜 주는 의미로서의 위격, 인격,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독립하는 그래서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 그러한 인격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한 하나님이면서도 서로가 교통할 수 있게 하는 그러한 의미에서의 위격 혹은 인격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를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라 부른다면 그 이전에 신성으로만 계셨던 그리스도를 선재하시는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이 그리스도는 바로 삼위일체 안에서 하나님의 지성이며 하나님의 로고스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 있는 모든 이 세계를 향한 신적인 작정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그 신적인 작정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 안에 있는 신적 작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 당신 마음 안에 있는 말씀을 통하여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실 때 그리스도 예수를 중보로 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중보로 하여 인간을 구속하실 뿐 아니라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마지막에 완성하시고, 완성된 피조물들은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신적 작정들을 실현해 나가는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충만을 두셨다고 하는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선재하시는 그리스도일 때조차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 이 세계 속에서 실현될 모든 경륜에 대한 작정을 그 위격 안에 두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창조된 이 모든 세계의 창조, 구속, 완성, 존속, 이 모든 것들을 좌우하는 통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창조, 구속, 완성, 완성 이후의 모든 피조세계의 운명까지도 그렇게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설명하고 나면 이 모든 세계에서의 충만이 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였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B. 창조와 구속의 중보자가 되심
두 번째는 창조와 구속의 중보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선재하시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위대한 신적 작정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면 이 신적 작정을 따라서 하나님이 창조와 구속의 중보자가 되게 하십니다. 창조는 시간과 함께 충만이 시작이 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좋은 예화가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10년 전에 이 교회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이 기본적인 설계는 제가 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많이 하면서 설계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집을 짓기 전에 정확하게 말하면 수리하기 전에 이미 이러한 모양으로 해야 하겠다고 하는 것이 설계자의 머릿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것입니다. 완전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있어도 그게 진짜 실제로 이루어지면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 다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고 또 진행되다가 생각이 바뀌거나 구체화되면서 모양이 바뀌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 안에 완전한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그림이 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설계자의 마음속에 비교적 절대완전은 아니더라도 비교적 완성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충만입니다. 그것이 충만입니다. 인간은 이 속에 있는 계획을 여러 가지 제약 요건으로 인해 모두 실현을 못 합니다. 혹은 실현이 되어도 이 속에 있는 것과 사뭇 다르게 실현이 됩니다. 10년 전에 인생에 대한 전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대로 사신 분 있으시면 손들어 보십시오. 원하는 기대에 못 미치거나 훨씬 미달될 때가 많습니다. 머릿속에는 완전한 생각이 있어도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지 방해받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니십니다. 충만입니다. 그 설계가. 완전히 충만한 것입니다. 그것들이 머릿속에 있는 것들이 구체적으로 실현됩니다. 그래서 땅을 다듬고 건물을 다 해체시킬 때부터 이 설계자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겠다고 하는 그림이 있는 것입니다. 그 머릿속에 있는 것을 따라서 하나씩 하나씩 실행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쉽게 이야기 하면 눈금으로 그려진 그림책이 있고 아이들은 크레용이나 연필로 줄을 따라 그려 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집이 완성되고 동물이 그려지는 것처럼 그 마음에 있는 것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조도 하나님이 이 시간과 함께 이 모든 창조된 것도 당신 마음에 있는 충만으로부터 흘러 나와서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속은 인간이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이 몰랐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그러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 인간을 타락하게 내버려 두셨는가. 여기에서 다룰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간단하게 대답을 하고 넘어가자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작정하고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사람에 대한 작정은 놀랍게도 인간의 의지와 배치되게끔 하시는 작정이 아닙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결국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 없다고 하면 말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뜻을 가지고 계시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데 하나님이 뜻을 안 가지고 계시다면 당신의 뜻이 없다고 하시다는 것이니까 사실 어떻게 인간이 살든지 하나님 앞에 명령 위반이라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안 했다라고 하는 사실 자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다면 인간이 이룰 것이 아닌가. 맞습니다. 인간을 통해 이루십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짓도록 작정하신 것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죄를 짓는 것도 하나님의 작정 속에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반항할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작정하셨지만 인간의 의지의 행사를 거슬려서 작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유롭게 자신의 의지를 따라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 자유의 자유스러움은 하나님의 작정의 필연성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사실은 그 설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실은 합리적이라는 것입니다. 안셀무스가 말한 것처럼. 불합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지점에서 주님을 믿어야 할 필요를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전혀 설명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것을 어느 책에서 읽거나 누구에게 들은 것은 아니고 나의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발견된 중요한 진리인데 이런 것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꿈을 모두 믿지는 않지만 그러나 이제 꿈을 꾸면 아,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반가운 사람을 만날 꿈이구나라고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만날까. 정말 그러한 일이 일어날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아침에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침에 밥 먹고 출근하고 일을 하고 등등 삽니다. 거의 오늘은 누군가 반가운 사람을 만날 것이라고 하는 생각도 별로 없이 그냥 나는 나의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저녁 때 버스 안에서 정말 오랫동안 헤어졌던 친구를 만나게 됩니다. 그제야 어젯밤 꿈이 생각나게 됩니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일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알고 그 사람을 만나려고 애쓴 것도 아닌데 필연인 것처럼 놀랍게도 그 일이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이 때 보면 우리는 어떠한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는 것이 정해졌어도 누구에게 강요되거나 떠밀렸다라고 하는 느낌이 추어에도 없이 하루를 살았는데도 그 뜻이 이루어진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와 당신의 경륜이 충돌하지 않게끔 그렇게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누구도 자신이 죄를 짓거나 혹은 악으로 말미암아 나쁜 상태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작정 때문이라고 핑계할 수 없게끔, 도덕적인 책임을 지게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할 것을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그것을 하나님이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적극적으로 작정했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범죄의 말하자면 주원인이 되니까, 하나님이 인간이 그렇게 타락하는 것을 허용하셨다고 우리는 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인간이 그렇게 타락할 것을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은 구원을 위한 계획도 영원 전에 이미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그 구속의 작정이 인간이 타락하기 전까지는 안 나타났지만 타락하면서부터 구속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시간 속에서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것은 당신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이 세계를 통하여 인간에게 드러내고자 세계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창조의 세계가 드러내고 인간이 그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원인입니다. 그러니까 그런데 놀라운 일은 결국 인간이 타락했을 때에는 하나님께 도전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더럽혀서 하나님의 큰 뜻을 훼손시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온 땅에 죄와 죽음이 가득히 들어오고 영생불멸하기로 한 인간은 필멸할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되었는데도 놀랍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뜻은 인간이 타락했을 때보다도 더욱 찬란하게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하는 영광이 타락하지 않았을 경우보다 더욱 찬란하게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인간의 타락과 함께 시작된 하나님의 영광은 마치 그 이전이 환한 대낮에 타올랐던 불꽃이었다면 인간이 타락한 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은 캄캄한 어두운 하늘에 타오르는 불꽃과 같이 아주 뚜렷하게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의 죄와 악은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었으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찬란하게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을 향한 간절하고 뜨거운 사랑, 그리고 인간이 죄를 깨닫고 자기를 신뢰하지 않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신앙, 그리고 마음이 녹는 것 같이 그리스도만을 붙들려고 하는 신앙의 절절함, 이러한 것들은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다면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란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경륜이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인간의 타락 때문에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은 더욱 찬란한 빛을 내면서 이 세상에 불꽃처럼 타오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속성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가 되는 인간세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더욱 찬란한 불꽃으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누군가가 사랑을 받을 때 그것이 그렇기 기쁘고 눈물이 나도록 감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은 나를 미워하니까 그 사랑이 그렇게 감격이 되는 것입니다. 일평생 좋은 부모님 만나서 갓난아기 때부터 특급으로 대우를 해줘서 뭐든지 해달라고 하면 모든 것을 다 해주는 그러한 아이들은 부모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옛 말에 어리광 받아줘서 기른 집, 옛날 어른 분들이 으으 하면서 기른 집안 애들 중에 효자가 안 나오고 패고 기른 아이들 중에는 효자가 나온다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고아로 살다가 입양 되어서 양부모의 지극한 사랑을 받아온 아이들은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상처를 받고 괴롭게 살던 사람들은 그 속에서 언뜻 언뜻 끊을 수 없이 부어지는 엄마 아빠의 사랑을 통해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부족할 것이 없는 하나도 없는 집안의 애들은 호로 자식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려움 속에서도 부모가 꿋꿋하게 인간다움의 삶을 보이면서 아이들에게 헌신하고 사랑한 집안에서는 비교적 효자가 많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를 존경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똑같은 일이 바로 구속의 과정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거니와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느니라. 이것은 당신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당신 자신이 자, 이런 생각을 해 보십시오. 옛날에 고등학교 다닐 때 읽었던 어느 미국 소설이었는데 잊어버렸습니다. 굉장히 감격 깊게 읽었습니다. 어떤 여자가 있었는데 미인이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언제나 독차지 하였습니다. 남편이 무역업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먼 나라에서 예쁜 반지를 구해서 아내의 손에 끼워 줍니다. 아내가 좋아합니다. 선물을 늘 해 주니까 아내라 너무 행복해 하고 좋아합니다. 어느 날 보니까 질리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것 말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선물해서 당신의 사랑을 보여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보이지 남편에게만 보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남편이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제일 소중한 것을 당신에게 선물할게.’ 그리고는 어느 날 아내를 불렀습니다. ‘당신에게 줄 가장 소중한 선물이 항구에 도착했어.’ 아내가 너무 좋아서 예쁜 옷을 입고 막 뛰어갔습니다. 뭐가 왔는가? 항구 뚝 위에서 보는 것입니다. ‘여보, 내가 당신에게 선물을 하려고.’ 이 예화는 개척 이후로 처음 하는 예화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게 아니라 가장 소중한 것을 주고 싶었는데 무엇일까? 아주 오랜 시간 생각했는데,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밀이라고 생각해.’ 밀을 한 배를 싫고 와서 아내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아내가 너무 기뻤겠습니까? 화가 났겠습니까? 마치 생일에 쌀 사다 준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저 놈의 밀, 다 버리라고.’ 펄펄 뛰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일꾼들이 밀 부대를 찢어서 다 뿌리는 것입니다. 넓은 땅에다가 다 뿌려 버렸습니다. 일은 결국 끝났습니다. 그 해에 남편이 쫄딱 망해서 알거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나 근심을 하면서 우연히 그 배가 도달했던 뚝, 그 위에 펼쳐진 넓은 땅을 보니까 그것이 일 년 동안 자라서 길처럼 자라서 황금물결을 이룬 밀밭이 된 것입니다. 물론 자기 소유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여자가 깊이 각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자 보십시오. 한 알의 밀은 땅에 떨어지면 자랍니다. 그러면 이 밀은 이후에 이루어질 끝이 보이지 않는 어마어마하게 넓은 황금물결이 출렁거리는 밀밭의 원인일 수 있습니다. 쌀을 심으면 한 알이 이천 몇 백 알이 된다고 합니다. 옛날에 문익점 같은 사람이 목화씨 몇 개를 가져와서 그러한 식으로 못 가지고 들어오게 하니까 그러한 식으로 씨를 퍼뜨리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한 알의 밀알이 한 알로 보이지만 미래에 이루어질 그것을 종자씨 삼아서 계속 퍼뜨렸을 때 황금물결을 출렁거리며 지평선까지 가득 펼쳐진 어마어마한 밀밭을 충만이라고 한다면 그 모든 충만이 이 밀알 속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충만이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충만이 되시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한 알의 밀알로서 죽으심으로 이제 모든 세계를 움켜잡고 있었던 사단의 세력들이 괴멸이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구속이 완성을 향해서 힘차게 전개되어 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고 하나님과의 완전히 끊어졌던 관계를 회복하고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 길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보좌에 이르는 새롭고 산 길은 생명의 길이고 이 길을 통해서 하나님과 대면한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신 영적인 사랑이며 영적인 생명입니다.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이제 이 인간은 죄가 가져왔던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극복하고 거기에서부터 부어지는 이 신적인 생명과 은혜를 힘입어서 하나님이 자기를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구원과 함께 우리에게 덜컥 하고 주신 것이 아니라 쉽게 말하면 선풍기를 사가지고 와서 전기를 탁 하고 꽂으면 전기가 흘러와 선풍기가 계속해서 돌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모든 창조목적을 따라 살아가게 하는 모든 힘의 근원이 되어주셔서 이것을 영원히 끊지 않고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셔서 그래서 이것들을 실현해 가시는 것입니다. 이 실현의 방식이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복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공로적 죽음입니다. 공로적인 수단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것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이렇게 믿게 만드시는 분은 성령님이시고, 이 믿음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복음을 통해 보게 하시니까 이 사중적인 도구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 위에 당신의 구원을 성취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이루시면서 구원이 실현되어 가는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이제 교회의 수립이고, 교회가 힘차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구원의 사역을 펼쳐 나갈 때 그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계획하신 교회에 대한 위대한 계획들을 성취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모두 성취해 나갈 때에 이 세상에 종말이 오고 이 세계는 완성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와 구속의 중보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 분을 통해서 구약의 모든 역사가 달려오고 신약의 역사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확 퍼져 나가면서 구원의 놀라운 역사의 연결을 그리스도 예수의 위격 안에서 성취해 가는 것입니다.
C. 완성의 중보자가 되심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와 구속에 있어서 중보자가 되실 뿐 아니라 완성에서도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이 완성은 두 국면을 갖습니다. 그것은 구속의 완성과 창조의 계승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구속을 완성하실 때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그래서 심판받는 자들은 영원한 불에 떨어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이제 천국에 이르게 될 때 그 때 이제 두 세계는 하나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천상세계와 지상세계의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이렇게 해서 구속이 완성이 되면 그러면 모든 것들은 끝났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의 아무것도 없다. 거기가 바로 완성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흔히 창조, 타락, 구속, 완성이라고 할 때 완성은 완성 이후에서 본 것이 아니라 완성 이편에서 죄와 타락이 들어온 불완전한 세상에서 미래를 향해서 본 것이 완성입니다. 그러니까 완성은 정확하게 말하면 창조의 완성이 아니라 구속의 완성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구속의 완성까지는 이게 삽입되어 간 것입니다. 원래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습니까. 창조하신 세계에서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에덴동산에서 벌거벗고 과일이나 따먹고 놀았을 것이다. 일하기 싫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끊임없이 인간은 문명을 만들어 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은 물질과 모든 것들의 문명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쪽으로 가고 있지만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인간의 물질과 문명 그 자체가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드러내는 아주 훌륭한 통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정신뿐만 아니라 물질의 세계도 물질의 발전도 종교뿐만 아니라 이성의 세계도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는 위대한 통로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완성이라고 할 때 세계의 완성이 아니라 타락한 세계가 완성된 것입니다. 완성된 세계는 창조의 그 상태로 다시 완성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기서부터 이제 영원무궁토록 발전이 있는 것입니다. 그 발전이 어떠한 방식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지만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이렇게 타락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드러냈던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찬란한 영광을 하나님이 그 완성 이후의 세계에서 드러나게 하시고 그것이 바로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원인이 될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사실 그 때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은 인류가 여전히 자신들이 타락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타락하지 않고 계속 되었던 인간들에 비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기억은 폭발적으로 증대되는 그러한 지적인 행복의 상태일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이 세계가 완성된 다음에는 우리들이 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우리의 죄 때문에 회개하고 용서를 빌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은혜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끝날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덜 의존하지 않을 것이냐 우리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후에도 그리스도는 영원한 중보자가 되어 주셔서 완성된 세계 이후에도 인간은 결국 죄는 없어졌지만 그러나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인간이 타락하였던 기억은 갖은 채로 그래서 당시에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과 평화를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인간이 그러했을 때보다 높은 수준에서 찬송하고 주님을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죄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하고 영광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하지만 그 때에는 죄가 없는 상태에서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 창조와 구속 속에 드러난 영광뿐만 아니라 완성 속에서 드러난 위대한 영광, 완성된 이후에는 인간의 죄의 방해가 없기 때문에 더욱더 찬란하게 드러날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가를 알며 그리스도 예수를 전심으로 의지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거기에서도 이 모든 하나님의 신적 작정의 실현의 과정에서 펼쳐졌던 그리스도 예수의 중보자 되심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때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그렇게 자기들을 구속하신 위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어떻게 창조가 이루어졌고 창조된 세계가 타락했을 때 어떻게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고 구원받은 인간들이 완성된 이후에 어떻게 그 기억을 가지고 우리 하나님을 높이게 되었는지에 대한 모든 이유와 근거를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까지는 한 알의 밀알이었으나 죽으신 이후 이 밀알이 아주 많은 열매들을 맺으면서 한 톨 밖에 안 되던 밀알이 이 지평선 끝까지 가득 출렁거리는 황금물결을 이루는 것을 지켜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출렁거리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궁무진한 밀의 평야를 믿음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위격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것의 pleroma, 충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IV. 적용과 결론
결국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은 비유를 하자면 이렇게 말려진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모두 접혀서 이렇게 접힌 이것이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위격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적인 작정들이 펼쳐지면서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 경륜이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삼위일체 하나님, 그 중에서 특별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의 아름다움이 눈부시도록 찬란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결국 이렇게 놓고 보면 인간이 지혜로워진다고 하는 것은 이렇게 잠시 있다 사라질 세계가 전부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이 세계가 또한 앞으로 올 세계와 중첩되어 있고 그 사이에 교회가 있고 이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경륜들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예수님이 운명을 함께 하시면서 당신의 경륜을 펼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위대한 경륜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위격 안에 두셨고 위격 안에 두신 하나님의 영원하고 위대한 경륜을 교회의 실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교회와 함께 펼쳐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이 모든 경륜을 이해하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충만을 그 분안에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2천 년 전에 단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려고 온 하나의 제물이 아니라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을 입은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을 능가하는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하여 안 계신 곳이 없으시며 모든 곳에 계시면서 당신의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당신의 위격 안에서 성취해 가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피해서는 우리들이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결국 온 땅과 모든 만물들이 그 분의 위격 안에 있는 경륜에 달렸고 나는 그러한 하나님의 물 흐르는 것 같은 우주적인 위대한 경륜 속에 있는 한 존재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위대한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이루는 하찮은 부속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그 위대한 하나님의 경륜에 지극히 작은 일부이면서도 그 일부인 나는 독자적으로 그리스도 예수와 관계를 가지고 그리고 하나님과 생명적인 연결 속에서 그 분께로부터 모든 삶의 지혜와 그리고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으면서 신적인 교통 속에서 사는 위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함께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충만이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의 역사를 통해서 전개되고 완성된 이후에도 그리스도의 위격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이 모든 충만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실현될 것을 바라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 일어났고 이후에 일어나게 될 완성된 후에도 전개될 모든 초자연적인 상태까지도 포함한 모든 상태는 그리스도의 경륜의 실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직과 중보자직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신적인 아름다움은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수 없이 많은 세월이 흐르고 흐른 후에라도 불멸하는 영혼으로써 수없이 많은 시간이 흘러간 후에라도 언제나 우리는 다함이 없이 펼쳐지는 하나님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그리스도 예수의 위격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안에 우리를 향해 펼쳐질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들이 하나님의 찬란한 아름다움을 드러낸다면 결국 그 모든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그리스도 예수의 탁월하심과 함께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도 끝이 없고 그리스도 예수의 아름다움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원무궁토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영광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실현되는 것을 바라보는 기쁨이 완성 이후에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기쁨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충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셨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 피조세계와 예수 그리스도를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 때는 죄인이었던 나, 지금은 예수 그리스 도안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은 나,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당신의 위대한 경륜을 드러내는 동역자로 쓰시는 내 안에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구속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더 많이 의지하게 되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사랑하게 되는 그것이 바로 인간의 도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길입니다. 그래서 영생은 곧 당신과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단지 그 분이 나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오신 구속의 제물이고 그것으로서 그 분은 나를 위해 하신 분은 끝났고 나는 과거에 예수께서 이루신 그 용서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표하면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의존하도록 배우게 하시는 한 중요한 부분이지, 이 구속을 통해서 뿐 아니라 창조와 완성, 완성 이후에 이루어질 모든 그리스도를 향한 의존 안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께 대한 겸비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영원토록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고 그 분을 앙망하면서 살 때 우리는 그 분께로부터 모든 좋은 것을 금생에서나 내세에서나 받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 보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사람들은 눈 어두워 그저 한 인간의 키, 한 인간의 몸체, 한 인간의 사람 됨 정도로 보지만 그리스도 안에 바로 우리와 똑같은 몸을 입으신 그 예수 안에 하나님은 이 세계의 모든 충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2천 년 전에 사람의 몸으로 비천하게 오신 그 예수 안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위대한 완성, 완성 이후에 펼쳐지게 될 영원불멸의 이 세계의 영광을 바로 그 분의 작은 인격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완성될 세계도 아니고 끊임없이 죄와 슬픔이 가득한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이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일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예수 의지하는 크기에 달려 있습니다. 한 성도가 얼마나 아름다운 성도인가 하는 것은 그가 마음 깊은 곳에서 얼마나 예수를 의존하는지, 얼마나 예수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라고 고백하며 그 분을 전심을 의존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영광과 은혜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의지하는 이 복을 누리게 되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빕니다.
