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와 기도생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말년에 어떤 기자가 설교와 기도의 차이가 뭐냐고 물었더니 아주 명쾌한 대답을 했습니다. ‘설교는 항상 쉽고 기도는 항상 어려운 게 설교와 기도의 차이점이다’라고 했어요.
하나님에 관해서 가르치고 말하는 것은 물론 순간순간 성령님이 도우셔야 하고 또 그것을 온전하게 순전한 마음으로 전달하고 전달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의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끊임없이 자신을 순전하게 해야한다는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좋은 통로가 되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확실한 것 하나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의 영적인 특성, 그 영적인 특성을 가진 섬김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심령이 준비되어야 할 필요, 그 모든 것들을 다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 자체가 기능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는 거죠. 쉽게 얘기하면, 교사라고 하는 그 일, 영혼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는 그 일이 신령한 특성이 있고, 마음을 드려야 하는 특성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익숙해질 수 있는 기능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많이 하다보면 이골이 나서 쉽게 잘 할 수 있는 측면도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에게는 있다하는 얘깁니다. 성령의 역사하고는 상관없이 익숙해지는 측면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런 측면이 없다고 잘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제까지 청산유수로 기도하던 사람이 오늘 기도 못할 수 있고, 몇 년 동안 기도의 문이 막혔던 사람이 오늘 트여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제가 깊이 존경하는 존 오웬 목사님은 자신의 책 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한 신자의 생명력 있는 신앙의 특성은 온 마음을 바쳐서 열렬히 기도하는 그 순간에 입증된다.” 이것이 인격의 특징이 되고, 열렬한 마음으로 신음하듯이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아놓는 이 헌신, 이것을 통해서 그 사람이 생명력 있는 신앙에 있다는 것이 입증이 됩니다.
그가 쓴 유명한 논문 하나가 있는데, “Spiritual Mindedness"라는 논문이 있어요. 우리말로 ‘영적 사고방식’이라는 이름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근데 제 느낌에 흡족하게 잘 전달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거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죠. 'mindedness'라는 단어가 ‘mind’는 ‘생각하다’라는 뜻이 있거든요. 'minded'니까 수동태죠. ‘생각되다’, '~ness'가 붙으니까 ‘생각됨’, 이거든요. 이것은 희랍어의 ‘푸르네마’라는 단어를 번역한 거예요. 그래서 뭐냐면, ‘육신의 생각은 영의 원수가 되고 영의 생각은 육신과 원수가 되느니라’라고 할 때 그 생각이라는 것이 ‘생각되는 것’이예요. 우리들이 무엇인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우세한 관심사,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우세한 관심사에 의해서 사고가 그것을 축으로 맴도는 상황이 있잖아요.
예를 들면, 여러분은 워낙 경건하니까 잘 안하시겠지만, 그래도 좀 하셔야 되는데, 연애를 하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되잖아요. 모든 것이 그 사랑하는 대상을 축으로 맴도는 거예요. 꽃을 보면서 그 사람이 이 꽃을 좋아하는데, 물을 보면서, 물을 잘 먹던 형제였는데... 나를 물먹이고 가다니... 모든 것에서 연상이 되는 거예요. 말하자면 'lover mindedness', 연인을 중심으로 생각이 되는 거예요. 거기서 얘기하는 'spiritual mindedness'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깊이 빠져드는 것이에요.
그래서 청교도들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냐면, 사실 제가 되고 싶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에요. 청교도들에 대한 정의를 존 파이퍼 목사는, ‘하나님과 사랑에 빠진 지성인’이라고 했어요. 하나님과의 사랑에 푹 빠진 지성, 묘사가 재미있죠! 생각 없이 빠진 게 아니라 아주 명료한 지성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달콤한 사랑에 빠진 거예요. 그래서 모든 지성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들에 거대한 사상들을 만들어내는 도구로 사용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축으로 해서 도는 거예요.
그런 대표적인 것이 시편 42편에 나오잖아요.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내 영혼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가 생존하신 하나님을 갈망하오니 어느 때 주의 얼굴을 뵈올꼬’ 그러면서 성일을 기억하면서 남의 나라에 망명해서 성일이 되었어요. 성일이 되었는데, 이런 성일이 다가오면 주님의 전에서 예배가 드려졌고, 예배가 드려지면 나는 하나님께 나아오는 무리들을 인도하면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는데... 현실은 그 상황 속에 있지 않은데 그것이 'mindedness'가 되서 계속 도는 거예요. 그러다가 현실과 자기가 마땅히 도달하고 싶은 상태의 차이를 느끼면서 눈물이 확 쏟아지는 장면이 바로 시편 42편 장면이에요.
