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스터디
* 그래서 마지막 결론은 아까 말씀 드린 것처럼 이런 항상성에 개체가 깨어질 때 한 개체가 생명이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고 그것이 경미한 손상 일 때는 질병의 과정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강의를 목사님과 짧게 나누면서 받았던 강한 인상 중의 하나는 생명의 지적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우리의 영혼이 사람 몸속에 깃들므로 자기의 생명이라든지 자기의 육체가 그 사람 것이 절대 될 수 없다라고 하는 것. 엄격하게 얘기하면 생리학 입장에서 육체는 그 사람의 소유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제가 조심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결론입니다.
그는 그 사람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프로그램도 계획하지 않았고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마치 뉴욕시가 유지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 아닙니까? 뉴욕시가 유지되고 있는 엄청난 질서와 같이 한사람의 생명은 유지되고 자기 스스로를 치료해나가는 것을 보면서 한 생명을 유지하는 지적소유권은 자신에게 절대 있지 않고 그것을 설계하고 그것을 계획하고 그것을 만든 그분에게 있다고 하는 것이 오늘 강의를 통해 얻은 교훈입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린 것은 청론인데요. 한 부분 한 부분이 너무 복잡하고 얘기할 것이 많은 부분입니다. 예전에 목사님께서 들으셨던 생리학(biology) 이라고 하는 생명체 전체가 아닌 사람의 몸을 대상으로 이야기 할 때는 생각해 볼게 더 많은 것 같습니다.
* 지금 형제님은 독실한 신앙을 가지고 이것을 하니까 괜찮은데 나와 같이 공부한 사람들은 그들도 크리스천이었어요. 그런데 재밌는 것은 천체에서 일어나는 fact, 인체와 생명체 속에서 일어나는 fact는 아는데 그 fact가 무슨 meaning을 가지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적절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공부할 때 70:30 정도로 대화를 하면서 같이 공부했어요. 그 친구들은 나름대로 굉장히 자기 학문에 대한 신학적 해설이라 그럴까. 그래서 너무 재밌는 것은 나는 아포토시스(apoptosis)와 네크로시스(necrosis) 개념이 우주에서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서 한동안 엄청난 충격을 받았어요.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우주, 인간, 사회, 인체 내부 그러니까 매크로코즘부터 마이크로코즘까지 아주 놀라운 일치를 이루고 있어요. 하나 설명해볼께요.
이 우주공간에는 H밖에 없어요. H라는 원소가 우주 안에 기본을 이루어요. 그런데 이것이 우주공간으로부터 벗어나면 1㎥안에 이거 하나있으니까 없다고 말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드물게 있던 것들이 어떤 요인에 의해서 모여요. 모이는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어요. 그 중에 중요한 한 가지는 별들이 태어날 때도 폭발과 함께 태어나고 사라질 때도 폭발과 함께 사라져요. 그런데 이런 충격파를 받으면서 이것들이 모이는 거에요. 이것들이 응집되면서 여기서 핵반응을 일으켜요. 한 별이 죽어가면서 여기서 많은 원소들을 방출하고 그 에너지로 생명이 없는 이동성이 없는 이것들을 한데 뭉쳐지게 만들어요. 장구한 세월동안 이것들이 집적이 되면서 여기서 핵폭발이 일어나는 거에요. 핵폭발이 일어나면서 그러면서 여기에 별이 생겨나게 되는거에요. 여기에 어떤 별의 탄생은 또 다른 별의 죽음의 덕을 입는거에요. 그럼 세포를 보면, 세포가 연결되면서 한 세포가 죽고 HP를 만들고 이것들이 다른 세포의 에너지가 돼서 이것을 돌리고 분열도 하고 그러면서 네크로시스(necrosis)의 죽음말고 아포토시스(apoptosis)의 죽음도 있듯이 똑같이 이렇게 되는 거에요.