11. 충만의 비밀, 십자가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20)
녹취자 : 김세나
I. 본문 해설
지난 시간에 1장 19절을 해설하면서 충만, 희랍어로 플레로마라고 하는 것은 성취, 완성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충만,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다라고 하는 의미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인류 사회를 향하여 이루실 바 성취를 예수 안에 감추셨다라고 하는 뜻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그 영원한 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취될 것임을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또한 타락한 인간 때문에 구속하셔서 그래서 인간과 자연의 모든 세계를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셨던 의도대로 돌려놓으실 것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이렇게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이루실 구속의 위대한 계획을 위한 시련의 도구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20절에서는 사도가 갑자기 이제 십자가로 시선을 돌립니다.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II. 충만과 불화의 해결
A. 창조 목적의 좌절
여기에서 우리는 충만과 불화의 해결을 만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온전히 성취되기 위해서는 불화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화는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평화의 깨뜨려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좌절된 것이 아니냐고 묻습니다. 물론 가깝게 보기에는 이 세계는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셨던 계획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고, 그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좌절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오늘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결코 나쁜 일을 하실 수 없습니다. 선한 것들로부터 나온 것은 모두 선한 것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선하신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으니 창조된 이 모든 세계도 또한 선한 세계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 사이에 선의 연속성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탁월한 지혜와 동시에 능력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혜가 모자라면 의도와는 다르게 나쁜 결과가 올 수 있고, 지혜는 뛰어나도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 능력이 모자라면 본인이 알고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결말이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무한히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이 세계를 완전한 지혜 속에서 가장 좋은 상태로 완전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조된 이 모든 세계는 완전히 선한 상태에 있었고, 창조된 모든 세계는 서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었고, 그리고 이 조화와 균형, 그리고 일체의 아름다운 질서의 어울림이 인간에게서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닮은 온전한 사랑 속에서 서로가 사회를 이루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때에 이 창조세계의 선함은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를 알고 서로를 사랑하기를 마치 하나님이 삼위일체 안에서 이 삼위가 서로를 알고 사랑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알고 사랑하고, 또 창조된 이 모든 세계는 아름다운 질서와 조화, 그리고 엄정한 균형 속에서 서로 완벽한 쉼을 누리고 있는 조화로운 상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한 결과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고, 사람과의 관계에 그 관계가 투영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만물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인간은 평화를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함으로 세계 안에 하나님의 화평이 이루어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일들이 하늘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과 언약을 파괴하고 고의로 범죄하게 됩니다. 이러면서 이 질서들은 깨뜨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가 파괴되자 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은 깨져버렸습니다. 깨져버리고 나니까 비로소 이 사람들과의 사람들 속에 있었던 사랑의 질서도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내려오는 생명과 사랑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모든 세계도 이제 인간과 화목이 깨졌기 때문에 인간은 이 자연을 두려워하고, 이 자연과 치열하게 투쟁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이 자연의 세계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우리가 잠들고 있는 동안에도 바다 밑에서 개울 강바닥 아래에서는 작은 생물들 조차도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이 무엇인가를 잡아먹어야 하고, 잡아먹히는 것들은 잡아먹으려 하는 것들로부터 목숨을 건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그 작은 생물의 세계로부터 커다란 짐승들의 세계에까지 그렇게 포식자와 포획자, 포획당하는 자 사이에 이 사슬과 같은 먹이의 고리가 존재함으로써 이러한 균형과 조화, 평화 같은 것들은 그저 눈에 들어오는 외관일 뿐이고, 그 속에는 치열한 생존경쟁들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결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겨우 그러한 세상을 만들려고 세계를 창조하셨겠습니까. 그래서 서로 죄를 짓고 살인하고 끔찍한 폭력들이 난무하는 이러한 세계를 바라보면서 과연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좌절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B. 창조 목적의 눈부신 발편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였지만 세계에 하나님이 세우신 많은 질서들이 파괴되었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인간 누구도 심지어는 천사들도 예상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또 다른 방법으로 창조의 목적을 지속해 나가셨던 것입니다. 이 창조의 목적이 눈부시게 발현이 되는데 이것은 오히려 인간이 타락하고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토록 눈부시게 발현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게 발현되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놀라운 지혜로 이 세계를 다루셨는데 그게 바로 인간의 구속이라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구속은 아까 말씀드린 창조목적을 좌절시킨,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자연과 자연 속에 있는 불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요약을 하자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창조목적이 좌절되는 것 같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은 그 좌절된 것 같은 상황을 사용하셔서 원래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의도하셨던 계획을 더 눈부시게 진행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창조하실 때에 이 세계에 대한 창조의 목적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통하여 당신의 지성 안에 있는 이 세계의 구성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직접 만드심으로 당신 자신이 보시는 것이었고, 그리고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이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뛰어나신 분이시며 우리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그 분 앞에 경배하는 자들이 되는 것을 보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 분을 사랑하는 것을 통해 가장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의 고백을 가진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들을 통해서 또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의 경제활동, 그리고 생산활동, 학문활동, 이 모든 활동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도록 우리들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만약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은 인간을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아무리 인류 사회가 커져도 서로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을 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아이를 낳았더라도 하와가 남편을 사랑하는 것과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 갈등을 느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3촌, 4촌, 5촌, 6촌, 8촌, 10촌, 12촌 하는 이러한 식의 친척의 학렬들과는 상관없이 그 사랑이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 있을 때에 누렸던 것과 같은 동일한 사랑을 온 인류가 동일하게 누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문명은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학문도 이루어질 것이었으니 이 지식의 발전을 통하여 눈부신 문명의 발전도 구가되었을 것이고, 그 세계를 통하여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미친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물질주의 중심으로 달음박질 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함께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더듬어 유추하게 하는 아름다운 사회들을 건설해 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것들은 좌절된 것 같지만 사실은 더 놀라운 방법으로 당신 자신을 이 세계에 계시하고자 하는 그래서 인간들과 관계를 맺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는 더 놀랍게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자, 인간들이 처음부터 하나님의 놀라운 형상으로 창조되어서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미움이나 그리고 갈등, 이기심 같은 것들이 없습니다. 언제나 있는 사랑입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해서 인간이 완벽한 존재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싫증은 존재했고, 타락의 위험성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죄가 없기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면서 살아가지만 아마 이것이 이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깨닫는 것처럼 깊이 깨닫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미움과 그리고 시기, 사랑과 정반대되는 것들을 처절하게 경험했기 때문에 사랑을 발견했을 때 그것은 어두움을 뚫고 지나가는 한줄기 찬란한 불꽃처럼 느껴진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하고 죄로 말미암아 창조의 목적이 훼손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이 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의도하셨던 목적을 그대로 구현하게 되는데 오히려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이 영광을 드러내는데 크게 이바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반문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죄 지은 인간, 타락한 인간을 통해 더 큰 영광을 받으셨으니 그들을 상주셔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 영광돌릴 것을 의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을 대적함으로써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가 오히려 인간이 나쁘게 만든 것을 더 좋게 사용하셔서 당신의 목적을 이루어 가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해서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오히려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구속의 역사를 통해 눈부시게 발현이 됩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이 불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구속계획을 전개하셨고, 그 구속계획의 핵심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관계가 파괴된 순서대로 회복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제일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었고, 그 다음 인간과의 관계, 그 다음에 자연과의 관계, 자연과 자연사이의 관계가 파괴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제일먼저 하나님께 죄를 짓고 불신앙으로 살던 사람들을 돌이켜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평화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 힘으로 그 은혜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셔서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하며 사랑하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세 번째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고 이 세계를 온전하고 선량한 관리자로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모든 계획에 적합하도록 돌보고 가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구속이 완성되는 그 날에 충만이 모두 성취되는 그 날에는 결국 이 모든 피조세계에 있는 자연 사물들간의 갈등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작은 물고기가 큰 물고기에 잡혀 먹는 것, 그 짐승이 서로를 잡아먹고 죽이는 끔찍한 살육이 생존의 수단이 되는 이 갈등들이 종식됨으로써 하나님이 원래 세계를 창조하셨던 이 모든 화목이 완성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구속의 전개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각양 아름다운 속성들이 눈부시도록 이 세상에 나타나도록 하는데 이는 바로 하나님이 인간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모든 창조목적의 눈부실 발현의 결정적 자리에 바로 십자가가 있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심으로써 이 십자가가 하나의 스위치가 되어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화목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통해서 교회가 형성되고 결국 교회는 확장되어서 마지막에 온 인류 중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들을 구원함으로써 그들만이 남아서 이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완전한 영적인 나라를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Ⅲ. 십자가와 충만의 비밀
A. 화목을 기뻐하시는 하나님
그러한 점에서 이 십자가는 충만의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오늘 말합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아라고 말씀하십니다. 화목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소원은 화목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어짐으로 말미암아 이 세계가 이토록 비참해졌으니 비록 비참해진 이 세계 때문에 원래 창조의 목적은 계속 눈부시고 발현되고 있지만, 여전히 고통받는 인간들이 이 세계에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안 사람들, 창조의 목적을 안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어두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로 인해 박해를 받고, 또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찬란한 이 구원의 계시가 빛으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끝까지 붙들고 살아가지 아니하는 불순종으로 인간들은 고통합니다. 이러한 고통들을 종식시키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당신과의 화목을 기뻐하십니다. 모든 인류들이 당신 자신을 알고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교회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온전한 하나님의 뜻이 화목입니다. 하나님과 화목될 뿐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화목하고, 이 화목이 지상에서뿐만 아니라 천상에서도 모두 이루어지고, 천상과 지상이 모두 화해해서 하나의 화목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이상이고, 그 첫 번째 종자씨로서 하나님이 세워주신 공동체가 교회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는 사랑과 용서를 통한 화목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그토록 서로 사랑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도들이 이렇게 공동체로 모이는 것은 무슨 일을 하기 위한 과정이 아닙니다. 교회를 향한 지상명령이 선교라고 말하는데 그 말도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닙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의 교제가 어떤 것을 목적으로 하는 교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칭찬 받는 것, 선교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사실은 공동체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사랑의 공동체가 된 결과물 들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성도들이 끊임없이 와 구원을 받으면 그 사람들은 누가 데려온 것 같습니까. 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 가장 열심 있는 전도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 그 자체는 물 같아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어디론가 흐르려고 합니다. 이 사랑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흘러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이렇게 성도들이 모여서 함께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교회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서 그냥 살아가는 것이냐.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우리도 살아갑니다. 산 사람 치고 살아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들이 모두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냥 죽지 않고 목숨이 붙어있는 그 자체가 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대교회를 향해서 예수님이 너희는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니라. 너희의 죽게 된 것을 일깨워 라고 말씀하십니다. 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함께 살아가는데 이 불완전한 사람들이 끊임없이 자기를 포기하고 버림으로 하나가 되어서 보다 높은 사랑의 공동체로 계속 충만해져 가는 것입니다. 이 자체를 위해서 교회는 존재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높임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화목인데 이 화목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사랑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되는 것을 바로 화목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화목은 하나님과의 불화만큼 감출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 평화 안에서 살면 모든 사람을 향해 너그럽고 용서하고 베풀고 나누어주고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그들의 행복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기꺼운 마음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화목을 기뻐하셨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B. 십자가로 충만을 이루심
이러한 화목을 통해서 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충만이 이루어지는데 십자가로 그 충만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피가 무엇입니까. 성경은 이 피를 곧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짐승을 피 채 먹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피는 생명이라. 피를 흘렸다라고 하는 것은 생명을 흘렸다는 의미이고, 이것은 죽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다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생명을 흘려 버리셨고, 그래서 죽음에 복속되셨다라는 의미입니다. 자, 그러면 이 그리스도의 피가 왜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이 장엄한 우주적인 회복을 위한 결정적인 단서로 우리에게 떠 오르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십자가가 이 모든 충만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이 충만은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구속의 성취, 혹은 완성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이 구속의 완성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것을 너무 중요히 생각하신 나머지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데 무엇을 믿어야지 구원하시느냐. 아무거나 믿는다고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도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서 당신은 죽으시고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고, 그것을 끝까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지옥의 형벌에 처하실 정도로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충만한 성취를 위해 결정적인 열쇠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이렇게 하나님과 세계 사이에 완전한 단절, 즉 인간의 죄와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단절 밖에 없었던 이 세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여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막혔던 하늘이 뚫리고 위로부터 진리의 빛과 하나님의 능력의 불이 내려오도록 그래서 천상의 사랑과 생명이 충만하게 부워지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 충만한 생명과 은혜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부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신부인 교회에게 부어 주시고, 그리고 교회는 충만한 생명과 사랑을 자기에게 접붙힌바 된 모든 신자들이 핏줄처럼 그 생명과 사랑에 참여하게끔 만들어서 그들을 이 타락한 세계를 향한 구속의 계획을 완성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십자가는 우주적인 구속, 교회의 생명을 통한 구속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의 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여 그리스도의 교회의 몸을 만들어 가시고 하나님이 이만한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영원한 계획이 있는데 그 계획이 성취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으로 이 모든 죄와 불순종의 세계를 멸하고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를 갈라내어서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깨끗하고 순결한 사람들이 당신께 접붙혀진 백성들이 다스리고 통치하는 나라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당신과의 화목을 이 세상에 가득히 펼치시고 그래서 성도들은 그 속에서 죄의 그늘이 없는 충만한 신적인 사랑 속에서 완벽한 사랑의 교통을 이루고, 이것들을 피조세계에 대해서도 적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아마 미친 듯이 자연을 파괴하며 물질주의로만 달음질치던 이 모든 미친짓들을 멈추게 될 것이고, 이제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을 파괴해서 만든 물질들을 대량으로 소비함으로써 겨우 하나님 없는 허한 마음을 달래는 이 허영의 기쁨의 쇠사슬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지금 우리와는 비교도 될 수 없는 첨단과학기술을 누리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분명한 것은 그렇게 과학 기술을 발전시켜 인류에게 만족을 주기 위해서 이 자연을 비참하도록 착취하고 파괴하는 일들은 종식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자연의 세계 조차 마치 자신과 떨어질 수 없는 인연을 가진 한 공동적인 운명체로 생각하며 선을 베풀게 될 것이고, 자연속에 있었던 수많은 갈등들과 생존하기 위하여 남을 죽여야 하는 파괴적인 행위도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화목을 이룬 이 교회를 통해 모든 인류와 자연, 자연과 자연 속에 온전한 평화가 찾아오게 될 것인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로 이루어지는 충만입니다. 이 모든 충만한 성취는 결국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이루어지게 되어 있고, 이렇게 이 충만한 성취가 구속으로 이루어진 후에도 여전히 이 모든 만물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창조된 것처럼 그리스도를 통해 지탱되고, 그리스도의 중보를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20절에서 노래하고 있는 이 십자가의 찬란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도피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현실에 부적응한 사람들이 현실로부터 도피하는 종교가 아니고, 더욱이 이 십자가는 그냥 죄 가운데 살던 사람들이 피해서 하나님께로 도망쳐 이제는 이 세상과 관계를 단절하고 도피성에 있는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자기만족적인 영성을 가지고 살다가 이 세상의 사상과는 상관없이 타계적인 신앙으로 살다가 죽는 그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 십자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단순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는 개인적인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고자 하시는 경륜이시며 교회의 완성을 향한 경륜이 이 우주적 구속과 이 모든 만물들을 회복시키는 위대한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우주적 구속의 거대한 경륜이 바로 이 십자가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920년대까지 아인슈타인은 이 세상 어떤 사람보다도 유명하고 어떤 사람보다도 인류의 관심을 받는 최고의 스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명성도 1927년 기점으로 거스러들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더 유명해지지 못한채 생애를 마감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아인슈타인은 뉴턴이후에 사람들이 보아온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제시했던 사람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뉴턴서부터 뉴턴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이 모든 세계는 수학적인 법칙으로 존재하고 이 모든 물질의 운동과 존재는 수학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인슈타인이 이 법칙이 우주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시간과 공간이 각각 따로 따로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인슈타인은 천문학의 연구를 통해서 이 물체들이 결국 시간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어떻게 뉴턴의 법칙이 이 거시세계에서 적용이 안 되는지 입증해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시간에 관한 관념을 완전히 깨고 이 시간과 공간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말랑말랑한 고무로 만든 끝을 알아 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천이 팽팽하게 펼쳐져 있고, 그 위에 각각 크기가 다른 공들이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말랑말랑한 고무판은 밑으로 내려앉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주저앉은 굴곡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 말랑말랑한 천을 시간으로 본 것입니다. 위에 올려져 있는 커다란 둥근 물체가 천체라고 본 것입니다. 그리고 공간과 시간은 떼어 놓을 수 없이 굴곡을 가져오고, 이럴 때에는 중력에 의해서 시간도 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왜냐하면 시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빛을 통해서 온 것이기 때문에, 빛이 휘게 되면 결국 시간이 더 걸리게 되면, 그 시간은 가변적인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평평한 고무판자가 있는데, 여기에서 10초를 걸어간 것과, 밑을 잡아 당겨서 10초를 걸어간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밑에서 재 보면 여기에서는 1분에 10cm를 갔는데, 여기에서 보면 10분을 갔는데도 1cm도 못 갔을수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가변적이라 본 것입니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거의 과학에 있어서 초자연적인 인정을 받았습니다. 27년 이후에 양자역학이 나오면서 그의 이론이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이 아주 작은 원자의 세계에서는 두 세 개의 법칙은 전혀 설명되지 않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새로운 법칙은 외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오늘날 여러분이 고속전철을 타고 다니고, 냉장고의 문을 열고, 수퍼에 가서 물건을 사고 찍 하고 인식기에 바코드를 찍는 모든 것들이 다 양자역학의 발전으로 인한 문명의 혜택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잘들어 보십시오. 그래서 작은 원자의 세계에서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동시에 사물은 하나 밖에 있을 수 없는데, 원자의 세계는 동시에 여러 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안 볼 때는 여러개가 존재하는데 사람이 볼 때는 하나만 남습니다. 우연과 필연이 만나고 시간을 거슬러 갈 수도 있고, 2+2나 4+4가 마찬가지이지만, 양자에서는 순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측할 수 없는 결과가 나오는데, 아인슈타인이 마지막에 죽으면서까지 며칠 남겨놓고 헐떡거리는 숨을 몰아쉬면서도 방정식을 적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원자의 세계와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뉴턴 법칙이 통하는 세계와 저 거시세계에 완전히 다른 법칙이 적용되는 것 같지만,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엮는 원리가 있을 것이다. 그게 통일장 이론이고, 그것이 촉근 이론입니다. 그런데 한동안 과학계는 이 모든 것을 통활하는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포기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새 다시 연구가 시작되었습니다. 아마 100년 안에는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기 위해 이 말씀을 드립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 뿐인 이 자연의 세계도 하나씩 보면 모두 상관이 없는 것 같지만, 얼핏 보면 모두 비슷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모두가 달라서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그런데 더 깊이 들어가서 보면 그것들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차원에서 하나의 일치를 이루는 거대한 하나의 원리 안에서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세계의 구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영적인 피조물인 인간을 만드시고, 세계를 만드신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통일된 뜻이 없다면, 성취될 뜻도 없지 않겠습니까. 분명히 여기에는 통일된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구속을 완성하심으로 말미암아 이루려는 통일적인 커다란 뜻이 하나의 원형으로 표현이 된다면, 그 원형의 한 중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그 탁월한 사상과 학문의 지혜가 출중했던 사람이, 그때는 지금처럼 복음의 빛이 흔하지 않았던 때인데도,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을 십자가에서 발견하고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다.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다. 그리고 이 지혜를 알게 하는 것은 성령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교회에 갔을 때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및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다짐하였노라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요새 제가 가만히 우주와 자연에 대해 묵상해 보면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가 우연히, 그리고 모든 것들 가운데 서로 연관이 없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볼 때 서로 상관이 없는 것 같아도 더 높은 차원에서 이러한 것들은 놀라운 일치를 이루고 있고, 아주 아름다운 조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물질의 세계가 그러하다면 하물며 영적인 세계에는 얼마나 놀라운 일치가 있고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의 통일성이 있겠는가. 그것이 있다고 사도가 확신하기 때문에 바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이루시고, 그 십자가로 충만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을 안 믿으며 산다는 것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이렇게 깊고 오묘한 뜻이 있고 날파리처럼 살다가 죽는 우리 인간은 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들을, 심지어 이 점에 있어서는 천사들도 우리들에게 배워야 할 정도로, 천사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은 이 위대한 경륜들을 우리를 통해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잠시 머물 세상에 하루살이처럼 사라져가고, 풀잎의 이슬처럼 사라져가도 허무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위대한 하나님의 경륜 안에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소멸되지 않는 완전한 충만의 성취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누리게 될 영원한 화목, 그리고 우리 영원히 불멸한 존재로 태어난 우리 인간들 사이의 화목,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와의 완전한 화목, 이 소망을 우리들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을 얻은 것이 우리에게는 정말 대치할 수 없는 기쁨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영원을 향한 우주적인 전망을 가지고 이 십자가를 볼 때, 이 십자가는 정말 모든 지혜자들이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드는 위대한 하나님의 지혜이고,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몸의 한 지체로서 당신의 위대한 영광을 완성해 가시는 그 충만을 성취해 가시는 그 위대한 비밀에 참예한 자로서 영광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잇대어 살고 잠시 세상에 살아도 우리는 세상에서 사라져 갈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12.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골 1:21)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이해
저는 지난 시간에 만물을 하나님이 회복시키시는 충만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성경은 하나님께서 만물을 자신에게로 화목하게 하시는데 이것은 바로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도입된 불화를 해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자연 만물과 함께 저주를 받았고 영혼의 생명은 박탈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21절은 하나님이 위대한 만물의 회복의 계획을 말씀하시고 난 후에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던 주된 원인인 인간의 상태와 처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적 화목이 필요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Ⅱ. 신적 화목이 필요한 인간
성경은 말합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화목하게 하셔야만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모든 뜻들이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우리 인간을 구원할 계획을 펼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획이 모두 성취될 때 이 모든 세계는 하나님과 더불어 화목하게 되고 원래 인간이 하나님 앞에 창조된 목적으로 살고 이 모든 세계도 본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어떠한 처지에 놓였기에 하나님과의 화목이 필요하게 되었습니까.
