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인턴십 개강예배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눅1:80)
녹취자: 김경애
이 ‘아이’는 세례 요한입니다. 오늘 개강예배에서 제가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이유는 세례 요한이 제사장의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무슨 이유 때문인지 광야에 보내집니다. 그래서 오늘 보면 ‘빈들’이라고 나옵니다. 부모가 일찍 죽어서 아이가 그렇게 보내졌는지 혹은 제사장이었지만 자기 아들이 이렇게 죄로 오염된 예루살렘에서 양육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되었는지 광야에 경건한 무리들에게 보내졌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사는 하나님은 어린아이를 쓰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쓰시기 위해서 당신의 사람들을 준비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아이가 자라며’ 라고 되어있습니다. 성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 자신은 충분히 자랐으며 컸으며 하나님의 일을 할 만반의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선생이 되어버립니다. 목회자의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성경의 원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번은 자연적으로 엄마의 몸에서 태어납니다. 첫 번째 출생입니다. 두 번째는 성령 안에서 거듭납니다. 영적인 출생입니다. 두 번째 출생입니다. 세 번째 출생은 그렇게 그리스도인으로 살다가 사명을 깨닫게 되어서 목회를 결심하거나 선교를 결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을 다 드립니다. 세 번째 태어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입니다. 갓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지만 핏덩어리를 사용하시지는 않습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이 사람이 훈련을 받으며 성장하는가? 그것에 의해서 이 사람이 어떻게 쓰여 질것인가 하는 것이 결정됩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군부대 중에서 최고의 군부대원 스무 명이 한꺼번에 헬기에서 격추당해서 죽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들리는 이야기는 미국 안에도 그런 군인이 400~500명밖에 없답니다. 이 사람들은 어마어마한 훈련을 받아서 낙하산을 펴지 않은 채 9,000미터 상공에서 뛰어내립니다. 9,000미터 상공이면 영하 50도쯤 되는데 거기서 뛰어내려서 낙하산을 펴지 않고 지상 가장 가까운 곳에 와서 낙하산을 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캄캄한 밤에 9,000미터 상공에서 영하 50도쯤 되는데서 9.8㎨ 가속도로 지상을 향해 떨어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1초에 몇 백 미터씩 날아가며 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적진에 침투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타는 헬기는 8,000억 원짜리 헬기입니다. 스텔스입니다.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헬기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특수부대를 가지고 있는 것이 그 나라로서는 보통 군인들이 수행할 수 없는 작전을 수행할 때 그런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마찬가지로 목회자도 모든 사람이 다 한번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받았으니까 하나님 앞에 쓰임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준비되지 않은 사람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이루시지는 않습니다.
첫 번째 준비가 무엇이냐 하면 육체의 준비입니다. 우스워보일지 모르지만 목회자는 교회만 잘되면 다 빌려서 쓸 수 있습니다. 머리가 나쁘면 똑똑한 사람을 빌려 쓰면 되고, 돈이 없으면 나처럼 은행에서 빌려 쓰면 됩니다. 그리고 전문지식이 없으면 전문적인 지식인을 불러서 쓰면 됩니다. 그러니까 목회자 자신은 아무것도 없어도 다 빌려서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못 빌립니다. 건강은 안 됩니다. 자기가 그 교회에서 아무리 존경을 받는다고 쳐도 한 달 아프면 교인들이 너무 안쓰럽게 생각해서 개고기도 끊여오고 인삼도 사오고 심지어도 산삼도 사옵니다. 그런데 6개월이 아프면 걱정합니다. 1년을 계속 아프면 어디 후임이 없을까를 생각합니다. 2년쯤 아프면 얼마를 드려서 내보내드리면 될까를 생각합니다. 냉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을 잘 관리해야합니다. 저는 못했습니다. 타고난 건강이 있었기 때문에 너무나 자신을 믿으면서 모든 아픈 것은 정신력이 해이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어리석었습니다. 안자고, 안 쉬고 일했습니다. 지금은 반성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건강해야합니다.
