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에 어떻게 목회할 것인가?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
녹취자 : 김지혜
사도 바울이 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전도 여행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마도 사도 바울에게 ‘당신이 가장 행복했던 목회의 시절이 언제냐’고 물어보면 바로 이때였을 것입니다. 서아시아 지방에 머물면서 특히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때일 것입니다. 또 반대로 당신이 목회 중 가장 고통스러운 때가 언제냐고 물어보면 또 똑같이 바로 그때라고 말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고통스러운 것과 행복한 것이 공존할 수 없는데 목회의 세계에서는 이 두 가지가 가능합니다. 그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장면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는 장면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쩌면 이 예루살렘 가는 길이 자신의 마지막 순교의 길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밀레도라는 곳까지 갔을 때 바울은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어서 교회의 장로들을 오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제 생각에는 에베소 장로들을 만나는 게 마지막일 것 같아서 유언과 같은 설교를 남기기 위해서 특별히 부르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때 그들에게 말씀한 내용이 18절 이하에서부터 마지막까지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제 다 크게 울면서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다시 그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한 말 때문에 근심하면서 배까지 그를 전송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가 그렇게 힘들게 목회해서 많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에베소교회가 큰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세워지잖아요. 그러면서 그 놀라운 부흥이 에베소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온갖 허무한 마술하는 책들을 불태우면서 에베소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렇게 능력 있는 목회를 했단 말입니다. 그 할 일 많은 사람이 3년이나 한곳에 머물면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것은 한곳에 머물러 있기를 원해서라기보다 사람들을 말씀으로 든든히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3년 동안이나 거기에 머물러서 말씀 목회에 전무(專務)하였던 것입니다.
목회자가 한 교회에 머무르고 있다고 할 때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이 목표는 그냥 교회에서 있다가 전임이 되고 부목사가 되고 담임 목사가 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영적으로 내가 이 교회에 있는 이유가 뭐냐고 했을 때, 주님이 “너 여기 계속 있어야 하는 사람이냐, 왜 네가 여기 내가 너를 여기다 놔둬야 하냐”라고 물으시면 “이 이유 때문입니다”라고 또렷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회자를 하나님이 거기에 두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 목회를 잘했습니다. 이 통찰력 있는 사도 바울의 눈에는 그 광경이 다 보입니다. 무슨 광경이 보이냐 하면 자기가 떠나고 나면 사나운 이리떼들이 몰려올 것이라는 게 보입니다. 이단들과 이교도들, 말하자면 불신자들의 거대한 박해였습니다. 여러분 에베소 못 가보셨죠? 에베소가 당시에 5만 명이 모이던 도시였습니다. 당시에 5만의 도시는 로마에서도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폼페이 같은 도시가 5만 명 정도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도시였습니다. 그 당시가 1세기 아닙니까? 조선이 1300년대니까 한 14세기 정도를 해도 조선 한양이 한 20만 명 정도. 전 세계에서 굉장히 큰 도시였습니다. 런던이 15만 명밖에 안 되던 시절에 한양이 21만 명에서 그리고 그 뒤로부터 1300~1400년을 거꾸로 돌려서 5만 명이라고 하니까 그 어마어마한 도시였습니다. 지금도 가서 보면 그 도시 규모가 입이 딱 벌어질 정도입니다. 어마어마하게 도시에 얼마나 많은 이단적이고 이교적인 사상들이 있겠습니까? 악랄한 박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결국은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이 일어날 것으로 예측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가르친 사람들 중에서도 이단들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이미 예측한 것입니다.
여기까진 서론이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면 어떻게 그런 것에 대해서 대책을 세워야 할까요? 그가 말하는 것은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워 기억하라’ 그것이 대책이었습니다. ‘일깨워라’는 이야기는 신앙적으로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이야기입니다. 누가 깨워서 깨어 있는 게 아니라 물론 누가 깨워서 깨고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이거는 자기가 스스로 자각을 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눈만 뜨고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이 시험에 들지 않게끔 현실을 보면서 자기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할까 하는 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자기 자신이 깨어 있어야 하겠다는 이 각오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게 ‘내가 이러면 안 된다’, ‘깨어 있어야 한다’는 강력한 자기 각오가 필요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지만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일깨워서 기억하거라 그것입니다.