A. 거리감과 원수됨
오늘 성경은 거리감과 원수됨이라는 두 단어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다시 말해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났다는 뜻입니다.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제일 먼저 거리감입니다. 멀리 떠났다라고 되어 있는데 희랍어 성경에 보면 이것은 분사 현재 완료 수동태로 되어있습니다. 스스로 떠난 것이 아니라 그렇게 떠날 수 밖에 없게끔 무엇인가 인간에게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원리 이 희랍어 단어는 멀리하다, 이간질하다, 정을 때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에 의해서 어쨌든 그것이 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든, 마귀의 궤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든 간에 그러한 일들이 일어났고 그로 말미암아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와 버렸고 하나님과 정이 떨어지게 되었고 하나님과 멀리 거리감을 갖게 되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문맥에서 보면 인간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리고 결국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정이 떨어지고 멀리 떨어져 나간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을 타락이후의 오늘로 옮기지 말고, 에덴동산으로 옮겨서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과 그리고 인간이 어떠한 관계에 있었을지를 생각하면서 거기에서 하나님을 멀리 떨어져 나갔다. 하나님으로부터 정이 떨어져 나갔다 라고 하는 동사가 의미하는 바가 어떠한 것인지 생각해 보면 보다 생생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한 인류의 처음 조상 두 사람을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높고 위대하신 분이지만, 아직 죄가 없었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향한 정이 떨어지는 것 같은 큰 거리감, 혹은 하나님을 향한 공포 같은 것들이 전혀 없이 마치 가족처럼 친밀한 가운데 영이신 하나님과 순결한 영으로 교제하며 살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영혼의 친밀함입니다. 아담은 지성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아는 최고의 영혼을 가지고 있었고, 그리고 하나님 뿐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 그리고 자기의 배우자인 아내에 대해서도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감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고 세계의 모든 아름다움을 탁월한 심미자로서 감찰하고 감동을 받으며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송할 위치에 있었습니다. 의지는 올곧고 똑바르게 질서 속에 있었고 하나님을 향하여 순종하는 것이 매우 쉬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타락하기 전 하와도 동일한 내면세계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며 함께 사랑했던 것입니다. 얼마나 시간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이 아담과 하와는 인류가 자신들 이외에는 아무도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누구도 경험해 본 적 없는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그 사랑으로 말미암는 사람들 간의 친밀한 사랑을 온전히 느끼면서 살아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각도에서 보면 하나님과 매우 친밀하였고 타락하였을 때 하나님께로 떨어졌던 거리감, 정이 떨어질 것 같은 이 거리감은 이것은 영혼이 본래 익숙했던 상태에서 떨어져 나온 아주 낯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커다란 두려움과 공포를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화목이 필요한 상태에 있는 인간에 대한 첫 번째 묘사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는 이쪽 편에서 볼 때, 하나님과의 친밀함과 그리고 그 친밀함이 익숙해져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어느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고 그리하여 거리감을 느끼게 된 것이지만, 이후에 인류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과의 어떠한 친밀함도 없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무한한 거리감을 느끼는 존재로 태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아담과 하와가 최초로 경험했을 이 거리감은 커다란 고통을 동반한 것이었고, 이것은 아마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 여러분도 어느 정도 경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 안에 있던 성도가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불순종하고 죄를 짓게 될 때 그렇게 회심한 이후로 하나님과 친말하던, 그리고 그 친밀함에 익숙했던 영혼의 상태가 변하여 상실하게 되고 그리하여 하나님과 무한한 거리감,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온 것 같은 소외감을 느끼게 될 때 어느 정도는 이 아담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화목이 필요한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이후로는 모든 인간들이 예외없이 이렇게 하나님과 정이 떨어진 상태에서 하나님이 낯설고 멀리 있는 분으로 느껴지는 상태에서 영혼의 본래의 특권인 하나님을 향한 친밀함이 완전히 박탈된 상태에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어, 낯설어야 할 죄, 낯설어야 할 이 세상에 대해서는 익숙해지고 낯익어야 할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한한 거리감과 소외의식을 느끼게 되는 존재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으로도 이 거리감은 단축하거나 줄일 수 없습니다. 오직 이것은 하나님과의 전적인 화목이 필요하고 이 일을 위해서는 지난 시간에 살펴 본 것처럼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이 화평을 이루심으로써만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 세상의 많은 고통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거리감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과 나누었던 친밀함을 잃어버리고 영혼의 익숙한 상태에서 그 좋은 것들을 모두 상실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 인간의 방황과 갈등, 모든 범죄와 하나님을 향한 모든 반란들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러한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거리감을 해소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셨고, 그 분을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거리감을 모두 없애어 다시 하나님을 향한 참되고 진실한 친밀함으로 돌아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회심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 가지 놀라운 영혼의 변화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각, 사랑에 대한 감각, 그리고 거룩함에 대한 감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과 거룩함에 대한 감격이 강물처럼 밀려들어오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될 때, 이제는 그 하나님이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저 높고 높은 하늘에 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 내 마음 속에 오신 것 같은 친밀한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데 인간은 원래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러한 하나님과의 온전한 친밀함 속에서 태어나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다시 획득한 놀라운 친밀함과 그리고 은혜는 인간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원수됨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전에 하나님을 멀리 떠나 원수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셨다고 말입니다. 원수됨이라고 하였는데 ‘에크쓰루스(ἐχθρός)’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미움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적의를 품은, 적대적인, 미워하는 이런 뜻입니다. 인간은 처음에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과 친밀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영혼의 아버지로 알아보던 인류였지만 타락 이후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향해 적의를 품고 적대적인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이것은 이유가 없습니다. 경험에 의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본성이 하나님을 향해 적의를 품고 적대적이고 하나님을 모질게 미워하는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어난 그 사람에게 어떤 매우 특별한 일들이 일어나서 그것을 바꿔 놓는 계기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라면서 성숙하면서 이 적의가 구체화되고, 하나님을 향한 적대적인 마음들이 더욱 더 성장하여 결국 하나님의 모든 법에 대항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본성의 빛과 양심을 남겨 두셔서 인류를 보존하게 하셨기 때문에 막갈 때까지는 가지 못하지만, 그러나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적의는 뽑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말씀 드렸습니다. 동물들 세계에서 천적은 경험에 의해서 적의를 길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느 학자가 실험을 하였습니다. 고양이를 태어나자마자 유리그릇에 놓고, 쥐도 태어나자마자 그 옆에 유리그릇에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이 아이들에게 학습할 기회도 없었고, 그냥 그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을 뜨며 본 대상이 고양이게는 쥐였고 쥐에게는 고양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통에 넣어서 사료를 주고 우유를 주며 길렀습니다. 마지막에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시간이 지나서 다 자란 다음에 고양이가 쥐를 죽여 버렸습니다. 이게 천적입니다. 경험을 통해서 이 쥐가 나를 해롭게 하기 때문에 내가 이 녀석을 죽여 버릴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천적이 아닙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향해 천적과 같이 태어납니다. 학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냥 뼈속 깊이 새겨진 본성에 의해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원수 삼으며 태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이것들은 구체적으로 삶을 통해 나타나고 하나님을 향한 적의는 사람들을 향해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원수됨은 본성에 깊이 베어있어서 연습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화목이 필요한 인간의 상태였습니다. 자, 적군은 죽일 수 있지만, 사람은 죽일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적의는 죽일 수 없습니다. 그 적의를 품고 적의 손에 의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 된 처지에서는 하나님과의 화목이 불가능하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관계의 모든 파괴들, 하나님과의 관계의 파괴는 물론이고, 사람 사이에 일어난 관계의 파괴,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일어난 파괴, 이런 것들은 회복할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하나님과의 원수 된 상태를 어떤 식으로든지 해결하고 풀어야지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회복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의 목적이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원수됨은 우리들이 회심하지 않고 하나님과 원수 된 채 살 때에는 내가 하나님을 그렇게 모질게 대적한다는 느낌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고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체험하고 난 다음에는 비로소 예전의 나의 생활이 하나님을 모질게 대적하고 그 분에게 형언할 수 없는 악을 행한 삶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의 마음이 과거를 생각하며 얼마나 아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바로 하나님과의 원수됨입니다. 이러한 거리감과 원수 된 상태에 있는 인간을 놔두고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의 회복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만 보더라도 인간의 존재와 지위가 얼마나 위대하였는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압니까.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위대하게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비교해서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제외하고 이 세상의 모든 사물 어떤 것도 인간의 위대함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 위대함이 단지 이 사회적인 지위나 경제의 유무, 학문의 깊고 얕음, 지식의 있고 없음, 외모의 좋고 나쁨, 이것에 의해서 그 인간의 존귀함과 위대함이 그 자체가 평가되어 진다는 것은 그것은 인간에게 매우 악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소한 하나님의 자녀들만이라도 이 세상의 가치 기준과는 다른 삶의 방식을 이 세계에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떤 사람이 돈이 많다고 칩시다. 그 많은 물질이 그 사람의 존엄성 자체를 높여 주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옷을 입을 수도 있고, 좋은 집에서 살 수도 있고, 손가락 하나로 사람들을 거느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의해서 이 사람이 더욱 존귀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 나라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 나라에 살고 있지만, 우리가 속한 진정한 본향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우리는 사실상 우리의 진정한 신분이 하늘나라의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다른 가치 기준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세상 사람들이 돈 있는 사람들을 더 존귀한 사람으로 알고 높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없이 여길 때 여러분은 다르게 행동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껍질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이 주신 인간 그 자체로 그의 존엄성과 위대함을 직시하면서 그를 사람답게 대우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외모를 생각해 봅시다. 사람의 외모가 얼마나 이 세상에서 다른 대접을 받게 하는지 모릅니다. 우리처럼 나이 먹고 늙어 버리면 용모 평준화가 되어서 어디로 가든지 대접도 못 받지만, 젊은 자매들 형제들 같은 경우 얼마나 다른지 생각해 보십시오. 옛날에 누가 그랬습니다. 장가갈 때 외모 보지 말고, 신앙 좋은 자매 만나서 결혼해야 한다고 했더니 어느 형제가 그랬습니다. 저는 신앙 좋은 자매 만나서 평탄한 가정을 이루기보다는 예쁜 자매 만나서 연단을 받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예쁘다는 것도 결국 껍질 아닙니까. 그 1mm 도 안 되는 껍질을 벗기고 나면 그 속에 결국 시뻘건 살덩어리 천지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것들을 높이 평가하고 그것에 의해서 그 사람의 존엄과 가치를 다르게 매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것을 극복할 수 있는 다른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을 극복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거리감과 원수됨은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더더욱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상을 따라 살아가게 됩니다. 이러한 거리감과 원수됨을 극복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게 화목의 손길을 내미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함은 바로 인간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범죄한 그 한 가지 사건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 재앙이 들어오고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렇게 망가진 이 세계를 고치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마지막에 창조하신 것처럼 세계를 구속하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구속하시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죄가 들어온 그 순서대로 인간을 하나님께서 고치셔서 그 인간과 화목이 이루어지면 이 이루어진 화목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이 흘러 들어와 이 모든 세계를 살아서 춤추고 운동하는 세계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무엇이관대 타락한 것이 무엇이관대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당신의 저주 아래 두시고, 인간이 무엇이관대 그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자 이 모든 세계가 회복될 거룩한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가 보여줍니다. 그러한 위대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깨어진 속에서 살아가면 그 위대함 때문에 인간은 다른 모든 동물들보다도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B. 거리감과 원수된 방식
그러면 그러한 거리감과 원수됨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살펴 봅시다.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전에 악한 행실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들 이라고 말입니다. 첫째는 악한 행실로 인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악한 행실은 무엇입니까. 성경에 아주 등장합니다. 악한 행실. 착한 행실 이렇게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빛의 자녀들에게는 착한 행실이 빛의 자녀의 징표이고 어둠의 자식들에게는 바로 악한 행실이 어두움의 자식이라는 징표입니다. 그래서 빛, 어둠, 착한 행실, 악한 행실, 하나님의 자녀, 세상의 자녀, 이러한 식으로 이원론적인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면 착한 행실을 먼저 생각해 보면 악한 행실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착하다고 하는 말, 선하다고 하는 이 말은 동기와 그리고 목적, 이 두 가지와 관련됩니다. 동기와 관련된다는 것은 착한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 착한 일이 하나님이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일,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행하게 되는 일, 이것이 착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없이 그냥 착한 일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그러나 겹치지 않는 독특한 부분까지 있기 때문에 이것은 독특한 의미에서 착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성경에서 착한 행실이라고 할 때 이것을 그냥 이 세상에서 도덕적인 착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복음의 세례된, 하나님의 복음에 풍덩 담그고 나온, 어떤 사람의 표현에 의하면 하나님의 복음에 침례되어 나온 착한 행실입니다. 그래서 이 동기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우러나오는 착한 행실입니다. 두 번째는 목적과 관련이 됩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아마 여러분은 설교를 통해 선과 악에 대한 담론들을 들은 기억이 날 것입니다. 선은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천지창조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또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그 모든 궁극적인 계획은 당신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통해 당신을 보여 주심으로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정하게 하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고 인간은 그 안에서 가장 행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착한 행실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에 어떤 식으로든지, 조금이든지 많든지 이바지하는 행실을 가리켜서 착한 행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악한 행실은 의미가 명료해집니다. 그것이 아닌 모든 것은 다 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구속하신 뚜렷한 계획이 있는데 그 계획을 따라서 이바지하는 삶을 살지 않고 다른 방향을 목적하며 사는 모든 삶이 그게 결국 악한 행실입니다. 그러니까 악은 하나이고 행실들은 많습니다. 선은 하나이고 선한 행실들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행실들이 선을 지향하거나 많은 행실들이 악을 지향합니다. 그 지향점과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행실은 악을 향합니다. 그러면 왜 인간은 악을 향합니까. 선은 하나님이 지정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악은 목적이 없습니다. 악은 목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목적이 없는데 악을 행하겠습니까. 선에는 목적이 있고, 악에는 목적이 없는데 왜 악을 행하겠습니까. 그 이유는 그냥 인간이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 즐거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악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구속하신 궁극적인 목적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다양한 형태로 인간은 거기에 반항하며 훼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고치시고 징벌하시고 돌이키시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내는 동시에 선하심을 드러내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선하시다면 이 모든 인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선한 길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는 악한 세계 속에서도 선을 향해 거침없이 가는 것입니다. 결국 이 악한 행실은 하나님 보다는 자기를 주인 삼으며 살아가는 삶이고 온 우주 안에서 자기가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자기 기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하나님을 싫어하고 하나님을 미워하여 하나님과 원수된 삶을 계속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자기가 기뻐하는 것을 못 하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한 행실들에 의해서 구원받기 전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왔고, 하나님으로부터 정이 떨어져 나왔고 이간질 당했고 그리고 먼 거리감을 느끼며 도저히 가까이 할 수 없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오늘 성경이 마음 안에서 원수된 것이라 말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있었고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들을. 이라고 말입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단어가 희랍어로 디아노이아 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마음이라는 단어가 희랍어 성경에 대표적인 단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카르디아라고 하는 단어이고 이것은 심장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카르디올로지는 심장학입니다. 그래서 카르디아라는 단어는 심장을 의미하는 동시에 인간의 마음, Heart를 가리킵니다. 인간의 모든 행실들을 낳게 하는 이 모든 의지와 정신의 작용이 총체적으로 움직이는 그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사용한 단어는 그 단어가 아닙니다. 그런데 마음이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이 가르치신 유명한 계명,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라는 단어에서 뜻이라는 단어가 바로 이 단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번역이 계속 일치를 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단어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카르디아라는 단어, 원래의 의미 이 Heart 는 우리 모든 사람의 인생을 움직이는 말하자면 배의 조종석의 기능과 같다고 한다면 디아노이아의 기능은 레이더의 기능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이 디아노이아라는 단어는 가장 좋은 번역은 생각이라는 뜻입니다. 성질, 의향, 의도, 의해, 목적, 지각, 뜻, 이렇게 여러 단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결국 마음은 마음인데 그 마음이 Heart 가 아니라 생각에 속하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아까 말씀 드린 대로 Heart 가 조종관이라면 이 디아노이아는 계기판에 나오는 레이다 장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입니까. 인간과 하나님이 원수가 되었는데 이게 확신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의 이 생각 속에서 하나님 그런 존재는 없어. 혹은 하나님 그는 나쁜 존재야. 우리를 괴롭히는 존재야. 우리 인생의 도움이 안 돼.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것만 강요하고 무자비한 존재야. 우리 마음 속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못 하게 하는 자율성을 해치는 존재야. 그와 관계를 맺으면 우리의 인생은 끝장 나는 거야. 매우 힘들어지고, 노예처럼 될거야 라고 하는 생각이 그들을 강력하게 사로 잡혀 있어서 도저히 그것을 떨쳐 버릴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마음 안에서 원수되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여러분은 오래 전에 설교했던 고린도전서 13장을 기억할 것입니다. 거기에서 저는 몇 번째인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이런 구절을 해설한 적이 있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라고 했을 때 이것은 사랑의 의도를 가리키는 동시에 사랑의 해석학적인 성향이라고까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사람이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면 모든 것을 악한 쪽으로 생각하지 않고 좋은 쪽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가지고 있는 유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사랑은 허물을 덮나니 라고 합니다. 밥을 차려놓고 거기에 보자기를 덮습니다. 요즘에는 안 사용하는데 옛날에는 많이 사용했습니다. 늦게 들어가면, 어머니가 상을 차려놓고 윗목에 놓고 밥보자기를 덮어 놓습니다. 그런데 이 밥 보자기가 밥상보다 크면 푹 덮으면 되는데 밥상에 반찬은 많이 차렸는데 보자기가 작습니다. 이쪽을 덮으면 이쪽이 삐져나오고, 이쪽으로 덮으면 국 냄새가 나고, 국을 덮으면 찌개 냄새가 나고. 사랑이 있으면 허물을 덮는다. 사랑을 하면 해석이 모든 것이 다 좋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누군가를 이렇게 봤는데 인상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말이 많으면 뭐라고 합니까. “참 사람 쾌할하구만. 붙임성이 참 좋구만.” 그런데 딱 봤는데 뭐라고 말할 수 없는데 마음에 안 듭니다. 말이 많으면 “더럽게 수다스럽게 오지랖이 넓구만.” 사람이 마음에 들면, 무엇을 물어보면 아주 분명하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아, 사람이 정말 판단력이 정확하구만.” 마음에 안 들면, 무엇인가 매정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싸가지가 없구만.” 이게 사랑의 유무가 해석을 다 좌우하는 것입니다. 모든 해석을 좌우합니다. 사랑의 유무가 해석을 좌우합니다. 그러니까 마음 안에서 하나님과 원수 되었으니까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들이 못 마땅하게 보입니다. 그리고 좋은 것들은 그것을 절대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확신의 오류에 빠져서 모든 해석을 그 오류가 지배하고 있는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여러분이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화해함에 있어서 감정적으로만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성적으로도 화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 때 이 감정의 화해가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부부가 함께 살다가 싸웁니다. 그래서 대판 싸울 때는 그럽니다. 정말 운도 정말 없다.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은 사람이 1천 억 명이라고 하는데 그 1천 억 중에 저 인간이 걸렸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주 괴롭습니다. 누가 그러더랍니다. 남편이 죽으면서 아내의 손을 붙잡으면서, 여보 나는 먼저 죽지만 당신은 나 죽는 것 때문에 마음 상해하지 말고 곧 빨리 시집가서 잘 살아. 그러니까 일생동안 서로 다투면서 살았는데 남편이 그렇게 감동적인 유언을 남기니까 주위에 애들도 있고 그런데 아내의 마음이 애틋하겠습니까? 남편의 손을 꼭 잡고 나 죽거든 당신 꼭 결혼해. 그리고 누구와 결혼할지 가르쳐 주더랍니다. 부인이 깜짝 놀라면서 그 인간은 일평생 당신 따라다니면서 당신 사업 망치고 당신에게 나쁜 짓 한 사람 아니에요? 그래서 말하는 거야. 내가 그 녀석한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복수야. 사랑은 모든 해석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정적으로 화해가 되었어도 내 남편이 왜 좋은 사람인지 심지어 왜 나에게 과분한 사람인지 심지어는 어떤 점이 정말 훌륭하고 탁월한지 이러한 것에 대한 이해없이 감정적으로 화해하고 나면, 그것은 감정 하나만을 의지한 화해입니다. 어느 한순간 감정이 상하면 더 이상 기대고 볼 곳이 없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각해야 합니다. 왜, 저 사람이 훌륭한가. 왜 내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저 사람을 못 만났을까. 그러면서 거울도 보고 옛날에 가난했던 때도 생각해 보고 하면서 지성적으로 설득이 되는 것입니다 .화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감정으로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정적으로만 이제 내가 주님을 따릅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 세상 어느 종교와 사상을 찾아도 하나님 같은 분을 만날 수 없는지, 왜 그 분의 자녀가 된 것이 위대한 것인지 그리고 이 기독교의 가르침과 사상이 이 모든 세계 위에 탁월하고 뛰어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지성의 화해가 필요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의 원수된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거리감이 있고 그리고 철저히 원수된 이 인간을 하나님이 화목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화목이 사람에게로 가서 화목하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주권적으로 화목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기준점 자체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향하여 인간을 돌이켜 화목을 이루게 하시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여 인간과 화목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들이 성취될 수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스스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스스로 더듬어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도 없고 하나님과 너무나 철저히 원수가 되었고 마음으로 이미 확신의 오류 속에서 모든 해석을 지배할 정도로 까지 하나님과 철저하게 이를 갈고 싶을 정도로 원수가 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이러한 상태 속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인생에 있어서 근본적인 숙제를 감추며 살아갑니다. 인생과 그리고 인류의 모든 근본 문제는 결국 하나님과의 화해 없이는 해결이 불가능합니다. 바로 그 하나님과의 불화한 그 처지에서부터 인간의 모든 비극과 고통이 그리고 그 모든 시련이 거기에서 모두 생겨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을 그것을 감춘 채 살아가고, 때로는 무시하고, 때로는 회피한 채 살아가지만, 조금이라도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죄인이지만 마음을 잔잔하게 가라앉히고 맨 정신으로 고요히 생각을 하려고 하면 이렇게 사는 것은 인간이 사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것들이 수많은 철학과 인간의 사상이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번뇌와 인생의 문제에 대한 고뇌를 글로 필역하여 속에 있는 것들을 다 끌어내어 본 적이 문학입니다. 그런데 결국 문제를 드러내고 이러한 문제가 있다는 것은 진단히지만 궁극적인 해결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물질문명을 통해서 번영을 구가한다 할지라도 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옛날에 유럽에, 유럽 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그러면 옛날에는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염병이 돌면 사람들이 종교행위를 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모였습니다. 그러면 이 전염병이 더 빨리 확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명한 유적지들이 있는데 사람의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경우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이 전염병 때문입니다. 그래서 앙코르와트나 잉카 마야 문명들이 모두 다 그러한 흔적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쨌든 질병에 걸립니다. 예를 들어서 나병에 걸렸다고 칩시다. 그래서 나병에 걸려서 온 몸이 다 썩어 갑니다. 귀가 떨어지고 코가 떨어지고 진물이 흐릅니다. 한 나라의 왕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왕인데 나라를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니까. 그래서 황금으로 된 가면을 쓰고 그리고 이제 다스립니다. 왕에게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추한 얼굴을 가리기 위한 가면도 황금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음식도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좋은 의자에 앉아서 온 세상을 통치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병에 걸려서 죽어가는 왕의 상태를 해결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불가능합니다.
