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 난 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7)
녹취자: 양현정
지난 시간에는 제가 사유와 언어의 관계가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라는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오늘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요한은 형제와 함께 우레의 아들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니 원래 그 성격이 얼마나 과격하고 극단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랑의 사람으로 변하게 됐습니다. 사도 요한이 다 늙어서 귀양가기 전에 기운이 없어서 사람들이 부축을 해서 설교단 앞에 세우면 손을 들고 ‘자녀들아 너희는 서로 사랑할지니라’ 하고 한마디를 하기만 하면 온 교인들이 눈물바다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만큼 사랑에 대해서 깊은 감화를 받은 사람이었고 삼위일체 중에서도 사랑에 관한 가장 풍부한 언급을 주고 있는 복음사가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씩 문제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두 가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나오는데 여러분도 저에게 교리를 배우면서 이런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사랑은 은혜의 소산이다’ 공식이 있는데 ‘신령한 은혜의 경험은 거룩한 사랑의 정서를 가져온다. 그 은혜는 성령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성경이 여러 곳에서 사랑을 성령의 몫으로 돌립니다. 그렇게 놓고 보니 어떤 난점이 나오느냐 하면 성령님이 사랑이시라고 하면 성부 성자는 성령이 아니신가 하는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성령님이라고 알아들을 사람은 없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왜 성경은 한편으로는 성령님이 사랑이 성령님께 고유한 것으로 묘사하고 한편으로는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하는 혼란이 생깁니다. 우리들의 눈길을 끄는 의문점은 성경에 보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면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너희는 나를 사랑하고’는 성자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의심할 여지 없이 성부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뒤져도 성령을 사랑하라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우리의 사랑과 경배를 받으실 분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만 못한 그 무엇이 아니겠는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부터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혼란이 나오게 됩니다.
성령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을 사랑하라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듯이 사랑하는 자는 이미 성령을 사랑하고 삼위일체 하나님뿐 아니라 성령을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에 성령을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 수 있느냐 하면 아우구스투누스의 이 이야기가 모든 신학의 방향을 잡으면서 이제까지 견지해 오고 있는 정통 신학이 됩니다. 사랑이 누구에게 속한 것이냐라고 물을 때 고유하게는 성령님에게 속하고, 전체적으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성경에 등장합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하면서 삼각형을 그리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삼각형은 어느 한쪽이 잘라지고 나면 삼각형이 안 됩니다. 직선으로 잘라지면 오각형이 되고 곡선으로 잘라지면 각형이 안 됩니다. 한 각이 없는 삼각형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님은 항상 두 분이 계신데 한 분이 없으신 적은 없습니다. 성자 있는 곳에 성부, 성령이 계시고, 성부 있는 곳에 성자, 성령이 함께 계십니다. 찢어지듯이 나뉘어지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아니라 삼신이 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어거스틴은 사랑은 고유하게는 성령에게 속했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하나님 자신에게 속했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실 뿐 아니라 또한 성령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해서 성령 자신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 사람이 모두 생각이 다르고 살아온 인생이 다르고 상처가 다르고 모든 것이 다르지만 우리의 공통점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아본 엄마들은 금방 이해가 되겠지만 자식을 낳으면 유전자가 똑같습니다. 그 유전자가 부모로부터 자신에게 물려주는 신기하게 기질, 생각, 감정의 움직임까지도 엄마 아빠를 유사하게 닮습니다. 아빠의 씨가 엄마의 몸에 떨어지고 그것이 합하여 결합이 되고 거기서 새 생명이 탄생합니다. 신비합니다. 여성 그 자체가 신비합니다. 무에서 유, 완전한 사람이 생겨납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완전한 사람이 생겨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태어났다’입니다. 아버지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혼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것 아닙니까. 그것을 사람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을 가지고 태어나고 그리고 또한 우리가 거듭날 때에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났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는 성령 때문에라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하나님 속으로 들어간 사람인데 당신 자신의 사랑 안에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은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이 사랑이 없으면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기도생활 많이 하고 말씀의 은혜를 받고 예배를 드리고 성도의 거룩한 교제를 나누고 하면 이 사랑이 증진되기도 하고 멀어져서 세속적인 것에 빠져서 살면 이 사랑이 쇠약해집니다. 사랑이 쇠약해지면 사랑만 쇠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눌려지고 있었던 속에 있는 회심하기 전에 육에 속한 본성들이 반란을 일으키듯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돼지에게 뜨물 같은 사료를 먹입니다. 긴 도구를 갖다 놓으면 여름이면 사료에서 시큼한 냄새가 납니다. 대개 아침에 와서 가져가는데 아침이 되면 음식물 찌꺼기가 아래로 가라앉습니다. 더 작은 것이 가라앉고 위에 색을 보면 맑습니다. 마치 맨 위에는 청주 같고 아래는 탁주 막걸리 같습니다. 제일 먼저 막대기로 수레에 싣고 다닙니다. 막대기를 넣고 돌리면 밑에서 온갖 찌꺼기가 나옵니다. 은혜에서 멀어져 성질이 치솟을 때 모양입니다. 그러면 사랑은 어디 있느냐 사랑은 사라지지 않고 항상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그 삶이 마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세팅이 되어있는데 세상을 사랑하며 살아가니까 두 개가 싸움질을 하며 갈가리 찢어집니다. 정신의 착란과 혼란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그런 사랑 안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것이 맞다. 그것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사유와 우리의 언어를 연결시킬까요? 