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이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고전 12:8)
녹취자 : 송미옥
I. 본문해설
지혜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지혜는 기본적으로 영원한 사물에 관련된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뚤리우스라고 자주 이야기 했던 사람이 사실은 툴리우스 키케로라는 사람입니다. 시대의 저명한 정치가였고 문학가였고, 철학자였습니다. 이 사람이 의미 있는 작품들을 많이 남깁니다. 그중의 하나가 우정에 관하여 라는 작품이고 라틴어 문학의 최고봉이라고 일컬어지는 책입니다. 그 사람도 지혜라고 하는 것은 신사와 인간사의 관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신들에 관한 일들과 인간들의 일들에 관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게 나중에 어거스틴을 거쳐서 신학에까지 내려와서 신학이 무엇이냐? 라고 할 때 개혁파 전통주의자들이 자주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의 일과 인간에 관한 학문이다. 이것의 전제에는 신의 일과 하나님의 일과 인간의 일이 떼어질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인간이 창조된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서 구상이 되고, 능력에 의해서 창조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을 모르고는 하나님을 모르고는 인간의 자신을 규명할 수 없고 당연히 선과 악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를 더더욱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에 관한 일과 인간에 관한 일은 아주 밀접하게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기독교강요를 펴면서 제일 먼저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관해서 이야기하면서 지식은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다. 경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을 아는 만큼 인간 자신을 알고 자신을 아는 것만큼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 자체가 직조물처럼 인간에 관한 지식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나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리를 하면 ‘지혜란? 영원한 사물에 관한 모성적 인식입니다.
두 번째로 지식은 무엇이겠습니까? 시간적 사물에 대한 이성적 인식입니다. 영원한 사물 시간적 사물은 영원에서 시간이 오니까 ‘영원한’은 ‘영원한’이 되고 하나는 기본이 되고 하나는 거기서 유래한 것이 되고 영원은 끝까지 있으니까 영원은 동시에 목적이 되지만 시간적 사물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못하고 결국은 영원한 사물로 회귀하게 된다. 그래서 로마서 11장 36절에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마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라고 한 것도 그런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다 똑같으니까 지성으로써 그것을 받아들이고 아는 것입니다. 오성적 이성적이라고 하는 것은 오성적이라고 하는 것은 번뜩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철학적으로 말하자면 변증적이라는 것의 반대가 이성적입니다. 변증적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고등학교 때 배운 것처럼 변증법적 유물론의 대가인 프리드리히 헤겔의 변증법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이 통용되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시간이 흐르면 반대가 생겨납니다. 이 반대는 결국에 또 다른 합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래서 정이였던 것이 ,반 합이 되고 합이였던 것이 정이 되고 반이되고 합이 됩니다. 정에서 합이된 것이 다시 정이되고, 정이 된 것이 다시 합이 되는 그런 정을 쭉 이을 때 헤겔은 시대의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 반, 합이 되어가는 과정이 정해진 것이 있으면 반대가 주어지고 그것이 합하여지는데, 이것이 반드시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무슨 뜻이냐 하면 오성에 의해서 어떤 것들보다 더 뛰어난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 초월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게 말하자면 하나의 지혜를 습득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아마 제가 설교했을 때 이런 구절을 이해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두 개의 인식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는 신앙이었고, 하나는 이성이었습니다. 이렇게 들었을 것입니다. 타락했을 때 제일 먼저 신앙이 산산이 부서졌고, 이성도 깊이 훼손되어서 이성과 오성이 짝을 이루면서 하나님을 알고, 사물을 알고, 자기를 알아갈 수 있었는데, 결국 이것이 괴멸되어 버리고 이성도 굉장히 많은 타격을 입게 되어서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한 것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라는 것이 생각이 납니다. 그 때의 믿음이 오성입니다. 그것은 초월적인 것을 깨닫도록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고, 이성은 창조된 세계 안에 있는 사물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주신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술이나 사상이나 종교나 이런 것들은 이쪽에 관여하는 것이고 나머지 다른 학문은 이쪽에 관여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쪽이 발달된 사람들이 대접을 받고 좋은 학교도 가고 좋은 직장도 보장이 되고 하는 그런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설교를 끝마쳤습니다. ‘그러나 비록 지혜가 영원한 사물에 대한 인식이고 지식이 시간적 사물에 대한 인식이지만 이 두 가지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 아니고 이 두 가지는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라고 마쳤습니다. 오늘 속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보면 유명한 은사의 장입니다. 한 성령님이 교회를 온전케 하기 위해서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주셔서 그 뜻대로 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려 함이라. 나누어준다는 것은 혜택을 받게 된다. 그런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있으면 눈이 좋으면 온몸이 덕을 보는 것입니다. 눈이 나쁘면 엎어져서 코도 깨지고, 무릎도 다치고 그렇습니다. 