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영성과 기도의 비밀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누가복음 11장 1절 상)
2003.9.24-29
15년 전쯤인가요, 제가 신학교 선생이 되고나서 그 이듬해였던 것 같아요. 교수실에서, 교수실이라고 조그만 방을 하나 학교에서 주었어요. 그런데 그 방 참 가보고 싶어요. 왜냐하면, 옆의 창을 열면 바로 산이었어요. 그래서 다람쥐들이 막 왔다 갔다 하고, 밤에는 새들이 날아와서 울고 그랬습니다. 학생들 가르치고 지쳐서 가서 창문만 열면,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서 너무 좋았어요. 교수 가서 얼마 안 되었으니까 강의 시간도 많고, 저도 공부도 계속하고 있었고 하니까, 굉장히 힘들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누가복음 11장을 딱 폈거든요.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가 그 성경 한 절을 세 시간동안 읽었어요. 그러면서 얼마나 은혜를 받았는지, 제 인생을 변화시키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어요. 그래서 완전히 변화 시켰다기보다는 평소에 가려고 하던 나를 더 강력하게 그 방향으로 가도록 혼을 불어 넣어 준 그러한 성경구절이 바로 누가복음 11장 1절이었어요. 그래서 오늘 1시간 20분정도 강의를 할 텐데, 그 시간동안 이 내용을 다 다루지는 못하겠지만, 그러나 다룰 수 있는 데까지 다루어보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목회자로서의 기도실천의 문제를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20세기의 세계적인 복음에 대해서 가장 해박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설교자는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라고 믿어집니다. 물론 이제 19세기로 넘어가면 달라집니다만. 그 목사님에게 말년에 어떤 기자가 물었대요. 설교자로서 워낙 명성을 날렸으니까. “목사님, 설교하고 기도하고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그랬더니, 이 목사님이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게 대답을 했어요. “설교는 항상 쉽고, 기도는 항상 어렵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이 설교시간에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훌륭한 설교자라도 바보가 되어 버리거든요. 그래서 챨스 스펄젼이 자신의 ‘목회자들을 위한 강의’라고 하는 책에서 설교하기 전에 설교 준비 할 때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앞두고 도와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특이하게 설교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라는 거예요. 설교하면서 마음속으로 지금 하나님이 나를 붙잡아 주시지 않으면, 난 이 설교강단에서 병신될 겁니다. 이렇게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설교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설교가 그런 것과 상관없다, 라고 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죠. 그러니까 결국은 스스로 무덤을 파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는 어느 정도 깊이 연구하고 말씀이 축적되어가고 하면 어느 정도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다들 설교준비를 몇 시간을 하느냐 가지고, 그 목회자의 설교의 질을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넌센스라, 이거죠. 무슨 뜻이냐 하면 사물을 보면서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세계를 많이 여행한 사람이 한 시간을 보내는 것과 초등학생이 1년을 본 양의 차이는 엄청날지 모르지만 그 본 것을 판단하고 적어 내려가는 차이는 오히려 전자의 사람이 한 시간 보고 말하는 것이, 후자의 어린아이가 1년을 보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 이거죠. 무슨 말인지 아시죠. 그러니까 어떤 컨벤션과 레벨 이 수준과 상태는 다른 거라 이거죠.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설교시간에 성령 충만하면, 설교가 막 쏟아져 나올 거 아니에요. 그죠.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상태가 아주 나빠. 컨디션이 나빠요. 컨디션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적인 것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죠. 신앙적이고 영적인 모든 컨디션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설교를 버벅댈 거 아니에요. 그죠. 그렇지만 똑같은 레벨에서는 두 사람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겠지만, 그러나 한 사람의 상태가 너무 좋은데 수준이 아주 낮아. 그 사람이 잘 한 설교와, 상태는 조금 나쁜데 수준은 높아. 그 사람이 못한 설교를 비교할 수 있겠느냐.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실 수 있지요? 그러니까 설교를 어느 정도 원숙한 경지에 들어가게 되면, 설교가 쉬워진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나 나 혼자도 잘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되지. 그죠.
역사상 올리버크로멜이 있었죠. 그 올리버크로멜이 왕정을 폐기하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켰고,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경건한 사람이었지요.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그가 집권하고 있을 때에 청교도 목자들을 불러서, 그 설교를 듣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실권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나중에 이제 왕정복고가 되고나서 올리버크로멜이 부관참시를 당하지요. 끄집어내서 다시 토막을 내는 거죠. 그래서 결국은 영국의 역사에서 보면 영국이 역사상에서 딱 한 번, 카톨릭에서 벗어나서 이 개신교로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딱 한 번 있었는데 그게 무산이 된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성공회로 굳어지게 되는 거죠. 어떤 일화가 있었냐면, 올리버크로멜이 존 하웨이라고 하는 청교도목사를 초청을 했어요. 설교를 해 주십사하고. 그러니까 지금처럼 순서를 미리 정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다, 불렀는데 이 청교도의 마음에 그러면 안 되는데, 저 목사님이 성경을 어느정도 능숙하게 설교할 수 있을까, 심술궂게 그걸 시험 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이 하웨이 목사가 설교준비를 다 해가지고 왔는데, 갑자기 엉뚱한 본문을 딱 펴가지고, “목사님, 이 부분을 설교해 주십시오,” 지금 막 예배 막 시작했는데.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하웨이 목사가, 네 그러시지요. 그리고 올라가서 지금 방금 편 성경 본문을 가지고 설교했는데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설교가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는데 끝나지가 않아요. 뭘 얘기하고 싶냐 하면 하웨이 목사는 얘기할 때, 성경 중에서도 많이 읽는 부분이 있고, 거의 안 읽는 부분이 있잖아요. 레위기 같은 거, 그런 걸 펼쳐서 설교를 해 주십시오. 그랬으니까 설교 준비할 기회가 있었겠어요, 없었겠어요. 없었잖아요. 그런데도 막 펼쳐가며 설교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확실히 설교시간에 매 순간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하지만, 그것도 충분히 인정하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숙달되면서 어느 경지에 이르면, 그 때는 설교가 막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이건 레벨의 문제에요. 레벨 업 된 거예요.
