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란 무엇인가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09-11)
녹취자: 황인준
예수님의 행적을 살펴보는데 렌즈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게 주기도문입니다. 이것은 저만의 얘기가 아니라 모든 신학 신학자들의 공통적인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은 즉석에서 제조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평소에 기도하시던 패턴이었습니다. 그 패턴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패턴으로 기도하셨다는 것은 그 기도가 실현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혹은 실현되었어도 언제든지 그것이 다시 실현이 안될 수 있기 때문에 기도하신 것입니다. 우리 중에 공기가 있게 해달라고 매일매일 기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건이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게 해달라고 주님의 매달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이고 그것은 사라질 염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렌즈를 가지고 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기를 원했는가라고 하는 것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나라에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가 나온 후 우리들을 위한 기도가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이후 마지막에 하나님에 대한 소명으로 끝을 맺습니다. 똑같은 공식을 여기에 적용해 보면 사도 바울이 이 기도는 빌립보 교회에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모든 교회에 대해서 목회자로서 늘 하고 있던 기도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가 빌립보 교회를 목양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으면서 이 구절만큼 목회의 본질을 잘 설명해주는 구절을 못 만났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희 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여기서 ‘너희 사랑이란?’ 원문을 보면 ‘헤 아가페 몬’이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너희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리스어에서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부모와 의 숙명적인 사랑(스톨리에), 형제들 간의 사랑(필리아), 남녀의 사랑(에로스), 그리고 이 아가페는 사실은 신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신이 인간과 만물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가리켜서 아가페라고 불렀는데 이것의 Equivalent가 구약의 헤세드입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보면 ‘너희 안에 있는 사랑’인데 그 사랑의 저자가 너희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저자입니다. 이것을 아우구스티누스는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해 하나님과 관련된 사랑을 아가페와 까리따스로 나눕니다. 그래서 아가페의 사랑은 신 안에 신이 가지고 있는 인간을 향한 사랑입니다. 이에 비해 까리따스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반응으로서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을 함께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두 개가 아니라 전자가 성취되면 후자는 따라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자 없이도 후자가 성취될 수 없기 때문에 후자를 성취하면 전자가 따라올 수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어거스틴 뿐만 아니라 모든 교부들에게 있어서 초대 교회부터 중세 교회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사랑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은 아마레데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함께 아마레데오 탈격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을 모두 포함합니다.
따라서 ‘너희의 사랑’이라고 할 때 그 사랑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인본주의적인 사랑이 아니라 사람들안에 원래 없었던 것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리스에서는 전자도 아가페로 불렀고 후자도 아가페로 불러서 구분을 안 한 것입니다. 그래서 까리따스의 사랑은 그것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래서 목회가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성경적인 본질로 대답을 하자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그것이 목회의 본질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은 각기 다른 각도에서 말을 한 것입니다. 틀렸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신학적이고 성경적인 표현이 아니라 문학적인 표현으로 여러분들이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을 풍성하게 한다’라고 하는 건 굉장히 많은 내용들을 가지고 있지만 간락하게 요약을 한다면 여기서 ‘풍성하게 한다’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어로 ‘패릿슈오(περισσεύω)’라는 단어인데 ‘페리’는 둘레, ‘슈에오’는 넘친다는 뜻입니다. 