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10)
녹취자 : 허혜숙
우리는 어디로 달려가고 있는지 두 주 전에 말씀을 드렸고 지난 주에는 그러므로 성찰해 보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 관심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지 진정한 행복에 이르고 그 행복이 후회 없는 행복이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삶에 대한 우리의 고민은 행복하지 않기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지만 진정한 행복에 이를 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이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를 묻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한 가지 질문에 대답을 해야지만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누구인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여러분들은 ‘부시맨’이란 영화를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경비행기를 타고 가던 인간들이 코카콜라를 마시고 떨어뜨렸습니다. 부시맨들이 사는 마을에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논쟁이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을 쟁탈하기 위해 전쟁까지 벌어지는 코미디 같은 장면이 연출됩니다. 콜라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은 ‘나’ 사용 설명서입니다. 나를 어떻게 사용하고 살 것인가? 그런데 나는 특별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인간 속에 속해 있습니다. 인간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를 알 때 그것을 기초로 해서 나는 무엇을 위해 쓰여질 수 있는 사람인가를 생각할 때 인생사용서의 설명서를 작성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들은 ‘집게’하면 수많은 종류의 집게가 떠오릅니다. 의사들이 사용하는 핀셋 같은 종류의 작은 집게부터 시작을 해서 튀김 닭을 건져내는 기다란 집게로 해서 그 다음에는 큰 물건을 집어서 나르는 로봇이 쓰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기계에 매달린 집게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손가락만한 작은 집게에서부터 집채만 한 골리앗 집게에 이르기까지 종류는 각각 다르고 크기는 각각 다르지만 원리는 통일되어 있습니다. 양쪽에 무언가 힘을 주어서 이렇게 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옮기는 것입니다. 통일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용해서 그 통일된 집게의 용도를 가지고 얼마만한 크기의 어떤 종류의 물건을 옮기느냐에 의해서 서로서로 다른 집게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옮기는 물건이 평범하면 평범하게 만들면 됩니다. 그런데 말하자면 쇳물이 담겨져 있는 용기를 옮겨야 된다면 쇠가 1560도에 녹으니까 그 열을 견딜 수 있을 정도의 집게여야 되는 것은 너무 분명한 것입니다. 또 아주 딱딱한 물건이 아니라 매우 깨지기 쉬운 물건을 집으려고 한다면 집게는 아주 보드라운 물체로 만들어야 됩니다.
그러면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지식은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지식과 밀접하게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나를 알아야 하는데 나를 알기 위해서는 인간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보면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4절에 나오는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바라. ‘나’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 ‘우리’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그 질문과 함께 물어보아야 할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인가? 사실 그 질문이 그 오랜 세월동안 철학자들이 탐구한 질문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인식하는 내가 없는데 우주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내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 있기 때문에 우주가 무엇인가? 신은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 바이런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 시집을 늘 끼고 다녔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서른여섯 살에 죽었습니다. 여러분, 그런 이야기 들어봤을 것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니 내가 유명해 졌더라’ 그 사람이 ‘차일즈의 순례길’이라는 시집을 써서 그것이 유럽에 인쇄되어 팔리면서 그 사람이 그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까 유럽에서 어마어마하게 유명한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너무 잘생겼습니다. 그래서 귀족적인 외모에 마초적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어서 그 남자를 쳐다보다가 여자들이 기절을 했다고 합니다. 남자가 얼마나 잘 생겨서 그럴까요? 유요한 정도가 되어도 기절을 안 하는데 얼마나 잘 생겼으면 기절을 했을까? 그런데 또 아주 도도해서 그렇게 여자들이 좋아해도 눈길한 번 안 주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삶이 서른여섯 살에 죽습니다. 그런데 인생 전체가 그냥 말할 수 없는 미친 광기의 인생입니다. 수많은 유부녀들과의 불륜, 이복동생과의 정사, 심지어는 동성애, 그리고 결국은 무절제한 삶으로 죽습니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도 똑같았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그런 삶을 살았으니 영국 같은 보수적인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욕을 먹었겠습니까? 그런데 오스카 와일드 같은 사람이 옹호를 합니다. 아주 속 좁은 영국인들의 편견 때문에 천재 같은 사람이 자신의 대단한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편견 속에서 죽어갔다고 하는데 그를 옹호했던 오스카 와일드도 바이런하고 똑같은 삶을 삽니다.
