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빛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4-5)
녹취자: 양현정
(인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전에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소위 어떤 경우에도 움직이지 않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의 참모습을 보게 하는 그 무엇에 집중했습니다. 그것이 진리에 대한 탐구였습니다. 이 일은 철학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래서 철학의 관심사는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현혹되지 않는 지혜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 모두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갈 때 인간이 올바른 판단력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자명했기 때문에 그 불변하는 기준을, 모든 것을 판단하게 하는 기준을 알고 싶어 했습니다. 이것은 다른 학문에서는 볼 수 없는 지향점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철학을 모든 학문 위에 있는 학문이라고 불리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학문에 지도를 받음으로써 그 하위의 모든 학문이 어느 길로 가면서 자신이 봉사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종교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가지고 더 많이 고민했습니다. 인간이 살아야 할 마땅한 도리가 무엇인가. 그 종교에서 가르치는 도리대로 사는 일이 중요했던 이유는 죽음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중국의 역사에서 보면 왕 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무덤을 어마어마하게 준비합니다. 사십 년씩 육십 년씩 공사를 해서 자신이 들어갈 무덤을 준비합니다. 저는 여러해 전에 시안에 갔을 때 병마총을 보고 정말 놀라웠습니다. 실제 사람 크기만 한 말과 말을 탄 사람, 혹은 그냥 서 있는 군인의 형상이 8,000개 정도 발견이 되었다고 합니다. 맨 처음 어느 농부가 밭을 갈다가 구멍을 하나 발견하고 그 유적지를 알게 되어서 당국에 신고했습니다. 가서 보니까 처음 발굴사들이 발굴해 내었는데 처음 나타나는 병마총의 병사들의 모습이 총천연색이었답니다. 그것을 아직까지도 염료가 무엇이었는지 찾아내지 못합니다. 초기 모습을 보여주는 데 정말 화려합니다. 공기에 노출되고 햇빛을 받으면서 우리에게는 기왓장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발굴해 낸 터가 1/700일 것이라고 본다고 합니다. 폼페이보다 어마어마한 유적이 묻혀 있는 것입니다. 진시황은 왜 그런 것을 만들어 냈을까요? 사후의 세계가 있다고 믿었고 그때에 자기를 호위하고 돌볼 그런 병사와 시종들이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세월에 걸쳐서 그 병마총을 만든 것입니다. 한 편, 이집트로 넘어가보면 파라오들이 등극하자마자 파라오의 위에 오르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피라미드를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자신 하나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어마어마한 밑변 높이 각각, 196m 되는 사각뿔을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피라미드를 세웁니다. 각각을 구성하는 돌 하나의 무게가 2.5톤입니다. 수만 개를 쌓아서 어마어마한 것들을 만듭니다.
결국은 현세에 우리들이 살아가는 길은 결국은 우리 죽음 이후의 어떤 처지를 만나게 될 것인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도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진리에 대해 관심이 없었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진리를 통해서 도가 결정되고 진리를 탐구하는 철학자들은 궁극적으로 그 사람들이 찾고자 하는 행복한 삶이었습니다. 철학은 종교적이었고 종교는 철학적일 수 밖에 없던 것입니다. 결코 철학은 종교적일 수가 없었고 종교는 철학적일 수가 없기도 했습니다.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목표 자체가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수많은 우상숭배와 거짓 종교들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특히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우리에게 계시된 이 종교는 참된 종교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가 태초부터 계셔왔고 하나님이셨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생전에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도 생명을 말씀하십니다. 철학은 진리에 대해서 종교는 도에 대해서 가르쳐왔지만 생명을 가르쳐준 종교는 없었습니다. 그 생명을 주겠다고 당신 자신이 생명이라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계셨으니 그분이 곧 그리스도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는 생명이요”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부와 성령과는 상관없이 자신만 생명이라고 하는 뜻은 아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 이미 영원전부터 생명이셨고 그 생명이 결국은 영적인 생명이 육적인 그 모든 생명들을 산출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 생명에 의해서 이 생명들이 창조되고 그 생명에 의해서 모든 생명 중 가장 뛰어난 영적인 생명이 창조됩니다.
