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사 44:21).
녹취자: 이새봄
이사야 선지자는 이제 이스라엘을 위로하면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자인지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종, 에벳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획일적으로 같은 뜻으로 쓰이지 않습니다. 한쪽에서는 종이 자유가 없는 낮은 계급의 사람으로 일에 매여 노동하는 사람으로 불리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에벳이라고 하는 것은 특히 하나님과 관련될 때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탁월한 친교와 사랑의 관계를 나누는 대명사로 불립니다. 그래서 아모스서에 보면 당신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당신의 사랑하는 종에게는 숨기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시인이 경건한 사람들이 ‘제가 주의 종이오니’라고 고백했던 것은 하나님과 매우 특별한 교제의 관계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노예를 가리키는 말만은 아니다 이 뜻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이 일을 기억하라 이스라엘아, 야곱아 이스라엘아” 야곱은 북왕국 이스라엘에 대한 애칭입니다. 그래서 아주 친근할 때에 부르는 애칭입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같은 명칭을 되풀이하면서 ‘이 일을 기억하라’, 뭔가 장엄하고 중요한 어떤 사실이 도입되는 그러한, 말하자면 환기시키는 청유형입니다. ‘이 일을 기억하라’, 명령형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는 내 종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너는 내가 지었고 너는 내 종이고 너는 나에게서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히브리어에 자카르라고 하는 동사는 ‘기억하다’인데 ‘사랑하다’라는 단어와 일치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특히 그 동사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선택된 백성들에게 쓰일 때 말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려는 것은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입니다. 어제는 우리들이 무엇을 위해 사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실 때 선한 일을 위해 지으셨으니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지난주 설교의 요지였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보다 훨씬 더 구체적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우리들은 두 가지로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보편적 인간으로서 이 질문에 답하는 것입니다. 나는 나이기 전에 모든 공통된 본성을 가진 인간에 속해있습니다.
그래서 내 인생의 목적을 물을 때에는 항상 인간에게 일관적으로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에 대한 한 답이 지난주에 주어졌는데 하나님이 선한 일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다, 신자만 그렇게 창조하신 게 아니라 불신자까지, 모든 사람이 선한 일을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하게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지으신 창조 목적에 위배되면서 사니 행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행복하기를 원하니 그 행복이 어찌 참다운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인문학이 우리의 인생의 이해에 도움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렇게 나라는 개별적인 인간이 누구인지를 교정하기 전에 먼저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고민들, 그것을 우리에게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린아이에게 그리스신화를 읽혀주는 게 적합하냐 묻는데 단군신화도 들려주지 말아야죠. 동화도 지어낸 이야기니까 들려주지 말아야죠. 박을 타는데 무슨 돈이 쏟아지고 금이 쏟아집니까? 그리고 무슨 다리 부러진 제비가 무슨 박씨를 물고 옵니까? 이렇게 따지면 다 쓸데없는 이야기들입니다. 아무 문제없습니다. 그것을 자라면서 상상의 날개를 펴면서 선과 악을 배우고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의 다양한 견해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면 사고를 유연하게 하고 그리고 보편적인 인간성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판타지보다도 더 강력하게 선과 악의 대조를 가르쳐주는 장르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 문제없습니다. 다만 그런 것들을 가지고 올바른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 해석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주면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다 그렇게 크면서 이렇게 폭넓은 사고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궁극적인 인생의 목적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영원한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 영원한 목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이렇게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한 한 과정입니다. 비유를 들자면 기가 막힌 오페라가 들어왔는데 도저히 표를 살 수 없는데 사람들이 그 전날부터 극장 앞에 진치고 줄서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페라가 상영되는 그 극장 속이 천국이라면 우리는 그 천국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어떠한 방해와 제한이 없이 영원히 끊임없이 하나님을 즐거워하기 위해서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되느냐 이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에서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는 특권입니다. 그러면 그 희락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기쁨입니다. 그런 기쁨이 어디서 올까요? 결국 그 모든 기쁨과 희락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그것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라에서는 어떤 식으로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하게 되느냐. 거기서는 우리가 어떠한 제한도, 어떠한 속박도 없습니다. 당연히 거기에는 죄가 사라지고 우리의 온전한 지성이 있을 테니 표상 같은 것 없습니다. 그런 것에 시달리고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당신 자신은 당신의 일과 관련이 있고 일의 범주는 천상과 지상입니다. 하늘과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통해서 당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시는 그 계시의 증진을 통해서 그만큼 우리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을 엔조이(enjoy),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큰 기쁨을 누리는데 하나님은 끊임없이 당신 자신을 보여주어도 무한한 존재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아무리 많이 우리에게 알려주셔도 우리가 하나님을 다 파악했다는 날이 없으니까. 그런 날이 있다면 그날부터는 지겨울 텐데 그럴 리가 없으니까 거기서 매일매일 아침마다 새롭고 또 새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존재를 발견하면서 거기서 우리들이 극락의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입니다. 무한히 계속되어도 알려진 하나님보다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이 무한히 많으시기 때문에 우리가 무한히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목적이고 여기서는 바로 그렇게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연습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 이르기까지.
