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산함으로 얻는 구원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딤전 2:15)
녹취자: 이은정
여자가 해산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 그랬는데 제가 이 구절을 읽으면서 궁금한 건 그러면 남자는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가르침이 사실은 결혼에 대해서 가르치려다가 이 가르침이 나온 게 아니라 문맥 자체가 2장 전체가 기도에 대해서 가르는 것입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하며 어떨 때 기도가 안되고 어떻게 해야지만 간절한 기도가 될 수 있느냐를 이야기하다가 마지막 끝에 여자 이야기가 나오면서 여자들이 해산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도 몇 가지 들을 해석을 내놓는데 그래도 가장 여태까지 많은 사람에게서 설득력을 얻고 있는 해석은 여기서 해산은 다른 게 아니라 아이를 낳는 것을 말하는 거다. 물론 아이 못 낳는 사람은 구원을 못 받나 그렇게 생각을 할 수도 있고, 결혼을 안 한 사람은 아이를 못 낳는데 그러면 그거는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런 우스운 질문이 나올 수 있지만 그런 이야기는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구원은 우리가 칭의로 말미암아 얻는 일회적 구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성화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른다는 말, 혹은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도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갈망한다는 말, 이런 것 들은 성화, 혹은 구원의 모든 완결을 갈망하는 성도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결국은 성화입니다. 해석해 놓고 보면 ‘여자가 아이를 낳음으로써 진짜 구원받은 사람답게 된다.’그렇게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점은 사실은 해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해산한 다음에 해산한 엄마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해산하기도 쉽지 않겠죠? 아이를 가져서 아홉 달 15일 동안 뱃속에 넣고 구토를 하고 이러면서 보내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 것이겠습니까.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나서 아이를 낳습니다) 제가 수술을 하고 병원에 누워있었습니다. 아파서 죽겠는데 어느 청년 출신의 젊은 여집사가 와서 나를 위로합니다. 위로하는 방식이 좀 맘에 안 들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목사님, 많이 아프시죠?” “많이 아파.” “진짜 많이 아프세요? 많이 아프시겠죠.” “그래도 목사님 꼭 기억하세요. 애 낳는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애를 안 낳아봤지만, 자신은 이렇게 수술을 당해봤나?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위로의 방식이 별로 맘에 안 들었습니다. 그냥 뒤엣것은 얘기 안 하고 ‘많이 아프시겠어요.’라고 (위로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다음 주에 퇴원하고 나왔습니다. 저기서 교인이 걸어오는 겁니다. “목사님 그렇게 그렇게 아프셨다면서요?” “예, 간신히 죽다가 살아서 퇴원하고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 그거 목 뒤로 확 염증이 생겨서 증상이 나타났죠? 네. 그리고 결국은 편도선 두 개를 잘라내신 거죠?” “네.” “아휴, 목사님 그거 무지무지하게 아파요. 그거는 걸린 사람 아니면은 몰라요.” 자기가 그래서 목 뒤에까지 열꽃이 퍼져서 식도까지 내려가서 자기도 그렇게 수술했는데 정말 죽는 것 같았다고 (회고하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진짜 제가 그랬습니다. 심지어 여기는 수술을 네 시간을 했는데 이거보다 한 시간 수술한 이 편도선 수술이 죽을 것 같았습니다. 너무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사람은 이제 공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지 위로가 됩니다. “많이 아프죠? 정말요? 그거 아무것도 아니에요. 애 낳아보세요. 얼마나 아프게요.” 그런데 내가 목회를 하고 나서 보니까 그것도 사람마다 달랐습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아팠냐고 그러니까. ’아팠지만 뭐 견딜만했어요.‘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24시간 진통을 하고 죽을뻔하고 결국은 까무러치고 아기를 못 낳고 제왕절개를 해서 낳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해산하는 수고도 그렇게 아프고 힘듭니다.