인간이 그렇게 오랫동안 종교를 통해서 행복의 길을 찾고 철학을 통해서 진리를 찾았어도 결국은 행복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이 주전 5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피렌체에서 13세기, 14세기, 15세기 예술적인 천재가 아닌 철학적인 천재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중 많은 사람이 자살로 생을 마칩니다. 진리를 그렇게 치열하게 탐구했지만 그러나 결국 행복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 그것은 도를 찾아도 그리고 진리를 추구해도 그것으로 인간에 충만하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그 생명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 백성들에게 주시던 바였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생명이었습니다. 육적인 생명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으나, 그것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느끼는 사람은 지극히 소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영적인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 시대부터 쓰여져서 포로기까지 쓰여진 시편을 보면 다양한 세대에 걸쳐 자신들이 경험한 내적 생명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진토와 같이 땅에 떨어졌던 사람들의 영혼을 회복시켜서 다시 기쁨의 관을 쓰게 하시는 것도 영적인 생명에 대한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힘을 얻나이다’라는 고백도 영적인 생명에 관한 고백이었고, 원수를 용서하는 것도 영적인 고백이었고, 육욕에 빠졌던 사람들이 변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결심을 가졌던 것도 영적인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결국은 성소에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 것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되어 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잠시이지만 죄의 용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순종하게 하시는 은총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림자요 맛보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감각 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도 그들이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알 수 있게 하심으로써 그분이 어떻게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는 건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한 능력을 아주 풍부하게 예수를 통해서 나타나도록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이었습니다. 이것은 성령 강림 이후에 더 빈번하게 나타나서 많은 사도들이 죽은 사람들을 살려내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계속된다고 생각하고 모 교회에서는 죽은 자들을 살아나게 했다는 헛된 소문을 퍼뜨리기도 합니다. 그것은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는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뚜렷한 징표가 필요했고 그 모든 징표는 예수그리스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육으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신 것처럼 영으로도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믿는 완고하기 짝이 없는 유대인들에게 먼저 가르쳐주심으로써 이방인들에게 이 생명의 능력을 전할 수 있는 증인들이 되도록 만들어주시기 위해 하신 것이기 때문에 한시적으로 있었던 일입니다.
어거스틴 시대를 봐도 기도를 해서 사람을 살렸단 이야기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로 족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하셨으면 족했지 왜 사도들까지 이 일을 하게 하셨는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의문 가질 이유가 없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사람을 살려 내셨지만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렇게 살려 내셨지만 그가 생전에 계셨을 때는 별로 괄목할 만하게 보이지 않았던 제자들이 죽은 자를 살리는 놀라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제자들이 그런 위대한 능력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과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습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당신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전달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위격입니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로 말미암아 보냄 받은 그분이 가장 풍부하게 하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심으로써 그 과연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만큼 사랑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풍부한 성령의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죽은 자를 살려 내는 위대한 일까지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일은 왜 멎었을까요? 이제는 성경에 기록되고 누구든지 이 기록된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깊이 은혜를 받는 사람마다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그 영을 살리는 일이 너무나 빈번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살리는 학습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믿기에 충분한 증거들이 이 성경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일찍 나와서 어거스틴을 묵상하고 성경을 보는데 눈물이 나고 하나님 앞에 감사가 들었습니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것,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진리의 말씀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남들이 알 수 없는 이 진리가 주는 행복은 결국 생명의 기쁨입니다. 멀리 있던 하나님이 가깝게 느껴지고 그 하나님이 나를 감싸주시고 당신의 체온까지 전달해주시는 이것은 결국 살아있는 생명을 느끼는 것입니다. 시체를 끌어안아 본 적이 있습니까? 저는 몇 번 있습니다. 교인들, 가족들의 시체도 안아 보았습니다. 산 사람을 안을 때와는 사뭇 다릅니다. 죽은 사람을 끌어안으면 나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온 마음을 다해 끌어안는데 그는 그 팔을 내 등 뒤로 돌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끌어안으면 두 사람의 몸이 밀착이 되는데 그는 뻣뻣하고 차갑습니다. 결국은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것입니다. 그 생명은 주신 것으로 끝나는 생명이 아니라 우리가 그 생명을 누리면서 살도록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주시고 계시고 앞으로 주실 것인데 이 세 가지 생명은 본질에 있어서는 일치하지만 그러나 각각 조금씩 다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최초로 주신 생명은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게 해 주시는 생명이었고 우리가 그것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명이고 미래에 누릴 생명은 바라봄의 생명입니다. 아우구스투누스는 미래의 생명을 직관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직관이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쓰는 눈치로 안다. 영어로 ‘My wife is very insightful’ 이라고 하면 우리 아내는 눈치구단이라는 뜻입니다. 직관은 결국은 우리의 영혼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직접 뵙는 그런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악인과 선인이 모두 인자의 심판을 받을 때 모두 그분을 뵈옵지만 그러나 모두 똑같은 주님을 뵈옵는 것은 아닙니다. 악인들은 심판하시는 사람의 아들이신 그분을 뵈옵지만 의로운 사람들은 거기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뵈옵는 것입니다. 