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창조와 인간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녹취자: 장소연
도시에서는 불빛 때문에 별 볼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적한 시골의 밤하늘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을의 불빛도 없고 어두운 밤하늘에 쏟아질 듯 수많은 별들이 떠있습니다. 인간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하늘의 별의 개수는 약 6000개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더 많은 별들이 하늘의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첫 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성경은 과학을 위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살게 하기 위한 책입니다. 그 책의 첫 마디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우주 이 끝부터 저 끝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많이 되는지 과학자들이 많은 토론을 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약 150억 광년이 된다는 것이 유력한 학설입니다. 그것은 우주의 끝이 150억 광년에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거리가 150억 광년까지라고 하는 것이니 관측 범위를 벗어난 우주의 넓이가 얼마나 넓은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요? 알다시피 지구는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는 여덟 개의 위성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태양은 그보다 더 많은 별들이 모인 우리 은하계에 속해 있습니다. 우리 은하계는 둥근 바람개비 모양을 하고 있고, 거기에는 태양과 같이 늘 빛나는 항성만 약 2000억 개가 모인 별입니다. 그리고 그 별의 은하의 중심으로부터 좌측 하단 쪽에 이 태양은 위치해 있습니다. 빛나는 항성이 2000억 개이지만 그 주위를 돌고 있는 위성, 그 위성의 주위를 돌고 있는 또 작은 위성까지 합하면 약 작은 4조개의 별들이 모여 있는 것이 우주입니다.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이런 태양계에 있는 별들이 모인 곳이 크기가 500원 동전이라면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의 거리가 대구에 있다고 하니 이 우주의 넓이가 얼마나 큰 지 모릅니다. 약 20만 광년 되는 넓은 우리 은하계 안에 4조개의 별들 중 인간이 가본 곳은 달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달은 빛이 약 1.2초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이제 인간은 바로 그러한 별들 중 4조개 중에 하나의 별에서 태어나 그 별을 벗어나 보지도 못한 채 사라져 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별 하나의 나이는 적개는 40억 50억년에서 100억 살까지 산다고 하니 100년 살지 못하고 사라지는 인간의 시간의 길이는 마치 깨끗이 양치질한 입에서 다시 생겨나는 구강속의 균, 가글하여서 죽어 토해내치는 그 균의 세균의 수명만큼이나 아주 짧은 것입니다. 그런 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여러분들이 앉아있는 이곳은 예배당입니다. 그리고 여기는 모두 인간이 가공하거나 만든 물건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아무것도 목적이 없이 만들어진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앉아있는 의자는 여러분들이 예배를 드리기에 편안하도록 제작된 가구입니다. 위에 있는 등불은 어두움을 밝히기 위한 것이고, 설교자 앞에 놓여있는 마이크로폰은 작은 목소리를 크게 확대하기 위해서 제작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개개의 사물들은 모두 그 목적이 연결되어 이 방 전체를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로 만들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인간의 의지가 눈에 뜨이면서 인간이 고민하던 바가 있었습니다. ‘우주는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가?’, ‘인간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향해 가는가?’라는 질문들이었습니다. 동서양의 탁월한 천재들이 수없는 철학적 토론으로 이러한 질문에 답을 구했고, 종교도 바로 그런 답을 찾기 위한 한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누구도 이 질문에 대해서 뚜렷한 답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풍조는 이까짓 질문을 해야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되묻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잠깐 있다 이슬처럼 사라져가는 인간인데 하나님은 바로 그런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부여하셔서 하나님 닮은꼴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하나님처럼 느끼고, 하나님처럼 판단하고, 하나님처럼 결정할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을 우리 인간에게 주신 것입니다. 인간 이외의 모든 것들은 이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비록 육체는 흙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죽으면 육신은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실 때 인간을 모두 빚으신 후, ‘후’하고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영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육체와 영혼은 만나서 산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죽으면 육체는 고향인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자신의 고향인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영혼이 육체를 지도합니다. 