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집이 될 때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7)
녹취자 : 황인준
이사야 56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우주적으로 회복시키셔서 선교의 지평이 어떻게 넓혀질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미 53장에서 메시아의 오심을 예고하였기 때문에 그 메시아가 오시면 세상이 어떻게 바뀌게 될 것을 보여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이사야 56장 7절은 예수님이 성전을 숙청하는 사건 속에서 인용하셨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 마음에 깊이 박혀있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하셨느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말씀에 원바탕이 되는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문맥 자체는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역사를 베푸실 것을 보여줍니다. 본래 여기에 나오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집에 가까이 올수 없도록 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여호와와 연합시킨다고 3절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도 신실하게 하나님께 붙어있던 사람들, 그의 내면이 하나님과 부종했던 사람들을 두고 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에게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난시간에 제가 말씀드렸던 고넬료의 집안에 성령이 강림한 사건이 바로 이 예언이 이루어지는 본격적인 지점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많이 확대하지 않고 오늘날 살펴보고 있는 기도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기도하는 집이 될 때가 온다. 이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누구냐’고 하니까 하나님이 ‘그들을 나의 성산도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라고 하셨기 때문에 이들은 이방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시온으로 인도를 해서 기도하는 내 집에서’라고 하셨으므로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하나가 되어서 주님의 집을 기도의 집으로 만드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 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
첫 번째가 기쁨입니다.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라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될 때에 교회에 기쁨이 가득 차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기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의 이방인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율법에서도 이미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금하였고 또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습에 따라서도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올 수 없는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것이 본래의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은 아니었습니다. 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유대인은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진실로 연합되어 있어서 내면의 세계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이스라엘의 편견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었고 또한 이스라엘 사람인 유대인들은 마음이 정결하지 않기 때문에 이면적인 유대인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다시 이방인들에게 선교의 문을 열어 주셔서 그들이 하나님의 집을 가득 채우게 될 이상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이 언약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 일원이 된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의 한 지체가 된 것입니다. 그 사람들의 가장 큰 의무는 자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또한 모든 백성들이 교회를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어야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은 사실 번역상의 많은 여지를 남겨두고 있습니다만 저는 이 번역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의 번역에 의하면 ‘내 집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이다’. ‘암밈’이라고 하는 복수(複數)의 민족개념으로 나옵니다. 결국 이것이 구원역사에 있어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구속받게 될 다양한 종류의 이방의 백성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저는 선교적으로 해석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종류의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아서 이스라엘과 함께 주님의 교회를 가득 채우고 그 사람들이 또한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수많은 종류의 이방 족속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이 몇 가지 언어로 번역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세계에 있는 모든 언어가 성경으로 다 번역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으로 번역된 언어가 놀랍게도 2,538개라고 합니다. 그러니 실제 쓰고 있는 언어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고 종족들은 그것보다 더 훨씬 많은 숫자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중국 같은 곳은 이미 많은 종족들이 하나의 언어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결국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족속들을 위해서 교회가 그들도 자신들과 같이 구원 얻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아주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단순히 자신 개인이 복을 받고 마음이 평안한 것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회를 이 땅에 세우신 구속의 위대한 사역을 이루어가는 하나의 위대한 계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복음서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부터 마지막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까지 성령이 다시 임하실 때까지를 모두 추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모두 기도할 때에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있는 마리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가 예고되고 그러한 경건을 가지고 있는 요셉에게 그녀가 잉태했을지라도 그것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셨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으신 음성이 들리는 사건도 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에 기도하는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 제자들을 사도 세우실 때도 밤이 낮이 되도록 기도하신 후에 세우셨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도 간절한 기도 속에서 십자가에 대한 응답을 받으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도 간절한 기도로 십자가의 고난을 시작하셨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도 기도로 죽으셨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성령이 임하실 때에도 기도하고 있을 때에 그 교회에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이런 역사가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래전에 ‘예수님의 생애와 기도’라는 시리즈를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꼭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구속사를 보는 새로운 눈이 열리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아무튼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본다면 결국 교회에게 주신 사명은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는 것입니다. 밥을 해먹고 사람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점만 치는 집을 가리켜 점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집이 있는데 만화만 보는 집을 만화방이라고 말합니다. 기도의 집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기도밖에 할 일이 없는 것처럼 기도가 그렇게 특징이 되어버린 그 집. 다른 집과 구별되는 것은 바로 기도하는 하나님에 대한 헌신의 행위가 그치지 않는 집. 그것이 세상의 집과 구별되어지는 하나님의 집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교회가 간절히 그 속에서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그 기도하는 교회를 통해서 선교적인 구속의 역사를 펼쳐 가십니다.
