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01. 22._교직원예배
하나님이 보낸 설교자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요 1:6-7)
녹취자: 피노라
저는 오늘과 다음 시간까지 두 번에 걸쳐서 설교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문제가 중요한 것은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설교자는 설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성도는 그 설교를 듣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않고는 신앙의 유아기를 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긴 이야기를 하지 않고 바로 핵심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요1:6) 당연히 그의 사명은 빛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었고 우리가 읽은 본문 앞에 보면 결국 그 빛은 일반적인 진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임이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은 하나님에 대해 증거하는 일인데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직접 하지 않으시고 사람을 사용하셔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자는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기 위해서 설교하고 있다는 생각이 분명해야하고 두 번째는 그 설교를 듣는 사람은 저 설교를 통해서 내가 그리스도를 만난다는 생각이 분명해야합니다.
그러면 모든 설교가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판단해야 되겠습니까? 설교가 성경을 설교하고 있는 한해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면 전해서도 안 되고 들을 의무도 없고 들으면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엄중한 사안입니다. 설교자는 성경의 가르침과 자신의 설교가 사상적으로만 연속선상에 있지 않고,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신자들에게)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주고 설교하는 내용이 명백하게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있어야합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좋은 설교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기 전에 좋은 설교 청취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목회의 길을 가니까 내가 하나만 얘기하자면, 훌륭한 설교 청취자였던 사람들이 훌륭한 설교자가 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설교자가 되는 예가 없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그런 원칙이 통하는 것입니다. 데니스 레인(Denis Lane)이라는 1980년도에 강해 설교계를 주름 잡았던 영국의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분은 아주 탁월한 강해 설교자였습니다. 지금에 있는 오늘날의 설교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렇게 탁월했는데 깊이 있는 설교의 비결이 뭐냐고 물으니까 “회심을 한 이후 설교 같지 않은 설교는 들은 적이 없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설교를 들려 준 사람들이 제임스 파커(James Packer)와 로이드 존슨(Lloyd Jones) 목사님입니다. 두 분의 설교를 들으면서 신앙생활을 해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한 목회자가) 아무리 많이 책을 읽고 설교를 들어도 항상 이 속에는 하나님 앞에 자기를 굴복하고자 하는 것은 별로 없고(없는 채로), 그것을 소재로 자기가 어떻게 설교를 할 것인가를(만)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결국은 말씀을 전하지만 자신은 말씀 앞에 깨어져 본적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나온 설교는 깊은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한동안 우리 교회에서 은혜 받은 사람이 아니면 교역자로 사람을 선정하지 않았던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그것이었습니다. 설교를 설교답지 않게 하는 사람 중 목회를 목회답게 하는 사람이 없고 설교를 진중하게 청취하며 은혜를 받지 않는 성도들 중 진짜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잘하면 그저 자기의 의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로 가슴에 새겨야할 것은 설교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 보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한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사람이라면, 하나님 곁에 있다 온 흔적이 있어야합니다. 그것이 신령함, 하나님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깊은 심취, 거기에 복종하는 자신의 삶, 그 안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형상 이런 것이란 말입니다. 성도들은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고, 설교에 은혜를 받으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자기가 어느 정도 하나님의 앞에 세워진 사람인가 하는 것은 자기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가. 정확하게 그 정도입니다. 어린아이를 놓고 못 하는 사람은 어른을 놓고도 못합니다. 뭔가 중요한 변화가 그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너무 안타까운 것은 젊은 목회자들이 그것이 결함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주 심하게 이야기하면 내가 소명을 받았고, 신학교에 갔고 전도사가 되었고 목사가 되었는데 내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사람이 거의 없다면 (목회자가 자신의) 소명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회심과 성화의 열매로 나타나야 됩니다. 