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사 결단의 기도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녹취자 : 김세나
늘 신앙의 모습을 한 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정말 신앙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위기를 닥쳐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위기는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지고 있는 신앙의 한계를 아주 송두리째 드러내 보여 줍니다. 우선 위기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가 되면 그 사람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 앞에 깨어있는 사람이거나 혹은 위기가 닥친 그 순간에 하나님 앞에 깨어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영역에서는, 이 세상에서는 모르는 게 약인 경우가 있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모르는 게 무엇일까요. 약하고 비슷한 말. 악. 세상에서는 모르는 게 약일 경우가 있지만 신앙의 세계에서는 대부분 모르는 게 악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인이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위기를 위기라고 파악하고 그것을 위기라고 진단할 수 있을 정도 되면 그 사람은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깨어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위기가 닥쳐 온 그 순간에 아 이것은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다. 들리는 소리나 아니면 애통하는, 언어는 없어도 이 상황이 소리치듯이 나에게 말한다. 그런 것을 깨어나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기는 우리의 신앙을 여실히 드러내 보여줍니다. 때로는 말입니다. 매우 성실한 신앙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서도 이런 것을 거의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 헛 다닌 사람들입니다. 대게 어떠한 사람들이 이렇게 인생의 위기가 왔는데도 그 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느냐 하면 껍데기만 교회에 다니고 내면의 신령한 세계가 모두가 무너져 버린 사람들, 쉽게 이야기 하면 외식하는 사람들. 제가 말씀 드립니다만 외식은 누구에게 보여야 되겠다라고 생각을 하고 그리고 자기를 치장하는 것만이 외식이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난 신앙생활을 도저히 내면의 세계가 받쳐 주지 않는 것, 다 외식입니다. 주님께서 외식을 버려라 말씀하신 것은, 사실 외식하는 사람들에게는 버릴 것이 없습니다. 왜, 속에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없는데 겉으로는 주님을 공경합니다. 주님이 외식을 버려라 말씀하신 것은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자, 예배에 나오는데 몸은 나오는데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습니다. 전혀 주님을 공경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외식을 버려라 말씀하시는 것은 무슨 말씀이에요? 너 다음주 부터는 교회에 나오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고 껍데기만 있으니까 껍데기를 버리면 뭐가 남아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배교입니다. 그것이 침륜에 빠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것을 버리고 껍데기만 버리면 속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대로 자연스럽게 불신자가 되는 것 아닌가요. 그런데 주님이 그 외식을 책망하신 것, 형식적인 예배를 책망하시는 것, 그렇게 제사를 드릴 바에야 당장 집어 치워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실제로 그 모든 행위를 그만 두라고 하는 것이 관심의 초점이 아니라 그러한 형식으로만 나타난 신앙적인 삶에 어울리는 내면의 세계를 갖도록 너희 자신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지 못한 것은 위기이다.
이 세상에서의 위기는 돈 떨어지면 오고, 건강이 상하면 오고 사랑하던 사람이 죽거나 죽을 병이 들거나 아니면 이 세상에서 불행하거나 나쁜 소식이 오면 위기가 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특징이 뭐냐 하면 나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느낀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의 위기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많이 느낍니다. 그런데 도무지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하고, 위기를 위기로 느끼지 못하니까 당연히 거기에 대한 적절한 대처가 없을 것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대처하지 못하니까 결국은 대처하지 못하는 게 우리의 입장에서는 몰랐기 때문에 대처하지 않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의 놓여있는 상황을 깨닫고 적절히 대처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못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다른 것을 하느라고 마땅히 하나님 앞에 해야 할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거부한 것입니다. 제가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걸어가는 게 뭐 그렇게 힘이 보여요?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사람 걸어가는 것이 공격적으로 보입니까. 다른 데 쳐다 보다가 가다가 부딪히면 여기 찢어지고 피가 흐르고 계단 하나만 헛 딛으면 뼈가 부러지고 다리 부러지고 온통 난리가 납니다. 그만큼 인간이 평범하게 자기 생활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 같아도 그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순종이 있고 하나님을 향한 강력한 거절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아주 완고하게 당신이 원하시는 길을 알려고 하지 않고 다른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 앞에 투명하지 않으니까 하나님 앞에 뭔가 비춰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번에 열린마을에 나온 간증에도 보니까 그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내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고 정확하게 말하면 발견하는 그것이 내게는 두려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자꾸 묻어놓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살고 하나님 앞에 투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합니다, 자신을. 그러니까 뭘 찾는데 좀 자세히 보고 싶어하면 어떻게 합니까. 좀 목양실에 있을 때 저는 거의 불 안 켭니다. 끄고 약간 캄캄하게 보이는 곳에서 컴퓨터도 다 하고 다 합니다. 작은 글씨를 보려면 스탠드를 켜고 그 아래다가 자기 보고 싶은 것을 내 보입니다. 그러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왜 사람들이 왜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그게 그 소리 같고, 그게 그 소리 같고 무엇인가 상세하게 가르쳐 주려고 하면 너무 복잡하다고 말하고 따지기 좋아한다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들에게는 빛이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빛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투명하게 살고자 하고 하나님이 앞에 온전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놀라운지를 아는 사람들은 적당히 살아가는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좋은 집을 버리고 돼지 우리에서 이불을 펴고 자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더 많은 빛을 필요로 합니다. 