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하기 위해 온 사람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요 1:6-7)
녹취자 : 박혜아
Ⅰ. 본문해설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인류에게 전해주셔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알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고 믿지 않고는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막연한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맨 처음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과 가졌던 관계입니다. 그 관계는 생명의 관계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하는 그 생명을 원 생명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받아서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 생명이 충만하지 않은 데에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버림받는 이유는 이유를 불문하고 부모에게 생명이 충만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낳고 자식을 마음 깊이 전심으로 사랑하면 자식을 버릴 수 없습니다. 그 생명은 곧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과 같은 마음을 품게 된다는 점에서 생명은 곧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생명이라 불리기도 하고 사랑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신학자들이 자신의 신학을 수립할 때(도 이와 같은 사실이 적용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생명에 집중해서 신학을 수립했다면 어거스틴은 사랑에 집중해서 신학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사실 생명과 사랑은 다른 측면에 불과한 것입니다. 즉, 생명이 없이는 인간이 참다운 자기를 지탱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그것은 생명이지만, 자신을 지탱하는 참 생명으로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혹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혹은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친구와 관계를 맺고 심지어 원수들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자연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은 생명의 모든 충만함이 관계 속에서는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120개가 넘는 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나서 28년 전 LA 폭동을 방불할 정도의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헬기가 떠서 그 바람으로 시위대를 해산하고 있다고 하니 이 나라 꼴이 말이 아닙니다. 결국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백인들의 가슴 깊이 맺혀 있는 흑인들에 대한 무시와 모멸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사람이 아무리 큰 죄를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무릎팍으로 절명할 때까지 목을 눌러서 사람을 살인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경찰은 인간성이 산산이 파괴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에게는) 자신을 참 자신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생명이 모자라거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생명이 없을 때 결국 인간은 금수와 다름이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체의 생명과 영혼의 생명의 차이입니다. 육체의 생명이 없으면 아무 일도 못 합니다. 한 7일 정도만 금식하고 자기 육체를 보십시오.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에는 무릎을 꿇을 기운조차 없습니다. 그냥 강대에 엎드려서 묵상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생명이 없으면 아무 기동도 못 하는데, 영혼의 생명은 생명이 없을 때 아주 활발하게 기동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답지 않은 모습으로 기동하고 나답지 않은 모습으로 행동을 해서 수많은 문제들을 활발하게 만들어 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는 죽음의 행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영혼이 죽었을 때 나타나는 바를 성경의 표현에 의하면 ‘육체의 일이고 그것은 현저하니’(라고) 했습니다. 영혼의 생명이 결핍될 때 나타나는 현상은 아주 뚜렷하고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그런 생명이 없이 살아가는 인간 세상의 모습이 이렇게 비참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이 흘러도 평화와 사랑에 대한 가치를 부정한 역사는 없습니다. 그것을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가는가에 대해서는 견해의 차이가 있으나 평화와 사랑의 가치를 부인한 부류와 세대는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런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환영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무슨 문제가 있는지 보십시오. 오늘날 사람들이 사랑을 강조하고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널리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사랑이면 아무 사랑이라도 받아들이면서 용납을 합니다. 그러다보니 무슨 문제가 생깁니까. (그것은) 영적인 참된 생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생명을 흉내 내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저것을 대체하려고 할 때 인간은 또 다른 신념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초점이 하나로 모아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많은 신학자들은 특히 교구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연히 사람의 옷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니다. 즉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어도 언젠가는 말씀이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고, 또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를 이 세상에 보여주셨을 것이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저도 그 사실에 동의합니다. 다만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함으로써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더욱 찬란하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Ⅱ. 하나님을 증거함
A. 하나님의 생명이 충만하심
