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지 말고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녹취자: 김경애
아마 성경 66권중 가장 짧은 구절이 5장 16절 혹은 17절일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 편지는 사도 바울이 문제가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 쓴 편지입니다. 유대인 거짓교사들이 교회에 들어왔고 임박한 종말론을 퍼뜨리며 사람들을 요동하게 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하는 일 없이 끊임없이 이설과 요설을 퍼뜨리며 도무지 일은 하지 않는 게으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되려고 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훼방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이때에 여러 가지 교훈을 모두 한 후 교리를 강설한 후 권면하는 끝 인사로 이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은 과연 이것이 가능합니까? 밥도 먹어야 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씻어야 하고 잠도 자야 하는데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가능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구절을 물리적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기도하라는 것은 우리가 모를 것이 없는 ‘쉬지 말고’ 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이 ‘쉬지 말고’ 라는 말은 ‘아디알레이토’ 라는 그리스어 단어인데 ‘리토’는 ‘그만두다’ 는 뜻입니다. 길을 가다가 포기하고 그만둔다는 것입니다. 접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거기 앞에 부정접두사 ‘아’가 붙어있고 ‘디아’는 전치사입니다.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쉬지 말고’ 라는 말은 계속 워킹 하라는 뜻이 아니라 그만두는 일이 없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기도는 좁은 의미에서 기도를 말하자면 구체적으로 언어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스토리를 엮어가면서 아뢰는 것이 기도입니다. 당연히 거기에 마음이 실려야 하고 열정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의 기도는 영혼의 시선이 항상 하나님께 가 있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항상 옆에서 같이 이렇게 함께 밥 먹던 사람에게 ‘너 언제 여기에 와 있었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기도의 세계가 그렇게 하나님과의 친교 속에서 있는 세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사람들은 어떤 상황이 일어났을 때 즉각적으로 기도하도록 준비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영적인 관계에서 오는 행위입니다. 당연히 어제도 만나고, 오늘도 만나고, 밤에도 같이 자고, 늘 지내던 사람은 말 걸기가 너무 쉽습니다. 몇 년 만에 만났고 돈 문제로 몹시 다투다가 몇 년 전에 헤어져서 예기치 않는 장소에서 전혀 원하지 않는데 만났습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한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자리를 모면할까 하는 생각이 너무 간절하고 무엇인가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내가 안에서 수없이 글짓기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그렇게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글짓기를 해야 겨우 말을 걸 수 있는 그런 생활을 하지 말라는 것이 이것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어제 예화를 든 것처럼 가마니의 쌀이 가득 들어 있으면 후크로 쿡 찍으면 쌀이 확 쏟아집니다. 그런 것처럼 마음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항상 말하고 있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 교제의 정서 속에 항상 있기 때문에 그 하나님이 나와 어떤 거리감도 느껴지지 않고 나에 대해서 어떤 낯섦도 느껴지지 않는 그런 친밀한 관계 속에서 언제든지 기도할 수 있는 기도의 영으로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들도 교구기도회를 해보면 알 수 있지만 교역자가 기도 인도를 하다가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자기는 열심히 준비하고 와서 ‘우리 다 같이 기도합시다.’ 입 꽉 다물고 가만히 앉아서 숨만 쉬는 것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예전에 있었던 일인데 교사들이 모여서 간절히 찬양을 부릅니다. 자기는 눈을 감고 엎드립니다. 조용히 찬송가를 듣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음을 합해야 합니다. 그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그렇게 기도회에 모였는데 한 마디도 못하고 입도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너무나 낯선 공간에 낯선 하나님과 만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몇 해 전 제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한 일 중의 하나가 금요기도회를 부서별로 모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여러분 교역자들에게 얼마나 큰 부담을 주는지 너무나 잘 압니다. 교회학교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모르는데 그 기도회를 나갔는데 서너 명 앉아있을 때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자괴감, 그리고 얼마 모였는데 말씀을 전하는데 아무 힘이 없는 낙담, 그리고 자신은 열심히 기도하고 싶은데 돌부처처럼 성도들이 뺑 둘러 앉아 있다가 숨소리 한번 못 내고 조용히 있다가 일어나서 가는 그 기도회의 절망감 그것을 느끼면서 목회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결국 교인들의 신앙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이 일주일 동안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댐에 물이 가득 고이면 언제든지 아래로 쏟아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홍수가 납니다. 