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새벽예배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행 2:14-16)
녹취자: 김은정
그렇게 의혹하기도 하고 조롱하기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베드로가 다른 모든 사도와 같은 뜻을 가지고 사람들 앞에서 모두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외치는 태도를 보면은 "이제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을 들으라"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보아서 베드로는 열한 사도와 함께 자신들에게 임한 놀라운 경험 성령이 임하고 그리고 그들에게 강력한 권능과 함께 각 나라 방언을 말하게 되는 자신들도 역시 경험해 보지 못했던 독특한 체험에 대해서 모든 의미를 알고 있는 것처럼 권위를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강림 사건에서 매우 중요한 핵심입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면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은 성령으로 교회를 충만하게 하셔서 그들로 하여금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에서도 예수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토대로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성령 부으심은 필연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과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부동의 사실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시는 방식이 내적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내적측면이 무엇이냐면 성령이 임하심으로 말미암아서 거기에 있는 성령을 경험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강력하게 역사하셔서 성령 부어주심을 통해서 그들이 외치지 않을 수없는 메시지를 갖게 하신 것입니다. 핵심이 무엇이냐면 복음이라는 실체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재미있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의 생애를 다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도 보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40일을 함께 계시고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부활승천의 장면까지 모두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 잘 몰랐으며 지금 우리보다도 잘 몰랐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에 대한 경험이 있었으니까 사실 하나 하나에 대해서는 제자들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것 하나하나의 사실들은 연결점이 없이 떠돌아다니는 조각난 지식의 파편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쫙 꿰어지는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 강림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통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다 옳았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진정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성령강림 사건이 이후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니까 성령님의 강림을 통해서 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체험하게 되니까 이제 껏까지 자신들이 보았던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조각난 흩어진 것들이 연결을 이루며 하나가 되어서 장엄하게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모든 탁월하고 놀라운 이 변화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은 내적으로 초대교회의 신자들을 전파하지 않으면 안될 메시지를 가진 사람들로 준비시키시고 그렇게 해서 외적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함께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증인이 되게 하시는 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도 역시 똑같은 경우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다 봤고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이시는 것을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지만 그 상황을 다 경험했고 예수님을 3번 부인했을 때 잘못하는 줄 알고 밖에 나가서 닭이 울때 대성통곡하고 울었고 모두 다 진실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에 대한 경험이었을 뿐 이것이 정말 무엇인가에 대한 철저한 체험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가져다 준 것이 성령강림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이 깨달아야 되는 것이 무엇이냐면 성령의 부어주시는 그 은혜는 우리들을 이 세상에서 번영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이 세상에서의 번영과 관련시켜서 이해하는 것은 성령님에 대한 전적인 모독입니다. 그런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히려 성령님이 하시는 역할은 사람들에게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후에 사도들에 의해서 복음이 전파될 때에 예수를 믿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 본 사람들도 시대가 흐르면서 점점 많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동행 했던 성령 임하시기 전의 제자들보다 훨씬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처럼 말입니다. 성령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시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함으로 말미암아 그 예수그리스도에 우리를 위해 이루신 구속을 생각나게 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와 그 다음에 죄의 비참함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깨닫게 하시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고는 예수님의 고난을 제대로 알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을 당하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두 번째로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당하신 비참한 형벌을 보면서 그 죄의 마지막 결과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 발견하게 되는 방식이 객관적인 방식과 주관적인 방식으로 나뉘어지는데 객관적인 방식으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의 깊이를 보면서 죄의 비참함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방식으로는 자기 안에서 죄가 가져다주는 비참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님이 그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해 주실 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이제껏 까지 자기를 믿는 모든 것을 버리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며 따르게 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11사도들이 성령이 임하시자 이제껏 쪼가리 쪼가리 흩어다니던 예수님의 생애의 사실의 파편들과 구약에 대해서 유대인이니까 많이 알고 있던 지식과 이 모든 것들이 한번에 연결이 되면서 지금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성령의 놀라운 경험과 미래에 대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다시 올 것이라는 사실,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미래의 전망으로 찬란하게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두 번째로 나타났던 현상은 성령강림 사건으로 성령을 경험한 사도들이 구약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자 제일 먼저 거론한 것이 구약성경이었습니다. 