그가 놓여있는 상황은 하나님과 친교를 나눌 수 없는 상황으로 튕겨나가 버렸는데, 하나님을 향한 'mindedness'는 변함이 없는 거예요. 이게 뭐가 유지되었냐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이게 도는 거예요. 근데 거기에서 오웬이 이런 얘기를 해요.
“한 성도가 얼마나 성화되고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었는가는, 이 영적으로 생각되어지는 것, 'spiritual minded'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고 하는 거죠. 이런 거는 'spiritual mindedness'가 아니라 이거죠. 예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가르칠 때에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은 그렇게 하다보면 그 순간에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물론 안 되는 사람도 있겠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순간 그 작업을 하면 영이 완전히 죽어있는 사람이 아닌 한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가 돌아간다는 거예요. 그렇게 가르치는 동안에.
그러니까 그 사람이 진짜 하나님 중심으로 하는 영적으로 생각되어지는 심성의 상태를 가지고 있느냐는 일상적인 생활에서 판단이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사색에 대해 말하면서 그런 말씀을 드렸죠. 사색은 성경을 펴놓고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색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모든 것들을 우리의 전 본성으로 사색을 하는 거예요. 그것이 기독교에서 사라진 전통이에요. 이것을 빨리 복원해야 되요. 사색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구도자일 가능성이 매우 적어요. 다시 반복할께요. 사색하지 않는 사람이 구도자일 가능성이 매우 적어요. 구도하는 길에 대해 사색하지 않는 사람이 구도자일 가능성이 매우 적다는 거죠.
만약에 중이 그런 사람이 있다면, 중은 중인데 땡중이라고 부르죠. 땡신자, 땡자, ‘땡’이라고 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아무것도 머리에 든 것이 없이 생각 없이 움직이는 존재인 거죠. 여러분들도 사색을 안하게 되면 신자가 아니라 땡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색을 해야 되요.
모든 접촉하는 사물을 통해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거예요. 여러분, 사랑에 깊이 빠져보면 제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될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동안에 사고가 하나님 중심축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가 영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임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게 끝나고 나면 다시 원래의 마인도로 돌아가는 거예요. ‘세속적인 마음의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말이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잘 가르친다고 해서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말씀대로 살고 말씀에 젖어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죠. 그것은 그 작용을 하면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죠.
그러면 기도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이냐? 기도는 그런 식으로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분명히 기도에는 기도를 하다보면, 그 기도에 부합하는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쇄신되는 특성이 기도 속에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그 스위치되는 정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처럼 쉽게 스위치되지 않아요. 쉽게 되지 않는다고요.
사람들이 기도하려고 도전하는데 장기간 기도를 하지도 않지만, 혹시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에 하나님께서 나를 좋아하시지 않는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거죠.
결국은 이런 결론에 도달하게 되죠. 한 사람이 자기가 기도할 수 있는 순간에, 기도해야 하는 순간에, 엎드렸을 때에 마음을 쏟아서 간절히 기도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사고와 영적인 관심사와 실제적인 삶 전체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움직여져야지만 가능해져요.
교사는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해요. 그것이 모든 다른 사역에 있어서 성공한 모든 방법과 기술을 익히는 것보다 더 뛰어나게 필수적인거라는 거죠. 너무 중요한 여건, 요인이에요. 왜 그런지 설명을 해볼께요.
교사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이고,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돌보는 목회 사역은 진리의 저장고를 열어서 영혼을 돌보는 사역이 아니면, 목회 사역이 아니면 드러낼 수 없는 진리의 말씀을 드러내서, 그것을 펼쳐서 영혼들에게 먹이는 일이 목회 사역의 가장 중요한 존재 의의예요. 그런데 잘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 일을 천사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성령님 혼자 하시도록 맡기신 것이 아니라 결점이 많은 사람들에게 위임하셔서 이 일을 하도록 위탁하시는 거예요. 근데 사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마치 내가 이 아래에서 설교를 듣고, 여러분 중에 한 사람을 강단에 올라와서 설교하라고 하면서 마음을 졸이는 것보다 더 할 거예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족한 것이 여러분이 내 앞에서 부족한 것보다 훨씬 능가할 거예요. 그런데도 하나님이 그렇게 미련해 보이는 방법을 통해서 하게 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하게 하시는 요인 중에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두 가지 요인이 있어요.
첫째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을 세워놓고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거예요. 그게 핵심이에요.