그리고 그 영혼은 하나님이 지도하십니다. 영혼이 육체를 올바르게 지도할 수 없을 때 인간은 수많은 고통과 불행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인간을 하나님 닮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가 누구이든지 단지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존귀한 자로 여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 드넓은 우주를 왜 창조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아름답게 하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 즉 그 드넓은 우주, 아무도 방문하는 사람이 없지만 하나님은 그것이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좋으셨기 때문에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은 거기에 가서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우주를 창조하고 스스로 예술품처럼 감상하시며 기뻐하십니다. 바로 이러한 목적 안에서 우리는 다음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인간을 창조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신 이유는 바로 인류가 당신처럼 사랑하며 살게 하기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한 사람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류를 창조하셨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한 사람이 아니라 수많은 인류를 이 땅위에 창조하셔서 번성하게 하셔서 사회를 이루고 싶어 하셨습니다. 인류학자들의 추산에 의하면 이 지구상에는 약 1 천억의 인류가 살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인류를 번성하게 하셔서 사회를 이루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회를 이루고 싶어 하셨을까요? 그것이 바로 사랑의 사회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은 흙으로 만드시고 영혼을 불어넣으셨으나 두 번째 사람은 그 사람의 신체의 일부를 취하여 두 번째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여자입니다. 이것은 남자가 우월하다거나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원래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한 몸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의 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의 몸을 사랑하는 것은 교육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저절로 자신의 몸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죠. 추우면 덮어주고 배고프면 먹여주고 피곤하면 쉬어줍니다. 심심하면 놀아줍니다. 이래서 우리는 영원히 우리의 몸을 위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몸을 위하는 것처럼 똑같이 다른 사람을 위하며 살도록 하나님이 인류 사회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몇 해 전 저는 가족에 관해 설교하면서 형제가 서로 사랑하고 우애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설교했습니다. 설교가 끝나고 2층에 있는 제 방으로 올라올 때에 한 노인이 쫓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복도에서 제 문 앞에 서 있을 때 제 손을 붙들고 소리 내서 우시기 시작했습니다. 그 노인의 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어쩌면 좋습니까? 나에게 자식들이 있는 서로 미워하고 싸우는데 전 죽고만 싶습니다.” 하면서 노인이 한없이 소리 내어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 형제들도 어버이 날이라면 인사치레라도 아마 봉투라도 하나들고 아니면 카네이션이라도 하나 들고 부모님을 찾아올 것입니다. 그것도 안 하면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형제들이 같이 오지 않고 각자 따로 옵니다. 그렇게 해서 받는 어버이날의 선물은 그 부모를 기쁘게 하실 수 있을까요? 똑같이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그 뜻은 모든 인류가 서로를 사랑하며 가족처럼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무슨 문제가 일어났을까요? 하나님이 처음에는 인간에게 그렇게 자기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그를 비추고 있었고, 마음과 정신은 아주 충만하고 올바른 힘으로 가득 차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내를 창조하셨을 때 처음 남자는 그 아내를 보며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우리 몸에는 약간 없어도 괜찮은 살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데가 까져서 조금 살점이 조금 떨어져 나갔다고 해도 생명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우리의 뼈 중의 필요 없는 것이 하나도 없지만 하나쯤 뼈가 깨져도 목숨에 지장이 없는 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손톱 깎기로 한번만 잘라내도 죽는 살이 있습니다. 신장, 심장, 간, 비장,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뼈에서도 한 마디만 떼어내면 불구가 되거나 절명하는 뼈들이 있습니다. 척추에 있는 뼈 같은 것들, 그런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노래한 것은 ‘그녀 없이는 내가 있을 수 없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동일체의 고백입니다. 