그런데 기도는 그런 게 없다 이거에요. 설교는 그런 게 있는데 기도는 그런 게 없다. 물론 기도도 오래 많이 한 사람들은 기도 속에서 엉뚱한 그런 이야기들은 안 하죠. 그런 점에 있어서는 분명히 상승되는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그런 게 없다 이거죠. 설교는 자기가 알고 있는 신학 지식이나, 성경 지식이 영적 상태가 나빠진다고 해서 하얗게 탈색되는 것은 아니에요. 무슨 뜻인지 알죠? 이미 들어가 있는 지식이니까. 그렇지 않아요? 개혁 신학을 배우고, 개혁신학이 정리된 사람이 성령 충만할 때는 개신교 사상 전파하고, 성령 떨어지면 카톨릭 사상 전파하고, 더 떨어지면 샤마니즘 전파하고, 그러지 않는다 이거죠.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기도는 안 그래요. 내가 수 십 년을 기도생활 하면서 목회해 왔는데, 어느 한 순간에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하얗게 탈색해 버리는 거예요. 한 줄도 생각이 안 나는 거예요. 그리고 한 줄이 생각이 나고 몇 줄을 기도한다고 해도, 기도하다가 자. 그렇지 않으면 내가 막 기도를 하는데 내 속에서 양심이 그래. “야, 네기도 계속 떨어지는 중이다, 하늘로 안 올라가고.” 이런 일은 목회를 오래도록 한 선배님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는 일이라 이거죠. 다윗이 어떤 사람이었어요. 하나님이 기다린 사람이었어요.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 한자라. 그는 구약 시대 때에 구약 속에서 복음의 장엄함을 가장 많이 맛본 (?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다윗의 시를 연구하면, 거꾸로 복음의 진수들을 많이 길어낼 수 있어요. 왜? 그가 복음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를 연구하면 바라본 복음의 실체를 찾아낼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땠어요? 진짜 파란 하늘을 쳐다보면서 야, 하늘이 맑구나, 이러지만, 그 파란 하늘 속에서 그 하나님의 majesty를 본거에요. 그래서 ‘하늘의 주는 높이 들리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위에.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과 말이죠. (? )범죄 했어요. 그리고는 어떻게 되었어요? “내가 깊은데서 부르짖나이다. 부르짖어도 듣는 분이 없고, 여호와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은혜 베푸시기를 잊으셨나이까. 그러니까 완전히 하얗게 탈색되는 거예요.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내동댕이쳐저버린 버림받은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에요. 100% 기도하는 것을 30%정도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도 없이 완전히 상한 사람으로 변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저의 강연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실 거예요. ‘그거야 간음죄를 지었으니까 그렇지. 우리는 그런 죄에 빠지지 않았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죄라고 하는 것은 그 엄밀하게 말하면 죄가 아니라 악이죠. 악. 이 말이 정의하기가 굉장히 어려운 말이에요. 범죄죠. 이 죄는 인간의 마음 안에 흐르고 있는 경향성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particular한 것이 아니에요. 이 경향성이 바깥으로 흘러나오게 되요. 흘러나와서 짓게 된 어떤 악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런 경향성들이 바깥으로 흘러나와서 간음이라는 죄로 떨어지게 된 것이에요. 그런데 이러한 가지고 있는 죄의 경향성이 이게 없다고 해서 이게 없는 것이 아니에요. 시골에서 자라신 분들은 제 이야기를 이해하실 텐데, 시골에서 닭을 잡잖아요. 암탉을 잡아요. 특히. 암탉을 탁 잡아서 털을 다 뽑아서 요리를 하려면 배부터 갈라야 하잖아요. 배를 탁 갈라보면 굉장히 재미있어요. 거기 계란이 들어있어요. 계란이. 그런데 어쩔 때는 아래로 내려와서 계란이 하얗게 껍질까지 다 만들어져서 하루만 있으면 계란이 쫙 나올 텐데, 미리 잘랐기 때문에 거기에 계란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또 하얀 계란위에 노란 계란들이 달려 있어요. 그런데 어떤 모양으로 달렸는지 기억나시죠. 아래가 커요. 포도송이 같이 여기에는 자잘한 좁쌀 같은 것들이 달려있어요. 여기서부터 하나씩 밀어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겠지요. 이게 비유를 하자면 저런 것들이 인간 속에 많이 달려 있는 거예요. 지금 이 순간에도 달려 있어요. 제 안에도 달려있고요. 달려있는데 어떤 것은 밖으로 산출이 되는데 어떤 것은 유산이 돼. 산출이 안돼. 만약에 저것이 다 산출하도록 하나님이 내버려두시면, 이 세상은 정말 볼만한 세상이 될 거야. 그러니까 왜,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이 그것을 막으시는가, 이것에 관한 것이 청교도 존 오웬의 박사학위 논문이에요. 그것을 얘기하면 지금 뭐 끝이 없으니까. 그런데 하여간 여러 가지 이유로 하나님이 그것을 막으셔요. 그러니까 그나마 세상이 이렇게 질서롭게 살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쏟아져 나오는 계란이 아니라, 이 속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신자들 안에 내재하고 있는 죄를 죽이는 것에 관한 교리들이 또 하나의 거대한 평야로 펼쳐져요. 그런데 기도 문제를 다룰 때 그 문제가 아주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죠.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일단 이 정도로만 접어놓고. 그럼 아까 다윗의 경우에는 산출이 되었어요. 산출이 되었는데, 진짜 기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산출이 되었다고 하는 이것 뿐 만이 아니라, 이러한 것이 있다고 하는 자체가 이것이 있는 정도의 크기가 깊이가 기도의 영성에 영향을 미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이런 게 없다고 해서 생명력 넘치는 기도의 삶을 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거죠. 누가 사람의 마음을 알겠으며 자기도 자기 마음을 몰라. 그래서 유행가 가운데 ‘내 마음 나도 몰라’ 그런 노래도 있잖아. 그런데 이제 이 정도 해 놓고요.
그럼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기도는 어느 경지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이거죠.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예수께서’ 이렇게 되어 있어요. 누가 기도하셨다는 거죠? 예수님이. 신학적으로 금방 의문이 나잖아요. 예수님의 정체가 뭐예요? 하나님이시죠.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다’ 하나님이죠. 하나님이신 그 분이 왜 기도하시냐 이거죠. 왜 기도 하냐. 하나님이신 그 분이. 실제로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바다를 보고 “잠잠 하라” 그러셨잖아요. 뭐 필요한 게 있으면, 그냥 명령하시면 되잖아요. 그런데 왜 예수님이 기도하시냐. 우리 인간의 경우에는 회개해야할 죄들이 있기 때문에 기도해야할 필요가 있고, 뭐 기도해야할 이유는 너무나 많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왜 기도하셨느냐.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을 깊이 있게 읽는 비결은 무엇이냐 하면, 남은 도저히 제기할 수 없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집요하게 그 답을 성경 속에서 찾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선생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생님한테 질문을 잘 하는 학생이 정말 공부를 잘 하는 학생이에요.