눈이 좋으면 동물들은 저 멀리 보이는 사냥감도 사냥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전체적인 몸이 유익을 나누는 모습이 은사를 주셨을 때 교회가 누리는 유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을 한 번에 정리하자면 흔히 이 지식을 놓고 이 지식은 모든 지식을 의미하는가보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인터넷에 들어가면 수많은 정보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많이 알고 있는 것을 우리는 지식의 은사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자기의 책 속 삼위일체 13권 19장 14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지식은 그리스도이고 우리의 지혜도 같은 그리스도이시다. 바로 그분이 시간적 사물을 가지고 우리에게 신앙을 심어주시고 바로 그분이 영구한 사물을 두고는 진리를 보여주신다. 여기서 ’바로 그분이 시간적 사물을 가지고 우리에게 신앙을 심어주시고‘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당신 자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적 사물로 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신앙을 심어주시는 것이고 그 다음. ’영구한 사물을 가지고는 진리를 보여주신다.‘
이 뜻은 하나님으로 오신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적 사물로 오셨으나 시간적 사물 안에 있는 모든 존재는 결국은 영원한 사물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의 말이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진리에 대해 말은 할 수 있지만 내 말 자체가 나 때문에 진리가 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예수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심으로써, 시간 안에서 하나님을 보여주심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갖게 하시고, 그 믿음이 오성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서 영원한 사물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고 진리를 터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과 지혜가 떨어질 수 없다고 말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우리가 인터넷을 켜면 알 수 있는 살림의 지혜라든지 캠핑 가서 즐겁게 노는 방법이라든지 이러한 것 등의 잡다한 지식들 심지어는 의학적인 지식까지도 그것은 지식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거스틴이 이야기할 때 지식은 무엇이냐?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서 주어진 책이다. 그 두 가지 지식은 첫째는 ‘믿음의 규칙들을 아는 지식’이고 두 번째는 ‘삶에 관한 교훈’ 그것만 지식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무엇이라고 보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 심지어는 호기심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결과들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12장 8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가 명료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한 사람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지혜의 말씀을 주신다는 것은 하늘의 높은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판사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압니까? 승려의 종을 말합니다. 승려에는 이판승과 사판승이 있습니다. 이판승은 ‘이치’ 할 때 ‘이’입니다. 사람들은 정신이 고매해서 불교의 심오한 철학적 이치를 깨닫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이판승이 성철스님입니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
어느 식당에 갔더니 산은 산이요. 물은 셀프로다. 라고 써있었습니다.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 이것을 구역장 공부에서 30분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심오한 것입니다. 진짜 있는 산과 사람들이 생각하는 산 말하는 산, 말하고 들은 것을 말하는 산 모두 다릅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해도 산은 원래 그 산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삶의 교훈을 끄집어냅니다. 결국은 그런 것을 판단하는 승려들이 이판승입니다. 사판승은 제자들이 몰려옵니다. 이판승이 도망만 다닐 수 없지 않습니까? 중생을 구제해야 할 것 아닙니까?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조직을 짜고 정리를 해서 오묘한 가르침을 중생들에게까지 실어 나를지? 그것은 이판승의 소관 사항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판 능력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모두 그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판의 능력입니다. 일을 판단하는 승려입니다. 그래서 이판사판이라는 것이 모든 것이 동원되었다는 것입니다. 절에 있는 모든 승려들이 동원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각각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물론 탁월한 이판의 능력과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사판의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대단한 사람인 것입니다. 자신은 고달플지 모르겠지만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플라톤이 꿈꾸는 이상국가에 왕이 바로 이판과 사판의 능력을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건희 회장의 어록에 의하면 자기가 모르는 것은 사람들에게 시킬 수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알아야지 시킬 수 있고 시킬 수 있어야 결국은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 이야기하는 지혜의 말씀은 초월적인 세계에 속한 것들을 오성적 인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이 탁월하게 깨닫는 능력입니다. 그게 지혜의 은사입니다. 어거스틴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 다음 말씀에 ‘어떤 사람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이것을 존 오웬 목사님은 말씀이 로고스입니다. 로고스의 병치어가 다바르입니다. 알다시피 여러분들이 ‘다바르’라고 하는 것은 말씀이라는 뜻도 있지만 대표적인 뜻이 일입니다. 로고스와 같은 뜻이 되는 것입니다. ‘로고스’는 말씀으로도 번역이 되고 일로도 번역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7장 1장에서 보면 ‘ 이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라고 할 때 ‘이 일 후에’ 하는 말이 히브리어로 ‘엘레 핫 데 빠린’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바린의 복수입니다. ‘이 일들 이후에’ 이런 식입니다.