자, 이 문제를 좀 더 살펴보기 위해서 우리의 초점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에 행하셨던 일과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셨던 인격에 집중해 보십시오. 그럼 우리들은 아주 특이한 사실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예수에게 원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당신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모세는 원수를 미워하라고 했지만 내가 새로운 가르침을 너희에게 주는데, 너희는 너희의 원수도 사랑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군병들이 미래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심판에 마음 아파하시면서 그들을 용서해 주실 것을 하나님 앞에 간구하십니다. 이로써 자신의 가르침이 말만의 가르침이 아니라 진실로 그분이 원수까지도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사람들이) 간음하고 온 여자를 돌로 치려고 했던 것은 율법대로 수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홀로 그 사람들이 든 돌을 내려놓게 만들고 마지막에 하신 말씀이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니 다시는 가서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여자를 향한 어떤 불쾌한 감정이나 인간 이하의 사람으로 취급하시는 모습을 읽어 볼 수 없습니다. 일평생 세리 짓을 하면서 동족의 피를 빨아 먹었던 모기나 흡혈귀 같은 존재인 세리를 향해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내가 그의 집에 유숙하여야 하겠다.”하고 말씀하셨을 정도로 그를 환대하시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 안에 있던 하나님의 충만한 생명이었습니다. 우리가 그 장면을 볼 때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당연히 그렇게 하지.’(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답이 아닙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우리로 하여금 겨우 그러한 결론에 이르게 하기를 원하셨으면 하늘에 계셔서 그 일을 하시지 무엇 때문에 사람의 몸을 입고 여인의 몸에 태어나셔서 모든 인간과 똑같이 고통과 괴로움을 겪으시고, 죄는 없으시지만 온갖 시험을 당하시면서 배고픔과 피곤함과 목마름과 모든 인간의 결핍에 종속되시면서 이 세상에 오셔서 친히 그 모습을 보여주셨을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기는 하지만 사람의 몸을 입으셨을 때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그와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고 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성품이신 신성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저 밑에 감추어 두고 차라리 참 인간인 우리와 똑같이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사신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그분의 탁월한 생애를 보면서 역설적으로 ‘그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못하고 그분은 그렇게 하신 것이 너무 당연하고 그 둘 사이를 건너갈 필요는 우리에게 없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친히 “나를 믿는 자는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얘기는 예수와 경쟁하라는 뜻이 아니라 참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한 생명이 넘칠 때, 아무도 미워하는 사람이 없이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누구도 사랑하는 사람이 없지 않도록 누구든지 모든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게 만든 그 충만한 생명의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해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요점을 말씀드리자면 ’너희도 하나님을 잘 믿어라. 너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 사람을 위하여 너도 나처럼 눈물로 기도하고 그를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B. 지식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심
여기에서 두 번째 발견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하나는 하나님이 결국 인간을 지식을 통하여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식이라는 말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삶과 분리된다든지 사랑과 분리된다든지 그런 의미에서의 지식이 아닙니다. 지난번 공과 시간에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을 인용하면서 굉장히 감명 깊은 구절이 있었습니다. 인용하면서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결국 인간의 지성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그 사랑은 자신을 지성에 합치시키면서 그 지성이 어떤 지식을 낳았을 때 사랑으로 그 지식을 낳은 것이기 때문에 지성은 그 지식을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예뻐하게 되는데, 결국 그것은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성이 지식을 낳자마자 결국 사랑을 낳은 것이고, 그 사랑은 다시 지성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하나의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구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실 때에 그런 의미에서의 지식으로 우리 인간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사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다단 에드워즈가 말끔하게 정리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제대로 가르쳐 주면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받고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가르침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그 사랑까지도 자신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모든 짐승들과 달리 마지막 날에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자유로운 선택이 없었다면 심판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자유로운 선택 속에서 인간은 책임을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하자마자 끊임없이 지식을 보내십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은 당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해주는 지식을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칼빈은 타락했던 아담이 하나님이 주시는 지식의 빛으로 구원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 빛은 후손들에게 전해지면서 믿음의 자손들은 끊임없이 바깥으로 빠져나갑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이탈한 사람들인데, 바깥으로부터도 끊임없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공동체는 개방적인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지식의 빛이 전승되면서 어떤 사람들은 지식을 배반하고 끊임없이 빠져나가서 사망으로 가고, 어떤 사람들은 끊임없이 지식 안으로 들어와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 빛이 면면히 전해져 내려오고 전해진 빛들이 족장 이전 시대의 사람들을 거쳐서 족장 시대에 들어오면서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에게 위탁됩니다. 그리고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열두 지파에게 전해지고 이스라엘이 되어서 전해집니다. 그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도 이스라엘 안에서 혈통과 제도 속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일어났던 것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분명히 언약 받은 열두 지파 사람들인데 끊임없이 하나님의 지식을 배반함으로써 불신앙으로 떠나가고, 이방인들은 그 참된 빛으로 돌아와서 그 지식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인류를 구원하게 됩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와 시인 이사야, 하박국과 같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웅장한 비전은 물이 바다를 가득 채워서 덮는 것처럼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아는 지식이 온 세계를 다 덮어 편만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은 여호와의 생명을 누리고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었으며, 사람이 타락하지 아니 하였더라면 이루게 되었을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을 향하여 자신의 살과 뼈처럼 여기는 세상이 되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일들은 간단하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는 배신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참된 지식을 굳어진 지식으로 대체하고자 했습니다. 