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얼굴을 가리실 때
“여호와여 주의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시 30:7-8)
녹취자:장미연
이것은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의 영적인 침체와 그 의미. 그리고 그것에 해결 방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은혜로 나를 산 같이 굳게 세우셨더니”. 그랬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내가 형통할 때 말하기를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라 하였도다” 하였습니다. 단순히 왕국이나 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영적으로 이렇게 모든 산전수전을 헤치면서 내가 주님을 믿고 살아왔으니 이제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산과 같이 굳게 서 있다. 성경에서 사실 불가능한 것이 산을 옮기는 것입니다. 산은 운명처럼 거기에 영원히 태초부터 서 있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믿었습니다. 그때는 지질학적인 특별한 지식이 없었으니까 하나님이 지으신 대로 거기 서 있는 거다 이렇게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처럼 “산같이 굳게 세우셨다.” 한 것은 결국은 자신이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얼굴을 가리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알고 보니까 자신이 그렇게 견고할 수 있었던 비결이 인간의 위대함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끊임없이 얼굴을 보여주셔서 그와 살아있는 생생한 교제를 나눌 수 있었기 때문에 사실은 자기가 산처럼 서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죽고 없지만 그랬는데도 써 놓은 마음의 일부인 시편을 읽어도 그가 정말 산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지는데 그렇게 살아가는 그 사람을 보았을 때 느끼는 감동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다 소용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산 같이 되었고 주님의 은혜가 그치자 그는 근심하는 초라한 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득불 자랑할 것이 있으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는 약한 것만큼 하나님이 도우셨기 때문입니다.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은혜 안에 살자.
이발사는 세상에 제일 편안한 직업 중에 하나였습니다. 지금은 이발소가 있어서 이발소에 가서 이발을 하잖아요. 우리 어렸을 때 없었습니다. 그런 데가 있기는 있는데 비쌉니다. 아저씨가 가방 하나 메고 여유가 있는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냥 가방 하나 메고 “이발∼ 이발∼이발하러 왔어요. 이발.” 그러면 사람들이 막 뛰어나옵니다. 그럼 깡통 하나 놓고 차례대로 앉는 겁니다. 그러면 면도질이고 뭐고 없어요. 그냥 이렇게 빗 하나 가지고 가위 가지고 쓱쓱 깎아서 그다음 사람. 동전 몇 개 놓고 그다음 사람. 그다음에 빡빡 깎아달라고 오면은 먼저 이가 많아서 기계에 묻으니까 하얀거 뿌리고 기계도 아니에요. 손으로 째깍째깍 하면서 깎아요. 부지런한 이발사는 날을 다 갈아 가지고 다녀요. 그래서 안 아픈데 어떤 이발사는 게을러서 째깍째깍 하는데 살이 찝혀요. 그걸 이렇게 들어요. 으악∼ 그러면 머리털 빠지는 비명소리가 들려요. 좋은 시절이었어요. 엄마가 볼기짝을 때리면서 “가만히 있어. 아저씨 머리 깎잖아.” 이발사는 가위하고 바리깡하고 빗 세 개를 가져야하는데 목사는 더 한 권이면 됩니다. 옛날엔 두 권이었는데 성경, 찬송인데 요새 합본으로 나와서 한 권이면 됩니다. 이제는 스마트폰이 있으니까 그것도 없어도 됩니다. 나의 신념이 이것입니다. 목회자의 최고 자산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어디가서든지 먹고 삽니다. 나는 지금도 이런 말 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젊은 사람들한테 미움 받는다고. 마음은 청춘이란말 하지 말라고 하는데 청춘이 아니라 지금도 개척교회 하고 싶어요. 하면 꼭 될 거 같아요. 늙었으니까 안돼잖아요. 그래서 그런 꿈도 꾸었어요. 열린교회하고 상관이 없는 아주 먼 곳에 가서 맘에 꼭 드는 후배하나 개척을 시켜서 뒤에서 내가 몇 년만 “이건 이렇게 해라.” 가끔 설교도 해주고 그렇게 하고 개척을 다시 해보면 그러다 한 5년쯤 됐을 때 자기 혼자서 씩씩하게 몇 백 명 이끌어갈 수 있다면 참 행복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런 열정이 마음속에 솟구칩니다.
결론은 뭐냐하면 그 은혜라는게 도대체 무엇입니까? 열정이라는 것은 은혜의 산물인데 은혜라는게 무엇입니까? “하나님 저 왔어요.” 그럴 때.
누가 찾아와서 높은 사람한테 “저 왔어요.” 그럴 때 반응이 몇 가지잖아요. “왔어요.” 그러는데 아랫사람이 뛰어나와서 “각하께서 너무 바쁘시답니다. 다음에 오시랍니다.” 이런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다음에 “저 왔습니다.” 그럴 때 “어, 그래 별일 없나?” 문 닫힌 채로 어쩌구저쩌구 “지금 내가 머리 산란하니까 나중에 보고 받을테니 물러가있게.” 이런 사이가 있고 “저 왔습니다.” 이럴 때 그래 그러고 얼른 문을 열고 뛰어나가서 마주하는 사이가 있잖아요. “말씀 다 드렸기 때문에 가겠습니다.” 그럴 때 “가긴 어딜가? 밥 먹고 가야지. 애들아 상차려 오너라.” 어떤 정도의 사이냐가 은혜의 등급입니다.