왜 그렇게 예수님이 기도하셨느냐 이거죠.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우선 첫째는, 예수님의 본성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그래서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동시에 또한 사람이셨거든요. 그래서 빌립보서 2장에서 ‘그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잖아요. 그래서 결국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신데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 즉, 인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신데 사람의 몸을 취하실 때 사람의 성품도 함께 가시셨다는 거죠. 그 때 사람의 성품을 가지신 이 방법이 하나님의 성품이 담겨진 예수님의 존재의 그릇 속에서 신성을 다 퍼내서 버려버리고 인성을 가지셨다, 라고 하는 견해와 또 하나는 이 속에 하나님의 신성이 있는데 그대로 내버려 두고 인성을 또 가지셨다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 거예요. 전자는 이단적 교리에요. 퍼내고 가지신 거죠. 그러니까 인간이 되셨으니까 어차피 기도해야 할 의무가 생겨나는 거예요. 기도와 관련시켜서 이 교리를 이야기 한다면. 그런데 그게 아니에요.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성품이 있으신데 이걸 놔 둔 상태에서 인성을 아울러 가지신 거예요. 그러니까 방식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신데 이것을 인성으로 덮으신 거예요. 그래서 이 신성과 인성이 공존하는 거예요. 왜 이렇게 하셔야 했는지는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 그럼 또 속죄론까지 나오니까. 참 구주이시기 위해서는 저렇게 되셔야만 했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기도와는 무슨 상관이 있느냐. 방식이 인성 밑에 신성을 감추신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쓰셨어요. 그러니까 이 분은 죄는 없으시고 동시에 하나님 자신이시긴 했지만, 인간이 지닌 죄를 제외한 모든 연약함을 그대로 가지신 거예요. 그렇게 인간의 성품을 가지셨을 때, 인간이 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서 갖는 관계 중에서 창조 시에 가졌던 가장 탁월하고 확실한 관계가 무엇이냐 하면, 절대적 의존의 관계에요. 이 절대적 의존의 관계가 있는 그 곳에는 반드시 그 결과로서 절대적 순종이 있게 되는 것이에요. 그것은 우리의 경험도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죄가 아직 없어요. 그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살도록 되어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있었다 이거죠.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순종하면서 하나님께 기대어 살아갔다 이거죠. 좀 더 설명을 드릴게요. 이런 거예요. 이해를 하기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가 기도할 때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어느 한 순간에 내가 너무 죄인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주님 없이 내가 살 수 없다. 그리고 정말 이제는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나는 어떻게 할 수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나는 정말 주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겠다, 라는 마음 때문에 마음이 녹는 경험 하신 적 있죠. 회심한 사람은 모두 그런 경험이 있어요. 그런 경험이 똑같이 아담에게도 있었다고 보는 거예요. 단 하나는 없었죠. 죄가 없었으니까, 죄에 대한 뼈저린 참회 같은 것만 없지. 그 다음에는 나는 도저히 나 혼자 살 수 없고 정말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는 우리들이 오늘날 은혜 받았을 때 경험하는 그 의존의 마음이 있었다고 보는 거죠. 그리고 그렇게 될 때에 그 인간은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 수 있다, 라고 하는 것이죠. 이렇게 절대적인 의존의 특성이 인성의 특성이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인성을 취하셨을 때에는 인성에 따르는 동일한 모든 본질과 효과들을 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한꺼번에 가져온 거예요. 그래서 제가 쓴 비유에 의하면, 그렇게 하나님을 의존하는 의존의 감정은 인성이라는 이불을 위해 놓여진 수와 같아요. 수 따로 이불 따로 그렇게 취할 수 없잖아요. 이불을 끌어 덮으면 수놓은 것도 함께 따라와서 자기 몸을 덮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이해되시죠? 그런 의미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수 밖 에 없었다 이거에요. 본성과 관련해서.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기도하셨던 이유는 죄는 없으셨지만, 우리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거예요. 이건 칼빈의 설명이에요. 뭘 가르쳐주고 싶었느냐 하면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싶으셨던 거예요. 자. 이런 얘기죠. 같은 그리스도인인데, 기도도 하나도 안하고 자기 힘으로 살던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돈이 딱 생기면 자기도 모르게 ‘그거 어떻게 해서라도 돈 해결이 되었네.’ 그러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운 좋았지.’ 이렇게 말해. 그런데 그 문제를 놓고 평소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던 사람이면, 딱 생겼을 때 하나님의 인격을 느껴.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나를 바라보시면서 나에게 그것을 주시는구나. 그러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그것을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싶으셨던 거예요.
마지막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예수님이 후일에 당신이 모든 구속의 대업을 이루고 부활 승천하시고 나면 우리들 중에 신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전심으로 당신을 본받으려고 할 것을 아셨을까요. 모르셨을까요. 아셨죠. 그래서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셨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거예요. 그리고, 그 기도의 응답이라는 절차를 거치면서 기꺼이 그렇게 살아가는 방식에 자기 자신을 맞추신 거예요. 더 많은 이야기가 있지만 이정도로 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갈게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기도하셨다고 하니까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해야 하겠느냐 하는 것이죠. 우리가 예수님처럼 순결합니까. 예수님처럼 능력이 많습니까. 예수님처럼 특별히 하나님과 친교를 누리며 살아갑니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훨씬 더 많이 기도하면서 살아가야죠.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것이 죄에요. 기도하지 않는 행위자체가 율법적으로 죄가 된다기보다도, 기도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목회자이든 평신도이건 간에 저기서 이탈한 거예요. 절대적 의존의 관계에서 이탈한 거예요. 이것은 창조 시에 인간에게 지정해주신 자리에요. 여기에서 이탈한 거예요. 그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기도 안 했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이 절대적 의존의 관계에서 이탈해 버렸기 때문에 그가 생각하고 있는 인생에 대한 계획, 프로그램, 그 다음에 가고자하는 오리엔테이션. 이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거기로 향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기도 안했다는 율법적인 죄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절대적 의존의 관계에서 이탈된 거라 이거죠.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얼마나 기도 안하나 보세요. 얼마 전에 목회자를 위한 잡지를 읽었어요. 제가 그것을 아주 상세히 읽어 보았는데 목회자 928명에게 앙케이트 조사를 했어요. 그런데 제가 그 통계를 모두 기억을 하는데 50%이상이 하루에 1시간도 기도 안 하는 걸로 통계가 나왔어요. 30분도 기도 안 하는 목회자가 굉장히 많아요. 30%이상. 그리고 세 시간 이상 기도하는 목회자는 겨우 8%에요. 저는 그 통계를 보면서, 이러한 통계가 사실이라면, 물론 여러 가지 변수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우리 정황으로 볼 때 이것은 신앙생활조차 불가능한 수준이에요. 목회는커녕 신앙생활조차 불가능한 수준이라구. 하루나 이틀은 어쩔 수 없는 요인 때문에 그럴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이 장기간 계속 되면, 이미 그의 spirituality는 다 파괴된 거예요. 이게 개인적으로 살아있는 spirituality를 유지하면서 하나님과의 영적인 세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그 일은 저런 식으로 나태한 삶을 통해서는 견지되지를 않는 거예요. 굉장히 심각해요. 너무 안 해요. 목회자가 저부터도, 비즈니스맨인지 영적인 사람인지 구분이 안 가요. 실제로 우리 교회에 이름만 대면 여러분 다 알만한 분입니다. 몇 만 명 교회를 목회하시는 분인데 그 분이 그래요. “김 목사, 난 교회가면 그룹의 회장이 된 건지, 목사가 된 건지 구분이 안 가.” 교회에서 다루어야 할 너무나 많은 일들이 비 영적인 일들이야. 그것이 비 영적인 방법으로 행해져요. 굉장히 심각해요. 너무 많은 목회자들이 관심 자체가 목회에만 있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 그건 성경적이지 않아요. 예수님이 실패한 시몬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의 목회자로 세우실 때에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목회의 비결만 묻지 않으시고, “Do you love me?" 하고 물으셨어요. 네가 날 사랑하느냐. 의미심장한 말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기도 안 하는 가운데 목회자가 그 많은 일들에 시달리고, 유혹에 노출된 가운데서 정말 순결하게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제 경험으로는 불가능해요. 문제라는 것이죠.
