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11.25 새벽예배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행선하여 바로 고스로 가서 이튿날 로도에 이르러 거기서부터 바라라로 가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서 타고 가다가 구브로를 바라보고 이를 왼편에 두고 수리아로 행선하여 두로에서 상륙하니 거기서 배가 짐을 풀려 함이러라 제자들을 찾아 거시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이 여러날을 지난 후 우리가 떠나갈쌔 저희가 다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전송하거늘 우리가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한 후 우리는 배에 오르고 저희는 집으로 돌아가니라. 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러 날 있더니 한 선지자 아가보라 하는 이가 유대로부터 내려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 하거늘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사 21:1-14)
녹취자: 이시내
확실히 이제 성령님의 증거는 아주 일관됩니다.
그래서 거기서 출발해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데 여러 행로를 거치게 되었습니다. 그러가다 이 지방에 와서 잠시 여러 날이라고 했으니까 얼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상당한 기간 동안 머물게 되었는데 여기서도 역시 똑같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는 예언이 주어집니다. 또 여선지자 한사람은 와서 아예 그 행동예언이라고 하는데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을 묶으면서 성령이 말씀하시는데 이 띠 임자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이렇게 유대인들에게 묶여서 이방인들에게 내어주게 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내어주게 된다는 것은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을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 당시에 그러니까 율법대로 판결을 해서 형을 집행하고 시행을 하려면 반드시 로마의 도움을 받아야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법정에 권력있는 세상법정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거라고 하는 것을 예고했습니다. 일관되게 에베소에서 출발해서 이제 밀레도에서 왔을 때도 그랬고, 계속해서 성령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환난과 결박이 기다란다 그러더라 이런 예언이 동일하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람들은 이 성령님의 예언을 보면서 그러니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아야 한다 환난과 결박이 기다란다고 하고 이 띠의 임자를 유대인들이 붙잡아서 이방인에게까지 넘겨준다고 하니까 그러니까 가지말아야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가지 말아야 된다는 것은 성령님의 음성이라기 보다는 환난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하는것까지가 성령님의 음성이고 나머지는 자신들이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적용을 하는데 이제 이 사람들은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올라가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매우 귀한사람이고 죽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우리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더 많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에서 그들이 그 예언을 자신에게 적용을 한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생각이 틀렸습니다. 그래서 환난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성령님이 증거하시니까 그런 일이 분명히 있겠지만 확실히 그것은 맞는 이야기지만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거꾸로 적용했습니다. 그렇지만 주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사명 곧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생명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환난과 결박이 기다리고 있어도 나는 가야한다. 왜나햐면 그것이 나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용을 한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게 바로 사명감입니다. 그래서 환난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하는 것을 성령님이 미리 가르쳐준 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피하라는 예고로 들렸지만 사도바울에게는 그러한 환난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거기 올라가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는 것으로 들리는것입니다. 그것이 같은 상황을 놓고 해석을 하는 차이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렇게 각각 다른 해석의 차이를 만들었을까요? 바로 사명감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사도바울 나름대로의 강한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그 사명감은 바로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난이후에 이미 벌써 경험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때에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님 앞에 거꾸러 지면서 주님께로부터 들었던 음성이었습니다. 너는 이방과 임금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것이 사도바울에게 주어진 사명감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일평생동안에 그것이 골수에 사무쳐서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강제력이 되었습니다. 사랑의 감화가 그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이 되게끔 만들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살아있다’ 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먹고 입고 마시고 쓰면서 걸어다니면 그것을 우리들이 살아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한사람이 진정으로 살아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죽지 않고 살아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 사람이 자신의 가슴 안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사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죽지 못해서 사는 것은 살아있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정말 살아있어야 되는 이유, 살아있는 동안에는 포기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그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지만 그 사람이 진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짜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그게 사명감입니다. 그 사명감에 사도가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똑같이 고난의 예언이 주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해석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사도바울의 마음 안에 있는 이 사명감을 동일하게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해는 할 수 있었겠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였습니까? 사도바울을 말렸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안에 이러한 사명감을 느끼며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은 살아가는 그 삶이 정말 의미를 찾기 힘들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사명감이 우리의 인생에 주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로 보니까 역시 여기서도 사람에 의한 따뜻한 인간의 정이 여기에 등장합니다.
그래서 울면서 환난과 결박을 당한다고 하니까 그게 얼마나 무서운건지를 아니까 사람들이 많이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때 사도가 이제 단호하게 그들은 나무랍니다. 왜 울어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말입니다. 왜 상했을까요? 사명이 있어 가야하는데 이렇게 우니까 이 지체들과의 인간적인 정 그리고 내가 가면 이 지체들을 누가 돌볼 것이냐 에베소에서도 설교했지 않습니까? 내가 가면 이제 흉악한 이리떼가 올텐데 그런 상황속에서도 나는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라 그렇게 말하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이들이 당하게 될 이러한 환난과 많은 어려움들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도 많은 환난과 어려움들이 있을텐데... 이들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향해 가는데 눈물을 흘리니까 이들은 누가 돌보나 하는 인간적인 마음과 목양적인 마음이 엉키면서 그러면서 많이 슬퍼하게 된것입니다.. 많이 슬퍼하고 아파하게 된것입니다. 그래도 단호했습니다. 왜 울어서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목숨을 버릴 것도 각오했다. 이러면서 그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제 세 번째로는 모든 사람들이 바울 안에 있는 그 마음을 이해할수 있었습니다. 아 그렇구나 저 분은 이제 자기의 사명을 따라서 가는구나 그러면 이제 우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끝났다. 주님께 부탁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많이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뜻을 구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가치자체가 누가 행복하고 누가 많은 것을 누리고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자체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거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인간적인 욕심도 있고 바라는 소원도 있지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는 지점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을수 있는거 그것이 바로 모든 인간관계보다 하나님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랑하는 신자들의 마음이고 사명자들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와 성도가 만나서 목회자나 성도가 유익을 받는 것도 좋지만 그러나 목회자와 성도가 만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아프고 때로는 고통이 있어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만남이 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만남을 축복하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