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신대 특별편목과정강의
녹취자: 백지영
자, 이제 모든 사람들이 다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이야기는 목회하기 매우 힘든 시절에 왔다 이렇게 다들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서 공감을 할 것입니다. 제가 교수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열린교회를 개척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29년 전입니다. 30년이 돼 가지요. 그때만 해도 그래도 목회를 신도시 쪽에 가서 교회를 개척하면, 열 교회를 세우면 들리는 이야기에 세 교회, 네 교회는 되고, 3년을 기준으로, 그리고 나머지 교회들은 3년 안에 철수하는 것으로 그렇게 됐는데, 지금은 그것보다도 훨씬 더 생존확률이 떨어지는 시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미 담임목회를 하시는 분들도 있고, 젊으신 분들은 아직까지 학교에 계신 분도 있을 것이고, 아직까지 목회 임직을 못 맡으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어쨌든 그게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위에서 보면 쭉쭉 성장하는 교회들보다는 그저 선배로부터 물려받아서 그냥 그것을 파수하는 데에 허덕거리는 교회들이 훨씬 더 많은 그런 시대를 우리들이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우리들은 이런 문제를 어떤 사회학적인 고찰이나 이런 문제들과 관련지어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설교의 문제와 관련시켜서 이 이야기들을 다루어보자 이런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역사를 회고해 보면 사실은 교회의 거대한 말씀 운동이 일어났던 때에는 대부분 그 모든 시대에 공통적으로 설교의 회복이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신학성경으로 돌아가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리고 부활하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만 남겨졌는데 성령이 강림하신 다음에 아주 뚜렷하게 일어난 일이 설교자의 탄생입니다. 그래서 설교사적으로 볼 때에 성령강림사건은 설교자를 폭발적으로 분출해내는 사건이 된 것이지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으면서 그분께 가르침을 직접 받을 때조차도 도대체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이 전혀 잡히지를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좋으신 분이고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도 알았고, 심지어 부활하셨다는 사실까지도 깨닫고 또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것까지 보았는데, 이 모든 사건들이 조각조각 흩어져서 파편처럼 서로 섞이지 않은 채 돌아다니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사실 제자들은 자기가 믿는 신앙에 대한 사상적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셨을 때의 모습입니다.
그러다가 오순절 성령강림사건이 있게 됩니다. 거기에서 지축을 뒤흔드는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떠오르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입니다. 성령강림은 그것을 체험하게 해준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사도 바울이 회심했던 것과 똑같은 장면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메섹에서 만나기 전에 두 가지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신학적인 편견이고 하나는 심리적인 편견이었습니다. 신학적인 편견은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일 수가 없다, 나사렛의 목수인 그 젊은이가 결코 하나님의 아들일 수 없다는 신학적인 확신이었고, 심리적인 확신은 유대인들 이외에 모든 족속들은 하나님 앞에 별 가치가 없는 종족들이라고 하는 아주 극단적 선민주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는데 직접 목격하게 됩니다.
여기서 이제 아주 중대한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이, 신학적 사실과 역사적인 사실이 이게 서로 연결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하나님이 저주하셨을 리가 없고, 또 만약에 저주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그분은 다시 살아나셨을 리가 없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셔서 직접 만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자기 눈앞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가 문제였지요. 그렇지요? 그 죽음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의 대속, 혹은 속죄사상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었는데 그 저주가 자신 때문에 당한 저주였다면 그가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가치가 없는 죄인이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당하신 죽음이었다면 오히려 그것은 그를 다시 살리셔서 그가 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선포하셔야 할 필연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사도 바울이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이제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에서 설교자로 둔갑하는 사건입니다. 그것을 충만한 성령의 임하심과 함께 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부르심의 형태가 아주 고전적입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장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누구에게 임하니라” 했던 것과 아주 유사한 패턴의 방식으로, 그 여호와의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로 환치가 되어서,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큰 성령의 능력 속에 경험하게 되면서 자신의 내적인 사고의 구조에 폭발적인 변혁이 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제 사도 바울은 크게 정치적으로는 로마주의를 배경으로 컸고, 문화적으로는 헬레니즘을 배경으로 컸고, 종교적으로는 주다이즘, 유대주의를 배경으로 큰 사람입니다. 그리고 열린 마음으로 굉장히 많은 학문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까 놀라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제껏 까지 자기의 배경을 이루고 있던 로마주의와 헬레니즘과 주다이즘이 모두 지평이 융합되면서, 사실은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축으로 과거의 역사가 신약을 향해 달려왔고 그리고 앞으로의 역사가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전개되리라고 하는 역사의 지평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의 모든 신학을 총체적으로 정리하면 결국은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신학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교회를 이야기할 때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론, 신론을 이야기할 때도 결국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신론, 인간론을 이야기할 때도 결국은 그리스도께로 향하여 나아오는 기독론, 구원론은 당연히 그 중심에 그리스도가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쪽의 역사가 줄달음쳐서 창조로부터, 창조 이전에는 영원세계의 하나님의 작정으로부터 그것이 시간과 공간을 침투해서 들어와서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성취가 되고,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이 그 모든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교회와 역사와 모든 것을 보는 통일적인 관점을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하느냐 이것입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이미 설교의 효용성이 끝났다고 보는 시대입니다. 이런 생각을 강단 아래 있는 사람들이 많이 하는 게 아니라 강단 위에 있는 목회자들이 이미 이런 패배의식에 젖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구라파와 미국에서는 이미 1900년대 중반부터 이미 설교가 없는 목회, 설교를 하지 않는 목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아주 복음주의적이고 개혁주의적인 학교들을 제외하고는 설교학이 선택과목으로 계속 넘어가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것이 벌써 이미 더 이상 설교가 현대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강단 아래서가 아니라 위에서 먼저 자인하고 있는 광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그게 나와 뭔 상관이냐고 물으면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자신은 이런 시류에 대해서 어떤 분석을 하고 있고, 그리고 신학을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시류에 대해서 여러분들을 뭐라고 도전할 것인지, 시류에 순응해서 교회를 하는 방법을 찾을 것인지 아니면 그 시류를 비판적으로 타도하고 그리고 진짜 올바른 견해를 찾아서 그래서 설교에 다시 한번 자신의 목회의 사활을 걸어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 시대는 이미 진리가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지요. 니체는 1880년대에 신은 죽었다고 선언을 합니다. 그것은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신은 죽었다는 이야기를 사실은 니체가 먼저 한 게 아니라 헤겔이 먼저 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시대는 신이 죽었다는 느낌과 함께 시작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언합니다. 그럴 때 온 세상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지금은 신이 죽었다고 이야기해도 아무 신경도 안 씁니다. 이미 그 신이 자살을 했든지 타살을 당했든지 관심도 없습니다. 설교가 똑같습니다. 30년 전만 해도 설교는 끝났다고 할 때 복음주의 권에서 와글와글했습니다. “그게 말이 되냐?” 그리고 이야기했는데, 지금은 이제 설교는 끝났다고 이야기해도 아무도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미 모종의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근대정신과 현대정신이 가지고 온 결과입니다. 근대정신은 아주 핵심적으로 요약하면, 신이 있던 자리에 신을 축출하고 인간의 이성을 그 자리에 갖다 놓은 게 그게 근대주의입니다. 근대주의고, 그 근대주의의 본격적인 포문을 연 사람이 데카르트입니다. 칸트가 그것을 정리합니다. 두 사람 다 신에 대해서 관심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진리에 대해서도. 그러니까 그 신을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 생각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바깥으로 내보내고 그리고 우리가 감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 안에서 이성의 논리로서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됐으니, 이제 신은 뒷방 노인네가 된 것이고 인간의 이성이 중심자리에 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게 근대주의입니다. 근대입니다. 근대도 이야기하면 길지만 어쨌든 그게 근대주의입니다.
