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빛으로 오심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3-4)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해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생각하며 쓴 복음서이지만, 요한복음은 당시 헬레니즘의 문화 아래 로마제국에 살던 모든 사람에게 읽히기 위해서 쓴 복음서입니다. 저술하는 의도가 약간 다르기는 하였지만, 궁극적으로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이나 한 가지 사실을 증거 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분이 하나님 자신이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대상이 달랐으니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이 훌륭한 조상이라 생각하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이야기로 시작하고, 요한복음은 세계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썼으니 당연히 이 세계의 기원과 예수 그리스도가 무슨 관계에 있는지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말하면서 그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 이미 계셨던 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Ⅱ. 생명의 빛으로 오심
그러면서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생명의 빛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A. 만물의 근원이심
제일 먼저 생명과 빛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그분이 만물의 근원이심을 말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 모든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뿐 아니라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닌, 태어난 모든 세계는 천상이든지 천하든지 모두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고, 따라서 지은 바 된 것은 단 하나도 그분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된 것이 없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얼핏 보면 만물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만물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후 소개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분인지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 실제로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저절로 태어난 것이 없고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하였으니, 그분은 누구로도 말미암지 않으신 분이요, 모든 만물은 그분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것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그분은 그분 아니면 된 것이 없는 모든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존재임을 말합니다.
그러면 모든 있는 것 중 아무것도 그분과 같은 것이 없다는 뜻이고, 그렇게 된다면 그분은 신,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 됩니다. 모든 것들은 원인이 있어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졌지만, 하나님이신 그분, 성자는 누구로부터 말미암은 분이 아니니 그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이야기를 이렇게 완곡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정신에 ‘쿵’하는 울림을 줍니다.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그분이 지은 바 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세계는 그분을 통하여 만들어진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모든 세계를 아무리 겹겹이 쌓아놓는다고 할지라도 만든 그분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제가 특별한 예술의 재능이 있어서, 아니면 특별히 과학 기술에 재능이 있어서 수많은 미술 작품과 수많은 악보와 그리고 수많은 로봇과 수많은 기계를 남겼다고 칩시다. 그것을 산처럼 쌓아놓은들 나와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들이 내가 하는 일을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들은 다만 그것을 창작한 내가 누구인지 간접적으로 보여줄 뿐이지, 아무리 많이 쌓아 올려서 그 덩치와 부피가 나보다 수천 배나 더 많이 쌓아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내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대신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와 내가 만든 것들 사이에는 무한한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로 살아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시작은 신앙에 관한 관심의 시작은 우리의 인생에서 시작하지만, 그러나 신앙의 시작은 우리에게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 모든 세계를 만드신 하나님이 이 모든 세계를 초월해 계신다는 사실에 눈을 뜸으로써 거기에서부터 신앙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땅에서 신앙에 관한 관심이 시작하지만, 신앙은 하늘로부터 이 땅에 내려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같이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이라도 의도 없이 하는 일은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일을 하지 않을 때도 우리는 의도가 있어서 그 일을 안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 하지 않는 일 모든 일에는 우리의 의도가 있기 마련입니다.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더군다나 도덕적 결정과 관련될 때에는 반드시 거기에는 우리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보다 훨씬 뛰어나신 이 모든 세계를 만들만한 지혜와 이 모든 세계를 만들 만한 능력과 그 모든 세계 중 특별히 인간과 사랑을 나누실 정도로 특별하신 분이라면, 뜻 없이 이 세계를 만드셨을 리 없고, 뜻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인류를 창조하셨을 리 없고, 아무 생각 없이 나라는 인간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결국 우리는 인생의 목적이 이 모든 세계를 있게 하시고, 근원이신 하나님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이신 그 하나님이 아무 의도 없이 세계를 만드셨을 리 없고, 또 나를 창조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먼저 복음서를 시작하면서 못을 박습니다. 그러니까, “세계를 봐라.” 이 모든 세계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아무도 설명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 이성의 추론을 초월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아주 분명히 말하기를 “모든 만물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지은 바 되었다.” 