빌립보서 1장에 보면 ‘내가 죽는것도 유익함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안에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매크로코즘의 세계, 인간의 도덕세계, 마이크로코즘의 세계, 도덕세계뿐 아니라 인간의 자연세계 여기까지 모두 하나의 맵으로 통해요. 지금 이 설명을 들으면서 생각나는 책이 있어요. 그것은 플라톤의 ‘리퍼블릭’, 폴리테이아라고 하는 이 책이에요. 이 책의 화두가 뭐냐면 좋은 투수. 좋은 도공, 좋은 가수라고 할 때 개념이 분명해요. 좋은 투수는 스트라익 아웃을 많이 시키는 사람이에요. 좋은 도공은 도자기를 예쁘게 만드는 사람이에요. 좋은 가수는 노래를 잘 불러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거에요. 그런데 이것들은 모두 사람이라는 범주에 속하잖아요. 그럼 이것은 우연적인 것으로 치고 사람자체를 놓고 좋은 사람이라고 하면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 이것이 이 폴리테이아의 화두입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국가론의 화두입니다. 나중에 한번 읽어보세요. 의학자의 눈에서 보면 완전히 다르게 보일거에요. 사람이 뭐냐고 묻는거에요. 대답을 할 수 없는거에요. 이런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 하면 기준이 있어야 하지 않아요. 누가 만든 기준이냐 이거지요. 플라톤이 이건 금방 답이 안나오니까 이것을 더 확장시켜보자. 나라로 예를 들면 나라는 지금 국가가 아니라 폴리스를 생각하면 되요. 옛날에 그리스 시대에 트로이 같은데 나오는 폴리스를 말하는 거에요. 인구 한 만명 정도 되는 작은 도시국가에요. 그것을 이야기 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어떤 국가가 좋은 국가냐 해서 이것을 축소하면 사람이 되지 않겠냐 이야기를 하는거에요. 그럼 너네들이 좋은 국가는 어떤 국가인지 생각해보라고 이야기를 하는거에요. 법정스님이 아주 근검 절약하면서 존경을 받았잖아요. 그런데 사천칠백만이 다 법정스님 같다면 과연 나라가 존재할 수 있을까? 확실히 좋은 나라는 아닐거에요. 그래서 얘기하는 것이 전쟁이 일어나면 나라를 지켜야 하니까 나라를 지키는 전사가 있어야 해요. 이 사람들은 사는 목표가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집에서 살고 부귀 호강하고 싶고 애들 나서 성공하는 것 보고 싶고 이런 목표를 갖고 살면 안되요. 그러면 전쟁 나갔다가 자기 아들이 위험하다고 하면 돌아올거 아니에요. B라는 나라가 돈 더 줄게 이리로 와라 그러면 배반할거 아니에요. 그래서 이 사람들을 이렇게 하면 안되요. 이런 사람은 천명 정도 되야된다고 봐요. 전사그룹이에요. 그 다음에 나머지 사람들은 그냥 자기 이익을 따라서 욕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어야 된다는 거에요. 왜냐하면 칼 한자루 만들어서 자기 쓰던 사람이 세 자루를 만들려면 이걸 갔다가 팔아서 돈을 벌면서 이걸로 밥도 사고 옷도 사야지 하는 욕구가 있어야지 만든다 이거에요. 그럼 도자기 굽는 사람도 마찬가지에요. 이러면서 돌아가는 거에요. 여기가 가슴, 여기가 배. 욕망이 꿈틀거리면서 욕망이 움직이면서 생산합니다. 그런데 이 인간들로 가득 채워져 있으면 꼴이 안되요. 양육강식의 돈만 알고 욕망만 꿈틀거리게 되는거죠. 그 다음에는 이것이 어떤 관계를 가지고 돌아가는지 머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게 누구냐면 왕입니다. 왕은 어떻게 되냐면 아주 냉정하게 국가 전체가 왜 존립하는지에 대한 universal purpose를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리고 이 나라가 어떻게 되어가는 것이 인간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것인지에 대한 명쾌한 이상과 이성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 기준이 진리입니다. 그럼 이 전사들은 나라를 위해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돼서 살아야 해요. 그래서 여기서 오늘날에 보면 말도 안되는 이야기를 플라톤이 하는데, 절대로 가정을 이루어서는 안된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 유명한 다부다처제가 나온거에요. 그래서 가족을 만약에 나, 내 아내, 내 새끼라는 개념을 이런 개념을 가지면 이 전사로서의 임무를 수행을 못한다 이거에요. 계백이 황산벌 전투를 나갈 때 가족을 죽인 것은 이것이 진리라는 반증입니다. 모두 아이를 낳고 누구하고도 특별한 개별적인 정을 갖지 말고 모두를 자기 아내처럼 모두를 자기 자식처럼 사랑하는 것. 그것이 이상 국가의 핵심이에요. 이 사람들은 좋은 옷을 입어도 안되고 맜있는 것을 먹어도 안되요. 쉽게 이야기 하면 이 세상과 어느정도 단절이 되야해요. 그리고 이 안에서 이루어지는 현란한 영화라던지 부귀 기품은 담장을 치고 다른 사람만 누리게 해야 해요.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하냐 밥은 넉넉히 준다. 