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2월 20일 교직원예배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잠 17:3).
여러분들이 도가니를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도가니탕 할 때 그 도가니 말고 이 도가니는 쇠로 만들지를 않고 요즘은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은 흑연으로 만듭니다. 흑연은 연필심인데 그것이 경도가 아주 높은 그런 흑연으로 만들면 아무리 열을 가해도 그것이 결코 터지거나 깨지지 않습니다. 그 흑연으로 만든 그 도가니를 풀무불로 하죠. 그래서 이제 저도 불을 떼서 재련하는 광경은 못 보았습니다. 만은 코크스 같은 그런 유연탄으로 그것을 때면 엄청난 열이 그 속에서 납니다. 쇠가 거의 휠 정도까지 휩니다. 거기에다 은 같은 것은 비교적 회보다 빨리 녹거든요. 거기에다 녹이는 것입니다. 이때에 이 불을 잘 지피기 위해서 풀무가 들어가게 됩니다. 이 풀무는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의 도움을 받아서 이제 불타오르는 화로를 뜻하는 것이죠. 그래서 대장간 같은 곳에 가면 바람이 부는 소리가 쇅쇅 하고 납니다. 그리고 바람이 계속 공급되면서 엄청난 열을 내면서 그 유연탄이 타게 됩니다. 그런 불, 그다음에 도가니, 거기에 놓인 은이나 금, 이것들이 연단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죠. 저도 그 광경을 어느 공장에 가서 본 것은 아니고, 어쨌든 가물가물합니다. 그런데 그 현장에 대한 생각이 눈에 떠오르는데 이제 녹이면 액체 상태가 되면서 그래서 그 탈수 있는 불순물들은 그 열 속에서 다 타버리고, 타지는 못하지만 그 비중이 무거운 것은 은 액체로 된 그 은 아래로 가라앉아요. 가라앉으면 그 물을 잘 따라서 다시 걸러내는 것이죠. 그리고 다시 식혀서 굳히죠. 그리고 그다음에 새로운 도가니 위에 그것을 다시 집어넣고 같은 작업을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굉장히 여러 번을 해도 여전히 찌꺼기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여러 번 걸러내어서 순도를 높일수록 그 은과 금이 가치가 뛰어난 은, 가치가 뛰어난 금이 되는 것이죠. 이 지혜 자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연단하신다. 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이 왜 우리의 마음을 이렇게 연단하실까? 한 사람의 가치라고 하는 것은 세상이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는 것은 다릅니다. 세상이 보는 가치는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는가? 아니면 얼마나 예쁘고 건강한가? 그다음에 얼마나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가? 또 얼마나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나? 이런 것들이 세상으로 볼 때는 그 사람의 가치죠. 그러나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의 가치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 더 사려 깊고 사색적인 사람들은 그렇게 인간에 대해서 세속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철학자들은 한 사람의 정신의 크기가 그 사람의 존재가치의 크기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한 사람의 정신의 크기라는 것은 어떤 것이냐? 그것은 그 사람의 정신의 크기는 이성과 감성의 크기. 그래서 사물들을 잘 추론할 수 있는 이성의 능력이 뛰어나고 사물들을 보면서 그것을 느낄 수 있는 감성의 폭이 클 때 이 두 개의 크기가 그 사람의 정신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이미 받아들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그런 것들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정신의 크기가 얼마나 크냐 하는 것과 관련된 것이죠.