그런데 그 근대주의 안에는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습니다. 이쪽으로는 신은 절대 없다는 완벽한 무신론부터 시작해서 반대쪽은 기독교의 근대주의까지, 무슨 뜻이냐 하면 그런 이성적인 것들을 다 동원해서 오히려 하나님을 더 믿으려고 하는 근대주의자까지 스펙트럼이 굉장히 폭넓었던 것입니다. 평균적인 근대주의는 그 중간 어느 지점에 있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신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는 측면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종교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칸트도 뭐라고 이야기 했느냐 하면 “철학은 신을 요청한다.”고 그랬습니다. 왜? 왜 우리가 도둑질하지 말고 싸우지 말아야 할지 그런 것들이 그 근거를 이성이 설명을 안 해줍니다. 더군다나 아주 나쁜짓하고 악을 행하며 살던 사람이 죽는 순간에도 편안하게 죽는 것을 볼 때에는 인간의 마음은 더 뒤집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세상은 신을 요청한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의 철학의 유명한 개념 가운데 하나가 ‘미똘로기제이션’과 ‘디미똘로기제이션’이 있습니다. ‘디미똘로기제이션’은 무엇이냐 하면 비신화화(非神話化)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신화적인 요소들을 다 빼는 것입니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끔 만드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다시 ‘미똘로기제이션’을 합니다. 그건 뭐냐면, 지금같이 대답할 수 없는 문제, 지금 최근에 활동하고 있는 프랑스의 철학자 알랑 보통 같은 사람이 그런 논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신론자입니다. 그런데 뭐냐면, 이게 무신론만을 가지고는 인류의 궁극적인 질병을 치유할 수 없다 이것입니다. 아까 악하게 살고 마지막에 웃으면서 죽는 인간 같은 사람을 위해서는 신이 요청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그 다음에 다시 그런 모든 도덕적인 가치를 신화화(神話化)해서 그래서 도덕적인 삶의 근거로 삶으며 살자는 것입니다. 그게 칸트의 ‘미똘로기제이션’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 표준적인 근대의 정신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결국은 인간의 이성이 왕노릇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은 인간의 이성이 왕노릇 하면서 그렇게 지내온 결과 시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니까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이야기할 때가 19세기 말인데 이미 18세기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재화들이 생산이 됩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도입이 됩니다. 자본주의가 도입이 되니까 돈이 최고인 사회가 됩니다. 그리고 농촌이 몰락하면서 이제 도시로, 도시로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모이게 됩니다. 도시에 인프라가 형성이 되니까. 그러니까 공급과잉의 법칙에 의해서 노동을 하겠다는 사람은 어마어마하게 많은데 일자리는 너무 적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가격이, 노동가격이 폭락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동자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가 이루어집니다. 자본가들이 배를 불리고 돈이 돈을 버는 극단적인 자본주의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망가져가는 사회를 보는데, 이게 학문에도 타락이 오는 것입니다. 학문에 어떤 식으로 타락이 오느냐 하면, 교수들이 예전에는 삶의 보람을 자기가 학문을 연구하고 새로운 학식을 창출해서 인류를 이롭게 하는 데서 보람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학문의 세계에 자본주의 바람이 불어 닥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명예와 학문의 영광 같은 것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권력자에게 아부하고 자본가에게 아부해서 그래서 호의호식하고 부를 축적하는 풍조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에 기여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언론입니다. 신문. 신문은 광고가 필수이고 누군가의 지원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결국은 이 신문은 사실을 보도하기보다는 뭔가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고 계속 그것을 읽고 싶은 기분 좋은 뭔가를 제공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 사이에서 사실과 해석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실과는 거리가 먼, 참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 사회적으로 환영을 받는 시대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를 니체가 다 보면서 아주 너덜너덜하게 염증을 내는 것입니다. 결국은 잘못이 무엇이냐 하면, 근대주의가 들어섰지만 신을 완전히 추방하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이런 일들이 생겨난다고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사조를 생각하면서, 이제 우리의 도덕 가치에 대해서 전체적인 회의를 품기 시작하면서 신은 죽었다는 선언을 합니다. 아버지가 천사와 같은 목사였고, 5대가 목사가 나온 집안입니다. 5대가 계속해서. 5대 할아버지부터 아버지까지 목회자가 된 집안이고 모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공부를 하고 그 다음에 문헌학자가 됩니다. 그래서 신은 죽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니체가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사람들이, 유럽 전체가 발칵 뒤집어지면서 엄청난 파문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지금은 파문도 안 일어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이제 신이 제거된 사회입니다. 그러니까 신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설교가 환영받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전체적인 이 진리의 세계 자체를 예전에는 평면에 놓고 본 것입니다. 여기 평면에 원이 있으면 중심점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딱 표면에. 그런데 지금의 진리의 관(觀)은 그런 관점이 아니라 둥그런 볼링공에다가 점을 찍는 것입니다. 그 표면에 아무리 점을 찍어도 그 표면에 찍힌 수많은 점들 중 이게 정말 중심이 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속에 들어가면 구심점이 있는데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지요.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어렸을 때부터 세계지도가 항상 우리나라하고 일본이 중심에 있어서 세계 모두가 그런 지도를 쓰는 줄 알았습니다. 그랬더니 처음 유럽에 가보니까 우리는 저쪽 구석에 가서 붙어있는 것입니다. 자기네 나라가 중심에 와 있고. 그러니까 어느 것이 진짜 맞는 것이라고 보겠느냐 그런 것을 따지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것이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의 죽음의 선언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인간의 도덕을 통제하고 사고를 제어하는 모든 권위적인 것들의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언을 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가치체계가 다 부인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치를 어떻게 합니까? 각자 자기가 세워가야 되는 체계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잡하게 또 니체는 이론을 제기를 합니다. 그러면 그 니체를 기준으로 해서 이제 현대성으로 넘어왔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니체는 그 책을,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1880년대에 썼을 때, 마지막에는 그 책을 자기가 얼마나 격찬했느냐 하면 ‘제5복음서를 인류에 남겼다. 그리고 인류역사에 길이 남을 구원의 책을 내가 남겼다.’ 그렇게 자평을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4권이 완성되었을 때 아무도 출판해 주는 데가 없어서 자비로 출판을 해서 지인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그 중에 네덜란드에 있는 교수 한 사람이 읽고 한 줄도 이해를 못하겠다고 하니까 “네가 내 책을 한 줄도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내 책은 너무 시대를 앞서갔기 때문에 한 세기나 두 세기 후에 그때 비로소 사람들이 이런 책이 있구나 하고 깨닫게 되고, 가치에 대해 도전하는 모든 것을 니체라는 이름 속에서 찾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을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니체의 그 예언이 이루어진 것처럼, 자기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라는 것까지 다 예견을 했습니다. 