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모든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게 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빌 1:9~11)
녹취자 : 박나리
I. 본문해설
모든 목회자가 목회를 합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서도 목회가 무엇인지를 모를 때가 많습니다. 정말 목회를 하면 할수록 이건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26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한 번도 한 순간도 나는 이 목회를 위해 태어났다거나 목회야말로 나한테 딱 맞는 일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한 가지를 26년쯤 하면 지금쯤은 그런 생각이 들만도 한데, 단 하루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고 언제나 목회는 제가 원하지 않는 가슴앓이이고, 설교는 영원한 이국의 언어입니다. 은행 빚을 빌려서 교회를 짓는 것부터 시작해서, 말 안 듣는 교인들을 돌보는 일부터 시작해서, 건물을 짓고 직원들을 채용하고 계획을 세우는 모든 일까지, 심지어 선교와 구제 사역에 이르기까지 목회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분명하게 목회가 무엇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쓸 때 사도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인생의 황혼에 들려오는 순교의 종소리를 듣고 있는 때였습니다. 그는 감옥 속에서도 떠나온 빌립보 교인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고, 이 기도가 우리에게 목회가 무엇인지를 아주 아름답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II. 하나님을 사랑하게 함
아주 쉽게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목회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일입니다.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은 자신의 글 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고, 그 자신의 일평생 가장 커다란 숙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 때문에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많은 것을 사랑하지만 마지막의 그 사랑의 원인은 궁극적으로 하나님 한 분에게 매달려 있는 것, 그렇게 하도록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고 돌보는 일이 목회입니다.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일은 다른 것을 사랑하던 이를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고, 목회는 그렇게 하나님께 돌아온 사람을 끊임없이 돌보아 하나님만을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자격은 하나님을 현재적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에 담임 목사로 생각하던 베드로를 부르셔서 물으셨던 질문은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네가 어느 신학교를 나왔는지, 유학을 했는지, 경영능력이 있는지, 누구의 추천을 받았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단 한마디 말씀을 세 번 반복해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하신 이유는 바로 베드로를 통해 이루실 예루살렘 교회가 목회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게 하는 것이 예수의 비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랑이 너희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풍성해지는데, 원어로 보면 물 같은 것을 그릇에 담아 가득 넘쳐 바깥으로 흐르는 광경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목회의 많은 어려움을 이야기하지만 보람도 있습니다. 어떤 보람입니까? 모든 교인이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것, 그래서 역경 속에서 그 시련을 이겨내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방탕의 기회로 삼지 않고 소명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가득하게 되는 것이 목회의 보람입니다. 목회의 시작이 바로 그렇게 목회를 생각하며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사랑에 감화를 받아 시작한 것이 목회였기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있는 사람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어 목회를 하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 예수의 사랑에 붙잡혀서, 하나님이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그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서, 이제 하나님 없이는 내 인생이 의미가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나처럼 예수를 믿고 하나님 사랑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것이 목회의 소명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간직하며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느 선배 목사님이 제가 어렸을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 교회에서 3년만 목회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3년만 하고 나면 다 들은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새 교회에 가면 새 이야기가 되지 않겠느냐고 말입니다. 사랑이 한 번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가슴에서 그 사랑이 계속 솟아나게 하는 것이 목회에 있어서 가장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목사 자신이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길이 오늘 성경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III. 지식과 총명으로
그것은 바로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라고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식과 모든 총명을 가지고 너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해지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지식이 무엇일까요? 희랍어 성경에서 지식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에피그노시스'인데 이것은 '모두, 전체에 관하여'라는 전치사 '에피'와 '그노시스' 지식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그노시스'라고 하는 단어에 히브리 동치어가 '다하트'입니다. 이것이 구약 성경에서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얼마나 중요한 지 호세아 선지자가 4장에서 말하기를 너희가 지식을 버렸음으로 나도 너희를 버려 제사장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리라고 하실 정도로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지식은 모든 사물들에 대한 지식인 동시에 모든 사물들을 있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론적으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 이전에 논리적으로 이미 하나님의 지성 안에는 모든 사물들에 대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그 지식은 서로가 모두 연결되어 있는 지식입니다. 