하나님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세워놓고 기도하지 않을 때 굉장히 싫어하세요.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을 의지하게 됩니다. 개인적으로 연초에 제가 수술을 하면서 몇 주 강단에 못 섰잖아요. 개인적으로 굉장히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어요. 저는 체질적으로 건강하게 살았거든요. 그렇게 두 주를 병원에 입원하면서 강단에 설 수 없을 정도로 이래 보기는 생전 처음이었구요, 내 생애 그런 일이 안 일어 날 줄 알았는데...그렇게 됐거든요. 그런데 그 고통스런 순간을 통해서 많이 깨닫게 되었어요. 그게 뭐냐면, 저보다도 여러분들을 위해서 저를 그렇게 하신 것 같아요. 뭐냐면, 목회자를 위해 기도하지 않은 것을 많이 회개하게 하셨어요. 여러 통의 편지를 받았어요.
그러면서 실제로 저의 말씀 사역에 있어서 기도 받는 것이 무엇이라고 하는 것을 목회 하고 나서 최초로 피부에 와 닿도록 경험을 했어요. 근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세요. 그래서 그때 만들어진 기도 모임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요. 크고 작은 기도 모임들이...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원하세요.
또 하나는 어떻게 하시기 위해서 인간을 사용하셨느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가르치는 대로 살았을 때에 미리 지어진 사람의 모습이 어떤지를 사람을 통해서 보여주게 하시기 위해서 천사가 아닌 사람을 사용하여서 말씀을 가르치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영혼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중요한 사명은 두 가지로 집약이 되는 거예요.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지혜롭게 가르쳐서 그들을 감동받게 하는 거예요.
둘째는, 자기가 가르치는 가르침대로 살았을 때에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여러분들의 현존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첫 번째도 굉장히 어렵고 전문적인 것이지만, 제가 보기에는 두 번째는 첫 번째보다 훨씬 더 어려워요.
그래서 어느 후배가 이렇게 물어요. “목사님, 목회를 하시면서 제일 어려운 점이 뭐예요? 힘드시죠!” 그래서 내가 “하나도 안 힘든다. 힘든 게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것도 안하고 밥 먹고 사는 사람이 서울 하늘 아래 누가 있겠느냐? 아무것도 안 힘든다.” 힘들게 하는 교인은 딱 한 사람 밖에 없다. 나 자신이에요. 그래서 천 명, 이천 명 목회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런데 한 교인이 말을 잘 안 들어요. 이 교인은 떠나지도 않아. 이 교인은 죽어도 나한테만 목양을 받겠데. 바로 자신이에요. 그럼 거기서 오는 긴장감과 투쟁이 무엇을 위한 거예요? 간단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는 일도 힘들지만 그대로 우리의 삶을 건축했을 때에 건축된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실존으로 보여줘야 하는데 그것은 많은 자기 죽임의 노력이 필요해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지혜롭게 말씀을 잘 준비하고 연습하고 경험이 쌓이면 될 거예요. 영혼을 위한 사랑도 어느 정도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자신이 그런 가르침을 통해서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실존이 되기 위해서는 이 속에서 끊임없이 자아와의 죽이고 죽는 무수한 투쟁을 통해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참목자와 거짓 목자의 차이는 바로 그 지점이에요.
만약에 그렇게 하나님의 실제의 명령대로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지 않는 자아를 죽이고 미워하지 않고 야합해서 편하게 살아가는 인생을 택하면 바리새인적인 교사가 되는 거예요. 그런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진노하셨어요?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실족하게 하는 사람은 화가 있느니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빠지는 편이 나을 것이다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들이 가르치는 영혼들이 우리들을 보면서 우리 자신이 변해가는 것을 볼 수 있어야 되요. 그렇게 자신의 전 삶이 가르침으로 변화되어서 가르침에서 기도로, 기도에서 삶으로, 삶에서 인격적인 변화로, 인격적인 변화에서 다시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이것이 어느 지점에서 시작되었다고 꼬집을 수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순환하는 총체적인 순환,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실제에요.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물 붓듯 부어주시죠? 사도행전 5장 32절에 의하면,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령도 그러하대요. 그러니까 그 토막 하나를 가지고 보면, 성령을 부어 주시는데 순종하는 사람에게 부어주시는 거예요. 근데 순종하게 하는 힘은 어디서부터 와요? 은혜를 통해서 와요. 은혜는 어디서부터 와요? 성령으로부터 오는 거예요. 이것이 끝도 없이 계속 휘도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선한 사람에게서 선한 삶이 흘러나와요. 그러니까 선한 마음에서 선을 내요. 쌓은 선에서 선을 낸다고 했으니까 선이 쌓이지 않았을 때도 있잖아요. 마음속에 선이 쌓여가는 거예요. 그럼 무엇을 통해 선이 쌓여갔다는 거예요? 득도를 했다는 건 아닐거예요. 그러니까 선한 마음이 쌓여 가기 위해서는 그 선한 마음에서 삶이 나오지만, 그 삶으로 하나님의 표준에 부합하는 선한 삶을 살려고 분투할 때 그 삶의 몸부림이 그 사람의 본질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거예요. 그 선한 마음에서 선한 본성으로 바뀌고, 변화된 본성 속에서 선한 삶이 흘러나와요. 이게 어디가 먼저라고 할 수 없이 계속해서 휘도는 삶이에요. 이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내재적 은혜와 외출적 삶의 순환관계예요. 그러니까 한 사람이,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면 기도라고 하는 하나의 신앙생활의 요소가 망가진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망가진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되요.