죄로 말미암아서 인간이 결국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모든 처지가 이와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신적 해결책이 필요하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거리감이 생기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강력하게 원수된 인간의 처지, 확신의 오류에 빠져서 모든 해석을 지배당하며 이제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집요하게 미워하고 스스로 돌아갈 능력이 없는 이 인간을 하나님께서는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펼쳐, 죄로 말미암아 망가진 이 세계 전체를 다시 창조 목적으로 되돌려 놓으실 위대한 계획들을 이루셨는데 이 첫 번째 위대한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거리를 내었던 원인, 하나님과 마음 안에서 원수되게 만들었던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죄이고, 그리고 배후에서 이것들을 주관하는 마귀의 세력이었기 때문에 정사와 권세를 멸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하여 무장해제 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인간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 대신 징벌을 받음으로 율법의 요구를 지불하심으로써 인간에게 하나님과 화목할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택한 지혜가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이 계획에 충만한 성취로 데려가는 지름길이며 따라서 이 십자가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온 우주를 본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지혜의 소산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우주적인 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악한 행실을 인하여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 맺고, 그리고 하나님과 무한한 거리감속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이었고, 하나님을 향해서 모질고 표독스럽게 하나님께 대항하던 원수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십자가 앞에 우리를 나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고난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나의 인생의 문제. 하나님을 멀리 떠났기 때문에 주님과 원수 되었기 때문에 처하고 있는 이 모든 하늘 자원의 궁핍,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단절되고 소외된 것이 인생의 모든 불행과 고통의 근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우주적인 지혜이고, 이것은 단순히 우리 한 사람을 구원한 것이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여 마지막에 인류와 완전하게 화해한 후에 이 모든 창조세계를 찬란한 영광으로 되돌아가게 하셔서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위대하고 놀라운 계획들을 펼쳐 보이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우주적인 지혜이고, 그래서 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이 모든 충만한 하나님의 성취가 비밀스럽게 담겨있고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경륜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Ⅲ. 결론과 적용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부여 받은 하나님과의 화목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우리와 이렇게 화목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는 악을 행했고, 모질게 하나님께 원수처럼 살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켜 우리와 당신 사이에 있는 원수 된 담장을 허무셨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납해 주셔서 살게 하셨으니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악을 행하며 산 것은 우리 자신이 한 일이었고, 오늘 하나님과 화목을 누리며 그 분의 은혜 안에서 살게 하신 역사는 모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얼마나 원대하고 우주적이며 광대한 계획인지 생각하고 나 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이것ㅇ기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위대한 세계를 향한 원대한 목적과 계획을 성취하는데 어떤 식으로든지 이바지하게 하기 위하여 나 한 사람을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하나님과의 화목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화목을 전파하면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3.죽음으로 화목하게 하심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2)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이해
사도바울은 우리가 우리의 행실로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마음으로는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사람들이여 라고 분명히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상태에 있는 인간을 하나님이 내버려 두신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지도 못하고 이 세계가 창조된 목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가 그 목적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알지 못한 채 짐승처럼 살다가 죽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더 없는 불행이었고 하나님께는 이 세상을 창조하신 보람을 느끼지 못하게 될 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당신을 멀리 떠나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잠시 인간의 타락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인 당신의 영광이 피조세계 속에 충만하게 드러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좌절되는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그 무한한 지혜 속에서 오히려 인간의 죄와 타락을 사용하셔서 오히려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하지 않았을 때보다 더 찬란하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 구원사역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돌이켜 하나님께로 구원받게 하시는 사역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타락이 오히려 당신의 충만한 사랑의 영광을, 생명의 능력을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다고 하는 말이 얼마나 절망적인지를 지난 시간에 말씀 드렸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습니다. 그렇게 원수 된 사이가 다시 화목하게 되는 일이 없었다면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죄를 짓고 타락할 능력은 있었지만 그로 말미암아 망가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 없었던 것입니다. 인간은 이미 태고 적부터 이 세상에 태어나 비록 타락하여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정확히 모르고 이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도 모르고 자기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존재인지도 명확히 몰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짐승보다도 더 악한 삶을 살 때 조차도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사는 것만으로는 인간이 참으로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 있었던 모든 철학적인 질문들, 인간은 어디로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 것이며, 있다는 것은 무엇이고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한하다는 것과 유한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우주의 기원과 마지막 종말은 무엇인가 하는 끝없는 질문들을 던져온 이유도 그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이 인간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것을 규정함에 있어서 꼭 필요한 질문이었기 때문에 탐색해 온 것입니다. 이러한 철학적인 탐구는 어쨌든 인간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자기가 잃어버린 상태를 다시 되찾고자 하는 나름대로의 구원의 노력이었습니다. 비록 이 세계가 창조된 기원과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는 다 모른다 할지라도 도덕과 윤리를 통해서 사람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그 규범에 맞도록 삶으로서 양심에 부끄러움 없고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했던 욕망도 그들 나름대로는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이었습니다.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살아가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아서 학문과 예술을 통해 영원한 세계를 그려보고 잠시 있다 사라지는 유한한 존재인 인간의 존재의 의미를 영원과 연결 지어 보고자 하였던 노력들은 바로 그러한 인간들 나름대로는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이었고 그들은 명확히 그것을 몰랐지만, 그들은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배고픔, 목마름들이 겉으로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과의 불화한 상태에서,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의 인간들이 잃어버린 그 무엇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그로부터 내려오는 생명과 사랑을 공급받을 수 없고 피조세계와도 관계가 끊어지고, 인간들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고립된 존재로 살아가는 고통을 극복해 보고자 하는 노력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항상 선한 쪽으로만 나타났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극단적인 권력욕이나 쾌락, 이러한 것들에 자신을 내던지는 형태로도 나타나게 되었으니 어떠한 형태든지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간의 비참함을 극복하고자 하였던 인간의 몸부림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던 인간은 어떤 것으로도 그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Ⅱ. 원수들과 화목
그래서 성경은 말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을 향해 원수 된 자들과 화목해하실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그의 육체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셨다고 말입니다. 원수들과의 화목하게 하심에 있어서 그것을 화목하게 하는 조건은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면 죄를 범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된 우리 인간을 하나님께 돌이키기 위해서 정말 그리스도의 죽음이 꼭 필요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A. 꼭 죽음이 필요했는가
여기에서 우리들이 생각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하나님을 멀리 떠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것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시는 모본을 보임으로 말미암아 우리 죄인들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어 스스로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식의 가르침을 정당화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신 적이 없고 항상 인간을 향하여 선하고 자비로우신 분이신데 그 하나님께 인간이 스스로 반역하여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손해를 본 쪽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배신을 당한 피해가 우리가 입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는 가해자이고 하나님 그 분이 입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참으로 구원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자신이 그 마음을 풀고 우리 인간들을 향하여 주도적으로 구원의 손길을 내미시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3장 23절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한 의가 나타났으니 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이신칭의 교리를 감격하며 선언하였던 이유도 이와 같았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없는 인간을 위해서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무능한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이 한 의를 준비하셨고 그 의는 바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하나님께 가해를 하였던 모든 것을 용서받게 할 만한 하나님의 새로운 의였던 것입니다. 이 의가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획득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반역하고 죄를 지은 그 대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하나님 앞에서 치르심으로써 그 분의 의로운 분노를 만족시켜 드리고 이로써 하나님이 다시 인간을 향하여 관계를 회복하고 화목하게 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마 인간이 타락하지 아니하였다고 할지라도 성자께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우리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셔야 했던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 증거로 우리의 모든 구원이 완성되고 난 다음 그리스도께서는 다시 사람의 몸을 입고 강림하실 것입니다. 그 때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죽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속량하여야 할 죄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이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일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 오셔서 하신 세 가지 일이 있는데 첫째는 우리에게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 누구인지 보여주신 일이었고, 두 번째는 당신이 성육신 안에서 하나님 앞에 순종을 배우시는 것이었고, 마지막 세 번째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대신 속죄의 죽음을 죽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는 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과 우리의 화목을 위해 꼭 필요했는가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의견이 있는데 가설적 필요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꼭 그러셔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때에 죽게 하심으로써 인간을 구원하는 것을 선택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라고 하는 해석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칼빈 같은 사람들이 따른 주장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견이 있는 절대적 필요설입니다. 이것에 의하면 하나님도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셔야지만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자유로우신 분이고 무엇에도 얽매이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필연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자유로운 분이십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목을 위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필연적이었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 자신이 무엇에 얽매여 필연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당신 자신이 거기에 매이기를 기뻐하셨다는 의미에서의 필연입니다. 이러한 교리를 잘 입증해 주는 한 예가 있습니다.
(예화) 한 나라에 임금이 있었는데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고 소위 비원이라고 하여 자신 혼자만 그 정원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즐기도록 법을 만들었답니다. 비유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비원을 산책해 보니 왕이 아끼던 사슴이 죽어 있었고 여기 저기 동산을 파헤쳐 놓은 파괴의 흔적들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수사를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그 왕의 비원을 몰래 침입해서 왕이 아끼는 사슴을 죽이고 여기저기 파괴의 흔적을 남긴 사람은 자기 아들이었습니다. 왕은 매우 난감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변할 수 없는 왕국의 법률로서 누구든지 왕의 비원을 침범하는 자는 두 눈을 뽑으리라고 법령을 내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이제 이 법을 무시해 버리느냐 아니면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두 눈을 뽑느냐 이것이 관건이 되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왕이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에 대해서 주목하였습니다. 왕은 왕이기 때문에 법이 그렇게 되어 있어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면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왕이 법보다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렇게 해 버린다면 나라를 지탱하고 있는 수많은 법들은 백성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겠습니까. 동화 같은 이야기이지만 이제 왕은 두 눈을 뽑도록 판결을 내렸고 드디어 왕자는 한쪽 눈이 뽑혔습니다. 그리고는 그 왕자가 완전히 두 눈이 먼 상태에서 일생을 장님으로 산다면 자기의 대를 이어 나라를 통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만약에 눈을 뽑지 않는다면 도덕적인 결함이 생겨서 왕국을 다스릴 정당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왕자를 대신하여 자신의 눈을 뽑아 법률을 충족시키고 왕자를 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고 중국의 제왕학이라는 학문이 있습니다. 왕을 길러내는 학문입니다. 그 사람들의 사상은 왕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눈에 보면 오늘날의 민주정치는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표를 많이 얻었다고 해서 선택했는데 실망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왕이 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교육을 왕이 되기에 적합한 특수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 것입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 일일이 찾아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제왕학에 나오는 어느 한 구절이었습니다. 어린 왕에게 왕의 스승이 이제 왕으로서 살아가는 도리가 무엇인지 설명하는 가운데 이러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은 나라의 근본이십니다. 모든 법은 왕의 의지로 집행이 됩니다. 그러므로 왕은 법의 기원이고 그런데 만약 왕이 그 법을 따르지 않고 흔들리기 시작한다면 나라에는 이보다 더 큰 재앙이 없는 것입니다. 천지가 흔들리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누가 무엇을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 스스로 완전하고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자유로우시면서도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제약을 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지만 악을 행하실 수 없습니다. 무능해서 행하실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하시기 때문에 행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행하실 수 없는 것은 행하지 않으시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도둑질을 안 하는 사람이 훌륭합니까. 못하는 사람이 훌륭합니까.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예 마음에 성향 자체가 옆에다가 천만 원을 두고 가도 그것을 안 가져가는 것입니다. 언젠가 음식점을 갔습니다. 무엇을 살려고 했는지 20만원 되는 상품권을 들고 갔는데 밥 먹다가 옆에다가 놓았습니다. 그리고 밥을 먹으려 하였는데 식당 종업원이 더 좋은 방으로 옮겨 준다고 해서 갔습니다. 그리고 밥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까 상품권을 거기에다가 두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갔습니다. 없었습니다. 그러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것을 왜 가져갈까. 자기 것이 아닌데. 어디에 가서 봉투를 보고 땡잡았다고 하면서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운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너무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의 것을 주워서 히히덕 거리며 웃으며 사용할 것을 생각하니까 너무 측은합니다. 아깝지는 않았습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니까. 사람들이 왜 그러냐는 것입니다. 성향 자체가 그러한 것을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사람은 가져오고 싶은데도 이를 악물고 안 가져오는 사람보다도 훌륭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도 못하신다고 하는 것이 무능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완전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B. 죽음이 필요했던 이유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꼭 필요한 것이었다고 한다면 그 죽음은 왜 필요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설명 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은 당신을 배반하고 당신을 향해 무한한 죄를 지은 인간에게 엄정한 공의를 행하여야 했습니다. 이로써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에 원수 되고 범죄 한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엄정한 공의를 보며 두려움을 느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히 크신 분이시기 때문에 인간이 지은 죄는 무엇이든지 무한한 크기를 가지고 있는 죄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에게 그 죄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은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죽음의 심판을 당하고 영원한 파멸에 떨어지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에게 파멸을 선고하고 이것을 즉각적으로 집행해 버리셨다고 하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은 수포로 돌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는데 여기에 있는 이 모든 자연의 세계를 통해 하나님이 무슨 영광을 그렇게 크게 받으시겠습니까. 만약 교회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성도들이 없다면 지어진 건물과 아름다운 음향시설을 통해 받으실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하나님께 진정으로 영광 돌릴 수 있는 피조물은 하나님 닮은 인간이고, 이 인간의 의지와 지성 안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하나님의 이러한 무한한 엄정한 공의를 만족시키고 동시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도 소멸되지 않고 지속되도록 무한한 사랑을 인간에게 보이셔야 할 필요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공의와 사랑의 조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시고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우리를 모두 당신 안에서 포함하여 끌어안고 죽임을 당하심으로 우리 모두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룬 사람이 되었고 실질적인 죄의 형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과 인간의 화목을 도입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방식,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와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무한히 죄를 범한 인간이 구원을 받는 이러한 방식은 두 가지 성격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총과 의존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할 때에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에 우리는 아무것도 보탠 것이 없고 일방적으로 받았을 뿐입니다. 어떠한 사람들은 우리가 그래도 믿지 않았느냐고 말하는데 믿는 것은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예화) 어떤 사람이 명절이 되어서 시골에 가려고 하는데 표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애를 업고 추운데 벌벌 떨면서 고향 가야할 그 사람을 보니까 너무 불쌍하니까 KTX 특실권을 주면서 나는 고향에 내려 가봐야 특별히 반기는 사람이 없으니 나는 안 내려가도 되는 사람인데 그저 애기 엄마나 편히 다녀오십시오. 그러면서 티켓을 2장을 주었다고 칩시다. 이 사람이 가지고 벌써 차는 가려고 해, 막 같이 가자고 소리 지르며 뛰어가서 차에 간신히 갔습니다. 그래서 특실히 앉아서 갔을 때 어떻게 표도 없다면 고향까지 내려오게 되었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하겠습니까. 최선을 다해서 닫히려고 하는 객실 문을 향해 뛴 공로로 내가 고향에 오게 되었습니다 라고 이야기 한다면 정신병자일 것입니다. 내가 도저히 고향에 내려올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누군지도 모르는 분이 소위 이야기 하는 귀인이 나타나서 그래서 돈도 안 받고 특실표 2개를 주는 바람에 제가 고향에 올 수 있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믿음 그 자체는 어떠한 식으로든 공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구원의 은총적 성격을 보여 줍니다. 이 구원이 우리에게 너무나 감격적인 이유는 우리의 공로를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져 주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그라티아, 은혜입니다. 은혜. 거저 주어지는 것,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의 육체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의 관계를 여심으로써 이 구원이 은총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 오직 은총으로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누구도 자기가 구원 받은 것에 대해 하나님께 자랑할 수 없게끔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캄캄하게 어두운 밤에는 촛불의 밝기가 다르고, 횃불의 밝기가 다르고, 손전등의 밝기가 다릅니다. 그렇지만 대낮에는 그 밝기의 크기 작음이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햇빛이 찬란하게 비추는데 그까짓 밝기의 차이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두 번째는 구원이 가지고 있는 의존적 성격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일방적인 은총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근거를 마련하셨듯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함으로써,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그 일을 온전히 의존함으로써 구원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 그러면서도 공경하는 것, 이것이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따라서 그것을 따라오는 것들이 하나님을 향한 신뢰, 믿음, 의존, 이러한 것들이 따라옵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가면서 커다란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가 아주 중요한 의무로 등장하게 되고, 그것이 오히려 앞서 오면 그 뒤에 하나님을 향한 경외, 두려움, 그리고 의존 모든 것들이 따라옵니다. 사랑까지. 믿음입니다. 복음서를 정직하게 읽어보면 시종일관 강조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던지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는 대상이 놀랍게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구원의 여부가 결정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에서도 믿음이 강조된 것이 사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육체가 죽으심으로써 그리고 죽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남으로써, 믿음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행동을 온전히 믿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들에게 주신 또 하나의 중요한 유익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뭐냐 하면 우리로 하여금 예수와 영적인 연합을 이루며 그래서 거룩하게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나라에서나 복음이 온전히 심겨진 곳에서 환란과 핍박이 몰려 올 때에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무한한 용기를 주었던 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으면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이라고 하는 확신입니다. 