그 지식의 연결 속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를 보여주셨고, 그 지혜안에서 모든 삼라만상, 천지만물이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올바로 알기만 하면 자기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죄가 들어온 후에 눈이 어두워지고 만물도 원래의 아름다운 광채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이성만으로는 그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목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이 모든 사물에 대한 지식을 궁극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것도 궁극적으로는 그 사물 자체가 아니라 사물을 내신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끊임없이 공부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끊임없이 지식을 탐구하고 그 지식이 하나님의 말씀과 묶이고, 그 말씀이 하나님 사랑에 묶여서 체화되는 가운데에 끊임없이 교인들에게 설교할 재료가 나오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책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삶의 방식은 가르침의 풍부함을 결정한다”라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가르침을 풍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진리의 지식을 따라 살아가는 삶은 끊임없는 지식과 경험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풍부한 가르침을 갖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지식이 결국은 우리의 목회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설교를 할 때에 몰랐던 새로운 성경에 관한 사실을 깨닫고, 인생의 이치를 깨닫는 이치가 있으며 그것이 결국 하나님에 대해 가르쳐줄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솟아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총명입니다. 희랍어 성경에 '아이스데시스'라고 나오는 이 총명은 결국 의미가 오성입니다. 인간의 이성을 능가하는 초자연적인 것을 볼 수 있는 지혜를 가리키는데 결국 이것은 판단하게 하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았어도 인생을 사는 이치를 깨우치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아갑니다. 이 지식과 총명을 통해 점점 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풍성해져 갑니다. 잊어버리시지 않도록 그림을 그려 드려보자면,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고, 이 타오르는 불길이 계속 타오르는 날에 두 개의 커다란 장작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지식이라는 장작이고, 또 하나는 총명이라는 장작입니다. 이 두 가지 장작이 있을 때 불길은 계속 타오르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총명한 판단을 잃어버리게 될 때 인생의 방향을 잘못 설정하게 됩니다. 그리고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 모두 판단력의 부족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실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구원이고 구원 다음의 선물이 지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지혜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지식과 총명이 교회 안에서 계속 목회자를 통해 공급될 때 그 위에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그것이 성도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하나의 불길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런 지식과 총명 안에서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시는데, 이렇게 사랑이 풍성하게 하셔서 결국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III. 목회의 목표 :분별함, 진실함, 허물없음
성경은 목회의 세 목표를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 분별한다는 의미는 많은 것들 중에서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능력, 혹은 좋아 보이는 것들 중에서 최선의 것을 선택하는 행위입니다. 한동안 우리는 이단 문제로 인해서 교회가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그 일로 인해서 교회가 찢어지는 고통을 겪는 일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저희 인근에 있는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이단에 빠져서 교인을 모두 데리고 이단에 통째로 바친 교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목회자 사모가 이단에 빠져서 목회자와 갈라서고 교인들을 데리고 이단에게로 가는 사례도 있었습니다. 이런 끔찍한 일들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결국 분별력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이 많다고 해도 수많은 교인을 일일이 따라다니며 생활을 지도해줄 수 있는 목회자는 없습니다. 그리고 필요하지도 않습니다. 목회는 결국 이렇게 지식과 총명으로 하나님을 점점 사랑하게 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분별력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선한 지, 선해 보이는 것과 진짜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결국 목회는 목회자가 사라지고 난 다음에 그 열매가 입증되는 것이니 목회자가 사라진 후에도 성도들이 분별력 있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의 목회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진실함입니다. 진실하다는 단어는 '에일리크리네스'라고 단어입니다. 이것을 놓고 주석가들은 두 가지 해석을 합니다. '에일리'라는 단어와 '크리네스'라는 단어가 합친 것입니다. '크리네스'는 판단한다는 말입니다. '에일리'라는 단어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해 2개의 의견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이것이 '햇빛'이라고 보고 '햇빛에 비추어 판단한'이라는 뜻입니다. 문서나 혹은 화폐에는 위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햇빛에 비춰보면 진품과 가품을 구별할 수 있듯이 그렇게 검증된 것을 가리켜서 진실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키질하다'는 뜻입니다. 곡식 가루가 다 그렇고 그런 것 같아도 고운 체에 그 가루를 붓고 흔들면 가느다란 가루는 떨어져 나오고 그보다 굵은 것은 체에 남습니다. 아래에 있는 가루는 떡을 지을 수 있는 고운 가루가 됩니다. 그래서 진실하다는 것은 체에 걸러낸 것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저는 어느 해석을 취하든지 결론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진실하지 않은 사람의 특징은 자기 멋대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의 특징은 진리의 빛 아래에서 자신조차도 그릇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여기에 자기를 비추어봅니다. 진실하다는 말은 진리가 있고 진리에 그 마음과 정신과 행동이 합치된 상태를 가리켜서 진실하다고 부릅니다.