그런데 기도할 때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기쁨을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 기쁨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얻음으로서 발견하게 되는 세속적 기쁨이 아닙니다. 이것은 신령한 기쁨입니다. 저는 이번 달에 나온 열린신문을 상세히 보면서 간증의 은혜를 깊이 받았습니다. 한 자매의 간증이 실려 있는데 그 간증 속에서 그 자매는 어렵고 힘든 시기 은혜를 받은 이야기를 거기에 썼습니다. 그러면서 정신과 치료까지 받고 고통을 받다가 가정 시리즈 설교를 들으면서 부모와 화해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여기에 담긴 특징은 간절한 기도입니다. 모든 기승전기도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의 마지막 그 표증이 영적 생활에 있어서는 기도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들, 하나님 앞에 회심한 사람들 열렬히 기도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특징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건 진실한 영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회심의 때에 가장 열렬히 기도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뜨겁고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있는 기도의 생활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길 원합니까? 선교하는 교회, 구제하는 교회, 디자인이 아름다운 교회, 예배의 감격이 있는 교회. 모두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교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궁극적으로 기승전기도입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가 기도하는 집이 될 때에 하나님이 그 교회를 선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수많은 족속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다시 가득 채워 그들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선교의 계획입니다. 목회자인 여러분들이 사역을 할 때에 항상 명심해야 될 것이 이것입니다. 사실 교역자를 선발할 때에 설교를 시켜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회를 인도하게 해보는 것입니다. 아니면 기도하는 모습을 보든지 그러면 그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기도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교회에 놀라운 기쁨을 주십니다.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던 예루살렘 초대 교회에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그리고나서 주어진 첫 번째 특징은 놀라운 기쁨이었습니다. 그 기쁨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사도들도 그때 비로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교회를 가득 채운 사람들의 마음속에 진리가 수액처럼 퍼지게 되자 그들은 불같이 뜨겁게 타오르는 복음의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에 이러한 기쁨을 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목회를 할 때 다른 것을 못해도 여러분들이 하는 부서나 기관을 혹은 여러분들이 한 순을 맡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모인 사람들이 여러분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열렬하고 간절하게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 그때에 사람들은 비로소 신령한 기쁨에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왜 죄를 짓습니까? 왜 영적인 침체에 빠집니까? 왜 낙심하게 실망합니까? 하나님께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에게는 그런 법이 없습니다. 세속적인 것에 우리의 마음이 뻗쳐있기 때문에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실망하고 낙심하고 좌절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령한 기쁨 대신 세속적인 기쁨을 좇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신령한 기쁨이 가슴을 가득 채우고 있으면 세속적인 기쁨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속적으로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명품 가방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내가 하루 그날 저녁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해서 영적으로 교통하는 것이 더욱 기쁘고 내가 새집에 들어가서 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부흥을 보는 것이 내게 더 큰 기쁨을 줍니다. 그것이 신령한 기쁨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효과적으로 세상 방방곡곡에 전하셔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라고 할때에 궁극적인 그 사회의 이상은 결국 하나님을 향한 신령한 기쁨에 모든 사림이 가득차서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을 하나님이 사람으로 만드시고 구원해 주신 의미를 깨달으면서 이 문명의 건설에 이바지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이 일에 헌신하면서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진 특징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하나님의 나라는 24시간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심령은 언제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기뻐하기 때문에 어디서나 뵈올 수 있는 하나님께 경배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땅에 이루어질 때의 삶입니다. 그 삶이 바로 기쁨의 삶이고 행복의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천 해도니즘(hedonism)입니다. 기독교 희락주의. 그래서 사람들을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낙심하고 좌절하던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고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해진 삶을 사는 교회가 되게끔 만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열납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라고 말합니다. 이 번제와 희생은 이방인들이 드릴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 이 번제와 희생을 자신의 제단에서 그들이 드리는 번제와 희생을 기꺼이 받으시겠다는 건 그들이 드리는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는 뜻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지금이야 별 이야기가 아니지만 그때의 문명에서 보면 얼마나 충격적인 예언이었겠습니까? 이사야도 아마 신학적인 충격을 받으면서 이 예언을 하였을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이 열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 우리 중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기쁘지 않은 사람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 섬김이 진짜 섬김이냐’라고 말할 때는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섬기는 자의 기쁨은 하나님이 그것을 받으시게 기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남에게서 손톱만한 선물을 받아도 항상 감사의 표시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기쁨을 주기 때문입니다. ‘아 나의 이 선물을 저 사람이 받아주었구나! 나의 호의에 대해서 저 사람이 나를 수납해 주었구나!’라는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기쁨을 주려는 의도와 동기 자체가 사랑입니다. 그런 것을 열납하시는 분이 사람일지라도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데 열납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드리는 번제와 희생을 기쁘게 받으신다는 것은 그들도 받아주신다고 하는 뜻입니다.
교회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집이 될 때에 모든 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경험하게 됩니다. 자신이 얼마나 엄숙하도록 존귀한 존재인지를 아무리 다른 사람이 이야기해도 자신이 그것을 깊이 인식하기 전까지는 자신의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허랑방탕하게 사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자신이 존귀한 존재라고 하는 것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여기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자기가 존귀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위한 이기심을 가지고는 있지만 자신이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는 못합니다. 이기심은 존엄성을 인정하는 동기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보다 깊은 깨달음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존엄한지를 깨닫는 것과 모든 인간이 존엄함을 깨닫는 것은 어긋나지 않고 일치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결코 이기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사랑으로 정의를 완성하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교회가 만민이 기도하고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될 때에 그렇게 하나님은 그 교회에서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자신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열납의식을 갖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사랑 받는 존재임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 존귀함에 어울리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그 집이 만민을 위한 기도의 집이 되기 위해서 무엇인가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기도하라는 것. 그래서 때때로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랜 세월이 지나가도 아무개라는 교역자를 기도할 때 교인들의 마음에 늘 떠오르는 모습이 늘 기도하던 사람, 늘 눈물 흘리며 기도하던 사람, 늘 자신들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주던 사람, 기도하는 시간을 가장 행복하게 여기던 사람으로 교역자들은 마음속에 남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돌보는 양떼들에게도 ‘이전에 자신을 돌보던 구역장, 순장은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던 사람이다’라고 남을 수 있도록 그 기도가 여러분들에 인격의 특징이 되도록 살아가야 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결코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추구하고 그 영광의 빛 아래서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은 어디에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따라 살아갑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사람들이 맛보는 알 수 없는 신령한 세계의 기쁨과 하나님 앞에 자신이 열납 받고 있다는 이 놀라운 선민의식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우리의 마음에 깊이 새기며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