건강만이 아니라 순결해야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적인 순결입니다. 그것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목회자의 아내도 일생동안 경계하며 살아야할 제목입니다. 누구도 그 점에 있어서 나는 자신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 앞에서 정말 순전한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간음의 죄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적극적으로 죄를 지었다기보다는 기습을 당한 사람들입니다. 항상 목회자의 사모는 무슨 생각을 해야하느냐하면 거룩한 무리들 가운데서 목회하는 사람이 아니라 본질적으로는 죄인의 본성을 가진 사람과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병원에 있는 의사가 하얀 가운을 입고 병실에 오지만 수술을 하면서 온갖 피가 몸에 튀듯이 목회자도 그런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타오르는 연기, 짐승의 죽어가는 소리, 죄인들의 회개하는 울음소리, 튀는 피와 내장의 통들 그런 것이 있는 그 사이를 하얀 옷을 입고 다니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 준비가 인격적인 준비입니다. 성품과 생활에 있어서 자신이 그래서 정말 신앙으로 살려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아름다운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목사는 설교하려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 오늘 여기에 엎드려 교회를 위해서 1시간 기도해라.’ 하면 안하지만 설교하라고 하면 강단을 향해 돌진하려고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잘못된 것이라기보다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인격적으로 잘 준비되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아름다운지를 성품을 통해, 생활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어야합니다. 이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한사람의 인격이 향기롭게 느껴질 때까지는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그가 자기를 죽인 흔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하나님 앞에 끊임없는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너무 중요한 것이 성품과 인격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많은 동역자들을 만나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말씀에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을 골랐습니다.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은 것이 목회자로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것과 함께 꼭 염두에 두어야할 것이 그 사람이 어떤 성품과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청년이 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선배언니들이 결혼할 때 신앙 하나를 보고 몰빵을 했다가 망한 선배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데 그 말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제가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신앙을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인격에서 나오는 성품과 생활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매일매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보실 때 아름다운 사람으로 빚어져가는 것입니다. 저는 사모님한테 이런 이야기를 드리면 사기를 꺾는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사모 때문에 목회를 못하는 사람들 많이 보았습니다. 물론 목회자 자신이 목회를 못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다 성품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분은 한 교회에 오래 못 있고 항상 쫓겨나시는데 사모님이 어느 교회를 가든지 탁월한 친화력으로 사람들을 사귑니다. 그리고 돈을 빌리고 갚지 않습니다. 그 돈을 자기는 다른데 투자를 합니다. 가는 교회마다 똑같은 공식입니다. 그 사람의 성향이 그렇기 때문에 아마 이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그렇게 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인격적으로 다듬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인격 안에서 자라가야 합니다.