오늘 날은 성공과 승리, 이기고 성공하고 번영하는 것의 가치가 너무나 크게 강조되어서 진실이 묻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진실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의 특징은 진실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진실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큰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것이 어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믿음이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믿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일컬어지던 다윗과 일천번제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했던 솔로몬의 처음 시절도 역시 하나님 앞에 진실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해주신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사도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감옥에 갇혀있으나 여전히 교회를 사랑하고 헌신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결국 그의 마음이 진리에 합치하였기 때문에 그는 이렇게 하나님 앞에 감옥 속에서도 교회를 위해 진심으로 염려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목회자는 목회라는 행위를 통해 모든 교인들을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모든 사람 각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사랑하면 약한 것 같으나 하나님이 결국 그들을 지키실 것이라는 자신이 살아온 신념을 가지고 양떼들을 돌보는 것이 목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이제 그 세 번째 마지막은 허물없음이 목회의 목표입니다. "허물이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라고 했으니 한번쯤 잠시 흠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흠이 없는 상태에서 계속 있는 것입니다. 아주 크고 실한 과실도 약간의 흠집이 있으면 특등품에 들지를 못합니다. 그 흠 때문에 모든 것을 가격을 낮추게 됩니다. 우리에게 목회를 통해 하고자 하시는 일은 모든 사람들을 당신 사랑하게 만들어서 결국은 분별력이 있고 또한 허물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회라고 하는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바로 신학적인 허물, 그리고 윤리적인 허물을 뜻하는 것입니다. 잘못 믿는 바가 없고 도덕적으로 잘못 행하는 바가 없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그의 인격과 삶으로 그대로 표출되는 것, 그것이 바로 허물이 없는 삶입니다. 이 세 가지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통해 영광을 돌리는 것이 목회의 목표입니다.
V. 적용과 결론
인생이 얼마나 짧고 속히 지나가는 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청년 시절을 지나 열정적인 목회 시기를 지났습니다. 은퇴를 앞두고 있는 사람들도 우리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바람처럼 지나가야할 때 결국은 모두 헤어져야 하는 인연입니다. 교인들도 두고 떠나야하고 내가 생명처럼 아끼던 교회와도 이별의 인사를 고해야합 다. 그 때 우리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누구와 헤어져도 결코 그것이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온갖 추잡스러운 욕망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고 우리의 목회 사역의 종지부를 올바르게 찍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모두 목회를 끝내고 아무개 목사님이 설교하시는 마지막 주일예배라고 하는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 두 가지 소망을 분명히 합시다. 그 날 마지막 설교를 하기 위해 성경을 펼쳤을 때도 지식과 총명이 정말 풍부해서 35~40년 설교를 들었는데도 우리 담임 목사님의 설교가 어떻게 전개될 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말씀의 깊이를 진 사람이 되기로 다짐합시다. 마지막으로는 그렇게 교인들에게 떠나오는 마지막 날이 우리가 살아온 인생의 날들 중에서 하나님을 가장 많이 사랑한 날이고, 앞으로 살아갈 날에 비하면 가장 조금 예수님을 사랑할 날이 되게 합시다. 죽는 그날이 하나님 사랑에 사무치도록 뜨겁고 열렬한 날이 되도록 우리 그렇게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