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을 이기는 기도생활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이 진공에서 하거나 혹은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서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늘 우리들은 상황 속에서 살아가요. 문제는 뭐냐 하면 상황이 우리를 기도하도록 잘 도와주지를 않는단 말이지요. 그래서 기도하라고 권면을 하면 지금 상황이 기도할 상황입니까? 그렇게 말하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인생을 살아나가는데 크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환경에 길들여져서 살아가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환경을 개척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환경을 개척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말도 안 되는 그런 일들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런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되면 그러면 우리는 그 잘못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에요. 여러분 주위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습니까? 매를 맞고 사는 부인만 있는 게 아니라 매를 맞고 사는 남편도 상당히 있다는 거예요. 왜 그러고 사냐? 부인이 남편으로부터 첫 번째 두들겨 맞은 날은 며칠 동안 잠을 못자는 거예요. 그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런 것들이 두 번 세 번 자꾸 반복되면 자기의 그런 상황을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다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니까 도무지 뭔가 상황을 개혁하고 변화시켜서 자기의 신앙에 맞게끔 환경을 바꾼다라고 하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기도생활은 바로 그런 식으로 환경에 길들여져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깊은 기도가 나올 수 없습니다. 도전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에게 기도가 불이 붙게 되지 싸울 의지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되겠다는 의지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기도에 관한 한 영원히 새길 교훈은 이 기도생활은 우리들이 지상에 있는 동안에는 영원히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은혜 이것 없이는 우리들이 인생을 살 수 없으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된다, 그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상황을 기도생활에 있어서 우군으로 보지 말고 싸워서 정복해야 할 적군으로 보는 것이 기도생활을 놓치지 않는 비결이다 이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새벽 미명의 시간의 시간에 기도하러 가신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는 말씀을 전하시고 많은 사람에게 가르치시고 베드로의 장모가 병든 것을 찾아가 고쳐주시고 심방을 하시고 하루 종일 일하고 저녁에 숙소에 들어오셔서 잠자리에 들려고 했는데 예수님께로부터 병 고침을 받은 진짜 소망이 없는 자들이 병든 자들을 많이 데리고 왔어요.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숙소 앞에서 문전성시를 이루었어요. 예수님이 그 사람들을 다 고쳐서 돌려보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고치셨을까요? 내가 명하노니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나으라 그렇게 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궁극적인 관심은 그 사람들의 병든 육체보다는 그런 불행한 삶의 궁극적인 원인이 되는 그들의 마음 그들의 영혼을 고치는 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고쳐서 그들의 모든 인생을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늘 어떻게 하셨을 것 같아요? 틀림없이 각양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고쳐주실 뿐 아니라 천국의 복음을 가르쳐서 그들의 마음속에 천국에 대한 신앙에 대한 깨달음을 주셔서 보내셨겠지요. 그런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예수님의 섬김을 다 받았을 테니 시간은 상당히 늦은 시간이 되었을 것이고 심하면 새벽 요즘으로 말하면 한 두시가 되었을 지도 모르지요. 그 바로 그 다음날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에요.
새벽 미명에 예수님이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단순한 이야기지만 이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수님의 상황은 기도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피곤한 몸으로 잠자리에 누웠다가 이른 새벽 아직까지도 어둠이 잔뜩 깔려 있는 그 들판을 지나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외로이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생활을 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환경에 떠밀려서 기도할 수 있을 것이라 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어요. 배를 정말 잘 모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과 구분 되요. 어떻게 구분 되냐면 배를 잘 몰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파도가 항상 배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방해하는 어려움으로만 작용해요. 그러나 오랫동안 배를 젓고 바다를 잘 아는 사람들은 파도를 타면서 배를 저을 줄 알아요. 그래서 찬송가에 나와 있는 것처럼 풍랑 이는 파도를 통해서 더 빨리 가는 방법을 배운단 말이지요. 그래서 상황이 조금 어렵고 힘겨울 때는 기도에 능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약간 어려운 환경 때문에 더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고 더 간절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요.
