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 있는 중보기도를 위하여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출32:32).
요즘은 중보의 기도를 참 많이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중보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참 놀랍게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솔직히 말해서 신앙의 영역, 영적인 생활의 영역에 있어서도 우리들이 얼마나 자기만을 위하는 존재인가 하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저는 오늘 저녁때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성도로서 말하자면 영적인 삶의 높은 경지라고 할까? (그렇게 말하면 좀 뭐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영적인 생활의 기반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최고의 마음이 무엇이냐 하면 이 땅에 부흥이 이루어지기를 말할 수 없이 그리워하고 가슴 저려하는 것 이것이 이 땅의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 앞에 바칠 수 있는 마지막이에요.
그런데 사실은 그러한 열망을 성도가 가진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란 말이죠. 일반적이 아니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그래야 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어제 밤늦게도 호주에 있는 박순용 목사님과 통화를 했는데 그런 얘기를 물어봐요. ‘목사님! 목사님네 교회는 그럼 이제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겠네요?’ ‘있다. 그러나 많겠느냐?’
이것은 말이죠. 마치 물줄기와 같아서 물이 이렇게 높은 데까지 분수가 솟아오르면 그것은 중간에서 뛰어드는 분수는 없어요. 물체는 던지면 그렇게 될 수 있지만 물줄기는 밑에서부터 힘차게 뻗어와야지만 그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힘에 부치면 그다음에 물이 다시 떨어지는 것이죠. 분출하는 힘이 세면 더 높은 수준까지 올라가는 게 이게 물의 성질이잖아요.
마찬가지로 그렇게 자기 삶은 이기적이고, 삶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데 기도만 부흥에 대한 목멘 기도가 나온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왜 부흥이 필요한 줄 알면서도 사람들이 그렇게 부흥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지 않느냐하면 그들의 삶이 그런 기도를 할 수 없게끔 만들고 있다는 것이죠.
사실 부흥이라고 하는 것은 중보기도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어떤 면에서 중보기도냐 하면 이대로 내버려둬서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그 거룩하고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셔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 그분에게 이런 식의 삶을 살아드린다는 것은 옳지 않다. 어디가? 교회와 이 세상이……. 그렇기 때문에 바뀌어 지기를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죠? 그렇죠? 그런데 결국은 하나님을 위한 그런 변화가 누구를 통해서 일어나느냐 하면 사람들을 통해서 일어난단 말이에요. 사람이 바뀌지 않고 이 세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그러니까 부흥의 기도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하자면 충만한 영혼들을 위한 그 기도(사회를 위한 기도)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어떤 때에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지만 어떤 때에는 또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 영혼들의 어찌할 수 없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죠. 그러한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영적인 상태에요.
이런 것들을 이렇게 잠깐 하나님 앞에 그런 것들을 느꼈다가 잊어버리는 사람들은 가끔 나타나지만 지속적으로 그것들을 가슴에 그런 불을 가지고 오래도록 살아가는 사람이 부흥을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존경하는 신앙의 선배들 평생을 불꽃처럼 살았던 믿음의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던 선진들은 그런 점에서 우리와 구별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그 기도는 필연적으로 중보의 기도로 이어진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중보의 기도가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것과 같은 기도가 될 때에 그 때에 그 기도는 반드시 어떤 역사를 일으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수의 편이 아니에요.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소수의 편도 아니에요.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은 누구의 편이냐 하면 당신께 모든 것을 바쳐버린 사람 그 사람편이에요.
