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4일 교직원예배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마 13:20-21)
녹취자 : 김세나
성경에서 ‘밭’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크게 두 가지 의미로 사용이 됩니다. 첫째 의미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밭이라. 혹은 밭은 이 세상이라. 또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으니, 이런 예수님의 말씀 속에 나오는 밭은 세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선하다, 악하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일구고 가꾸어야 할 터전으로서의 밭, 혹은 이미 곡식들이 익었기 때문에 영혼들을 추수하여야 할 밭,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밭’이라는 단어를 또 다르게 사용을 하는데 그것이 오늘 마태복음 13장 천국 비유에서 나오는 것처럼 ‘밭’ 할 때 인간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 ‘밭’이라고 하는 단어가 지시하는 두 가지 의미는 완전히 불리 되지 않고 서로 일맥상통합니다. 그래서 결국 이 세상은 각자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에 이 세상을 가꾼다고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가꾼다는 것이고, 그래서 사람의 마음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만큼만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최근 과학자들이 빛보다도 더 빠른 물질을 발견하였다고 해서 소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무리 실험을 해봐도 그 값이 맞는데 나온 값이 빛보다도 빠른 값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뉴턴의 물리학을 무너뜨리고 아인스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등장을 했는데, 상대성이론은 철저하게 빛 보다 더 빠른 물체가 존재할 수 없다 라고 하는 전제 속에서 출발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대성원리도 무너지는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이미 오래 전에 나사에서는 암흑 물질을 이용해서 빛 보다 더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물체를 만들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시간과 공간의 개념,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개념들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빛 보다 빠른 물질이 아니라 빛과는 완전히 다른 물질이 발견이 되어서 시간과 공간에 대한 모든 것이 뒤바뀌는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영혼과 도덕 세계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인간은 악의 문제로 고통을 받을 것이고, 도덕의 문제로 마음에 괴로움을 당할 것이고, 평안과 불안 이 모든 것을 자신의 도덕 상태에 따라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결국 우리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리고 그 진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빛보다도 빠른 물질이 나와서 과거로 이행하느냐, 아니면 미래로 더 빨리 나아갈 수 있느냐는 이런 문제보다도 훨씬 더 본질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세 사람의 경우를 예를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제자들은 도저히 깨달을 수가 없어서 그래서 예수님께 여쭤봤더니 예수님이 사람들을 못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아주 단단히 잠긴 하나의 보석함과 같은 그런 정도의 난해함을 가진 그런 비유였습니다. 한 경우는 길가에 씨가 뿌려진 것이고, 또 하나는 돌 밭에, 세 번째는 좋은 땅에 뿌려진 씨였습니다. 그리고 이 밭은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시간상 저는 오늘 다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돌밭에 뿌리워진 씨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 본 적이 없더라도 돌 밭이 무엇인지 아마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돌 밭은 작은 돌맹이들이 가득 남아있고 흙이 군데군데 섞이고 위에 덮여 있는 밭을 가리켜서 돌밭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이런 지형은 대게 아주 지질학적으로 오래된 땅이어서 큰 바위들이 다 깨뜨려지고 부스러져서 그래서 그것들이 이제 땅 속에 많이 섞여 있는 그런 지형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누가 일부러 돌맹이들을 넣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밭에서는 잎이 크고 그리고 뿌리가 잘 뻗어가야지만 살 수 있는 이런 식물들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밭들이 대게 이렇게 산등성이 같은 곳에 이런 밭들이 많습니다. 산이기 때문에 땅 속에 돌맹이가 많습니다. 그것을 농부들이 할 수 있는 한 쟁기로 밀고 혹은 이렇게 갈고리 같은 것으로 돌맹이를 긁어낸다 하지만, 워낙 많으니까 그 돌맹이들을 모두 꺼내고 흙으로만 된 밭으로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온 마음을 다하면 되겠지만, 그것 몇 달 해가지고 땅 10평 얹는다고 해서 무슨 효능이 있겠습니까. 거기에 맞는 작물을 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렇게 뿌리를 깊이 내려야 되는 그런 작물은 안 되고 거친 땅에서도 자랄 수 있는 작물을 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씨라고 할 때, 결실했다고 할 때 이것이 무슨 작물을 가리키면서 예수님께서 염두해두고 말씀하셨을까에 대해서 우리가 속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마도 밀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밀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주식이었고, 그리고 그 밀을 가꾸는 것이 농사의 가장 기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만약에 꼭 밀이든지 밀이 아니든지 간에 그런 땅에서는 사실 밀이 자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돌밭에 뿌리웠다 라고 하는 것은 길가에 뿌린 것과는 현저히 다릅니다. 길가에 뿌리웠다 라고 할 때 싹이 트지도 못하고 그냥 새가 와서 먹어버리거나 바람이 불어서 날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 것을 길가라고 한다면, 이것은 마음에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입니까. 