결국은 모든 사람들의 꿈이 모여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마저 하나님이 훼파시키시고 이제는 그 육적인 영광스러운 성전이 아닌 또 다른 하나님의 집이 있음을 보여주셨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절정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 지식의 빛으로 사람들을 구원하는데 구약의 빛이 호롱불이라면 이제는 찬란한 태양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사람들을 빛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C. 사람을 통하여 진리를 전하게 하심
세 번째로 특이한 점은 하나님이 이 빛을 나누어주심에 있어 천사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이 직접 행하지도 않으시고, 심지어 예수를 세상에 영원히 두지도 않고 사람을 통해서 이 일을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당신의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알리시는 중요한 비결이 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을 통해서 진리를 전하는 것이 과연 효율적인 방법인가 생각해 봅시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사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전에 복음을 들었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결정적으로 그렇게 들려온 소문들은 그를 무릎 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그야말로 (그는) 고꾸라졌고 인생은 하나의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다시 돌아가지 않을 완전히 새로운 길을 걸어가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모든 사람이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만난다면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일반적인 방법으로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넓게 보면 사실은 사도 바울도 이미 오히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믿지 않고 반역하는 심정을 가지고 대제사장의 공문을 청해서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러 달려갔지만 이미 (예수에 관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예수가 이미 부활했다.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지식들이 예수를 만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점에서 사실은 사도 바울의 경험도 사람을 통해서 그 진리의 빛을 전달한다는 것에 예외라고만 볼 수 없습니다. 특이한 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열 사람이라면 회심의 양상이 모두 다릅니다. 모두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대체로 일치됩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만하게 자신이 최고인지 알고 살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복음을 들으면서 자신에게 도저히 의지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끼면서 자기와 결별하고, 복음 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자신의 전체를 던져 하나님께 매달리게 됩니다. 그때에 그리스도에 대한 간절한 갈망, 자신의 인생 전체를 그리스도의 복음에 얹어 버리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면서 구원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니 이제는 모든 사는 날의 행복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패턴은 똑같습니다. 회심의 구체적인 양상은 다 달라도 그 기본적인 골격은 모두 똑같고 그 절차를 거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자, 그런데 그렇게 효율적으로 보이지도 않는데 하나님은 왜 천사를 통하시지도 않고, 당신이 직접 행하지도 않으시고, 예수를 영원히 이 세상에 살게 하셔서 복음을 전파하지도 않으시고, 예수를 본 적도 없고 하나님을 육체적으로 만난 적도 없고 또 그런데다 복음을 전하는 모든 사람이 그 복음을 영원히 붙들고 하나님만 사랑하며 사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연약한 사람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감각을 초월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게 하시기 위함
첫째, 하나님의 복음을 감각을 초월하지 않고 전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감각을 가지고 믿을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사상하고, 정신의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신을 상정해야 가능합니다. 그런 작업이 눈에 보이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에레네우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감각에 호소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믿으면서 다 보지만 믿기 전에는 그분의 신성을 못 봐도 그분의 키와 얼굴 모습은 눈에 보입니다. 보이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접촉점으로 예수가 누구인가를 생각하고 그분이 베푸시는 사랑과 그분이 보이시는 감각적인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처음 제가 예수 믿었을 때 이해가 안 된 것은 ‘하나님은 왜 그렇게 오해받을 일을 하셨을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신비한 빛이나 모든 사람이 신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모습으로 오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두고도 수없이 시비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사생아라는 것입니다. 누가 아버지인지 모르는 마리아의 외도를 통해 태어난 사생아라는 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그렇게 모욕 받을 정도로 위험한 일을 하셨을까(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철이 들고 신학을 공부하고 나서야 그 깊고 오묘한 뜻을 알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바로 그런 점에서 천사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천사를 봤다고 하더라도 동질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어떤 사람에게 부어주셔서 사무치게 만듭니다. 뼈 마디마디까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게 만들어서 하나님을 눈으로 신비한 빛을 본 것보다 확실하게 인격적인 경험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생명의 주님이시라는 것을 뼛속 깊이 체험하게 합니다. 그 사랑은 그것을 증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연애에서 어떤 형제를 만나 깊은 사랑에 빠졌다고 가정을 해 보십시오. 친구를 만나면 그 얘기를 안 하겠습니까. 입이 근질거려서 어떻게 말을 안 하겠습니까. 친구가 온갖 이야기를 떠들어서 이 사람의 마음속에 가득한 것은 오늘 받은 사랑의 고백입니다. 이야기를 못 할 바에야 차라리 집에 혼자 조용히 가서 그 고백의 순간을 생각하는 것이 훨씬 쉬운 것입니다. 