여기 보면 인도에서 선교사로 헌신했던 기도에 사람 하이드에 대한 얘기가 나와요. 그는 세계 선교 역사에서 괄목할만한 어마어마한 업적을 이룬 선교사였어요. 그런데도 이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었어요. 브레이너드나 헨리 마틴 같은 철저한 기도의 사람이었어요. 조직도 부족하고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신음소리를 내는 헌신적인 기도에 의해서 선교의 문을 열기도 하고 선교의 현장에 불을 보내기도 했던 그런 사람이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의 사람 E. M. 바운즈는 자신의 책 속에서 무엇을 이야기했냐면,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인가 하는가는 그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그 모습을 능가할 수 없다고 했어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 그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그것이 그 사람의 What he is... 그의 사람됨이라는 거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교회 학교의 프로그램을 수행하고 그 일을 위해 물질적으로 헌신하고 그 일을 위해 시간을 내고 많은 애를 쓰고 할 때에 우리는 그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헌신됐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더 깊이 들어가면 그 사람이 교회학교 일에 헌신된 사람이냐, 그 일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영혼들의 주인이신 하나님 자신께 직접적으로 헌신된 사람이냐를 세밀하게 갈라놓으려고 할 때에 그 사람이 어느 편에 설 수 있을 것인가는 다시 검증되어야 해요.
모든 일 속에는 그 사람을 깊이 빠져들게 하는 마력이 있어요. 기독교 사역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교회 학교를 위해 봉사한다고 하지만,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헌신 없이도 얼마든지 일에 대한 열정을 가질 수 있어요. 사람들은 이 둘 사이를 아주 선명하게 갈라서 그 사람에게 가르쳐주지 않아요. 왜냐하면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그리고 조직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보면 이렇게 되었든 저렇게 됐든 조직에 헌신하는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가라내서 그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두 보세요. 근데 그런 두 종류의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가 뭐냐 하면, 기도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에요. 일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 일은 수단일 뿐이고, 일 뒤에 계신 하나님 자신께 헌신된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때 그 마음과 모든 관심사가 하나님께 집중되어져요. 그래서 일을 넘어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요. 그리고 그 분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사역을 해석해가요. 끊임없이 사역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그 길을 해석해가는 거예요.
그것들이 우리에게 있어서 기본적으로 있어야할 자세예요.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꾼의 중요한 덕목으로서 한꺼번에 말씀하세요. 그건 지혜롭고 충성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우리들이 매주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경배를 올리는데 하나님께서 곤고하고 상한 심령이 되어서 추수하지 않으면 안 될 영혼을 하나님이 안 보내 주신다고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되요? 우리는 일차적으로 우리가 지혜롭지 못하기 때문에 그 영혼들을 잘 돌보지 못하고 있는가의 측면이 있는지를 점검해보아야 해요. 그래서 합리적으로 고치고 잘 해야 되요.(?)말하자면, 고기를 낚기 위해서 커다란 그물을 가지고 나섰는데 잡으려고 하는 고기는 새끼손가락만한 고기인데, 그물은 상어를 잡으려는 큰 그물을 가지고 냇가에 들어섰다하면, 백날 휘젔고 다녀도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을 거예요. 그물을 바꿔야 되죠.
꼼꼼하게 점검해야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게 되면, 이것은 회사를 경영해가는 태도이지 영적인 단체인 교회, 우리의 목회 사역, 영혼을 돌보는 사역을 이끌어가는 사고방식이 아니에요. 그런 모든 것들을 점검한 후에 이것들을 점검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은 갖지 말아야 해요. 방법을 사용하지만, 방법을 의지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해요.