신학교 다닐 때에는 제일 부러운 사람이 공부만 하는 사람이 제일 부러웠어요. 그런데 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공부를 했어야 했으니까 그 마음의 고통이라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어요. 이 세상에 소원이 있다면 하루 종일 방해받지 않고 실컷 공부해 보는 것이 소원이었어요. 시험 때가 되면 창고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점심시간에 옥상에 올라가서 난간에 기대서서 노트필기 한 것 보면서 공부를 하고 전철을 타고 오면서 차 안에서 책을 들여다보고 책을 살 돈이 없으면 녹음기를 빌려서 책방에 가서 책을 구경하는 척 하면서 필요한 부분은 녹음을 해서 책을 풀어서 숙제를 하고 그랬어요. 그 때 같이 신학교에 다니던 형제들이 몇 있었는데 다들 그렇게 힘들어 하니까 소원은 공부만 하는 게 소원이었지요. 그 중의 한 형제가 월급도 많이 받고 직장 생활 열심히 했었는데 어느 날 기쁨에 가득해서 그래요. 김 전도사 내가 드디어 응답을 받았다고. 무슨 응답을 ? 하나님이 공부만 하게 해 주셨대요. 야 좋겠다. 그랬죠. 6개월 지나고 나니까 직장 다닐 때가 훨씬 좋았대요. 왜? 이제는 출근할 일도 없고 시간이 넉넉하고... 학교 일찍 가면 돌계단을 올라가며 너무 많이 울었어요. 노력하기 싫어서도 아니도 아닌데 왜 하나님은 우리 짐을 안 벗겨주시나 그런 거지요. 그 형제도 그랬어요. 끝나고도 15분 항상 채플실에서 기도하고 왔어요. 그 때도 그렇게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어요. 왜냐면 그냥 깨어 있는 순간 그 자체가 가책의 연속이에요. 책을 들여다보면 공부를 못해서 눈물이 나고 교회에 가서 보면 기도를 못해서 눈물이 나고 영혼들을 보면 정신 빼놓고 몸만 와서 섬기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나고 누가 어학을 잘한다더라... 나는 그것도 못하고... 늘 슬펐어요. 그런 상황에서 공부만 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니 우리 모두 부럽죠. 근데 그 형제 얘기가 직장을 그만두고 환경이 좋아지니 무한한 가능성이 보였다는 거지요. 그런데 계산에 안 넣은 것이 하나 있어요. 인간 자신이 내면의 세계에 가지고 있는 게으름과 부패에요. 그건 생각을 안 한 것이에요. 그랬더니 제일 먼저 없어지는 것이 몸부림치는 생활이 없어지는 거예요. 시간이 많으니까.. 결론은 6개월 동안 지나고 나서 어땠느냐 그랬더니 기도생활은 약해지고 텔레비전 프로는 훨씬 많이 알게 되었대요. 텔레비전 볼 시간이 어디 남아요? 근데 그렇게 되더라는 거예요.
똑같아요. 하늘 아래 사는 인간이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어요. 그러니까 우리 몸의 안일함은 한이 없어요. 조금 안일하게 해 주면 더 많이 더 많이...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이 그런데서 차이가 나는 거예요. 주님을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것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극복을 하려고 몸부림을 친다고요. 주님을 사랑하지 않거나 조금밖에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사랑이 없기 때문에 환경에 쉽게 굴복해요. 환경 자신이 우리를 억누를 수 없어요. 반드시 환경자신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불신앙적인 요소와 손을 잡을 때 우리의 기도생활이 좌절된다 이거지요.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이 모습을 뵈면서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밤늦게까지 병자들을 고치고 말씀전하고 심방하셨으면 피곤한 건 당연하잖아요? 예수님이시라고 안 그러시겠어요? 새벽이니까 새벽 미명이라고 그랬으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밤이에요. 밤. 잠시 후에 새벽이 오면 밝아지겠지만 아직은 캄캄한 어둠이에요. 어둠. 요즘같이 해가 긴 때에는 4시 40분 정도를 미명이라고 하면 딱 맞겠어요. 약간 빛이 있어요. 4시 반 정도. 그런 시간에 예수님이 기도하러 나가신 거예요. 기도하러. 힘들죠.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그러니까 지혜로운 선조들은 이 세상에서 주님을 믿는 것이 평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상한 것이 아니고 당연하게 받아들였어요. 괴롬과 죄만 있는 이곳에서 저 높은 것만 바라보면서 살았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변함없는 기도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커다란 영적인 능력을 유지하며 사실 수가 있었고 고통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사시면서도 고통보다도 더 큰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기도 속에서 늘 맛볼 수 있었던 것이에요.