그런데 먹는것자체가 생명위주의 수단이어야지 그것을 탐닉하게 만드는 이끌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럼 이 사람들은 무슨 재미로 일생을 사느냐. 왕하고 가까이 있는 재미로 사는 거에요. 이 왕은 탁월한 진리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 진리의 빛을 나누어 갖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사는 것입니다. A.B,C가 아주 이상적인 조화를 이뤘을 때 좋은 국가고 그럼 좋은 사람이라고 한 것은 이게 이 통제를 벗어나면 안되는 거에요. 통제를 받으면서 이게 전혀 없는 인간이다 그렇게 되면 존재의 동력자체를 상실하는 것이다. 수도사처럼 산속에 올라가서 온 국민이 국경도 안 지키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신을 찬미하며 죽는것입니다. 좋은 국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똑같은 것을 어디서 말하냐면,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이란 책을 봤어요? 이것을 들어보면 지금 강의한 내용이 여기에 그대로 들어있다고 느낄거에요. 이러한 똑같은게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circulation이 됩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쓸데없는 것들이 죄악된 인간이니까 생산이 되잖아요. 토해내고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이고 노폐물이 빠져나가고 말씀을 통해서 양분이 공급되고 그러면서 각자 각자가 교회 몸 전체에 contribution 해야지만 항상성이 유지가 되고 그 항상성은 그래서 자신에게 유익을 주는 거에요. 누군가가 자기 정체성을 깨뜨리면 항상성을 위협하고 항상성을 위협한 것이 결과로 돌아와서 결국은 모든 생명자체에 위협을 가져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작은 정도면 교회가 병이 들고 이게 심한 정도가 되면 문을 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각자 contribute 하지만 이것들 모두를 circulation에 돌아가게 만드는 그 생명은 이 사람들의 섬김 자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것들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 세 곳이 있어요. 그래서 자연학에서 어떤 fact를 이끌어내고 논리학에서 그 의미를 해석하고 이것들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는 것. 이런 것을 탁월하게 잘했던 사람들이 그리스 사람들이고 동양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법은 물이 지나가는 것이다. 물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아 물이 흘러가는구나 높은데서 낮은데로. 아 이것은 원리가 있구나. 그럼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며 살아야 되는구나 너 그렇게 사는 거는 법이 아니지 이러면서 physiology attitude가 일어나는겁니다. 이걸 근대 계몽주의가 끝나면서 이게 다 파괴된 겁니다. 이 연결들이 다 파괴된겁니다. 그래서 학문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다 상실되고 그러는 겁니다.
이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가 그거고, 저런 정신을 가지고 그럼 하나님이 여기서 지금 순환기 그리고 호흡기, 그 다음에 위장계통 저장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 했잖아요. 그럼 하나님이 이런 circulation을 어떤 식의 질서를 가지고 돌리시는가 하는 것이 이 책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다 이렇게 연결이 되어서 나는 꿈꾸는 지성이 뭐냐하면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이렇게 신학을 공부해, 의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이렇게 의학을 공부해, 미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미학을, 사회학은 사회학, 천문학은 천문학, 물리학은 물리학, 내가 정말 배우고 싶은거는 화학입니다. 그 다음에 철학. 그러면 허무하잖습니까. 이런 가로지름은 이 사고를 유목적 사고, 유목적 사례, 그런데 여기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면 다집형의 사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집형은 이런 식으로 다집형이 있는데 이 중심에 있는 것이 바이블입니다. 그러니까 바이블이 모든걸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목적자체가 그 모두 설명한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코어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걸 할 때에 그 때에 진리를, 예를 들면 이런거입니다. 