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양을 먹이라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요21:17)
녹취자 : 김경애
저는 이 본문을 거의 설교한 적이 없습니다. 대부분 첫 번째 ‘네가 사랑하느냐’를 물으실 때를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물으셨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에 약간씩 다른 단어가 쓰이고 있지만 그러나 의미는 대동소이합니다. 그리고 아주 심각한 그리스 철학의 Terminology를 여기에 도입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사랑하느냐를 세 번을 물으신 것입니다. 그 마지막 세 번째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근심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이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근심했다는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째 물으셨을 때만 해도 베드로는 그렇게까지는 생각되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질문을 던졌을 때 주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이 불신 받고 있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매우 염려되었던 것 같습니다. 가능성은 둘일 것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잘 몰라주시던지 두 번째는 자기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주님이 보실 때는 아니었던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신뢰가 매우 두터웠으니 전자로는 생각될 수 없고 계속되는 세 번의 예수님의 이 질문은 아마도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밑바닥에 주님이 보실 때는 안 사랑하는 것이 있나보다 하는데서 오는 염려였다고 저는 해석합니다. 어쨌든 그런 염려가 있었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염려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휩싸는 제일 큰 근심이 무엇입니까?
저는 월요일 저녁에 부산을 다녀와서 예배당에 와서 기도를 하면서 정말 주일날 은혜를 많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국에 어쨌든 많은 프로그램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이었는데 그러면서 옛날의 한국교회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이규현 목사님이 그러셨는데 21년 만에 호주의 목회를 마치고 돌아오니까 아주 눈에 띄게 변한 것이 있는데 경제성장이나 도시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열렬한 기도가 현저히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오신지 11년이 되었으니까 떠나갈 때가 32년 전입니다. 32년 전으로 시계를 거꾸로 돌리면 30년 전이면 1981년도가 되고, 2년 전이면 1979년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굉장히 뜨거웠습니다. 제가 정확히 기억나는 것이 1983년도에 제가 우체국장을 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안 믿어지겠지만 제가 송추우체국에 있었으니까 교사들이 기도하러 도봉산 같은 곳에 같이 갔습니다. 그쪽에도 기도원들이 있어서 갔는데 여러분들은 안 믿어지겠지만 1983년도에 금요일이 되면 온 계곡에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때 벌써 약간의 회의를 느꼈습니다. 뭐냐 하면 12시에 기도하고 그 다음에 통닭을 먹는 것입니다. 어쨌든 분위기상으로 볼 때 70년대 중반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제가 회심할 때가 75년도에 회심했으니까 그때는 진짜 피 끓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시간을 뒤로 돌리면 1962년도에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니까 1965년도쯤에는 모든 교회에 울부짖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특히 개척한 교회에는 모두 나는 주일 학교 때 전도사님한테나 선생님한테나 설교에 은혜를 받았던 기억은 안 납니다. 내가 눈물을 흘렸던 기억도 안 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울었습니다. 아주 생생합니다. 그것이 불과 30년 전입니다. 그 목사님의 연배가 저하고 두 살 아래인 것 같은데 마지막 끝물을 보고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까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애끓는 기도가 없어진 것입니다. 특히 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기도운동은 순복음교회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교단을 불문하고 모든 교회에서 울부짖는 기도가 있었고 그때도 제가 생생하게 기억하는데 도봉산, 우이동 삼각산 골짜기에 가면 이 골짜기에서 기도할까 하면 등불이 다 켜있습니다. 모여서 와글와글 기도합니다. 저 골짜기에 가볼까 하면 와글와글 모여 있습니다. 좀 더 위로 올라가볼까 하여 올라가면 거기도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 있습니다. 불과 3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던 때를 생각해보면 특징이 많이 있습니다. 전도도 많이 했고, 말씀도 달콤했고 등등 많이 있는데 이 문제와 관련해서 정리해 보면 기도를 많이 하던 때입니다. 많이 한다는 것이 시간적인 길이로 많이 한다는 것이 아니라 딱 앉으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서러운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친정엄마 얼굴을 보면 눈물이 왈칵 쏟아지듯이 그냥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 그냥 기도할 준비가 없이 꽉 찼던 보의 물이 터지면서 쏟아져 나오듯이 그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 대부분 모든 교인들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특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열린 교회에서도 눈물 없이 예배가 끝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것들이 너무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 사라진 가장 커다란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교인들이 그런 신앙을 본 예가 드물어진 것입니다. 교인들이 그런 신앙을 목회자를 통해서, 그리고 구역장을 통해서, 그리고 장로님들을 통해서 그런 것을 보면서 자기보다 신앙이 더 돈독한 사람들이 저렇게 깨진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것이구나! 그런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러놓고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우리 교회에 있다가 간 부교역자 이야기입니다. 이름은 이야기 안 하겠습니다. 개중에 아주 잘했고 지금도 아주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청년들하고 개인적으로 이야기하면서 ‘나는 우리 목사님이 신학교 다니실 때 영혼이 불쌍하다는 생각 때문에 학교 담장에 엎드려서 막 우셨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전도사가 되었는데도 그것이 무슨 심정인지 잘 모르겠다.’ 