지금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니체를 연구하고, 니체 이후에 자크 데리다, 미셀 푸코, 그리고 하이데거를 비롯해서 사르트르, 대부분의 모든 실존주의자들이 이 니체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현대성의 철학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우리 지금 한국사회에 가져오면, 사람들이 니체를 읽지는 않았지만 니체의 사상은 이러한 문화를 타고 우리 속에 스며드는 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보편적인 가치와 진리 체계 전체를 부인하고, 모든 것은 내가 주인이 되어서 내가 도덕을 새로 결정하고 새롭게 산다고 하는 사상이 퍼져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흔히 듣는 말로 다원주의(多元主義)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도 진리고 너도 진리고, 누구든지 누가 뭘 얘기해도 다 진리는 상대적인 것이다, 진리냐 아니냐는 각자가 결정해야 될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회가 되어 있기 때문에, 지금 사회에서는 그런 것들이 굉장히 호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설교가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널리 퍼지고 있는 세속주의입니다. 세속주의라고 하는 것은 가치의 기준을 인간에게 둔 것이 세속주의입니다. 타락하고 그러는 게 세속주의가 아니라, 가치의 기준점을 인간에 둔 게 세속주의입니다. 이런 세속주의 풍조가 이미 굉장히 넓게, 폭넓게 팽배해 있기 때문에, 사실은 사람들의 관심이 이 세상에서의 평안과 그리고 물질적인 풍요로움입니다. 그것이 현대인이 추구하는 거의 모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러니까 소비에 열광하는 것입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소비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을 천하게 여겼고 실제로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물자 자체가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안 그랬던 것입니다. 물론 귀족이나 왕족 같은 사람들은 누가 머리핀 하나 하고 다니면 ‘진짜 예쁘네.’ 그리고 그것을 장인에게 보여주면서 저거 보고 저거보다 더 좋은 것을 만들어가지고 오라고 그렇게 얘기하고 돈을 얼마든지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 가지고 소비를 누렸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소비에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어디에 있겠습니까? 생산에 가 있는 것입니다. 생산. 농사짓는 사람은 농사를 지으면서 최고의 밀을 수확했을 때 거기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을 직업이라고 하는데, ‘직(職)’은 ‘스테이터스(status)’이고 ‘업(業)’은 ‘하늘에서 내린 소명’입니다. 그것을 업(業)으로 삼으면서 살아가는데, 그게 아버지 할아버지도 똑같은 것을 느꼈으면 그게 ‘가업(家業)’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생산에서 찾는 것입니다. 농부는 농사짓는 일에서, 구두장이는 구두 만드는 일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은 학문의 발전을 통해서, 그리고 행복이 바로 그것들을 통해서 나의 존재가치를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까 이제 농부가 곡괭이 가지고 농사를 짓는 그런 밀보다는 공장제 공업으로 생산이 되는 산업형 인더스트리에서 훨씬 더 좋은 밀이 나오는 것입니다. 장인이 미친 듯이 평생 익힌 기술로 한 땀 한 땀 만드는 구두를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구두와 비교했더니 자기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훨씬 좋은 제품이 반값 이하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런 생산에 종사한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이 통용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제는 그런 물건을 만들어서 동네에서 그것을 주고 닭하고 바꿔 먹고 감자하고 바꿔 먹고 하던 시대는 지났습니다. 시장에 내놓아서 경쟁을 해서 거기서 돈을 벌어서 돈을 가지고 자기가 필요한 것을 사야 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인간이 돈이라는 것에 대해서 엄청 마음을 쓰지 않을 수밖에 없는, 실제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여기 올 때도 강의료 내고 들어오는 것 아닙니까? 강의료 못 냈으면 못 들어옵니다. 저녁을 못 먹었으면 수업을 못 듣지 않습니까? 여기서 딱 떠나는 순간 집에 도착할 때까지 기름을 쓰든지 교통비를 내든지 무엇을 먹든지 간에 돈이 주머니에 떨어져서는 생존할 수가 없는 사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엄청난 과학의 발전으로 상상할 수 없는 재화들을 쏟아놓으면서 인간에서 엄청난 소비욕을 촉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의 생활을 보면, 나이 든 사람도 별로 다르지 않지만, 너무 모순적입니다. 월급 한 350만 원 받는데, 핸드폰 요금, 컴퓨터 값, 자동차 할부금 다 하는데 돈을 안 내고 산 것입니다. 그것을 소비하기 위해서 갚아야 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소비를 하고 나면 그 소비를 유지하고 이미 소비한 것을 상환하기 위해서 노동으로 내몰리는 것입니다. 미친 듯이 일하지 않으면 자기가 이미 쓰고 있는 이것들을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물질적으로 굉장히 풍요로우면서 사실 정신과 삶은 거의 노예처럼 매달려 있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현대인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에 생각이 너무나 매여 있기 때문에 뭔가 이 위의 것을 설교하는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올 수 없는 여지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현대인이라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뭔가 그 사이에서 조화를 꾀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현대인의 삶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고, 어떻게 그런 현대인들을 위로하고 마음의 짐을 좀 덜어주면서 그러면서 가던 길을 계속 가게 할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이 그게 오늘날의 흐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마다 보면 특징이 점점 사라져갑니다. 예전에는 교회마다 아주 뚜렷한 특징이 있었습니다. 순복음 교회 예배드리는 것 다르고, 고신 측 교회 예배드리는 것 다르고, 감리교 측 교회 예배드리는 것 다르고, 다 달랐습니다. 지금은 뚜껑을 열어놓고 위에서 들여다보면 이게 어느 교파에 속한 교회인지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모두 평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 교회가 세상과 다르지 않다, 교회는 전혀 세상과 다른 곳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암시하고 가르쳐서 나름대로 뭔가 부흥을 이루어보려고 하는데, 사실은 진정한 마음으로 종교를 찾는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과 다를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교회에 오는 것이지 교회와 세상이 똑같을 것이라는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종교의 문을 두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무신론자였다가 그리스도께로 회심해 본 사람이기 때문에 누구보다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살던 세상과 교회가 똑같은 곳이었더라면 내가 기독교의 문을 두드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오히려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는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특히 목회자들은 훨씬 그런 생각이 강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뭘 의미하느냐 하면, 결국은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목회자 자신이 외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메시지가 자기 안에 없는 것입니다. 오래전인데, 부목사 하던 친구 하나가 교회를 개척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지 마라. 안 된다. 내가 내 명예를 걸고 이야기하는 데 넌 절대 안 된다.” 그러니까 심각하게 묻는 것입니다. “정말 안 되겠습니까?” “내가 김남준목사의 명예를 걸고 얘기하는데 너는 목회하면 반드시 안 된다. 하지 마라.”