논쟁하는 것도 아니고, 아주 간단하게 못 박고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요한복음 1장은 창세기 1장과 유사합니다. ‘신약의 창세기 1장’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요한복음 1장에서는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처럼 짝을 이룹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의미를 성경은 제일 먼저 밝혀 두는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그분에 의해 창조된 유한한 피조물이고, 그분은 무한하신 창조자이기 때문에 그분과 나 사이에는 서로 겨룰 수 없는 무한한 격차가 있고, 그분이 이 세계와 나를 창조하신 의도가 ‘법’이라고 하는 것을 깊이 인정하고, 거기에 충심으로 엎드리는 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문제는 세계를 보면서는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러한 생각을 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렇게 중심으로 무릎을 꿇어 창조의 목적대로 살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굳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세계는 결국 창조된 그 의미를 그분의 말씀을 통해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론」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당연히 그 모든 것들은 당신의 증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증언을 듣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적인 사건을 보면서 벌벌 떨고 두려워하는 일들이 먼저 있어야 했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보면 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이고, 이렇게 시간 속에서 창조되어 시간과 함께 있다가 시간 속에서 소멸하여 사라지는 그 모든 피조물 중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근원이시고, 나는 그 근원으로부터 온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B. 생명의 근원이심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다음 두 번째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분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이 세상의 창조의 목적이 있는 것이고, 그러면 내 인생의 목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그 두 가지와 함께 가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의 의도, 그래서 세계가 창조되었고, 있는 모든 세계 만물들이 창조주의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하나님의 창조 의도, 세계가 창조된 목적, 그 안에 내가 이 사람도 아니고 저 사람도 아니고 또 나보다 앞서 태어났던 누구도 아니고, 나 뒤에 태어날 누구도 아닌 유일한 나로 창조하신 것은 거기에도 목적이 있다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세 가지는 다 한 가지로 연결된 목적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의도가 있고, 세계가 실제로 창조되고 나니까 또 다른 목적이 생기고, 내가 생겨나니까 나와 창조된 세계의 목적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있고, 그 의도대로 세계가 창조되었고 인간이 타락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그 의도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창조 세계는 그 의도를 계승하고, 나는 바로 그러한 구도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생명은 신학자들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였습니다. 어떻게 했는가 하면 창조되지 않은 생명과 창조된 생명, 누구에게 귀속되었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생명은 창조되지 않은 생명이고, 원래 그분 안에 영원히 있는 생명이고, 나머지 모든 생명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생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은 기한이 없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생명은 기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 인간의 영혼의 생명에 관한 한 하나님이 그 생명을 주시기로 한 사람들은 그 생명을 영구히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창조된 생명은 창조되지 않은 생명만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된 생명은 창조되지 않은 생명에 기대어 겨우 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거대한 생명 속에 있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창조된 생명을 다시 둘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하나는 자연적인 생명이고, 또 하나는 도덕적인 생명 혹은 영적인 생명입니다. 자연적인 생명은 식물과 동물, 인간과 곤충, 이 같은 모든 것들입니다. 파리 하나가 날아다니는 것은 살아있으니까 날아다니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으니까. 생명이 있어서 꽃이 피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동안에는 멈춰 있지 않습니다. 성장하든지, 꽃을 피우든지, 향기를 발하든지, 뿌리를 내리든지, 혹은 열매를 맺든지, 그것이 결국 일정한 시점이 지나고 나면 그 생명은 소멸합니다. 그래서 생명체는 모두 유한합니다. 수백 년을 사는 거북이가 인간에 비하면 대단한 생명을 누리는 것 같지만 어차피 영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모두 한 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것들이 자연적인 생명입니다. 이 자연적인 생명도 하나님의 생명을 힘입어서 그래서 이것들이 살아있고 꽃을 피우고 변화되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연적인 생명도 우리가 소중히 생각하며 다뤄야 합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몸에 해로운 바이러스를 비롯한 세균이나 해로운 동물들의 생명체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물을 것입니다. 물론 제거해야 할 것입니다. 제거 안 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호주 같은 경우는 절대 살충제를 못 뿌리게 합니다. 그것도 필요해서 있는 것이라 보고 모기장을 치면서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뉴질랜드는 모기도, 파리도 없습니다. 그 나라가 호주와 비교해서 뭐가 부족한 나라인가 했을 때, 우리가 선뜻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이 창조한 아름다운 세계에 죄가 들어오고, 자연의 질서가 파괴되고 흐트러지면서 나타나는 소위 자연학의 증상이지, 생명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그것들이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생명은 자연적인 생명도 결국 하나님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어렸을 때는 교회에 와서 말씀을 듣고 찬양하고 눈물을 흘려야지만 겨우 하나님이 느껴지지만, 신앙이 깊어지고 지식이 풍만해져서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 살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보면서 그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하는 하나님이 이렇게 이 모든 생명의 근원이시고 이것들을 지금도 돌보고 계심으로써 이것들이 훌륭하게 하나님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고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연의 세계 전체가 하나님의 그림책과 같이,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보여주는 그러한 아름다운 그림책이 되는 것입니다. 