첫 번째는 육체적인 성장, 두 번째는 인격적인 성장, 세 번째는 지성적인 성장입니다. 그래서 일단 목회자는 세 가지 점에서 성도들의 우위에 서있어야 합니다. 뭐냐 하면 영적인 우위, 도덕적인 우위, 지성적인 우위에 서있어야 합니다. 물론 목회자가 모든 것을 다 잘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절대적인 양에 있어서 그것이 과학이나 철학이나 혹은 금융에 관한 것이면 전문가가 낫겠지만 진리에 관한한 하나님에 관한한 압도적으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지 그 사람이 목회를 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모든 지식을 가진 사람이 다 진실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지식이 없는 사람이 진실해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어려운 것입니다. 아는 것이 없으면 자꾸 자신을 과장해야하고 허풍을 부려야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남편을 공부하도록 자극해야합니다. TV를 너무 많이 보거나 핸드폰을 손에 들고 하루 종일 뒤적거리고 있으면 목회는 물 건너 간 것입니다. 진리를 평생 전해야하기 때문에 진리 그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탐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로 공부해야 하느냐고 물어봅니다. 한국 사람들은 딱 부러지는 것을 좋아해서 이야기하겠습니다. 최소한 10년 정도, 아주 더 이상 양보할 수 없이 낮추어 잡아도 최소한 5년은 공부해야합니다. 공부하다가 여러 번 병원에 실려 갈 정도로 그렇게 집중해서 공부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 옛말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개장수를 하려고해도 오랏줄이 있어야지.’ 오랏줄을 무엇입니까? 개를 죽일 때 쓰는 것입니다. 개를 죽여서 고기로 파는데 그러면 개를 잡아야합니다. 오랏줄이 있어야 묶어놓습니다. 나중에 목 졸라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무엇을 하든지 간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신학생들은 공부를 하지 않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껍데기만 다닙니다. 그러니까 진실해질 수 없습니다. 진실해지려면 매일 설교시간에 나는 아는 것이 없다고 이야기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수많은 설교의 표절이 나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설교하고 내려오는데 장로님 한분이 종이를 하나 들고 걸어오더랍니다. ‘목사님 지난주에 설교하신 내용이 여기에 있습니다. 토시 하나 틀리지 않습니다.’ 인터넷에서 돈을 주고 산 것입니다. 설교가 수만 편이 들어있어서 돈을 주면 다운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출력해서 가지고 올라간 것입니다. 교인에게 딱 걸렸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목회자가 되는 것은 농부의 심정이 되어야합니다. 자기가 스스로 땅을 파서 곡식을 심고 자라게 하시는 이는 주님이시지만 씨는 자기가 뿌려야합니다. 그리고 물도 주어야합니다. 그렇게 해서 걷어 들인 곡식으로 빻아서 엄마의 마음으로 밥을 해서 자식들에게 먹이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런데 땅을 파기도 싫고 물을 주기도 싫은데 밥은 얻어먹어야 하는데 누가 줍니까? 안줍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을 가지고 와서 먹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기본적으로 설교자의 설교가 도둑질한 설교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목회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공부를 하지 않아서 그럽니다. 그런데 공부를 안 하는 목회자의 30%이상의 책임은 사모님에게 있다고 봅니다. “여보, 김남준 목사님 개강예배를 드렸는데 공부 안하는 목회자는 아무 소용없대. 여보, 공부 좀 해! 그렇게 뺀질거리면서 공부하지 않아서 어떻게 해?” 부부싸움 할 일 있습니까? 가만히 있겠습니까? 당신은 사모노릇 제대로 한 것이 무엇이 있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에게 저녁을 맛있게 해먹이고 책을 읽는 것입니다. 책도 『아이 어떻게 기를까?』 그렇게 가벼운 책 말고 두툼한 책으로 『구약성경신학』 800페이지 되는 것을 펼쳐놓고 줄 치면서 쭉 읽는 것입니다. 매일 그러지는 말고 며칠 쯤 지나서 “성경에 나오는 이 계명을 이 학자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데 맞는 거예요?” 물어보십시오. 주저주저 대면서 아는 척 할 것입니다. 그러면 넘어가시고 몇 번만 해보십시오. “여보. 나 이것 다 읽었다. 당신은 이미 다 읽었겠지만 열흘 걸려서 다 읽었는데 진짜 잘 썼네!” 그러면 “진짜 잘 썼네!” 그리고 며칠 뒤에 줄까지 쳐서 또 하나를 쌓아놓으십시오. 그리고 왜 공부 안하느냐는 소리를 하지 말고 살림살이 어렵지만 아껴 쓰다가 어느 날 십만 원을 꺼내놓고 “여보 당신 꼭 사서보고 싶은 책 사서 읽으세요.” 자극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부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안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부부싸움 할 것을 각오하고 “당신 삯군이 될 거야 아니면 진짜 목자가 될 거야? 개장수를 하려고해도 오랏줄이 있어야 하는데 당신 그렇게 놀아서 오랏줄 있어?” 한번 부부싸움 할 각오를 하고 도전을 해보십시오. 그래서 지성적으로 성숙해야합니다. 세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육체적 성숙, 인격적 성숙, 지성적 성숙입니다. 지성적 성숙은 성경과 학문입니다.