그리고는 모든 생각과 방식들이 너무 세상적인 방식으로 채워지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와 목회, 선교의 전선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항상 문제에 대응하는 방식이 깊은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는 그런 방법이 아니라, 현대의 학문과 연구의 결과에 그리고 상황에 대한 진단과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제약회사 사람들이 약을 만들고 약국에서 약제사들이 약을 조제하는 방식으로 즉석에서 착착착 처방해서 이것이 대책이다, 라고 내 놓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교회가 서는 것이라고 하면, 기독교의 역사는 거룩한 목회자들이나 선교사들이 아니라, 기업가들에 의해서 이루어져 왔을 거라 이거죠. 예수님께서도 기도하셨으니까, 우리로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거죠.
두 번째 어디서 기도하셨다고 그랬죠. 한적한 곳이 아니고, ‘한 곳에서 기도하셨다.’라고 되어 있죠. 누가도 그 장소가 어딘지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확인할 길이 없는 어떤 장소였어요. ‘토포토니’라고 나오는데 ‘어떤 곳’ 이런 뜻이죠. 예수님의 생애는 한 곳에 주민등록 하시고, 거기에 사택에 계속 거주하시면서 말씀 전하신 그런 사역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오늘은 여기서 묵으시고 내일은 저기서 묵으시고, 그러면서 동가숙 서가숙 하시면서 사신 생애였어요. 그래서 많은 곳을 여행하시면서 그렇게 사신 생애가 예수님의 생애였어요. 예수님이 그렇게 많은 곳을 여행하시면서 사신 생애였기 때문에 예수님 당신 자신을 소개하실 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 들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말씀하신 거예요.
날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진정 예수님은 그런 삶을 사셨어요. 제가 외부로 많이 안 나가려고, 굉장히 애를 쓰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여행을 나오면 가장 많이 손해 보는 것이 기도생활이에요. 진짜. 그 다음에 집회로 인한 피로, 수면시간의 불규칙. 이런 것들 때문에 기도의 리듬이 보통 노력하지 않으면, 흐트러져요. 예수님은 매일 그런 생애를 사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를 복음서에서 추적해 보면, 예수님이 기도하신 장소가 성경에 너무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것을 보고 너무 깜짝 놀라게 되요. 몇 가지만 짚어 볼게요. 어떤 곳에서는 예수님이 강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 있어요. 누가복음 3장 같은데. 그리고 두 번째는 예수님이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나와요. 또 세 번째는 예수님이 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나와요. 네 번째는 예수님이 빈들에서 기도하셨다고 나와요. 광야에서. 그러니까 뭘 보여 주냐 하면, 우리처럼 이렇게 좋은 교회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시간을 정해 놓고 방해받지 않고 그럴 수가 없었어요. 왜? 계속 여행하시는 생애를 사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기도하신 시간이 대개 언제였어요? 새벽하고 밤중이었잖아요. 그런데 이것도 십 한 2년 전에 성경을 읽다가 당연한 얘긴데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목회자들은 새벽기도만 없으면 목회할 만하다고 그러더라고요. 어느 목사님이 미국으로 집회를 왔는데, 장로님을 한 분 데리고 오셨대요. 그런데 그 교회는 집회를 저녁때만 하기로 되어있대요. 그런데 호텔방에서 목사님은 이 방, 장로님은 저 방에서 잤는데 4시 반에 일어나서 “목사님, 목사님” 그러고 깨우더래요.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새벽기도 가실 시간입니다.” 그러더래요. 그러니까 목사님이 “그 놈의 새벽기도는 미국까지 쫒아왔냐.” 그러더래요. 너무너무 어려워요. 그리고 목회자의 삶이 6시 정시퇴근이 없기 때문에 너무 너무 어려워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거 하셨거든요. 그래서 맨 날 있는 거지만 이런 의문이 들었어요. 이게 이렇게 토할 것 같이 힘든데, 예수님도 그랬다고 봐야 되잖아요. 인성을 가지셨으니까. 내가 지금 피곤한 건 죄하고 상관없잖아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을까. 그리고 일주일 이상을 고민을 했어요. 왜 그럴까. 왜 그럴까. 마지막에 깨달은 사실이 있어요. 놀라운 깨달음이었어요. “아무 이유도 없다.” 그 다음이 궁금하죠. 그런데 그 아무 이유도 없는 것을 보고나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왜 그러셨는지 아세요? 낮에 기도하시면 되는데 왜 그렇게 안 하셨어요? 낮에는 말씀을 전하셔야 했고, 낮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래서 만약 예수님이 산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러 산에 가버리시면, 병든 사람은 병든 채 고통 받아야 하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진리를 모르는 채로 고통을 받으면서 예수님 없는 고통을 경험해야 해요. 예수님이 그게 너무 마음 아프셨던 거예요. 마가복음 1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죠. ‘예수께서 새벽 오히려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니라.’ 12절인가에 나와요. 그 앞에 보면 유대주의 자들과 논쟁하고, 그 다음에 막 그렇게 고달프게 섬기시는데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으셔요. 그래서 거기를 심방을 가죠. 그리고 기도하고 고쳐주셔요. 그리고 숙소로 돌아오셨더니 밤이 되었어요. 그래서 숙소에 들어가서 쉬시려고 했더니 예수님 오시는 거 알고, 각색 병든 무리들이 거기 다 모인 거예요. 그것을 예수님이 “나을지어다.”그리고 보낸 것이 아니라, 일일이 고쳐주신다, 나와요. 하나하나 영혼을 보듬어 안으면서 그들의 이 삶의 고통을 들으시면서 하나하나 고쳐주시는 거예요. 성경엔 안 나오지만 몇 시쯤 그 치료가 끝났을까요?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제 느낌에는 새벽 2시는 넘었을 거예요. 그 다음에 뭐라고 나오느냐 하면,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한적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사’ 그걸 읽다가 한 십 몇 년 전에 펑펑 울었어요. 정말 머리 둘 곳이 없는 생애를 사신 주님.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정말 우리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때에 제 마음속에 부족하지만 뼈저리게 결심한 것이 있어요. 뭐냐 하면 ‘목숨을 걸고 새벽기도는 죽는 날까지 하리라.’