그 얘기는 이 자기 자신을 일깨우는 것과 기억하는 것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거를 보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이 마르는 기적을 보면서 건너고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기적을 봅니다. 그러면서 타락하기까지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그 일이 일어나요.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잊지 말라, 기억하라는 말이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생각나게 하라는 말도 많이 나옵니다. ‘깨어 있다’라고 하는 것은 잊지 않는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그 무엇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걸 뭘 기억을 하라고 그러는 것일까요? 지금은 성경을 보셔도 됩니다. 우리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 20:31).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로, 내가 훈계한 것을 기억하라고 했습니다. 3년 동안이나 쉬지 않고 훈계한 것입니다. 히랍어 성경이 ‘뉴뎁톤’이라고 나옵니다. ‘누스’라는 정신이라는 단어와 ‘티뎀’이 ‘노타’라는 동사가 합쳐져서 ‘뉴스테테오’라는 단어가 나온 것입니다. 그게 분사형입니다. 여기서 모든 일들이 전부 다 이렇게 그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훈계는 '타이르다', '권고하나' 이런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권고하고 타이르는 것도 여러 종류가 있잖습니까? “이 집 마트보다는 저 집 마트가 싸니까 원하시면 그리로 가셔도 됩니다.” 이것도 권고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상품이 별로 좋지 않으니 내일 오셔서 사시면 더 신선한 상품을 구하실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적금보다는 그래도 주식이 요즘 돈을 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번 해보시겠습니까?”라고 권고하는 것입니다. 이 단어는 그런 데 쓰는 단어가 아닙니다. 명확한 어떤 진리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꼭 그리로 가게끔 강력하게 충고하는 것을 가리킬 때 이 단어를 쓰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우월한 지위에서 판단력이 없는 학생에게 훈계할 때 "너 그러면 안 돼 혼난다"고 똑 부러지게 가르칠 때 이게 훈계하는 것입니다.
목회자 사도 바울이 3년 동안 거기 있으면서 한 일은 뭘까요? 훈계한 일이었습니다. 이게 번역이 적합하지 않습니다. 딱 맞아떨어지는 단어가 없습니다. 오히려 ‘권계하다’라는 말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렇게 이렇게 해라. 안 그러면 이렇게 큰일이 난다. 이렇게 하면 굉장히 나쁜 일이 일어난다.” 이런 식으로 아주 엄중하게 가르치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가 떠나고 나면 수많은 이단과 대적자들이 몰려오는데 그것에 대한 대책이 기억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상기하라. 기억하는 상태에서 계속 있어라.” 그런데 그것이 무엇을 기억하라는 것입니까? ‘내가 훈계했던 것들을 기억하라. 내가 뭘 훈계했는지 기억하라.’
무엇을 훈계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놀랍게 21절에 나옵니다.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행 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 이 두 개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한 믿음. 이것은 신학적으로 회심의 두 요소입니다.
항상 사도 바울은 가르침이 이중적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케리그마와 디다케입니다. 케리그마는 초대교회의 선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디다케는 디다스코, ‘가르치다’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네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케리그마입니다. “그리니까 너는 이제 더 이상 내 육신을 위해 살지 말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라.”는 디다케입니다. 그러니까 ‘이웃에게 사랑을 베풀고 자비롭게 대하라.’ ‘부모는 공경하고 자녀들은 사랑하고 종들을 관용스럽게 대하고 권세자들에게 그들이 올바르다면 복종하고 빛된 윤리적인 삶을 살아라’를 가르친 것입니다. 그 모든 걸 가르쳤습니다. 그것들은 고구마 줄기처럼 따라 올라가서 하나의 케리그마에 매달려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회개였고, 너희는 죄인이고 하나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선포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너희들이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교훈, 정치, 경제, 사회, 윤리, 도덕, 심지어 역사를 보는 시각까지 다 가르쳤던 것입니다. 거기 두 개의 원이 겹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이 두 가지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왜 있습니까? 여러분이 어떤 재능이 있어도 한 가지가 없다면 교육자일 수 없습니다. 그 한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훈하는 사랑입니다. 그 태도는 때로는 엄중할 수도 있고 때로는 소리칠 수도 있고 때로는 눈물로 호소할 수도 있고 때로는 예를 들면서 가르칠 수도 있고 때로는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듯이 가르칠 수도 있습니다. 근데 심겨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년 동안 여러분이 사역하면서 '아, 내 목회는 말씀 목회였다. 내가 정말 부족하지만 아이들의 마음속에 말씀이 심겨졌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 가장 열렬히 기도해야 합니다. 주일학교 잘한 사람이 청년부도 잘합니다. 청년부 잘한 사람이 장년부도 잘합니다. 근데 여기서(교회학교에서) 못하는 사람은 좀 나이 많은 사람을 맡겨준다고 해서 잘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이 사람들이 심겨지는 원리는 기어 다니는 영아부 아이들부터 시작해서 곧 임종을 하려고 하는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똑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훈계였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너에게 뭘 가르쳤는지를 기억하면 그런 이단들이 떼거지로 일어나도 너희는 능히 믿음을 지키고 거기에 대항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예수 믿고 나서 너무너무 부러운 사람이 예수 잘 믿는 엄마 아빠를 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자기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 주잖습니까? 그래서 조용히 눈을 감으면 엄마 아빠가 다 돌아가셨는데도 그 찬송 부르면서 수없이 울었습니다.