씨가 땅에 떨어지면 습기를 머금고 그러면서 이것들이 싹을 트입니다. 싹이 트일 때에는 외부에서 양분을 공급을 안 해줘도 상관없습니다. 그 안에 있는 씨 눈이 그 씨를 썩히면서 거기에서 양분을 빨아먹고 싹이 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씨 눈에 있어서 씨는 비상식량입니다. 그래서 습도가 맞고 온도가 맞으면 썩으면서 그러면서 거기에서 양분을 빨아 먹으면서 씨눈이 발아를 합니다. 발아를 할 때에 잎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뿌리도 나오기 시작합니다. 비상식량이 다 떨어지기 전에 그 뿌리를 땅에 꽂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뻗어 가서 드디어 식량이 다 떨어졌을 때에는 발아된 뿌리가 스스로 물과 양분을 빨아 들여서 공급을 해 줘서 이제 비상식량이 아니라 정상양분을 땅에서 빨아 먹으면서 자라게 되고 잎이 자라면 잎이 광합성을 통해서 뿌리를 자라게 하고, 뿌리가 튼튼해지면 더 많이 빨아서 광합성을 하게 하고 양분과 수분을 공급해 주어서 잎이 점점 커지게 만들고 줄기게 점점 굵어지게 만드는 이 완전한 총체적인 상호교통 속에서 서로가 서로의 성장에 이바지 하면서 이 씨가 자라서 식물이 성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여기에 보면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았다고 했으니까, 마음에 영향을 준 것이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듣다라고 하는 아코라고 하는 단어는 히브리어의 샤마라고 하는 단어의 동치어 인데, 순종하다라고 하는 단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듣는데, 건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집중해서 듣고 순종해야 할 어느 정도의 의지도 그 속에 포함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다음에 마음으로 그 마음을 듣고 받았다고 했으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지성적으로 동의를 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기쁘다고 했으니까 정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떠한 정서적인 변동을 자신이 체험을 한 것입니다. 사실 이 정도면 우리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까. 말씀을 들었는데, 마음을 기울여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적으로 동의가 되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마음이 울렁거리고 눈물도 나고, 그리고 끝나고 나니까 마음속에 솟아나는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정말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을 우리들이 교리학에서 일시적 신앙이라고 부르고,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은혜를 받아도 안된다는 생각이 우리에게 상당부분 팽배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은것인가 하는 문제는 더 깊이 헤아려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돌밭에 떨어진 씨가 가진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뿌리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그 속에 뿌리가 없어서. 사실은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뿌리가 없지는 않고 여기에서 뿌리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지탱해 낼 수 있을 정도의 양분과 수분을 공급해 줄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뿌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 종류의 뿌리는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충분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것은 결국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놀랍게 말씀을 받았습니다. 지적으로 동의했고, 기쁨도 마음 속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싹이 트였습니다. 그러니까 뿌리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까 싹이 트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절대로 허락하지 않은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깨달았다라고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깨달았다라고 하는 것은 오직 마지막에 좋은 땅에 떨어진 씨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이 돌밭에 떨어졌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받아들여져서 들리기도 하고 또 어느 정도의 이해도 있고 그 다음에 기쁨도 있고 어떤 변화도 경험했는데 깨닫지는 못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 아닙니까. 몰랐던 한 가지 사실을 새롭게 알게되었을 때 우리는 깨달았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단어는 어떤 단편적인 것들에 대한 이해나 지적인 동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관련되어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이것은 어떤 한 가지 사실에 대한 이해나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이것들이 서로 연관을 맺으면서 진리 전체에 대한 이해를 갖게 만들어 주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나 종교지도자들에게 이 깨달음이 없는 것을 책망하셨고, 또 제자들도 깨달음이 없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께 꾸지람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정말 제자들에게 갖게 하고 싶으셨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당신의 오심과 인격과 중심으로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 인간에 관한 모든 진리의 체계 전체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는 그 것이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갖게 하고 싶으셨던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기에서 돌 밭에 뿌리운 것, 이것 하나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알고, 동의하고 그것 뿐만 아니라 이 속에서 기쁨도 느끼고 울컥하는 종교적인 경험도 하게 되고 그렇습니다. 