그런데, 그래서 내가 물은 게 그것입니다. 뭐냐 하면, 목회를 하고 싶어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그건 순서가 아닙니다. 목회라고 하는 것은 양무리를 치는 것이지 않습니까? 양무리가 생겨야지 치지요. 양무리가 생기려면 양을 낳아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남의 교회에서 빼앗아 오는 것 말고 자기가 양을 낳아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양을 낳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이, 교회를 하겠다고 하는 그 결심이, 설교하고 싶은 사람이 교회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목회하고 싶은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외치지 않을 수 없는 말씀이 내 안에 있어서 이것을 쏟아놓지 않으면 골수에 사무쳐서 내가 견딜 수가 없는 사람이 설교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 명을 앞에 놓아도 3천명 모인 것처럼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속에서 불붙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교회를 하면 결국은 사람들에게 영향력 있는 설교를 못 할 테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사람이 예수를 안 믿게 될 것이고, 이미 있는 교회에 청빙을 받아서 설교를 한다면 그러면 이 사람 속에 무엇인가 현재 이 사람이 있는 것들을 허물어버리고 새로운 사람을 만들어야 되겠다는 어떤 마음속에 불붙는 메시지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없는 상태면, 그러면 결국 지금 굴러가고 있는 그 교회의 체제에 순응해서 그래서 그냥 적당히 목회자의 자리를 메워주면서 급료를 받고 그리고 그냥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게 과장이 아닙니다. 현실입니다.
나는 묻고 싶은 것입니다. 뭐냐 하면,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설교자로서의 소명은 무엇인가? 예레미아 선지자는 설교자로서 어린 나이에 소명을 받으면서 파괴하고, 무너뜨리며, 건설하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결국은 설교자는 무엇인가 허물어트리지 않으면 다시 세울 수 없습니다. 허물어트릴 때는 반드시 세우고자 하는 그 무엇이 자기 마음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점점 강단에서 저 사람이 외치고 있는 바가 참 진리일 것이라고 하는 확신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박윤선목사님이 (?)에서도 목회를 하셨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옛날에 문선명 씨가 살았을 때에 평화교수회의라는 것을 만들었잖습니까? 그 사람을, 서울에 있는 아주 일류대학의 여자교수였는데 설득을 하고 설득을 해서 박목사님 설교를 들어보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몇 번을 예배에 참석해서 설교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도한 사람이 가서 “교수님, 어떠셨습니까?” 그리고 물어보니까 그 교수가 이야기하는데, “나는 아직도 박목사님 설교가 맞는지 우리 문 선생님 말이 맞는지 확신이 안 든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있다. 뭐냐 하면, ‘저 노인네가 저렇게 아래에서 설교를 듣는 사람이 저렇게 외치다가 저 노인네가 쓰러지는 게 아닐까’라고 느낄 정도로 외치는 것을 보면 진리가 아니고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말하는 방식자체가 진리를 자기가 느끼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그 이단을 믿는 사람에게도 인간적으로 그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자와 목회자는 설교의 열매를 가지고 영광을 돌리는 게 아니라 설교하는 과정을 통해서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한번 그런 교훈을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설교를 하는데 아래 있는 어떤 사람이 내 설교를 듣고 “어, 저 양반 저러다가 쓰러지는 것 아니야?”라고 설교할 때가 있는가? “이 확신이 너무나 크고 나와 설교를 듣는 사람의 운명이 이 말씀에 달렸다면 설교했을 것 같은 그런 방식으로 설교하고 있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말입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제 기억으로는 그때도 다양한 목회자들이 있었지만 교회에 가면 절반 이상은 그것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아주 유창하게 학문적으로 설교하는 목사도 있었고 투박하게 하는 설교도 있었지만, 지금 저 사람이 설교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얹어놓은 내용이라는 것이 최소한 절반은 느껴지던 때가 70년대입니다. 그리고 저의 어렸을 때 기억에 1960년대로 내려가면 거의 60프로 이상은 가는 교회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항상 이렇게 조용조용하게 하는 설교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렇게 설교하는 데는.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성결교회나 감리교회나 장로교회나 다 다녀봤는데 항상 이 목에 핏대가 확 서 있어서 외치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소한 이 강단 아래에 있는 사람은 모르지만 저 강단 위에서 설교하는 사람은 지금 무엇인가 자신의 뼛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진정성을 가지고, 자기가 느끼는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설교하고 있다고 하는 게 초등학교 다닐 때의 저의 느낌이었습니다. 어쩌면 그게 나로 하여금 기독교를 못 떠나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진정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1980년 특히 90년대에 들어오면서 급속하게 무너지기 시작하고, 2000년대 들어서면서는 사람들이 설교 자체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아주 극소수의 설교자들, 인기 있는 설교자들을 제외하고는 별로 설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특히 이 코로나가 일어나고 나서는 자기교회 설교를 안 듣는 교인들이 엄청나게 많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기네 교회 설교를 클릭을 하면 연관된 설교들이 확 뜨면서 궁금한 것입니다. 점프를 해서 들어가 보니까 여기에는 다른 설교의 세계가 울려 퍼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틀어놓고 그 다음에 설교는 여기로 가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돈은 자기네 교회로 보내고 설교는 이리로 가서 듣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이 코로나가 코로나 이후의 시대가 문제인데 교회에 대한 신뢰가 뚝 떨어졌습니다. 사회적인 신뢰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교인들이 이제 비로소 남들이 어떻게 설교하는지, 그리고 우리교회가 유일한 교회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쉽게 이야기하면 이제 방안에서 어느 교회든 참석할 수 있으니까 설교 잘하는 교회로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현상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고, 멤버십을 두 개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헌금 보내고 교인이 등록돼 있는 곳은 A교회지만, 말씀의 은혜를 받는 것은 B교회이고 연결해 가지고 자기가 그 교회 교인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이제 평범한 많은 사람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에는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코로나 시대가 빠르면 4월 아니면 6월쯤에 종식될 것이라고 보는데, 그러기를 바라는데, 그렇게 되고 나면 그 후에 밀려닥칠 후폭풍들이 굉장히 많은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특히 중형교회 이하의 교회들에서는 심각한 문제들이 생겨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응전은 무엇이어야 되겠는가? 이것을 말씀드리면서 1교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결국은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물처럼 흘려가게 마련이고, 시대의 풍조도 변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후배들이 나를 보고 “당신이 개척하던 시대와 지금의 차이가 무엇입니까?”라고 이야기하면 나는 전혀 다른 시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30년 어간에 얼마나 바뀌었는지 전혀 다른 시대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꿔서 이야기하면, 그때의 사고방식 가지고는 목회가 안 된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우선 중요한 것은 현대를 이해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진짜 현대를 이해하지 않는 사람 중에 자기 세계 속에서만 살고 있는 사람이 목회자입니다. 그래서 한번 현대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이해를 해야, 현대사회에 동의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사회 속에서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이해하라 이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교회에서 내가 전하는 설교가 왜 저 사람들 속에 스며들지 못하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현대사회를 잘 이해하고 현대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지배적인 사상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평가된 기독교는 어떤 기독교인가 그것을 먼저 파악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과 함께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단호하게 이야기하는데, 여러분들의 가장 중심적인 직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목회라고 하는데, 그것은 너무 추상적입니다. 뭐가 목회입니까? 교회 짓는 것부터 시작해서 직원들 고용하고 교역자들 월급 주는 것까지, 말썽부리는 장로들 타이르는 것부터 시작해서 교회를 자기 원하는 대로 이끌어가는 것까지, 은행에서 빚내는 것까지 목회 아닌 게 하나도 없습니다. 너무 광범위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가장 중요한 사명은 목회인데, 목회가 뭐냐하면 이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빌립보서에 의하면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 1:9) 결국 목회라고 하는 것은, 고전적인 목회의 정의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목회의 열매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인들입니다. 