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와 여자로 지으시다(2)
녹취자 : 오희열
반갑습니다. 가정의 관계 회복에 대한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번에 이어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하나님이 제일 먼저 한 사람 아담을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셔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하게 하심으로 최초의 가정을 만드셨습니다.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은 이렇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하는 두 사람을 통해서 인류 사회를 이루실 것이었고 모든 인류가 이렇게 서로를 사랑하며 사는 사회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뿐만 아니라 이후에 태어날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두 가지 명령을 내리십니다. 하나는 종교명령이었으니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명령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문화명령이었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를 어떻게 다스리고 가꿔야 할지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신 최초의 사람인 동시에 이후에 태어나게 될 모든 인류의 대표자의 지위에 있었습니다. 이후에 태어날 모든 인류의 한 대표자로서 하나님께로부터 두 가지 명령을 받게 됩니다. 창세기 2장 17절에서 하나님은, “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왜 하나님이 쩨쩨하게 왜 그러셨을까? 주시려면 다 주시지’, ‘왜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을까?’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의 이 열매가 어떤 종류의 열매일까에 대해서 궁금하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열매가 다른 열매들과는 다른 어떤 신비한 열매였을 것이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냥 평범한 나무의 열매였지만 하나님이 이 나무의 열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명령하심으로써, 여기 아담이 와서 서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후에 하와도 이렇게 와 있었을 것입니다. 이 나무의 실과를 보면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우리에게 맡기셨는데 이 나무의 실과는 우리가 먹지 못하게 하셨다.” 이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있는 존재의 차이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맡기셨지만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높으신 분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께 순종하면 살아야 한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종교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 먹지 마라.”하시고 인간은 거기에 순종해 하는 것인데, 순종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의지하는 마음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종교명령을 내리심으로써 하나님과의 존재의 차이를 알게 하시고 순종하게 하시고 당신을 의지하며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 종교명령은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이것을 종교명령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규율하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정과 관련해서 이런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남녀가 합하여 가정을 이루게 하시고,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옆으로는 모든 이웃들을 사랑하게 하시면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자연 사물에 대해서는 ‘선의’, ‘선한 뜻을 가지고 대하도록’ 그렇게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이런 도리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또 자연 모든 만물들을 선의로 대하는, 이러한 인간됨을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시고 종교명령을 주신 이유입니다.
그 다음 28절에서 ‘문화명령’, 혹은 이것을 ‘노동명령’이라고도 부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 다스리라 하시니라” 라고 나옵니다. 여기에서 ‘다스린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라다’라는 단어인데, 폭압적인 통치가 아니라 아버지, 어머니의 마음을 가지고 모든 자연 세계를 돌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동과 섬김을 통해서 자연만물도 모두 행복해지는 세상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역할을 남자와 여자가 함께 행함으로써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 속에, 자연세계뿐만 아니라 인간들이 살아가는 사회 속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가꾸고 돌보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였던 것입니다. 요약을 하면, 한편으로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와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아담은 그 이름이 ‘흙’, ‘땅’, 혹은 ‘붉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단어에서 옵니다. 그것은 육체의 근원이 ‘흙’ 또는 ‘땅’에서 온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하와’는 원래 ‘생명’이라는 뜻이고 그 생명은 여성이 생명을 잉태하고 생명을 퍼뜨리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여자의 이름을 ‘하와’라고 부르시고 남자를 ‘아담’으로 부르게 하셨습니다.