고 했습니다. 떠나갈 때 쯤 되어서 ‘이제는 조금 알듯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이 결국은 누구에게서 보았을 때 느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것을 누가 가르쳐 주었느냐 하면 전기를 읽으면서 그 청교도들의 전기를 읽는 것을 한동안 업으로 삼을 정도로 읽었는데 그 속에서 눈물이 없는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오웬도 어떤 글을 쓰고 나서 ‘솔직히 이 글은 나의 많은 눈물과 기도 속에서 쓰였다.’ 그런 것을 보면서 저의 신앙생활 자체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다행인 것은 회심했던 교회가 복음의 빛은 조금 약했지만 그렇게 통회하며 기도하는 어른들이 있었습니다. 권사님들, 장로님들, 전도사님들 그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으냐하면 베드로는 근심했습니다. 여러분의 근심은 무엇입니다. 우리의 근심은 수도 없이 많지 않겠습니까? ‘집은 어떻게 하나? 모아놓은 것도 없는데 어떻게 하나?’ 심지어는 아내 몰래 적금을 깨서 비트코인에 쏟아부은 사람도 많다는데 ‘그것도 떨어지는데 저것은 어떻게 하나?’ ‘일론 머스크도 일론 브루투스가 되어서 지난 분기의 실적 25%를 비트코인을 팔아서 채워 넣고 이러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근심거리가 수없이 많습니다.
근심은 두 가지인데 주께로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근심이 있고 멀어지게 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세상의 근심은 근심하기 시작하면 주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근심 즉 내가 예전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내 마음 깊은 저 밑바닥에는 가짜가 있습니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주님이 네가 날 사랑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아주 명쾌한 자신감이 없는 것입니다. 진짜 자신이 있으면 세 번이 아니라 백번을 물어도 아주 명징하게 대답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근심하는 것입니다. 그런 근심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근심입니다. 영혼이 살아있는 자만이 근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없을 때 어떻게 하게 됩니까? 주님께서 나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도록 은혜를 주셔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기 때문에 근심 끝에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생명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근심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진짜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어린 나이에 교수가 된 34살부터 생각해 보니까 잠깐입니다. 44살 때에는 교회개척하고 3년이 되어서 교인 80명 데리고 그냥 애쓰던 때였고 그 후에 10년 뒤에 53살 때에는 여기로 옮겨와서 경제적으로 고통 받을 때였고 그리고 한번 건너뛰고 나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3년 전인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은 금방 흘러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산에 가보면 금융회사 국장하던 사람이나 아니면 중소기업을 다니다가 은퇴한 사람이나 자영업 조그만 슈퍼를 하다가 접은 사람이나 다 비슷비슷하게 등산하고 비슷비슷하게 내려와서 김밥 먹고 비슷비슷하게 지냅니다. 무슨 특별한 낙이 있겠습니까? 우리의 낙은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이 힘을 주실 때 영혼을 위해, 주님을 위해 눈물로 사역하고 그리고 나이가 들었을 때는 삶의 양상이 바뀌는데 그것이 왜 허무합니까? 그것이 왜 허무합니까? 아내와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데 젊을 때는 기쁘고 늙으니까 외롭다면 둘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지 늙어서 외로운 것이 아닙니다. 결국 늙어서 외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파스칼에 의하면 회피할 수 있는 거리들이 점점 멀리 떠나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왓슨도 이야기하는데 ‘네가 계속 죄를 버리지 않으면 언젠가는 죄가 너를 버릴 때가 있다.’ 죄를 지을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늙어 가면 되겠습니까? 너무 마음을 쓰지 마십시오. 그리고 너무 쓸데없는 일에 열심히 살지 마십시오. 그리고 늙어가는 것도 받아들이고 나이 들어가는 것도 받아들이고 그러면서 이 고민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나의 근심은 이것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어릴 때도 그랬고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합니다. 이런 마음에 나에게 없다면 내가 살아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나의 죽는 그 순간이 최고로 주님을 사랑하는 순간이 되기를 원하옵나이다. 아멘.’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 생각해 볼 것은 자신의 진심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아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나의 판단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거짓말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주님이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시면 그것이 맞는 말이고 나의 생각이 틀린 것입니다. 판단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의 화려했던 삶을 많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노인네들의 심정입니다. 늙는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것을 많이 생각하지 말고 판단을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 제가 참 부족했습니다. 한 번 더 기회를 주신다면 잘할 수 있겠는데 그것밖에 못했습니다. 좋은 것은 주님 때문이고 나빴던 것은 제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하면서 주님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 의에 빠지지 말고 그렇게 하면서 내가 무엇을 하든지 이전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그리고 주님이 알아주실 그때까지 내가 충성스럽게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면서 산다고 하는 그리고 주님이 알아주시는 것이 나에게는……. 시편에서 보면 의인에게는 하나님을 알아주시는 것이 위로이고 악인에게는 하나님을 알아주시는 것이 공포입니다. 왜냐하면 의인에게는 그의 억울함을 하나님이 풀어주시는 날이고 악인에게는 들통 나는 날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주님이 나를 알아주신다는 사실이 위로가 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두려운 사람이 되겠습니까?