그 다음에 우리가 개별적인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살아갑니다. 그런 인간으로서 우리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있는가, 영원히 목적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고 잠세적인 목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선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 이제 개별적인 인간으로서 무슨 목적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를 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모든 인류에 속해있고 공통된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전체를 창조하신 그 안에 있고 인간은 세계 전체를 창조하신 그 안에 있고 전체는 하나님 안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각 범주에 따라서 목적을 정하는 것이 서로 모순을 일으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나는 개별적인 인간으로서 그렇게 하나님 앞에 독특한 인간으로 살아있는데 그것은, 나라는 인간은 다시 있은 적도 없고 또 다시 있을 적도 없으니 당연히 내 인생의 목적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반복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겠는가. 이것을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내 인생의 목적은 관계입니다. 관계. 관계 그 안에서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고 그 하나님 때문에 나와 관계 맺게 한 모든 사람들을 만족하게 하고 나와 관계를 맺게 하신 세상의 모든 만물을 만족하게 하는 그런 관계 속에 나를 두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의 이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이었습니다. 학문을 통해서 자기를 갈고 닦으며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큰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겁박하고 내치고 하는 그런 권력의 행사가 아니라 ‘치인’이라고 하는 것은 다스릴 치(治), 사람 인(人)인데 사람을 다스리는데 무엇을 향하여 다스리느냐? 그 각 사람이 자기 위치에 있도록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기치인’이라고도 하지만 ‘수기안인(修己安人)’이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갈고닦아 사람들을 각자의 자리에 있게끔 도와주면 그 안에서 모든 사람이 안인(安人), 평안함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기의 결심문 속에서 나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거룩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라고 했을 때 그 결심문 제 1번입니다. 그 결심문 제 1번에 그 선언은 바로 결국 자기 자신의 삶에 뚜렷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그를 구원하기 위해서? 왜 구원합니까? 뭐 때문에 그를 구원해야 합니까?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가엾어서? 아닙니다. 구원받지 않고는 죽을 때까지 그 인간이 자기자리로 못 돌아갈 것이니까. 그는 불행하고 그를 만드신 하나님은 가슴 아프고 그가 자기자리에 있지 않은 것을 보면서 그와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이 괴롭고 불행하고 심지어 자연의 모든 만물들도 함께 탄식할 것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뒤집어서 이야기하면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그 인간이 다시 죄 때문에 그 자리로 안 돌아간다면 사실 전하나 안 전하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구원을 받을 것 아니냐? 하나님은 성경에서 그런 식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구원은 우리가 오늘을 구원받은 자로 합당하게 살아갈 때 그 구원의 가치는 빛나는 것입니다. 극도로 내가 오늘 예수 영접하면 평생 개처럼 살아도 천국가지 않습니까? 이렇게 묻는 것은 자본주의적인 탐욕입니다. 그것이 그렇게 되고 안 되고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오늘 하나님이 예수를 믿게 하신 것은 오늘 살아있는 동안에 내가 당신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에 내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관계가 무엇입니까?
첫 번째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내가 독특한 한 인간으로서 ‘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잖습니까?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이 ‘내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할 때 그 ‘내’는 내가 아닙니다.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계 역사에서 내가 유일한 사람입니다. 각자가 다 ‘내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결국 그 고백은 그 사람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 하나님’이라고 부를 때에는 그 사람의 다른 인생입니다.