소명은 분명한데 그 열매가 너무 희박하여 괴로운 것이 소명의 증거입니다. 괴롭지 않으면 두 가지입니다. 소명이 아니던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던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쓰임을 받을 순 없지만,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하나님 곁에 있다 온 흔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근본적으로 사역의 문제를 가지고 괴로워하고 고통을 받고 죽음의 고비를 넘기는 것 같은 그런 진지함이 없다면 그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그가 증언하러 왔나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요1:7)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증언이라는 것은 법정적 용어입니다. 말튜리온(?)이라는 것인데, 법정적인 증언입니다. 설교자는 예수를 변호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의 이익을 위해서 자기도 못 본 일을 정파적 견해를 가지고 예수를 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도 일어나서 세수를 하면서 정말 이 나라가 어떻게 될까 마음에 무거움이 밀려 왔습니다. 어차피 한 나라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파를 지향하는 사람이 있고 좌파를 지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마찬가지이고 그것이 없으면 사회도 아닙니다. (그러나) 지도자는 그것을 통합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합니다.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킹 나탄(?)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사회의 문제는 사회의 불의에 대해서 용감하게 일어설 수 있는 의로운 사람이 숫자가 적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럼 뭐가 문제가 됩니까? 잘못되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비판한 사람이나 비판받은 사람이나 모두 묶어서 그 위로 통합할 수 있는 어떤 힘이 없기 때문에 사회는 불행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의 잘못한 한두 가지 결점이나 약점을 보고 그 사람을 악인으로 매도해서 (그 사람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 세상에 누를 끼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은 하나님의 시각이 아닙니다. 잘못을 비판하고 죄와 악에 대해서 명백히 반대하면서도 그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끊임없는 분노와 복수를 가져옵니다. 그것을 통합해서 모든 사람을 묶어낼 수 있는 그 신념과 기술을 지도자는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각기 자기의 정파에 충성하는 사람들로 나라가 찢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오래전에 그런 걱정들을 예고했습니다.
하나님에 관해 증거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것은 자기 마음으로 위하는 어떤 신념을 보지도 못한 채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증거한다’는 것은 무엇이냐면 법정의 증인이 하는 역할입니다. 증인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사건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설교는 자기가 만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관해서 재판 받는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증언을 하는 무게가 있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현장 목격이 중요한 것입니다. (설교자는) 만난 그리스도를 말해야 됩니다. 그 목표는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함이라.” 무슨 뜻이냐면 설교를 하면서 자기가 이미 그 설교의 끝에 도달한 것처럼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나란히 옆에 있어서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아랫것들로 보고 설교한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 다음 구절에 나오는 것이 “그는 빛이 아니요” 하고 쐐기를 쾅 박는 것입니다. 설교라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라서 자기가 계속 설교를 하면 자기가 그렇게 이미 된 것 같은 착각을 갖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잘 반복해서 인격화된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타고 납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돈을 열심히 모아가지고 청계천에 가서 중고 축구공을 하나 샀습니다. 그런데 공이 없어졌습니다. 어느 날 보니까 앞집에 있는 녀석이 나보다 세 살 어렸는데, “형형” 했는데 그 녀석이 들고 다니면서 차는 것입니다. 딱 보니까 다이아몬드 하나에 한 3센티 정도 까져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내 공입니다. 의심할 수 없습니다. 물론 그것을 증언해 줄 사람은 없었습니다. (앞집 아이가) “자기 공”이라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집에서 가져 왔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것을 양보할 리가 있습니까? “내놔라 내 공이다 여기 상처 있는 거 보면 알지 않느냐” 뺏으려고 하니까, 그 엄마까지 뛰어 나오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얼마나 무서우냐면 할아버지 집에서 가져왔다며 이 아이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내가 잊히지가 않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거짓말 탐지기를 다 통과합니다. 그래서 설교하는 사람들의 영혼은 위험한 것입니다.