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주님이 마음을 따라서 내리는 주님의 판단을 받아들이면서 살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내 양을 먹이라’ 입니다. 무엇을 먹인다는 말이 특별히 양에게 적용될 때에는 다른 짐승과는 다른 개념을 갖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문맥에서 보면 소나 말이나 이런 가축 수에 비해서 양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그리고 말은 대부분 그 당시에 식용이 아니라 전쟁을 위해서 쓰였고 소는 있지만 그러나 그쪽 지방의 소들이 우리나라의 소처럼 맛있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양이 그들의 주된 육식원이었습니다. 그러니 양을 키우는데 성경에서 소는 힘의 상징이고 말도 힘의 상징입니다. 말은 힘차게 달리는 것의 상징이고 소는 힘 있게 밭을 가는 것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 양은 사실 의지할 데가 없는 짐승으로 묘사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이 소나 말이라고 부르지 않고 양이라고 부르는 가장 중요한 개념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야생으로 살 수 없고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존의 개념, 의지의 개념이 있습니다. 그것을 표현하기 너무 적합하기 때문에 양이라는 개념을 차용해온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양 예수라고 할 때도 그런 것입니다.
양의 개념은 신학적으로 우리의 죄를 위해 대속해 줄 구속양이라는 뜻도 됩니다. 왜냐하면 양이 중요한 제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또 하나를 보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그 예수가 하나님을 의존한다는 의존의 콘셉트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이 하나님이시면서 육신을 입고 계신 동안에 그 인격의 특징이 아버지를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행하지를 않고 아버지께서 주시는 능력이 아니면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당신께 의존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 인간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첫 번째 교훈이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그 아버지를 내가 의지하는 것처럼 너희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신학적으로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부활해서 승천하신 다음에도 어린 양으로 불립니까? 그것은 천국에서 성자가 성부를 의지한다는 개념에서 뿐만이 아니라 말하자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을 그렇게 전심으로 의지하고 사셨기 때문에 구속을 이루셨다는 신학적인 한 상징인 것입니다. 어린 양이 무엇이 좋습니까? 제대로 자란 양이어야지 팔릴 때도 비싸게 팔리고 고기도 맛있을 것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어린 양이 뭐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그렇게 따지면 성경이 항상 양을 긍정적으로만 묘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 53장에 우리는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다. 멍청하고 자기 고집이 센 피조물로 언급이 됩니다. 그래서 어떤 상징을 쓸 때에 모든 것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중에 우세한 개념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이 성경의 상징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양이 인간을 의존하면서 사는 존재인데 어린 양은 이중으로 의존해야 합니다. 엄마 양을 의존하고 돌보는 주인을 의존해야 하는데 돌보는 주인이 어린 양을 더 극진히 보살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존의 그림이 그 속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단순한 제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내 양을 먹이라고 했는데 앞에 보면 어린양이 나오는데 어린양, 내 양, 내 양, 그렇게 나오는데 대화하는 중에 예수님이 첫 번째는 어린양을 먹이라, 큰 양을 먹이라, 늙은 양을 먹이라. 그런 식으로 화법을 하셨겠습니까? 그러니까 ‘어린’이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어쨌든 스페스피커티브 라고 해서 뒤에 있는 어떤 사물들을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그런 스페스피커티브 같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이 세 단어가 각기 무슨 차이가 나는 것이냐고 물을 것이 아니라 양 속에 모두 ‘어린’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리다는 개념이 무엇이냐 하면 판단력이 연약하고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누군가에게 특별한 돌봄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양입니다. 예수님이 보시면서 목자를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는 것을 보며 마음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셨던 그 장면입니다. 네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마다 은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사가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들에게 강력하게 말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혼을 돌보는 일에서 도피할 수 없습니다. 도피할 수 있으면 그것은 하나님을 덜 사랑하는 것입니다.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잠을 자든지 아침에 눈을 뜨든지 밥을 먹든지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모두 목회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구역장을 해라. 구역장이 안 되면 ‘내가 아니면 누가 돌보랴’ 라는 양떼가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지 새겨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일에 보람을 느끼고 그 일을 통해서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매번 질문을 받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 앞에서 묻는 것입니다. 간절히 영혼을 섬겨보십시오. 그래서 백스터가 말한 바에 의하면 남의 영혼을 위해 울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울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반드시 다른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음 시간에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