사람의 형상이신 심판 주 그리스도를 보는 사람은 두려움과 큰 공포 속에서 사로잡히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이신 그분을 뵙는 사람들은 직관의 지복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우리 육체의 생명을 유지하듯이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 의해 지탱되는 생명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VISIO, 직관, 하나님을 직접 뵙는 것, 영적으로 주님을 뵙는 것과 그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그것을 통해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것이 그것이 생명의 본체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그런 종류의 생명은 그 정도로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새롭게 깨닫게 될 때 그때 마음이 확 열리면서 그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를 생각하면서 세상에 붙은 욕심을 버리고 내 마음을 속박해왔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서 그 생명이 죽어있는 나를 살려내는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림자이고 그것은 앞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가 육체를 벗고 육체에 매이지 않고 영혼으로써 영이신 하나님을 직접 직관하게 될 그리고 새롭게 생각하게 될 그것이 주는 충만한 정도의 생명에 일부 맛보기를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진리를 많이 깨달을 때 그렇게 행복해 하고 기쁘면 그것을 한 번 무한하게 확장시켰을 때 그 나라에서는 얼마나 놀라울까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하늘나라에서는 욕구가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저는 그 말에 반대합니다. 물론 하늘나라에서는 더 좋은 것을 먹고 더 좋은 것을 입을 텐데 더 예쁜 여자를 만나고 더 능력 있는 형제를 만나고 그런 욕구는 없겠습니다. 시집가고 장가가며 매일 잔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끊임없이 알고자 하는 욕구는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욕구가 지금처럼 하나님을 더 알기를 간절히 원할 때에는 항상 우리에게 고통과 결핍에 대한 감정을 동반합니다. 공부하다가 누가 뛰어나게 공부하는 사람이 있어서 자기도 동참하고 나면 머리를 쥐어박습니다. 욕구가 생겼는데 항상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도 생깁니다. 그런 감정이 생긴다면 천국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감정은 없는 끊임 없는 욕구가 생깁니다. ‘예수 더 알기 원함은 크고도 넓은 은혜와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저는 그 욕구가 증대한다고 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매일 천국에서의 매일이라는 말은 여기에서의 매일처럼 해 뜨고 해지는 매일이 아니겠지만 매 순간 매 순간 이전까지 내가 알았던 하나님에 대한 것을 능가하는 새로운 인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한정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이 나중에 목회하면 기억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무 한꺼번에 사람들에게 좋은 것을 다 보여주지 마십시오. 밑천이 없어집니다. 너무 큰 감동을 주려고 하지 말고 교인들과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십시오. 한 발 멀리 놓고 알 듯 모를 듯 지내며 조금씩 보여 주십시오. 너무 교인들과 친하게 뭉쳐 지내면 청교도들은 교인들을 변화시키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예술가든지 음악가든지 조수미처럼 누가 너무 잘하면 역시 처음에 한국 사람은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CD 여섯 장을 사니 이제 알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매 순간 보여주는 아름다움이 이제 것까지 합친 아름다움을 능가한다 할지라도 그런 방식으로 보여주셔도 영원히 계속되어오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모두 인식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천국에서 우리들이 누리는 생명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우신 분인지 그 진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진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경험하는 것은 천국에서 충만한 것을 누릴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새끼를 낳으면 그 나는 훈련을 어미가 시키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자식은 엄마를 계속 의지하면 엄마가 데리고 날 수 있을 때까지 확 민다고 합니다. 그럼 이 새끼 독수리는 미친 듯이 날갯짓을 하다보면 부모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먹이를 구한다고 합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 갔더니 천국에 가고 싶으십니까? 우리 교회에서 나는 훈련을 하십시오.
하나님이 천국에서 누릴 수 있는 생명의 기쁨을 교회 속에서 하나님을 뵈옵는 그 진리의 지식 안에서 우리에게 먼저 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 지식과 생명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결코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사랑입니다. 그 생명을 가진 것은 그 생명을 지탱하는 동안 동물, 식물, 미생물이든지 인간이든지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관련을 맺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엘리베이터 같은 곳에 붙어 세 시간 혹은 하루까지도 버텨 살아 있다고 합니다. 결국은 모든 살아 있는 것은 생명이 있는 한 다른 것과 관계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더욱 그렇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생명을 가지게 되고 그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국은 사랑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은 사랑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부부의 세계’를 완청을 했는데 어느 쪽에서 보면 모두가 나쁜 사람이고 어느 쪽에서 보면 모두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목회자로서 그 드라마를 보면서 가슴 아프게 했던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황량함입니다. 아무리 자기가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헌신하고 뜨거운 사랑에 사로잡혀도 하나님 없는 사람의 허망함의 끝을 저는 보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파국에 이르고 나서 재미있는 것은 아무도 행복하게 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자신들은 스스로 이것이 그래도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어디와 비교하느냐 따라 판단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처음에 자신이 꿈꿨던 행복에 도달했느냐 물으면 누구도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하늘의 사랑이 닫혀 있는 상태에서 그렇게 미친 듯이 인간들이 갈등하며 살아가고 나름대로 도덕을 강조하면서 살지만 그러나 붙들고 사람을 정죄했던 사람도 다시 스스로 그 도덕을 짓밟으면서 자신도 누군가에 의해 비난받는 사람이 되는 그 모든 과정을 보면서 도덕이 그 부부의 세계의 해결책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그리스도인으로서 깨닫게 되는 것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사랑 없이 사는 사람의 마지막은 결국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보는 것입니다. 아무도 그 사랑으로 누구를 녹여내는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은 비극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라고 하셨을 때는 새로운 것이 없는데 “내가 생명이요”라고 하셨을 때는 이미 이 안에 사랑이 들어온 것입니다. 인간에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를 끌고 들어오면서 결국은 그 사랑이 진리와 어떻게 결합되어 있으며 그 진리가 어떻게 우리를 사랑으로 살게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철학이 가르쳐주지 못한 실제로 우리 인생을 살아가게 만든 그 원천적인 힘을 우리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러한 생명으로 오셨는데 그 빛이 그 생명을 전달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이 빛이 생명을 전달하였을까를 다음 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