그러니까 자기를 하나님 앞에 짜서 바치는 이것 없이 형식적으로 매달려서 나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수만 명의 기도모임에 함께 하시지 않던 하나님이 이름도 없는 성도가 골방에서 자기를 모두 짜서 하나님 앞에 바치는 진액을 드리는 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이 그 계획된 엄청난 기도모임, 기도 미팅에 나타나시는 않던 하나님이 그 한사람의 기도 세계 속에 나타나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한사람의 기도를 들으셔서 교회를 변화시키고, 역사를 변화시키시는 것이에요. 언제나 큰 부흥과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에게 강물과 같이 부어지는 역사가 있었던 때에는 반드시 그렇게 하나님이 부어주실 부흥을 미리 맛보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솔직히 말해서 한 사람이 그렇게 부흥을 위해서 절박하게 부르짖으며 기도하면 그에게는 이미 부흥이 온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부흥을 맞이하지 않고는 그가 그렇게 기도하고 삶이 그렇게 초점이 맞춰져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불꽃처럼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부흥을 개인적으로 미리 맛보면 맛볼수록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인생들이 너무 너무 불쌍한 것이에요. 그러니까 더 절박해지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말하자면 진정한 의미의 중보기도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기도하는 다수의 편이 아니라 그 기도에 자기를 다 바친 그 사람 편이라는 것이에요. 그 사람이 하나님을 움직이고 하나님이 역사를 움직이십니다. 불가능한 것 같은 상황을 뒤집어 엎으시고 그리고 정체되었던 선교의 전선에 벽을 허물고 복음을 동토의 땅에 불길과 같이 번져가도록 만드시는 분도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말이죠. 하나님 앞에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이제껏 까지는 그런 삶을 못 살았더라도 앞으로는 살아야 하고 일평생을 한결같이 그렇게 못 산다고 하더라도 한번 이렇게 무엇인가 실패를 숙명처럼 느끼고 선교와 혹은 우리의 섬김에 있어서 끝없이 돌아보아도 변화되지 않는 영혼들을 만날 때 우리는 그것을 한 풀 접고 들어가는 신앙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안 될까? 주님이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을 기뻐하셨고, 그래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일을 주셨고, 돌볼 수 있는 영혼들을 주셨는데 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이 교회를 주셨고 주님의 안타까운 마음은 지금도 진리가 선포되는 그 자리에서 많은 영혼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되어서 주님 앞에서 불꽃처럼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인데 왜 우리에게는 그런 놀라운 변화와 회심의 역사들 그리고 하나님의 참사랑을 깨닫고 감격하는 승리와 환희의 역사들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는 현실에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늘 그것이 의문으로 남아있는 것이에요. 약속은 있는데 현실을 왜 이럴까? 영광스러운 약속은 있는데 현실을 왜 이렇게 초라할까? 정말 거룩, 승리, 환희, 기쁨, 능력, 이런 것들은 하나의 하나님의 나라에 갈 때까지 바라만 보고 침만 삼키다 죽어야 하는 그러한 전시물들인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해요.
그때 비로소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짜서 바치는 기도-인간이 말이죠! 문제 앞에 부딪혀서 눈물을 흘리는 것만큼만 땀을 짜서 하나님 한 분 앞에 몸부림치면 넘지 못할 벽이 없어요.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의 구름을 부르지 못할 자가 없다는 것이에요. 어차피 해결되지 않는 것은 고난이에요.
제가 그런 말씀 드린 적이 있지요. 미국에서 한 때 유행하던 속담이 (하도 보기 싫으면 그렇게 욕했다고 해요.) '에이 이놈아 성령 받지 말고 가서 목회 질이나 실컷 해먹어라.’ 벌써 사람들은 알아요. 성령의 은혜 없이 영혼을 돌보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눈물 나고 힘든 일인지 알아요. 그렇게 힘들고 눈물 날 바에야 하나님 앞에서 ‘주님 저를 여기 세워주셨습니다. 목사로, 혹은 전도사로 혹은 교사로, 혹은 구역장으로 혹은 가정을 인도해야 할 내 가정의 첫 열매로 하나님이 나를 세워주셨습니다. 혹은 내 문제 앞에서 나를 세워주셨습니다. 하나님 내가 넘지도 못할 이 벽, 이 상황을 견디기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만큼 차라리 내가 상황 앞에서 몸부림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는 자가 되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아무리 눈물을 많이 흘리고 가련하게 보여도 성경을 찾아보세요. 마귀가 여러분이 가련하게 흘리는 눈물을 보고 불쌍해서 마귀가 그냥 갔더라(반쯤 죽이려고 그러다가 그냥 갔더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 세상이 와서 여러분 눈물을 닦아줍니까? 성도의 눈물을 씻기실 수 있는 분, 성도의 얼굴에서 흐르는 비지땀을 씻겨주시고 안식을 주실 수 있는 분, 오로지 예수그리스도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 한분 밖에는 없다고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습니까? 그럼요! 그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정말 자기를 짜서 바치는 그런 몸부림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을 역전시키셔서 새롭게 만드신다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소망이 없는 것이에요. 넘어야 할 벽이 있어요. 그런데 안 넘어요. 그럼 어떻게 되요. 그냥 벽 앞에 서있는 것이죠. 그러면 불평하지 말아야 되잖아요. 그런데 불평 안할 수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자기를 짜서 바치며 몸부림치는 사람은 이상하게 감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지 않고 상황에 몸부림치는 사람은 몸부림치면 칠수록 패역해져요. 눈물을 많이 흘리면 흘릴수록 사람이 패역해지고 못되진단 말이죠. 하나님 앞에 완고하고 말이죠. 나무가 이렇게 굽은 것처럼 말이죠. 펴놓으면 도로 되고, 펴놓으면 도로 되고, 고쳐지지를 않는다고요. 그게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결정적일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고 사는 대가라 이것이에요.
오늘 이것을 보세요.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끝났습니다. 이제 막을 내렸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우상을 섬긴 것입니다. 그것도 지도자와 함께 우상을 만들어놓고 그것도 말하자면 목회자가 하나님 만나기 위해서 산으로 올라갔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났어요. 그 상황을 모세가 와서 봤을 때 얼마나 기가 막혔겠어요.