우리 교역자들이 토요일에 얼마나 바쁩니까? 다 제각기 사역이 움직여요.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 지금 이렇게 가서는 안된다라고 생각할 때는 제가 항상 토요일 기도를 선포해요. 그 바쁜 와중에 우리 교역자들이 다 모여요. 그래서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거예요. 그때에 많은 사역자들이 함께 회개하고 힘을 다해 많이 애썼는데 영혼을 보내주시고, 그 영혼들이 회심하는 축복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 하나님이 왜 나의 목양지를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일까? 그러면 하나님이 항상 회복을 주세요. 항상 우리가 아플 때 회복을 주세요. 이게 바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인데, 그런 것들을 발견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지혜를 동원해서 모든 것들을 훌륭하게 해내야 하죠.
그러나 그것으로 저절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업가적인 발상이에요. 하나님과의 관계에 호소해야 해요. 그 하나님과의 관계에 호소한다고 할 때에 핵심이 뭐예요? 하나님에 대해 많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가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가서 사람들에 관해서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에요.
근데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은 교사들이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영혼의 이름을 부르며 매달리는 이 사역에 있어서 기본적인 헌신이 안 되어 있어요.
그래서 결국은 사역을 하면서 선교를 가지만, 현저히 하나님의 축복이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이 되는데, 하나는 영혼들이 회심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이고, 두 번째는 회심한 영혼들이 은혜의 상태에서 미끌어지지 않고 회심의 은혜를 보존해서 거룩한 성도로 자라가는 거예요. 이런 영적인 전선에서 계속 밀리는 거예요. 여러 가지 방법들을 만들고, 많은 시간을 활용해서 프로그램들을 짜고, 이벤트를 준비하고, 제도를 개선해보지만 그러나 그것만을 하는 곳에서는 생명의 역사가 있을 수 없어요. 그것과 함께 항상 이루어져야 할 것은 신음 소리를 내면서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이것이 필요해요.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여러분들의 각 부서의 교역자들이 있어요. 여러분들의 목사님이나 전도사님들이 여러분 보기에 그렇게 신음을 하면서 여러분과 영혼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여러분들은 깊이 존경해야 되요. 그리고 그분이 좀 부족한 것이 있다하더라도 지도력을 인정하고 세워줘야 해요.
일은 다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안타까운 몸부림이 아니면, 그러한 자기 깨어짐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 아니면 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7~8년 전에 쓴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누가 나에게 세계를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위대한 설교자가 되겠느냐? 아니면 하나님 앞에 탁월한 기도의 사람이 되겠느냐 물으면 나는 1분도 망설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 했어요. 유명해지지 않으면 무슨 상관이 있어요?
그러나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정말 그렇게 영혼들의 이름을 끌어안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까? 언젠가 한번 교역자들을, 교회 학교에서 위기를 느끼면서 교회학교 교역자들과 사모님들을 무도 모아놓고 바쁜데 시간을 내서 세미나를 했어요. 그리고 거기 온 사모님들에게 선물을 하나씩 줬어요. 두 권의 책이었어요. 한 권은 각 교회 학교의 교사들과 지체들의 명단, 또 하나는 각 지체들의 이름이 적힌 출석부, 그것에 6개월 동안 기도로 체크하도록 보내줬어요. 6개월 후에 다시 모여 세미나를 했어요. 사모님들의 간증이 놀라워요. 무섭다는 거예요. 매일매일 기도했어요. 그때 정말 기도를 많이 했어요. 사모님 한 분은 40~50명을 놓고 기도를 했대요. 놀라운 것은 뭐냐면, 교회학교의 변화의 그래프와 자기 기도의 그래프가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거예요. 생생하게 변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기도의 힘이에요. 너무나 놀라운 일이에요.
우리가 바로 이런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결국 이렇게 기도에 깊이 헌신되어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하는데... 그렇게 안한다 이거죠.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기도를 안하는 이유는 못해서 안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의 열렬한 은혜 속에서 살던 신자가 기도에서 뒤로 미끄러지는 순서가 있어요. 여러분도 언젠가는 물론 지금 살아있는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러나 지금 그런데서 이탈되어 있는 분들도 언젠가는 마음을 모으면 하나님 앞에 기도가 막 쏟아져 나오고 내 기도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는 각별한 친교의 시기를 경험했을 거예요. 아주 축복된 시기예요. 그리고 신앙생활의 관건은 열렬한 기도의 세계를 얼마나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사느냐라고 하는거죠. 이것이 모든 성화와 성결한 삶, 그리고 능력있는 복음 전도와 열매 맺는 목회 사역을 위한 필수적인 거예요.
