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가 되는 세 단계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5-8)
녹취자 : 오희열
오늘 말씀은 설교자가 되는 3단계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놀랍게 이사야서는 다른 선지서와는 다릅니다. 다른 선지서는 1장을 시작할 때 항상 “말씀이 누구누구 선지자에게 임하니라” 하며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사야 1장은 역사 서술로 시작됩니다. 다른 선지서와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 비결은, 이 웅장한 이사야의 소명사건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플라스??(0:54)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를 부각시기키 위해서 결론부터 보여주지 않고 서론에서 역사적인 배경을 끌고 가면서 이스라엘의 비참한 영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깔고 6절에서 이사야가 소명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 어떤 선지서에서도 없는 독특한 플라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선지자로서 중요한 것은, 기본적으로 총론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 선지자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것입니다. 누구도 원칙에 빗겨가지 않은 소명의 기본입니다. 놀랍게 신약시대에도 구약의 선자자의 소명사건과 전혀 다르지 않거나 똑같습니다. 유명한 김세연 교수님이 논문으로 쓴 “바울복음의 기원”의 핵심이 꼭 이사야 6장을 설명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엄청나게 넓은 바운더리를 가지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규명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사역을 하고 했던 사역마다 다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던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오늘 우리는 목회로 성공한 사람은 신학계에서는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신학자로서 이름이 난 사람은 목회에서는 알아주지 않습니다. 강의를 듣기 위해 그 사람을 부르는 것이지 영혼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그 사람을 부르지는 않습니다. 전도의 세계에서 이름이 난 사람은 그냥 전도자로 유명할 뿐이지 목회의 세계에서는 그 사람의 마인드를 다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또 최근에 작고하신 청교도의 권위자 제임스 패커 교수님, 제가 리젠트 칼리지에 갔을 때 직접 그분을 뵙지는 못했습니다. 아마 안식년이어서 학교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너무 궁금해서 거기 학생들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패커 교수님은 강의가 어떠시냐?”, “Boring 합니다.”, “너무 지루합니다. 강의보다는 책이 훨씬 훌륭하십니다.”했습니다. “하나님을 지식”이 세계적으로 500만권 이상이 팔렸습니다. 강의의 세계와 저술가의 세계가 다른 모양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그렇지 않고 저술가로서, 기독교 철학자로서, 기독교 사상가로서, 그리고 전도자로서, 전도기획자로서, 그리고 따뜻한 목회자로서, 개척자로서, 모든 방면에서 성공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사도행전에서 했던 설교들을 가지고 제가 공부하던 대학원 시절에 엑스트라 비블리컬 리소소, 성경 밖의 자료들과 상관관계를 조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엄청납니다. 심지어 아나투스라는 사람의 그리스식 희극작가의 인용문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그 당시 스토아철학 같은 것에도 정통했습니다. 굉장한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도바울을 연구할 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중심을 못 잡습니다. 백두산이 2743m인데 우리는 중국으로 해서 천지까지 올라가봤습니다. 정말 예쁘다고 하는데 구름 때문에 안 보여서 여섯 번 올라가면 한 번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너무너무 아름다운 광경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에서 봤습니다. 사진을 찍어왔는데 영상을 편집한 것처럼 아름답습니다. 거기 동행했던 사람이 하는 말이, 중국에서 올라가서 보는 백두산은 여인의 뒤통수를 보는 것이고 북한쪽에서 올라가는 것은 그 여인의 정면을 보며 올라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잘 들어보십시오. 제가 40년 가까이 신학을 하면서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이 시작점이 없이, 꼭대기도 아니고 아무데나 떨어뜨려 놓고 거기서부터 백두산 탐사를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계곡에 떨어졌고 한 사람은 저쪽 굴속에 떨어졌고 한 사람은 높은 곳에 있는 작은 바위 위에 떨어졌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땅바닥에 떨어졌습니다. 거기서 그렇게 각자 돌아다니면서 지도를 그려서 백두산이라고 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백두산의 한 쪼가리지 백두산일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합니까? 백두산은 없었습니다. 폭발과 함께 쏟아져 나오면서 산이 생긴 것입니다. 결국 백두산의 뿌리는 분화구 그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다메섹 사건입니다.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는 경험을 한 것이 폭발한 사건이 되었고 그 폭발한 것이 위로 솟으면서 백두산을 만든 것처럼 신학자의 지층과 목회자, 선교가, 작가, 역사가, 이 모든 것들이 쌓이면서 바울이라는 웅장한 인물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바울을 연구해도 다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시대의 문맥에서 그 사람이 되었고 여러분은 이 시대의 문맥에서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설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을 가슴에 새기십시오.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기도하십시오. 무슨 말인지 몰라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함으로써 목회자가 되는 것입니다.