조금 더 들어가면 그러면 이제 사람들이 그 사람이 그런 능력으로 어떤 내용들을 가득 채우고 있느냐에 대해서 그 사람의 존재의 가치가 결정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로서 보면 사실은 그보다도 훨씬 더 간단하게 얘기할 수 있죠. 한 인간 존재의 가치는 광의적으로 보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을 대에 있고, 좀 더 협의 적으로 보면 한 인간의 가치는 그 영혼의 아름다움에 달려있는 것이죠. 그 영혼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 영혼의 아름다움 속에는 우리들이 언젠가 한번 설교 들었던 선한 의지도 그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과 하나님이 마음을 연단하시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을 믿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을 날로, 날로 가치 있는 존재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있지만 우리 애들은 그저 길거리에 기어 다니면서 그저 밥이나 빌어먹으면 충분하다. 아마 그런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고, 각각 인생관은 다르겠죠. 그렇지만 어떻게 하든지 이 아이가 훌륭하게 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부모인 자신보다는 훨씬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잖아요. 하나님의 마음도 우리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뒤에는 하나님이 우리가 정말 가치 있는 존재가 되게 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가 되게 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데 문제는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는 그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아름답게 만드셔야합니다. 그런데 그 영혼을 아름답게 만드시는 방법이 뭐냐면 우리의 마음을 사용해서 영혼을 아름답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을 직접 하나님이 만지셔서 아름답게 하시는 것을 우리들이 중생으로 이야기 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통하여 성령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심으로서 우리의 영혼을 아름답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 영혼을 아름답게 만드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이 마음 안에서 성령의 주도적인 은혜의 역사와 그리고 우리 인간의 의지가 거기에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아름다운 영혼으로 만드시기 위해서는 마음의 끊임없는 변화를 주셔야만 그것들이 우리의 정신과 그리고 나아가서 영혼에 영향을 주어서 아름답지 못하던 사람들의 영혼이 아름답게 변화되고 새로워지는 그런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로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마음에 작용해서 연단하여 우리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실까 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실 때 두 가지 통로를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또 하나는 마음은 우리의 외부의 많은 사물들을 눈으로 보면서 그것들을 우리의 마음에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설명 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눈에 보이는 많은 외부의 사물들을 감관을 통해서 지각을 통해서 그렇게 우리의 마음에 받아들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고, 들리는 것이지 눈에 이렇게 글자로 나타난다든지 그런 것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마음에 찍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물들이 받아들여진 말씀에 의해서 끊임없이 해석되면서 우리의 마음에서 사물도 아니고 말씀도 아닌 제 삼의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데 갑자기 내 주위에서 사물의 질서들이 변동을 일으키면서 어려움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내 마음에 찍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뭐 이런 말씀이 떠올랐다고 칩시다. 그러면 이 상황 자체는 매우 고통스럽고 도피하고 싶은 상황인데 내가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것들을 해석을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 삼의 메시지로 들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상황은 고난이라는 상황이 있고, 메시지는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는 메시지가 있는데 이 두 개가 만나면서 나에게 제 삼의 해석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가리켜서 말씀의 적용이라고도 부르잖아요. 그래서 뭐냐면 ‘아, 나에게 지금 이런 어려움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이 결국은 나를 잘 다듬으셔서 유익한 인간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내가 아직까지도 모난 부분이 많고 게으른 부분이 많으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다루시는구나.’ 그런 생각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하자면 이렇게, 이렇게 만난 제 삼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진리의 말씀을 붙잡는다. 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그런 말씀,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상황은 신앙이 없어도 눈에 보이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말씀도 늘 우리에게 들려요. 그런데 그 두 개를 만나게 해서 자기를 향한 말씀으로 삼아서 그것을 붙드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이 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그렇게 되기를 사모해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이 시편 119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도가니에 아홉 번 연단한 은과 같도다. 그러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주의 말씀을 사모함으로 새벽 전에 눈을 떴나이다.