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26일 새벽예배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3)
녹취자: 임국한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은혜 때문에, 3절에서는 영혼을 회복시켜주시는 은혜 때문에, 그리고 이 4절에 와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자기를 건져주신 은혜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주님을 목자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라고 말입니다. 이 사망의 골짜기라고 하는 것은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그런 두려운 계곡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 가보면 우리나라처럼 숲과 물이 많이 흐르는 그런 지형이 아닙니다. 때로는 양 쪽에 커다란 모래산이나 바위산들이 있고 그 계곡을 통과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풀밭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그런 지형이 아니라 여기에 풀이 조금 나 있고 한참 이동하면 저기에 풀이 나 있고 하는 그런 지형이 이스라엘 지형이기 때문입니다. 가보니까 물길이 좀 있는 곳에서는 푸른 식물이 좀 있고 그렇지 못한 곳은 그저 한없이 세월이 흘러도 그냥 큰 마른 아무 쓸모없는 척박한 광야의 연속입니다. 그러니 목자는 이 양떼들을 풀을 먹이기 위해서 때로는 계곡을 통과해야 되는 적도 있습니다. 그 계곡에는 죽음의 위협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맹수의 위협도 있고 또 도적의 위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양떼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선한 목자가 지형을 정확히 잘 알고 그를 인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커다란 죽음과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도 목자는 능히 그 죽음의 계곡에서 양떼들을 보호하고 지킬 수 있기 때문에 양떼를 거기로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를 지나서 목자가 가고자 계획하고 있는 곳으로 양떼들을 이끌고 가는 것입니다.
시인은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곳으로 접어들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의 위기를 만나던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이 사람도 신앙을 가지고 있었지만, 옛날이었기 때문에 이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상황에 접어들었을 때에는 깊이 고통을 느끼고 괴로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인이 생각지도 못했던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건져주셨고 그리고 보호해주셨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기억을 되살리면서 자기가 양들을 이끌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지형을 지날 때에 안전하게 양떼들을 돌보았던 것처럼 하나님도 자신을 돌보신다는 고백을 하면서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실 수밖에 없다고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이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깊어져갔던 것입니다. 우리도 믿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다보면 이러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접어드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이러한 위기와 난관에 봉착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그러한 죄와 불순종 때문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기 위해서 그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곳으로 우리를 접어들어 살게 하시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도움이 끊어진 것 같고 그리고 끝없이 고통이 계속되는 두려운 날들이 연속됩니다. 시인은 이러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해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이 특별히 뜻이 계셔서 당하게 한 시련 속에서는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기만 하면 악한 자들이 자신에게 어찌할 수 없다는 확실한 증거를 신앙 속에서 소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시련과 고난이 계속 오면 우리의 삶이 위로를 받게 되고 예전이 누리던 평안한 삶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정말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순간들을 이기고 견디기만 하면 아무 해도 없다’ 그런 뜻입니다. 그러면 아무 해도 없다는 뜻은 우리가 손해도 안 보고 어려움도 안 당한다는 뜻일까요? 만약에 그렇다면 그게 어째서 사망의 골짜기가 되겠습니까? 사망의 골짜기에서는 정말 그렇게 손해도 보고 고생도 하고 그리고 괴로움도 당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연단이 될 수도 없고 죽음의 계곡이 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이 ‘해’라고 하는 무엇일까요? 히브리어 성경에는 ‘라아’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악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냐면 우리의 삶의 일반적인 질서가 흔들리고 고통과 괴로움이 있어도 그것이 우리의 영혼에 직접적으로 해를 끼쳐서 우리를 악으로 인도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쯔빙글리라고 하는 종교개혁가가 결국은 종교개혁을 방해하려는 카톨릭과 마지막 전투를 하게 되었을 때 워낙 적은 수의 군대로서 갑작스럽게 전투를 치러야 했기 때문에 결국은 패배하고 자신은 까펠이라는 곳에서 전투를 하다가 자신의 사위와 모든 부하들과 함께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 때에 남긴 유명한 유언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너희의 육체를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을 지옥불에 던지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은 전투에서 죽어가면서도 저 악한 자들이 자신들과 동료들을 죽였지만 그러나 자신들의 영혼에 대해서는 아무 악한 일도 행할 수 없었다는 것을 유언 속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하시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물질을 잃어버리고 고생을 하고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시련을 겪고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떠나보내며 이별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그 일들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원래 이 세상은 그렇게 시련과 고난이 파도처럼 일어나는 험한 바다와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칼빈 선생님은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자신의 생애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들, 하나님의 주권으로 발생하는 인생의 모든 시련과 고난들을 만났을 때 그것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의무다.’ 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자살을 아주 죄악시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고통스럽고 쓰디쓴 괴로움들을 인위적으로 도피하고자 하는 시도로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절망할 권리가 없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 사람이 자살을 하면 그 재산을 모두 시에서 몰수하게 했습니다. 그것이 정말 과한 조치가 아니었는가 하는 것은 오늘 나의 평가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분명하게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나의 죄의 결과로서 시련과 고난이 오기도 하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고난과 역경이 오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을 당할 때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것을 모두 묵묵히 견디면서도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저버리지 않는 그것이 믿음의 삶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찬양)
고난도 슬픔도 이기게 하옵시고 주 말씀 따라서 용감하게 하소서