로이드 존스의 “목사와 설교”를 한 줄로 그 두꺼운 책을 요약하라고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만 목회자가 될 수 있다. 설교자의 부르심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과 함께 온다.” 주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고 말씀의 종이 될 결심을 하셔야 합니다. “나는 소질이 없다.”하시지 말고 영광을 경험해보고 하십시오. 저도 세 명만 모이면 말을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영광을 경험해보고 그때도 능력이 없으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지금은 총론이고 세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화로나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망하게 되었다”는 히브리어로 “파멸당하다”입니다. 전투 같은 것에서 괴멸되는 것, 건물이 폭격에 부서져버리는 것 등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망한다”는 무슨 뜻입니까? 기존의 질서가 완전히 부서져버려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이 “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안 쫄딱 망했어.” 이 말은, 예전에 쓰던 신용카드를 쓸 수 없고, 예전에 살던 집에서 살지 못하고, 예전에 먹던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면 싹 쓸고 지나가고 파멸되어서 기존의 질서가 작동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화로다” 이 말은 무슨 말의 반대말입니까? “복이 있도다”의 반대말입니다. “복이 있도다”는 “헤슬레”입니다. 그것의 반대입니다. 이 “화”는 돌맹이가 날아오고 화살이 날아와서 당하는 육체적인 고통을 뜻하는 게 아니라 영적으로 자신이 파멸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화로다 나여” 너무 가련해서 자신을 부르는 것입니다. “나로 망하게 되었도다” 이것이 첫 번째 당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은 설교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이것은 똑같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설교를 할 때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보인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어찌해야할꼬” 였습니다.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비전을 품었습니까? 비전은 무슨 개뿔, “주여 내가 어찌하여야 하리이까?” 이 말이 바로 “내가 망하게 되었나이다”, “파멸에 이르렀나이다” 하는 뜻입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핵심은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는 이유는 두 가지 때문에 놀라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성 때문에 놀라고 하나님의 의지 때문에 놀랍니다. 그 지성이 바로 지식이고 지혜고, 의지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의지가 어떤 의지입니까?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사랑입니다. 그 지혜와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는데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다고 설교자로 소명을 받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면서 그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와 사랑에 압도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서 자신이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존재에 있어서 그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에 비하여 자신이 아주 미천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고, 자신이 너무 더러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실재론적으로는 절대적이지만 인식론적으로는 상대적입니다. 주위의 도덕수준이 개떡같이 낮으면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도덕수준이 높으면 주눅이 듭니다. “아, 나는 진짜 형편없는 사람이구나!”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경험한 것은,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미천한 인간인지를 깨닫게 되고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인간인가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도 깨달았습니다. 오늘 아침에 잠이 오질 않아서 병원에 갔는데 제 아내가 약을 먹고 잠을 잘 자길래 그 약 하나를 먹었는데 하루 종일 가면상태에 있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 다음날 절반을 먹었는데도 하루 종일 해맸습니다. 어제 저녁에는 조그마한 알약의 7분의 1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 여섯 시간을 푹 잤습니다. 그것도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습니다. 눈곱의 5분의 1도 안 되는 그 약 하나가 나를 잠재우고 깨우는 것입니다. 못 자게 하거나 푹 자게 하거나 말입니다. 그렇게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깨닫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기가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자기가 감히 설 수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용서받는 단계입니다. 4절에 보면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용서의 경험입니다. 용서의 경험은, 내가 저 사람을 때렸는데 그 죄가 생각나서 그 사람을 찾아가서 빌고 돌아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더니 양심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런 수준의 용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어떤 특정한 죄가 용서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으로 자신의 존재 자체를 용서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전존재적인 용서의 경험입니다. 그것이 사실 본문의 핵심입니다. 낮ㅇ에 기회가 닿으면 이사야의 소명과 사도바울의 소명 두 가지를 비교해서 연구해보십시오. 사도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는 그 순간까지 감옥 속에서 그 사람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기만 하면 눈물이 났고, 그 생각이 떠오르기만 하면 할 말을 잃게 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인 중에 내가 괴수로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충성되이 섬길 것으로 미리 여겨주셔서 나를 용서하시고 주의 종으로 삼으신 것이다.” 