그런데 이만큼 목회 생활을 하면서 여러분들께 말씀드리지만 누구도 대가의 경지의 도달했다고는 말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기도의 마에스트로는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 혹은 신학을 전수해주는 일에는 마에스트로가 있을 수 있어요. 대가가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는 마에스트로가 있을 수 없어요. 모두 매일매일 새로운 전쟁터에 부름을 받는 신병일 뿐이에요. 그래서 로이드 존스 같은 대가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지금도 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여러분들이 들어보지도 못한 말씀의 세계를 펼쳐서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 생애에 있어 가장 충만하게 마음을 쏟아놓던 때, 그런 특별한 때가 몇 번 있었어요. 언제나 저의 표준은 거기예요. 그런데 거기에 못 미쳐요. 오늘 아침에도 그 생각을 하면서 많이 슬펐어요.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하나님 앞에 깊이 매달리면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던 기도의 시간들, 생사를 걸고 기도할 때, 부딪치는 영적 싸움의 칼들의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할 때 들려오던 그분의 감미로운 음성.
그런 생각을 했어요. 아 나는 왜 나는 그때의 특별했던 기도의 세계로부터 멀어져있는 것일까? 그리고 만약에 영영 그런 기도의 세계 속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날에 주님의 얼굴을 뵈올 때 얼마나 부끄러울까?
기도해야 될 제목은 이렇게 많고, 곳곳에 상한 영혼들, 우리가 생사를 걸고 기도했더라면 엎드러지지 않고 일어났을 영혼들, 우리가 목숨을 걸고 기도하면서 죽음을 경험했더라면 다시 살아났을 많은 영혼들, 옛날보다 더 많은데... 내 마음이 왜 이렇게 냉냉해졌을까? 하나님에 관해서는 청산유수같이 가르쳐도 하나님 앞에서 가슴을 찢는 간절한 바람, 내 생명을 걷어 가시든지 내게 영혼을 붙여 주시든지,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내 기도를 들으시든지, 내 목숨을 끊으시든지... 왜 이런 순교의 결단들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걸까? 육신의 연약함과 너무나 쉽게 타협하고, 왜 그렇게 되는걸까? 그러면서 슬펐어요. 어떻게 해야 될까?
그러면서 정결함을 잃어버리고 점점 은혜로부터 미끄러져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요. 이게 저만의 고백이겠어요?
신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무서운 대적은 평안이에요. 육적인 평안, 세상적인 평안이에요. 그것이 영혼을 잠들게 해요. 결국은 무디어지게 만들어서 양떼가 아파도 울지 못하는 목자가 되고, 양들이 위험한 계곡에서 신음 소리 내고 울어도 밤이 어둡고 길이 험하다는 이유 때문에 그 음성을 듣고도 잠자리에 드는 삯군이 되는 거예요.
너무 마음이 아파요. 우리가 이렇게 언젠가 열렬히 기도하는 때가 있었는데...
이 생명도 달라시면
십자가에 놓겠으니
허물뿐이 육신 속에
참 빛을 심게 하시고
가시뿐인 세상 속에
빛으로 남게 하소서
우리 하나님 앞에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가슴을 찢는 교사의 영혼은 순결한 영혼이에요. 그는 약하는 그를 붙드신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걸 수 있어요. 우리는 우리의 사역의 현장을 액체로 물을 들여야 해요. 거기에 우리의 땀을 바르고, 우리의 눈물을 바르고, 우리의 피를 발라야 해요. 그 현장 속에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거예요. 언젠가 우리들에게 이런 기도의 세계가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사역을 할 정도로 기도의 에너지를 영혼들을 위해 쏟아 붓기는커녕 자신의 경건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쇠약해버린 영혼으로 살아가요.
그래서 눈에 보이는 모든 조직들은 규칙적으로 돌아가지만, 그 안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의 전선에서 밀리고 있는 거예요. 생명의 역사가 사라지고 있는 거예요. 바쁘게 움직이고 기능은 움직이는데, 기도를 시켜보면 교사들의 영혼이 현저히 메말라 있어요. 이렇게 되는 이유는 뭐냐 하면, 순서가 있어요. 제일 먼저는, 기도에 있어서 준비되는 것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기도에 있어서 준비되는 것은 뭐냐 하면, 기도가 언제 필요한 상황이 되든지 간에 기도가 필요로 할 때 쏟아져 나올 수 있도록 내면의 세계 속에 기도의 영이 꽉 차 있는 상태예요. 그래서 부대에 쌀이 가득 들어있으면, 그 쌀을 시험하기 위해서 후크로 콱 찌르면 쌀이 확 쏟아져 나오잖아요. 그러면 (레드네스??)가 항상 갖추어져 있어야 되요. 근데 시간이 지나면서 은혜에서 미끄러지면 이것을 잃어버리게 되요.