내 삶을 더 온전하게 하고 싶어하니까 더 많은 빛이 필요합니다. 취미가 아니라 그것은 생명이 달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더 많은 빛, 더 많은 진리, 보다 더 상세한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내 삶에 대해서 하나님이 정말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그것을 더 간절하고 절실하고 절박하게 필요로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위기가 오면 위기를 즉각적으로 간파할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법칙을 통해서 일어났지만 그리고 인간사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러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일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 중에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분들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합니다. 여러분, 물론 성령님께서 매우 특별하게 역사하시면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보다 더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더 잘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러한 유사한 체험들을 하나님께서 주시며, 저도 그러한 체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그러한 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늘 말씀하신다 하더라도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성령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보다 더 많은 경우는 우리의 경험이 무뎌서 그렇겠지만 그것 보다도 일반적인 경우는 하나님이 우리들을 깨닫게 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혹은 상황으로 우리를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얘기치 않게 예배에 참석을 했는데 성경을 차례대로 풀어나가고 있었는데 바로 그 지점에 우연히 들렀는데 자기가 고통하고 괴로워하는 문제에 대해 답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일반적인 경우는 상황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찾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려고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는데 여러분들의 영혼이 계속 곤고하면 그것도 메시지입니다. 그러니까 왜 왜 내가 주님을 찾고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하는데, 왜 내 영혼이 곤고할까. 메시지입니다. 내가 맡고 있는 양떼들이 계속 실족하고 아픈 일들이 생기고 견디기 힘든 고통스러운 일들이 생겨나서 영혼들이 계속 상할 때 양떼들이 자꾸 도적질 당하고 상할 때 그 때 거기에 메시지가 없다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메시지가 있습니다. 깨어있는 사람들은 이런 메시지들을 빨리빨리 깨닫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잠들어 있는 사람들은 가끔 깨달았다고 하는데 그것이 깨달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공상속에서 상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깨어있는 사람들은 상황이 주는 메시지들을 정확하게 읽어냅니다. 그러면서 들리는 음성은 없어도 보이는 환상은 없어도 하나님이 언제나 늘 가까이 계셔서 상황을 통하고 환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환경과 상황이 이것이 위기다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줄 때 성경은 우리가 어떠한 식으로 하나님 앞에 반응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구절은 아시다시피 에스더의 죽으면 죽으리라는 기도입니다. 여기에서 강조점은 금식의 날수나 금식한 사람의 수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수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갈대수풀이 이렇게 나면 갈대를 이렇게 한번 가로로 뚝 부러뜨려 보셨습니까. 갈대가 잘 꺾어 집니까. 안 꺾어집니까. 갈대가 연약하다는 것은 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 연약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꺾어보십시오. 절대로 안 꺾어집니다. 어디를 꺾으면 분질러지느냐 하면 갈대가 마디가 있습니다. 거기를 딱 꺾으면 분질러집니다. 다른 허리는 분질러도 분질러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을 살다가 보면 그렇게 갈대의 허리와 같은 그러한 아주 중요한 지점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하나님만을 찾고 부르짖어야 할 그런 시점을 하나님이 인생을 살다가 몇 번씩 몇 번씩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제대로 찾아서 정말 오늘 여기 나오는 에스더의 기도와 같이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그러면 그 위기 속에서 하나님 앞에 찾은 것이 자신에게 놀라운 축복이 되도록 하나님이 바꿔 주십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쏟아 붓고 기도하지 않으면 그 다음에 열심히 기도하려고 해도 그것은 마치 갈대의 허리를 붙잡고 분질러 뜨리려고 노력하는 것 같이 그렇게 힘겹고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결단을 가지고 기도를 하기를 원하시는 그 시점에서의 기도는 그렇지 않은 시점에서의 열심있는 모든 다른 기도 보다도 훨씬 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주님, 여기에서 나를 만나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생을 신앙생활을 하면서 한번도 죽으면 죽으리라를 못해본 기도생활의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사람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만나주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에 대해서 불공정하다거나 하나님을 많이 찾았는데도 하나님을 못 만났다거나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그 시점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서서 기도를 시작하면 하나님이 그 기도를 강력한 추진력으로 밀어주시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게 느껴지지 않으면 그러면 몇 가지를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우선 첫째는 기도는 포인트가 맞았는데 삶이 기도와 어울리지 않는 삶입니다. 전혀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신은 죽어도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진 채로 누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면 말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든지 삼켜버릴 듯이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는 그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 교회가 영혼사랑으로 가득찬 교회가 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기도할 수도 없거니와 만약에 한다면 그 안에, 그 사람 안에 존재하는 연극배우로서의 소질이 만들어낸 정서이지 진정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온 감정이 아닌 것입니다. 삶의 초점과 기도의 초점이 맞아야 뭔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초점이 맞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스럽고 하나님이 들으시게 고통을 드리는 기도입니다.