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처지에 적용하려고 하는 이런 방식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세 번째로 고통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이냐? 연단 한다. 라고 할 때에 이 연단의 의미는 무엇이냐는 것이죠. 연단이 주는 이 고난의 의미는 무엇이냐?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연단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역할을 합니다. 무슨 뜻이냐면 마음이 평상적일 때 우리들이 평상심을 갖는다. 그런데 마음이 위기를 느끼게 되면 마음이 위기감을 갖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렇게 우리의 영혼의 상태가 매우 맑고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각들이 아주 피어나서 그래서 말씀 이 끝에서부터 저 끝까지 말씀을 무엇을 보든지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잘 전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침에는 말씀을 읽다가 기뻐서 뛰고 오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다가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흘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이 전수될 때 그것들이 잘 전해지는 상태, 그런 상태가 부드러운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이 잘 전해지는 것이죠. 그래서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 때는 정서가 매우 풍부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잘 웃고, 잘 울고, 잘 분노하고, 가슴아파하고 하는 일들이 아주 풍부하게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은혜가 떨어지게 되면 이 감각의 폭이 아주 줄어들게 됩니다. 우리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역을 하거나 일상적인 삶을 살아갈 때 일반 섭리 안에서 아주 기쁜 일이 일어나면 기뻐하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괴로워하고 이런 것은 영혼의 상태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1억 원짜리 복권이 당첨 되서 기뻐서 펄펄 뛰는 것은 성령 충만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침체에 빠진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변에 아주 불행한 일이 일어났을 때 슬픔에 잠기는 것도 성령 충만한 사람뿐만 아니라. 침체에 빠진 사람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령한 것에 있어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크게 영광을 받으셨다. 그럴 때에 정말 어린아이처럼 뛰어놀며 가슴에 손을 포개고 그 감격하는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은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고, 그리고 주님의 영광이 가려졌다. 할 때에 가슴아파하고 쓰라려 할 수 있는 사람은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 아직까지도 찌꺼기가 많이 남아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너 잘못되었다. 네 마음이 올바르지 않다. 너의 영혼의 상태가 매우 안 좋다. 네가 나를 섬기는 자세가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말귀를 못 알아들어요. 말귀를 못 알아듣기 때문에 그렇기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시련입니다. 그런 시련들이 이제 연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는 여러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사역을 하려고 하는데 가정에 끊임없이 근심스러운 일들이 일어나요. 이것이 시련이죠.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더 올바르게 빚어져 가는 것을 가리켜서 연단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연단은 파괴와는 다릅니다. 파괴는 어떤 사물들을 없애버리기 위해서 그 사물에 가하는 충격입니다. 그런데 연단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그 형태를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신앙생활을 잘 해보려고 하는데 직장에서 끊임없이 어려운 일들이 생겨나요. 이제 내가 마음을 잡고 교회생활을 잘 해보려고 하는데 가는 곳 마다 부딪히면서 어려운 일들이 생겨요. 이것이 바로 시련입니다. 그러면 그런 시련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아픔이 연단이 되느냐하면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당하는 많은 시련이 연단이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꼭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뭐냐면 목표의식입니다. 내게 시련이 많이 닥칠 때 그래도 나는 이 사역을 감당하고 이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시련이 많이 닥칠 때 이런 많은 시련이 닥쳐도 나는 꼭 영혼들을 섬겨야 하고,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님이 나의 영혼 섬김에 축복하시는 부흥을 보아야 한다. 라고 하는 그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면 그에게 일어나는 모든 환난과 시련은 연단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강력한 시련이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에이 씨. 그까짓 것 힘든데 내가 이것이 아니면 할 일이 없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사역지가 뭐 여기밖에 없나. 오라는 대도 많고 할 일은 많은 그만 두면 되지, 접어버리면 되지.” 이렇게 생각하면 그가 죽음가까이 다가가는 시련을 만나도 환난을 만나도 그의 마음을 바꾸어 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연단이 아니기 때문에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그렇게 연단을 받을 때에 그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시겠습니까. 우리를 ‘깨끗하지 않다. 그리고 네가 나를 향해 바치는 섬김이 내게 이르기 위해서는 네 마음은 더 연단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도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에서 우리를 그렇게 마음을 연단해서 당신의 쓰심에 합당하도록 우리를 그렇게 아름다운 영혼가진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주님의 그 열심이 아주 특심하거든요. 