그리고 그것과 똑같이 중요한 열매는 자신이 이전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개척했을 때보다 아주 분명하게 지금 내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가장 큰 숙제는 하나님을 덜 사랑하던 나 자신과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나와의 비교, 그리고 내가 오늘날 과거보다 하나님을 덜 사랑하고 있으면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그리고 예전보다 내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으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격하는 그런 구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게 목회입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목회하는 사람들만이 남을 목회할 수 있는 것이지, 자기 목회에 실패한 사람이 남을 목회한다는 것은 실패하면 너무 당연한 것이고 성공하면 위선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고민과 관심사가 무엇인지 한번 물어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에게. 결국 목회가 정말 관심사인가? 그러면 그 목회의 관심사는 어디서 생겨난 것인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남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가슴 아픈 것은 사람들이 자기처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근대와 현대로 넘어오는 그 과정을 모두 보면 결국은 공통되게 흐르는 게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세속에 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축출하고 이성을 세우고, 그다음에 이성을 축출하고 그다음에는 개인의 욕망과 의지를 우선순위에 놓고 모든 가치체계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신적인 존재가 되어서, 실제로 니체가 그랬습니다. “신이 죽고 나면 하늘에서 신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릴 것이다.” 우리 각자 각자가 신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사회가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현대인의 문제는 혓바닥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무엇으로서 현대인들이 겪는 이 곤고한 고통의 문제, 그리고 철저한 소외의 문제, 고독의 문제, 이런 것들을 해결해 줄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중요한 숙제는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신앙인으로서 이 사랑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를 목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잘하면 그 사람이 저절로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사람이 되면 저절로 목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교인을 천 명을 모으냐 이천 명을 모으냐 그 문제를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모든 사람이 다 모든 것을 잘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이 목회를 하면서 끊임없는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면서 목회를 하다가 행복하게 죽어야 할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러면 한번 고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이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무엇이냐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게 무엇일까요?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것들을 버리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집요하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돼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도 인간에게 두 가지 자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병든 자아, 건강한 자아. 자기만을 위하여 이기심으로 살려고 하는 것은 병든 자아가 시키는 일입니다. 이것과 더불어 매일 매일 다시 죽고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그런 인간은 잡것이 되고 만다, 라스트 맨(last man)입니다. ‘잡것’이라고도 번역을 하고 ‘마지막 인간’이라고도 번역을 하고 ‘인간말종’이라고도 번역을 하는데, 그런 인간이 되고 만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위버맨쉬(Übermensch)는, 초인은 끊임없이 그런 자아를 죽이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각의 구조가 기독교의 성화론과 아주 흡사합니다. 기독교에서 받은 영향이 굉장히 큽니다. 그 신학적인 구도를 차용해 가지고 자기 신학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자기 사랑, 세속에 대한 사랑 버릴 수 있겠습니까? 못 버립니다. 자기 자신이 죽음에 직면해서 이 세상이 얼마나 허무한가 하는 것을 보게 되는 사람 중에 얼마간의 사람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인생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한 그냥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미친 듯이 소비에 환장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파스칼에 의하면 회피입니다. 파스칼이 무엇이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이 우주를 보고 미치지 않는 것도 미쳤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것입니다. 이미 미쳐버렸기 때문에, 이 우주를 보면서, 영원한 우주의 침묵과 무한한 세계를 보면서 미치지 않는 이유는 이미 벌써 미쳤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것입니다. 미치는 동작이 무엇이냐 하면 끊임없이 소비에 빠지고 오락에 빠져서, 마치 무엇과 똑같으냐 하면 사형을 기다리고 있는데 여기서 카드놀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을 강구할 생각은 안 하고 카드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을 깨우는 방법이 무엇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아픔을 같이 해 줘요? 솔직히 얘기해 보십시오. 어떻게 아픔을 같이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네 엄마 죽은 것하고 내 엄마 죽은 것하고 똑같습니까? 똑같으면 그것 정신이상 아닙니까? 남의 엄마 죽었을 때는 그 자리에서는 “유감입니다. 위로를 표합니다.” 그러지만, 가기 전에 다 잊어버리고 저녁때 무엇을 먹을지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결국은 어떻게 하면 그것을 바꾸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은 무엇인가 그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충격과 함께 다가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마지막에 이야기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설교의 갱신을 위해서는 두 가지의 갱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우리가 하나로 묶는데, 설교는 ‘sermon’과 ‘preaching’으로 나눕니다. ‘sermon’은 설교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미국에 가서 설교를 하고 나면 사람들이 인사를 합니다. “I really enjoyed your sermon.” 그러지 ‘preaching’이라고 이야기 안 합니다. “당신의 설교 내용을 들으면서 내가 너무 은혜를 받았다.”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항상 ‘sermon’이라고 이야기하지 ‘preaching’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sermon’은 설교의 내용입니다. ‘preaching’은 설교하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개를 가지고 결론을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선 ‘sermon’에 관한 한은 그 안에 탄탄한 진리의 내용이 들어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탄탄한 진리의 내용이 들어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래됐습니다. 한 15년 됐습니다. 눈을 수술하게 됐습니다. 안과수술을. 그래서 목사인데 교회 못나가게 된 것입니다. 수술을 했는데, 그래도 걸을 수 있는데 내가 예배당에 안 간다는 게 요즘 같았으면 코로나니까 그냥 그랬겠지만 용납이 안 됐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외출증을 쓰고 오전예배에 가고 그 다음에 들어왔다가 쉬었다가 오후 예배에 또 다른 교회에 갔습니다. 한 교회는 침례교회였고 한 교회는 통합 측 교회였습니다. 통합 측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요즘도 저런 설교를 하는 사람이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냐 하면, 40대 중반이나 50대밖에 안 돼 보이는 젊은 목사인데 시종일관 주의 종을 잘 공경해야지 대대손손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합동 측에서 그랬으면 좀 이해가 되는데 통합 측에서. 그런데 별로 은혜는 안 됐습니다. ‘지금 어느 시대이고 더 급하게 전할 메시지가 얼마나 많은데 아니 저 젊은 나이에 저런 설교를 하고 있나?’ 그러고 어쨌든 별로 은혜를 못 받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오후에 침례교회를 갔는데 오전 설교가 훨씬 나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명제는 동의하지 않지만 수미일관(首尾一貫)입니다. 시종일관(始終一貫) 설교 시작서부터 끝까지 ‘주의 종을 공경해야지 자자손손이 복을 받는다, 그리고 너도 물질의 복을 받는다, 주의 종을 잘 섬겨라.’ 아주 구체적인 예화까지 어떻게 목사한테 성도들이 잘해서 부자가 됐는지 그런 이야기입니다.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후 예배는 침례교 교회인데 사이즈는 거의 비슷한 교회였는데 뭔 소리를 하는지, 목사하고 신학교 교수인 내가 들어도 뭔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다 고개를 숙이고 노인들이 앉아서 설교를 듣는 것입니다. 돌아오면서 너무 화가 났습니다. ‘저 황금 같은 시간에 저 많은 교인들을 모아 놓고 어떻게 저렇게 설교를 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내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설교를 40년 이상 한 여러분들의 선배목사로서 이야기하는데, 지금 여러분들이 목회를 오래했던 안 했던 상관없이 설교준비라고 하고 메모지 같은 데다 찍찍찍찍 써가지고 올라가는 것은 불충입니다. 그것은 진짜 어마어마하게 설교를 한 대선배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설교를 했는데 설교가 너무 별로였습니다. 그런데 원고를 빼앗아서 한번 읽어보니까 진짜 꼼꼼히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성실성은 입증이 되는 것입니다. 말을 잘 못한다, 말을 못하면 더 써야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말을 못하면 외우기라도 해야 되지 않습니까? 아니, 강단에 올라가서 설교를 하는 사람이 그것 설교하고 월급을 받는 것 아닙니까? 배우들이 대사를 미친 듯이 외웁니다. 그리고 밤잠을 안자고 외워가지고 올라가서 연기를 하고 돈을 법니다. 그런데 내용 자체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은혜가 되고 안 되고가 아니라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제가 교역자들보고 이야기했습니다. “아니, 설교를 준비하다가 하다가 자기께 안 나오면 박윤선 박사 주석책이라도 보고 베껴가지고 올라와야지.” 그게 갖추어진 게 ‘sermon’입니다.