그런 시간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모든 환경에도 불구하고 그 환경을 뛰어넘어서 요동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은 삶의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고 있는 인격적인 관계에서 오는 평정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의 글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 인간이 어떤 존재입니까? 인간이 역경을 만나면 역경 속에서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괴로워함이기 때문에 불안해하는 존재이고, 순경을 만나서 삶이 평탄하면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불안해하는 것이 인생이오니 역경에 처하든 순경에 처하든 이렇게 끊임없이 불안한 것이 인생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이었을 뿐이라고 노래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 인간이 이 세상에 산다는 것 자체가 시련이 아니고 무엇이겠사옵나이까” 하고 노래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살이입니다. 그것을 이기며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맺은 목자와 양으로서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이 고백을 합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히브리 성경에 보면 ‘시인의 한 지팡이와 한 막대기가 나에게는 위로가 되나이다’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시인과 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도 함께하신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나오는 고백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인간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무엇이라고 묘사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5장에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옵니다. “에녹이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더니” 하나님이 그를 불러 가시고 시체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과의 동행. 이것이 성도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라고 존 오웬 목사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의 삶의 핵심을 두 가지로 요약을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 두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과 그 속에서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과의 완전한 동행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이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락인 것입니다. 오늘 시인이 여기서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고백을 하는 이것이 바로 그런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의 행복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주실 수 있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어떤 무명의 성도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 없이 천국의 길을 홀로 걷는 것보다는 주님과 함께 기옥의 불길 한 가운데를 지나는 것이 성도에게는 행복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찬양)
주 내 안에 늘 계시고 나 주님 안에 있어
저 포도비유 같으니 참 좋은 나의 친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 이것이 바로 주님이 함께하심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삶과 신앙을 유념하실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저는 살면서 정말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그런 경험들을 참 많이 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위하시고 그리고 나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그 일에 있어서 주인공으로 삼으시는 것 같은 하나님과의 친밀함, 그리고 그 은혜.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고백합니다. “주의 한 지팡이와 한 막대기가 나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라고 말입니다. 여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양떼를 지키는 목동에게는 두 가지 도구가 필요했는데 하나는 지팡이고, 또 하나는 막대기였습니다. 두 개가 모두 나무로 만들지만 용도는 달랐습니다. 지팡이는 길이가 길고 끝이 둥그렇게 휘어져 있어서 그것으로 양떼를 칠 때에 양들이 잘못 된 곳으로 가거나 배열을 따라오지 않으면 그 지팡이를 거꾸로 들고 쭉 뻗으면 그 고리에 양의 목이 걸리게 되어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양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이 지팡이는 목자 자신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걸어다니는 보조수단이기도 하고 양떼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기 위해서 그 양떼를 인도하는 도구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막대기는 끝이 뾰족한 무기입니다. 그래서 맹수들이 밤중에라도 이 양을 해치기 위해서 접근을 하면 목자는 밤새 양을 지키다가 그 맹수의 다가오는 것을 보고 쫓거나 혹은 돌을 던져서 퇴치하거나 그래도 물러서지 않을 때에는 자신의 목숨을 버려 이 막대기를 가지고 짐승들과 싸워서 그것을 무찌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선한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착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용사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시인이 일생동안 살면서 자기가 목동시절에 마음을 다해서 그 양떼를 치던 일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름답고 준수한 소년이었지만 또한 선한 목자로서 용사와 같이 자신의 양떼를 지키기 위해 싸우기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맹수의 습격에 과감히 맞서서 맹수와 싸우던 선한 목자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선한 목자의 그림을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사는 동안에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난관에 처할 때에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대신 싸워주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해서 가나안을 정복하고 거기에서 나라를 건설할 때까지, 건설하고 난 후에도 이들에게 하나님은 목자이실 뿐만 아니라 용사이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치를 때에 항상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셔서 싸우시며 승리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친히 전쟁에 강림하셔서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 패배하고 커다란 도륙을 당할 때에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서 무엇인가 진노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분을 진실하게 섬기고 사랑하는 한, 그분은 용사와 같이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인하여 시련과 고난을 당하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반해서 우리가 우리의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기거나 고통을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혼에 해를 끼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라는 것이 이 시인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힘을 신뢰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깊이 의지하면서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을 새롭게 하는 것은 놀랍게도 나 자신이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의 환경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인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함께해주셨던 것처럼 오늘도 당신을 목자로 고백하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 함께 계시며 그들을 붙들고 그들로 하여금 당신을 의지하며 살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섭리 속에서, 혹은 여러분들이 죄를 범했기 때문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고통스러운 시기를 지난다면, 그 속에서도 우리 주님을 굳게 붙들고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에 비로소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의 목자가 되어주셔서 여러분을 대신해 싸우시고 여러분들을 보호하시는 것을 경험할 것입니다. 어떤 위기와 시련 속에 있든지 하나님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유익이고 주님을 목자로 모시는 사람의 삶의 기쁨인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