지식의 일이다. 지식의 일들을 ‘지식에 속한 일이다’. 라고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그냥 일에 대한 지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혜의 말씀이 있는 그곳에서 어떻게 사람들이 그 지혜의 말씀의 혜택을 받게끔 그렇게 일의 질서를 정하고 정돈해서 그 말씀이 흘러 들어가게끔 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지식입니다. 자혜의 하부적인 지식의 사항들
그 지식은 많은 사람들을 지혜의 앞으로 인도하는데 요긴하게 쓰여지는 지식이 이고, 그 지식도 당연히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이고, 그 지혜도 그리스도로부터 그래서 사람이 되신 그분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식을 보여주고 그 지식과 함께 그 지식을 보여주고 그리고 그 지식과 함께 하나님이 지혜를 보여주심으로써 예수그리스도는 인성으로는 우리에게 지식을 보여주셔서 믿음을 갖게 하시고, 신성으로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에게 보여주심으로 그래서 우리가 예수 안에서 지식과 지혜의 결합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도 똑같이 하나님께서 특별한 사판의 지식을 주시면 됩니다. 사판이 이판과 관계없는 것이 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절에 승려가 있는데 고매한 스승이 하늘의 이치를 깨달으면 그것을 어떻게 설법하고, 어떻게 사람들에게 적용시켜서 지혜의 혜택을 받게 할 것인가? 라고 하는 것에 관한 일이여야지 가서 노름을 하는데 기가 막히게 한다. 등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판의 일이 아닙니다. 이판과 관련이 있을 때 진정한 사판의 일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바보 같은 생각이 뭐냐하면 신앙의 열정이 있고 순수성이 있는 사람은 지식의 말씀을 무시합니다. 그리고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지혜를 무시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온전한 사랑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평생 목회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은 탁월한 하늘의 지혜를 성령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것을 어떻게 지식으로 엮어서 자신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유익을 줄 수 있을지를 함께 가지고 있을 때에 목회에 꽃이 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신앙은 확실히 있는게 분명한데 끊임없이 삶이 고달프고, 신앙이 뛰어난데도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치고 마음속으로 칼부림을 하면서 고통받는 인생을 삽니다. 결국은 지식이 부족한데서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위대한 신학자들의 책을 읽어야 합니다. 거기서 놀라운 것들을 발견합니다. 사실 그 책을 읽으면서 모두가 성령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 지식을 보면서 놀라운 은혜를 받습니다. 오늘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를 알았다. 그게 아니라 내가 지혜의 말씀이 없는 것이 지식에 대한 말씀의 깨달음이 없었기 때문에 지혜의 말씀을 얻지 못하는 일이 너무도 많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음으로써 얼마나 진리가 아름다운 것인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눈물 흘리셨던 이야기가 사실은 하나님을 알게 하는 데 방해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 시간적인 육체 안에서 보이신 눈물을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지혜와 지식은 떨어질 수 없이 되는 것입니다. 부부처럼 한 몸이 되어서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