설교의 목적은 설교를 해서 자기 앞에 사람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에 관해서 설교를 했는데 주님의 가르침은 사라지고 기도를 많이 한 설교자의 모습이 생각나면 그 설교는 실패한 것입니다. 헌신에 대해서 설교했는데 자기 온 몸을 버리고 살아 온 설교자가 생각나면 설교는 그리스도를 증거 한 설교가 아닙니다. 사람을 내 앞에 세우기 위해서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입니다. 자기가 모든 삶에 있어서 뛰어난 부분, 그럼 결국은 사람들보다 자기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해서만 설교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것은 설교 전체가 자신에 대한 자랑입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우와 저분은 저렇게 기도를 많이 하셨구나, 저렇게 성경만 파는구나, 저렇게 구제를 많이 하셨구나, 저렇게 용감하구나, 저렇게 순결하구나.” (라고 느끼게 합니다. 이것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이 그렇게 못하니까 좌절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좌절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보면서 자신의 거울 앞에서 좌절을 느끼는 것입니다.
설교의 목적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법정에서 증언은 관심도 없습니다. 뭐에 대해서? 그 판결되고 있는 사안에 대해서 판결에 영향을 미칠 요소를 제공해 주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도는 그 증언이 무엇을 말했는가가 그 재판관들에게 있어서 관심사지 그 사람이 회사를 몇 개 가졌나. 여기 오기 전까지 어떻게 살았나. 그런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건 모두 하나님 앞에서 그 설교를 하기 위해서 준비하는 삶입니다. 모든 설교자에게는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신앙적으로는 생각하지만 설교단에 올라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설교하고 그것을 삶과 연결 지을 때 항상 그 유혹을 모든 설교자들이 받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한 자기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자신은 잊히는 것이 세례요한이 지향했던 삶입니다. 이 이야기를 회중들에게 적용을 하자면, 현란한 말로 설교를 해도 항상 그 설교자가 아니라 설교자 너머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하는 것입니다. 저가 증언하는 저 설교가 하나님에 대해서 무얼 말해주고 있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지막 결론은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사랑도 결국은 믿음이 있는 곳에만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그냥 솟아나는 사랑이 아닙니다. 누군지 모르는데 믿을 수 있겠어요? 그를 신뢰하지 않는데 사랑할 수 있겠어요? 자기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섰을 때 회개한 적이 없으면서 자기 설교를 통해서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바라는 건 온전한 마음이 아닙니다. 자기는 눈물 흘린 적이 없는데 사람들은 자기 얘기를 듣고 눈물 흘리길 바라는 건 온전한 설교자의 정신이 아닙니다. 일체의 두려움과 떨림으로써 자기는 감추어지고 하나님만 나타나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제가 일 년 와서(동안) 가운 입는 걸 한 번도 못 봤죠? 왜 안 입는지 아세요? 칼빈(Calvin)은 자기를 감추기 위해서 가운을 사용했습니다. 지금은 가운이 오히려 자기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저는 가운을 입지 않습니다. 똑같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지만 똑같은 인간의 연약함으로써 두려움과 일체의 떨림을 가지고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세우기 위해서 설교하는 사람이 설교자입니다.
그 마지막 결론은 사람들이 믿게 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분을 믿으면 설교한 사람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을 멀리 해야합니다. 설교자는 항상 외로울 각오를 하는 사람이어야 됩니다. 당연히 사람인데 자기한테 은혜 받은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고 싶고 둘러싸여 있고 싶죠. 그런 유혹을 과감하게 버려야 됩니다. 그런 외로움을 외로움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큰 정신의 세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목사에게는 ‘관종 기질’이 다 있습니다. ‘관심종자’입니다. 자신이 관심을 받고자하는 기질이 있습니다. 설교에서 이런 기질이 작용을 하면, 그는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잊혀야 하리라.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합니다.