그것이 이 사람이 지은 어떤 하나의 죄에 대한 용서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하나님을 반역하는 죄악 덩어리이고, 사도바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것을 절절하게 깨달으면서 용서의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 죄를 용서해주시는 방식입니다. 스랍은 천사의 부류 중 하나인데, 스랍 중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의 숯불을 가져와서 그것을 입술에 대는 것입니다. 시뻘건 숯불을 입술에 대면 어떻게 됩니까? 입술이 지져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5절부터 7절까지 신체의 관심사가 입술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하고 영광을 경험하면서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고 또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들 중에 있는 또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나의 입술만 부정한 것이 아니라 나는 이 백성들 중 하나인데 이 백성들 모두의 입술이 더럽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정하다”는 것은 결례적인 요소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왜 그렇게 집요하게 입술을 붙들고 늘어졌을까?” 솔직히 이야기해서 우리의 악이 우리의 입술에만 있는 게 아니라 주먹에도 있고 보는 눈에도 있고 들리는 귀에도 있고 온 지체 어디든지 다 있지 않습니까? 온 지체가 죄와 접촉을 하지 않습니까? 왜 입술에 대해서만 그렇게 물고 늘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저는 20년 전쯤에 여러 날을 고민했습니다. 입술이 뭘까? 성경을 찾아봤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입술”이라는 말 속에는 숯불을 입술에 대면서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설교자의 소명과 입술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 시편에도 보면 입술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입술은 마음의 열매입니다. 굳이 그 사람 속에 들어가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입술에서 떠들고 나오는 소리들을 들어보면 그 사람의 속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수근수군하고 비방하고 남에게 욕설을 퍼붓고 탐욕을 드러내고 하는 것이 입술을 통해서 나옵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어디로 고백합니까? “네 입술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은 단어입니다. 그만큼 유대인의 컨텍스트에서 본 이 입술은 아주 신비한 신체의 기관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입술의 열매를 드리오니 받아주시옵소서”라고 시편에서 노래합니다. 이것은 제유법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과 육체가 불결한데, 그 불결하다는 표현을 제유법적으로 “내가 입술이 더럽고 나와 함께 있는 백성들의 입술도 더러운데 나도 그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더러움과 공동체의 더러움이 함께 엮여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그러한 내면의 세계로는 그 본 것을 증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천사가 숯불을 가지고 입술을 지져버린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제유법적인 사인이 된 것입니다. “자, 이제 너의 모든 사지, 백체, 네 영혼과 정신 모든 것이 죄 사함을 받았다. 그리고 네 입술은 구별되었다.”하시면서 숯불로 지져버리신 것입니다. “네 입에 닿았으니 악이 제하여졌고 죄가 사하여졌다.”
설교의 깊이는 용서받은 깊이입니다. 제가 다윗의 이야기를 자주 하는데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다윗만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특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죄를 지었어도 죄를 지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통곡하며 하나님을 찾는 마음입니다. 그것이 다윗의 용서의 핵심이었습니다.
우리가 김기훈 목사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열린교회의 목사인데 어떤 사람은 금요기도회를 뜨겁게 인도하던 사람으로, 목회자로서 사랑으로 심방하던 분으로, 컷트, 컷트로 기억합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로 김기훈 목사의 전체를 다 평가합니다. 그 컷트가 여러 개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정확하게 놓고 보면, 모든 것을 다 돌려봐야 합니다. 심지어 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면 설교하는 순간만 봐서는 안 되고 설교하고 집에 돌아가서 대판 싸우거나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밤에 자던 이불에 부끄럽지 아니하며”라고 옛 현인들이 노래했겠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산다는 뜻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의 심리학에도 나옵니다. 사람들은 그 많은 컷트 중에서 뭘 선택할지를 저 대상에 대한 감정이 결정해주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 김기훈 목사를 굉장히 좋게 봤습니다. 그러면 수많은 컷트 중에서 아름다운 컷트만 채택됩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있어서 그 사이가 틀어져서 서로 다투게 되면 최악의 컷트만 채택하게 됩니다. 전자는 최고의 은혜로운 목회자로 칭찬을 하고 후자는 세상에 몹쓸 사람으로 욕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을 보는 성경적인 시각이 아닙니다. 그런 시각으로 살면 끊임없이 사람을 의심하는 비열한 인간으로 살거나, 아니면 아무 이유도 없이 사람을 추종하는 삶을 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누구나 다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랑에는 어떤 힘이 있습니까? “사랑은 악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이것을 희랍어 원어로 보면 “사랑은 악한 방식으로 해석하지 아니하며”입니다. 해석하는 방식이 좋은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런 어두운 면과 밝은 면을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너무 존경하지 마십시오. 누군가를 아주 몹쓸 사람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냥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 보셔야 합니다. 그런 양면성을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감정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필름으로 놓고 본다면 솔직히 다윗의 윤리 수준은 이스라엘 백성의 100분의 1 이하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백 명의 한 명이 살인을 하면 우리 교인 중에 살인범이 최소한 장년 중에서 서른 댓 명은 나와야 1퍼센트 아닙니까? 그런데 정말 그렇겠습니까? 그 당시에도 전쟁을 해서 사람은 죽여도 평상시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살인은 살인으로 다뤘습니다. 