지식의 즐거움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그러한 것을 보면서 아무것도 범상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보면서 하나님이 정말 아름다우신 분이고, 섬세하신 분이고, 위대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그 자연의 세계를 보면서, 또한 그 생명을 보면서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그 생명의 충만함을 보면서 그분의 능력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영적 생명입니다. 혹은 도덕적인 생명이라고도 말하는데, 영적 생명입니다. 이 영적 생명은 결국 인간의 영혼에 주시는 생명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생명은 영혼을 가진 존재인 인간만 누릴 수 있는 독특한 생명입니다. 그래서 결국 인간 영혼의 생명이 이러한 자연적인 생명과 비교할 수 없이 아주 차원이 높고 특별한 생명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창조된 생명입니다. 그래서 생명이신 하나님께 붙잡혀 있을 때만 그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결국, 인간의 영혼은 이 모든 삼라만상의 피조물 중 하나님을 가장 닮은 피조물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그 연합 속에서 신비한 생명을 공급받음으로써 그 영혼이 살아있는 영혼이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생기를 힘입어서 살아있는 생명이 되는 것인데, 인간이 하나님과 떨어짐으로써 영혼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고, 이것이 바로 영적인 죽음입니다. 결국, 영적인 생명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연합에 있는데, 그 하나님과의 사랑과 생명의 연합이 끊어졌을 때 영혼은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영혼과 육체의 결합이 끊어졌을 때 육체는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린 영혼의 죽음은 인간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선택한 것이고, 육체와 영혼이 헤어지는 것은 인간이 의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살하는 경우는 특별하지만, 의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냥 자기가 의도하지 않아도 그 형벌로서 그렇게 육체와 영혼은 언젠가 분리되게끔 되어 버린 것입니다. 결국,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멀리 떠나 분리된 것도 영혼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육체와 영혼이 갈라서는 것은 육체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려야 할 생명 대신 죽음에 복속되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예화) 최근에 9살밖에 안 된 아이를 여행 가방에 집어넣어 죽여 버렸습니다. 그래서 살인 혐의를 적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수사를 하고 있는데, 아무리 부부가 헤어져 친아빠가 아니라 하더라도 어떻게, 애가 속을 썩였을 수도 있겠습니다. 어떻게 그 아이를 데려다가 펄펄 끓는 프라이팬에 손을 올려놓고 지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가방 속에서 살아나기 위해서 사력을 다해 몸 부린 친 흔적들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인간으로서 끔찍한 일들을 저지를 수 있습니까.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사람은 그 사람들에게는 우리에게 없는 뭐가 있어서 그러한 흉악한 짓을 저질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적으로 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뭐냐 하면, 우리에게 없는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는 가지고 있는 것이 그들에게 없어서 그러한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생명. 인간을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영적인 생명, 그 영적인 생명은 고유하게 말하자면 거듭난 신자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런데 그 생명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많은 사람을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존엄성을 부여하셔서 그래서 인간이 그래도 영적으로는 죽어 있으나 여전히 선악을 어느 정도로 구분하고 인간의 도리를 따라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약육강식의 세계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배가 고파도 지나가는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극단적일 경우는 그럴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배고프고 굶어 죽어도 사람이 사람을 음식으로 삼을 수 없다는 이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점에서 넓은 의미에서는 그러한 생명의 기운들을 하나님을 향한 고유한 영적인 생명은 아니지만, 그러한 유사한 생명을 인간에게 주셨기 때문에 인간의 사회가 어떠한 종교를 갖고, 어떠한 신념을 가지고 있든지 짐승의 사회와는 다른 세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명조차도 고갈되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얼마든지 그러한 가능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사람 모습을 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더 어려운 문제는 그다음에 그렇게 사람의 모습을 하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떻게 사람답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문제에 있어서 깊은 한계를 느끼고 도저히 나 자신으로서는 이 문제의 강을 건널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말씀드리지만, 안 믿어도 될 사람들은 아직도 안 믿고 있습니다. 진짜 예수 믿는 사람이 되었다면 그는 안 믿을 수 없어서 그래서 믿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생명의 결핍입니다. 예배를 시작한 지 48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그사이에 한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자살하였습니다. 정확하게 34분마다 한 명씩 자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저녁 떼거리가 없어서 죽습니까? 아닙니다. 죽을병에 걸려 절망해서 죽습니까? 대부분은 그러한 경우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결국, 생명이 없어서 죽는 것입니다. 영혼의 생명.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영혼의 힘이 없어서 죽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사랑 타령을 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누구도 사랑받기 싫어하는 사람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받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이 사랑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역설은 결국 무엇이겠습니까.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은 이기심으로도 가능한 일이지만, 왜? 그것은 자기가 원하는 종류의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러한 욕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하나님의 생명 없이는 못 하는 일입니다.