그런 것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고 말씀을 깨달았다고 하는데도 무엇인가 삶의 견고함이 없는 이 현실에 대해서 아주 좋은 설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파편적으로 알고 동의하게 되고, 기쁨이 있게 되는 그 이상 그것을 넘어서는 그 어떠한 깨달음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런 깨달음이라는 것이 어떠한 성격의 것일까. 그것을 이사야서를 보면서 우리들이 깨닫게 됩니다. 그 앞에 마태복음 13장 14절을 보시면 됩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셔. 첫째,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둘째, 귀는 듣기에 둔하고. 셋째, 눈은 감았으니. 넷째, 그 결과입니다. 눈으로 보고 듣고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하노라. 이 부분이 정말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거기에. ‘이는’부터 보십시오.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그러면 진정으로 깨달은 것은 눈으로 보고 그렇습니다. 귀로 듣고, 그래서 결국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은 깨달음의 원이라고 본다면, 그러면 진정한 깨달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이렇게 하나, 깨달아. 둘, 돌이켜 셋, 고침을 받음이라고 우리들이 요약을 할 수 있습니다. 참 공교롭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의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에 관해서 이렇게 나누었습니다. 뭐냐 하면 사변적 지성과 실천적 지성으로 나눕니다. 그는 사변적 지성은 어떤 사물의 이치에 대해서 머릿속에서 질서를 정돈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사변적 지성이고, 머릿속에서 정리한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머릿속에서 정리된 그대로 삶 속에서 실천으로 옮겨지도록 만드는 지성이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실천적 지성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구분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완전히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성이 처음부터 사변을 위한 것이냐, 실천을 위한 것이냐 하는 것으로 나뉘어 지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여기에서 진짜 깨달았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이해하는 그 깨달음은 단지 우리의 생각 속에서만 지적으로 동의하고 감정의 어떤 정서의 움직임이 있어서 어떤 느낌을 만들어 주면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예수님이 이사야서를 인용하는 의도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생각하는 깨달음이라는 개념 자체는 희랍적이고, 지성 중심적인 전통에만 의지해서 우리들이 깨달음이라는 것을 지적인 작용으로만 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으로 보면 그것이 아니라 이렇게 지성의 작용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실천의 작용 모두까지 그 깨달음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에서는 깨달은 사람은 어리석게 살 수 없습니다. 불교에서 불가능한 것입니다. 만약에 그가 어리석게 산다면 아직 안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렇게 통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결국은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첫째는 마음으로 깨닫는다. 그러면 예전에 알지 못하던 것을 진리를 깨닫고 진리들이 서로 연결된 상호 관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돌이키는 것입니다. 돌이킴이라고 하는 것은 삶의 방향입니다. 삶의 방향. 쉽게 이야기 해서 구두를 기우며 먹고 살던 사람이 아침마다 출근을 해서 길거리에 앉아서 구두를 꼬맵니다. 저녁때까지 구두를 꼬매고 이 사람 구두, 저 사람 구두를 고쳐주고 돈을 받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내일도 나와서 똑같이 구두를 꼬맵니다. 모래도 꼬맵니다. 외적인 삶에 있어서 출근하는 시간부터 하나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돌이킨 사람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구두를 꼬매고 사는 삶의 이유와 목적과 방향이 바뀌었으면 그것은 바뀐 사람입니다. 외형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돌이키라고 명령하셨을 때 제사장들보고 그 말씀을 하셨을 때에는 이제는 더 이상 제사장 노릇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돌이키라고 했을 때에는 너희는 더 이상 농사짓지 말라는 이야기 입니까. 아닙니다. 귀족이나 왕궁을 향해서 너희는 돌이키라고 외쳤을 때에는 왕도 그만두고 귀족노릇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향과 목표가 바뀐 사람이 되어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진정으로 깨달았다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도덕생활에 있어서 자신의 삶의 목적과 존재의 이유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회귀. 회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과 관련해서 한번의 깨달음만을 이야기하지 말고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살아가야지만 이게 신앙생활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때 깨닫는다는 것은 뭘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똑같은 것입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똑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총체적으로는 하나님이 계시고, 창조목적을 따라 살고 주님을 섬겨야 되겠다라고 하는 원리적인 헌신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은혜가 떨어져도 우리의 지성은 이미 중생과 회심과 더불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방향 자체를 부인할 수 있을 정도로 담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 안에 있는 죄와 미끄러짐으로 원리적으로는 그 방향을 정했지만, 개별적인 삶 하나하나를 목적에 맞게끔 그곳에 올려드리지는 않습니다.