지금은 사람을 죽여도 사형당하는 예가 없습니다. 사형시키지 않습니다. 1천 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의, 윤리적으로 바닥이라고 보면 됩니다. 궁금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을까? 용서를 받았을까? 하나님이 용서해주셨을까? 그 대답을, 우리는 하나님의 품을 파고든, 자신이 어떤 죄를 지어도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종종 목회자 중에서 큰 죄를 짓고 교회를 사임하고 사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 속으로 항상 기도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바로 그런 때가 주님을 더 깊이 찾아야 할 때, 만나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전에 내가 했던 어떤 한두 가지 일을 기억하며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내 인생 전체를 바라보시고,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지를 바라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후에 전하는 메시지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 두 가지가 백그라운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을 피를 토하듯이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툭하고 끝나지 않습니다. 항상 뒤에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이 어떻게 그 백성을 사랑하시는지를 흐느끼시며 보여주십니다. 앞에 있는 것은 율법적인 요소이고 뒤에 있는 것은 복음적인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이 불결의 경험,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동시에 깨닫게 됩니다. 설교자는 이것에 대해서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만이 설교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그럼 우리는 설교자가 아니라는 말입니까?” 하실 텐데, 설교자입니다. 설교자인데 매우 특별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설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한 때 로이드 존스 목사에게 푹 빠져있었습니다. 그의 성령론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설교자가 아주 희미하게나마 하나님에 대해 한줄기 빛을 보여줄 수 있다면 나는 그의 모든 것을 용서하겠습니다.” 그렇다고 존스 목사님께 “존스 목사님, 당신이 나를 용서하실 권리가 있습니까?”물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 사람으로 용납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런 깊은, 율법과 복음에 대한 경험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8절에, “그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했는데, 앞에 첫 번째는 율법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고 두 번째는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러고나니까 도저히 자기가 본 하나님의 영광을 간직하고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락회 시간에 끼가 발동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만히 있으며 저주를 받을 것 같은 사랑의 강제력을 느낀 것입니다.
보내달라고 했는데 어디로 보내달라는 것입니까? 장소가 아닙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이것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의논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쨌든 “누가 우리를 위해 갈꼬” 할 때, “나를 보내소서”한 것입니다. 그것은 장소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 영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연민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계를 보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그것 때문에 우월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사람이, 나는 보았고 너는 못 봤다는 것 때문에 이 사람에 대해서 우월감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가질 수 있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가질 수 있습니다. “저 사람도 눈을 떠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나를 보내소서.” 히브리어의 “샬라흐”라는 단어입니다. 화살을 쏘아 날릴 때도 이 단어를 쓰고, 이 단어가 많이 쓰일 때는 종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 사용되었습니다. “샬라흐”, “아브라함이 종을 보내니 그가 갔더라” 할 때 쓰인 것입니다. 여기서 심정은 하나님의 대리자가 된다기보다는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개념입니다. “그가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오나이다” 하는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제 마음에 이런 생각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설교자가 되고 나면 아무것도 필요 없어집니다. 여러분이 벌판에 깃발을 세우고 예수의 사랑을 전해도 결국 여러분의 설교를 듣는 사람이 나옵니다. 몇 만 명이 모일 것이라고 보증을 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듣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것을 의지해서 모든 고난을 받으며 전파하다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복을 누리며 말씀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말씀을 섬기다가 그 말씀 때문에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설교자의 미래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고 나서 한 3년 동안의 기도제목이 순교였습니다. 이 시대에 어떻게 순교를 당할지는 몰랐지만 정말 죽고 싶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꼭 순교할 수 있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서, 사실은 오늘날 하나님이 순교보다 더 기뻐하시는 열매는 순생의 삶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그 내적인 순교 때문에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한 순간에 자신의 목을 대적자의 칼에 드리우는 것 보다 날마다 이 타락한 세상에서, 끊임없는 유혹을 받는 목회적인 현실 속에서 자기가 경험했던 그 하나님의 그 위엄을 생각하면서, 그때 자기가 얼마나 티끌같은 인간이었는지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역겨울 정도로 더럽고 토할 것 같은 존재였는지를 계속해서 상기하는 것, 그리고 그런 자신을 하나님이 그 많은 죄에도 불구하고 용서하고 사랑해주셨다는 것, 그것이 한 번에 끝난 게 아니라 이후에도 살아온 인생 자체가 그 끊임없는 용서를 힘입어서 살아온 것입니다.