그 무엇에 의해서도 주님의 그 열심히 꺾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의 섬김의 과정에서 시련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또 우리를 연단하고자 하는 주님의 열심 또한 계속 있다면 이제 관건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어떤 자세로 그러한 연단을 받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니까 시련이 아무리 많이 일어나고 고난이 닥쳐도 인간은 탁월한 적응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젠가 한번 바닷물 속을 촬영해서 보여주는데 천 몇 미터까지 들어가는 깊은 바다 속인데 거기에서 온천수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쏟아지는 물이 거의 100도시의 물이 쏟아져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는 물고기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거기에도 물고기가 사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100도시면 펄펄 끓는 물인데 생선이 거기에 접근하면 그것이 다 매운탕이 될 것인데 어떻게 거기에 있나 했더니 아주 놀라워요. 100도시 가까운 뜨거운 온천수가 쏟아지는데 무슨 산호 계통의 그런 것이 거기에 달라붙어요. 그것이 방열판 역할을 해요. 그래서 한쪽에서는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데 이 방열판처럼 가려진 거기에는 온도가 좀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도 몇 10도죠. 그런데 거기에서 수 천 만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바다 생물들이 거기에 적응해서 그 껍데기에 붙은 미생물들이나 이런 것들을 뜯어먹고 사는 광경을 보면서 많은 해양학자들이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말이죠. 고생하면 다 주님 찾을 것 같죠 절대 안 그렇습니다. 이것이 운명이려니,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팔자려니 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보 어떻게 저렇게 살까? 살든지 죽든지 기도를 해서 양단간에 결단을 내리고 사역을 하든지, 집어치우든지, 하나님이 죽음을 주시든지, 복을 주시든지 둘 중에 하나 결단을 내려야지 어떻게 저렇게 할까. 그런데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제 제가 설교한 실패를 숙명처럼 생각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단지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깊이 익숙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얘기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건강하지 않은 사역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특성들을 인격에 거의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다. 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조금이라고 불편하면 불편하다. 라고 생각을 하고 고통을 느끼는 것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왜 옷이 이렇게 작을까. 아우, 나는 너무 불편하다. 어떻게 이렇게 사냐. 그러면서 벗어버리고 새 옷으로 갈아입든지. 아, 내가 이렇게 살고 싶은데 왜 이럴까. 너무 불편하다. 이것을 느껴야합니다. 그것을 끊임없이 느끼는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의외로 이러한 실패에 깊이 적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어떠한 시련을 통해서도 그가 연단되지 않습니다. 상처에 쌓일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연단되지 않습니다. 연단되는 사람은 잘 하고 싶은 사람, 온전하게 되고 싶은 사람, 많은 시련과 어려움을 통해서 그것에 의해서 고난을 당하지만 바른 길을 가고 싶어 하는 사람, 그런 사람에 의해서 이 시련이 연단화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그를 끊임없이 변화시키시면서 하나님 앞에서 새로 그를 빚어 가시고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됩니다. 그러면 사역에 있어서 성공이 없습니다. 섬김에 있어서 성공이 없습니다. 매우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갈 때 목표의식을 잃어버리지 않고 거기에 마음이 아주 깊이 꽂일 때 그 때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많은 시련들을 직면하게 되면 시련 자체가 괴로워서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시련 때문에 내가 방해를 받아서 주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슬픔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은혜에 호소하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히 매달리면서 주님 도와달라고, 하나님 나에게 은혜를 달라고, 능력을 달라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연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냥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연단을 받으면 사람이 순결해지고, 그냥 고생만 하면 사람이 포악해지고 상처로 가득 차게 됩니다. 그러면 오히려 그 사람이 일하기전보다도 더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금년 한 해 동안 고생 많이 했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그렇지만 이제 새해에는 우리들이 일을 할 때에는 나의 이 사역에 모든 복들을 보면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과 나의 인격적인 관계를 점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정말 나는 내 마음에 연단 되어야할 찌꺼기들이 너무 많구나. 그래서 하나님이 내 마음의 찌끼를 제거하기 위해서 이런 뼈아픈 시련들을 주시는구나. 그리고 이런 고통들을 나에게 주시는구나. 그러나 이 뜨거운 불 때문에 내가 주님 앞에 더 순결한 사람이 되면 지금은 꿈도 꾸지 못하는 아주 귀한 일에 하나님이 나를 써주실 것이다. 그런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쁨으로 그것을 감당하면서 기도해야합니다. 그래서 내가 섬기면서 눈물의 기도를 그렇게 강조하는 이유가 뭐냐면 그것이 바로 그 고통과 시련 속에 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은 그 시련과 고통 속에서 주님이 계속 해서 보내주시는 메시지들을 듣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변화되죠. 하나님이 왜 변화 안 시켜주시겠습니까. 