네 번째는 정서적 성숙입니다. 무엇이냐 하면 열정이 없습니다. 마스터클래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음악에서의 마스터클래스는 저명한 연주자나 아니면 오페라 가수가 엄선되고 엄선된 학생들이 하는 것을 보면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마스터클래스에 한 10명 정도 뽑혔는데 한국 사람이 뽑혔습니다. 그 사람이 오페라 토스카에 나오는 ‘별은 빛나건만’ 을 부른 것입니다. 내가 별것 아닌 것 같습니다. 목소리는 좋은 것 같은데 불렀습니다. 파바로티가 정곡을 찌른 것입니다. 다 들었습니다. “무슨 노래를 그렇게 하냐? 토스카에서 ‘별은 빛나건만’ 이 어떤 대목에서 나오냐?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해서 이 여자와 완전히 헤어지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네 노래에서 안 느껴지냐?” 토스카에서 유명한 아리아가 두 개가 있는데 ‘별은 빛나건만’ 이라는 노래하고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라는 ‘vissi d’arte’라는 노래입니다. 그 앞에 것은 여자가 부르고 뒤에 것은 남자가 부릅니다. 그 내용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성모 마리아께 늘 꽃을 드리고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데 자기가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납치를 당해서 끌려가고 자기는 돈 많은 흉악한 인간에게 말하자면 농락당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절절히 가슴에 맺힌 한을 가지고 성모 마리아에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했건만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고 섬겼는데 이것이 고작 나에게 돌아오는 대가입니까?’ 하고 부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인터넷에 들어가서 영어로 ‘vissi d’arte’를 쳐보십시오. 대부분의 유명한 오페라가수들은 마지막에 눈물을 안 보이는 가수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몰입되는 것입니다. 그 ‘별은 빛나건만’ 을 부르는 사람에게 파바로티가 정곡을 찌른 것입니다. ‘죽을 지경이 되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는데 가슴이 찢어지는 것과 같은 열정으로 노래를 불러야지 노래를 그렇게 불러서야 되겠냐?’ 먼저 네가 그 심정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전에는 항상 설교 속에서 빛나간 열정이 교회를 망친다고 설교했습니다. 요새는 빗나간 열정도 없습니다. 미친 듯이 신비주의에 도취해서 온밤을 기도로 새우는 사람들이 나의 설교의 비판의 대상이었습니다. 없습니다. 열정은 고사하고 빗나간 열정도 없습니다. 기본적으로 열정 자체가 없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그런 사람이 목회지, 자기 삶을 편의하게 하는 공부의 보고들, 이런 것은 애국심이 없는 사람에게 공급하는 최신무기와 같은 것입니다. 애국심이 없습니다. 나라를 위해 살고 죽겠다는 애국심이 없는데 최신무기가 있으면 무엇 합니까? 안 씁니다. 열정은 어떻게 생깁니까? 그것은 주님을 깊이 만나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오늘날은 어린 목회자들을 보면서 현저히 느껴지는 것은 이것입니다. 저는 학생들을 보면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데 교수님들에게 여쭤보니까 우리가 신학교 다닐 때보다 학생들이 훨씬 아는 것이 많고 똑똑하다고 합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선생님들이 그렇다니까 정확할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 하면 열정이 없습니다. 내가 이것을 위해 살고 죽겠다는 열정이 없습니다. 사모님들도 똑같습니다. 최근에 여러분들이 펑펑 울면서 기도했던 적이 언제였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경우 이 일이 꼭 이루어지지 않으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Something 무언가가 있습니까? 한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이런, 이런 일들이 내 생애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져도 이 세상에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만난 것은 잘생긴 남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생각해보십시오. 울며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목표가 있어야합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결혼도 그것 때문에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그 목표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살아가야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그런 정서의 성숙, 열정을 내 안에 간직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것이 위인들의 전기를 읽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도 읽겠지만 그것을 부지런히 읽으십시오. 그러면 위대한 목회자들을 내조했던 탁월한 목회자들의 아내 이야기,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안일하게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정말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살다가 간 사람들이 무수히 많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열정이 타올라야합니다. 그 열정이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의 진짜 모습입니다. 그러면 네 가지를 했습니다. 육체적인 준비, 인격적인 준비, 지성적인 준비, 정서적인 준비입니다.