두레박에 물을 담으면 일정량까지는 두레박에 갇혀있지만 더 많이 부으면 밖으로 넘쳐흐르는 것처럼 바깥으로 넘쳐흐르는 동작을 가리키는데 풍성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사랑이 어느 정도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샘솟듯 솟아나서 그 사랑에 의해 사랑이 마음속에 넘쳐나기를 예수님의 표현에 비유하자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는 것처럼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전도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게 전도라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영혼을 구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목적 자체가 천국가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늘나라에 가서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전도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을 설득해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입니다. 목회란 전도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을 점점 더 사랑하게 하는 것, 이것이 목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회의 성공은 ‘얼마나 큰 교회를 했는가?’가 성공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자녀 교육에 성공했는가를 측정할 때 ‘몇 킬로그램으로 아이를 키웠는지?’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관계가 있을 순 있을 것입니다. 아이를 열심히 키웠는데 15kg밖에 체중이 나가지 않았더라면 무엇인가 중대한 결함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정상적으로 자라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 한 사람을 기른다는 것은 한 사람이 어떻게 인간답게 살아가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목회의 본질도 그 사람들을 어떻게 전도해서 하나님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 사랑한 사람은 점점 자라나게 하고 어떻게 보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믿음의 열매이기에 믿지 않고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랑의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레오 10세에게 쓴 편지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교황이시여, 사랑이 소중한 것은 틀림없지만 사랑은 믿음을 저절로 창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반드시 사랑을 가져옵니다. 무엇이 앞서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를 전하는 이유도 사랑할 것을 올바르게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회의 성패는 이전의 사역을 돌아보면서 나 때문에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는지, 그러한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면 둘 중에 하나입니다. 소명이 아니거나 아니면 매우 잘못된 방식으로 사역을 하고 있던지 둘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요즘은 그렇게 사람들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목회라는 것보다는 함께 어울려서 서로 위로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건 사회사업가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굳이 그 일을 위해서 목사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친절한 세탁소 주인으로서 친절한 가게의 주인으로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 그것은 우리 목회 사역의 열매입니다. 그런 것의 열매가 없다면 하나님 앞에 본질적으로 씨름을 하면서 ‘나는 왜 이 일에 부름을 받았으면서도 효과가 별로 없는 사람입니까?’라는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합니다. 그것이 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넘쳤던 사람이 목회 사역을 하더라도 남을 넘치게 할 수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넘쳐보지 못했던 사람은 그런 목표를 목회에서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목회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격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격인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인격, 조금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도저히 다른 일을 했다가는 화를 당할 것 같은 그런 긴박감을 느끼는 것이 목회의 소명인 것입니다. 그러면 동의가 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넘쳐나게 만드는 것이 목회자의 할 일이다. 목회자가 그런 일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그렇게 할 수 있느냐고 했을 때, 오늘날의 접근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주 Nive하게 그저 ‘아픔을 함께하며 살아간다.’ 너무 추상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목회가 아니어도 당연히 평신도로서 살아가면서도 한 이웃과 함께 아픔을 이겨내며 살아가야지 그것은 내가 평신도라도 그렇게 해야 될 일일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목회에 대한 생각들이 좋게 얘기하면 Nive하고 나쁘게 얘기하면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려서 신문에 착한 일 했던 교회로 나온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기도 하는데 교회는 세상에 칭찬받으려고 세워진 기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한 기관입니다. 윤리와 도덕이 아니라 그것은 하나의 열매이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추구하도록 만들어진 단체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 수 있을까라고 물었을 때 그 답이 여기에서 ‘지식과 모든 총명’이라고 나옵니다.
지식이라 함은 그리스어 원문에 에피그노시스(ἐπίγνωσις, εως, ἡ)라고 나옵니다.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에피라는 전치사는 ‘∼에 대하여, ∼에 관하여, ∼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펜데믹이라고 하는 것은 지구전체가 데믹상태에 들어가 있는 것을 말하고 에피데믹이라고 하면 어느 지역이 전체가 데믹상태에 들어간 것 말합니다. 엔데믹은 사라졌어도 사람몸속에 내장되어 있다가 아니면 자연 속에 내장되어 있다가 다시 나오는 것을 엔데믹이라고 합니다.