그래서 진짜 여기에서 “주께서 얼굴을 가리시매” 그야말로 가린다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어땠다는 겁니까? 주님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며 대했다라는 뜻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면 다윗의 영성의 뿌리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산 것이 그게 다윗의 영성의 뿌리입니다. 그와의 친밀함 속에서 산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얼굴을 가리고 나니까 금방 산처럼 견고하던 확신이 흔들리면서 근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이 부분을 설명하면서 목회자의 강함과 약함이 이렇게 종이 한 장 차이다라는 이야기를 하신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영적으로 어리고 이런 사람들을 저 하수로 볼게 아니라 나도 얼마든지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거두시면 저렇게 될 수 있다라는 겸손한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주님이 세워주셨으니까 산처럼 있는 것이고 주님이 놓으시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뜻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 시인의 심정은 어떤 심정이냐하면 “내가 무덤에 내려간다 하더라도 내 피가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것의 의미는 구약에서 피의 개념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피 값을 갚아야 합니다. 그걸 흘리는 피는 하나님이 죄에 대해서 징벌을 하고 이루어진 거잖아요. 아니면은 원한이 맺힌 사람들에게 원수를 죽이심으로써 하나님이 그 피 값을 갚으심으로써 원한을 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지금 산처럼 굳게 서 있다가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셔서 영혼의 깊은 침체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무덤에 내려간다. 이게 스올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죽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내세의 세계가 있다고 믿지를 않고 반쯤은 살고 반쯤은 죽어있는 음울한 그 생명이 박탈된 상태에 있는 무기력한 세월이 온다라고 하는 것이 구약시대에는 지옥 개념이 발달을 안 했으니까 유대인 문학에서 가지고 있던 유대 문헌에서 가지고 있는 스올의 개념입니다. 사후 세계에 대한 개념입니다. 그래서 사후의 세계는 어떤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죽은 사자보다는 산 개가 낫다는 표현이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보면 욥 같은 사람이 “내가 육체 바깥에서 주를 뵈오리다” 이런 부활의 소망같은 것들은 신학적으로 미스테리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의 사람이라고 여겨지는데 그런 놀라운 신학적인 전개를 바라볼 수 있었던 사실 자체가 신비한 것입니다. 수수께끼지요. 그래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서 내가 피를 흘리기까지 주께서 나에게 뭘 잘못했다고 복수를 한다고 할지라도 이게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이게 무슨 나의 죄를 속했다든지 아니면 주님의 진노를 푸셔서 주님께 영광이 됐다든지 이것도 아닌데 나는 결국은 힘없이 살다가 죽은 자처럼 사는데 그렇게 죽은 자처럼 살면서 죽기 위해서 흘리는 그 피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무엇을 누구에게 어떠한 유익을 주변 사람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나 자신에게는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서 “진토가 어떻게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진토’라고 하는 개념은 먼지입니다. 티끌인데 사람들이 자기가 죄를 지었을 때 비통한 일을 만났을 때에 재를 무릅쓰고 기도했잖아요. 진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가장 무가치한 것의 대명사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무가치하게 되어버린 인간이 무가치하게 되었다는 건 자기 존재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심정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사랑받지 못하는 자로서 아무 쓸데없다고 느끼는 이런 인간이 어떻게 주를 찬송할 수 있겠습니까?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이 주를 찬송할 수 있습니까? 없잖아요. 자기가 쓰레기에 불과하다라고 탄식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니까 찬송할 수 있는 거지 그 자체를 바라보고 있으면 주를 찬송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보고 진리를 선포하라고 하는 자격을 주셨는데 내 마음이 진토인데 내 영혼이 티끌같이 되어서 무가치한 존재가 되었는데 어떻게 진리를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고귀한 영혼으로나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겁니다. 영적인 침체에 빠졌을 때 목회자의 무력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양심은 송사를 받고 사역은 하기도 싫고 그다음에 뭔가를 해봐도 아무런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그리고 더군다나 자신에 대한 비난이나 나쁜 평가들이 자신의 귀에 들릴 때에는 더더욱 목회하기 싫은 거지요. 그런 지경에 까지 시인이 가게 되었으니 이런 영적인 거인도 이런 적이 있었다고 하니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일은 얼마나 자주 있는 일인가? 그걸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직 젊으신 분들은 이제 다가오지 않겠지만 갱년기를 맞이하고 하게 되면은 인간이 얼마나 지푸라기와 같이 힘이 없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많지만 말씀을 맺으면 해결책을 어디서 찾았느냐. 8절에서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그랬습니다. 그 결국은 이런 영혼으로는 아무 유익이 없고 주님을 찬송할수도 진리를 선포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울부짖으며 주님 앞에 간구했으니 10절에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마지막 결론입니다.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것이 마지막 소원입니다. 귀결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나를 산처럼 굳게 붙들어준것도 은혜 때문이었고 결국 내가 무너진것도 은혜 때문이었고 다시 무덤에 내려가서 아무 힘이 없는 자가 된 것도 은혜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해결책은 결국 주님께 은혜를 받아야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목회자인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데 아무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은혜의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정말 사람이 버린 사람을 하나님이 쓰십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던 사람을 하나님이 존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이 따라가실 것이고 어디에 있든지 그 자리가 하나님의 품이 될 것입니다. 무엇이 두려워요? 무엇이 겁이나요? 그러한 은혜의 정신을 가지고 목회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