(찬송)
예수 세상 계실 때 많은 고난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한 일
어머니가 읽으며 눈물 많이 흘린 것 지금까지 내가 기억합니다.
그 아이는 어떤 아이입니까? 엄마가 남겨준 신앙이 마음속에 들어간 아이입니다. 그 훈계가 걔를 붙들고 있기 때문에 엄마는 죽었는데 엄마에게 물려받는 신앙은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인생을 헤쳐나가는 것입니다. 눈물 나도록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 바울에게서 배우는 것은 가르침의 목회입니다. 그들의 영혼을 제자리에 갖다 놓는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믿음을 파수하며 살 수 있는 그 가르침이 있는 목회였습니다. 심령 깊은 곳에 영향을 끼쳐서 그래서 어떠한 난관이 오더라도 그 바울 사도가 전한 말씀을 생각하면 힘이 나는 그런 말씀의 목회였습니다.
둘째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각 사람이라는 단어입니다. 희랍어로 말하자면 '일일이', '낱낱이', '한 사람씩' 그런 뜻입니다. 한 영혼 한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있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조금 규모가 커진 교회에서 목회자들이 일하다 보면 단점이 있습니다. 영혼으로 안 보이고 집단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덩어리로 신도시에 있었던 교회에서 실제 교육자 회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증언을 해줬으니 거짓말이 아니겠습니다. 아파트가 막 들어서면서 교인들이 막 몰려온 것입니다. 목사님이 잘하셨으니까 왔겠죠. 부교역자들끼리 회의를 하다가 머리가 터지는 것입니다. 우연히 한 사람 입에서 ‘에이씨, 왜 우리 교회로는 몰려오고 난리야’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몰려오는 많은 교인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으로 보인 게 아니라 집단으로 보인 것입니다. 장사하는 사람이라도 고객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건 팔아주러 오니까 말입니다. 그런 일이 얼마나 우리에게 경고가 되는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모인 숫자에 치중하거나 현혹되어서 마치 사장처럼 목회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일일이 낱낱이 한 사람씩을 기억하며 목회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역사에 보면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 칼빈이 목회의 시간 중 많이 쓴 시간이 심방이었던 거 기억합니까? 제네바에 1차로 부임했을 때 5천 명 모였는데 제네바에서 목회를 마감할 때 만 5천 명이었습니다. 그 많은 신학 활동과 논적들에 대한 정치적인 탄압, 시의회와의 관계 이런 것들은 모두 꾸려가면서도 병든 자, 고아들, 과부들, 이런 사람들을 심방하면서 목회를 했던 것입니다. 그런 면들이 사실은 잘 안 드러났습니다. 정말 뜨거운 가슴이 소유자였습니다. 사랑의 목회를 했던 것입니다. 그건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심방하는 것은 여러분의 목회에 있어서 엄청난 기억에 남는 사건들이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열린 교회를 떠나면 어느 교회에서도 그렇게 대심방을 하라고 강요하는 교회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런 교회들이 거의 사라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조사해 보니까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굉장히 우리 교회도 규모가 큰데 하여튼 줄기차게 심방하는 교회들이 있더라고요. 그런 교회는 영원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많이 쇠약해졌는데 부산에 1980년대에 1만 5천 명의 주일 학생이 모이는 교회가 있습니다. 신부산교회인가 그랬습니다. 백파교회였습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이 하루에 120명을 심방을 했습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직장 가기 전에 심방하고 직장 갔다 와서 밤까지 심방하는 것입니다. 120명인데 걔가 버스 토큰 떨어진 것까지 다 기억을 했다고 합니다. 교사가 그 정도니까 전도사는 얘기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만오천 명씩의 어린이들이 거기에 모여서 지구촌 최대의 말하자면 (주일학교가) 됩니다. 굉장히 단순합니다. 지난 주일 목사님이 설교한 것이 그 다음주에 공과 책입니다. 그걸 가지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영혼 한 영혼을 돌보는 목회자의 모습 속에서 대신학자, 대철학자, 대사도, 대전도자, 이런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한 영혼을 가엽게 여기면서 목회를 했던 것입니다. 