문제는 결국 행복하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하는데 ‘내가 무엇인가?’ 하는 이것은 결국은 나를 만드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가 파악되는 것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커다란 집을 한 채 지어놓으면 그 집 안에 거실, 큰 방, 작은 방, 화장실, 창고, 다용도실까지 포함해서 거실까지 많은 방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 집에서 사람이 사는데 적합하고 편리하도록 모든 것들이 조직되어서 주택의 설계라는 것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했으면 각각 서로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도 대체적으로 참 집을 잘 설계 했네 이런 말을 듣는 것이고 자기에게는 편리할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편적으로 동의가 되지 않을 때에는 ‘아, 이건 아니지’ 하는 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인간을 내가 누구인가?,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맞아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만든 물건이 별로 없습니다. 예전에는 뜨개질도 하고 만든 물건들이 있었는데 요즘은 안 하니까 만든 물건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에게 만든 물건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만들 때 아무 의도가 없이 만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최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도 만듭니다. 무엇을 위해서 뭔가를 만들게 됩니다. 그러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은 만든 자의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졌는데 오늘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만드신 바라’ 그러면서 ‘선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선을 위해서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선’은 인류 철학사에서 매우 복잡하고 말하자면 논쟁이 되고 가장 많은 뜻을 담고 있는 말이 ‘선’ 일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그것은 하나님처럼 행복하고 좋은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모자라거나 결핍이나 넘침이나 모순이나 충돌 같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자신은 완전한 평화 속에 계십니다. 그래서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그런 분입니다. 그것이 ‘선’입니다. 그 선에 참여하도록 이 모든 세계를 지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세계에는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셔서 이미 주신 선한 것들을 더 선하게 만드실 수 있었으니 이것은 하나님이 선에 가능성을 주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혼자 하시는 일에 참여할 수 있게끔 하신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창조의 모든 세계가 완전하고 선했는데 타락하게 되어 악이 들어오게 됩니다. 악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에 의해서 선을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나쁜 것들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자, 몸이 선하고 완전합니다. 질병과 죽음 고통 같은 것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사라진 것들이 바로 악입니다.
너무 힘들어서 며칠 전에 병원에 갔습니다. 아무래도 너무 기운이 없어서 링거를 맞아야 되겠습니다 했더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하면서 링거를 다섯 병을 맞았습니다. 네 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는데 저는 뭘 맞는지를 물어봐도 잊어버립니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집에 들어와서 아홉시에 곯아떨어졌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아무데도 안 아픈데 이십대 초반에 아침에 눈을 떴을 때의 그 느낌이었습니다. 눈을 떴는데 깃털같이 가벼우면서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컨디션이었습니다. 아무데도 아픈 곳이 없었습니다. 여러분들도 나이 들면 여기저기 아구구 하실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 몸이 깃털같이 가벼우면서 20대 초반 10대 후반에 아침에 눈을 뜬 것과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날만 그랬습니다. 그래서 매일 이렇게 일어날 수 있다면 10년쯤 덜 살아도 참 행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하자면 우리가 그런 상태였는데 악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가 사람으로 태어난 근원이시고 목적이신 하나님을 모질게 대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행복이 거기 있는데 그 행복을 발로 차면서 사는데 행복해 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신 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실 때, 물론 성자의 중보 직에 의해서 우리가 창조 되었지만 그것을 예수그리스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나중에 생긴 이름이니까. 그런데 이렇게 말한 이유는 처음 창조될 때에는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성자를 통해서 성령 안에서 창조되었지만 두 번째 우리가 창조 될 때에 똑같이 성부에 의해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된 것입니다. 그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구속을 힘입어서 우리가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시 원래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따라서 그 선을 위해서 살 수 있는 사람으로 창조 된 것입니다. 재창조 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서 ‘우리’ 라고 하는 에베소 교인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더 넓게는 인류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지으신바 되었으니’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간이 무엇인가라는 것을 생각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특별한 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마스크를 모두 끼고 있습니다. 공장에서 마스크 기계에 부직포를 집어넣고 기계를 돌리면 수천 만장 똑같은 크기를 찍어내는 것입니다. 