물체를 봤습니다. 이렇게 예쁘다 이러고 본 겁니다. 이거를 A라는 학문으로 본거에다. 똑같은게 또 있어요. 다면체입니다. 이 학문으로는 이것밖에 못보고 이 학문으로는 이것밖에 못 봐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면체로 보게 만드는 학문이 철학입니다. 이 철학은 사실에 관심을 갖지만, 신학은 이 위에서 이것이 갖는 value가 무엇인가를 찾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에는 이 신학은 의학이나 이런것을 공부하는 사람보다 훨씬 수재들이 들어가는 학교였습니다. 지금은 거기에 못 미치지만, 왜 이런 지망생들이 귀족의 자녀일수밖에 없었냐면 들어가기 전에 여기까지 상당한 분야의 학문을 공부하고 최종적인 답으로 이것들을 풀어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있는 다면적인 진리들을 모두 여기에서 봅니다. 철학은 보는 각도자체가 틀립니다. 이 위에서 발견한 fact를 해석을 해서 fact와 value를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신학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하자면 예를 들자면 어떤 physical fact가 있다 그러면 미학은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고, 문학은 문학 나름대로 규정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생에 있어서 의문들을 제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것을 죽음이라고 합시다. 이런식으로 설명을 하면 각자 각자가 내놓는 생각이 미학에서 보는 죽음이라던지 아니면 문학에서 보는 죽음 의학에서 보는 죽음 뭐 의학을 하는 사람도 내 생각에는 아마 뇌과학쪽 하는 사람에 대한 죽음에 대한 생각과 장기계통을 하는 사람들의 차이가 있겠지요. 이러한 모든 것들이 있는데 이러한 것들이 다지평이에요. 이 다지평을 철학은 모두 고려해서 어디에다가 대입시켜도 대입이 가능한 이 fact에 대한 설명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족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신학은 해석을 해서 value와 연결시켜서 그러면. How should we live? 우리는 어떻게 살것인가에 신학이 있는 것입니다.
이게 인제 내가 이 책 한권을 쓰기 위해서 2,200만원 어치 책을 샀습니다. 이 책은 내가 6개월 걸려서 썼습니다. 그 밑에 빨간 책은 정확하게 3일만에 썼습니다. 이 책은 6개월 걸려서 썼는데 아직도 만부가 안나갔습니다. 그래서 심혈을 기울여서 쓴 책은 잘 안되요. 그래서 여기에 보면 나의 천문학적인 고민들이 나오는데, 일반 상대성이론에 나오는 어떻게 해서 물체가 시간보다 빠른 물체가 나올 수 없느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결국은 시간과 존재에 대한 이야기들을 논고하면서 이 문제가 나온 것입니다. 요즘은 내가 이런 사고에서 약간 오프 되어 있는데 이 때는 막 머리가 반짝이면서 성경이 아까 얘기한대로 바이블에서 소위 얘기하는 beauty of God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어떻게 문학으로 어떻게 미술로 어떻게 자연과학으로 이렇게 뻗어나가는가 하는데에 관심이 너무 많아지기 때문에 이렇게 복잡한 이야기들을 써낸것이죠. 그러나 아주 중요한 우리 신앙에 있어서 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인간은 왜 하나님의 통치에 굴복하며 살지 않고는 행복해 질 수 없는가 하는 문제들을 여기에서 독특한 방법으로 다루면서 학문으로 가는 통석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지난 번에 배웠던 내용을 하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이미 몸 자체가 하나의 우주처럼 한의학에서는 특히 우리 몸을 하나의 우주로 보잖아요. 그런 것들 속에서 이런 것들이 하나의 circulation으로 움직인다는 것, 다음에 개체와 항상성의 문제 이런 것들, 이게 그대로 항상성 같은 경우는 생태계문제에서 그대로 적용이 되어집니다. 확장시키면 그대로 생태계인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이냐면 가이버 같은 사람들은 이제 인류가 많이 쓰레기를 배출하고 pollution의 문제를 일으켰지만 항상성의 문제가 없다. 여태까지 나온 굉장히 두꺼운 책을 써요. 그러면 왜 항상성이 깨졌다고 왜 그렇게 과학자들이 위기를 얘기하고 방해를 하는가, 이것을 자본주의 논리로 펼친 것입니다. 다 자기네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지금 현재 이 pollution의 상태가 자신이 자정할 수 있는 충분한 범위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런 항상성이 깨지고 있는 증거들이 너무 심각하게 지구 곳곳에서 나오니까, 지난 번에 다큐를 한번 보니까 태평양 한가운데에 쓰레기 섬이 다섯 개 정도가 떠있는데, 큰 거 하나의 크기는 미국보다 약간 작은 크기, 작은 것은 한반도 몇 개 정도 된답니다, 그런데 이게 모여 뭉쳐 있다는게 아니라 떠있는데, 어떻게 되냐면 자외선을 계속 받으면서 플라스틱 이런 것들이 깨져 부스러져서 이만한 물주머니를 달고 육지와는 상관도 없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가서 주머니를 달고 막 다닌 것입니다. 