밑을 조절하기 위해서 소양 댐의 물을 가둡니다. 2억 6천만 톤을 가둔다고 하는데 설악산까지 뱃길이 열립니다. 옛날에 한창 보관했을 때는 가득합니다. 도저히 더 이상 물을 보관할 수 없습니다. 흘려보내지 않으면 댐이 넘치고 위의 지역이 수몰되게 생겼습니다. 할 수 없이 문을 여는 것입니다. 문을 열면 그 물이 160미터 되는 댐에서 떨어져서 바닥에 부딪히면서 하늘로 수십 미터를 치솟습니다. 장관입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그렇게 물이 가득 찼는데 댐의 수문을 여니까 물이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합니까? 문이 열렸는데 ‘얘들아 우리 나갈까? 말까?’ 생각하고 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에 그 댐에 물이 없다고 칩시다. 그리고 수문 바로 밑에서 물결이 치고 있습니다. 댐의 문을 수없이 열고 닫아도 한 방울의 물도 나오지 않습니다. 왜? 문을 밀고 나갈 물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목회를 하는 가장 중요한 영적인 이유는 모든 성도들을 그렇게 댐에 물이 가득 차듯이 언제고 기도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을 때 말로 발화되지 않을 때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말하고, 말로 발화가 되었을 때는 마음을 통해서 언어로 하나님께 말하는 그런 신자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고, 회개를 가르치는 것이고, 성령의 충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온갖 신앙의 무기력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기도하지 않는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솔직히 이야기하면 기도를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되는 것을 웬만하면 막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른들이 통성기도하면 몇 분쯤 기도할 것 같습니까? 초등학교 학생들은 기도하면 몇 분쯤 될 것 같습니까?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는 나이 별로 점점 아래로 내려갈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초등학생들이 기도회에서 2시간씩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쉬지 않습니다. 왜? 마음에 기도가 꽉 차있으니까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기도모임에 와서 기도를 하지 않는 이유는 못하기 때문에 안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전혀 하나님과 사귀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습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묻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기도를 안 하는 이유는 못하기 때문에 안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왜 못하게 되었습니까? 안하니까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명령형입니다. ‘얘들아 기도가 되면 하고 안 되면 그만두어라.’ 하시지 않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할 때는 기도하는 것이고 기도가 끝난 다음에 다음 기도 할 때까지는 기도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영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성경구절의 의미입니다. 이 모든 일에 목양을 하는 사람들은 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렇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즉각적으로 터져 나오는 기도가 신앙의 표시이구나!’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열렬한 기도의 세계를 가진 사람이 예배시간에 졸음으로 견디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말씀의 은혜를 받는 사람이 기도를 못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영혼이 너무 많이 미끄러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번쩍 번쩍 비췸을 받아도 신호등은 켜졌는데 분명히 파란불은 켜졌는데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건널목을 건너갈 수 없는 것처럼 마음이 불구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바쳐 열렬하게 가식이 아닌 중심에 불붙는 것과 같이 매달려 기도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합니다. 그래서 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더 주시고, 없는 자들은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는 것입니다.
더 놀라운 일을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기도를 합니다. 기도회가 힘들게 시작했는데 아주 은혜롭게 끝났습니다. 굳었던 마음이 아주 부드러워지고 무엇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할 것 같다는 마음이 들고 반성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회를 했는데 그렇게 안됐습니다. 돌아갈 때 마음이 올 때보다 더 딱딱하게 굳어져 가지고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불만과 불평이 생겨나고 심지어는 아주 심하면 ‘이 까짓것 해봐야 무엇 하나?’ 하는 반감까지 생겨납니다. 그래서 구역장 한 사람으로서의 역량이 한 목회자로서의 힘이 그가 인도하는 기도회모임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가 하는 회의가 아닙니다. 그가 하는 강의가 하니라, 심지어 그가 하는 설교가 아니라 그가 인도하는 기도회를 보면 그가 어떻게 살아온 사람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을 중심에서 찾는 사람인지 그것을 보게 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이 명령은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뻔합니다.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 자기 자신도 밥도 먹고 잠도 잤을 것 아닙니까? 고문도 받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까?