그리고 두 번째 단계로 가면, 기도의 모양은 남아있는데 기도하기를 꺼리게 되요. 기도하기를 점점 꺼려하게 되요. 그래서 기도의 모양은 남아있는데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요. 그래서 기도 시간도 있어요. 그래서 규칙적으로 기도회에도 나와요. 교사 기도회에도 나오고, 기도 생활도 해요. 남들이 보기에 아주 규칙적인 기도 생활을 이어가요. 근데 문제는, 기도의 능력이 사라진 거예요. 이때 나타나는 현상이 뭐냐면, 기도하려고 엎드리면 이상하게 잡생각이 기도 시간 내내 자기를 사로잡아서 기도에 몰두하지 못하게 되요. 그렇지 않으면, 기도하러 가기만 하면 졸음이 쏟아져 오고. 그래서 기도의 모양은 갖추었는데 실제적으로 기도의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이게 두 번째 단계에요.
세 번째 단계에 가서는 기도하기가 싫어져요. 그렇게 되면 형식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져요. 적당한 구실이 생기면 기도에 헌신할 그 시간을 침범해 버리는 거예요. 어차피 기도 속에서 느끼는 달콤함이 없으니까 양보해 버려요. 그리고 기도가 되지 않을 때 그 기도의 자세를 하고 있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거절감이예요. 그것을 증명함으로써 자기를 정직하게 평가해야 되는데 그렇게 안해요.
마지막 네 번째가 기도의 의무를 무시해 버리는 거예요. 그 정도 되면, 교사의 영적인 싸움에 있어서 창, 칼, 갑옷까지 다 반납한 상태예요. 그런 상황이 되고 나면 이제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는 아주 무기력한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가 돌보는 영혼들을 눈앞에서 사자의 공격, 짐승의 공격을 받아서 내 양떼가 물려 가는데도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양떼를 치는데 있어서 기본적인 도구가 뭐라고 했죠? 하나는 지팡이고, 또 하나는 막대기예요. 지팡이는 양떼를 인격적으로 인도하는 도구예요. 양의 목에 걸고 그리로 가지 말라고 잡아끌어요. 이건 지도용 도구예요. 막대기는 뭐냐 하면, 끝이 뾰족한 흉기예요. 그래서 맹수가 달려오면 그걸로 맹수와 투쟁을 벌여 찔려 죽여버리는 거예요. 이것이 우리 목회 사역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기둥이예요. 한편으로는 인격적으로 그를 감화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힘으로 감동을 주어서 그를 인도하는 거예요. 또한 원수에 대해서 전투적인 사람이 되는 거예요.
기도하지 않으면 둘 다 사라지는 거예요. 영혼들이 인격적으로 감화를 한다더라, 기도가 메말랐기 때문에 말씀이 나와도 항상 상체에서, 두부, 머리 부분에서 나오는 거지, 이 속에서 자기를 움직이고 감동시키는 활력된 말씀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에요. 삶 자체를 휘돌아 나온 말씀이 아니기에 항상 한계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인격적인 감화가 안되요. 더욱이 기도하지 않으니까 영적인 능력이 쇠약해져서 원수가 와서 내 양떼를 물어가도 그것에 대항할 능력이 없어요. 이미 자신이 지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러면서 기도의 전선에 있어서 자꾸 뒤로 물러가요. 결국은 힘겹게 사역을 계속 하다가 마지막에는 결국 기도 안하면 마지막에 이 사역을 내려놓게 되요. 자유함을 느끼는 거죠. 그렇게 되면 사실 그는 많이 미끄러진 상태 속으로 들어가게 되요. 훌륭하게 충만하게 하다 딱 끊고 새로운 섬김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역을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다가 하다가 못하겠으니까 집어치는 거예요. 그러면 그 영혼은 사역을 그만두면서 급속하게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의 설교를 들으면서, 또 시편 130편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 들으면서 이런 설교를 기억하실 거예요. 작은 범죄처럼 보이는데도 하나님이 특별히 큰 것으로 다루실 때가 있는데, 그건 하나님이 섬기도록 주신 탁월한 은사를 외면할 때, 그때 하나님이 영혼을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거예요. 영혼에 깊은 곤고함이 오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기도에서 미끄러지는 순서예요.
근데 회복되는 것은 반대로 회복이 되기 시작해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영혼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 섬기는 자이기에 앞서 한 사람의 신자로서 참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며 진실되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어야 해요. 근데 그런 자원이 우리에게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주님 앞에 의지하게 되는 거예요. 영혼을 돌보아야 할 임무만을 감당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교사의 중요한 사명인 현존으로서 참으로 우리의 가르침이 확립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그런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것이 현실적으로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자원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요. 그래서 교사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주님을 깊이 사랑하는 인격이에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를 목양으로 불러주실 때에 물으셨던 질문에 그것이 농축되어 있는 거예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래서 잘 생각해 보면, 기도는 곧 사랑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요.