그걸 기억하면 이리떼들이 몰려와도 능히 교회를 지켜야 될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쉬지 않는 목회입니다. 오크 에타오사멘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오크’는 ‘아니다’이고 ‘에타우사멘’은 ‘쉬었다’입니다. 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오크는 희랍어에서 강한 부정입니다. 그러니까 ‘결코 쉬지 않았다’입니다. 한 번 설교할 때 수많은 사람을 회개하고, 목회할 때 어린이들이 막 몰려오는 것은 그건 하나님이 다 특별한 은혜를 주셔야지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모두 갈망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육자로서 용서받을 수 없는 죄는 나태한 것입니다. 태만한 것입니다. 이 양떼들을 죽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도 죽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제가 무능하기는 했지만 근데 양심에 비추어서 나는 쉰 적은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내수동교회를 떠나서 총신 근처로 이사를 갔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어 교회에 올라가다가 도로 내려갔습니다. 우리 집사람한테 말했습니다. “난 이 예배를 안 가겠다.” “아니, 지금 시간도 다 됐는데 왜. 그냥 가지”라고 집사람이 그럽니다. “애들이 싼 똥이 계단에 놓여 있다. 나는 그런 걸 이해할 수 없다.” 내가 하는 얘기는 이것입니다. 찾아온 영혼에게 가슴이 터질 듯한 감동적인 설교를 못하는 것은 ‘너 지금 왜 그렇게 못하느냐’고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그냥 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니까 앞으로 변해가야 합니다. 근데 그 장소가 더러운 걸 책임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건 자기가 부지런하기만 하면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교에 벼락이 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당장 물을 수는 없지만 갈멜 산에 장작을 쌓아놓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설교 준비를 했는데 성과가 이것밖에 안 되었나이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이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준비도 안 하고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지 않기 때문에 이것밖에 못했다고 하면 안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양심의 손을 얹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제가 굉장히 힘든 일이 있었을 텐데 참 많이 울었습니다. 설교을 수없이 했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이제까지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여러분도 아는 바니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관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그가 제일 먼저 에베소에서의 목회에서 생각난 단어는 겸손과 눈물 그리고 또 하나 있었다면 고통이었습니다. 대사도가 아니라 진짜 연약한 갈대 같은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능력은 부족했으나 그러면 결코 쉬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내가 여러분만할 때는 전기에 미쳤었습니다. 내가 오늘도 걸어오면서 ‘이 친구들이 왜 전기를 안 읽을까’ 참 궁금했습니다. 저는 전기에 거의 미쳤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은사도 다르고 시대도 다른데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우크 에타우스 다민.’ 결코 쉰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열렬하게 사역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 단명했습니다. 내 이야기는 빨리 죽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쉬지 않고 그대로 번역하면 중지하는 일이 없이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고 회개하는 사람이 생겨날 때도 있고 돌맹이를 맞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섬김을 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의 목회의 세 번째 모본입니다. 가르치는 목회, 각 사람을 돌보는 목회, 쉬지 않았던 목회. 그러니까 자신의 힘에 진하도록 섬김. 밤이나 낮이나 할 것 없이 자신은 끊임없이 쉬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본 받아야 됩니다.