다음으로, 이렇게 두 개의 사물이 있어서 하나의 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사물이 네 개라면 네 개의 관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들이 많아지면 더 많은 관계들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무한히 많아지면 여기에 무수하게 많은 관계들이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관계가 복수가 될 때에는 맺는 관계들이 많아지기 때문에 이 각자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리에 있게 되면 아름다움을 증진시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인간들의 이러한 관계들을 서로 사랑하는 관계들로 만드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사회 속에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사랑이라는 것은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에게 적용한다면 두 사람과의 관계, 네 사람과의 관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 무수한 사람들과의 관계, 그것들이 함께 사랑으로 엮여지기만 했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관계가 되었겠습니까? 그렇게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불행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는데 생육하고 번성하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게 하셨지만 엄격하게 나누어보자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인간을 향한 사랑과 좀 다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경외’라고 표현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이 함께 결합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느끼면서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게 만드는 것을 가리켜서 우리는 ‘경건’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이 사람 안에 이런 사랑이 있고, 이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진 사랑인데 이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도 사랑하고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해주신 것처럼 사랑하게 되고 자연의 모든 만물들을 선의로 대하게 되는데 이것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삶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셨는데, 하나님은 남자에게 여성과는 다른 성품을 주셔서 개척하고 또 통치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남성성은 용기와 투지, 결단, 이런 것들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여성성은, ‘이 땅을 다스리라’라는 하나님의 계명 속에 잘 나타나는데, 이것은 돌보고,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관계를 구축하고, 혹은 이미 이루어진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성성은 지혜, 자비, 공감, 이런 것들로 사물들과의 관계에 의해서 표출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 라고 하신 것은 결국 아담 혼자에게 주신 명령이 아니라 아담 이후에 생겨날 하와와 모든 인류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이것은 남자와 여자가 함께 힘을 합하여 성취될 수 있는 계명이니 그것이 바로 “정복하고 다스리라”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우리가 잘 이해하고 있는 바와 같이 남자들은 얼마나 큰 집에 얼마나 비싼 가구를 들여놓고 사느냐에 관심을 가질지 모르지만 여성들은 그것보다 아기자기하게 어떻게 집안을 가꾸어서 행복한 삶을 엮어갈 수 있을까를 훨씬 더 생각합니다. 남자보다 여자가 작고 소소한 곳에서 오히려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도 하나님께서 여성에게 주신 이러한 기질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남녀가 서로 이렇게 다른 성품을 가지고 태어났으니 서로를 깊이 이해해야만 사랑하는 데에 힘이 덜 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을 내리시는데 이것은 남녀가 서로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남녀 우월의 차이가 아니라 맡겨진 영역들이 다른 것처럼 하나님이 남자에게 이런 성품을, 여자에게 이런 성품을 주신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게 될 때 서로를 잘 섬기고 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결혼식 주례를 하고 신랑 신부가 신혼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면 항상 물어봅니다. “솔직히 말해봐라. 너희 다퉜느냐 안 다퉜느냐?” 물으면 대부분이 “조금 다퉜어요.” 합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맨 처음 결혼을 해서 아직 남녀가 서로 다른 존재라는 것을 너무 몰라서 입니다. 사실 서로 다른 존재로 창조되어 살아왔고 이제껏 삶의 배경이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서로 처음 같이 시작을 할 때 둘이 잘 맞지 않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화의 길을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녀가 서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하나의 법칙입니다. 희랍 신화에 보면 원래 남녀가 한 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너무 고상하고 높은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니까 신들이 위협을 느끼게 되고 인간을 절반으로 쪼갭니다. 한창 인간성을 가꾸고 신의 경지에까지 오르도록 변화되어야 할 시기에 일정한 나이가 되면 남녀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서 이 땅에 있는 생각들로 꽉 차게 되어서 신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신화는 그 당시에 가지고 있는 인간관을 보여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결국 남자와 여자는 일정한 나이가 되면 너무 뜨겁게 짝을 찾아서 사랑을 갈망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세상에 있는 남자와 여자를 결합시켜서 한 가정을 만드시는 방법입니다. 가끔 사람들이 독신으로 사는 것을 보는데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그러한 것을 별로 안 느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평생을 살았는데 어떤 여자를 보면 가슴이 뛰고 저 여자와 한 몸이 되어서 살고 싶다는 것을 많이 안 느끼는 사람들은 독신의 소명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그것을 느낀다면 독신으로 살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남녀가 사랑함으로써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서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 인간을 만드시고 인간을 통해서 이루고 싶으셨던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일을 이해하고 그 뜻을 따라서 이 세계를 돌보고 가꾸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남녀를 사랑으로 결합시키신 이유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남녀를 사랑으로 결합시켜주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한 인간을 하나님이 지으신 경륜은 보다 높게 보면, 하나님이 가정을 만드신 경륜 안에 있고, 이 가정의 경륜은 하나님이 세계를 모두 창조하신 경륜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가정이 너무 중요한 이유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엄마 아빠를 통해서 인간이 누구인지, 자연만물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것들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한 