바로 그것이 이 성도들로 하여금 모든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신앙의 정절을 지키며 거룩하게 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결심한다고 해서 항상 행복하고 기쁜 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면 현실적으로 고난이 시작되고, 하나님의 일을 하되 온전하게 하려고 하면 환란과 핍박이 더 몰려오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시련과 고난이 가득하게 될 때, 우리가 어떻게 고난과 시련을 이기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고자 하셨고, 그 때 끊임없이 그분도 시험도 당하시고 고난을 겪으셨으니 나도 이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따르겠다고 결심할 때 그 고난 속에서 2천 년 전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실제화 되어서 우리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함으로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사는 영적인 영혼의 실제적인 변화, 마음의 실제적인 갱신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가슴 저미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육체의 죽음에 우리가 어떻게 영적으로 동참하는 영적인 체험들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에서 타락하여 하나님의 이 구속하시는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였다면 가슴이 녹는 것 같은 간절한 기도, 그리고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부인하는 몸부림치는 이 신앙에 대한 열망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우리의 입을 다물게 만듭니다. 우리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왜 이렇게 어려움만 당할까 라고 불평만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주면 할 말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제법 받아 들여질만한 사람이고, 쓸 만한 사람이라 생각할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고난의 형상을 보여주면 할말을 잃어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죄인중의 괴수라는 사실을 그 십자가의 죽음이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었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는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과의 화목을 회복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타락하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은총을 아주 거두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아마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셔서 죽지 않으셨어도 인간은 끊임없이 문명을 발달하고 물질문명을 이루며 역사적으로 발전해 왔을 것입니다. 건축도 발달하고, 기계공업도 발달하고 많은 재활을 생산해서 소비하는 그러한 발전은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없이도 계속해 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모르는 나라에서도 탁월한 발전을 이루었던 문명과 문화의 현상들을 보아서도 이러한 사실은 자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한 발달한 문명과 발전한 문화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들이 반드시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행복은 물질을 얼마나 많이 누리고 얼마나 많은 화려한 세계 속에서 사는가 하는 것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미국까지 한 시간에 가는 비행기가 나오고, 아침에 달나라에 가서 점심 먹고 놀다가 저녁때 돌아오는 세상이 된다고 칩시다. 그래서 어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산업들이 발전하고 기계문명들이 발전해서 공중으로 양자역학을 이용해서 그래서 무게도 차량을 타고 다니고 만화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빌딩사이를 누빈다고 칩시다. 절대로 교통사고가 안 나고 그렇게 해서 다닌다고 칩시다. 우리 각자에게 모두 옥상 위에 비행기가 한 대씩 주어진다고 칩시다. 한순간에 순간이동을 할 수 있어서 목성에도 가고 토성에도 간다고 칩시다. 그게 어쨌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공간을 이동하고 엄청난 물질들을 소비하면서 놀라운 쾌락을 누리고 우리의 기술이 발달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놀라운 환경들을 만난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그것으로서 절대로 행복해 질 수 없습니다. 잠시 이 모든 현혹들로 말미암아서 인간이 근본적으로 고민해야 할 문제에 대해서 잊어버리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불행입니다. 인간이 마땅히 고민하고 괴로워해야 할 문제는 괴로워하고 고민해야 참다운 가치에 도달할 수 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즘도 청소년들을 보면서 걱정스러운 것이 뭐냐 하면 책을 안 읽습니다. 그리고 핸드폰 하나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컴퓨터 하나에. 그리고 자신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컴퓨터에 다 들어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활용할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찾아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자기 지식이 아닙니다. 이만한 기계 하나 들고 지식이 다 있다고 이야 기하는 것이나, 집에다가 수십만 권 책을 쌓아놓고 내 도서관에 다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우리를 참으로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정보가 어디에 있다는 그것으로 행복해지고 그것으로 고상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하고 자기가 살아보지 못하고 경험해 보지 못한 인간의 비극과 기쁨과 슬픔, 좌절과 분노 같은 것들을 책을 통해 경험하면서 인간이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가능성과 삶의 폭이 얼마나 넓은지를 깨달아야지만 인생을 사유할 능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질문명의 발달로 말미암아서 인간을 단순한 동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우리의 인간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시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 맺은 우리들을 돌이킬 수 있도록 하나님이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셨고, 그 구원이 은총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피해자 이시면서도 스스로 주도자가 되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다시 맺을 수 있도록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부부가 대판 싸운다고 합시다. 그리고 냉전에 접어듭니다. 그런데 양쪽이 서로 화해를 안 합니다. 그러면 팽팽합니다. 그러다가 결국 어느 한쪽이 화해를 청합니다. 누가 화해를 청합니까. 남편입니까. 아내입니까. 세상에서는 기가 센 사람이 이깁니다. 그래서 그냥 성질대로 해서 부부관계를 깨뜨려놓고 그저 남편이 먼저 가서 죽었다 하고 그리고 용서해 달라고 하고 빕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그 사람이 약하기 때문에 굴복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보면 두 사람이 관계가 깨진 다음에 화해의 손을 내미는 사람은 사랑이 더 많은 사람이 회해의 손을 내밉니다. 사랑이라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타자와 관계를 맺으려는 성향입니다. 가끔 그렇습니다. 나는 한번 안 본다면 안 봐. 자랑삼아서 하는데 그것은 자랑이 아니라 스스로 얼마나 사랑이 없는 사람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이 없으면 한번 결단하면 되냐는 것입니다. 보지 말아야지 했을 때 그것에 어떻게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그럴 수 없습니다. 다시는 보지 말아야지, 돌아서면 보고 싶어지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리워지고. 화가나고 속에서 분노가 끓는데도 집에 돌아와서 갑자기 그 인간 지금 어디에서 밥이나 먹고 있을까, 그러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그러한 사랑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러한 세계를 다 망가뜨리고 하나님께 악을 행하고 돌이켜서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을 찾으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자존심도 없으신 것처럼, 뭐 그렇게 대단한 피조물이라고 하나님이 그 인간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불쌍히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사랑이 무한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고난의 죽음을 찬송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많은 고민과 괴로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민과 많은 괴로움들 중 거의 대부분은 우리가 지금 이 순간에 죽는다면 더 이상 계속할 필요 없는 고민들입니다. 마지막 우리에게 결국 남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나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내가 다시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었고, 그 분의 사랑을 받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 이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이 가장 중요한 사실이 그 마음 대부분을 차지입니다. 이게 은혜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커 보이고, 세상이 작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소멸되게 되면 이 십자가는 아주 하찮은 것이 되고 이 세상은 너무 커 보이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의 갈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 하는 행실과 악한 행실과 마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완전히 원수 되었던 이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과 화목의 길을 여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찬송 제목이 되어야 하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분골쇄신하여 주님을 섬겨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우리가 이 사랑에 빚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면서 까지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시려 하셨을까. 다시 말해서 당신이 우리를 화목하게 하신 그 궁극적인 계획이 무엇이었을까. 다음 시간에 계속하시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4.죽음으로 화목하게 하심(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골 1:22)
녹취자 : 김세나
지난 시간에 1장 21절을 다 설교하려고 하다가 시간이 너무 많이 가서 중간에 설교를 멈추었습니다. 그러나 형편없이 그냥 멈춘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논리가 있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설명하였고, 원수를 화목하게 하셨는데 그 방법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었는데, 첫째는 죽음이 꼭 필요한 것이었는가에 대해 말씀 드렸고 두 번째는 죽음이 필요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조화라는 측면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가능하도록 우리를 만들어 주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Ⅰ. 본문 이해
오늘은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형벌을 당하게 하면서까지 우리를 하나님께로 화목 되게 하셨는데, 그렇게 화목하게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화목의 계획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고 그 사랑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이 구원의 계획이 필요하셨다는 것입니다. 자, 이미 앞에서 여러 시간에 걸쳐서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인간들의 형편이 얼마나 비참하였었는지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타락하였을 때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고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생명과 사랑을 충만히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자원이 끊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자 하나님의 그 사랑과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었고, 이로써 인간은 도저히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Ⅱ. 화목의 계획 : 사랑 + 삶
그래서 하나님이 이제 이 인간을 다시금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단절된 관계를 다시 이어주실 계획을 가지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범죄 할 능력은 있었지만, 이 생명과 사랑을 복원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의 선도적인 역사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앞서서 역사해야지만 겨우 은총을 받아들인 인간이 믿음으로 반응하여 이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은택을 입을 수 있는 처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성격은 성경적으로 이해한다면, 구원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먼저 역사하시고 우리는 전적으로 그분의 은총에 의존해 있다는 사실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복원되고 거기로부터 생명과 사랑이 흘러 나와서 그래서 우리가 다시 사람들 속에서도 하나님 안에서 이룩된 평화와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는 처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단절된 관계를 다시 이으시고 선도적으로 우리를 대속의 은총으로 구원해 주셨는데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고자 하셨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A. 온전한 인간을 만드심
첫째는 온전한 인간을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과 화목하게 하신 계획의 첫 번째입니다. 그러면 그 온전한 인간. 온전한 사람이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당신을 닮은 형상을 주셨지 당신과 똑같이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의 완전함과 동물의 완전함과 나무의 완전함이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인간이 아무리 완전해도 하나님과 같아질 수는 없고 동물이 아무리 완전해도 인간의 지위에 오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인간, 완전한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 기준이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기대하셨던 그 인간이 그것이 기준이 됩니다. 거기에 부합하면 온전한 인간, 혹은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고 그 부합하는 데서 멀어질수록 불완전하고 온전하지 못한 인간이 됩니다.
그러면 결국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 됨됨이인데 사람 됨됨이는 그 사람이 행동하는 원인이 됩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무엇을 해도 빨리빨리 하려고 합니다. 그러한 태도가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고 실패를 자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덤벙덤벙한 사람은 무엇을 해도 덤벙덤벙하고 빠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도움이 되는 쪽도 있을 것입니다. 사람들한테 꽁하고 그러한 것들이 사람 살다 보면 그럴 수 있지 이러한 좋은 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최악의 사람은 일할 때는 그럴 수도 있지 그러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어찌 그럴 수 있느냐고 이중적인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일은 못 하고 까다롭기는 대게 까다로운 사람입니다. 그럴 수는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간에 어떠한 물질의 성질이 있으면 그 성질은 작용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온전한 사람을 만드시고자 하는데 결국 그들이 온전한 사람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되어 있던 사람들이 다시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에 접붙여져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예수를 통해 다시 받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아무리 가전제품이 많이 있어도 일단 전기코드를 꽂아야지만, 작동합니다. 전기를 꽂았는데도 이게 하도 오래 사용해서 망가졌을 경우 소리가 삐그덕 소리가 나고 선풍기가 자꾸 돌다가 멈출 수도 있고 아니면 소리를 내다가 덜그덕 거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일단 꽂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타락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 창조될 때부터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께 딱 꽂혀 있어서 거기서부터 생명과 은혜를 공급받음으로써 그것에서 인간다운 삶,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생각, 감정, 의지, 생활, 이러한 것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계획을 따라 살려고 하는 성향, 이러한 것들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타락함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것들이 뽑혀져 버린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집도 짓고 도로도 놓고 학문도 발전시키며 살아가지만, 그러나 참으로 인간을 정말 인간답게 만드는 것, 그리고 그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기대하는 바를 따라 사는 그 방향성,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 불가능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타락하고 얼마 안 되어서 라멕이라는 후손이 나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맨 처음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하나님이 또 다른 사람을 창조해서 데려갔더니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라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인간이 타락하고 죄가 들어오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느냐 하면 이제 라멕이라는 인물이 나타납니다. 그 사람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한 사람의 이름은 아다, 한 사람은 실라였습니다. 그 두 아내에게 이러한 노래를 부릅니다. 나는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사람을 죽였고, 내가 다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다. 아까 이야기 했던 이는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는 고백과는 정반대의 고백이 불과 성경 2장 사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누가 실수로 상처를 입혔습니다. 복수를 하였습니다.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어떠한 소년이 아마 실수였을 것입니다. 이 사람을 다치게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고대의 법률로 보더라도 보복법의 비유를 능가한 것입니다. 소위 탈리오의 법칙이라고 하는 보복법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똑같은 상처를 내고 경우에 따라서 상처를 배상할 수 없을 경우, 예를 들면 소가 와서 사람에게 상처를 냈다든지. 그러한 것은 소한테 상처를 낸다고 해서 소용없지 않습니까. 주인한테 상처를 낼 수 없고. 그래서 곡식으로 배상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자연법에 따라서 기준이 있는데 이 라멕은 그 기준을 훨씬 능가한 것입니다. 실수로 건드려서 약간 다쳤는데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 안에 무엇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까. 폭력과 그리고 복수에 대한 불타는 감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글자로 무엇입니까. 사랑의 반대. 미움입니다. 미움.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 된 채 살아가는 인간의 내면의 세계가 그리고 있는 현실생활입니다. 그러니까 온전한 인간을 만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죄가 들어오기 전에 맨 처음 창조할 때 그 인간에게 주셨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능력, 그것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그 첫 번째 조치가 하나님의 생명으로 멀리 떠난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게 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부어주시고, 그리스도가 교회에게 주신 그 생명과 사랑을 받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그 인간이 완전하게 이미 되어 버린 것은 아닙니다. 이제 세상을 사랑할 수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 세상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절대적인 의미에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세상 하나를 절대적으로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고 난 다음에는 그렇게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불신자는 죄를 지을 때, 단일한 의지로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은 죄를 지을 때에 복합의지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는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옛 사람의 욕망입니다. 또 하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새로 태어난 거듭난 속사람의 본성입니다. 두 가지가 싸우는 것입니다. 무게 중심이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에 따라서 그 쪽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죄를 지어도 말이 조금 안 되는 것 같지만, 마음 편하게 죄를 짓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기는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데 그것 또한 마음 편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러한 불균형 상태에 있는 인간을 하나님이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생명에 접붙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단번에 중생과 칭의로서 해결하시지만, 그 생명을 계속 누리면서 하나님이 기대하신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은 이 세상에서 성화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에 대한 놀라운 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이러한 성화의 길이라고 하는 과제를 주심으로써 인간은 구원을 받은 다음에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까 나는 완전히 자유고 해방이고, 용서도 받았고 생명과 사랑도 받았으니까 나는 이제 완전히 자유다,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더 많이 의지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놀라운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의 한계를 깨달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시는데 그것이 우리가 회심하기 전에 주님을 의지하였던 것을 자꾸 반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심하기 전에 나는 정말 아무 희망이 없구나. 나는 이제 하나님을 멀리 떠났고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고, 나는 영원히 죄를 지어 지옥 백성이 지었구나. 구원 받기 전의 절망감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었던 것처럼 그 때 그 절망감이 굉장히 큰 것이었는데 구원받고 난 후에 느끼는 그 절망도 그것 못지않습니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합니다. 선을 행하기를 원하는 소원은 내게 있지만, 그러나 악을 행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 내리오 할 때에 구원받은 자로서 사도바울은 지금 자기 안에 있는 옛 사람의 죄 된 본성 때문에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깊은 탄식할 때의 그 절망감이 처음 예수를 믿을 때의 절망감 못지않은 절망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다시금 깊이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구원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자기가 성화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개가 같은 구원이니까 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화에 대한 진정한 갈망이 없을 때 그 사람이 과연 중생하고 칭의를 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원리적인 회의를 우리들이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되는 것을 오늘 성경은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음, 이러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거룩하다고 하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데 이 거룩함이 하나님께 적용될 때와 우리에게 적용될 때에는 각각 의미가 다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 적용될 때에는 하나님이 존재에 있어서는 모든 피조물 위에 드높고 높으시도다 라는 의미이고, 도덕적으로 적용될 때에는 모든 인간들의 덕에 비해서 하나님의 덕스러운 성품은 무한히 높으시다 라고 하는 두 가지입니다. 그래서 존재에 있어서의 초월성과 도덕에 있어서 완전성입니다. 존재적 초월성과 도덕적 완전성, 이렇게 두 가지를 외우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거룩하시다 라고 할 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라고 할 때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 반응이 아주 확실할 때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된 사람입니다. 그 반응이 희미할 때 우리는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라 불결한 상태에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똑같은 존재적 초월성에 대한 반응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은 무한하고 높고 위대하시고 초월적이시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 아무 가치가 없는 티끌 같은 인간일 뿐이다.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는 하나님에 비하면 정말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라는 것을 정말 깊이 인식하고 자신이 체득하는 그 만큼이 그가 거룩하게 된 증거인 것입니다.
얼마 전에 미국에서 공부하던 사람이 와서 물어봅니다. 목사님 요새는 무슨 생각하고 지내십니까. 무엇을 연구하냐는 질문일 것입니다. 연구고 뭐고 요새는 하도 바빠서 제대로 하는 것도 없지만, 티끌 콤플렉스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나는 온 우주 가운데서 진짜 티끌일 뿐이구나. 나라는 존재는 티끌은 하나님께 손해라도 안 끼치지, 티끌 같은 존재일 뿐이다.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무한히 영으로 수렴하여 거의 없는 것 같은 것. 그 하나님의 창조하신 세계에 대한 지식의 바다에서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주 티끌만한 그 존재, 티끌만한 지식, 그것만 생각한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존재, 그러한 자기 존재에 대한 미천한 인식, 미천하다 라고 하는 인식, 이것이 바로 인간의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해서 올바르게 반응하는 것만큼 그 사람이 가진 거룩함의 척도가 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하나님의 도덕적인 완전성과 자신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다가 이제 그물을 거두고 실패한 채로 그물을 거두려는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 하셨습니다. 진짜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물이 뜯어질 정도로 엄청나게 고기가 잡힌 것입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보인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진짜 재수 좋은 날이다. 아, 고기가 진짜 많이 잡혔다.