우리는 환경에 너무 쉽게 무릎을 꿇어요. 쉽게 말해서 거룩한 강렬함이 없어요. 그래서 환경이 실제로 우리를 공격하지 않고 위협만 해도 무릎을 꿇어요. 그러니까 이 기도의 영성이 모두 고갈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저는 여러분들보다 훨씬 더 목회자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어요. 이런 모임을 통해서. 또는 개인적으로. 심지어는 상담도 하고. 그런데 너무 죄송한 말씀이지만 목회자들 가운데는 기도의 영이 완벽하게 고갈된 사람들을 많이 만나요.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목회라고 하는 것은 제 경험에 의하면, 들판을 가르고 흐르는 한 줄기 강물이에요. 그래서 목회는 누가 내 목회를 다 좋다고 해. 또 누가 다 싫다고 하겠어요. 내 목회를. 그냥 하나님 의지하면서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해서 부단한 자기 깨어짐과, 몸부림 속에서 주님이 자신에게 주신 은사를 따라서, 메마른 들판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한 줄기 강물이에요. 그리고 지나가면 물 기운이 땅에 쭉 베이기 시작하면서 메마른 모래밭에 생태계가 형성이 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와서 먹고 거기에 집 짓고, 어떤 사람은 한 번 마시고 도망가요. 그러면 그게 사람들이 어떻게 하든지 그건 상관이 없어요. 문제는 영원히 내가 마르지 않고, 흐르는 강이 될 수 있느냐, 그게 문제에요. 그런데 우리 안에 뭐가 있느냐, 그거에요. 캐고 들어가면 우리 안에 있는 거라고는 시커먼 죄의 오니토(?) 밖에는 없다 이거에요. 예수님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쳐나리라 했을 때, 누가 주신 강이냐 이거에요. 그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그 강에서 솟아서 넘쳐나는 것이지, 자기 안에 그게 있느냐, 그거에요. 이 세상에서 가장 바보 같은 사람이 자기를 신뢰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나는 나를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다. 왜? 한 번도 기대를 걸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그래서 결국 우리가 두 번째를 정리하자면, 메시지의 내용은 환경에 쉽게 무릎을 꿇지 않는 강인한 resolution이 있어야 해요. 12월 현재로 저희 교회에 부목사님들이 7명인가 8명 정도 있어요. 새벽기도 시간인데 안 보여요. 지금은 교역자들이 많아서, 누가 새벽기도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잘 몰라요. 그런데 목사가 안 보여요. 그래서 새벽 기도 끝나고 강대에 엎드려서 인터폰을 했어요. 그리고 방송실의 간사를 불렀어요. “아무개 목사 새벽기도 왜 안나왔냐?”, “연락이 없는 대요.”, “전화 해 봐라.” 그리고는 다시 왔어요. “그래 뭐래?”, “아프답니다.”, “다시 전화할래? 죽을 정도 아니면 나오라고 그래라.” 그리고 내가 얘기했어요. 우리 모두 연약한 육신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새벽기도 정도가 아니라 설교도 할 수 없을 때가 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그리고 그런 때에는 휴식하는 것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에요.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니까. 그러나 이렇게 나오지 않으면,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안 나오니까 아프다고 얘기한 거 아니야. 그런데 네가 그 정신으로 목회를 하겠냐. 너무 너무 이 짊어지고 있는 영혼에 대한, 짐. 그리고 피할 수 없이 맡겨주신 이 목양의 엄숙한 직무 앞에서 내 몸은 나로 하여금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게 하는데도, 그래도 내가 이 짐을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토해 놓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서 새벽기도 하다가 걸어 나오다가 전신주 옆에서 쓰러지는 게 목회자의 생애지, 생각을 해 보아라, 얼마나, 몰인정한 담임목사인가, 그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그렇지 않아. 너무 사랑해. 그래서 바보같이 마지막 목회의 전선에서, 너무 사소한 싸움에서 뒤로 넘어지는 그런 사람으로 네가 자라는 것을 나는 볼 수 없다. 호러시우스버너라고 하는 19세기 영국의 글라스고 대학교에서 목회하던 경건한 목회자가 있었어요. 그가 청교도들을 평가하면서 historical collection 이라고 하는 책 속에서 무슨 얘기를 했느냐 하면 청교도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던가. 그들은 진리에 대한 단호함과 신적인 용기를 소유한 사람들이었다. 적이 1만이고, 내가 하나이기 때문에 1만대 1의 싸움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진리 편에 서 있다면 what man we got his majority(?)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 싸웠던 사람들이다 이거에요. 이 한국교회에 원래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로부터 받은 목회의 정신은 토혈목회에요. 피를 토하는 목회. 그리고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죽는 거예요. 그런 일사각오의 신앙이에요. 이 정신이 처음엔 네 안에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사라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토혈목회. 이것이 종교개혁자들의 정신이에요. 이게, 피 뿌리고 죽어간 수많은 청교도들과, 신앙의 선조들의 정신이에요. 이 정신을 따라 사도들이 목회하다가, 한 줌의 이슬로 사라진 거야. 심지어 어느 날 기도 그 자체도 목회의 성공을 위한 한 아트로 생각을 한다 이거에요. 그렇게 해서 그 목회가, 자신이 목회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느냐, 이거에요. 여러분 기억하시죠. 몇 년 전에 하버드 대학 신학장이 사표 낸 거. 컴퓨터 기사가 우연히 들어가서 컴퓨터를 만지니까, 포르노물이 막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거야. 이 사람이 너무 괴로워서 고발했어요. 그래서 물러났어요. 소송을 한다나, 어쩐다나, 모르겠어요.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장로, 목사, 무슨 뭐, 간판? 아무 소용없어요. 이 자체가 우리들을 어떤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시켜주고, 영적인 어떤 것들을 유지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라고 말했던 거예요.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날만 죽은 것이 아니라, 이방인의 선교의 아버지가 되고 대 사도가 되고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쓰고,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그 순간에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래서 그는 살았어요. 우리의 가슴에 살아있어요.