아이가 참 사람이 되고자 애쓰는 아빠와 그렇게 되고자 애쓰는 엄마 아래에 태어나서 인간이 되는 도리를 올바르게 배울 수 있다면 이 아이는 행복에 훨씬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그것을 가르쳐주지 못할 때 아이들은 온몸으로 부딪치며 깨어지며 그 평범한 진리들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야 할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은 이 가정이 가정다워질 때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신 경륜에 매우 가깝게 다가가는 것입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한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올바르게 깨달으며 성숙할 때 그 사람은 좋은 아버지가 되고 좋은 엄마가 되고 좋은 자녀가 되고 좋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을 향한 경륜, 가정의 경륜, 창조의 경륜이 모두 연속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배운 내용들을 종합하면 여섯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것은 잊어버리더라도 이 여섯 가지를 기억하시면 됩니다. 첫째로, 하나님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인간에게 두 가지 명령을 주십니다. 하나는 종교명령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명령이었습니다. 종교명령은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이었고 문화명령은 이 세상을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가꾸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문화명령은 인간의 사회, 자연의 세계, 모두에 대해서 주시는 명령이니 우리가 이 세상에 없는 것 보다는 있기 때문에 더 아름다운 인류사회가 되고 자연세계가 되도록 하나님이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종교명령을 주셨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습니다. 동산에 있는 많은 실과들 중에 특정한 실과는 따먹지 말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인간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서 엄청난 무한대의 질적인 격차를 느끼도록, 그래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문화명령은 하나님이 이 인간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이것은 사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정복과 다스림’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인간 사회에서 인간들이 만들어가는 이 모든 사회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로서의 사회이기 때문에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대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자연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영역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하나님의 이러한 문화명령과 종교명령을 위해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모두 필요합니다. 특히 문화명령을 위해서 남성성은 새로운 세계를 정복하는 데에, 여성성은 이미 정복되어 있는 사물들과 함께 관계를 맺어가는 데에 필요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다섯 번째는 인간과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경륜 안에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한 사람이 정말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은 가정다운 가정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고 모든 인류가 가정다운 가정을 이루게 하심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모든 경륜이 그 경륜대로 이루어지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과 가정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경륜을 따르는 사회가 되려면 가정이 가정다워야 하고 그 가정이 가정다워지는 비결은 가정의 구성요소인 가족들이 각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할 뿐만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을 자비롭게 대하는 선의에 의해서 성취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마음은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의 모든 만물들을 돌보고 가꾸는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간에 대한 비참한 대우들, 갑질하는 것, 자기보다 지위가 낮고 돈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인간을 구박하고 억압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류사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연만 보더라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인간들이 이렇게 학대하고 마구 소비해서 자연의 세계를 황폐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선의에 이르게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종교와 문화명령을 주셨다. 종교명령은 순종하게 하시기 위함이고 문화명령은 정복하고 다스리게 하기 위함이다. 이런 문화명령을 위해서 남성성과 여성성이 모두 필요하다 남성성은 정복하고 여성성은 그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 인생과 가정은 창조의 경륜 안에 있고 하나님을 경외함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만물에 대한 선의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우리가 배운 내용입니다.
(질문 1) 인생과 가정은 창조의 경륜 안에 있다고 오늘 배웠는데 독신으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1)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이야기를 한 것이고 오히려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독신을 권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독신으로 살아가느냐 결혼을 하고 살아가느냐는 인생의 한 양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을 하고 어떤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이것은 하나의 양상입니다. 문제는 무엇을 위한 결혼이고 무엇을 위한 독신이냐는 것입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인데, 결혼을 하지 않은 자매들이 결혼을 한 자기 또래의 친구가 아이를 낳아 기르느라 억수로 고생하는 것을 보면 독신으로 사는 보람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자매는 결혼할 때가 되니까 길거리에 아기를 안고 지나가는 엄마들을 보면 눈물이 난다고 합니다. 자기는 결혼해서 남편과 함께 행복하게 살 소망보다는 ‘자기 아이를 갖는 것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고백을 들었습니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것입니다. 독신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한 형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우리가 너무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질문 2) 남녀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살아야 하다는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결혼 후 아이 출산 후에 남편이 신앙을 져버리고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삽니다. 