(예화) 옛날에 속초 밑에 고성에 집회를 한번 갔는데 한번은 어부 선장하시던 분의 집에서 아침 식사 대접을 받았는데 그 분이 그랬습니다. 자기 동네에서 예수 잘 믿었던 집사 한 사람이 있었는데 진짜 고기가 그렇게 안 잡히더랍니다. 교회는 새로 진다고 했답니다. 집사라서 건축헌금은 해야겠는데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 정말 한번 고기를 잡히게 해 주십시오. 이미 벌써 수많은 배들이 지나갔는데 못 잡았습니다. 그런데 무슨 음성을 들은 것은 아니고, 저 쪽으로 가면 고기가 있을 것 같다. 상식으로는 안 맞는데 어쨌든 감동이 와서 그물을 던진 것입니다. 4980마리의 고등어를 한 번에 낚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그것 한번 잡고 나서 전국으로 간증을 하러 다니고 있습니다. 무슨 간증을 하러 다니는지 빨리 고기나 계속 잡지. 4980마리를 공판장에 가서 팔아서 건축헌금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쨌든 엄청난 고기가 잡혔을 때 베드로가 보인 반응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주님께 무릎을 꿇고 주여 나를 떠나십시오. 나 같은 사람과 가까이 계시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나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느끼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다가오는 것이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마치 자기가 바깥에 있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자기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예화) 요새 월요일마다 신학생들이 와서 공부를 하는데 고린도전서 13장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20개를 들었더니 20개에서 사랑의 속성이 끝났습니다.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그런데 이제 다들 질문이 있는 것입니다. 목사님, 과연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언제나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여러분은 죄인이고 불완전하지만 여러분도 딱 한번은 그러한 사랑을 한다. 한번만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고 일평생 그러한 사랑을 계속 해 왔다. 언제나 오래 참고 언제나 온유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선의로 해석하고 기다려주고 견디고. 누구한테? 자기한테. 자기한테는 그렇게 한 것입니다. 자기한테는 그렇습니다. 집에 가서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나 오래 참습니다. 모든 사람이 못된 녀석, 못된 녀석 그러는데 수 많은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데도 괜찮아, 괜찮아. 기다려줄게. 사람들이 못된 인간은 혼내야 된다고 욕을 합니다. 그런데 항상 변호해주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어. 너가 너무 약해서 그래.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서 그래. 다른 사람이라면 더 했을 거야. 위로하는 것입니다. 한 번도 자기 자신을 배반하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가 이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일흔 번에 일곱 번씩 남을 용서해 줄 수 있느냐고 묻지만 우리는 항상 그렇게 하면서 우리 자신을 대해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합니다. 남에게는 어림없습니다. 어림없습니다. 건널목을 건널 때에는 기다리고 있다가 파란불이 바뀔 때 딱 건너갑니다. 차가 확 오다가 끽 하고 섭니다. 자기 말야. 어디를 말야. 보행자 우선이지 말이지. 건널목에 파란불이 켜졌는데 째려보며 말이지. 어떤 사람은 바퀴를 발로 뻥 차고 갑니다. 그 다음에 자기가 운전을 합니다. 그러면 이제 파란불 켜졌으면 빨리 빨리 건너가면 되지, 여기가 무슨 놀이터야? 흐느적. 자기 입장에서 수시로 바뀌는 것입니다. 언제나 자기편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기가 비천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 거기에서 탈출해서 바깥에 와서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너 이제 봤더니 틀렸다고 고발을 하는 것입니다. 너는 인간이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다. 이 속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자기와 딱 아삼육이 되어서 돌아다니는 것이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너는 틀렸어. 내가 왜? 너는 틀렸어.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춰 보았을 때 너는 틀렸어. 그러한 것들이 딱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떠나서 이야기해도 가장 어려운 것이 반성입니다. 반성은 자기에서 이탈해 나와야 합니다. 자기가 아닌 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냉혹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쉽습니까. 그래서 옛 성연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일일 삼성이면 그 마음은 명경지수라고 했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반성하면 인간의 마음이 맑은 거울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울과 같이 되기는커녕 명경지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호수의 물이 하나도 안 흔들립니다. 햇살이 쫙 비칩니다. 이것이 환타지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두 개의 나무가 마주보고 서 있는 것입니다. 물 위에 쫙 어려서. 그런데 소용없습니다. 보트 한번 지나가면 다 깨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덕이 높고 자기 절제가 뛰어난 사람들이 반성이 가능한 것이지, 반성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반성 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한방 들이 받으면 아파서 저 인간이 왜 이럴까. 무엇을 잘못했나. 못된 인간은 계속 다른 사람을 반성시키고, 자기는 계속 반성 안하고 다른 사람들을 반성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도 교회 성화에 기여는 하겠지만, 상은 없습니다. 본인이 의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은 없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거룩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비참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흠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흠이 없다는 것은 결점, 결함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과일이 큰데 사과, 요새 진짜 좋은 사과들 많이 나옵니다. 배도 그렇고. 그런데 살짝 썩었습니다. 썩은 비율로 따지자면 1/100도 안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사야 맛있습니다. 그것만 도려내면 맛있습니다. 가격이 곤두박질칩니다. 흠을 하나님이 없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서 이렇게 온전한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시려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화목 되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룰루랄라 하면서 다니는 사람은 그 화목의 목적과 하나님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서부터 죄 많은 세상, 지옥세상에서 보면 예수 믿고 구원 얻은 것이 끝일지 모르지만, 천국에서 보면 겨우 어둠속에 있다가 달리기를 하겠다고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흑암에서 내가 나오게 되었다는 것 때문에 과거를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감격과 함께 때로는 자신을 이탈해서 저 천국에서 자기 자신을 보면서 이제 겨우 믿음이 시작되는구나 라고 보면서 그러면서 여기에서 오는 감사와 기쁨, 여기에서 오는 떨림과 두려움이 함께 만나야지 이게 온전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세상에서 참된 신자를 만드시는 방법이 결국 우리의 본성 안에 깃들여 있는 옛사람의 본성들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의 감화를 받게 하고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셔서 서서히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도록 만드시는데, 이 참된 신자가 되어 감으로써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베드로후서 5장 18절에서는 은혜와 진리 안에서 그리스도 예수께 까지 자라가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은혜, 이것은 사랑이고 진리, 이것은 지식 그야말로 진리입니다. 그 진리와 사랑, 이 두 가지가 진리는 또한 생명입니다. 생명과 사랑, 진리와 사랑, 진리와 성령,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이 두 기둥이 항상 함께 가고 이 사랑은 하나님의 의지라면 이 지식은 하나님의 지성입니다. 진리, 지식, 생명, 그 다음에 지성, 그 다음에 은혜, 사랑, 하나님의 의지 이렇게 두 축으로 갑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지성과 그 다음에 의지가 하나님께 감화를 입어서 지성은 명료하고 지식으로 풍부해지고, 가슴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함으로 창조의 목적이 무엇인지 분간하여 알고 그 다음에 이 속에서 이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실제적인 사랑의 감화들이 이 속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장의 단계에 있어서 점점 더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영적인 성장이라 부릅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는 완전한 인간, 하나님이 맨 처음에 창조하셨던 아담과 하와와 같은 완전한 상태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지막에 우리가 죽는 그 순간에 우리의 성화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은 많이 성화된 사람이 있고, 덜 성화된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사람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많이 성화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큼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행복을 누리고 그 은혜와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자신의 삶에서 기쁨이고 행복인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것만큼 고통을 받고 괴로움 속에서 살면서 인생의 날들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앞의 사람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고 후자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슬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불화했던 우리를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으로 화목하게 하신 이유입니다.
B.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심
마지막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세우고자 하셨으니.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파라스테사이’라고 하는 단어인데, 파라는 옆이고, ‘스테사이’는 ‘히스테미’라는 동사에서 나왔는데 서 있다는 의미입니다. 곁에 서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곁에 세우고자 하시기 위함이다. 이것이 원래 히브리말로 ‘아마드’라는 단어인데 여러분, 시편을 보면 누가 하나님 앞에 서리요, 내가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 ‘선다’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그 동사의 대부분이 ‘아마드’라는 동사입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서리요 라는 것은 견딘다는 의미입니다. 산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올바르고 인정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견딜 수 있지만 악인은 그럴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옥 광산을 합니다. 광산에서 옥을 많이 캐서 사우나도 만들고 침대도 만듭니다. 신문에 보니까 뭐라고 나왔는가 하면 옥에는 신비한 힘이 있는데 악한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빨리 죽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별로 믿지는 않지만, 악한 사람은 혹시 옥반지라도 끼면 무엇인가 전자가 나와서 오래 살 것이라고 하지 말고 빨리 죽으니까 악한 사람은 옥을 만지지도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그 이야기가 믿지는 않지만 속설로 조상들이 옥이라는 하나 가지고도 신성하게 여겼다면 그러면 하나님이 그 사람 옆에 혹은 앞에 있다고 할 때에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 앞에 세운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예전에는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 등 뒤에 서서 악을 행하고 하나님을 미워하며 살던 사람이었지만 이번에는 하나님 면전에서 살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 이제는 파멸의 대상이 아니라 기쁨과 사랑의 대상이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이제 주님과의 화목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그 은혜와 진리, 사랑과 하나님의 생명 때문에 주님 앞에서 주님이 의도하신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멀리 떠나 불화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 시켜 주신 것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그러면 결론적으로 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원래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불화했던 자식들이고 하나님께 모질게 대들고 도전하던 자식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극히 뛰어난 은혜와 사랑으로 너희를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 주셨다. 이것은 너희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계획대로 살도록 온전한 인간으로 만드셔서 이제는 하나님 등진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 하나님 앞에 사는 기쁨을 누리며 주님이 우리를 창조하고 구속하신 의도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라. 이것이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5.견고함과 신자 됨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며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골 1:23)
녹취자 : 김세나
몇 주에 걸쳐서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통한 화목이 왜 인류에게 필요했는가에 대해 말씀을 드렸고 지난 시간에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재물로 주시기까지 하나님이 당신을 버리고 떠난 인간과 화목하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렇게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을 통해 화목하게 만드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우시기 위하여 그러한 화목을 이루셨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고 그 구원하신 계획을 따라 우리가 거룩함과 흠 없음, 책망할 것이 없는 존재가 됨으로써 창조 시에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참된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고 창조의 계획을 따라 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자신에게는 행복이요, 함께 살고 있는 인류에게는 그들을 하나님 앞에 돌아가게 하는 등불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 영광, 자신에게 행복,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 기쁨이 되는,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로 인하여 하나로 만나게 된다는 말씀을 여러분들에게 드렸습니다.
Ⅰ. 본문 이해
그런데 오늘 23절에서 사도바울은 일어나기 어려운 것처럼 안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에 혹시 일어난다면 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해서 23절을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만일 이렇게 하면 그렇게 하리라. 그리 하리라. 즉 무슨 뜻입니까. 만일 이렇게 너희가 한다면 그리 되리라. 거룩하고 흠없고 하나님 앞에 책망할 것이 없는 신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구속하셔서 우리와 화목을 이루신 우리를 예수 믿게 하신 궁극적인 계획이 성취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라는 가정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은 받았지만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구원의 계획대로 살지 못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가정법 자체가 우리에게 아주 강력한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오직 행위나 공로나 우리의 의로움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것이지만, 이제 구원을 얻은 후에는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고 사는 백성들로서 그 신앙과 삶에 있어서 언약의 원리를 따라야 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신앙과 순종입니다. 신앙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모든 것 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반응이고 순종은 그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동력삼아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표준과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하는 생활을 살아가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참된 신자로 변화되어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문제가 뭐냐 하면 어쨌든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자기에게 불리하고 힘들고 희생이 뒤따르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그리고 쉽게 할 수 있는 길을 찾습니다.
(예화) 운동이 좋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압니다. 그리고 진짜로 큰 역기를 번쩍 번쩍 들고 근육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존경스럽기까지 합니다. 운동은 해야 되겠는데, 힘을 쓰는 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을 위한 헬스 센터가 등장하였습니다. 그것은 passive 운동 센터입니다. passive 운동 센터. passive 라는 말은 수동적이란 의미입니다. 사람을 기계에 묶습니다. 그리고 기계가 다리 찢기 운동, 손 올리기 운동을 합니다. 이 기계는 독일에서 운동은 해야겠는데 반신불수가 되거나 중풍에 걸려서 몸을 못 움직이는 사람들을 운동시키기 위해 팔, 다리를 묶고 passive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0대 젊은이들이 많이 온 답니다. 재활치료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이 아주 돈 많은 사람들이 하는 운동이 된 것입니다. 뭐냐 그러니까, 헬스클럽을 수 없이 끊는데 1년치 끊으면 1달 다니면 땡이고, 1달치 끊으면 3일 다니면 땡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괜찮다는 것입니다. 6개월째 한다는 것입니다. 힘이 안 드니까. 힘만 빼고 가만히 있으면 기계가 알아서 해 주니까 팔 운동, 다리 운동, 몸통 운동 해 주니까. 운동의 효과는 있냐 하니까 안 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면서 눈에 띄는 효과는 없다고 합니다. 당연합니다. 사람들은 많이 보는 사람들은 50%, 적게 보는 사람들은 20-30% 로 본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것이 어디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이래야 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역기가 달려서 이렇게 합니다. 줄만 안 나오게 인증샷 찍으면 진짜 역기하는 것 같지 않겠습니까. 사실은 역기에 매달려 있는것인데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청년이 인터뷰를 하였는데 6개월이 되었는데, 태어나서 헬스클럽을 6개월 다닌 것이 처음이라는 것입니다. 가면서 기대감이 있다고 합니다. 힘이 안 든다. 그러면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지금 힘이 안 든다고 가르쳐 주는 그러한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입니다. passive 신앙센터. 성화, 사람 사서 할 수 있습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이제 그렇게 우리를 초청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우나에 들어가서 가만히 앉아서 여성들이 수다 떨고 이야기 하면 땀이 떨어지는데 그게 무척 좋은 줄 압니다. 그런데 컵에다 받아서 분석해 보면 거의 맹물이랍니다. 그런데 헬스클럽에서, 혹은 화단을 가꾸다 보면 땀이 뻘뻘 흐릅니다. 그 속에 보면 중금속이 섞여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로봇 콜만이라고 하는 학자가 이야기 했습니다. 사도시대 이후로 교회는 쉬운 선교의 길을 끊임없이 찾아왔으나 선교의 모든 지름길은 거짓이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 뭐냐 하면 신앙생활에 있어서 기독교 2천년 역사 이래로 언제나 희생과 힘듦이 없는 쉽고 거룩한 신앙생활의 길이 있는지 애썼으나 그러한 길은 없었다. 그러한 길을 발견했다고 큰 소리로 외치고 전단지를 흔든 사람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그러한 일을 이단들이 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 만일 이라고 하는 가정법의 접속사가 주는 이 의미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아주 많습니다. 어떻게 만일이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예수를 믿기만 하면 저절로 거룩해져 갈 것이고, 죄와의 어떠한 싸움도 필요 없고, 순종하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필요 없다라고 주장하는 율법 폐기론이 교회 역사 속에서 심심하면 나타났고 지금도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는 이제 쉽게 신앙생활할 수 있는 곳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Ⅱ. 그리스도를 닮게 하심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사도바울은 그렇게 너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이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 없는 자로,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닮은 자로 너희들을 만드시려고 하는데 세 가지 조건을 통해서 그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A. 믿음 안에 거함
첫째는 “믿음 안에 거한다.” 입니다. 성경 안에서 “믿음 안에서 거한다.”라고 하는 표현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한다는 표현 다음으로 많이 나올 것입니다. 믿음안 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에서 믿음이라고 이야기 할 때, 그 믿음은 거의 99% 이상이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입니다. 예수.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경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잘 깨닫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충만한 믿음을 갖고 성경을 읽는 것, 설교를 듣는 것, 그 때에 그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신랑의 음성이 되는 것입니다. 신랑을 사랑하면 음성이 들릴 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신랑이 싫으면, 신랑이 싫은 사람 많이 만났습니다. 신랑이 싫으면 냄새도 싫고 신발 벗어 놓은 것도 싫고, 목소리는 더 싫다고 합니다. 얼굴은 더 싫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를 진실하게 믿는 그러한 신앙의 태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쫙 빨아들일 수 있는 영적인 흡입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을 배우고 할 때, 정말 그 맛이 꿀과 같다고 느껴지던 때가 언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가득해서 그래서 주님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꽉 차 있었던 때에 그 때 놀라운 흡입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쭉쭉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청소년 시절에 나라 전체가 가난했으니까 그렇게 잘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밤늦게 가서 밥 먹고 그러면 건강에 안 좋다고 하였을 때, 사실 그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우리는 그 때 먹으면 그 자체가 감사했으니까. 그러지 말고 우유 한잔과 계란 후라이 하나 해서 먹고 자라. 말도 안 되는 충고인데 생물 선생님도 그렇게 했어요. 중학교 3학년 때 아이들이 뱃살을 잡고 웃었습니다. 왜 웃었는지 아십니까. 우리 중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아이가 몇 명이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웃었습니다. 대박이 터진 듯이 웃었던 것입니다. 오늘로 말하면 이러한 것 아니겠습니까. 집에 가서 너무 이것 저것 마시지 말고 안심 스테이크 하나와 메론 하나와 산삼 주스 한잔 마시고 자라. 그 정도 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놀랍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키가 148cm이었습니다. 1학년에서 2학년 올라갈 때 159cm 2학년에서 3학년 올라갈 때 168cm, 그리고 3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 큰 키가 6cm밖에 안 되었습니다. 지금은 다시 줄고 있습니다. 1cm 줄었습니다. 그러니까 한참 자랄 때, 흡입력이 있어서 음식을 빨아들이듯이 할 때 쭉 자란 것입니다. 연조가 바닥에서 기는, 연조라는 것이 해당이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바닥에서 계속 기는 신앙생활 했던 사람들의 연조는 쓸모가 없고, 그 다음에 회심하자마자 말씀을 쫙 빨아들여서 충만한 믿음 안에 거하는 사람에게는 연조가 해당이 안 되는 것입니다. 중간 평균된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 오래 다니면 눈치도 좀 늘고 예의도 갖출 줄 압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연조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연조를 이야기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찬동하는 것입니다. 아, 그렇습니다. 주님 말씀이 맞습니다. 그리고 깊이 그 주님을 의지하고, 그 말씀을 신뢰하면서 순종하는 것, 이게 바로 믿음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 충만한 믿음 안에. 이 믿음 가운데 거하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하실 때 성령님께서 취향이 있으십니다. 취향. 그러니까 우리 모두에게 취향이 있습니다. 저 같으면 음식점을 간다고 할 때 컴컴한 음식점은 정말 싫습니다.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는 창문이 있는, 그리고 음식은 맛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깨끗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거의 용서해 줍니다. 그 대신 다음에 안 갑니다. 용서는 해 주지만 다시는 안 갑니다. 지저분한 것은 용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취향이 있지 않습니까. 자기 취향에 맞으면 한참 있고 싶고, 그러한 것입니다. 성령님도 우리의 마음 가운데 거하실 때 좋아하는 취향이 둘이 있으십니다. 그것은 믿음과 순종입니다. 마음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신뢰하는 마음이 많으면 많을수록 성령은 그러한 환경에 거하시기를 너무 좋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종하는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여러분들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거나 뭔가 소중한 것을 바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 때 생각해 보면 주님께 소중한 것을 바치고 난 뒤에 느껴지는 뿌듯함, 그러면서 이 마음속에 믿음이 생겨나는 것 같은, 믿음으로 무엇을 바친 것이 아니라 바치고 나니까 믿음이 생긴 것 같은, 정말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여러분들이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자매들이 이제 결혼하기 위해서 연애를 합니다. 오락가락 합니다. 100% 확신을 가지고 결혼하자고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누가 100%라고 이야기 할 수 있겠습니까. 만난지 1년, 2년 6개월 되거나, 국제결혼 같은 경우는 한번 만나고 결심을 해야 하는데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래도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나면 사랑했기 때문에 고백을 한 것이 아니라 고백을 하니까 이 속에 사랑이 확 차 오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좋아하시는 우리의 마음의 취향입니다. 그게 바로 믿음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신약성경에서 믿음이라고 나오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구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질서를 믿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B. 터 위에 굳게 섬
두 번째, 터 위에 굳게 선다고 했습니다. 이 터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에베소서 2장 20절에 보면 이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입니다. 그러면 사도들과 선지자들은 무슨 터를 마련했다는 것입니까. 사도들이 초대교회 성도들이 많이 준 헌금으로, 여기에서 선지자들은 신약의 선지자라고 봅니다. 신약의 선지자들이 엄격하게 말해서 선지자 직은 금방 사라집니다. 계시의 말씀이 완성된 다음에 사라집니다. 구약 선지자들과 연속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이제 구약선지자, 신약선지자 다 가리킨다고 해석을 해도 됩니다. 그런데 사도들이 먼저 나온 것을 보면, 이것은 이제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들과 선지자들, 선지자들은 권위에 있어서 두 번째입니다. 그 다음에 목사와 교사와 등등으로 나옵니다. 어쨌든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라고 하였는데, 이 분들이 무엇인가 헌금을 거두어서 후대의 교회를 위해서 건축할 수 있는 토지를 사 놓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의 터, 선지자들의 터 할 때 이 터는 복음도리의 기초를 가리킵니다. 복음도리의 기초를 가리킵니다. 이 터 위에 굳게 선다고 이야기 할 때 이 터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속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역사의 흐름 안에 있는 신앙입니다. 즉, 구약에서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거룩한 보편 교회와 교부들과 이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강물처럼 흘러 내려오는 그 신앙의 물줄기 하류에 우리들이 있는 것입니다. 상류로부터 내려와서 하류에 우리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역사적인 신앙의 흐름의 물줄기에 하나를 보탬으로 다른 세대가 흘러가면 또 다른 물줄기를 누군가에게 보내는데 원류는 하나인 것입니다. 강이 저 위에서는 좁게, 어떤 때는 가장 자리에서 많이 지류들이 들어오고, 혹은 다른 개천으로 빠져 나가기도 하지만 그 원류는 하나인 것처럼 우리의 신앙은 어느 날 하나님께로부터 장로교 칼빈주의, 대한예수교 장로회 너희들은 이것을 믿어라 털렁 내려 주시면서 이것 이외에는 가짜라고 하나님은 그러신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무슨 문제가 나오느냐 하면 신앙에 있어서 보편성과 개별성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의 보편성은 아주 쉬운 이야기입니다. 귀담아서 잘 들어 보십시오. 신앙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토마스 아퀴나스만 해도 자기 죽고 나서 몇 백 년 있다가 루터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종교개혁을 해서 개신교라는 것을 생겨나게 할 줄 몰랐습니다. 당연합니다. 그 이전의 사람들은 더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시대이건 이단은 항상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제도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 같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분류합니다. 첫째는 이교입니다. 이교. 이교는 아예 처음서부터 기초가 다른 것입니다. 교가 처음서부터 다른 것입니다. 이교. 그 다음에 두 번째는 유대교가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신학적으로는 이교가 틀림없는데 역사적으로는 이교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만큼 기독교에 뿌리를 제공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분류할 때 이교도들, 유대인들, 유대인들을 포함하지 않고 이교도들, 유대인들이라고 구분하였습니다. 이교, 유대교. 그 다음에 또 뭐가 있느냐 하면 이단이 있습니다. 이단. 이단은 뭐냐 하면 바탕에 있어서는 기독교와 비슷하게 출발한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다른 종교처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이단입니다. 그런데 기초도 똑같고 쌓아 올린 것도 비슷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형제라고 안 부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상종도 안 하겠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을 열교자라고 합니다. 거기에서 열은 찢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우리 이번에 교단에 찢어져 버렸습니다.’ ‘왜 그러셨어요?’ ‘아, 그 자식 마음에 안 들어요. 순 나쁜 놈들이야!’ ‘믿는 게 이쪽 교단과 다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보다 더 잘 믿습니다.’ 그게 바로 찢어질 명분이 없는 열교입니다. 열교. 이교자, 유대인, 이단자, 열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사람이 어느 시대에서 존재하였습니다. 그래도 역사적인 물줄기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쭉 흘러 내려온 것입니다. 그러면 그 분들은 우리의 신앙의 조상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었는가 하는 것을 면밀히 살피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지금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것도 있고,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예수 믿으시면 잘못 믿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요소들이 함께 섞여서 흘러내려 오는 것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한하기 때문에 그 때는 깨닫는 바가 그 만큼 밖에 안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 역사의 과정에서 보면 이단이 기독교 발전에 엄청나게 공헌을 합니다. 왜 공헌을 하는갸 하면 이단이 나올 때까지는 문제가 안 되었는데 이단이 나오니까 분명히 해야 할 이유가 생겨납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두루뭉술하게 믿던 것들을 정확하게 분류하고 세분화해서 이단들의 공격을 막아 내면서 교리가 아주 정교해지고, 그러한 역사적인 발전 과정을 최소한 1500년 이상 밟아오면서, 1800년 1900년 이상 밟아오면서 오늘 우리가 믿는 신앙고백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단은 최고의 공헌자입니다. 정통 교리를 형식화 하는데 있어서 이단은 최고의 공헌자입니다.