그렇게 온 인류가 번성하면서 모두가 서로에 대해서 이런 사랑을 하면서 살도록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랑할 힘은 여전히 남아있는데 사랑을 올바르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어렸을 때 우리는 귀뚜라미를 가지고 많이 놀았습니다. 귀뚜라미는 알다시피 더듬이가 매우 깁니다. 어렸을 때 귀뚜라미를 잡아놓고 가위로 귀뚜라미의 더듬이 두개를 잘라버립니다. 그러면 귀뚜라미는 멘붕에 빠집니다. 아무리 안테나를 움직여도 아무 것도 더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아무데도 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고 서 있는 귀뚜라미를 보게 됩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고 하나님께 범죄하게 됩니다. 그리고 죄와 사망이 들어오게 됩니다. 사랑할 능력은 남아있으나 더듬이가 잘린 귀뚜라미처럼 어느 방향으로 사랑해야 될지를 모르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귀뚜라미는 제 자리에 있지만 인간은 제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갈 방향도 모르면서 사방팔방으로 마구 뛰는 것입니다. 그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남아있으나 올바르게 사랑할 수 없는데 그 사랑의 힘을 가지고 온갖 악을 저지르고 함께 사랑하며 살아야 할 이웃 사이에 상처와 고통을 주는 존재들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부터 우리는 거의 상처받지 않습니다. 기대하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대표적인 부류는 가족입니다. 마땅히 부모로부터 한없는 사랑을 무한히 받아야 할 인간인데 그 부모에게서 상처를 받고 자식으로부터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받아야 할 부모인데 자식으로부터 큰 상처를 당합니다. 함께 사랑하고 긍휼히 여겨야 하는데 무관심하게 상처를 받게 되는 것도 모두 처음 있었던 그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하나님께로부터만 오는 그 사랑을 영혼에 듬뿍 받고 그 사랑의 힘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며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따뜻하게 돌봄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구현하는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조화로운 사랑의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40개월 미만된 아이들이 있는 아버지들을 한 방에 모아놓고, 아빠를 모아놓고 문제지를 주었습니다. 우리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가? 우리 아이는 언제 가장 행복해 하는가? 우리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은 무엇인가? 아이와 함께 마지막으로 놀아준 때가 언제인가? 아빠들은 모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즐겁게 정답을 썼습니다. 시험 문제지를 모두 회수한 후에 똑같은 문제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는 그 대상이 자기의 아들딸이 아니라 그 사람의 아버지에 대해서 묻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무슨 음식을 제일 좋아하는가? 우리 아버지가 가장 행복해 하는 때는 언제인가? 우리 아버지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우리 아버지와 언제 놀아주었는가? 답안을 쓰다가 거의 모든 아기 아빠들이 울었습니다. 한문제도 제대로 답을 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불과 20년도 되기 전에 그렇게 답안을 쓰던 아빠들이 자기의 자식에게 똑같이 버림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위로 부모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고 아래로는 자식을 사랑하고 이렇게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그렇게 사랑하며 균형을 이루며 살 수 없게 된 이유가 무엇 때문일까요? 성경은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생명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에게 어떤 특별한 것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마땅히 해야 하지만 철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게 사람의 도리인지를 모르던 것을 행하게 가르쳐 주는 곳이 기독교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사춘기의 나이에 시골에서 매일 아빠는 소 풀이나 먹이러 오라고 하고, 엄마는 가사를 도와달라고 합니다. 학교 갔다가 가방 내려놓기 무섭게 여기저기서 일을 시키고, 집안일을 거들어야 합니다. 가끔 들려오는 도회지의 소식은 정말 흥미진진한 것이었습니다. 도회지의 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듣고 나니 이제는 이 시골 생활이 매우 따분해졌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지갑에서 돈을 조금 훔쳐서 그리고 새벽 버스를 타고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도회지도 도망을 옵니다. 그리고 제법 돈도 벌었고, 그리고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서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자식이 태어나고 철이 들면서 점점 고향 생각이 나게 됩니다. 바쁘게 살아온 나날들 속에서 어느 날 문득 밀려오는 피곤함이 따뜻한 아랫목에 차려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엄마의 밥상이 생각나게 하고, 재떨이를 두드리며 쿨룩쿨룩 기침을 하는 아빠의 그 모습이 떠오릅니다. 드디어 이 사람은 결심을 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가족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서 부모님을 멀리 떠났던 죄를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그리고 가족들이 얼싸안고 기쁨의 시간을 나누게 됩니다.