넷째로, 눈물의 목회였습니다. “눈물로” 그 가르침이 그냥 감정이 솟구치거나 아니면 미운 마음이 솟구치는 훈계가 아니라 히랍어 성경에는 ‘메타 다크 리온’이라고 나옵니다. 복수입니다. ‘위드 티어’가 아니라 ‘위드 티얼스’입니다. 한두 번 흘린 눈물이 아니라 수없이 눈물 흘린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에베소의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내가 떠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온 것을 당신들이 다 봤다. 그런데 모든 격론과 눈물이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으면 당신들이 눈물을 기억하겠냐” 근데 그 눈물은 복수입니다.
청계산에 올라가잖아요. 비가 며칠만 오면, 며칠도 필요 없습니다. 하루만 잔뜩 쏟아지면 그다음 날 올라가면 기분좋게 소리를 내면서 물이 흐릅니다. 그리고 계곡의 온도가 뚝 떨어집니다. 고여 있던 장구벌레들이 다 떠내려가서 모이도 없어집니다. 신선한 바람이 물과 함께 불어옵니다. 물이 흘러야 산이 아름답고 교회에는 은혜가 흘러야 교회가 교회 나오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회는 목회가 산이라면 목회자의 눈물이 흐르지를 않잖습니까? 꽤 잘 섬기던 교사들이 툭툭툭 넘어지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침체에 빠지고, 죄를 짓습니다. 어떤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죄를 저지릅니다. 그리고 쓰러집니다. 그런 속에서 이미 오래전에 목양은 병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온갖 더러운 벌레들이 생겨나면서 거기에서 퍼지잖아요. 그러니까 산에 올라갔는데 물이 거의 없이 흐르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뭐 온갖 지저분한 벌레들이 생겨나잖아요. 그 숲속에 새카만 모기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라고 하는 산에는 목회자의 눈물이 흐릅니다. 눈물이 없는 목회는 근로입니다. 종교 근로 활동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삯을 받는 것입니다. 그게 삯꾼입니다. 요한복음 10장에 나오는 삯꾼과 참목자의 비유는 굉장히 나쁜 사람을 삯꾼으로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양을 치는데 500마리는 쳐야 생계가 되는데 100마리밖에 안 되니까 전업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장사를 하든지 농사를 지으면서 100마리를 남한테 맡기는 것입니다. 그럼 그 사람은 100마리, 100마리, 100마리 해서 한 천 마리쯤 맡습니다. 각 사람에게 추렴해서 돈을 받아서 자기 1년 생활비를 챙기는 것입니다. 돈 버는 것입니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는 평소에는 똑같습니다. 남의 양에 다 표시까지 되어 있는데 그걸 자기 도시락 대신 잡아먹지 않습니다. 삯꾼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할 일 다 하고 삯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리나 늑대가 밤중에 오면 다윗처럼 싸워서 양을 지키지 않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그게 삯꾼입니다.
눈물이 없는 목회는 종교 근로 활동입니다. 얼마나 서글퍼요? 그는 사명자가 가는 길이 아닙니다. 다큐리온이라고 하는 단어는 눈물방울이라는 뜻이 있고, 이거를 은유적으로 울음이라는 그 의미로 같이 사용을 합니다. 사도 바울의 목회는 많은 눈물들의 목회였고 많은 울음의 목회였던 것입니다. 그것으로 사도 바울이 3년 동안 거기서 많은 제자들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사람들이 일어나서 그 위대한 선교의 시대를 만들어갔던 초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 정리를 해봅시다. 첫 번째는 가르침의 목회입니다. 두 번째는 한 영혼의 목회입니다. 세 번째는 쉼이 없는 목회입니다. 네 번째는 눈물이 있는 목회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지금이 어린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목회자는 20년 후에도 눈물을 흘리면서 목회를 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지금 그렇게 눈물의 목회를 못 하는 사람이 20년 후에 그렇게 될 가능성은 적습니다. 왜냐하면 제일 사람의 영혼이 주님을 만나고 놀랍게 변화되는 때가 청년이었을 때입니다. 그때 신학교를 가고 목회자가 될 계획이 없으면서도 예수 사랑의 감동을 받아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이게 그리고 설교를 듣습니다. 목회자로서 설교를 듣는 것과 성도로서 설교를 듣는 것이 다릅니다. 그러면서 많이 변화됩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서 신학교를 가야 합니다.