좋은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아리우스라는 인물이 나타납니다. 초대교회 때. 이 사람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가까운 피조물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아니다. 하나님은 오직 성부 하나님 하나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왔는데 플라톤 철학에 보면 원래 있었던 것에서 나온 그 무엇은 어떠하든지 간에 나온바 된 것은 그 나온 것 그 원천만 못하다는 교리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만 못하다. 그러면서 이제 고수합니다. 처음에는 다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은 하나님보다 못하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또 다른 위격이라는 것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그것을 아주 날카롭게 비판하고 들어와서 예수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래서 유명한 이야기가 예수님의 본질은 성부 하나님과 똑같은 것이 아니라 유사하다. 엄청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황제가 하도 골치가 없으니까, 왜 저렇게 싸우냐 그랬더니 글자 딱 하나 영어로 말하면 I(아이), 이것을 희랍어로 ‘이오타(ί)’라고 합니다. I, 이오타(ί) 이것 하나가지고 싸우나이다. 왜 그까짓 것 가지고 싸우냐고 하는데 희랍어로 ‘호모 우시우스’, ‘호모 이 우시우스’입니다. ‘호모 우시우스’는 성부와 성자가 같은 본질이라는 의미이고, 그 속에 ‘이’가 들어가면 ‘호모 이 우시우스’ 그러면 성자의 본질은 성부의 본질과 비슷하다는 의미입니다. 글자는 하나이지만, 이것은 기독교에 있어서 운명을 가르는 양보할 수 없는 대접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 교리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발전과정을 통해서 며칠 밤을 새도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일들이 일어나면서 교리는 변하기도 하고, 분명해지기도 하고, 두루뭉술해 진 것이 선명해 지기도 하면서 내려오면서 그것을 선명하게 하려다 보니까 그 다음에 의견들이 갈라지기 시작하면서 교파라는 것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위의 원천들이 어떻게 있었는가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보편성이라면 이번에는 그것만 강조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오늘날 굉장히 많은 것들, 심지어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이야기 하는 우리가 잘 믿으면 하나님처럼 거의 똑같이 된다고 하는 이단이 그 때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폭이 너무 넓어져서 오늘날의 수많은 이단을 품에 끌어안을 수 있을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믿어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이 그러나 그것들이 영향을 주면서 오고 역사적인 발전 과정에서 우리의 신앙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뿌리를 안다는 것은 너무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나 터툴리안이나 이야기 하니까 읽는 분들 가끔 보았습니다. 읽을 때는 항상 조심을 해야 합니다. 읽을 때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모든 책을 읽으면서 우리 담임 목사님은 이 모든 책을 100% 다 승배 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도 마찬가지이고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별성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장로교인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의 수많은 집단들이 있었는데 제네바의 칼빈이 생각하였던 기독교의 총체적인 교리의 체계들을 우리들이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제 웨스트민스터에서 작성된 그 교리들을 우리가 받아들인다. 등등의 신앙고백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개별성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모두 알지 못하지만 우리는 어쨌든 이 신앙이 다르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길도 있지만 이렇게 믿는 것이 하나님을 그래도 비교적 성경에 기록된 기독교 신앙을 찾아가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우리의 이 신앙고백을 우리 입장에서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교회에서 여러분들이 개혁교리를 공부하고 기독교강요를 읽는 것을 권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그것이 모두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앙에 있어서 우리 개별적인 우리의 입장입니다. 이 쪽에 개별적인 것이 있고 이 쪽에 보편적인 것이 있어서 수시로 대화를 합니다. 이것으로 이것을 해석하고 그 다음에 이 보편적인 것으로 개별적인 것들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되겠는지 역사적인 맥락을 고려하면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우리들이 원천으로부터 개별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흘러나오는 과정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에 대해서 우리들이 공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우리나라 국민이 되었으면 국사 공부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 때는 국사 공부 정말 열심히 하였습니다. 요즘은 물어보면 아무것도 모릅니다. 삼국시대부터 왕조도 못 외웁니다. 고려가 먼저인가 조선이 먼저인가. 태조 왕건이 고려시대인가, 조선시대인가. TV에 나온 것은 조금 압니다. 연속극에 나온 것은. 그런데 연속극에 안 나온 것은 모릅니다. 뿌리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꾸준히.
여기에서 터 위에 굳게 선다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대는 변한다. 그래서 너희들이 믿고 싶어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에 주어진 진리의 터와 복음의 교리가 무엇인지를 확신하고 그 위에 그것이 옳다고 하는 터 위에 흔들리지 않고 서라.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설 터가 없는 것입니다. 없으니 어디에 뿌리를 박고 서 있어야 되는데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장로교회 다니다가 짜증나면 순복음 교회로 순복음 교회 가다가 너무 시끄러운 것 같으면 성결교회로, 성결교회 가서 맨날 듣기 싫으면 침례교회로 그렇게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자기가 서야 할 터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이 신앙의 터가 무엇인가. 그것을 보편성과 개별성의 원칙에 의해서 교리 공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교리만 가르치냐고 하는데 언제 교리만 가르쳤습니까. 그리고 배우기는 또 배웠습니까. 와서 배우지도 않으면서. 교리반 교인들 3200명 중에 교리반 수료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마 2000명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공부인데 그러니까 서야 할 터가 없으니까. 굳게 서라고 하였는데 터가 있어야 굳게 서지. 밧줄에 매달려 공중에 있는데 어떻게 굳게 섭니까. 밧줄이 계속해서 흔들리는데 어떻게 굳게 섭니까. 흔들리지 않는 터가 있어야 하는데 지식이 없는데 어디 굳게 섭니까. 교리반 안 하신 분들은 각성하고 회개하고 지금 평일 교리반 모집하고 있다고 하니까 얼른 들어가서 하고, 우리 교회 같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평일도 도저히 시간을 못 냅니다. 주일은 지방에서 내려와서 일찍 가야 됩니다. 그러면 온라인 교리반도 있습니다. 그러한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온라인 통장도 아니고 온라인 교리반. 그래서 작년에 한 40명 수료했습니다. 그렇게라도 공부해야 합니다. 터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교회는 계속 다닙니다. 거룩함도 없고 다닐수록 흠과 티가 더 많아집니다. 그리고 책망할 것도 많아지고 종류도 다양해진다 말입니다. 왜 그럽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없고 자기가 믿는 신앙이 무엇이고, 기독교는 이렇게 믿음으로써 기독교인이 된다라고 하는 기본적인 확고한 터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터에 대한 분명한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에 다녀도 거룩해지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있다가 재미난 이야기 하면 눈 게슴츠레 눈 떠보고, 교회 다니다가 자기 마음에 끌리는 비슷한 취미활동 같은 거 하면 반짝 하면 놀아보다가 끝나고 나서 복음의 본질로 돌아가면 또 다시 시무룩해지고. 이게 오래 다녀도 거룩함도 없고 다니면 다닐수록 때가 묻고 그 다음에 책망할 것도 많은 사람이 되어 가니까 예수 믿어도 무슨 문제가 생깁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못 돌립니다.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도 안 행복합니다. 옆에서 보는 사람도 안 행복합니다.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무엇인가 빛을 나타내야 할 사람들이 이웃에게 계속 손해나 끼치고 문제나 일으키니까 이게 빛이 안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한, 요새 TV에서 가끔 나오는데 누구를 위한 신앙생활입니까. 누군가는 이익을 받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누구입니까. 하나님도 아니시라고 하고, 이웃도 아니라고 하고. 교회도 그러한 사람은 힘듭니다. 어떻게 합니까. 어차피 성화의 삶은 passive 성화가 없습니다. 자기가 거기에 참여해야 합니다.
C. 복음의 소망에 확고함
마지막 세 번째,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며. 그러면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는데 소망이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을 찾아보니까 보다 나은 상태를 바람. 그게 소망입니다. 지금 상태는 충분히 만족이 안 되니까 보다 나은 것을 바람. 보다 나은 상태를 갈망함. 이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소망. 여러분들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소망, 그 중에서 특별히 마음은 소망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집 없는 사람은 24평 아파트라도 살아보는 게 소망이겠습니다. 결혼 적령기를 넘은 사람은 그래도 한번 시집 가보는 게 소망이겠습니다. 또 가난한 사람들은 돈 좀 많이 벌어 보는 게 소망이겠습니다. 그러한 생각할까봐 앞에다가 말을 붙였습니다. 그러한 것 말고 복음의 소망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복음의 소망. 그러면 복음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무엇입니까. 영어로 네 단어라고 했습니다. Jesus died for us. 예수 우리 위해 죽으셨다. 한국말로도 네 단어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할 때 위하여가 소망이 됩니다. 어떻게?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셨다. 우리를 대표해서 죽으셨다.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죽으셨다. 그 이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죽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 사도들이 십자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나무에 달려 죽으신 표이며,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의 증거라고 하는 것을 깨달았을 때 소망이 확 밀려 왔을 때 그 소망은 예수의 죽음과 반대된 예수 부활의 소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저렇게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죽을 자들이 아니며 이 세상에서 힘을 다하여 예수를 위하여 죽어도 다시 살 자들이라는 이 부활의 소망이 그들을 담대하게 했고 이들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눈물 흘리게 만들었고 이 복음을 들고 얼어붙은 동토의 땅에도 이 예수의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고 하는 결의를 가지게 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의 소망을 신약성경은 네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는 부활의 소망입니다. 사도행전 23장 6절에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것이 우리에게 곧 부활의 소망이 되었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서 우리들이 소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종 그러한 생각합니다. 장례 지내러 가면 소망을 느낍니다. 얼마나 슬픕니까. 그런데 어떤 때는 부럽기도 합니다. 이 분은 이 세상에서의 고단한 삶을 모두 마치고 부활의 소망을 품고 영광의 그날을 기다리는 휴식 속에 들어갔구나. 이미 하늘나라에서 부활하지는 못하였지만, 그 소망을 바라보는 부활의 기쁨이 있구나. 골로새서 1장 5절에 보면 이 복음의 소망은 하늘에 쌓아둔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결코 공평한 대접을 완전히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위해 많이 고생하고 고난을 당하다가 죽었는데 마지막까지 고생만하다가 죽을 수 있고, 주님을 위해 정말 충성스럽게 살았는데 영광대신 모함을 받고 때로는 오해를 당하여 순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대접받지 못하는 삶은 모두 하늘에 상급을 쌓아둔 삶입니다. 그 소망이 복음의 소망입니다. 복음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살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 자신, 그 그리스도가 어떠한 그리스도이냐 하면 열방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입니다. 이 분에 대한 소망이 로마서 15장 12절 같은 곳에서 강조됩니다. 지금은 그리스도가 충만히 이 세상을 다스리시지 않습니다. 수많은 대적자들을 추수 때까지 놔두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상태로 만족이 안 되어서 보다 나은 상태를 갈망하고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방을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에게 그 영광스러운 통치를 대망하며 소망을 받는데 이것이 바로 다름이 아닌 복음의 소망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디도서 1장에 보면 영생의 소망입니다. 영생은 어떠한 소망입니까. 지금 이미 우리들이 그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고 지금은 영원한 생명이 방해를 받지만 마지막 그 날에는 영원한 생명을 온전히 누리게 될 그 참된 소망을 바라보면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바라는 복음의 소망입니다. 이 소망에 대한 확고한 생각을 가지고 그 소망을 앙망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을 토대로 거룩해져가고 흠이 없어 가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 감으로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이루고자 하시는 의도대로 우리들이 변화되어 갈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흔들리는 사람들에게는 열매가 없습니다. 정말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참고 견디는 이야기를 세 번이나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위대한 속성에 대해서 마지막에 이야기 하는데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말하는데 이 견디다 라고 하는 단어가 희랍어로 ‘휘포메네’인데 이것은 군대용어입니다. 군대에서 진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그 때에 어떠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고 그 고지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휘포메네이’입니다. 견디는 것입니다. 게임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눈이 새빨갛게 밤새도록 하는 것을 견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걔네들은 공부를 해야지 견딘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고통이 없는 상태를 가리켜서 우리는 견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성화되어도, 그래서 그 찬송가에서 지워 버렸습니다. 교리적으로 잘 안 맞는다고 해서 지워 버렸습니다. 무엇이었는가 하면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 거기에 나오는 가사였는데 이러한 것이 나옵니다. 즐겨 고난 길가도록 나와 함께 하소서. 그것을 그렇게 번역한 사람은 진짜 그 길만 그렇게 가면서 즐겁게 살 수 있을까. 뭐가 이야기를 하려면 정직하고 진실하게 이야기 해야지 즐겨 고난 길 가게 하소서. 고난을 당하는데 주님을 위해서 인내하면서 주님이 주시는 기쁨으로 간다는 뜻이겠지만, 그러나 가사를 보면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이게 무슨 고행주의자들도 고행은 괴롭습니다. 즐겨 고난길 가도록 지웠습니다. 그렇게 되는 상태는 없습니다. 우리가 고난길이 좋아서 즐겨 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이 거기에 있으라고 하고 거기에서 살아가는 그것을 주님이 기뻐하시니까 그 길을 가는 것이지 고난길 자체가 좋아서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점에서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 있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힘든 것입니다. 여러분들 도망 치고 싶을 때 없었습니까. 어떤 자리에서, 내 맡겨진 일에서, 이 지위에서, 심지어는 아버지의 위치에서, 어머니의 위치에서, 혹은 아내의 위치에서, 남편의 위치에서, 딸의 위치에서, 아들의 위치에서, 회사 사장의 위치에서, 아니면 말단 사원의 위치에서. 그러한 때 없었습니까. 왜 없겠습니까. 언제나 있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 바로 다름이 아닌 흔들리지 않는 삶의 중요성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그래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매일 매일 단호한 결심, 내가 구원받은 의미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목적과 그리고 내가 어떻게 이 구원을 이루어 감으로써 이 세상에서 빛 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확고한 토대가 매일 매일의 단호한 결심, 자기 고백이 동반된 삶을 살아감으로써 이 견고함을 통해 진정한 신자됨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 받으실 하나님의 영광은 여러분들의 이 세상의 지위와 관련이 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존재, 인격, 진정한 예수의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거기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16.복음의 일꾼이 됨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며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골 1:23)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사도바울은 어떻게 해야지만 흔들리지 않는 신앙을 갖게 될지를 23절에서 말한 후에 다시 한 번 자신이 복음의 일꾼이 된 것이 바로 이 복음의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Ⅱ. 복음의 일꾼이 됨
그러면 오늘 사도바울이 복음의 일꾼이 된 것이 무엇을 통해서 복음의 일꾼이 되었겠습니까? 예전의 그는 장래가 총망된 지도자의 길을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야망이 시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의 일꾼이 된 것은 야망이 시킨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의 길에는 많은 영광과 유익한 것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동족들의 명망과 좋은 평판, 그리고 사람들에게 받는 존경과 어쩌면 권력도 그 안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일꾼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가 고린도후서 1장에서 고백한 바와 같이 그는 만물의 찌끼와 같이 여김을 받았고 살 소망이 끊어져 이제는 아무 희망이 없는 것 같은 낙심한 상태에 이르기도 하였습니다. 온갖 위험을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수없이 넘겼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일꾼이 된 대가였습니다. 그러니 유대 종교지도자의 길은 자기 스스로 좋은 평판과 명망과 좋은 대우와 권력을 위해서 자신이 택한 야망이었을지 모르지만, 복음의 일꾼이 된 것은 그러한 방식으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자신이 걸어가던 길의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여기던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들이 이단자들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하던 자들이라 굳게 믿고 그들을 박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자신이 박해하던 사람처럼 그는 변하고 말았고 자신의 박해받던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난 열심을 가지고 그리스도 복음의 일꾼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이 사람을 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하였겠습니까?