결국, 근본적으로는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하나님 안에서의 생명이 충만함으로써 하나님이 그 생명으로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된 인간을 하나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이 충만하게 되면 나타나는 가장 뚜렷한 현상은 미워하던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리고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고자 하는 욕구가 이 안에서 불일 듯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다음에 또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조금 다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에는 이유가 없고 사람 사랑에는 하나님이 이유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생명의 능력입니다. 인간의 영혼에 주신 생명은 중단되거나 사라질 수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 생명은 여전히 생명입니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는 그 생명을 충만하고 풍성하게 누리는 때가 있고, 아주 조금 누리거나 거의 못 누리는 때가 있습니다.
처음 목회를 할 때, 많이 속았습니다. 그래도 사람을 평균적으로 본다면,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무지한 사람 속에는 속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목회자 앞에 나타난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면, 와서 한 시간 들어보고 설교도 별 볼 일 없고 아무것도 없으면 슬그머니 왔다는 소식도 안 알리고 사라집니다. 눈에 띄고 하는 이유는 은혜를 받고 뭔가 충만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기쁨의 삶을 살고 있고 죄악의 구덩이에서 자신이 헤어 나왔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기쁨 속에서 산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나중에 충만한 생명의 은혜가 사라지고 나면 그 은혜가 없었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대로 보여줍니다. 크게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대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이 생명을 주실 때 그 사람이구나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주는 것입니다. 아주 훌륭한 사람을 보더라도 그 사람 앞에 머리가 숙여지지 않습니다. 저 사람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은혜의 힘, 그 생명 때문에 저 사람이 살아있구나, 생명을 누리는 그 사람이 아니라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 생명이 없어서 거의 짐승같이 사는 사람을 보면서도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저 사람에게도 생명을 부어주시면 놀라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그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관심은 이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서부터 시작된 그 지루하고 긴 철학의 역사는 진리가 무엇인지 찾기 위한 역사였고, 쉬지 않고 생성된 수많은 종교는 길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면, 아무것도 생명을 가져다주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 당신의 충만한 생명을 주셔서 살아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려고 육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충만한 생명의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와서 떡을 돌리듯이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셨습니까? 만약에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별로 감동 받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하나님의 생명을 인간에게 주신 방법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분이 그 생명을 가지고 오셔서 빛나는 삶 위에 찬란한 모습으로 계시면서 “생명이 없는 이 불쌍한 것들아, 다 와라. 내가 하나씩 주마.” 이렇게 생명을 주셨더라면 우리는 그렇게 감동 받을 일이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찬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주셨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냥 오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죽을 사람의 몸을 입고 인간의 본성을 가진 하나님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내려오실 때도 신의 본성을 앞세우시지 않고, 신의 본성을 가지셨으나 신의 본성을 인간의 본성 아래에 깊이 감추시고 낮은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상품을 입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가지고 계신 죄 없는 완전한 인간성, 인성 속으로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성과 연합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옴으로써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오셔서 인간의 본성을 가진 우리와 연합되셔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우리도 그분과 함께 죽는 것이 될 수 있도록, 그렇게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생명을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빈부나 귀천이나 차별이 없이 이 생명을 나눠주어서 그 충만한 생명 속에서 하나님이 살게 하신 것입니다. 비로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그분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우리와 같은 인간성을 유사하게 가지심으로 당신과는 전혀 비슷하지 않게 지은 그 죄를 멸하셔서 그래서 우리를 다시 하나님의 생명에 접붙여서 살아갈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있지만, 이 충만한 생명을 누리면서 사는 것으로부터는 거리가 멉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하면, 여전히 그 충만한 생명을 못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결국, 충만한 사랑을 못 누리는 것입니다. 여전히 자신에게 죽음을 가져다준 것들을 사랑하고, 마음을 바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주신 그 생명의 연합 안에서 믿음과 순종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끊임없는 무기력이 나오면서 하나님을 믿는 자녀도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낙심하고 좌절하고 그렇게 무력하게 사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생명을 주기 위해서 오셨으니, 예수 믿는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그분이 십자가에 죽기까지 희생하심으로 우리에게 주셨던, 이미 주신, 지금도 더 충만하게 주시고 계시는 이 생명을 누리며 사는 것이 신자의 삶이어야 합니다. 이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사람들의 빛이심
마지막 세 번째가 사람들의 빛으로 오신 것입니다. 반짝이는 모든 것들은 그 자체가 빛을 내거나 어딘가로부터 빛을 받아 빛을 냅니다. 그러면 인간이 만든 전기나 인간이 피운 불이 스스로 불을 내는 물질인가, 사물인가에 대해서는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각각 다릅니다. 왜냐하면, 전기도 아무 때나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이 갖추어져야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결국 전기로 인해 불이 들어오는 것도 저절로 불이 들어오는 것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자연의 세계를 돌아가서 보면 하늘의 빛나는 태양 하나가 있고 그것 때문에 결국 빛을 받아 빛나는 것들이 반짝이는 수많은 사물입니다. 너무나 많은 인간은 그 모든 것을 반짝이게 만드는 원래의 빛과 스스로 빛이 아니면서 반짝이기 때문에 빛인 척하는 그 사이를 구별하지 못합니다.