요엘을 거론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전에는 구약을 그냥 구약이라 생각하고 거기서 유대교의 잡다한 교훈을 끌어내는 원천정도라고 생각했었는데 성령님이 강력하게 임하시고 성령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게되니까 구약성경을 보는 탁월한 안목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생각을 해보십시오 영화가 시작하면 불과 영화가 시작되기 몇 분 안에 주인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주인공이 나타나면 그 사람이 주인공일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해줍니다. 영화가운데 1시간 20분짜리 영화를 하는데 절반이 넘도록 주인공이 누구인지 아무도 모르는 영화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영화가 스토리가 전개가 안됩니다. 둘이 막 싸우는데 한 사람은 신나게 얻어맞고 한 사람은 신나게 때려서 이기고 있는데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고 스토리를 모른다면 관경을 보면서 주인공이 고난을 당하고 있으니까 잠시 후 시간이 지나면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생각해야 합니까? 아니면 결국은 주인공이 이기고 저렇게 악한 사람을 때려 죽이고 영화가 끝나는 구나 하고 해석을 할 수 있습니까? 해석을 할 수 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도들이 성령강림 있기 전에 구약에 대한 태도가 그러했습니다. 애매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이 임하시고 나니까 성경에 대한 눈을 확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성령에 대해서 눈을 열게 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결단이 곧 성경에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앙적 결단과 나뉘어지지 않는다고 본 것입니다.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그 신앙적 결단이 기록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는 결단을 내포하지 않고 있다면 무엇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느냐는 것입니다. 근거가 무엇이냐는 말입니까? 말씀이 없이 믿게 되었다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성경을 다 읽는다고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믿음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신앙을 포함한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유가 두 가지인데 무엇이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을 믿으며 구원을 얻게 된다라고하는 모든 경험 자체를 성경이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오셔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깊이 믿게 만들어 주신 그 성령이 성경의 제자이고 성경의 기록된 목적 자체가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가장 중요한 성령님의 저작입니다. 만약에 이것을 부인하게 되면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그 자체도 근거를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과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 얻는 하나님의 유일한 방법으로 받아들이는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나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들의 삶 속에서 경험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경험하고 눈물을 흘렸는데 성경이 낯낯이 의심스러운 책으로 여겨지는 그런 경험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모든 것은 은혜가 떨어지고 난 다음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전적인 의존의 감정, 믿음 그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의 감정이 아닙니까? 그런 절대적인 의존의 감정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기초로 해서 여기에 나와 있는 약속과 보증들을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그래서 이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실 때 제일 먼저 나타나는 놀라운 역사가 사도의 눈이 열리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어떻게 복음이 예수님이 가르쳐준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생각나게 만들어 주셨고 구약성경에 대해 강력한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성경의 주인공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한 일이 구약성경을 당시의 사람들과는 다른 독특한 방식으로 구약성경을 해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의미를 잘 알 수 없었던 구약의 의미들이 찬란한 빛을 뿜으며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후로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어느 곳 이든지간에 사도들이 성경의 해석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죄를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작용, 죄의 비참함을 경험하게 하셔서 회개하시는 성령의 작용, 그래서 거룩한 길로 가게 하시는 성령의 작용, 그리스도 예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성경의 증거에 대해 눈을 뜨게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모두 다 밀쳐버리고 성령이 마치 자신의 마음을 편안하게하고 만족을 주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 세상에서 자신의 개인적 번영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은 중대한 모독입니다. 이런 신앙을 확신으로 가지고 있으면 성경의 전체의 흐름을 놓치게 되고 그 위에 쌓아올려진 신앙은 참된 기독교 신앙일 수 없고 그런 신앙의 토대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리 많은 열심을 낸다할지라도 진실해질 수 없고 거룩해 질 수 없습니다. 교만과 이 세상에 대한 사랑, 자기사랑과 빗나간 자기 열심으로 뭉쳐져서 결국은 신앙자체가 겉모습은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그 속은 깊히 부패하고 썪은 신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