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부활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눅 24:40-49)
녹취자: 백지영
사도 바울은 정통 유대인이었습니다. 혈통으로 히브리인이지만 유대교를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약에서 가르쳐 주는 여호와의 종교와는 다른 종교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그 사람이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을 기록하고 사실 기독교의 토대를 놓습니다. 선교학자들은 그가 직접 전도한 사람이 130만 명 됐을 것이라고 추정을 하는데 그 확실한 숫자를 누가 알겠습니까마는 그 숫자는 당시 로마의 규모로 보면 어마어마한 숫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도하던 그 위대한 30년의 시대에 기독교의 기틀이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펼쳐진 사도 바울의 어마어마한 선교사역, 그 다음에 신학 이런 것들을 바깥에서부터 추적을 해서 안으로 계속 들어올 때, 그때에 지구의 핵처럼 하나의 씨앗이 발견이 됩니다. 그 종자 씨가 퍼지고 퍼지고 확장되면서 우리들이 오늘 알고 있는 이 기독교라는 형체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너무 크고 방대해서 사람들이 마치 이 지구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땅덩어리를 다 가보지도 못했고 우주 바깥에서부터 본 적도 없기 때문에, 여기를 갔다 온 사람은 이것이 지구라고 이야기하고 저기를 갔다 온 사람은 저것이 지구라고 이야기하듯이 그런 정도의 어마어마한 크기의 사상과 그리고 진리의 체계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계속 파고들어올 때 그 모든 것을 태동시켰던 하나의 핵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엇이냐 하면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입니다. 그 경험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이 모든 창조의 근본이시며,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그 다음에 타락으로부터 구원하고 완성하시는 위대한 역사의 한 축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그러면서 그것을 중심으로 사상이 세워지게 되는데, 초기에는 약간 사상이 명확하지 않았지만 사도 바울이 신앙과 신학의 연조가 깊어져 가면서 그러면서 이것이 아주 정교하고 우주적인 관점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정점에 와 있는 것이 골로새서입니다.
그런데 그 핵심,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의 핵심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요한복음 3장 16절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게 어떻게 유대교 안에서 잘못 해석되었는지에 대한 오해에서 깨어나게 된 핵심적인 씨앗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에 대해서는 지난해에도 설교했고 내일도 설교할 것입니다. 귀 기울여서 들어보십시오. 그런데 그 핵심이 뭐냐 하면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이고, 거기에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있는 것입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우주적인 경륜이 그 하나의 씨앗에 담겼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도 바울의 모든 종교와 신학, 그러니까 종교라는 게 결국은 경건이지요,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이 ‘나의 복음’이라고 말했던 그 복음에 대한 해석, 이것이 결국은 그 씨앗이 확장된 것이라는 그것이 김세윤 교수가 ‘The Origin of Paul's Gospel’이라고 하는 1974년도의 박사논문에서 발표한 내용의 핵심입니다. 처음에 그 책을 읽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지만, 이렇게 정교하게 유대문헌까지 모두 동원하면서 그것을 입증해 낸 것입니다. 상당히 의미 있는 논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기 훨씬 전에 예수님이 벌써 그렇게 될 것을 오늘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대는 아마도 갈릴리 바다겠지요. 거기에서 생선을 잡수신 후, 생선을 잡수셨다는 것도 어떻게 부활하신 부활체가 밥을 먹을 수가 있느냐 그런 질문이 나오는데, 그 신비야 우리가 다 알 수 없지만 공간에 매일 수도 있고 공간을 통과할 수도 있고 그 다음에 그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안 먹을 수도 있고 그러한 신체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부활체이니까 굳이 식사를 하실 필요가 없었을 텐데 먹으신 그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것입니다. 예수 생전에 계실 때에 식사의 의미가 가족으로서의 생명적인 교제를 뜻하는 것입니다. 사랑입니다. 식탁을 나누는 것이. 가족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에 자기의 피와 살을 먹고 우리 모두가 한 몸이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의미 깊은 사건입니다. 말하자면 성찬과 같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면서 예수님이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구약이 달려온 길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율법, 선지자의 글, 시편, 이것이 구약성경의 타나크입니다. 토라, 느빔, 우 케튜빔, 그래서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서 율법, 선지서, 성문서, 이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서 지금도 히브리어 성경의 이름은 타나크라고 부릅니다. 한 글자씩 따와서. 그래서 토라, 느빔, 그리고 우, 케튜빔 이렇게 됩니다. 그 말씀이 무슨 뜻이냐 하면 구약의 전 성경이 자기를 향하여 가리키고 있는 내용들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구약의 주된 내용입니다. 그 토라, 율법과 선지서와 성문서의 가리키는 중요한 지시하고 있는 내용이 있는데 그게 당신 자신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 하는 그 말이 이것이라고 하면서 어느 한 주제로 집중시키시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미 있었던 일이지만 첫 번째가 고난입니다. 그래서 46절에서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날 것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직전에 무슨 말씀을 주시느냐 하면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경을 깨닫는 것인데 이성으로 공부를 통해서 성경을 깨닫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열어서 그 계시를 볼 수 있도록 특별한 은혜를 주셔야 됩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 신학교 시절에 선생님 한 분이 계셨는데, 이분이 초창기에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잘 하셔서 한국교회의 거의 우리 세대의 모든 사람들은 그분 책을 가지고 히브리어, 헬라어를 공부를 했습니다. 그분이 직접 쓴 것은 아니고 메이첸과 데이비드 눈의 책을 가지고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교제를 만들었는데, 그분은 유학을 위해서 발길 한번 돌린 적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토종으로 공부를 하셔서 나름대로 이루셨습니다. 