그노시스라는 것은 지식입니다. 이것은 그리스어 신약성경에 나오는 그리스어 단어 가운데 가장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10위 안에 드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노시스에 대해서 거의 다 알았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성경 신학의 절반을 통달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노시스는 기노스코에서 옵니다. 기노스코의 동치어가 구약의 야다입니다. 알다입니다. 야다에서 다트 지식이라는 말이 오고 기노스코에서 그노시스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이것은 그리스어로 쓰였지만 쓴 저자들의 사유는 히브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쓴 것입니다. 그래서 이 히브리어에서 야다라는 동사가 제일 먼저 나오는 게 창세기 3장입니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니 가인을 낳은지라’할 때, 동침하다입니다. 마태복음에도 ‘내가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나이까’ 마리아가 대답할 때, 그 때의 ‘알다’라는 단어도 역시 기노스코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그리스적 사유에서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적인 정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물에 대한 경험적인 앎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결국 에피그노시스란 사물에 대한 온전한 지식, 그 온전하다는 의미는 그 사물의 지식이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인생, 그리고 자기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총체적으로 가르쳐주는 지식인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 우리는 잘못된 공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평가하는 것은 한정된 범위를 정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들어오는 아이들의 순위를 정하게 되는데 사실 지식은 훨씬 스케일이 큽니다. 그래서 어느 한 아이가 학교 공부를 하지 못했다는 것은 다른 방면에서 지식이 엄청나게 발달했다라고 하는 아주 증거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인간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식에 관하여 말하자면 모든 지식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이외의 모든 것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실 때 하나님의 관념 속에 그 사물에 대한 생각이 없었을까요? 휴지를 만들었다고 가정해 보면 모든 휴지가 하얀색인데 이 휴지는 보라색으로 물들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하얀색을 보면서 펄프를 가지고 만들 때 이 속에 무엇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 기계와 기술을 통해서 이 제품이 나왔듯이 당연히 모든 만물이 있기 전에 하나님 안에 당신의 관념이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어떤 사물을 잘 들여다보고 제대로 알기만하면 그것은 반드시 그것이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라도 원창조자이신 하나님에 관해서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에피그노시스입니다.
여러분들은 공부의 범위를 너무 좁게 잡고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학교에서 교육받는 것을 그만두고 스스로 독학하면서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깐 여러분들은 공부의 범위를 제한두지 말아야 합니다. 신학, 성경, 역사, 철학, 문학, 과학, 생물학, 의학, 천문학, 미술, 디자인, 음악, 시학, 법학, 사회학, 기상학, 심지어 세 경학이나 양자역학에 대해서까지 모든 문을 열어야 합니다. 많이 공부하면 할수록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이 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구획을 지어서 이 바깥에서는 하나님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공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 그렇게 많은 것들을 공부해야하느냐는 각각 개인의 능력과 시간의 문제이고 원리가 그렇다는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지식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그리스에서는 아이들을 교육할 때 크게 세 가지 원리를 가지고 교육을 했습니다. (φύση)자연입니다. 자연을 관찰하면서 논리를 찾아냅니다. 그 다음 그것을 삶에 적용한 것이 철학입니다. 동북아 철학으로 보면 물이 지나간다는 의미의 거(去)와 물수(水)변에 지나갈 거(去)가 합쳐지면서 법(法)이 됩니다. 물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아! 이 물이 일정한 법칙을 가지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구나! 막히면 모였다가 넘치고 또 열리면 내려가고!’ 이렇게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라는 것을 깨달은데 서 ‘이! 그것이 법이구나! 