언제가 뉴욕에 집회를 갔을 때인데 다른 교회에 집회를 갔는데 그 교회와는 상관이 없는 교회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오신 길에 자기네 교회 새벽기도회 3번을 인도해서 부흥회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 가는데 그 옆에 있는 교회가 끼어드는 것도 경우가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이 교회 집회가 아니고 목회자 집회이니까 기왕 섬기러 간 것이니까 원하니까 섬기러 가주자 생각하며 갔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불과 1, 2년 전에 태풍 급의 위기를 겪은 교회였습니다. 목회자인 담임목사와 이야기하는데 들리는 이야기가 기도를 많이 하시는 분입니다. 나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을 좋아하는데 자기의 기도자랑을 이야기합니다. 하루에 9시간 내지 10시간을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설교준비를 합니까?’ 자기는 아침에 출근하면 기도하다가 퇴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어떻게 기도하게 되었는지 역사를 푸는데 신비주의 계열입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살라고 기도도 하는 것이지 기도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아침 9시에 출근해서 그렇게 하고 밤이 되어서 가방을 싸들고 집에 간다고 하니 아니 그러면 밤중에 와서 새벽기도까지 하고 그리고 낮에 일을 해야지 그렇게 따지면 왜 예수님이 굳이 밤 시간에 기도를 하셨습니까? 그것은 정상적인 영성이 아닙니다. 시간을 기도할 시간을 떼어놓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삶의 균형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결국 마음을 다 드려서 어느 시간이든지 기도가 필요할 때 마음 깊은 곳에서 터뜨려서 쏟아져 나오는 그 기도의 세계를 가지고 있으라고 오늘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지금도 살고 있는 그 삶을 자기가 살았던 내면의 세계를 그대로 교인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말을 데살로니가교회 교인들에게 이 편지가 전해졌을 때에 교회 출석을 안 한 사람의 손에 들려서 보냈을 리가 없습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 손에 들어가서 온 교회가 회람을 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말을 지금 우리처럼 못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들었을 것입니다. 24시간 하나님 앞에 떠들고 있으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매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의 영속에서 살 때 그때에 어떤 상황이 와도 우리는 즉각적으로 기도하면서 모든 것들을 물리치고 퇴치할 수 있는 그런 담대한 영적인 힘과 은혜를 얻으라는 것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불이 활활 타오릅니다. 엄청난 기세로 타오릅니다. 그냥 타오르면 타오르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정도의 힘이 있는 줄은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치열하게 불꽃이 치지직하는 소리를 내면서 타오르는데 거기에 무엇을 던져보는 것입니다. 던져보면 그 즉시 빛깔을 내면서 타버리는 것입니다. 던져지는 물질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온갖 빛깔을 내면서 다른 빛깔을 내면서 타오르는 것입니다. 그 원리를 이용한 것이 바로 불꽃놀이입니다. 매체가 무엇이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형형 빛깔의 잔치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타오르는 불길처럼 기도의 영을 소유하고 있을 때 어떤 상황이든지 만나면 확 타오르면서 그 불이 진짜 그 사람 마음속에 불붙고 있다는 그 타오르는 불길의 진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은 기도하는 시간이고, 기도가 끝나는 시간은 다음 기도를 준비하는 시간으로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잘 살다가 온 사람이 열렬하게 기도할 수 있고 열렬하게 기도한 사람이 잘 살 수 있으니 기도하는 것과 사는 것은 함께 가는 것이지 따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산 것만큼 기도하고 기도한 것만큼 삽니다. 기도한 것만큼 삽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