마지막으로 성경에 보면 예수께서 기도하시고, 한 곳에서 어떻게 하셨다고 나오죠? 마치시매. 이 한 마디에 비밀이 담겨 있어요. 이 동사는 마치다 ,라고 하는 뜻도 있지만, 이 희랍어는 근본적으로 그 배경자체가 히브리어 사유에서 온 거예요. 그래서 이 에파우사티의 동취어가 뭐냐 하면, 히브리말의 샤바트에요. 여기서 영어의 sabbath 온 거예요. 안식일. 결국은 무슨 뜻이냐 하면 ‘안식을 하다’ 예요. 그러면 우리 의도에 맞게끔 정확하게 번역을 하자면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쉬시매.’ 그럼 이 속에 뭐가 담겨있다는 의미죠? 예수님의 기도의 시간이 장시간이었다라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 11장에 나와있는 내용들을 reconstruction하면 대개 이렇게 되는 거죠. ‘사도들이 일어나 보니까 예수님이 사라지셨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갔어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저기서 기도하고 계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거룩하고 진지하고 열정적이었기 때문에 다가가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교의 시간을 깨뜨릴 엄두를 낼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기다린 거예요. 예수님이 드디어 기도를 모두 끝마치신 다음에 무릎을 펴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에, 즉시 예수님 곁으로 제자들이 달려와서, 그 감화를 받은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요한이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었는데 우리도 예수님께 기도를 배우고 싶습니다.’ 그 문맥이라 이거에요.
그럼 이것은 뭘 말해주는 거냐 하면 예수님의 이 기도는 간단한 기도가 아니었다는 거예요. 휴식을 취해서 그 휴식 안에서 몸과 육체, 그리고 마음이 거룩한 펜션을 풀고 잠시 쉼을 취하지 않을 정도로 자기를 모두 쏟아 부은 그러한 헌신은 기도의 헌신이 장시간 (?)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거예요. 사람들은 가끔 이런 생각을 해요. 짧은 기도를 가지고, 한 마디의 짧은 l기도를 가지고 상황을 확 뒤집어 버릴 수 있는 기도의 위력에 대해서 이야기해요. 그것은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짧은 기도를 가지고 커다란 기도의 능력을 하늘로부터 불러 내렸던 사람들은 모두 공통점들이 있었는데, 그 공통점들이 뭐냐 하면, 평소에 긴 기도 속에서 깊이 자신을 dedication하던 사람들이에요.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일들이 거의 일어나지 않아요. 원하시면 여러분들이 여기 나가시면서 실험을 해 보셔도 돼요. 여호수아서에 보면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가나안에 들어가죠. 원주민들을 추격하는데 해가 떨어져요. 어두워지면 그 지리를 원주민들이 더 잘 알기 때문에 어딘가 숨어 버릴 것이고, 숨어버리고 나면 그들을 진멸하라고 하는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여호수아가, ‘가라, 해야, 거기 멈춰라.’라고 명령하는데 이것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라, 변형된 기도의 형태에요. 그런데 그대로 순종하지요. 여러분도 나가면서 똑같이 한 번 해 보세요. 되나. 여호수아는 그렇게 한 마디의 기도로, 해, 달을 stop시킬 수 있기까지, 모세의 그늘에 가리어서 철저하게 훈련받으면서 기도의 사람으로 헌신되어 왔다라고 하는 흔적이 명백한 증거가 성경에 여러 번 나와요. 그중의 하나가 바로 그 십계명 사건이었어요. 하나님이 우상을 섬긴 것을 알고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 백성을 다 날려버리고 32장에서, 그리고 너를 중심으로 새 민족을 일으키리라.’ 그랬더니, 모세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매달리니까 하나님이 변경된 명령을 주시는데 ‘너희는 가나안으로 올라가라. 내가 보내주겠다. 그러나 나는 안가고 내 사자만 보내겠다.’ 그 의미를 그제 서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깨달은 거예요. 가나안이 중요해요? 임마누엘 하시는 하나님이 중요해요? 두말할 필요도 없잖아요. 하나님이 안 가시는데 가나안이 무슨 소용이에요. 이제야 비로소 제 정신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놀라운 각성이 일어나요. 33장에서. 그러면서 회개하는 거예요. 그리고 자신의 단장품들을 다 제해버리고 마음이 이 천상의 것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바뀌고, 이 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의 영을 충만히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니까 모세가 회막을 만들고 불붙는 사람이 그 회막으로 가서 하나님을 뵈옵고 그 얼굴을 구할 수 있도록 장소를 만들었어요. 그 때에 거기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와요. ‘모세는 회막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으나 여호수아는 거기서 그 회막을 지키며.’ 뭐하면서? 기도하면서. 한 사람의 영적인 사람은 풀무불속에 담겨지는 것 같은 고난의 시련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막 물건이 생산되듯이 신학교에서 찍어내지는 게 아니에요.
예수님도 이 케이스의 예외가 아니었어요. 예수님이 사역하시는 낮 시간 동안에 한번도 하나님이 예수님의 기도를 거절하신 적이 없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서 ‘내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했으니,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시는도다.’,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심을 감사하나이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잖아요. 그런데 어떤 삶이었어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낮 시간에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계신 삶을 살기까지 제자들마저도 피곤하여 깊이 잠들어 있는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걸어 나가셔요.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봐요. 제자들이 잠들어 있는데 예수님이 살며시 일어나셔서 문을 빠져나가 아직까지도 깜깜한 새벽 숲길을 걸어서 한적한 들판으로 나아가서 거기서 기도하시는 장면을 생각해봐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셔요. 자기를 쏟아 부으면서.