저는 충성스러운 사람이 못 되었습니다.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보다 내 염려를 하며 살아왔습니다. 저는 충성스러운 사람이고 인정받고 싶지만, 주 앞에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달려왔다고, 충성스럽게 달려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끊임없이 나보다 옳은 사람들의 편을 들어주시기 보다는 때로는 그들만도 못한 내 편을 들어주시고 심지어는 내가 충성스럽지 않을 때도 다시 한 번 충성스럽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을 생각하면서, “거기서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그것이 네가 바치는 순교의 열매보다 내가 더 받고 싶은 열매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설교자의 영광은 성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영광은 자신의 설교를 듣고 회심하는 사람에게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눈을 떠서 자신과 똑같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제 네 죄가 사하여졌도다”, 그리고 그 사람도 똑같이 “주여 나를 보내소서” 하는 사람이 자신의 설교를 통해서 생겨나는 것을 보는 것이 설교자의 영광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모두 탁월한 설교자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이 설교를 듣는 어떤 사람들은 마음속에 불같은 사모함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 주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못한다면 차라리 하나님의 영광을 그리워하다가 주님의 품에서 죽게 해 주시옵소서.” 하며 하나님 앞에 열렬하게 매달린다면 설교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달라질 것입니다. 과장을 하자면, 어제까지는 아니었는데 오늘 달라지고, 순식간에 완전히 옛 사역자가 아닌 새 사역자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하나님이 한 순간에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것에 우리의 경험과 경륜이 쌓여가면서 정말 영향력 있는 설교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별로 따라하지 않지만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전기를 읽으십시오. 성경으로 충분하지 않고 위인들의 전기를 읽으십시오. 그러면 생생한 것을 보여줍니다. 그 우렁찬 설교로 한 역사를 뒤흔들어 놓았던 인물들을 보면서 가슴이 뛰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렇게 찾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설교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올라가서 설교를 하면 성령이 회중을 덮더라, 누가 올라가서 설교를 하면 교회가 눈물바다가 되더라, 하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아무 두려울 것도 없습니다. 그저 지하실에서 셋방하나 얻어서 깃발을 꽂으면 사람들이 모입니다. 반드시 성공합니다.
마지막 한 마디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어떤 교회에 설교하러 갔습니다. 끝나고 다과를 베풀었는데 제 앞에 앉으신 분이 경희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님이었습니다. 옛날에 주일학교 다닐 때는 교회에 가마니를 깔고 시작했습니다. 실감도 안 나실 것입니다. 쌀가마니 아십니까? 짚으로 짠 것을 사진으로 보기는 했지만 만져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쌀가마니를 터서 멍석처럼 쭉 펴고 앉는 것입니다. 그것이 대부분의 개척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거기서 설교를 하는데 강대가 없어서 사과 궤짝 두 개를 수직으로 세워서 못을 받아두면 딱 그 높이가 됩니다. 거기에 성경책을 올려놓고, 심지어는 전기가 없어서 촛불을 켜놓고 예배를 시작합니다. 설교를 하는데 생생합니다. 부흥회 끝 무렵인데 사람들이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그 가마니 위해서 데굴데굴 구르며 회개를 했습니다. 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요즘은 너무 편한 교회만 좋아합니다. 예전에는 가마니를 깔고 사과 궤짝 두 개를 놓고 교회를 시작했는데 이제 교인들은 웬만큼 해서는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했더니, 그 교수님 거만하게 말씀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 분의 대답이 제 마음을 쿵하고 울렸습니다. 나는 30대 중반이었고 그분은 50대 중반이어서 머리가 희끗희끗하셨으니 제가 본 것을 그분도 보신 것입니다. 그분은 저보다 더 가난한 시절의 교회도 보셨을 것입니다. “목사님,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때 그 가마니를 깔고 설교하시던 목사님들처럼 그렇게 피를 토하듯 설교하면 가마니 깐 예배당에서 무릎을 꿇고 모일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때가 30년 가까운 세월이 되었는데도 제 마음에 울림이 떠나지 않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디자인이고 뭐고 필요없습니다. 내주 예수 모신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주님을 깊이 만나고 잊을 수 없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똑같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이 결혼하기 전에 사모님을 만났을 텐데 첫 키스를 어디서 했습니까? 호텔이었습니까? 필요 없습니다. 그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 그것이 어디였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때 붙잡았던 손, 그 사랑의 감격,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가 없습니다. 중보기도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주님 앞에 매달리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