지금 여기 젊은 분들 계신데 내가 조언을 하나 하자면, 설교는 반드시 발전을 합니다. 그런데 대충 준비하는 사람은 발전 안 합니다. 지금 어떻게 하면 좋으냐 하면, 여러분 설교가, 아주 실제적인 조언을 드리겠습니다, 내 설교가 너무 영향력이 없다 그러면, 설교를 길이를 줄이십시오. 길이를 줄이고 완벽한 원고를 쓰십시오. ‘여러분’까지 쓰십시오. 쓰고 외우십시오. 안 되면 가정 예배드리면서 외워가지고 한번 해보십시오. 그것을 하루면 외울 수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 나빠도. 그리고 반복해서 기도하고 그리고 그것을 하고 나서 주일날 올라가서는 그 원고 보지 말고, 왜냐하면 내가 지금 이러고 강의를 하면 여러분이 재미가 나겠습니까? 그것을 완벽하게 외워서 성도들 눈을 보면서 풍부한 내용을 전달해 주어야 됩니다. 적어도 오늘 진짜 들을만한 이야기가 있었다고 느끼게끔 내용을 갖추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진짜 부족하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훌륭한 목사님 설교를 놓고 조금 따다가 쓰십시오. 그 대신 항상 설교할 때에는 이야기를 하십시오. 이 설교는 옥한음 목사님이 95년도 10월 28일 날 사랑의 교회에서 한 설교 중에서 많이 따왔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표절이 되는 것입니다. 표절은,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표절은 축출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든지, 그것도 싫으면 자막으로 띄워놓든지 하고 자기가 은혜를 받고, 요지는 무엇이냐 하면 내용 있게 써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 합니다. 설교를 잘 하는 사람들은 준비하는 시간이 굉장히 깁니다. 그런데 설교를 잘 못하는 사람은 준비하는 절대적인 시간이 적습니다. 못하면 잘 하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아도 못 따라가는데, 못하는데다가 시간까지 안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힘든가 하는 것을 여러분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자기 업(業)이라고 생각을 해야 됩니다. ‘이 일을 위해서 내가 태어났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그것을 자기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매주 주일과 수요일까지 해서 두 편씩 5년만 풀 스크립트(full script)로 준비를 하면 설교가 놀랍게 발전돼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문학적인 표현력도 늘어나고. 그것을 안 하는 것은 불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할 때에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서 사람이 변화되고 하는 것은 내 맘대로 못해도,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 적어도 목사이고 교수인 사람이 갔을 때 40분 설교를 들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면 처음부터 내용이 잘못된 것입니다. 아까 그 사람처럼 일관성 있게 주의 종을 섬기라고 하든지. 그런데 그것도 똑같은 이야기를 40분 동안 되풀이했다는 점에서 일관성이 있다는 것이지 나를 설득했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설득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아니, 저 젊은 양반이 왜 벌써 저런 설교를 할까?’ 생각했던 것이지요. 절대적으로 연구하지 않은 것입니다. 연구라고 너무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책을 많이 읽고 많은 공부를 하면 좋지만 그게 아니라, 우선 갖다 놓고 남이 어떻게 설교했는지를 보고 그 다음에는 말이 되는 설교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원고를 다 써놓고 A4 용지로 한 일곱 장쯤 써서 이렇게 읽어봤을 때에 말이 되고, 애들한테 읽혔을 때 “무슨 소리인지 알겠어. 아빠"라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는 내용을 갖추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것을 왜 안 합니까? 결국은 게으른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데 시간을 쓰는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더군다나 아주 큰 교회 목사님이 그러는 것도 좋지 않지만 그래도 그분들은 바쁜 구석이라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적으면 가지 수는 많지만 일의 절대량은 많지 않잖습니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도 많지 않습니까? 그 일을 줄이고 거기에 온전히 자기를 쏟아 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변화되는지 변화되지 않는지는 그렇게 하면서 무릎으로 씨름해 보고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넘어가겠습니다.
두 번째는 ‘preaching’입니다. ‘preaching’이 갱신되어야 한다 이것입니다. ‘preaching’은 무엇이냐 하면 설교하는 행위입니다. 행위인데, 그게 뭐냐 하면 성령의 놀라운 능력과 나타남입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1740년 8월에 앰필드라는 미국의 마을에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세기적인 설교를 합니다.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죄인들’이라고 하는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 마을도 아주 심각하게 지금 신앙이 무너져가고 있는 때였습니다. 저녁이었습니다. 그래서 한쪽으로는, 에드워즈는 철저한 원고설교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한 손으로 등불을 들고 한 손으로 원고를 들고 읽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대부분 설교를 듣다가 다 쓰러진 것입니다. 회개하느라고. 그리고 엄청난 충격을 받으면서 영적인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냉정한 에드워즈 목사는 “조용히 하시오. 당신들이 그러면 내가 설교를 할 수 없지 않소. 들으시오.” 그리고 설교를 계속했습니다.
그 설교가 미국의 일차 대각성운동의 기폭제가 됐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그리고 진노하신 하나님, 그리고 죄 가운데 살고 있는 자기, 그래서 마치 불에 떨어지기 직전에 손에 붙어있는 거미와 같은데 그것을 탁 털어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비유로 설교를 합니다. 사람들은 설교가 끝나면서 그때에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지금 그 원고를 갖다 놓고 읽어준다면 그런 일이 안 일어날 것입니다. 그때에 그 시간에 독특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근대성, 현대성, 아무리 연구해도 그 안에서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관통하고 지나가는 무엇인가 신적인 빛이 사람들의 마음이 쾅하고 떨어져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심령의 부흥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바뀌고, 세속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그 사랑이 얼마나 누추하고 더러운가 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사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놀라운 능력입니다. 그것을 해결하게 해 주는 것이 뭐냐 하면 기도입니다.