(예화) 제가 지금은 그래도 좀 안경을 제대로 맞춰서 썼습니다. 옛날에 가난하던 시절에 동네 안경점에 들어가 물어봤는데 10만원입니다. 남자 종업원이 안경대 놓고 쭉 파는데 15000원 이어서 이게 왠 떡이냐 하면서 맞췄습니다. 맞추고 나가서 한 한달쯤 흘렀는데 머리가 터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견뎠습니다. 6개월 이상 견뎠습니다. 안경점에 가보니까 도대체 이 안경을 어디에서 맞췄냐는 것입니다. 초점이 양쪽으로 1.5씩이나 틀린데 이 안구의 초점과 안경의 초점이 딱 맞아야 하는데 이것은 여기가 초점인데 안경은 이쪽으로 초점이 온 것입니다. 초점이 두 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머리가 너무 아픈 것입니다.
하나님도 삶의 초점과 말하는 기도의 초점이 안 맞는 기도를 할 때 그렇게 괴로우실 것입니다. 쟤가 도저히 저런 기도를 할 수 없는 아이인데, 왜 저런 기도를 하는가. 마음에도 없는 기도를 왜 하니. 차라리 정직하게 나는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라고 땡깡을 하는 기도가 낫지, 마음에는 도저히 삶이 쫓아오지 않는 그런 기도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럴 때에 기도가 미는 힘이 없고 기도가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지 못하였을 때 불붙는 마음은 있는데 이 기도 자체의 초점이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는 자신의 영혼의 문제를 위해서 하나님 앞에 깨달으라고 환란과 어려움을 주셨는데 문제가 물질에 있다고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겠는지 하나님 앞에 구하는 것입니다. 초점이 안 맞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기도의 초점이 안 맞을 때 그런 것입니다. 또 하나는 불순종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지나치고 난 다음에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에 대한 기도입니다. 물론 불순종했기 때문에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게 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충분히 더 깊이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엎드려야 합니다. 이제 이렇게 이 시점이 내 인생에 있어서는 참 심각한 위기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 앞에 사생결단하고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러한 각오와 이러한 마음이 안 서려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는 하나님을 만날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위기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그 사람만이 기회가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을 무너뜨리며 간절히 간구하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비로소 그 사람의 마음을 당신에게 확정된 것을 확인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확인하고 싶어하십니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 다 아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보고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으니. 이삭을 재물로 바치고 난 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고백으로 표현된 사람을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그렇게 간절히 여기가 내 인생의 위기이다, 그리고 그 기회를 지나치면 하나님의 징벌이 올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이것이 기회다. 이것이 기회다. 아, 여기구나.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다 쏟아 부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감동시키시면, 시간을 정해 놓고 매우 특별하게 기도할 수도 있고 금식할 수도 있고 물도 마시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오늘 이 에스더와 그의 동족들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릴 수도 있습니다. 그때 그 마음에는 어떤 마음이 동반되느냐 하면 죽으면 죽으리라. 무슨 뜻이냐 하면 항상 무엇인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최고로 마르고 닳도록 보호하시는 그러한 개념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 간절히 자신을 바쳐서 기도할 때는 죽음이라는 것이, 내가 이점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고 이 인생의 기회를 주님의 힘으로 이겨서 인생의 위기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내 인생은 산 것이, 산 것이 아닙니다. 무슨 희망이 하나님 앞에 있겠습니까. 이런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갖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합니다. 기도가 뜨거워 질 수밖에 없고 간절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무슨 기질의 문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그 시점에 와서는 하나님 앞에 간절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오로지 나를 구속해 주신 그리스도 예수 만이 이 시점에서 내가 부르짖어 기도할 수 밖에 없는 유일한 대상이고 그 분에게만 희망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을 살면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것을 얼마나 고백하십니까. 죽으면 죽으리라 살기 위해서 이 민족이 기도하고, 에스더도 살기 위해서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안 들어 주시면 그만입니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죽으면 죽으리라고 말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구하는데 그 뜻이 이뤄져야지만 자기가 여기 살아있는 것이 의미가 있지,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자기가 여기에 살아있으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죽으면 죽으리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자, 사랑하는 동족이 하만의 계략으로 말미암아 모두 몰살을 당할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 때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데 자기는 살아있고 동족은 모두 죽었습니다. 