그런데 해산 한 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이를 기를때) 이놈을 밥을 먹여야 하니까 (힘이듭니다) 우리 이슬이는 키울때 (너무 힘들었는데), 우리 영례는 너무 쉽게 길렀습니다. 밥을 먹으면 아침까지 내리자고, 자다가 낑 하면은 잠결에 250CC를 타서 눕히고 젖꼭지가 구멍이 작다고 항상 애가 짜증을 냅니다. 그래서 젓가락을 연탄불에다가 달궈서 넣고 젖꼭지 구멍을 푹 뚫어버렸습니다. 그러니깐 누르면 줄줄 나옵니다. 그러니 150인가 250CC를 타서 자다가 낑 거리면 잠결에 흔들어서 입에다 이렇게 대줍니다. 입에다 대주고 껌뻑껌뻑 졸다가 잠이 듭니다. (저도 같이 잠이 듭니다.) 조금 있으면 파앙! 하는 소리가 납니다. 기겁해서 놀라서 깨면 젖꼭지를 너무 빨아서 진공상태가 됐다가 탕 놓으면 폭발 소리를 내면서 절로 굴러떨어지는 것입니다. 이슬이는 끌어안고 먹여주지 않으면 우유를 안 먹습니다. 그리고 낮에는 실컷 자고, 밤에는 놀자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 정신을 차리기 힘듭니다) 나는 그냥 그때만 해도 성화가 덜 되서 나는 내일 주일 해야 하니까 가서 자야 한다라고 하며 무조건 이불 뒤집어쓰고 나는 자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내가 고생했습니다. 그 정도로 힘듭니다. 미운 4살 되면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면서 온갖 물건을 다 뒤집어놓으면서 난을 일으킵니다. 7살 되면 슬슬 반항하면서 (힘들어집니다) 어저께도 우리 아들이 전화가 와서 그러더랍니다. “엄마,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악해? 왜 그랬더니 동준이가 놀이터에서 놀고 밥을 먹으러 안 들어오더랍니다. 동준아 밥 먹자 우리 가족 식사해야지? 그러면 “싫어요. 저 더 놀 거에요.” “아니, 엄마도 기다리고 누나도 기다리고 엄마도 기다리는데 밥을 먹고 또 나와서 놀자.” “싫어요. 저 계속 놀 거예요.” 그래서 “너 정말 말 안 들을래?” 아빠를 탁 쳐다보더니 “아빠 내 몸으로 내가 노는데 왜 아빠가 왜 참견이에요?” 이제 미운 7살의 증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청소년이 되보십시오. 그 골치 아픈 거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지 않습니까?) 갑입니다. 갑. 평~생을.
그래서 여기서 해산한다고 하는 것은 아이를 그냥 낳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 낳은 아이를 기르고 돌보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게 무슨 뜻이냐면 성화가 된다는 뜻인데, 편지를 쓸 때 받는 대상이 경건한 성도들입니다. 경건한 성도들은 범사에 어려움이 올 때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까. 결국은 아이를 기르는 과정이 얼마나 힘든 과정인가, 그리고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야 하는 과정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기르면 사람이 안 됩니다. 일반적으로. 아주 특별한 경우는 부모가 팽개쳐도 훌륭한 애가 되는 경우가 있지만. 그거는 야생에다가 닭이 알을 낳는데 마침 햇빛을 잘 받아서 저절로 부화하는 확률만큼 적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안타깝게 자녀를 위해서 애쓰는 몸부림치는 과정을 통해서 경건한 사람들이니까 결국은 하나님을 안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한계를 느끼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된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면서 그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안 한다고 하면 믿음이 없거나 아이를 티끌만큼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어서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지 (아십니까?) 아이를 잘 기르자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제 이것을 영적으로 적용해 보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쓴 사람도 바울이고, 고린도전서를 쓴 사람도 바울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서에서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반대라고 하는 얘기는 무엇이냐 하면 영적으로 자녀를 낳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를 개척했지 않습니까. 어쨌든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서. 개척하기 직전에 있었던 일이 아덴에서 복음을 전한 거였습니다. 철학자들과 함께 토론하면서 몇 사람이 예수에 관심을 갖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도바울의 전도 여정에서는 너무 수학이 거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것을 철학적 논쟁에서 그래도 그 철학자들이 몇 명 예수를 믿게 되었든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에 대해서 변증적 전도의 모범 사례로 뽑고 있지만, 저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고린도전서를 쓰면서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고린도로 올 때 - 직전에 아덴에 있었습니다. - 고린도로 와서 “내가 심히 두렵고 떨렸노라” 자신의 전도 여행에서 그렇게 실패한 사례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에 가면서 내가 과연 여기서 제대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울 수 있을까라는 떨리는 마음으로 돌아오면서 아덴에서 결심한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및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노라”하면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고린도 교회가 서게 된 것입니다.