그렇다면 우리는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말고 살아야 행복할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다’ 이런 식으로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교수들이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줄 수 없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 그것에 대한 끊임없는 묵상과 현실 속에서 지식을 어떻게 자신의 삶과 연결시킬지를 고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고민에 대한 깊이만큼 사람들에게 아주 이론적인 것을 설교해도 현실과 전혀 동떨어지지 않는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 결국 목회자는 지식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그는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목회자로서 공부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입니다. 그래서 많은 양의 공부를 해야 합니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리스 철학에서 나오는 독사(Doxa)와 에피스테메(epistēmē)의 구별, 이런 것들을 눈여겨보면서 이 단어를 생각해야 합니다. 단어 하나하나가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깊이 있는 설교를 하는 아주 중요한 방법 중에 하나가 워드 스터디를 많이 해야 합니다. 단어 스터디를. 그래서 신학 사전을 펼쳐 놓고 하나의 단어가 나오면 그 단어의 몇 페이지씩 계속되는 내용들을 읽으면서 성경 전체에서 이 단어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것을 설교할 때마다 그런 식으로 10년 내지 15년 읽게 되면 놀라운 차이가 날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냉담한 사람들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게 되는 것은 결국 지식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그 지식을 크게 세 가지 대상에 대한 지식인데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 만물에 대한 지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지식은 보편적 존재로서의 인간과 개별적 존재로서 나에 대한 지식입니다. 이 지식들이 성경 속에서 올바르게 전달될 때, 경험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크 트웨인, 거의 신곡에 비유할 정도로 유명한 서사시가 있는데 거기서 이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경험했으나 의미를 잃어버렸다. 의미를 파고들었더니 경험이 다시 살아났다.’ 여기서 마크 트웨인이 말한 것처럼 지식을 전달하는데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체험된 지식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지 않으면 저희가 화가 있을 거 같다고 믿었던 말하자면 성령에 의해 세례된 지식을 목회자가 마음에 가득 가지고 있을 때 교육이 가능해 지고 목회가 가능해 지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모든 총명이라고 했습니다. ‘두려워하다’라는 동사에서 나오는데 현대 그리스어 성경에서는 이것을 누스(nūs)로 번역합니다. 누스는 그리스 철학에서 정신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정신의 이해를 이야기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초월적인 것들에 대한 이해, 감각적인 사물이 아닌 것들에 대한 이해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너 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니?’ 무신론자에게 물어보면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또 다른 질문으로 ‘너는 너 자신을 사랑 하냐?’라고 했을 때 그것은 대답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무슨 논리로 자신을 사랑하는 거냐?’라고 물었을 때, 아무도 그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건 논리가 없는 것인가? 데카르트는 그것이 논리가 없는 것으로 보았지만 파스칼은 아주 논리정연하게 본 것입니다. 이성의 논리와 마음의 논리가 있는데 그런 질문의 이성의 논리로 답할 수 없고 마음의 논리로 답한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논리는 실질적으로 사람들이 행동할 때에 있어서 이성의 논리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입니다.
도저히 둘이 결혼하기 어려운 조건이 있는데 이성적으로는 결혼할 수 없다고 하지만 마음으로는 끌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엔 드디어 결심하게 되는데 ‘당신과 살다가 1년 후에 죽어도 이후의 인생을 나 홀로 살아도 나는 당신의 남편이 되고 싶다’ 이것이 이성의 논리가 아니라 마음의 논리인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파스칼이 제시했던 것은 이런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훌륭한 인물이지만 그러나 그 사상은 너무 유해한 사상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기독교 사상을 허무는데 커다란 공헌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성찰에서 ‘의심할 수 있는 한 끝까지 의심하라’라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서 실제로 행동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숨 쉬는 공기가 진짜 공기가 맞는지, 지금 이 공간이 가상공간은 아닌지 등등 아무도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끌리면서 현실을 접촉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세시스’는 이런 것들을 이렇게 접촉하고 보고 만지는 것들에 대한 이해가 아닙니다.