행정직원들 여기에 있지만 여러분들 일에 있어서 지혜를 주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나는 어제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일에 있어서 지혜를 주시는 분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 이십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지혜가 없어서 어려움을 당할 때 울어야합니다. 내가 밥을 못 먹어도 좋은데, 내 젊음이 사라져도 좋은데. 하나님 나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르가 마지막에 그 모차르트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열등감을 느끼며 하나님 앞에 그렇게 부르짖죠. 하나님이 나에게 사명을 주셨으면 거기에 맞는 달란트도 주셔야죠. 그리고 소리치는 장면이 나오죠. 그렇게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행정직원들이 교역자만큼 눈물을 흘리며 온전히 사역해야합니다. 그러면 하늘나라에서 여러분들이 받을 상급이 목사들이 받을 상급보다 훨씬 뛰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섬기는데 지혜를 주십시오. 간절히. 이런 얘기는 너무 도발적인지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아, 나는 끈기가 부족하다. 창의성이 부족하다. 혹은 지혜가 부족하다. 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유능한 사람은 별로 없으니까 나를 포함해서 누구든지, 그러면 한번 여러분들에게 물어보겠어요. 여러분들이 가정의 시련이 물러가기 위해서는 금식 기도했지만 그런 지혜를 특별히 구하는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려 본적 있습니까.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끊임없이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요즘도 나는 나의 목회에 한없는 자괴감을 느끼고 그리고 능력의 한계를 느끼지만 그러면서도 이렇게 과거를 돌아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이만큼이라도 할 수 있었던 동기는 내가 전도사 생활 하면서 연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목회하면서 연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이렇게 돌아보면 주님 만나고 나서 한 7년 동안 전도사생활 눈물의 연속인 것 밖에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교회 가면서 울고, 설교하면서 울고, 영혼들을 보면서 울고, 심방하면서 울고, 왜 이 아무것도 아닌 인간을 이 자리에 세워주셔서 가당하지 않는 일을 나에게 감당하게 하시나. 하나님의 사람은 천천히, 천천히 빚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시련과 연단의 채찍, 그리고 그 불길들이 가해지면서 그러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천천히. 천천히 주님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 연단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은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가정적으로, 개인의 심적으로, 건강으로, 무지함으로, 주위의 지체들을 통해서 친척을 통해서, 부모를 통해서, 자식을 통해서 동료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연단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도 거기에서 목표를 놓아버리면 그것은 마치 바다에 빠져서 구명줄을 던졌어요. 그래서 그것을 꽉 잡고 가는데 몇 미터의 파도가 치면서 폭풍 속에서 뒤웅 치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 잡은 그 줄은 얼마나 파도가 자기를 휘몰아치는지 이 줄 하나를 잡고 바람개비처럼 막 파도위에서 몸부림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 배는 자기를 잡아당기니까 밧줄을 묶었는데 피가 날정도로 쓰리면서 껍질이 까지면서 살갖이 드러나 보이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죠. 이것을 놓으면 순간 고통은 사라지죠. 그러나 죽음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요. 나는 살아도 이 자리에서 살고, 죽어도 이 자리에서 죽도록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이것을 붙들고 이것을 틀어쥐고 이것을 놓으면 나는 죽음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를 갈고 견뎌야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뒤웅 치면서 쓰리면서 핏줄까지 상하면서 새빨간 피가 바닷물에 뚝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차가운 바닷물에 짠 물이 살갖에 스며들면서 살에서 열이 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부분적으로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경험하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되요. 이렇게 죽음과 같은 고통을 경험해도 이것을 놓지 않고 붙들고 있으면 사는 것입니다. 결국은 살아남아요. 그러나 결국 그렇지 못하면 죽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불필사의 각오로. 필사불생의 각오로 그렇게 목표의식을 잃어버리지 않을 때에 그렇게 1년을 사역하고 나면 10년을 사역할 수 있는 정신이 그 사람의 뼈 속에 박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흔들거리면서 하는 사역은 평생을 해도 그 사람을 연단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쓸모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연단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아주 기쁘게
(찬양) 날 빚으소서. 기도 하오니 항상 진실케 내 마음 바꾸사 하나님 닮게 하소서.
하면서 자기를 온전히 빚도록 그렇게 주님께 맡겨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연단을 받는 어느 순간에 말씀을 볼 수 있는 눈이 확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줄만 읽어도 말씀이 막 쏟아 부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영혼들이 흐느낄 때 저 고통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마음이 생깁니다. 사역을 할 때 어려움이 오면 이것이 내 인생에 무엇을 뜻하는지를 깨달을 수 있는 눈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아주 깊이 있는 지도자일수록 많은 연단을 경험합니다. 심히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야곱이 그 연단을 경험하면서 바로를 축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잖아요.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