그 고린도 교회가 선 것이 바울이 해산을 한 거라면 이후에 지겹도록 속을 썩이는 교회가 고린도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향해 사도바울이 3통의 편지를 씁니다. 고린도전서, 고린도중서, 고린도후서. 그런데 그 중서가 없어졌습니다.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분명히 편지를 쓴 것입니다. 한 교회에 3번이나 편지를 썼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문제가 많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바울을 보고 예수도 못 만난 사람이 무슨 사도냐 자칭 사도 아니냐 그렇게 타박을 했는데 그때 사도바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고린도 교회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부모가 자식을 돌보는 것처럼 자기가 고린도 교회 교인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서 허비할 정도로 자기 자신을 그들을 위해 주었음을 언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은 모든 환경을 사용해서 우리를 성화시키십니다. 시험과 때로는 심지어는 유혹, 때로는 환난, 질병 그 모든 것을 통해서 (성화 되게 하십니다) 그런 것들을 놓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을 의지하면서 성화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성화시키는 가장 뛰어난 방법 중의 하나가 영혼을 섬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꼭 구역장을 하라 그 얘기만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사를 하라 그 얘기만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그래서 무언가 영혼을 위해서 전도를 위해서 그리고 또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 사랑으로 섬기는 그 과정을 통해서, 그 사람은 해산의 수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목회자가 목회하면서 성화가 안 되는 것은 100% 목양을 잘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목회하면서 성화가 더딘 것은 목회를 성의 없게 하기 때문에 그럽니다. 목회를 정말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전심으로 목회를 하면 그것은 영혼을 해산하는 수고입니다. 거룩해지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룩한 일을 하면서 사람은 세속적으로 변해간다면 그것은 일하는 방식이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동기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여러 직원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영혼을 섬기십시오. 영혼을. 구역장을 하는 게 너무 힘들면 장년 교구나 청년 교구 가서 내가 그 그릇은 안되니까. 일대일 양육이라도 하게 해달라고 하십시오.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영혼이 있습니까?
어제 내 책에 열렬한 독자라고 하는 전도사 한 사람이 기자들과 함께 왔습니다.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는데 가족구원을 읽으면서 자기 가족들은 구원을 받았는데 친척은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했답니다. 그 책을 읽고 깊이 감동을 받고 친척도 내 책임이구나 그러고 나서 친척을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하니까 소원했던 친척들을 가까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해야 하니까 외삼촌이고 외사촌이고 도통 왕래 없이 지내던 사람을 찾아다니게 되고 겸손해지게 되고 가슴에 품고 기도하니까 그들의 영혼이 정말 가엾어 보여서 복음을 전했더니 그중의 몇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더라라는 얘기입니다. 그런 마음입니다.
그래서 내가 글을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리고 기계를 잘 다루고 사람을 잘 웃기는 코미디를 할 수 있고 그다음에 테이블을 예쁘게 차리고 하는 것은 은사입니다. 그래서 안 되는 사람은 안됩니다. 기자가 모였을 때 "목사님 우리가 목숨을 걸고 공부하면 그래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안될 사람은 목숨을 걸어도 안 됩니다. 전도사님이 지금 목숨을 건다고 김연아 뒤를 이을 수 있겠어요? 확 다가오네요. 안되는 것은 안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은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 모든 사람은 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것도 은사가 아닙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면 누구의 영혼이든지 불쌍히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섬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섬기려고 하면 세상에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사회적으로도 내가 저보다는 낫고, 그리고 나이도 내가 저보다는 많고, 그리고 내가 저한테 빵 한 쪼가리 빌린 적 없습니다. 자기는 수없이 와서 돈도 빌려 가고 내 시간도 빼앗고, 근데 왜 양 떼들은 그렇게 갑질을 하는 걸까요? 심방을 가면 안 받겠다고 하고, 전화를 걸면 이리저리 뺀질거리면서 피하고 도대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은 적이 언제가 있습니까? 당장 집어치우고 싶습니다. 치사해서 못 해 먹겠다고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기게 하는 것은
(찬양)
예수 사랑 나의 사랑
내 맘에 넘쳐
형제를 사랑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 영혼이 보입니다. 너무너무 불쌍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합니다. 거기서 은혜가 솟아나게 하십니다. 그 사랑으로 그것을 극복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교구든지 교회학교든지 목회자가 누군지 몰라도 두 가지를 보면, 그 부서의 영적인 은혜가 어느 정도인지를 잴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예배입니다. 불시에 들어가서 예배드리는 것을 보면 어떤 태도로 예배를 드리는지 보면 영적인 기류가 확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 모임은 저 목회자가 정말 잘하고 있다 몸부림치고 있다. 그리고 영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라고 느껴집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아니다. 벼락을 맞는 것 같은 변화를 목회자가 받기 전까지는 큰 성과는 없을 것이다라고 느낍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째 장면은 뭐냐하면 교구로 말하자면 구역장모임이고, 부서로 말하자면 교사모임입니다. 