그래서 내가 선배로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비유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빵을 만들면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밀가루입니다. 지금 세계에서 빵을 만들 때 최고로 쳐주는 밀가루가 프랑스산 밀가루입니다. 2위가 이태리산, 3위가 터키쯤 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할 때. 우리나라 밀가루나 중국 밀가루는 빵을 만들기에 적합한 밀가루가 아니라 국수 만들기에 적합한 밀가루라고 합니다. 맛 자체가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제일 먼저 ‘밀을 어떤 좋은 밭에서 가져오느냐’입니다. 제가 만든 비유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성령의 능력은 나중 문제이고 내용이 튼실해야 됩니다. 성경이라는 밭에 나아가서 추수해 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그 밀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가 은혜를 많이 받은 말씀은 아주 좋은 프랑스산 밀입니다. 그런데 어디를 읽어도 은혜 받은 게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설교하기 위해서 성경을 뒤적거리면서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벌써 좋은 밀을 거둘 확률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그러면서 자기가 은혜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수확해 오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이게 밀입니다.
그 다음에 어떻게 합니까? 밀로 바로 빵을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찧어야 됩니다. 방아를 찧어서, 절구로 두들겨서 파쇄를 해서 쳐서 껍질을 분리하고 그 다음에 가루로 만들어야 됩니다. 똑같이, 그 말씀의 은혜를 받고 와서 목회자 자신이 깨뜨려져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여기서 받은 말씀을 이렇게 전달해 주는 게 아니라, 그 말씀을 받고 자기 자신이 깊이 깨트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서 그렇게 깨트려집니다. 그게 밀가루가 부서지는 과정입니다. 거기에다가 많은 기도의 눈물을 떨어트려서 반죽을 하는 것입니다. 이해되십니까? 한편의 설교는 그 설교자의 모든 것이 걸린 것이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의 눈물로 반죽을 합니다. 그렇게 해서 그것을 성령의 화로에 굽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교시간에는 그것을 성찬을 떼어주듯이 마음이 굶주린 사람들에게 한쪽씩 넣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을 먹고 영혼들이 살아나게 하는 것이 목회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그런 자신이 설교하는 이때에 하나님의 성령이 충만하게 부어지는 것은 누가 주장하는 것이냐? 이것은 내가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열렬한 척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나를 열렬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주권을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매달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날 예배를 위해서 많은 시간을 기도로 헌신해야 됩니다. 설교를 잘 준비하고, 그 설교에 은혜를 달라고 그 원고지를 눈물로 적셔보십시오. 그리고 올라갑니다. 목사가 올라가면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그리고 무엇인가 권위가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미 나를, 내 마음을 움직이고 지나간 말씀입니다. 그 시간에 성령이 함께 하셨을 때, 그때에 그 말씀을 사용하셔서 수많은 사람을 깨우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그 사람이 여러분들의 설교를 들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가를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돌아올 때, 근대가 무엇을 이야기하든지 간에 그것의 영향을 받는 게 아니라 오늘 내 마음을 울리고 지나가는 그리스도께 자기가 사로잡히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목회자의 길에 들어선 것 아닙니까? 아무리 사람들이 다 자기가 신(神)이라고 생각을 하고 자기가 모든 것의 중심이라고 생각을 해도,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큰 은혜를 받고 변화를 받아서 완전히 바뀐 사람이 될 때 그때에 하나님의 주권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기가 설교를 했는데 사람이 막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목회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더 많이 연구하고 싶고 더 많이 설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다 드려서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고답적인 구닥다리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목회를 해 보니까 목회자가 땀을 흘리면 교인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고, 목회자가 눈물을 흘리면 교인은 겨우 땀을 흘리고, 목회자가 피를 흘려야지만 교인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게 목회입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통해서 무엇인가 아직까지도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는 근본적인 말씀의 역사, 성령의 역사가 있는 설교자들에게는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견디기 힘든 시련의 터널을 주님과 함께 통과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어떤 설교자가 설교시간에 하나님에 관한 희미한 진리의 빛 한 줄기만 내 마음에 비춰준다면 나는 그의 모든 것을 용서하겠습니다.” 하나님 만난 사람이 아니면 그런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책을 읽으십시오. 공부 안 하는 것은 직무유기입니다. 생명이 없는 책을 읽지 말고 내 마음을 뜨겁게 하고 말씀 사역에 헌신하게 만드는 그런 책들을 읽으십시오. 열렬하게. 그리고 하나님 앞에, 지금도 기도 많이 하시겠지만 설교 그 자체를 위해서 많은 시간을 눈물의 기도를 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변화될 때 그 사람들을 앞에 모아놓을 때 그 목사님으로부터 열렬하게 삶을 배우고 성경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커가는 것 자체가 교회를 세워가는 과정입니다. 오늘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자, 그러면 쉴 것도 없고 질문을 몇 개 받고 강의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자, 질문하십시오. 다섯 분만 질문을 받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자, 질문하십시오. 큰소리로.
(질문) ...목사님 양력을 보면 야학을 하신 이유와, 좋은 설교자가 되는 비결을 알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답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야학을 한 이유는 제가 가족들을 부양해야 되기 때문에 직장을 다니고 있었고, 마지막 직책은 시골의 우체국장이었습니다. 스물여덟 살까지 하다가, 스물여덟 살에 우체국장이 돼서 하다가 도저히 신학공부 때문에 안 되겠어서 사표내고, 그리고 신학에 전념하게 된 게 야간신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그랬습니다.
그것은 해결이 됐고, 그리고 좋은 설교자가 되는 비결이 무엇이냐 하면, 마음을 울리는 설교자를 가지십시오. 그러니까 모든 훌륭한 설교자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는데 설교 청취자였던 사람입니다. 비근한 예를 들어보면, 여러분들은 잘 모르시려나? 혹시 데니스 레인 아십니까? 1980년대에 성경강해설교로 널리 알려진 사람입니다. 영국 목사님입니다. 설교를 너무 잘하십니다. 우리 신대원 다닐 때 그분이 인기 탑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 한번 오면 수천 명씩 사람들이 모여서 데니스 레인의 성경강해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 설교 정말 너무 탁월합니다. 당신이 그렇게 설교를 잘하는데 무슨 비법이 있습니까?” 그랬더니 그러면 당연히 로이드 존스처럼 ‘주님을 깊이 만났다’ 그런 얘기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내가 설교를 잘 하는 이유는 대학생 때 이후로 설교 같지 않은 설교를 안 듣고 자라서 그렇다.” 그래서 두 사람의 설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자랐는데, 제임스 파커와 로이드 존스의 설교만 들으면서 자란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드리는 게 뭐냐면, 훌륭한 설교자를 하나 찾으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설교를 따라하겠다고 그러지 말고 그 사람을 존경하면서 그 설교에 깊이 심취하십시오. 살아 있는 사람 중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그러면 죽은 사람 중에서 찾으십시오. 저는 죽은 사람 중에서 그런 스승을 찾아내면서 오늘날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팬이 되어 보십시오. 그리고 그 설교에 미친 듯이 은혜를 받아보십시오. 그러면 목사님도 설교 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분 질문했습니다. 집에 가고 싶으면 빨리 질문하십시오. 두 번째, 예, 말씀하십시오. 큰소리로 말씀하십시오. 누군지 자기소개를 하시는 게 예의입니다.