여러분 혹시 신학교 다니면서 1학년 대학교에 들어왔을 때 학교에서 자기소개하는데 ‘쟤는 좀 진짜 별로인 것 같다.’ 이런 학생이 졸업 3학년 졸업할 때 ‘어떻게 저렇게 변했을까. 또 진실하고 능력 있는 종으로 변했네.’ 이런 사람 본 적 있어요? 30년 후에 만나도 목소리도 비슷하고 생각하는 방식도 비슷합니다. 그때 날라리였던 학생들은 그 후에도 그렇습니다. 아주 희귀하게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교제가 많은 사람은 아니었고 공부에 열심히 전념하던 때였지만 우리 반에 한 75명 md과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아닌 것 같았는데 정말 놀라운 종으로 변한 사람은 딱 두 명 만났습니다. 지금도 그 사람들은 진실합니다. 그런데 그때는 내가 볼 때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근데 그렇게 놀랍기는 두 사람뿐입니다. 물론 이제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기초적인 목회의 맛을 보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마세요. 요동하지 말고 주님을 꼭 붙들고 여러분이 여기에 당하는 모든 고통을 신앙으로 승화시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죽으면 죽을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내 마음을 아신다.’ 그것이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 정도에는 때가 덜 묻었잖습니까? 그때 예배당만 들어가면 눈물이 쏟아지는 영혼을 가져야 합니다. 예배당에 들어가서 자기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부서를 위해서 기도하면 눈물이 확 쏟아지는 기도의 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때가 묻습니다. 여러분 미안합니다. 사람이 불결하고 더러워지는 것은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순결을 간직하는 것은 세월이 흘러가고 여러분의 목회의 격면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일들도 참 참 어려워집니다. 그런 것을 다 끊어버리고 담대하게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전도사할 때 제일 행복한 시간이 내가 말씀 전하는 이 부서에 강단에서 기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난 그 공간이 나만을 위해서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내가 못하더라도 딱 하나 이 영아부 강당을 내가 눈물로 적신다. 내가 목회하는 고등부 이 예배실 다 떠나도 나는 남아서 예수 십자가 붙들고 내가 눈물로 적신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실 것이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목회를 해야 합니다.
윤리적 수준으로 보면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서 100분의 1 수준도 안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100명이 한 명이 살인의 죄를 짓고 간음죄를 저질렀더라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내 주위에 사람이 그렇게 많아도 그 두 가지 죄를 함께 지은 사람은 난 아직 한 번도 못 만났습니다. 다윗은 그랬잖아요. 이러면 걸레 아닌가요? 그런데 눈물이 있었던 것입니다. 내일 설교에 내가 인용하는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에도 똑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품을 파고드는 사람” 사도 바울이 흘렀다는 눈물이 그런 종류의 눈물입니다. 너무 괴로워서 그냥 운 게 아니라 자기가 닥치고 있는 목회적인 모든 현실과 고난을 그거를 신앙으로 승화시키면서 하나님 앞에 그분의 품을 파고드는 것입니다. 그런 데서 흘리는 서러움의 눈물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생생하게 얘기를 하자면 골목에서 형아들한테 세게 얻어맞고 발길을 채였습니다. 서러운데 엄마가 오는 것입니다. 달려가서 엄마의 품에 안기면서 “저 형아들이 나 엄마가 없을 때 때렸어...”라고 고자질 하면서 서럽게 울 때 그 눈물입니다. 그 하나님의 품을 파고드는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선배들이 “넌 왜 목회를 그것밖에 못하니?”, “넌 왜 1년 목회했는데 하나도 전도를 못하니?”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 그거를 가지고 ‘지는 얼마나 잘하나 그리고 내가 얼마나 힘들게 했는데...’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이, 너무 힘들어서 못 참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그걸 가지고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갖고 나가서 “하나님, 내가 이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지 내가 주의 종 답게 살 수 있겠습니까?”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서럽지 않습니다. 그런 눈물의 목회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르침의 목회, 한 영혼의 목회 쉼이 없는 목회, 눈물의 목회를 해서 나는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쯤 됐을 때 여러분 중 한국 교회에서 정말 존경 받는 큰 산과 같은 목회자들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감화를 줘서 그 사람들에게 또 다른 하나님의 나라의 꿈을 심어주는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런 목회를 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