그래서 기도는 언제 가장 생명력 있고 풍부하게 쏟아져 나오느냐 하면, 주님과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연합을 이루었을 때 기도가 자연스럽게 쏟아져 나와요. 이 연합이 해체되고 실제적인 연합이 느슨해졌을 때 기도는 매우 힘겨운 작업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사역에 있어서만 어려움이 오는 것이 아니라, 실제 구도자인 한 사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 자체에 어려움이 오는 거예요. 그
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우리 같은 그러한 종류의 죄나 유혹에 굴복할 가능성이 없었으면서,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들을 돌보는 사역을 감당하는 일에 있어서 그 능력을 공급하는 원천을 기도로 삼으셨던 거예요. 예수님의 생애 전체는 그러한 기도의 피눈물을 하나님께 바치신 그런 생애를 사신 거예요. 예수님이 그런 생애를 사셔야 했다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얼마나 많겠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정말 그것을 기억해야 되요.
나는 지금도 이렇게 목회를 하지만은 내 생애에서 너무 그리워지는 목양의 현장은 사실 열린교회가 아니에요. 전도사 때에 목양하던 그 현장이 그렇게 그리워져요. 지금보다 설교를 못했을지는 몰라도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았던 것 같아요. 이렇게 과거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이지만, 특별한 기름 부으심이 있었어요.
토요일이면 영혼들을 위해, 회심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 교회에 가있으면 선생님들이 모여요. 아무도 오라하지 않았는데 하나씩, 둘씩 모여요. 영혼들이 모여요. 어떤 때는 이십 명씩, 삼십 명씩 모여요. 모여서 기도하기 시작하면서 새벽 네 시까지, 기도하다 보면 어느 날 훤하게 먼동이 터요. 우리가 몇 번 기도했는지도 모르고, 서너 번 정도 밖에 기도제목을 올려놓은 적이 없는데 한 번의 기도제목을 올리면 한 시간씩, 한 시간 반씩 누구도 그치는 사람이 없이 그렇게 열렬히 기도했어요.
영혼을 위해서, 그리고 변화되지 않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했어요. 교사들이 가슴을 두드리면서 울면서 기도하다 보면 너무 가슴이 아파서 두드려요. 아침에 예배를 드리고 집에 가서 샤워할 때쯤 되면 가슴 위에 주먹으로 하도 쳐서 멍이 들어있는 것을 교사들이 발견해요.
정말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지 몰라요. 우리가 믿을 것이 있다면, 그렇게 연약한 막대기 같은 우리를 주님 손에 붙드셨다는 사실 하나만을 우리들이 신뢰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들이 얼마나 주님께 더 매달려야 하는지 생각해보세요. 저를 포함해서 여러분 모두에게 제안하고 싶어요. 우리 많이 기도합시다.
요한 웨슬레는 감리교를 창설한 전설적인, 영적인 인물이었어요. 요한 웨슬레가 사역하던 유적지를 방문하 던 어느 목사가 안내인에게 말했어요. “웨슬레 목사의 위대한 사역의 성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랬더 니, 웨슬레가 목회하던 교회에서 뜯어낸 판자대기를 보여주었어요. 무릎 패인 흔적이 나타났어요. “이게 뭡 니까?” “당신은 감리교 목사라면서 이것도 모릅니까? 웨슬레 선생님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사역의 자리입 니다.” “그러면 그가 매일 어떻게 사역을 했습니까?” “목사님, 그러면 거기 무릎을 꿇으세요.” 무릎을 꿇었 어요. “엎드리세요. 눈을 감으세요, 이제 우시면 됩니다. 가슴 아파하면서 그렇게 우시면 됩니다. 이게 웨슬 레의 섬김에 하나님의 축복이 따라다녔던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합시다. 기도합시다. 영혼을 위해 끌어안고, 그 영혼의 상태와 운명이 내 운명인 것처럼 기도합시다. 우리 자신의 경건조차도 감당해나가지 못하는 이 연약함을 벗어버리고 헌신적인 기도 속에서 우리 에너지를 축적합시다. 그래서 우리 그것들을 퍼서 영혼들의 입에 넣어줍시다. 기도할 수 없는 영혼들은 기도할 수 없기 때문에 넣어주고, 기도하는 영혼들 위에는 기도가 더 불타오르도록 기름처럼 그 위에 끼얹어 줍시다. 그래서 우리의 사역의 현장에 놀라운 성령의 불이, 영혼을 쇄신시키고 변화시키는 은혜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그렇게 헌신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