나는 오늘 우리 모두에게 묻고 싶어요. 성공한 교회의 목회자도 아니고, 또 이런 저런 일에 하나님이 나를 쓰시려고 한다는 자부심을 가진 일군도 아니고, 선교사도 아니고 그런 거 아니고 한 사람의 평범한 하나님의 자녀로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 자기 자신이 모두 쏟아 부어서 깔대기 같은 곳에 액체처럼 녹아서 나 존재 자체가 주님의 심장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라고 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그렇게 자기가 물같이 녹는 것을 경험하며 기도해 본 적이 언제에요? 얼마 안 되는 세월을 목회하면서 제가 깨달은 평범한 결론이 있어요. 목회자가 강단에 엎드려서 흘리는 그 눈물은, 교회에 강같이 흘러서 생명 있는 신자의 뿌리는 강건하게 하여 열매 맺게 하고, 쓴 뿌리는 파고 들어가서 태워버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요. 한국교회에 최초로 구약학을 가르치시던 김치선 박사님이라고 총신에 계셨어요. 그 분은 설교할 때마다, 지금은 다 돌아가셨지요. 이북으로 끌려가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분은 설교하실 때마다 그렇게 많이 눈물을 흘리셨어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그 때 한국의 동네가 2만 8천 동네였대요. 남한에. 너희들은 2만 8천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 왜? 이 백성들이 물이 없어서 너무 갈급해하니, 너희들은 그 백성들을 위해 예수이름을 전하고 우물을 파라. 그런데 신학교에서 가르치셨으니까, 야간 수업까지 하셨거든요. 그러니까 뭐 굉장히 건강도 안 좋으신 노인네가 혹사당하는 삶을 사셨어요. 사택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목사님이 안 와요. 통근시간도 지났는데 목사님이 안 와요. 끝났는데 밤을 새우셔요. 어떻게 된 건가 걱정이 되어서 사택에서 나와서 신학교 채플실로 들어가면, 목사님이 거기서 기도하고 계셔요. 그런데 손가락에는 분필자국도 씻지 못한 채 하얀 분필자국이 잔뜩 묻어있고, 거기서 양복을 땅에 떨어뜨린 채 엎드려서 기도하시다가 잠이 드신 거예요. 저도 신학교에서 선생을 해 보았습니다만, 우리나라에 이 같은 신학교 선생님들이 없어요. 예수님에 관해서 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존재 자체가 예수님을 보여주는 사람, 그리고 그가 정말 우리에게 학문을 가르쳐주는 선생님이기 이전에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것을 입증해 주시는 선생님이 너무나 소수라 이거에요.
그러니까 저렇게 오래, 깊이, 많이 기도해야 하는데 그런데 그렇게 기도 안 하잖아요. 그 이유가 뭘까? 이게 궁금한 거예요. 왜 이게 안 될까?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기도를 할 수 없으니까 안 하는 거예요. 그래서 청교도 존 오웬은 자기의 논문 속에서 신자가 기도의 은혜에서 물러나가 back sliding하는 단계를 4스텝으로 이야기했어요. 기도할 수 있도록 막 준비되는 것, 이것을 먼저 잃어버린다는 거예요. 은혜가 충만한 상태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면 이렇게 되잖아요. 은혜가 가득 있을 때에는 어떤 기도해야 할 상황이 딱 생기면 거의 반사적으로 기도도 확 쏟아져 나오는 거예요. readiness 갖추고 있기 때문이에요. 언제나 기도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게 여러 가지 이유로 마음의 부패의 작용이 일어나는 거야. 그래서 결국은 레드니스를 잃어버리는 거야.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게으름이에요. 무슨 얘기냐 하면, 마음이 좀 상해서 충만한 은혜는 잃어버렸지만, 여기서 다시 기도를 하면 극복이 되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그런 기도를 해야 될 의무에 대해서 게으르게 되는 거예요. 열심히 안하고 게으르게 되는 거예요. 이게 두 가지가 만나서 형성이 되요. 영적인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이 결합이 되면서 여기서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는 거예요. 영적인 싫증이에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계속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라는 것은 아는데, “주님 도와주시옵소서.”막 이렇게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가, 싫은 거예요.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뻔한데도 하여간 싫은 거예요. 그 영적인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이 만나는 거예요. 그런데 이 둘은 항상 만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둘이 만나서 그래서 완전히 기도의 은혜를 잃어버린 사람으로 떨어지는 거예요.
세 번째는 기도의 파워를 잃어버리는 거예요. 기도의 능력을 현저하게 상실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형식만 유지하는 거예요. 마음의 열렬함들이 사라지는 거예요. 파워를 잃어버리게 되요. 그래서 새벽기도는 나와. 그런데 기도는 안 돼. 그러니까 졸다 가고, 교인들 앞에서 내가 교역자니까 할 수 없이 나오는 거예요. 기회만 닿으면 안 나오는 거죠. 의무 자체를 집어 던져버리는 거예요. 오웬이 여기까지 설명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한 단계 더 가요. 영적인 모든 삶에 대한 경멸로 나아가요.