불량품 빼고는 모두 똑같이 나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이 모두 다 똑같은 인간으로 창조되되 내가 나일 수밖에 없는 독특성을 가진 인간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이야기는 우리를 인간으로서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똑같은 사람이 없는 그 사람으로서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모두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아마 그 관계는 공장장과 공장의 제품 같은 관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인간으로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나로 창조하셔서 인류 전체와 관계를 가지실 뿐 아니라 나 한 사람 한 사람과 관계를 갖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들판에 꽃들이 가득 피어있습니다. 종류도 알 수 없는 수백 가지의 꽃들이 피어있습니다. 저 지평선 끝까지 피어있습니다. 내가 그 모든 꽃들을 퉁쳐서 ‘꽃’ 그렇게 부르는 동안에는 그냥 꽃입니다. 그런데 그 꽃의 이름을 불러 줄 때에 그 꽃은 그 모든 꽃 가운데서 튀어 올라 내 품에 안기는 것입니다. 내 좋아함이 그것을 끌어안고 이름으로 내 정신 속에 기억이 되어서 이제는 그 꽃이 없을 때에도 그 꽃의 이름을 부르면 심지어 그 꽃의 향기까지 느껴질 정도의 감각이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 이렇게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알며’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라도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되고 인간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그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지식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는 답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쓸데없는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실존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일관된 삶을 사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시몬느 보봐르와 사르트르와의 계약 결혼에 관해서 너무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말할 수 없이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르트르가 그랬습니다. 처음부터 거기에서 도덕적인 삶을 기대할 수도 없었겠지만 그런 삶입니다. 결국은 자기가 누구인지 근원을 알지 못하고 인생을 산다고 하는 것은 기껏해야 지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시지프스가 그 돌멩이를 산꼭대기까지 올린 후 다시 굴러떨어지는 것을 주우러 내려가면서 시크하게 웃으면서 내려오는 것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의미를 규정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집요하게 물으면서 ‘나’ 라는 존재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설명되는 것이고 나라는 존재가 존귀한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군대가 가 있다고 칩시다. 별 네 개짜리 장군이 왔습니다. 결국 우리 모두 다 병사로 서 있는데 OOO 병장을 칭찬하면서 ‘너는 어쩌면 그렇게 뛰어난 사격술을 가지고 있냐’고 칭찬하면서 부대장을 불러서 한 달 동안 휴가를 보내주라고 특별한 대우를 해 줍니다. 그러면 둘 중의 하나입니다. 부대원들의 시샘을 받든지 사랑을 받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노골적으로 시샘은 못 할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그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나를 존귀하게 여기고 남을 존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소중하고 의미 있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 안에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지음 바 되어서 하나님을 향해 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도록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그리고 그 안에서 행복을 누리도록 지음 바 된 존재입니다. 그리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와는 다른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면서 그렇게 고귀하고 소중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남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누구인지를 하나님의 사랑이 가르쳐 주셨고 사람에게 받는 사랑은 어느 정도 그 사람을 교만하게 하여 그런 사랑을 못 받는 사람을 무시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은 신기하게도 자기가 사랑을 받으면 받을수록 다른 사람도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남을 사랑하기 마련입니다. 거기에서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결론을 내리면 그러면 어떻게 알게 되는 것일까요? 이런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 결국은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 나를 만드신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나를 사랑하셔서 내가 존귀한 사람이라면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을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 하나님이 뜻을 가지고 계시지 않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면 기대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실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은 사람에게 배신을 느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당연히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가 궁금해지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궁금해집니다. 그러면 하나하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면서 우리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씀하실까요? 이것을 위해서는 긴 이야기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홀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결혼, 자녀, 가정, 직장,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이 인류를 향한 뜻을 가지고 계시고 또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계시고 그것을 이루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서 사는 것, 거기에 인생의 갈 길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