그때 신학교라는 것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목회도 아주 잘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너무 일꾼이 없으니까 도대체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분 표현으로, 설교 한편 죽어라 하고 준비해 놓으면 홀딱 써먹고 홀딱 써먹고 하는데, 어느 날 이렇게 해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강의를 아침부터 밤까지 하고 그리고는 설교준비를 해서 주일날 설교를 하고 수요설교를 하는데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어서 10일 동안을 금식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제가 이런 식으로는 도저히 교회에도 누가 되고 학교에도 누가 돼서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제 마음을 열어서 성경을 볼 수 있는 눈을 주십시오.” 10일이니까, 그분 나이 그때 50대쯤 되셨으니까 사실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금식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눈이 열리면서 성경을 펼치면 그 성경이 살아서 자신의 눈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저는 그분 설교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주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었습니다. 그런 눈이 열려야 됩니다. 그래서 아무리 신학공부를 많이 하고 왔어도 설교하는 것을 이렇게 들어보면 저 사람이 이성의 곡괭이로 성경을 판 사람인지 하나님이 그 마음을 열어주셔서 성경을 보게 한 사람인지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마음을 열어주시는데,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그 후에 제자들이 알아야 할 내용이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기 때문에 마음을 열어주어야 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첫 번째가 고난입니다. 이때만 해도 제자들이 아직까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무엇인지 살아나셨는데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살아나셨지만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까막눈입니다. 까막눈인데 다만 예수가 살아나신 것을 보고 기뻐하는데 사실 그것은 영적 기쁨이라기보다는 육적 기쁨입니다. 예수가 떠나지 않고 이렇게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구나 하는 데서 오는 그런 안도감입니다. 그러면서 고난에 대해서 먼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사도 바울은 사도 바울 되게 만들었던 이후에 그 복음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는 그 위대한 도리의 첫 핵심이 고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그 다음도 똑같습니다. 제일 먼저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고난을 제외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구원에 이르는 고백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죽으셔야 했을까?” 거기서 바로, 그 고난에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답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죄는 우리가 지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신 속죄의 죽음 안에서 입을 다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사도 바울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이후로 복음이 전해지면서 모든 사람이 똑같은 방식으로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기독교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 의미를 모르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참으로 십자가를 안 사람은 배교할 수 없지만, 그러나 만약에 어떤 사람이 배교를 한다면 그것은 결국은 십자가에 대해서 알았던 지식을 버리는 것입니다. 참지식은 아니었겠지만 그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모든 신학과 삶 이런 것들이 이 세상의 종교나 도덕, 윤리가 가르쳐주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런 혼탁한 것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네 개가 있는데 두 개만 하겠습니다. 두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이미 일어났습니다. 일어난 건데 그날 것을 성경이 가르쳤다, 그러면 그것은 왜 그렇게 중요한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을 때에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아주 정교한 종교적인 음모의 결과로 예수가 자기 죄 때문에 죽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 아니면 살리실 분이 없는데 그러면 하나님이 살리신 것입니다. 죽어야 할 죄가 있다면 살리셨을 리가 없고 살려야 할 분이라면 죽으실 리가 없었는데 죽으신 것도 팩트이고 살리신 것도 팩트입니다. 거기에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고 하는 교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속죄의 교리를 빼면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다시 살아난 것이 위대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세 가지 점에서 중요한데, 우선 우주적으로 뭔가 중대한 일이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단이 공중권세 잡은 자로 영계를 지배하고 있던 것이 무너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죽음이 사단의 마지막 카드였습니다. 그게 무너진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사실 죽음이 갖는 의미가 달라진 것입니다. 죽음은 사실 끝이었습니다. 구약에 스올이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그게 나중에 발전해서 하데스와 게헨나의 개념으로 발전해 가는 것인데 그 주제도 굉장히 재미있습니다. 한번 연구해 보십시오. 구약시대에는 스올은 적극적인 심판의 장소라기보다는 생명의 기운이 모두 사라진 아주 음습하고 기분 나쁜 그런 곳으로 묘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 희망이 모두 끊어진 상태를 스올에 있는 상태라고 불렀습니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죽음 이후의 어떤 무슨 낙이 있을까 모두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이 너무 고통스러우면 차라리 죽고 싶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렇게 욥이 말했지만, 그러나 기본적으로 죽음 이후라고 하는 희망이 있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활 사건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예수와 함께 죽기 때문에 그처럼 다시 살아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달라지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일어난 중요한 의미는 뭐냐 하면,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현재 우리 안에서 actualize 라고 하는데 실제화, 과거의 일어난 사건이 실제화 되어서 우리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게 사실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영적 생활의 신비인 것입니다.