저는 요즘 상처의 치유 회복에 대해 시편 23편을 통해서도 많이 다루었잖아요? 근데 나는 그 말이 성립을 하는가에 대해 요새 회의적이에요. 상처의 치유 이런 말이 성립을 하는 가에 대해서.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이런 거예요. 우리가 태어나면서 인생을 살면서 어떤 사람에게 상처를 받기도 하지요. 어떤 때는 강하게 눌려서 그 마음의 눌림 때문에 어떤 굽은 성품들을 만들어내기도 해요. 그것이 죄악 된 습관일 경우에는 패역을 만들어내기도 하죠. 다양한 요소들이 생기잖아요. 그런 것들이 생겨나는 것은 쉽게 생겨나는데 없어지는 것은 쉽게 없어지지 않아요.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고 흡족한 은혜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자기를 다 치유하셨다 그렇게 느꼈거든요. 실제로 전에는 그 상처나 그 마음에 있는 어떤 눌림들이 그 사람의 인생 자체를 확 휘어잡고 그것들이 원하는 대로 인생을 끌고 갔거든요. 그런데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 안에서 정말 자유로워진 거예요. 그런 것을 우리는 치유라고 해요. 그런데 그 것도 그 은혜를 잘 유지하고 살아야지 은혜가 다 떨어지고 나면 다시 우리들이 하나님의 친밀한 교제가 사라지고 상처받기에 적당한 마음, 이러한 마음으로 변하면 모두 항복하고 손들었다고 생각했던 수많은 것들이 일제히 궐기를 하고 일어나는 거예요. 다시 상처는 상처대로 고통은 고통대로 원한은 원한대로 막 솟아나요. 그러니까 두 가지를 다 강조해야지 하나만 강조하면 안 된다 이거죠. 봐요. 뭘 보면 알 수 있어요? 우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을 때 죄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잖아요? 죄를 용서를 받았고 실제로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을 부어주셨단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들이 은혜 생활을 잘 하지 못하니까 우리들에게 주신 죄를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들이 이미 약화되면서 예수 안에서 자유하게 되었던 많은 일들에 대해서 다시 구속을 느끼고 그런 것들이 다시 우리 안에서 살아서 역사하게 되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강하게 고쳐 주시는 것도 강조해야 되지만 또 하나는 그렇게 고침을 받은 이후에 계속해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도 동일하게 강조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렇게 살아가게 하는 은혜의 방편 중의 하나가 기도이고, 예수님께서 그 비밀을 아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 기도의 생활을 열심히 해 나가는 거지요. 죽 떠먹은 자리에 표 안 나고 배 지나간 물결 위에 자국이 나지 않듯이 우리들이 한두 번 기도 안했다고 해서 표가 나겠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계속 쌓이면서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약한 영의 세계를 갖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환경을 기도를 해서 기도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꾸어 버린다 라고 하는 적극적인 신앙을 우리들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여름이 다가오고 우리의 육신이 매우 곤해지는 때이거든요. 가을보다는 확실히 기도생활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집중도 덜 되고. 그렇지만 새롭게 떨치고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간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