A. 그리스도를 앎
제일 먼저 생각할 것은 그리스도를 알게 된 것, 이것이 그를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한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같은 나사렛 이단자는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의 중심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의미를 깨닫게 되자 그는 창조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저 멀리 그의 시야에도 들어오지 않던 아득한 태초에 이루어졌던 창조의 의미는 창조를 직시함으로써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가 왜 하나님이면서도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는지를 알게 되었을 때 그 때 비로소 구속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왜 하나님이 이 인류를 구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를 탐구하였을 때 창조의 의미가 드러났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도 자기의 외아들을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다시 부활하시지 아니하고는 인류를 구속하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우주적인 놀라운 구속이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성육신과 관계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신비였고 비밀이었습니다. 그저 한번 슬쩍 보고 알 수 있는 그러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으로는 사람의 몸을 입은 30대 청년에 불과하였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은 물론이고 그 분 안에 깃들여져 있는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신 그 분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 위대한 구원의 계획과 창조, 그리고 위대한 종말까지 모든 해답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그렇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라고 불렀던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지혜는 단지 평범한 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이 세계와 인간과 그리고 이 세계의 창조와 구원과 종말에 이르는 영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원대한 지혜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종교들 중 이렇게 한 사람, 한 인물에 집중하고 있는 종교는 없습니다. 불교도 석가모니 없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마호메트교도 아마 마호메트교 없이 존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교도 공자 없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먹고 마시고 타락하고 쾌락을 쫓으면 충분히 행복하게 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를 물었고 이 세계의 기원을 물었고 그리고 마지막에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궁금해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든 비밀이 결국 인간에 의해서 밝혀졌습니까? 아닙니다. 유행을 따라서 어느 시대는 이런 사상이, 어떤 시대에는 이런 사상이 유행을 하였고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최종적인 해답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두 사람에 지혜로 찾아간 지혜이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지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렇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써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셨고 30년 동안 특별히 공생애 3년 동안 종처럼 낮아져서 불쌍한 죄인들을 섬기심으로써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야 할지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인간의 불행과 고통이 그 어느 근원에서 오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죄에서 건져 주시는지 보여 주셨고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당신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그 부활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는 만주의 주가 되어서 이 모든 세계와 인류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게 되셨습니다. 모든 창조로부터 구속과 마지막 완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류를 향한 계획이 하나님 안에 있었는데 하나님 안에 있는 이 위대한 계획이 무엇인지가 예수 그리스도,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한분에게서 모든 것이 풀려 나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까지는 복음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메섹에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을, 지혜를 알게 하였고 그 순간 그는 이 그리스도에게 붙들어 매이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B. 복음의 의미를 앎
사도바울은 또 한 가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진정한 복음의 의미를 알게 됨으로써 복음을 위한 일꾼이 되었던 것입니다. 예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믿는 경건한 종교를 훼방하는 이단자라고 굳게 믿었으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기쁜 소식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복음이 바로 기쁜 소리입니다. ‘유앙겔로스라(εὐάγγελος)’고 하는데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뭐가 그렇게 좋은 소식, 혹은 기쁜 소식입니까? 무엇이 그렇게 기쁜 소식입니까? 이 기쁜 소식이 기쁜 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 있는 인간의 형편이 나쁜 상태라는 것을 알아야지만 기쁜 소식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 캄캄한 어두움 속에 햇빛도 보지 못하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겨우 연명하는 고통스러운 죄수에게 석방이라는 소식은 그 어느 것 보다도 기쁜 소식일 수 없을 것입니다. 많은 인간들은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인간의 상태가 나쁜 상태라고 하는 것을 모릅니다. 특히 아직 젊기 때문에 육체의 자원이 많이 남아있을 때 잘 모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물질적인 자원이 풍족히 있을 때 인간의 비참한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 착각하여 잘 모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예화) 저는 젊었을 때 어른들을 보면서 정말 이해되지 않는 것이 여러 개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일 처음에 밥 먹고 이빨 쑤시는 것입니다. 왜 쑤시고 있나. 어떤 사람은 젓가락으로 쑤십니다. 뜻을 세우고 막 그렇게 공격하듯이 쑤십니다. 왜 저렇게 살까? 그리고 두 번째는 대머리가 벗겨지는 것. 왜 벗겨질까? 그리고 얼굴에 개기름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서서 자기 발가락이 안 보이는 것, 배 나오는 것입니다. 왜 나올까? 나는 그러한 것과는. 그리고 또한 이해 안 가는 사람, 허리 아픈 사람. 왜 허리가 아플까?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들을 하나씩 다 거쳤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이상하게 이 사이에 구멍이 생기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이빨이 다 썩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의사선생님이 쭉 진찰해 보더니 나이 들어서 잇몸이 약해져서 잇몸이 가라앉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좁쌀하나 간신히 들어갈 정도였는데 지금은 콩 하나가 들어갈 정도입니다. 그래서 분명히 ‘이것은 썩은 것이구나. 뽑아 버려야겠구나.’ 했는데 의사선생님이 썩은 것이 아니라 위에 있던 잇몸이 주저앉으면서 치아가 뿌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구멍은 점점 넓어질 것입니다. 빼 주십시오. 그랬더니 X-ray를 찍었더니 빼면 정말 좋겠는데 사랑니라 빼도 문제가 없는데 이게 사랑니가 횡으로 드러누웠다고 합니다. 이게 어금니를 지탱해 주고 있는데 이것을 빼면 어금니가 흔들려서 같이 빠질 수 있으니까 내버려 두랍니다. 구멍 뚫어진 것은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까 그냥 사십시오. 항상 지갑에 여기에다가 이쑤시개를 넣어가지고 다닙니다. 그래서 오해도 많이 했습니다. 나는 이쑤시개 꺼내려고 지갑을 꺼내는데 사람들은 돈 내려고 하는 줄 알고 괜찮다고 합니다. 이빨 쑤셔야 하는데 괜찮기는. 공격하듯이 이빨을 쑤십니다. 안 하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아침마다 머리를 감았을 때는 조금 낫습니다. 그런데 저녁 때가 되어서 떡이 져서 이렇게 보면 이게 저 아저씨가 누구인가. 사진 찍는 것을 참 싫어합니다. 어느 날 출판사에서 제발 사진 좀 찍어 놓으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사진을 쭉 찍었는데 그 사진을 가지고 와서 한참도안 침체에 빠졌습니다. 내가 이런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그전 까지는 로션도 안 발랐는데 그 후부터 로션을 발랐습니다. 이게 완전성으로부터 정말 멀어졌구나. 그리고 결혼하기 전에 허리가 27인치였습니다. 굉장히 날씬했습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30이 허리가 넘어갈 때 몇 주 동안 괴로웠습니다. 사람의 허리가 어떻게 30이 넘어갈까? 그런데 지금은 꿈입니다. 30이 되는 것, 그런데 죽을 때까지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에 어느 날 허리가 계속 아프더니 서재에서 책을 찾다가 툭 하고 쓰러졌는데 10cm도 못 움직이겠는 것입니다. 그대로 누운 채로 끌려가서 병원에 입원을 하고 그리고 휠체어를 타고 그리고 주일 저녁이면 휠체어를 타고 1층 로비에서 재정 결제를 하였습니다. 개기름도 어쩌면 그렇게 기름이 많이 나는지 모릅니다. 이제는 기름도 안 나옵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완전성으로부터 계속 멀어지면서 자원이 자기에게 충분히 있을 때에는 인간이 모릅니다. 풍족하게 사는 애들이 밥을 굶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습니까?
(예화) 유명한 이야기 있지 않습니까? 싯다르타가 왕궁에만 있다가 바깥에서 보고 왕궁에 누가 늙은 사람, 병든 사람이 왕자의 수발을 들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젊고 예쁜 사람들만 여자이건, 남자이건 생생한 사람들만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깥에 나와 보니까 콜록콜록 기침을 하고, 저것은 무엇인가 했더니 병드는 것입니다. 병드는 것이 무엇이냐? 저 사람이 왜 저렇게 지팡이를 지고 허리도 못 피고 걸어 다니냐? 늙은 것입니다. 늙은 것이 무엇이냐? 사람이 죽어서 슬피 우는 것을 보고 죽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에게 자원이 충분히 있을 때는 이게 가려져서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도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아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러한 일을 하셔서 부담스럽게 나는 괜찮다고. 날 위해서 구지 그러시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나쁜 상태인지 모르기 때문에 복음이 복음으로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원래 인간의 상태가 어떠한 상태였는가. 그리고 인간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고귀한 존재인가.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존엄하고 아름다운 존재인가 라고 하는 것을 깊이 생각하고 나면 오늘날의 이 죄의 사슬에 매여서 결핍 속에서 죄의 결과인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모든 삶은 너무너무 비참한 것입니다. 그 비참을 깊이 알고 났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 모든 비참함과 결핍으로부터 너희를 건져내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할 때 그것이 한없는 기쁜 복음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바로 하나님의 일꾼이 되었는데 복음의 일꾼이 되었는데 이것은 복음을 경험함으로써 일꾼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형벌 받아야 할 인류의 죄를 짊어지셨기 때문에 형벌을 당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의 죽음이 2천년 이후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그 어떤 것보다도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현실적인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이 저주하여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부활시키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바로 이 부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받으시고 만물을 자신의 발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위대하신 만군의 주가 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제는 그 예수께 전적으로 순종하고 자신의 인생을 그 분의 신비스러운 계획이 이 세상에 펼쳐져 가는데 이바지 하면서 살아야 된다고 하는 분명한 깨달음과 지식이 확실히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부활과 찬란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Ⅲ. 천하 만민에 전파됨
그리고 그는 이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자신의 인생의 최고의 보람이고 그리고 인류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사건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도 네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는 너를 저주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지만 사도바울은 내가 부득불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는 화가 있을 것이다. 유대인에게도 헬라인에게도 나는 복음의 빚진 자라고 하는 확고한 운명처럼 이 사도의 가슴속에 뼈 속 깊이 박혔던 것입니다. 왜 입니까? 이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여전히 인간의 위대함, 인간의 복됨을 모르고 짐승처럼 살아가는 사람들, 그것을 바라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보았기 때문에 이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그들의 어두운 눈을 열어 주어야 한다는 운명처럼 다가오는 소명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던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해 봅시다. 사도바울만 복음의 일꾼이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교회에 접붙여지는 그 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하셨을 그 일을 하는 교회의 몸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는 항상 일이 생각나야 합니다.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일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교회에 베풀어주신 큰 은혜,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그 큰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내가 무엇으로 섬겨서 그 분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고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티끌만큼이라도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세상으로 변화되는데 내가 이바지 할 수 있을까? 이것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무위도식이라는 말은 교회에서 아무 봉사도 안하는 그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가 되어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이 세상을 섬기는 어떤 기쁨과 보람이 없는 모든 사람은 일을 해도 그는 무위도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묻습니다. 여러분은 일에 대한 기쁨이 있습니까? 복음의 일꾼, 일꾼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꾼은 그것을 잘 하는 사람, 그것을 하는 것에 매인 사람, 운명처럼 그것을 계속하는 사람, 그것입니다. 항상 좋은 회사 다니면서 월급 많이 받다가 자원봉사 한다고 일일찻집에 가서 차 한 잔 드세요, 티켓 하나 팔아 주세요. 라고 하는 사람들은 장사꾼 아닙니다. 장사꾼은 그것만 하는 사람입니다. 꾼이 그것입니다. 일꾼은 그 일에 매이고 그 일을 잘 하고, 그 일에서 보람을 느끼고, 자신의 존재의 가치를 찾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일꾼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되고 교회의 일부가 된 그 순간부터 여러분은 일꾼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복음을 들고 5대양 6대주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일입니다. 일입니다. 그래서 하는 것입니다. 일입니다. 그것은 아무에게나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할 만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맡기셔서 그 일을 하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복음 사역이 돈 없이 됩니까? 돈으로 하는 것 아니고 믿음으로 하는 것이지만, 땅 팔려면 도구가 있어야 되듯이 물질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 사람들이 빌게이츠를 존경하는 이유는 바로 그렇게 엄청난 돈을 벌어서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나쁜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고치는데 이바지하게끔 하려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가치는 그 정도가 아니라 정말 인간만 행복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예전에는 다 우리 행복 찾으면서 살지 않았습니까?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이 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때, 그것이 진정한 행복 아닙니까? 그것이 바로 복음이 중심에 서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넓은 의미에서 그렇게 복음을 들고 먼 곳에 다니며 전파하는 사람만 복음의 일꾼이 아니라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헌금을 하는 사람도 복음의 일꾼이고, 그 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도 복음의 일꾼이고, 그 일을 돕기 위해서 이모저모 애쓰는 모든 사람들이 복음의 일꾼입니다. 그러니 그 많은 일들, 국가가 전쟁을 하게 되면 그 전쟁 하나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수만 가지 일에 종사하는 수천만의 사람들이 애를 써서 전쟁을 수행합니다. 모두가 나라를 위한 일꾼입니다. 그러한 일꾼이 되기까지 사도바울이 강력하게 매인 것입니다. 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아십니까? 일꾼이 되는 깊이는 그렇게 주님을 만난 깊이에 비례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깊이 만나고도 뺀질대고 탈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깊이 만나지 못하였는데도 성품이 착해서 잘 순종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을 깊이 만나 그 복음의 의미를 알게 될 때, 그 복음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 깨닫게 될 때 자신을 헌신하면서 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복음의 일꾼이십니까? 여러분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일에 대한 기쁨이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 일하는 보람과 영광,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쁨, 나같이 쓰레기 같은 인간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은 망가진 이 세상의 어느 한 구석이라도 고치고 계시고 나 때문에 불행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을 받고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게 된다고 하는 티끌만한 보람이라도 있느냐고 나는 여러분에게 묻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복음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자신이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만난 깊이는 사도바울에게 견줄 수 없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한 인간으로서 우리 하나님께 받은 사랑의 깊이와 넓이는 사도바울의 그것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께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들이었고, 하나하나를 지극한 사랑으로 불러 복음을 깨닫게 하사 우리로 하나님 자녀 삼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정말 복음의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크고 신문에 오르내리는 괄목할만한 일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하찮고 헛된 것인지 알고 그것을 버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제 우리의 삶의 목표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의 영광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만약에 하나님을 섬기면서 여전히 이 세상의 영광을 취한다면 예전에는 세상에서 영광을 찾았고 이제는 교회에서 세상 영광을 찾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추구하면서 살아야 할 가치가 아닙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주목해 보거나 나를 높여 주거나 인정해 주지 않아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앞에서 이 세상 어디에선가 자기를 이 세상에 가장 작은 자로 여기면서 그러면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지구 한 모퉁이를 섬기고 그리스도교의 한 모퉁이를 섬기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통치를 실현해 가는데 티끌만큼이라도 이바지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크신 사랑을 입고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고유한 사명을 주셨고 아직 그것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없어서 없는 것이 아니라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은혜 안에서 발견 됩니다. 은혜 안에 소명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목적하게 인생을 살던 사람이 예수님 깊이 만나면 인생의 의미가 명료해집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아주 분명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일을 맡겨준 사람보고 저 영광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도 한번 저렇게 영광스럽게 사용되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남의 십자가, 남의 영광에 관심 갖을 필요 없고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 주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며 그 일을 위해 온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매일 살아가노라면 하나님이 신기하게 당신의 일꾼으로 당신을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당신 나름대로 그 길을 선명하게 인도하셔서 그래서 당신의 뜻을 따라 당신을 섬기며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기회를 주십니다. 인간이 자기의 꿈을 앞 세우고 하나님을 빙자하여 그리스도의 사역을 빙자하여 자신의 영광을 찾으려 하는지, 아니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저 주님을 섬기려고 하다가 보니까 영광스러운 길로 인도하시는지는 하나님이 잘 아십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일꾼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사람이 일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일꾼을 부리는 주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주인의 마음에 맞게끔 일하여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주는 그 일을 위해 일꾼이 된 것입니다.
(예화) 내가 전도사로 있을 때 담임 목사님이 계셨는데 나이 많아서 신학교를 다니시고 옛날에는 노동운동도 하고 당신 말로 나쁜 짓도 많이 했는데, 회심하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목사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자기가 항상 뒤에다가 써서 붙여놓기도 하고, 설교 때마다 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예수님의 복음만 전하며 살겠습니다. 내 입의 혀가 굳어질 때까지, 내 혈과의 피가 식을 때까지 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시골교회에서 목사님, 우리 교회 와서 부흥회를 해 주십시오 그랬답니다. 그 분은 그렇게 유명한 분이 아니니까 여기저기에서 오라고 하는 것 아니니까 그냥 당신 자신이 사례금도 안 받으시고 시골교회 가난한 교회인데 사례금 받는다고 해서 줄 돈이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서 오라는 교회 가시는데 연세 드시고 힘드셨나 봅니다. 아, 내가 너무 힘들어서 못 가겠다고 그랬더니 그 교회 젊은 전도사가 목사님, 입의 혀가 굳어지기 전까지 혈관의 피가 식어지기 전까지 계속 복음을 전하신다 그래놓고 왜 우리 교회 안 오십니까? 잘못했다, 그러고 갔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마음에 어떨 때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너무 일이 많습니다. 사람이 힘이 듭니다. 어디 와 달라. 어디 와 달라. 엊그제도 1년 전에 지나가면서 하도 간곡하게 이야기해서 나는 정말 할 여력이 없는데 생각해 보자. 그리고 떡 하니 편지가 왔습니다. 아프리카에 있는 선교사들을 프랑스에 모을 테니까 꼭 오십시오, 장문의 편지가 왔습니다. 힘이 듭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같이 쓸모없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일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가. 제가 그래서 오늘도 심방하면서 그랬습니다. 기동할 능력이 없어도 정신이 맑으면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여기 권사님들, 연세 드신 집사님들 제가 말씀을 드리는데 걸어 다니고 자기 손으로 화장실 왔다갔다 하고 교회 나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영구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여러분은 여러분 힘으로 잘 사는 것 같지만, 아파보고 나면 이게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구나를 깨닫습니다. 요새 고난주간에 우리 교회 병자들 심각한 환우들 심방하고 있는데 정말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도 그러한 분들에게 만약 건강을 주고 우리가 섬기는 이 자리에서 섬기라고 하면 얼마나 열심히 섬기겠습니까? 어떤 때는 그러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힘들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거두어 버리고 우리를 홀로 남겨 두실 때 우리는 이렇게 권사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장로님 여기 좀 와 주십시오. 목사님 여기 좀 와서 말씀 전해 주십시오. 이러던 때를 얼마나 그리워 할 것인가.
제가 모시고 있던 담임 목사님이 어느 날 그러셨습니다. 아, 그 분이 정말 신사적인 분이었고 이렇게 몸매의 흐트러짐이 없던 분이었는데 교회를 은퇴하고 나니까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했습니다. 그럴만한 사이도 아닌데 어느 날 와서 박 목사, 나 설교 좀 시켜줘. 당신 교회 가서 설교 좀 하게 해줘. 그래놓고 사례금 안 받을게. 얼마나 설교하고 싶었으면 동료 목사님, 후배 목사님 손을 붙들고 나 좀 설교할 수 있도록 도와줘. 여러분, 언젠가 그러한 때가옵니다. 그러면 이것도 메뚜기도 한철이라고 잠깐 햇빛들 때 잠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만나면 어떤 사람들이 목사님 그렇게 외국 왔다갔다 하면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데 힘듭니다. 힘듭니다. 그런데 항상 하는 말이 있습니다. 메뚜기도 한 철이다. 이제 한 10년만 지나면 누가 우리를 오라 그러겠느냐는 것입니다. 권사님들은 10년도 안 남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살아서 운동하는 것, 자기 발로 걸어올 수 있고 자기가 밥 떠먹고 자기가 화장실 갈 수 있고 입을 열어 말을 해도 말이 세지 않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일꾼이 되라는 소명입니다. 그 자체가. 그거 몇 년 못 있습니다. 얼마 지나면 말하면 말도 세고 남의 도움 받지 않으면 화장실도 못 가는 신세가 되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의 인생의 때가 너무 짧다는 사실을 알면서 정말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무위도식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회심한 것이 약 35년경이라고 봅니다. 주후 34년 35년경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 편지를 쓴 것이 62년-64년경으로 봅니다. 약 30년 약간 안 되는 기간입니다. 이 30년은 기독교 역사에서 위대한 30년이라 부릅니다. 왜냐하면 이 30년에 종교역사의 유래가 없는 속도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럽을 휩쓸면서 전파하는 것입니다. 어둠에 있는 수많은 인류를 깨웠고 이것은 단순한 회심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로서 살아가야 할 기독교의 사상의 체계를 받아들이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길에서 돌이켜 서서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을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영적인 큰 부흥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획기적으로 돌아서는 것과 함께 확고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길이 무엇인가에 대한 뚜렷한 지침이 있어서 그 사상대로 사는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서 많은 이방인들이 인생을 사는 참된 지혜와 그리고 영광이 저 기독교에 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수많은 복음의 일꾼들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그러한 위대한 복음의 역사의 물줄기를 타고 우리도 그 사람들의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자기를 바쳐 헌신한 그 많은 노력과 헌신을 통해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위해서 살라는 확고한 소명입니다. 확고한 소명입니다. 그래서 삶의 초점이 예수께 올바로 맞춰져 있지 않으면 기도를 해도 허공을 치는 것 같은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데 은혜를 제대로 구하려면 주시는 바 은혜를 어디에다가 쓸지 방향을 올바르게 설정합니다. 그리고 그 삶에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힘으로 이 삶을 도전하는 대로 살수 없으니 나에게 능력을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간절히 매달리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놀라운 능력을 여러분에게 부어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복음의 일꾼이 되어서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날까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십시다. 기도하겠습니다.
믿는 자를 위한 기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