그 관계가 내 인생에 영원한 목적을 향하는 하나의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다양한 관계들을 만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제일 중요하겠죠. 그 가족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할 사람으로서 선을 위해 창조된 보편적 인간으로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나 때문에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이 끊임없이 고통을 받고 있다면 난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가족들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배반하거나 잊어버렸다, 그것은 더 잘못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올바르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의 삶의 목적이 정해졌다고 하면 그러면 가족들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이 내가 예수를 믿을 때 내가 가장이면 가장으로서 참 자리로 돌아가고 이 사람을 내 아내, 내 남편, 내 아들, 내 딸 각자를 자기자리에 두게 하기 위해서 나를 예수 믿게 만든 것입니다. 그것을 실천하는 원리가 끊임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가족들을 돌보고 진리의 말씀대로 질서를 찾아가게끔 도와주어서 그래서 자기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서 눈물로 그 회심을 위해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 믿고 복 받게 하기 위해서?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결코 자기자리로 돌아갈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자기자리를 모르는 사람이 자기자리를 모르는 또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룰 때 그 밑에서 자손들이 태어날 때 그들이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더욱이 그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을까? 그들이 하나님을 엔조이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될 필요를 느끼게 됩니다. 회심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입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다른 사람들과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솔직히 성경은 가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가족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게 훨씬 더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할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생태계가 인간의 탐욕으로 저렇게 끔찍하게 약탈당하고 모든 만물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그때 내가 살아있는 것이 그 고통 받는 것들을 제자리에 돌려놓아 눈물 흘리지 않게 해주는 데에 티끌만큼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인생의 구체적인 목적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써봅니다. 종이를 놓고 내가 어떤 사람인가 써보십시오. 그리고 나에 대해서. 나의 아내는 나에 대해서 얼마나 나 때문에 괴로운가, 내가 무엇으로 무엇 때문에 자녀들에게 지속적인 고통을 주고 있는가. 반대로 내가 이렇게 살아감으로써 내 남편이 나 때문에 얼마나 행복한가, 내가 교회에 있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기쁨이 되는가. 이러면서 스테이트먼트를 써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물건 하나 살 때에도 수없이 메모하고 인터넷을 찾으면서, 그래봤자 몇 십만 원짜리 하나 사면서도 그렇게 신중하게 결정하는데 이것은 자신의 인생에 행불행이 달린 문제잖아요. 써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자신이 어떤 품질의 사람인지를 생각하면서 그러면서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되는 것이죠.
그 뿐만이 아닙니다. 나에게 직업이 있잖습니까? 이 직업이 확실한 것 하나는 밥 벌어먹기 위한 것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에게 이 직업을 주신 것은 무슨 뜻이 있을까, 이것을 통해서 정말 나를 수련하고 이웃을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데에 이바지하고 있는가, 우리 이런 것을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재능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남에게는 없는 놀라운 재능들이 있습니다. 없다고 생각되면 발견하지 못했거나 기회가 없었거나 개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5세기에 피렌체에서 문학, 그다음에 예술의 천재들이 폭발하듯이 쏟아져 나옵니다. 불과 한 2십여 년 사이에 스물한 여덟 명의 세계적인 대가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문학으로는 단테와 같은 사람으로 시작해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라파엘로, 건축의 브로넬레스키, 미술의 마사초 이런 사람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옵니다. 여성은 한명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 시대에 여성은 정말 재능이 없는 그런 무능한 존재였을까요? 아닙니다. 사회가 여성들에게 기회를 안 준 것입니다. 그래서 없었던 것입니다. 기회를 주지 않으니까 나타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재능도 그러한 원리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주위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서 재능을 발굴하고 또 격려를 받고 그러면 너무 좋겠죠. 그런데 그런 환경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때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발견하면서 자기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면서 살아야 합니다. 왜? 그 재능이 바로 그 사람이 독특하게 하나님을 섬기라고 주신 재능입니다. 왜 이렇게 되는지 나중에 알아보십시오. 그렇게 재능을 가지고 그것에서 인생의 보람을 느끼면서 즐겁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쉽게 이야기하면 나라를 위해 기꺼이 죽겠다는 순국의 정신이 있다고 할지라도 삶이 하나하나가 진짜로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삶인지를 묻지 않으면 구호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다고 그렇게 눈물로 기도하고 집에 가서는 폭력을 휘두르고 직장에 가서는 손가락질을 받고 자기 자신도 자기가 무슨 재능이 있는지를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그렇게 지옥 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우리는 보편적 인간으로서는 선한 일을 위해 태어났고 개별적인 인간으로서는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 사람, 가족, 교회, 자기의 노동, 그리고 자신의 재능,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기만의 독특한 삶을 살아가도록 그 속에서 보람을 느끼도록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는 이것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공급해주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한번 조용히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과 가족과 교회와 내 이웃들의 만족도가 어느 정도인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나를 통해서 정말 사람들이 하나님의 정하신 질서로 돌아가고 있는지 거기에서 내가 주신 재능을 최대한 사용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있는지 다시 한번 묻고 인생의 갈피를 잡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