그러면, 처방이 뭐냐? 간단하게 얘기할게요. 무슨 결론에 도달하게 되느냐 하면, 열렬함을 잃어버리고 , 그 다음에 게으름에 떨어지게 되고, 그 다음에 파워를 잃어버리게 되고, 마지막에 의무를 잃어버리게 되고, 마지막에 하나 더 나아간다면, 영적인 의무들에 대한 전반적인 경멸현상이 나타나거든요. 이렇게 될 때에 이 사람 자신의 삶 전체가 비 영적인 틀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 상태가 되면 자력으로는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 evangelical 디제스터(?)라는 책 잃어보셨어요? 쉐퍼가 쓴 책이에요. 뒤편에 가면 신학교 들어간 사람이 영매술에 접속하는 장면이 나와요. 무슨 얘기인지 아세요? 신학교 들어갔는데 거기서 모든 기독교의 진리들이 부인당하면서 방황하는 신학생이 마지막에 영매술에 빠져버리는 거예요. 신접하는데. 그 학생이 눈물 흘리면서 고백하는 얘기가 뭐냐 하면, “나는 영혼의 떡을 얻기 위해서 신학교를 갔는데 신학교는 나에게 돌맹이를 주었다.” 이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 비 영적인 틀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저는 미국을 여러분들보다 잘 몰라요. 그런데 미국의 대부분의 신학교가 비 영적인 틀 속으로 들어갔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의 영광이 사라진 거예요.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많은 논의가 필요하고 상세한 설명이 필요하지만, 시간이 많이 지나서 간략하게 정리를 하겠어요. 그럼 여기서 뭐만 공격을 해서 해결을 하면 되냐 하면, 두 가지이거든요. 첫째는 영적 싫증이고요. 또 하나는 육체적인 게으름이잖아요. 영적 싫증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는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모든 선한 영적인 것들에 대해 지겨워하는 권태감이에요. 여러분은 깜짝 놀라겠지요. ‘아니, 그런 게 어떻게 우리 안에 있을 수 있습니까?’ 많아요. 그럼 여러분은 ‘아니,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권태감을 느낄 수 있습니까?’ 있지요. 아내 사랑하세요? 안 사랑하세요? 사랑하지요. 그런데 사모님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여기 지금 고백을 하시는데 대체로 사랑한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싫증날 때도 있어요. 이 권태감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는 하나님에 대한 어떤 권태감도 없이 뜨거운 타는 듯한 마음으로 살다가 죽는 성도는 하나도 없어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날마다 죽노라 라고 말할 수도 없고, 자신을 쳐서 십자가 아래 복종시킨다고 하는 그런 고백도 필요가 없는 거지요. 그리고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 그렇게 말할 수 없어. 다 이루었다. 라고 얘기해야지. 그러면 더 궁금한 게 있겠죠. 그러면, 이 영적인 싫증이 어디로부터 올까?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두 가지로부터 와요. 하나는 뭐냐 하면, 타고난 부패성으로부터 와요. 두 번째는 피조물의 한계에요. 그러니까 영혼의 싫증은 타락한 후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도 저 영적인 권태감은 존재한 거예요. 그랬으니까 아담이 타락한 거예요. 다만, 죄가 들어오기 시작한 이후로는 저 권태감이 더 맹렬한 방법으로 죄와 함께 역사한 거예요. 유치하긴 하지만 적절한 비유를 들자하면 이런 거예요. 모든 여성들이 결혼한 후에 3년이 흐르기 전에 대부분의 여성들이 권태감을 느낀다고 통계가 나와 있어요. 그런데 권태감을 느끼는 모든 여성들이 다 부정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죠? 그러다가 애기 낳고 급진전을 하면서 남편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용서하고 다시 살고 이러다가 보면 어느 새 세월이 흘러가서 100년을 해로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권태감을 느낄 때 이 사람이 막 죄에 빠져버려. 그럼 불륜을 저지르는 거예요. 무슨 뜻인지 알죠? 그러니까 이 영적인 싫증은 선천적인 피조물로서의 연약함이에요. 그게 신학적으로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당신과 같은 신적 완전성을 안 주신 거예요. 주시면 어떻게 되요? 신이 되는 거지요. 하나님이 안 주신 거예요. 그것과 이것이 결합이 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게 아니라 사실은 이게 더 문제가 되는 거예요. 두 번째로 육적 게으름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이 기도의 습관을 몸에 배이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게으름에 떨어질 가능성이 적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은 의무로서 행할 때보다도, 기쁨으로 그 일을 행할 때 훨씬 더 양질의 성과를 거둘 수 있어요. 그래서 때로는 교회일도 일하기 싫어하는 전문가보다는 재미있어하는 비전문가가 더 좋은 사역을 하는 경우가 많아. 무슨 뜻인지 알죠. 그러니까 자기를 습관으로 딱 묶어야 돼. 그래서 교인들 가운데, “기도 합니까?”, 그러면 “네, 기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는데 “기도 시간이 언제 입니까?” 그러면, “뭐 꼭 기도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고요.” 그러면 그 기도한다는 말은 거짓말이에요. 왜냐하면 그것은 몸에 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일이라도 당장 무너질 수 있는 스타일의 것이다 이거죠. 그래서 그렇게 극복을 하면 되고요.
마지막으로 이 영적인 싫증을 극복하는 방법이 뭐냐. 여러 가지 설명이 필요한데 다 제하고 한 가지만 가르쳐 드릴게요. 가장 좋은 방법은 경건한 참회 속에서 자신이 깨뜨려 지는 거예요. 그러면 저 영적인 싫증은 물러나고 다시 하나님 앞에 열심을 내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은 참회를 통해서 자신이 깨뜨려 질 때, 저 딱딱했던 마음이 깨뜨려지고, 그 깨뜨려짐과 함께 영적인 싫증이 물러가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에서 이 육체의 게으름보다는 영혼의 싫증이 더 큰 문제가 되는 거예요. 영혼이 기도하고 싶은 갈망이 있으면 육체가 게을러도 야단을 쳐서 데리고 나오는데, 육체가 아무리 부지런해도 영혼이 기도하려고 하지 않으면, 기도하려고 나와서 기도는 하는데 기도가 성립이 안 된다 이거죠. 그렇기 때문에 자기 깨어짐의 세계가 없는 신자는 나쁜 크리스챤이에요. 그리고 나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중이에요. 그래서 청교도인 헬리스크가리라는 사람이 자기의 책,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 그 작품이 18세기의 유명한 설교자 조지휫필드를 회심시킨 책이에요. 그 책 속에서 참된 신자의 결정적인 표는 자기 깨뜨려짐‘. 그것을 통해서 싫증을 풀어버리면서 주님의 열렬함을 계속 덧입으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다시 만날 수 없겠지만 우리가 깊이 이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에서 겸비해 져야 해요.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좋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영적으로 성숙되어 가야해. 캘리포니아 저쪽으로 가면 레드우드 숲이 있잖아요. 1200년 이상 된 거목들이 서로서로 뿌리가 엉켜서 하늘을 찌를 듯이 자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게 필요해요. 기독교 지도자들은 분재처럼 되어버리고, 교인들은 묘목처럼 자라가는 세상이에요. 누군가가 거목과 같은 삶을 살아서 그 거목이 산에 맨 처음 묘목으로 심겨질 때에는 그 묘목이 산의 신세를 지지만 그 묘목이 거목이 되고나면 이번에는 산이 그 거목의 신세를 지는 거예요. 바람과 함께 날려 보내는 수많은 꽃가루들이 씨들이 날아가서 누가 심어주는 않는데도, 수많은 새끼나무들을 심으면서 산 전체를 삼림이 되게 만들어 주어요. 그리고 거기에서 어마어마하게 떨어지는 나뭇잎들이 부엽토가 되어서 산을 비옥하게 만들고 그 그늘아래 습기가 있고 그래서 수많은 벌레들이 있고 그래서 날짐승들이 깃들고 그래서 짐승들이 머리 둘 곳을 찾고, 거기서 자라는 수많은 나무들 사이로 개울이 흘러가고 그러면서 모래로 흙으로 벌거벗었던 산이 아름다운 산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거예요. 누군가가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라가야 하는 것이에요. 교만하지 말고, 모두 겸비하게 낮아지고 그리고 정말 거룩하고 진실한 사람들로 자라가기 위해서 우리 기도의 세계를 build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