총명이라는 말이 킹제임스버전에 understanding, 이해라고 번역하는데 이해가 아니라 고전철학에서 오성입니다. 오성이라는 말을 데카르트, 칸트 이전과 이후에 의미가 달라집니다. 이후에는 오성이 감각으로 통합니다. 그런데 이전에는 감각을 초월하는 지성의 작용을 오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아이시디시스는 감각이 한정적이고 시간 안에 있고 부피와 크기와 색깔과 모양을 가진 것에 대한 지식이라면 총명은 그것을 초월하는 영적이고 정신적인 것들에 대한 이해입니다. 결국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사물에 대한 두 가지 인식 능력을 주십니다. 자연적인 사물은 이성으로 인식하고 자연적인 사물 배후에 있는 것들은 초월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믿음으로 인식하도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이성과 믿음인데, 믿음은 오성의 중요한 수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이성으로 설득되어서 믿은 것이 아니라 마음의 논리로 알게 되어서 믿는데 그것을 이성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누구도 완벽하게 설득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도 마음에 논리로 그것을 볼 때에 그것이 함께 공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모든 총명을 성도들이 갖게 함으로써 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목회자는 사랑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목회자는 지식의 사람이어야 된다. 마지막 세 번째는 목회자는 믿음의 사람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써 저 사물 배후에 있는 초월적인 것들에 대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그것들의 지식이 늘어나고 믿음이 증가할수록 예전에 볼 수 없던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신비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것 때문에 결국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원인은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돈이 최고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물질주의자가 되는 것이고 사랑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면 박애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자연이 인간은 지겨운 존재고 자연이 아름답다하면 자연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에 의해서 지식과 모든 총명에서 모든(παν)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데 칼빈은 해석하기를 ‘범위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총명이 아주 깊이가 있을 때에 지식과 총명이 도구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이 계속 넘쳐나게 됩니다. 묘사를 해본다면 사랑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데 두 개의 연료가 계속 불이 붙으면서 불길이 타오릅니다. 하나는 에피그노시스고 하나는 아이스데시스 두 개가 계속 타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에게 새로운 사물에 대한 앎, 경험, 거기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아름다움. 이것이 계속 목회에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도록 만들어주는 중용한 조건이 되고 잘 믿어서 예전에 보지 못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전달해 주는 믿음이 있을 때에 이 두 가지가 타오르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학문은 이성의 논리를 따르지만 믿음을 배척하지 않고 믿음은 이성의 논리를 초월하지만 그러나 지식을 배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셀무스(Anselmus)가 이야기 했듯이 ‘믿음은 지혜를 구한다,’ (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라고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이 구절을 보게 되면 얼마나 웅장한 목회의 비전을 보여주는가라는 것입니다. 큰 교회를 세우고 어마어마한 사업을 하고 그래서 마치 목회자가 비즈니스맨이 된 것 같이 그렇게 하는 것이 목회의 이상이 아닙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라고 나옵니다. 분별하다란 단어는 그리스어로 도키마죠(δοκιμάζω) 시험하다란 뜻입니다. 요즘에는 너무 가품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장미꽃조차도 실제와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나오는데 가까이 가도 잘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결국 가까이 가서 냄새를 맡거나 꽃잎을 기어이 한 장 따 보는 거 이러한 행동을 통해 모조제품 여부를 확인하는 것을 도키마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선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많은 주석가들에 의하면 좋아 보이는 것들 중 가장 좋은 것을 시험하며 라고 번역을 합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는 다 좋은 겁니다. 내일이 기말고사인데 아이들이 공부는 안 하고 게임만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겐 게임하는 게 기말고사 공부하는 것보다 더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더 좋게 생각하는 것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헷갈리지 않고 하나님이 볼 때에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확 찾아내는 능력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한 주체성 있는 판단력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목회를 하는 겁니다. 사랑은 모든 판단력의 근원인 것입니다.
요즘 강남에서 개를 키우는데 개유치원이 160만원한다고 합니다. 똑같이 차량이 와서 선생님이 개를 데리고 가고 유기농 간식을 먹이고 창의력 교육도 시키고 저녁때 집에 데려다 주는데 A급 유치원이 160만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이 안돼서 개를 데리고 마사지에 가서 마사지를 해주고 건강을 위해서 침을 놔주고 그래서 개 한 마리에 한 달에 250만 원 정도의 돈을 쓴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강아지를 사랑하니깐 강아지를 제일 우선으로 놓고 질서가 생기는 겁니다. 사랑은 질서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제일 우선으로 한 사랑을 못하기 때문에 분별력이 없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말도 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라는 자기의 책속에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어디 죄가 들어올 틈이 있겠는가?, 죄가 들어올 자리가 어디에 있겠는가?’ 죄를 안 짖는다는 것이 아니라 죄가 들어올 논리적인 자리가 어디에 있겠느냐는 뜻입니다. 진짜 이성을 사랑하게 되면 남자는 전 세계에 여자는 한사람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사람 저사람 모두 여자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의 분별을 키워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진실해야 합니다. 에일리크리네라는 그리스어 단어인데 에일리와 크리네라는 두 개의 단어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것입니다. 크리네는 크리노(krino)판단하다는 뜻이며 크리틱스(critics)라는 영어 단어가 여기에서 유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판단하다는 뜻인데 그 앞에 에일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주석가들의 뜻이 두 가지로 갈립니다. 첫째는 ‘햇빛의’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도 작품들이 혹은 중요한 서류 같은 것들이 위조되는 경우가 많았었습니다. 그때 가장 좋은 방법은 햇빛에 비춰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햇빛에 비춰본∼, 진위를 가리는’의 뜻이 되는 겁니다.