그것이 연결이 안 되었다면 어거스틴이 심리적 삼위일체론을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훌륭한 모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사유할 능력이 있습니다. 마음속에 수많은 생각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우리 존재 자체를 기억의 덩어리라고 했습니다. 내가 나인 이유는 나만의 독특한 영혼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만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형제로서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이 살았다면 똑같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겠냐고 말하기도 하지만 부모님으로부터 똑같은 피를 받아도 형제에게 사물은 똑같이 보일지 모릅니다. 유리컵에 담겨 있는 물. 컵 겉면에 맺혀 있는 물. 그러나 느낌은 다 다릅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생수, 생수는 우리 주님이라고 생각하나 다른 사람은 이것을 보면서 소주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각자의 마음속에 다른 기억이 입력되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동일한 기억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사유가 이 안에 있습니다. 사유는 물과 같아서 어디로 흐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나한테 좋은 기억이 없는데 아침에 기분 나쁘게 한마디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모여있던 사유가 출렁거리기 시작하면서 그 사람에 대한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을 연대순으로 뽑아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사소한 일인데 옛날 일인데 끌고 들어오면서 엄청난 후원을 받으며 지금의 상황을 해석해 내니까 더 엄청난 정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나쁜 사람이라고 쏟아져 나오고 주위에 있는 사람은 그럴 필요가 있나 싶지만 이 사람에게는 그럴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십여 년 동안 쌓여 있던 것이 쏟아져 나오며 정동을 일으킵니다. 기억이 그렇게 무서운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기억은 평소에는 가만히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있는 것을 성부라고 한다면 두 번째는 거기서 무엇인가를 상기해 내는 것입니다. 많은 기억이 있는데 어느 한 사물을 봅니다. 그러면 이 속에서 사유가 움직이며 저것을 해석해 내기 적합한 모든 기억나는 정보를 끌어 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의 사유가 있는데 그것이 상기가 되어서 언어를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자라고 말한다면 시선에 들어오고 상기하게 된 것을 그것에 애착하지 않으면 그 생각을 그쪽으로 몰아가서 없겠습니다. 그것을 애착하게 되는 것을 성령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사유가 성부, 상기되는 것을 성자, 상기된 애착이 일어나는 것이 성령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이 우리 의식처럼 사랑은 기억 속에 설정되어 있는 시선과 그렇게 되어있는 것과 어떤 것을 보면서 형상화하는 시선, 두 가지를 결합시키기를,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사랑하게 됩니다. 그 사랑이 부모와 자식을 결합시킵니다. 결국은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를 사랑하게 만드는 것처럼 그렇게 성령님이 우리에게 역사하십니다.
처음부터 지식과 사랑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이라도 의욕 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고 안 것에 대해 의욕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랑과 지식은 그런 의미에서 나뉘어지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이 성부라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성자고, 사랑하는 것이 성령이니 기억 없이 이해할 수 없고, 이해는 기억을 동원함으로 이해가 되니, 이해하지 않는다면 사랑할 수 없으니 결국은 기억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그것이 마치 분리되지 않는 것처럼 성부, 성자, 성령님은 한 하나님으로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결론을 낸다면 요한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사랑은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결국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영혼의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안에서는 자기를 향한 이기심과 자기 안의 모든 인류를 위한 이타심이 결코 분리되지 않으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이렇게 사랑하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사랑을 안다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영원히 신비에 싸여 있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려고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이 언제나 함께하시듯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이해하는 지성과 그리고 그 말씀과 우리의 지성을 하나로 묶어 주는 사랑이 항상 함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중심, 이해하려는 자신의 의지, 그리고 그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성령, 이러한 은혜의 역사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의 인생에서의 마음과 생각은 찢어지지 않고 온전한 하나를 이루어서 혼란이 없이 하나님 앞에 분열이 없는 자아를 가진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가 한없이 넓은 것처럼 또한 우리가 아무리 그것을 이해해도 끝이 없고, 또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경험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끝이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드넓은 신앙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무한함만큼이나 넓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드넓은 지성의 가능성의 바다 위에서 우리는 작은 물거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바다 위에서 파도가 쳐서 잠시 솟아올라 하얀 거품을 토해낼 때 그 거품 위에 있는 한 방울의 거품이 되어서 그래서 잠시 있다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인생과 같습니다. 그 사랑의 바다에서 태어나 그 사랑의 바다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덧없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이신 것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아우구스투누스가 삼위일체를 모두 마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 이제 나는 나의 이 글을 기도로 마치고 싶사옵나이다’ 존경하는 동료 목회자에게 삼위일체를 시작했는데 끝날 때에는 하나님을 향한 기도로 끝을 냅니다. 긴 기도를 한 맨 끝에 마지막에 나오는 기도는 ‘당신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이해하게 하옵소서, 사랑하게 하옵소서. 죽는 날까지 그렇게 되게 하옵소서.’ 그러면서 위대한 삼위일체 마침표를 찍습니다. 그것이 위대한 저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기억하고 이해하고 사랑함으로써 여러분들이 행복하고 여러분들이 존재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