하나만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교회오빠 이관희에서도 나오고 많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무슨 고난을 당하든지 간에 그 고난을 당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으로 자신의 고난을 투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주 쉬운 말로 표현하면 내가 고난을 당할 때 예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나와 함께 있고 그리고 이 고난을 당하신다.”
미로슬라브 볼프가 동족들이 그렇게 비참하게 학살당하는 그 상황을 역사를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 스승이 몰트만이었는데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에서, 그 사람 자신이 2차 대전 때 포로로 끌려가서 수용소에서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평생 질문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인류들이 고통을 당하고 죽어갈 때 그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마지막 그를 깨운 답이 그렇게 고통 받을 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고통을 받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얘기하면 굉장히 길지만 결국은 바로 그것이 투사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내가 고난을 당합니다. 더욱이 가장 좋은 것은 내가 예수를 위해 살다가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도 이 세상에서 나에게 주신 이 가르침을 보이기 위해서 사셨을 때 그 고난을 당하셨다는 것을 내가 깊이 묵상하면서 그러면서 나의 고난이 그리스도 예수께 투사되고, 실제로 신학적으로 내가 그렇게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사랑하며 당하는 고난은 실제적으로 교회를 통해서 그리스도께 봉헌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세세하게 파헤친 게 교회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해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될 때에 그때에 놀라운 게 뭐냐 하면, 그렇게 하면서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의 죽음이 자신 속에 침투해 들어오면서 자신의 죄와 욕망이 죽는 것을 경험하고, 그 죽는 것이 모티피케이션인데 그 죽는 것만큼 비비피케이션, 다시 자신이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는데, 이것이 결국 우주 안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나의 마음과 영혼 안에서 재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고백이 바로 사도 바울이 “예수 죽음을 날마다 내 육체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 생명이 부활의 생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써 살아나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이러한 정교한 신학적인 언어로 그것을 표현을 못 하는 것입니다.
밤에 이제 기도하러 교회에 옵니다. 그러면 근심과 걱정이 막 밀려옵니다. 요즈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자영업 하는 사람을 비롯해서 직장 쫓겨나고 그럽니다. 너무너무 괴롭습니다. 그러니까 눈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그러고 나면 결국은 나의 죄가 보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그러면 눈에는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데 무엇인가 내 영혼이 살아나는 생명으로 나를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입니다. 근원이 무엇인지 우리들이 족집게처럼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 신비하고 은밀한 일이니까. 그래서 그 속에서 예수가 그 죽음을 모두 이기고 살아나는데 죽음의 흔적이 없습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십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그렇게 살리실 수 있는 분이 누구인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입술이 다 부르트고 터지도록 탈고를 해서 책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정말 제 마음을 움직였던 것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우주를 놓고 보면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뭐라고 말할까 영원과 영원의 틈바구니에서 지나가는 바람 같은 존재인데, 언제부터 계속 됐는지도 모르는 영원과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영원 사이에서 잠깐 소풍 나온 것 같은 게 우리 인생인데 수많은 슬픔과 아픔을 안고 살아갑니다. 나도 내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래도 나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에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이 아름답기 때문에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알아주는 사람 없어도 하나님이 나와 관계를 맺으시고 나를 아시고 나를 사랑하십니다. 아무도 나를 몰라줍니다. 그런데 들에 핀 백합화 한 송이 누가 봐주지 않아도 결국은 솔로몬의 전의가 만들어준 그 옷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냅니다. 우리 하나하나의 존재가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보느냐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우월감도 느끼고 열등감도 느끼지만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으시답니다. 그렇게 살아 있는 게. 심지어 죄를 지으면서 살아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셔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이 세상에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여러분과 관계를 맺고 계시다는, 위대한 것이지요. 그 생명을 여러분 속에 충만하게 주셔서, 그래서 자신이 그 위대하신 하나님과 맺는 관계를 기뻐하면서 수없이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지만 그것이 오히려 나의 죄를 죽이고, 예수의 생명이 불끈불끈 솟아나게 만들어주는 그 생명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게 만들어주는 그런 사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빚으시는 것입니다. 그 기쁨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셨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셔서, 정말 스펄전이 표현한대로 힘으로 말하자면 당나귀 하나만도 못하고 강하기로 말하자면 바위덩어리 하나만도 못한 인간, 아무것도 아닌 인간, 코로나 한방이면 으스러져서 시신이 될 수밖에 없는 인간을 그렇게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고 소중하게 보고 계시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이 세상을 아름답게 보신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 벅차는 것이지요. 다음 시간에 두 개를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