저는 배운 대로 살려고 하는데 남편과 함께 마음을 모으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 물론 하나님께 사랑을 구해야겠지만 한계가 있는 것 같아서 지혜로운 방법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답변 2)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남편과 아내가 함께 신앙생활을 잘 해도 가정을 이끌어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남편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신앙을 버리셨다고 하니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렇지만 우리에게 별다른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지 남편의 마음이 변하여 주님께 돌아오기를 갈망하는 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매님이 먼저 여유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여유라는 것은 단순히 물질의 여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로서 자식을 기르다보면 성깔이 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말썽 피우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성깔이 나서 아이들을 때리거나 할 때가 있는가 하면, 자신의 마음에 기쁘고 좋은 일이 있어서 마음이 한 없이 너그러워질 때에는 아이들이 그렇게 말썽을 피우는 것조차도 너무 귀여워 보이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자신에게 여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남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믿는 남편과 결혼한 사람도 있는데 자매님은 믿는 남편과 결혼을 해서 지금은 신앙을 떠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언젠가는 돌이키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자매님이 보다 더 큰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남편을 용납하고 하나님을 떠난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아내의 자리를 꿋꿋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남편이 한 순간에 바뀌어서 나에게 잘 해주기를 기대할 수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사랑을 많이 받아서 현실들을 극복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남편으로부터 박해를 받는 아내들도 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 많이 만났습니다. 구타를 하기도 하고 인간 이하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때 성경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핍박을 인내하고 사랑으로 참으면서 언젠가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대하면서 희생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남편과 올바르고 좋은 관계가 될 때 대화가 되기 때문에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불만과 원망이 가득 찬 상태에서는 대화가 되질 않습니다. 똑같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자기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며 남편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면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3) “생육하고 번성하여” 라는 말이 육체적인 번식에 관한 명령이라고 책에 제시되어 있고 그것이 저는 가정명령에 포함된 것 같은데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출산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번성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고 요새 저출산이 심각해지고 있는데 저도 첫째를 낳고 둘째를 임신 중인데, 사실 그렇게 낳는 것이 힘들고, 다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경륜으로 봤을 때는 그런 마음이 죄에 속하는 것은 아닌지, 혹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녀를 많이 낳아야 한다고 하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 목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3) 하나님의 뜻이 많은 자녀들을 낳는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아주 극단적인 곳에서는 피임조차도 꺼리고 낙태는 물론이고 말입니다. 피임조차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꺼렸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녀들을 다산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즘 현실이, 예전에 농경사회에서는 자녀를 낳으면 자녀를 부모가 기르기도 하지만 대가족 사회에 살면서 서로서로 돌보며 아이를 길러주었고 자녀들을 많이 낳으면 처음에 낳은 아이들이 자기 동생들을 돌보면서, 쉽게 이야기하면 구조적으로 육아의 분업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핵가족 사회가 되어서 딱 둘이서 낳고 남편은 직업 활동을 하러 가고 심지어 아내도 직업 활동을 하러 가야하고 그러면서 아이를 돌보는 육아를 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아이들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도 가짓수가 얼마 안 되었지만 이제는 굉장히 많은 것들이 필요하게 되고 이런 복잡한 문제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출산을 꺼립니다. 그렇지만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이 낳아서 그 아이들을 사람답게 길러낸다면 그보다 더 귀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우리들이 그것을 생물학적 선교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람을 그냥 낳아 놓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답게 길러낸다면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위한 훌륭한 섬김일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렵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 며느리도 결혼하기 전에는 넷을 낳겠다고 해서 대단하다고 하고 거기에 점수를 많이 주고 결혼을 허락했는데, 하나를 낳더니 “이제 셋만 낳아야겠어요.”, 하기에 “그래?” 하고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둘째를 낳고 났더니 너무 힘든지 이제는 그만 낳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힘든 시기가 지나가고 편안해지면 하나 더 낳아보라고 했는데 어떻게 강요할 수가 있겠습니까? 다산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지금도 그런 다산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있습니다. 미국에 갔을 때 조엘 비키 목사님을 만났더니 자기네 집안이 얼마나 다산의 집안인지를 이야기하는데, 자기네 큰 아버지 집안은 1년에 한 번씩 체육관을 빌려서 모인다고 합니다. 손자와 그 집안의 식구들이 70명이 넘어서 이름을 다 외울 수 없다고 합니다. 1세대에 아홉 명인가를 낳았고 그 다음 세대들이 또 그런 식으로 퍼뜨린 것입니다. 1세대에 아홉 명이지만 다음 세대에 가면 7명씩만 해도 63명이 됩니다. 최소한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을 낳고 그것이 3세대, 증손자까지 안 내려가도 그 숫자가 약 70명이라고 하니까 한 집에 보통 일곱에서 아홉 명을 낳은 것입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만일 증손자까지 내려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지 않는 가정이 아니라 잘 믿는 가정이 이렇게 생물학적 선교를 한다면 언젠가 이 지구를 하나님 경외하는 가정으로 덮어버릴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많은 희생이 필요할 것입니다. 저도 둘 밖에 낳지 않은 사람이라서 자신 있게 말은 못하겠지만 다산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한 번 도전해 보십시오.
이상으로 두 번째 시간을 마치겠습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