미래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지만 그러나 적어도 나는 교회를 은퇴하고 나서 사람들이 모르는 어느 구석에서 열린교회 교인들이 보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고 멀리 떨어진 소외감에 외로워하면서 살고 싶진 않습니다. 그런 것은 바람직한 삶이 아닙니다. 너무너무 사랑하고 있는 동안에 서로가 이름 석 자가 그리움이 되어야 하고 눈물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람에게 집착하는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목사는 교인들이 많이 늘어날수록 외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안수집사가 둘 넷 여섯 여덟 11명 있다고 칩시다. 다 고만고만합니다. 이 사람하고만 밥 먹으러 다니면 나머지 사람들이 좋아하겠어요? 뭐가 있나 그럴 것 아닙니까.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 기쁨 자체가 내가 온 마음을 다해서 눈물과 피로 설교를 할테니 그것을 밟고 너는 그리스도에게로 가고, 그리스도가 너무 아름다우시기 때문에 그런 것도 별로 있지도 않지만 혹시 있다고 하더라도 설교자의 아름다움은 눈에 들어오지 말고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그 하나님과의 사랑에 깊이 빠져서 인간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기억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설교를 잘 듣는데서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으면 영혼들의 상태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서 끊임없이 은혜가 생기는 사람들은 훌륭한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설교를 듣지 않는 사람이 신앙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다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예배를 중심으로 신앙이 큰 사람과 이런저런 교회를 돌아다니면서 한 교회에 단 5년도 정착을 못하면서 사람들이 얼러주고 띄워주는 것에 재미가 들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자란 사람들 하고는 다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할 줄 알고, 그리고 하나님 말씀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아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한 예배자가 된다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 말씀 앞에 얼마나 자기가 영향을 받고 믿음을 가질 수 있느냐 거기에 달린 것입니다. 지금 하세요. 설교는 사람을 자신 앞에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설교 듣는 사람들에게는 종종 생생할 수는 있고, 감동도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열등감을 느낄 수 있고 비교의식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모두 허무한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한 설교자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할 때 성도들로부터 느끼는 가장 큰 소외감은 자기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와 아무리 친해도 그것은 아주 큰 소외감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런 설교자가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게 된다면 어떤 소외감도 느끼지 말아야 됩니다. 왜? 만약에 소외감을 느낀다면 자기가 그만큼 하나님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닙니다. 나도 그렇게 완벽하게 설교하면서 살지는 못했지만 젊을 때부터 설교 속에서 가능한 한 명백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법이 아니면 자기사랑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설교를 들을 때 전혀 그가 그렇게 하지 않는데도 그가 진리에 대해서 달라붙은 마음으로 온 인격으로 설교하면, 그럼 성도들은 그의 삶이 어떠했을지 온 가슴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이 주는 힘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마약하지 마세요.” 감동이 있습니까? 마약으로 쩔어서 인생을 다 망쳤다가 살아난 사람이 “마약하지 마세요.” 옛날에 온 국민을 울렸던 금연 광고 중 하나가 코미디언 이주일씨가 죽어가면서 코에다가 호흡보조기 끼고 죽기 며칠 전에 월드컵에 추첨해서 구경하게 해줬습니다. 마지막에 광고가 여기에 코에 낀 모습을 보여주면서 “젊을 때부터 담배가 자기의 인생의 위로였습니다. 슬플 때나 괴로울 때나 담배를 피웠는데” 폐암에 걸려서 다 잃고 죽음을 앞두면서 “여러분 절대 담배 피지 마세요”(하니까) 사람들에게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설교하되 자신이 이제껏 그리스도 앞에 살아왔던 온 마음과 인격으로 설교해서 진심이 되어야합니다. 나는 빛이 아니요 나는 빛에 대해 증거하러 왔을 뿐이라. 그것이 자기의 진실한 소원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거의 안 부르는 찬송입니다.
(찬양)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니
그분을 온전히 드러내면서 그 분에 대한 광채가 설교를 들은 성도들의 마음을 가득 채울 때에 그 설교가 살아있는 설교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