자, 보십시오. 타향살이가 부모와 인연을 끊고 도회지에서 그렇게 근본도 없이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입니까? 도회지에 살지라도 그 부모와 인연을 알고 그 부모를 공경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입니까? 철이 없을 때에는 그렇게 사는 것도 인생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했지만 나이 들고 철이 들면 그러면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람으로 하여금 철들게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본래 자신이 버리고 온 그 하늘 아버지를 생각나게 하고, 자기가 이 드넓은 우주 속에서 잠시 있다 사라져 가는 존재이지만 근본이 있는 존재이고, 돌아가야 할 아버지의 집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곳이 바로 기독교요, 교회인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우리가 우리에게 이런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인생에서 느끼는 말할 수 없는 소외감과 외로움, 가족들이 있지만 자신은 홀로 버려진 존재 같은 낯선 느낌은 모두 하나님을 멀리 떠난 타향살이에서 오는 서러운 감정들입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모두 돌아갈 집이 있고, 여러분들을 사람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로 돌아가 영혼의 안식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돌아가야 할까요?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영혼과 관계를 맺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 안에 끊임없이 당신의 충만한 영적 생명과 사랑을 부어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사랑과 생명의 힘으로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는 모든 인간을 자기의 몸과 같이 사랑하고, 가족들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며, 아래로는 하나님이 창조한 이 자연의 모든 만물을 학대하지 않고 따뜻하게 돌보아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되도록 이바지하게끔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죄 때문에 이 모든 관계가 깨졌습니다. 인간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영혼의 양식은 공급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육체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하며 먹고, 입고, 마시지만 영혼은 거의 돌보지 않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뜻과는 정반대의 결과 속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끊어지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사랑받기는커녕 다투고 분쟁하며 고통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고, 이런 이기심들이 국가적으로 규합될 때에 전쟁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을 끊임없이 확대하고 그 재앙적인 자연의 결과들이 인간의 육체를 위협하는 시점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이런 불행한 상태에서 도저히 스스로를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보다 못해 이 불쌍한 인간들을 참 본래의 아름다운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원히 당신의 아들이신 하나님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을 입혀 이 세상에 내려 보내신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크게 두 가지 목적이었습니다. 하나는 우리에게 그런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었지만 역사적인 예수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눈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볼 수 있었고, 손을 갖고 가까이 가는 사람들은 그 분을 만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어떻게 사시고, 어떻게 우리를 돌보셨는지를 보면서 그분과 하나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비록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지만 그분은 그렇게 머리 둘 곳이 없는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러나 일생은 병든 자를 고치고 주린 자를 먹이고 그리고 어리석은 자를 깨우치는 일생이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으로 모든 사람들을 돌보셨습니다. 그 분은 죽으셨으나 그분을 목격한 기록들이 성경에 남아있기 때문에 오늘 누구든지 그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듣는 사람은 똑같이 그분이 이 땅에 살아계셨던 때 것처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그렇게 영원한 생명, 영원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게 하기 위하여 예수는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 인간들에게 참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편으로는 참 하나님으로 사셨고, 또 한편으로는 참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아버지요, 선생님이요, 이웃이요, 형제가 되어 주셨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셔서 착한 생애를 사셨습니다. 자기를 온전히 내어줌으로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하고, 평화의 도구로 사셨습니다. 