주위엔 섬도 없고 거의 없는 건데, 불과 1-2십분 달렸는데 작은 플라스틱 쪼가리들이 이 물주머니 안에 한가득 들어와요, 그런데 그걸 물고기들이 먹은 것입니다. 그걸 사람들이 잡고 물고기 몸에 있는 것들은 큰고기가 먹고 그것들이 다시 또 해체 되어서 바다를 오염시키고 해서 이 모든게 이미 청정이라는 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이런 식으로 지구가 오염되어서 항상성을 위협하는데, 우리 60년대 어렸을 때만 해도 감히 이렇게 많지는 않았어요, 평균 수명이야 짧았지만 대개 뭐 오줌을 못 누어서 죽었다던지 이런 말도 안되는 병이지, 당뇨, 암, 우울증 있을 수도 없는 병들, 그래서 항상성이 깨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근데 이 항상성이란 말을 지구 환경에 비한다면 physical한 항상성이라는 말도 깨졌지만 spiritual한 것도 깨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정신 자체가 깨져버린 것이에요, 기본적으로 통용되던 그런 윤리의 기준, 질서 이런 것들이 다 깨지고 부서지면서 그런 가치배재적인 사고방식들이 사람들을 오염시키면서 악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번 한성주씨 사건 인터넷에서 봤죠? 근데 그걸 보면서 우스운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요즘 같이 성이 완전히 개방된 시대에 연예인이 그런 비디오 하나 발견됐다고 해서 마치 그 여자의 일생이 끝난 것처럼 말하고 비난하고 혹은 슬퍼하고 하는 사람들이 사실 그 가치를 허문 주범인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저들에게 엄청난 가치들을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인데도 그 가치를 강요하고 있는 것일까, 무서운 힘으로, 이게 뭐냐면 이 사회의 항상성을 유지시키려는 신적인 에너지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이죠, 그걸 우리 신학에서는 율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성이 유지되는 것이죠.
그런데 항상성이 깨지고 나니까 피터징거 같은 사람이 진화론적인 사고방식을 결혼에 도입한다면 인간과의 결혼만을 고집하는 이것은 가장 진화론에 역행하는 사고방식이다. 동물과의 결합도 가능하다라는 것이죠. 그런데 결국 그 마지막의 결과는 항상성을 깨뜨리는 결과가 와요. 1980년대 오렌지 카운티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스와핑이라는게 제일 먼저 일어납니다. 오렌지 카운티는 굉장히 부유한 마을인데 할 일이 없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남자들이 모여 앉아서 우리 아내를 바꾸어 보자하고 아내한테 얘기하니까 아내들이 동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와핑이 유래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그들에게 행복과 만족을 가지고 오느냐 하는데 전혀 그게 아니거든, 그런 항상성은 몸에만 있는 게 아니라 자연계 안에도 있고 인간의 정신세계 안에도 있고 인간의 도덕세계 안에도 이런 항상성이라는게 항상 있는 것이죠. 그런데 다원주의자들은 이 항상성을 위협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이 항상성을 위협해서 소위 얘기하는 milieu interieur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게 소위 얘기하는 internal milieu이잖아요, 그걸 파괴하는 거에요. 그 파괴의 결과가 그게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오늘날 수많은 영화와 이런 것들 속에서 나오는 말하자면 절대 가치를 부정하는 인간의 완벽하게 고독해진 인간의 모습, 그러면서 인간이 방황하며 절망하는 그런 모습들이 오늘 이 항상성을 깨뜨린 결과로서 인간들에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사명은 개체적 건전성을 유지하는 것과 함께 사회와 교회가 이 항상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이 기여하는 것 자체가 이 두 개가 분리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지난 가을사경회 때 했던 하나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는 주제입니다. 근데 생각해보면 너무너무 재미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엮어지는 것이. 그래서 항상 의학에 다른 과학을 가미하고 신학을 가미하고 다른 학문에서의 해석을 들음으로서 그 해석 자체가 아주 풍부해집니다. 재밌지 않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