매주 눈물바다가 되야 합니다. 그게 결국은 그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내면서 영혼을 섬기게 하는 동력이 자기 안에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영혼을 섬길 때만큼 자기를 꺾어야 하는 때가 없습니다. 영혼을 섬겨야 하는 때만큼 자기를 포기해야 하는 때가 없습니다. 영혼을 섬겨야 하는 때만큼 낮은 자리에 내려와서 남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때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아가 펄펄 살아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언어로 표현합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 보기에는 자신감 있는 태도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보기에는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그려보세요. 펄펄 뛰는 고등어입니다. 제주도에 내려가면 제주도에서는 고등어회를 먹습니다. 먹을만합니다. 기름기 있어서 썩 좋아하지는 않는데, 정말 싱싱합니다. 빛깔이 너무 예쁩니다. 그렇게 생생하게 살아있는 고등어를 잘라서 구웠습니다. 생각해보시오. 3분의 1분쯤 굽다가 그냥 가지고 왔습니다. 젓가락 푹 집어넣으니까 내장이 터지면서 국물이 확 흐르고, 살점을 뒤집으니까 겉에는 익었는데 속에는 날것입니다. 비린내가 확 납니다. 먹을 수 있겠습니까? 먹을 수 있겠어요? 다른 밥상에 밥도 먹을 수가 없어요 맛있게 비빈 냉면에 상한 고등어가 날개 서너 쪽 올라가서 같이 비벼놨다고 생각해보세요. 먹을 수 있겠어요? 못 먹죠. 마찬가지로 사람이 깊이 들어가서 자아가 죽은 것만큼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진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가 죽어본 사람들을 결코 그렇게 가벼울 수 없습니다. 참는다고 하는 것은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는 것은 참는 게 아니야 참을 수 없는데, 그 한계를 넘어서 참을 때 그게 참는 것입니다. 운동이나 정신력이나 공부나 그 모든 것이나 그 레드라인을 넘어서면서 참을 때에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에 남는 게 뭐겠습니까? 언젠가는 일도 사라지고 우리 모두 흩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에게 마지막에 남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생을 교회를 섬기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돌아다니던 사람이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죽어가며 홀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그날에 하나님을 그 사람이 뜨겁게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아마 죽음과 함께 허공에 던져진 것 같은 고립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델레트가 칼빈보다 8살이나 많았는데 더 일찍 죽습니다. 마지막 그의 죽음을 묘사하면서 전기 작가가 그랬습니다. 이델레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여 이삭의 하나님이여 야곱의 하나님이여” 그렇게 소리치고 죽습니다. 큰소리를 지르고 숨을 거듭니다. 평온하게 천국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라고 묘사했습니다.) 칼빈은 옆에서 죽어가는 아내에게 천국이 얼마나 복된 곳인지 그리고 이 세상의 수고가 어떻게 끝나는 아름다운 곳인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찬양)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열심히 섬겨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영혼을 섬기십시오. 잘 들으십시오. 가슴에 품고 눈물을 흘리는 영혼이 없는 사람은, 절대 자기 자신의 영혼을 위해 울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는 울 수 있습니다. 집도 없고, 외롭고, 돈도 없고, 엄마 아빠가 아프고 이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영혼을 위해서는 울 수 없습니다.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누구도 예외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위선이 아니나 외식이 아닌. 그래서 가슴에 눈물을 흘릴 영혼을 품고 살아가십시오. 그게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까 엄마를 품지 말고, 엄마의 영혼을 품으십시오. 아빠를 품지 말고 아빠의 영혼을 품으십시오. 그러면 아마 용돈 몇 푼 송금해 드리는 거로 위안으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영혼을 섬깁니다. 뜨겁게. 그러면은 자기 자신이 형벌을 받는 것 같은 고통을 겪을 것입니다. 그 대신 그만큼 하나님이 영혼을 섬겨본 사람들만이 아는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경험이 너무나 커서 도저히 다른 일을 할 수 없는 것. 그게 목회자의 소명입니다. 그 소명을 따라서 눈물이 있는 삶을 삽니다. 영혼을 섬기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비결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몇십 년식이나 견고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집사님들이나 권사님들 붙들고 물어보십시오.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 (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영혼을 섬기면서 구역장으로 교사로 그렇게 섬기면서 하나님이 자기의 영혼을 다루시는 과정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는 것입니다. 편하게 살고 싶다고요? 다 때려치우십시오. 그냥 혼자 먹고 입고 자기만을 위하면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편안합니다. 그런데 결코 거룩한 성도는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면서 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시옵소서 하는 사람은 많이 변화되고 있는 사람입니다.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이 모습 이대로 받으시옵소서 그 찬송을 선택을 안 합니다.
요새 절대 안 부르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 찬송이 1980년대에 한국교회에 넘버원이었습니다.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삶이 찬송과 맞아 떨어질 때는 그 찬송이 유행하지만, 삶이 어울리지 않으면 찬송도 풍조가 바뀌고 말씀도 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고 싶습니다. 영혼을 섬기라. 그리고 영혼을 끌어안고 눈물 흘리는 영혼을 가져라. 그리고 그것만큼 자신의 영혼을 위해 울어라. 그러면 그 자체가 해산하는 과정이 되고 거룩함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