빛이셨기 때문에 무지의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밝혀 진리를 따라 행복하게 살 수 있게끔 도와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당시 모든 사람들은 부끄러워하였습니다. 참 인간이 저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살아야 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참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 철든 사람이 삶이 무엇인지 가르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얼마나 높고 위대하신 분이신지를 배우게 되고, 미천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참 철든 인간으로 도리를 다하며 사는 것인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면 저절로 좋은 아버지요, 아들이 되고, 딸이요, 어머니가 되고, 형제가 되고, 이웃이 되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중 가장 뛰어난 일은 바로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해서 그들의 죄를 대신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는 있지만 그 죄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모든 죄는 이 모든 우주를 창조하고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 앞에서 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놀다가 황제에게 던져 버려서 황제의 옷에 떨어졌다고 칩시다. 아이는 그런 나쁜 짓을 의미를 모르고 했지만 그 아이는 잘못에 대한 처벌을 받을 능력이 없습니다. 아이가 장난삼아서 단추를 잘못 눌러서 커다란 건물이 폭발했다고 칩시다. 아이는 그런 실수를 할 수 있지만 폭파된 건물을 배상할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바로 인간의 죄가 하나님 앞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의 원래의 본 가정인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94년도에 운전면허를 땄습니다. 따게 된 동기는 제주도에 가서 렌트카를 빌리고 저는 집회에 들어갔는데 아내는 맨날 듣던 이야기니까 듣고 싶지 않고 여기 산책하고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열심히 한 1시간 반 동안 강연을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랬더니 아내가 이야기했습니다. “내 처지가 너무 탁해. 남편이 강의하는 동안 내가 운전할 줄 알았다면 이 차를 몰고 제주도 구석구석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는 운전 학원에 등록을 하고 열심히 운전을 배웠습니다. 25년 동안 운전을 하면서 그녀에게 늘 자랑이 있었습니다. ‘나는 교통 위반한 적이 없어.’ 사실은 위반한 적이 없는 게 아니라 걸린 적이 없었습니다. ‘한 번도 과태료를 낸 적이 없어’ 하고 자랑했습니다. 2주 전에 딱지 하나가 날라 왔습니다. 그리고 바로 집 앞에 있는 동네 큰 길에서 빨간 불에 신호를 위반하고 주행을 했다는 사진이 찍힌 채 날라 왔습니다. 그리고는 계속 ‘나는 그런 적이 없는데. 그런 적이 없는데’ 여기 사진에 자동차 번호가 찍히고 신호등 색깔까지 찍혔다고 그랬더니 ‘당신이 대신 내 주면 안 되겠습니까?’라고 해서 ‘그러지 뭐’하고 제가 내주었습니다. 벌점은 15점이고 6만원을 내든지 아니면 운전자가 누군지 확인이 안 된다고 하고 7만원을 내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법대로 과태료 고지서를 처리했습니다. 일주일 있다 또 한 장이 날라 왔습니다. 거의 똑같은 장소에서 또 찍혔습니다. 이번에는 막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고 짜증을 내었습니다. ‘당신이 위반했으니까 그랬지’ 그랬더니 하는 말이 ‘의롭다고 내세울게 하나도 없어. 25년 운전하면서 딱지 떼지 않은 것을 25년 동안 자랑했는데 이젠 그 자랑도 못하겠네.’ 이번에도 제가 두 번째 과태료를 대신 내주었습니다. 그것도 똑같이 벌점 15점에 6만원 혹은 과태료 7만원의 고지서였습니다. 두 번 모두 내주었습니다. 교통 위반한 사람은 아내인데 대가는 제가 치루었습니다. 충분히 치루었기 때문에 이제 경찰은 더 이상 아내에게 ‘왜 신호를 어겼느냐’고 추궁하지 않습니다. 잘못은 아내가 했는데 남편인 제가 돈을 물어준 것, 이것이 바로 대속입니다. 죄는 여러분들이 지었는데 그 죄에 대한 형벌은 예수가 받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예수의 위에 뒤집어씌우시고 형벌을 당하게 하시고, 그 덕으로 우리는 용서를 받게 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그를 믿을 때에 다시 참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생명과 은혜를 한없이 부어주신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사람들에게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다시 하늘을 열어 우리의 죽은 영혼을 살리시고, 살아난 그 영혼에 영혼을 영혼답게 살게 하시는 충만한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이 생명은 곧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은 용서할 수 없었던 가족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었던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26년 전 교회를 개척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였습니다. 지하실 교회에 교인이 몇십 명 모이던 때였는데 새벽기도를 가면 우리 교인이 아닌 어느 부인이 와서 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목회자는 수십 명이 기도를 해도 누가 정말 기도를 하는지 안 아는지를 알 수 있는 영적인 더듬이가 있습니다. 늦게까지 새벽기도를 하고 가는 그 부인은 거의 한 마디도 기도를 못하고 매 새벽마다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은 너무 궁금해서 ‘당신 누굽니까? 그리고 왜 우리교회 새벽기도 나옵니까?’ 했습니다. 