마지막으로 영적인 준비입니다. 여기서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고” 강한 심령을 갖게 되는 영적인 성숙입니다. 그래서 그런 영적인 성숙에서 진정한 의미의 권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왠지 목회자가 나이가 어려도 아버지처럼 느껴지고 사모님이 나이가 어려도 왠지 어머니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그것이 영적인 성숙에서 오는 권위입니다. 권위주의는 내 권위를 인정하라고 강요하는 것이지만 권위는 홀로 조용히 흘러나와서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드는 그런 영혼의 힘입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읽으셨을 테니까 성경을 보든지 아니면 역사 속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위대한 종들을 보든지 아니면 현대에 동시대에 함께 살아있어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목회자를 보든지 그는 영적으로 잘 성숙되어서 영적으로 신령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런 사람들 중에는 꽃길만 걸으면서 거기까지 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버린 사람들은 꽃길만 걷게 하실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인간이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꽃길만 걷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가는 길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사람들은 꽃길이 아니라 가시밭길을 걸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들을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훈련시키십니다. 그러면서 영적으로 그 사람이 안으로, 안으로 다져져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신령한 권위를 가진 사람으로 자라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모세의 뒤를 이었던 여호수아를 생각해보십시오. 모세는 선지자들의 비조였고 모세가 가진 카리스마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그 이상이었습니다. 자기의 시대에도 그랬고 이후의 시대에도 그랬고 그렇지만 모세가 그런 엄청난 영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항상 꽃길을 걸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가 꽃길을 걸은 것은 사명 없이 그냥 애굽의 왕실의 자식으로 살아갈 때였습니다. 부르심을 받고는 그 꽃길이 끝났습니다. 그런 놀라운 권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수시로 자기의 리더십에 도전하는 수많은 악한 무리들을 늘 만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주여 내 인생이 족하오니 나를 데려가 달라”라고 기도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걷는 길입니다. 위대한 목회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꽃길은 그를 훈련시킬 수 있는 길이 아닙니다. 특수부대가 꽃길을 걸으면서 무슨 훈련을 하겠습니까?
(찬양)
거친 바다 험한 산 피가 맺혀도
십자가 내가 지고 끝내 이기리
그런 마음으로 그렇게 싸워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섯 가지를 했습니다. 육체적인 준비, 인격적인 준비, 지성적인 준비, 정서적인 준비, 영적인 준비입니다.
마지막에 뭐가 있겠습니까? 이 모든 훈련이 어디에서 이루어졌습니까? 빈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에레모스’ 라는 광야입니다. 사람의 인적이 거의 없고 밤이 되면 맹수의 위협을 느껴야하는 그런 외로운 벌판 거기서 이 다섯 가지 준비가 천천히, 천천히 긴 세월을 두고 이루어집니다. 최소한 25년에서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세례 요한이 한 30년 사역했습니까? 아닙니다. 불과 한 2년 했습니다. 길게 잡으면 한 3년 정도, 짧게 잡으면 1년 정도에 설교 몇 편 남기고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앞길을 충분히 예비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사명을 다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바로 그렇게 벌판과 같은 데에서 서야 됩니다. 거기가 어디입니까? 힘든 교회의 상황, 인격적으로 대해주지 않는 담임목사, 우리를 깊이 대접해주지 않는 교인들, 사역의 압박, 가정의 어려움, 이런 모든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에 세우시는데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광야를 두려워서 못갑니다. 그러면 평생 준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아야하는 그런 벌판에 서있는 마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습니다. 기다림의 미학입니다. 기다림. 하나님이 써주실 때까지 조용히 끝없이 기다리는 것입니다. 나는 아주 정직한 편입니다. 어느 날 나에게 “목사님! 저는 담임목회를 하러 나가겠습니다.” 내가 웃으면서 “가지 마.” 마음속으로 ‘나도 네가 가면 참 좋은데 그 교회가 어려울 거야 가지 마.’ “왜요?” “너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 자신을 더 하나님 앞에 훈련하라.” 절반은 말을 듣고 절반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개척을 하겠다고 부목사가 그럽니다. “가지 마라.” “왜요?” “너는 해도 안 된다.” “정말 해도 안 되겠습니까?” “김남준 목사의 명예를 걸고 보증한다. 너는 목회 안 된다. 둘 중에 하나 해라. 자신을 더 준비하든지 목회 말고 다른 것을 해라. 어느 기관에 가서 일을 하든지 해라.” 대부분 제 예고가 맞습니다. 그래서 기다려야합니다. 자신이 준비되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때에 당신의 시험을 다 끝내십니다. ‘됐다. 이제 가라.’ 그러면 갑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보기에는 길게 걸리시는 분은 한 15년 되겠지만 짧으신 분은 5년 안에 담임목사로 가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 어떻게 준비하느냐가 그 이후에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부딪히면 하겠지…….’ 아닙니다. 논산훈련소에서 4주 훈련을 받고 북한에 특수부대로 보내면 다 죽습니다. 훈련을 받아야합니다. 진짜 어마어마한 훈련을 받아야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해보십시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준비되고 쓰임 받는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반대의 삶을 살 것인가? 원한다고 그 길을 걷는 것도 아니지만 꽃길을 걸을 것인가? 가시밭길을 걸으며 준비될 것인가?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