다른 뜻은 에일리에체라는 뜻이 있습니다. 비슷한 굵기의 밀가루를 부어 체에 걸러보니 걸러지지 않은 굵은 덩어리와 이물질이 나오게 되는데 ‘걸러내어서 정제된’이란 뜻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지만 둘 다 무엇을 취해도 마찬가지의 결론인거 같습니다. 진실하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생각으로 자기를 생각한 것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자기를 체에 치든지 아니면 햇빛에 비추어 본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자기를 비치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객관적으로 자기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진실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진실의 개념에는 반드시 진리의 개념하고 같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라틴어로 베룸(vērum)이라고 하는 진실은 베리따스(vérĭtas)라고 하는 진리의 단어와 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것은 솔직하고 정직한 것이 맞는데 정직하고 솔직하기 만하고 진리가 없으면 뻔뻔스러움의 극치가 되는 것입니다.
“너 사람을 죽였지?”, “그래 내가 죽였다. 어떻게 할 건데? 내가 기분이 나빠서 죽였다. 나는 사람 죽이면 안되냐?” 솔직하고 정직한데 진리가 없기 때문에 뻔뻔하다는 겁니다. 차라리 ‘내가 안 그랬는데’라고 변명이라도 한다면 그 사림이 아까 그 사람보다는 좀 났다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해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는 그게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네. 제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때는 제가 이성을 잃었었는데 정말 잘못한 것이었습니다.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눈물을 흘리면 그것을 우리는 진리로 돌아오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진실하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결국은 ‘왜 그것밖에 못 사느냐’고 손가락질하는 것은 목회가 아닙니다. 그리고 성도들을 강아지 수준으로 보고 목줄을 내서 어떻게 행동하리라는 지침까지 내려야 되는 정도의 존재라고 보는 것은 성경적인 목회가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아무도 꾸짖는 사람이 없어도 말씀과 양심으로 가책을 받고 진리로 돌아가고 싶은 그게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기에 그런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목회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누가 보든지 보지 않던지 코람데오(Coram Deo) 하나님의 임재를 충만히 느끼면서 뚜껑을 열고 보나 안 열고 보나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맹자에서는 ‘이불을 덮고 잘 때에 이불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이불을 덮고 자는데 이불은 밤에 내가 무엇을 하는지 모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릅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불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불에 부끄럽지 아니하며’. 그런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실한 사랑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허물없이 아크로포스라고 합니다. 흠집이 없다는 뜻입니다. 수학에서 어떠한 인간도 완벽한 삼각형을 그릴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아무리 그어도 그것을 펼쳐서 평평하게 놓으면 삼각형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삼각형을 그릴 때에 그려놓은 결과는 삼각형이 아니더라도 관념 속에는 완벽한 삼각형입니다. 다만 그것을 완벽히 못 그릴 뿐인 것입니다. 같은 의미로 우리가 허물이 완벽하게 없을 수 없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학적으로 흠이 없고 삶에 있어서 윤리적으로 흠이 없도록 살아야 하는데 완벽히 도달한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러나 마음속에선 최소한 그 이상향을 그리고 살아가면 비교적 흠이 덜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완전에 이르지 못하지만 사도 바울이 말했던 것처럼 완전함에 이를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면서 끊임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칙이 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