마음에도 없는 쓸데없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것을 참아주어야 하는 시간 자체가 자신에게는 너무나 마음의 작용과 실제 일어나는 현실 사이에 괴리가 큰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이 전파되는 원리입니다. 전파될 때에는 이 사람이 충만한 사랑으로 전파하는데 그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가 하셨던 것과 꼭 닮은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 현실에서는 안 그렇지 않습니까. 입으로는 복음을 전하면서 뒤로는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결국 사람이 복음을 전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복음이 전해졌다면 그런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들이 주님의 뜻을 발견하게 됩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당신이 넘치도록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으로서 사람들을 사랑하신 것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신으로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과는 일체 차이가 없습니다. 동일하게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속에서 복음이 전해졌던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들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방식이 그런 식으로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그렇게 원하셨고 지금도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온몸 가득히 주님의 사랑이 가득 차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안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뜻은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으로 영혼을 사랑하게 되는 사랑은 하나이니, 그 사랑 안에서 이 지식이 전해져서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 사랑과 지식이 일체된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와서 복음을 전달받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당신은 하나님을 안 믿고 살아올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이 사람은 눈물을 흘립니다. 이때에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 지식이 사랑을 동반하지 않는 차가운 지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인격 속에서 흘러나오는 증언인데, 바로 그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질 것이라는 본보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고, 그러한 감각적인 이유 때문에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이 인간을 통해서 전해지게 되므로 그렇게 부르신 것입니다.
2. 복음을 전함으로써 그 복음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심
두 번째로 하나님이 천사나 당신 자신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가장 커다란 이유는 첫 번째는 감각적인 이유 때문이고, 두 번째는 복음을 전함으로써 늘 복음을 잊기 쉬운 인간 자신이 그 복음을 끊임없이 의식의 표면으로 기억 속에서 소환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여러분, 혹시 그럴 때가 있지 않습니까. 내가 구역장이고 교역자입니다. 그런데 아주 극도로 마음이 상한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들고 마음의 상태가 매우 안 좋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 와서 자기가 고민하는 똑같은 문제를 가지고 와서 상담해 달라고 합니다. 그때에 양심 같아서는 ‘누가 누구를 상담하겠는가, 내 상태가 이런데 오지 마라.’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안 됩니다. 앉혀놓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을 똑같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타일러 줍니다. 수시로 양심 속에서 소리가 들립니다. ‘너나 잘해라, 너는?’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렇게 이야기를 계속하면서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니 절대로 낙심하지 마라.’라고 말해줍니다. 사실은 자기가 낙심하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렇게 가르쳐주면서 상담을 끝내고 나면 내 마음의 틀이 변한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비록 자기 입으로 나온 말이지만 진리가 자기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그런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천사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지 않고 우리 인간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면서 자신을 끊임없는 복음의 감동으로 그 사람들을 불러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칼빈이 말한 바와 같이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은 찬송 받으실 것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기를 불태웠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있었던 공통된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며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길 수 있다는 신념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제쳐 놓고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긴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그 나라를 먼저 경험한 사람들이 어떻게 헌신된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가 앞당겨질 수 있다는 신념이었습니다. 그것을 굳게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헌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미래관이 18세기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대각성 이후에 존 웨이의 부흥, 그리고 그 이전의 데이비드 브래이너드의 일기를 통해서 영향을 받은 수많은 선교사들의 마음속에 공통적으로 불타고 있었던 확신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장 미련해 보이는데도 그런 사람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Ⅲ. 적용과 발전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생명이시요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떨어질 수 없는 빛과 생명, 생명과 사랑을 모든 인류 속에 충만하게 나누어 주심으로써 진리가 있는 그곳에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그곳에 정의 곧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고, 지식의 빛과 사랑의 불, 하나님의 거룩한 정의와 자비가 하나가 된 세상,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복음을 전해주셨습니다. 우리는 먼저 그것을 받았기 때문에 미래에 이루어질 사회의 본보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생명이 얼마나 값지고 위대한 것인가(를 깨닫고) 그것이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빛으로 왔다는 것을 굳게 붙들면서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빛과 사랑과 생명을 전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