다른 교회에 다니고 있고 집에 가까워서 새벽기도 나오는데 자신이 매일 새벽기도 나오는 것은 두 가지도 아니고 한 가지 기도제목 때문에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남편하고 은혜롭게 이혼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정말 간절히 남편과 헤어지기를 원했습니다. 남편은 평균적으로 봐도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지만 그러나 성격이 거칠고, 그리고 술을 너무 좋아해서 알콜 중독 상태에 들어가고, 그리고 아내에게 폭언도 하는 거친 남편이었습니다. 그러다 그 부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미움이 변해서 얼마나 놀라운 사랑이 되는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일이 있고나서 얼마 안 되서 남편은 중풍에 걸렸습니다. 회사는 퇴직을 하게 되어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아내는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그 집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면 남편은 반신불수가 되어서 침을 흘리고 있는데 아내가 닦아주었습니다. 언어도 어눌한데 이 부인은 목사인 제 앞에서 남편의 볼을 부비며 자기는 이 사람을 너무 사랑한다고,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사랑하며 살다가 남편이 먼저 하늘나라에 가셨습니다.
(찬양) 오늘 피었다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 이 몸을 정금 같게 하시네.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힘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더욱이 그 사람을 생명처럼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이 자신을 향하지만 자기를 더욱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역설적으로 그는 더 많이 사랑받지 못하고 소외를 경험하게 됩니다. 인간은 처음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께 사랑을 받고, 그 분께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생명을 받으며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이 관계가 깨지고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 때문에 사람들은 주님을 멀리 떠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자식이 부모를 나몰라라 하고, 자기 행복을 찾아 멀리 떠나가 도회지에서 성공하며 즐겁게 살아도 자식이 오기를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빠는 동구 밖에 나아가 자식을 기다리고, 어미는 정화수를 떠놓고 신령님께 자식의 무사 귀가를 기원합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에 그림자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났으나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시간도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려고 하는 사람들의 손을 이끌어 당신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지금이 바로 그렇게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친구들과 함께 망까기를 하고, 숨박꼭질을 하며 재미있게 놀다가 어두움이 깔리고 여기저기 굴뚝에서 연기가 나고, 머리에 수건을 쓴 엄마들이 아이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면 모든 걸 버려두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지금 하나님을 멀리 떠나 고단하고 외로운 삶을 살았던 여러분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 몰랐던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은 사랑의 음성으로 여러분들의 이름을 크게 부르십니다. 어스름한 저녁의 때에 모든 따뜻한 밥을 차려놓고 여러분들의 이름을 불렀던 엄마처럼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이름을 부르고 계십니다. 주님 없이, 고향 없이 살았던 고단한 삶을 멈추십시오. 그리고 한없이 사랑이 많으신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십시오.
정채봉이라고 하는 시인이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이라는 시를 썼습니다. 이 시인은 60대이고 지금은 작고하신 걸로 아는데 어머니를 어린 나이에 여의었습니다. 시 속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 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주님은 그렇게 사랑이 많으신 어머니 같은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을 당신의 품에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여러 번 불렀지만 여러분은 몰랐기에 오늘 저를 통해 여러분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믿고, 그것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 핏빛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다면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믿을 마음을 주시고, 여러분들을 다시 당신의 품에 안으실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더 이상 외로울 이유가 없고, 결핍할 염려가 없고, 영원히 핍절할 이유가 없이 그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며 어디 가든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구원한 그 손을 마지막 여러분들의 숨결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놓지 않을 것이며 이 죽음의 장막을 거둔 후에는 당신의 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의 품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