사격술 가운데 영점 조정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 사격을 하기 전에 전쟁에 나가기 전에 먼저 사격부터 할 것입니다. 그래서 표적을 놓고 표적에다가 똑바르게 맞춰서 정확하게 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금에 정확하게 맞춰서 표적을 향해 정확하게 쐈는데 몇 번을 쐈는데도 중앙에 맞지 않고 옆에 맞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내가 실수 한 것이 아니라 총 자체가 조정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영점 조정을 합니다. 조정을 해서 정중앙을 겨냥을 해서 딱 쐈는때, 정확하게 표적에 맞을 때 이 총이 제대로된 총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체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해 살고 주님을 위해 살겠다라고 하는 것들이 분명해졌지만, 그러나 우리 자신이 스스로 부패해서 원리적으로는 그렇게 목적을 정했으면서도, 그 목표를 향해 안 가기 때문에 매일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우리의 삶의 목표와 동기를 영점 조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필요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담대한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필요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제자들을 보내면서 예수님께 여쭤 보았습니다. 오실 당신이 바로 그 이 이십니까. 이 질문을 놓고 주석가들은 두 개의 해석을 놓습니다. 하나는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제발 나만 따라다니지 말고 예수님을 좀 제대로 알아라. 그래서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소수 학설입니다.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 로이드존스 목사님 같은 분들은 소수학설이라고 할 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은혜롭게 해설을 합니다. 그런데 로이드존스 목사님 같은 사람들 청교도들은 세례요한이 믿음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침체에 빠져서 예수님을 세례를 주고도 시간이 흐르니까 이 양반이 진짜 메시야인가 헷갈리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이 그리고나서 예수님이 곧바로 말씀하십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는데 천국에서는 아주 작은 자도 요한보다도 크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갖게 되는 복음의 시대의 그 믿음이 구약의 마지막에 있는 그 선지자 보다 낫다라고 하는 그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세례요한 같은 사람도 영점 조정이 필요했다면 그러면 우리 같은 사람은 얼마나 많이 필요하겠습니까. 그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무엇입니까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고침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히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라파입니다. 라파. 라파가 무엇입니까. 로페가 의사입니다.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병에 걸린 사람은 그런 상태가 될 수밖에 없고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허벅지에 커다랗게 종기가 두어 개 나면 어기적 거리고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그것이 터질 각오를 하고 똑바로 걸으면 이를 악 물고 걸으면 몇 미터야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힘듭니다. 그러니까 어기적 어기적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병은 어떤 필연적인 상태를 가져올 수 밖에 없고, 그 행동과 생존의 불편을 가져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고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깨닫는다라고 하는 것은 거기에까지 이르러서 완전히 변화되는 것입니다. 성화라고 하는 것은 결국 뭐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합니다.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의무를 행하는 것이 그에게 자연스러운 본성이 되도록 다듬어 지는 것, 그러니까 성화의 정의를 모든 불결과 죄로부터 우리를 순결하게 하시는 성령의 작용이라고 이야기 한 것은 너무 negative한 정의입니다. 그것 말고 아주 positive한 면이 오히려 성화의 정의에서 강조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가 인간 자신의 성향의 일부가 되어 버린 것, 그리고 자신도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 그것입니다.
제가 한 3주 전서부터 워킹을 밤에 합니다. 어제도 7km를 걸었는데 많이 걸으면 12-13km를 걷습니다. 두 시간 반쯤 걸리는데 너무 좋습니다. 예전에 안 걸으면 걷는 것 생각하면, 힘들었는데 그때는 조금만 걸어도 헉헉 합니다. 지금은 청계산까지 걸어 올라가는데 밤 공기가 너무 좋습니다. 더 좋은 것은 청계산 자락으로 걸으면 사람이 없습니다. 걸으면서 자연과 대화하면서 그러면서 쭉 걸어갑니다. 밤 시간이 너무 행복합니다. 오면서 마음속으로 기도도 하고 너무 좋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해야 하는 그 의무가 이렇게 나에게 즐거움이 되고 그렇게 걷지 않으면 왠지 불편하고, 의무를 못한 것이 아니라 기쁨을 박탈당한 것 같아서 마음에 뭔가 상실감을 느끼고 이러는 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성화. 그렇게 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의 신앙 중 깨달았다라고 하는 많은 것들이 얼마나 성경이 이야기 하는 참된 깨달음에 미치지 못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이렇게 깨달음에 대한 총체적인 성격을 기억을 하면서 지적인 쾌락, 만족, 정서의 변화로 인한 자기 자만심 이런 것들을 버리고 그런 것들이 충분히 돌이키게 만들고 열매를 맺어서 고침을 받는데까지 나가도록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정말 아름다운 인격과 삶으로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