결국, 이 생명은 빛과 떼어놓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어서 생명의 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사람들이 만든 빛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생명은 사람들 속에 들어갈 때 빛과 나누어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생명은 진리를 얼마나 충만하게 내가 누리느냐에 따라 그것이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 빛이 거의 없으면 거의 완전한 어두움이 되는 것이고, 그 빛이 조금 있으면 덜한 어두움이 되는 것이고, 그 빛이 충만하게 있으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지성적인 종교입니다. 지성을 앞세운다는 점에서 지성적인 종교가 아니라, 진리를 깨닫는 일이 참된 생명과 사랑에 이르는 길이라 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깨닫는 것은 결국 무엇이겠습니까? 진리를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와 아무 상관 없고 관심 없는 사람들은 그냥 비유하자면, 그냥 그 진리와 아무 상관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를 조금이라도 그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 할지라도 그냥 남의 가르침을 받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진리를 아는 것은 생명이 이 피부를 타고 흐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진리를 자신이 깊이 생각하면서 내 마음의 정동이 일어납니다. 살 속으로까지 들어온 생명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그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진리에 자신을 복종하고 진리를 따라 살려고 자신을 다 드리는 삶을 살아갈 때 그 진리는 뼛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피부나 살갗에서 생명의 기운이 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골수 속에서 우러나와서 그래서 그것이 불이 되기도 하고, 생명이 되기도 하고, 사랑이 되기도 해서, 하나님께로 받은 생명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파함으로써 죽은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하고, 어둠 속에 있는 그 사람에게 빛을 주는 도구가 되게도 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충만한 생명을 한껏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전심으로 참된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진리의 기운이 나의 피부에 흐르는 것이 아니라 살 속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뼛속 골수에까지 꿰뚫고 들어가 나라는 인간을 움직이는 삶의 이유와 동기와 목적이 되어 우러나올 때 그의 삶은 그 진리에 영향을 받는 아름다운 선율을 그리면서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Ⅲ. 적용과 결론
말씀을 맺겠습니다. 결국, 오늘 이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모든 만물을 있게 한 근원이셨구나. 우리도 그분을 근원으로 삼아 사람으로 여기에 태어났구나. 그런데 나는 내 힘으로 사람답게 살 수 없으니 육체의 생명은 이미 받은 것이지만, 영혼의 생명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이구나. 결국, 그 생명 없이 내가 살 수 없겠구나. 그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졌구나. 이 생명을 내가 충만히 누리며 살아야 하겠구나. 어떻게? 내가 진리와 상관없이 이 생명을 누릴 수 없으니, 내가 진리의 말씀을 깨닫되 그것이 나의 피부에 흐르는 진리, 살갗에 스며든 진리가 아니라 나의 뼛속과 골수까지 사무친 진리가 되어서 그것이 결국 나의 뼛속과 골수까지 사무친 진리가 되어서 그것이 결국 나의 삶을 움직이는 동기가 되어야 하겠구나. 나는 이 진리에 대해서 얼마나 무지한가. 그러므로 결국 그 진리가 없어 생명이 없고, 생명이 없어 내가 사랑이 없고, 결국 나의 현실을 지탱해 나갈 수 없는 무력한 인간이 되어 가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이러한 지리멸렬한 우리의 인생의 고리를 끊어내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보다 훨씬 더 학문이 짧고 여러분보다 훨씬 더 불리한 위치에 있는 많은 사람도 그것을 끊어내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왜입니까?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충만한 생명과 진리의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 놀라운 일들을 행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