이 에스더는 그와 같은 상황을 기도하면서 꿈꾸지도 않거니와 만약에 그런 일들이 가능하다면 자기도 함께 죽는 것이 가치있고 올바른 것이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것은 죽음을 향한 결단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붙들고 매달려야 겠다라고 하는 결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살려고 하는 사람은 살려고 하는 것만큼만 죽을 수 있고, 죽으려고 하는 사람은 죽으려고 하는 만큼만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부르짖을 때 그 때가 무슨 시간이냐 하면 인공위성이 땅으로 떨어지는 순간인 것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아십니까. 김준곤 목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맨날 교회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그리스도의 부딪힘이 없고 하나님과의 부딪힘이 없는 사람, 하나님 앞에 깨어진 적이 없는 사람은 인공위성과 같다. 수없이 돕니다. 수없이. 10년, 20년 수 없이 돕니다. 그러면 뭐합니까. 고물 될 때까지 계속 돕니다. 수없이 지구에 사진을 전송하고 지구를 모두 인공위성이 쳐다 보고 있지만 그러나 지구는 지구, 인공위성은 인공위성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설교도 많이 듣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알고 교리도 배우고 계속 들어도 모든 것은 개념으로만 남는 것입니다. 한 번도 부딪쳐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살고 그렇게 기도하니까 그렇게밖에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씀 드린 것처럼 이것이 내 인생의 위기이구나. 그리고 주님 없이 사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 없이 하나님의 신앙의 복락없이 이렇게 사는 것이 정말 사는 것인가. 그러면서 하나님을 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런 식으로 계속 산다면 마지막에 내 인생은 어떻게 될까. 그것이 과연 성도의 인생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과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구속의 은혜를 받고 꿈꾸고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자랑하고 그리고 이 모든 삶을 다른 사람들도 살고 싶어했던 그 삶인가. 그것이 아닌가. 그러면 이 시점 속에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 시점에서 기도하는 그 순간에 그 인공위성이 땅에 떨어져서 부딪히는 것입니다. 고물 될 때까지 계속 돌다가 결국은 모든 기능을 멈춰 버리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한번도 그 분과 부딪혀 보지 못한 인생의 종말 아니냐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한번도 핑계는 많고 이유는 여러 가지 많은데 성경을 배워 본 적도 있고 진지하게 책을 읽어본 적도 있지만 문제는 그런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전도하라고 하면 전도에 관한 책을 읽고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에 관한 세미나 하고 가정을 제대로 하라고 하면 가정에 대한 영화를 보고 그리고 때우면서 그러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정보를 찾아서 여기저기 해매고 돌아다녔지만 그러나 나를 변화시켜 주시는 하나님 자신을 찾아본 적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찾고는 쥐꼬리만큼 찾고는 개꼬리만큼 실망하는 것입니다. 조금 하나님 찾는 시늉을 하고는 마치 자기가 장구한 생활동안 수도의 인생을 살아온 것처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다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에 덜렁덜렁 거리며 돌아다니는 것처럼 사는 것 같은데 쾅 하고 하나님 만나서 새 사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 차려서 말씀 깨닫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반쯤 두들겨 맞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찾기 위해서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이 교회 저 교회 다니고 수많은 책들과 책들 돌아다니면서 거의 정신 분열에 이르기까지 뭔가 몸부림을 치고 기도하고 그랬는데도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쉽게 만나 주신 하나님이 그 사람은 이상하게 더디 만나 주실 수 있습니다. 똑같은 말 하고 싶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듯이. God will repay. 하나님이 갚이 주실 것입니다. 누구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왜 다른 사람이 그렇게 쉽게 만나는 하나님을 나만 그렇게 어렵게 만나고 다른 사람은 그렇게 쉽게 극복하게 하시는 그 위기를 나는 이렇게 장구한 세월동안 미친 듯이 씨름해야 되는지 객관적으로 보면 내가 그 사람보다 신앙생활을 신실하게 했는데 왜 그런지 나도 설명할 수 없고 주님도 여러분들에게 다 설명 안 해 주실 것입니다. 설명해 주셔도 우리는 못 알아 들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고, 매달리면 인공위성이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없이 사진으로만 전송하던 그 땅 그 바다 거기를 인공위성이 한번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위기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영혼의 위기, 삶의 위기는 하나님이 특별히 만나자고 불러주시는 면에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위기라고 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고 괜찮아 여태까지 잘 해 왔는데. 별 일 있겠는가. 괜찮아 괜찮아 하는 동안에 마음 속에서 계속해서 불순종과 죄악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만날래야 만날 수 없는 굳어지고 화석화된 영혼으로 변질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 에스더의 기도를 통하여서 여러분들이 정확하게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를 읽고 그렇게 기도해서 하나님 만나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