자기는 물도 안 먹고, 먹지도 않고 올라가서 하나님 앞에 이 백성을 위해서 주님 면전에서 그렇게 매달렸는데 돌아와 보니까 개판이에요. 얼마나 낙심했겠어요. 그런데 모세가 봐도 이것은 ‘그럴 수도 있지...’ 의 정도가 아니에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에요. 모세 자신도 하나님 앞에 변명할 말이 없어요. 변명한 적이 하나도 없어요. 고백하기를 ‘이 백성이 크게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렇게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해요. 쓸어버려야지.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모세야 끝났다. 내가 이 백성을 쓸어버리겠다. 그리고 너를 제2의 아브라함으로 삼아서 새 민족을 창조하겠다.’ 하나님께서 한번 모세의 마음을 떠보시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잖아요? 준엄했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 ‘아멘, 주 여호와여!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그랬습니까? 모세는 그렇게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 됩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이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자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모세는 그런 마음 때문에 하나님 앞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에요. 모세를 움직였던 더 큰 마음의 소원은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자기의 백성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사랑이었고, 또 하나는 이 백성들이 여기서 사라지고 나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 모욕거리가 될 것이라고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어요. 만약에 이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치워버리시면 이방사람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여호와라고 하는 신이 있었는데 자기백성을 인도하여 냈지만 그러나 어떻게 자기 백성들을 막상 인도는 해냈는데 광야를 헤쳐갈 길이 없으니까 죽여 버렸다! 그러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땅에 떨어지는 하나님의 이름의 명예는 내가 어떻게 견딜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는 것이에요. ‘이런 상황 속에서 제가 살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고 내 사랑하는 동포들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데 내가 살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는 것이죠. 생명책에 기록된 자기의 이름을 걸고 매어달리는 것이에요.
생명책이 무슨 포장마차집의 술 장부요? 슈퍼의 외상장부요? 생명책은 그야말로 생명이 오가는 기록이에요.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그것을 걸고 하나님 앞에 매어달리는 것이에요.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했어요. 그랬더니 하나님이 진노의 불을 끄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회를 주셨어요. 그렇게 자기를 다 짜서 드리는 기도를 모세가 40일을 했습니까? 한 달쯤 했습니까? 일 년쯤 했습니까?
아닙니다. 한번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짜서 드리는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 진노의 불을 껐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할 때 하나님의 마음에는 진노의 불길이 타올라요. 그 불길이 어떻게 하면 멎지요? 어떻게 하면 멎어요? 어떤 일이 있을 때 어떻게 해야지만 그 하나님의 마음속에 타오르는 죄를 향한 진노의 불이 꺼져요? 피를 봐야지만 불이 꺼져요. 죽음의 심판이 지나가야지만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꺼지는 것이에요. 그런데 모세의 이 중보기도는 수많은 사람의 피를 대신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진노의 불을 끈 것이에요.
이것이 중보기도의 놀라운 능력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우리의 기도생활 속에서 이런 데까지 나아가기를 원하시는 것이에요. 그리고 이것이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은 진정한 이유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서 우리가 이렇게 기도한다면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영혼들을 다시 얻을 것이며, 도저히 변화되지 않는다고 포기했던 수많은 영혼들이 변화된다는 놀라운 소식에 속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마음으로 기도의 자기 자신을 바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와의 편에 선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에도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면서 이렇게 자기를 다 짜서 하나님 앞에 바치는 그 사람을 하나님이 찾으셔서 그를 통해서 놀라운 일들을 이루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비교적 하나님을 사랑하는 수많은 무리가 아니라 주님밖에는 사랑하는 이가 없는 한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대체로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서는 대체로 역사하시지만 기도에 자기를 다 바친 사람들을 향해서는 하나님이 자기의 능력을 다 보여주어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들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할 때 우선적으로 떠오르는 그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자기를 다 바치고 그래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주님만이 자신의 삶의 이유가 되고 기도 속에서 주님만이 자기의 진정한 목표가 되는 그러한 상태 속에서 아버지와 교제할 수 있는 세계를 가진 사람들 그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요, 하나님의 열정으로 불붙은 사람들이요, 그 사람들이야말로 자기들의 기도를 통해서 자기들이 영화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화로워지시고 자기들의 기도를 통해서 자기를 살릴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많은 일과 복잡한 과업들이 우리들의 기도생활을 대치해보려고 하는 그런 위협 속에 있는 때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의 시간을 늘리고 기도의 시간에 더 많이 자기를 바쳐야 합니다. 언젠가 저는 몇 년 사이에 여태까지 자기가 읽은 책이 삼천권이라고 자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삼천권이라는 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한 세 트럭쯤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루에 여섯 시간씩 책을 읽는다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굉장히 부러웠습니다.
그러나 나는 즉시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 시간의 반을 기도로 보낸다면 그 사람은 훨씬 더 크게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수 있을 터인데……. 하나님은 오늘 이 시간에도 이런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래서 모세를 통해서 이루셨던 그 일보다도 더 크고 놀라운 일들을 우리를 통해 이루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이 찾던 바로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렇지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