(질문) 저는목사님 책을 거의 다 읽었는데 죄와 은혜의 지배라든가 게으름 같은 것은 편차가 좀 크지 않습니까? 목사님이 평생에 가장 이 책만큼은 꼭 읽게 하고 싶다라는 (책을 추천해주시기 바랍니다.)
(답변) 제가 몇 권 책을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80권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100권이 된다고 하는데 아직 세어보지는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세어볼 계획은 없는데, 모든 책들은 다 자기 운명을 가지고 태어나고 사실은 어느 것도 제 피와 살을 갖지 않고 태어난 책은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권만 고르라고 한다면, 그 책은 사실 많이 안 팔렸습니다. 그런 식으로 질문 안 하고 저는 이런 식으로 합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 줄 수 있는 책 한 권만, 당신에 관해서 가장 정확하게 많이 말해 줄 수 책 한 권만 골라주십시오.”라고 하면 저는 ‘그리스도인이 빛으로 산다는 것’ 그 책을 주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으면 이 책을 읽어보라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를 설교자로서 깨웠던 책은 사실은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라는 책입니다. 그 책이 저의 데뷔작인데 그렇게 두 권을 추천하고 싶고, 그리고 가장 최근의 책을 한 권 추천하라고 하면 김영사에서 나온, 2000년도 12월에 나온 ‘아무도 사랑하고 싶지 않던 밤’ 그렇게 세 권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네, 두 번째 질문했습니다. 자, 세 번째.
(질문) 목사님은 많이 바쁘시고 하실 텐데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서 시간을 얼마나 투자하시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바쁜 일들이 많으실 텐데 그런 부분을 어떻게 시간을 조율하시는지요.
(답변) 설교준비는 착상이 되고 나서 실제로 스크립트로 옮기는 시간이 여덟 시간에서 열여덟 시간 정도입니다. 그리고 교정은 아주 적게 보면 일곱 번, 많이 보면 열일곱 번. 이번 주일에 할 것 초고를 오늘 넘기고 왔습니다. 내일부터는 그것 붙들고 계속해서 다시 꾸미고 교정하고 찾는 작업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평균적으로 볼 때 아주 익숙한 설교는 시간이 좀 적게 걸리고 많이 걸리지만 그런데 그 시간이 주석집을 찾고 그러는 시간은 아닙니다. 그런 시간은 오히려 얼마 안 걸리고 원고 자체와 많이 씨름을 합니다. 그래서 평균 쳐서 열 시간은 원고와 씨름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는 풀 스크립트(full script) 아니거든요? 내가 오늘 가지고 왔으면 좀 보여드릴 뻔 했는데, 길이가 이것 반 정도 되고 요만큼 된 것에 두 장 정도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놓고 이제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내가 프롬프트 스피치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나아가게 됩니다. 한 열 시간, 많이 걸릴 때는 열여덟 시간씩 걸리지만, 그래서 그렇다고 해서 유별을 떨면서 토요일 날은 (? 1.29.15)이러는 것은 아니고, 그러지는 않고 바쁘면 바쁜 대로 좀 덜 자고 이렇게 내면서 하는데 그 시간은 다른 것에 밀릴 수 없습니다. 밀리면 그것은 안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은혜를 받아야 되니까. 그래서 제가 오히려 젊었을 때 설교하는 것보다 지금 두 배는 시간이 더 많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자, 그러면 질문 세 개 나왔지요?
(질문) 목사님께서 그렇게 설교에 투자를 많이 하시는데 막상 대예배시간에 대예배 때 설교를, 물론 목사님들마다 다 다르기는 한데 목사님께서는 한 몇 분 정도 설교를 하시는지,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지금 코로나 시대를 맞이해가지고 성도들을 심방을 하시는지, 심방을 하시면 그 심방 가서 설교하는 그 내용은 목사님 어떻게 특별히 준비하시는지 두 가지만 질문드립니다.
(답변) 설교시간은 저의 목회의 때마다 달랐습니다. 초창기에는 주일날 낮에 설교가 100분, 설교만. 그리고 보통 90분에서 100분 정도였고, 주일날 설교의 최고기록은 144분, 가장 짧았을 때는 35분 정도, 그리고 모든 설교를 통틀어서 가장 길었던 설교는 4시간 15분. 시편 23편 5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되냐면, 지금은 교회는 작은데 교인이 많이 오니까 네 번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주일날 차량이 한 7백 대 내지 8백 대가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설교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짧으면 50분, 매우 길면 70분 정도합니다. 그리고 힘이 없어서 더 길게 못 하겠습니다. 나이가 드니까 힘이 들어서 80분 할 때도 가끔 있는데 그것은 극히 드물고, 보통 50분에 70분 정도.
심방은 이제 교인이 많으니까 개척교회 할 때처럼 그렇게 활발하게 심방을 다닐 시간은 없습니다. 제가 교회 개척하고 나서 94, 5, 6, 7, 8, 9, 그러니까 한 6년까지 제가 심방을 했는데 장년 교인 1100명 모일 때까지 등록한 모든 사람을 심방을 했습니다. 그런데 1000명이 넘고 나서는 일주일 내내 심방을 해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포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가정에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심방을 갑니다. 그런데 심방을 갈 때, 저를 따라하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저는 준비 안 하고 갑니다. 그리고 가서 심방을 하면서 물어봅니다. 어떻게 지내느냐 그러면 그때 비로소 그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제 “찬송 한 장 같이 부르십시다.” 그리고 찬송을 부르는 동안에 저는 조용히 어느 성경이 적합할까 그리고 머릿속으로 찾는 것입니다. 찬송이 끝났는데 잘 안 떠오르면 “우리 한 장만 더 부르십시다.” 그리고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 맞는 말씀을 딱 찾아서 성경을 풀면서 설교를 해 주는데, 설교를 그렇게 오래하지는 않습니다. 한 15분정도 설교하고 옵니다. 마지막 질문 있으시면, 예, 이 질문 받고 집에 가는 겁니다.
(질문) 목사님 말씀이 가슴에 와닿는데 목사님을 닮아가려면 목사님에 대해서 알아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을 알려주시면, 사이트라도 알려주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답변) 저는 너무 많아서 걱정인데, 유튜브에 들어가서 김남준 치면 설교가 죽 나옵니다. 그리고 더 권하고 싶은 방법은, 열린교회 치고 우리 홈피에 들어오면 배너에서, 초기화면에서 말씀을 누르면 설교도 나오고 그다음에 강의도 나옵니다. 그리고 강의를 딱 누르면 수많은 세미나들이 다 나옵니다. 거기서 들으시면 됩니다. 그리고 책을 읽으시고. 그래서 초창기에 그냥 너무 어려운 것 하지 마시고 ‘게으름’이나 ‘십자가를 경험하라’, 이번에 다시 나오는 ‘예배에 감격에 빠져라’ 이런 책들 쉬운 책부터 시작해서 구미가 당기면 그다음에 아까 목사님처럼 ‘죄와 은혜의 지배’라든지 아니면 ‘도덕적 통치’라든지 그런 철학적인 내용으로 이동을 하면서, 신학적인 책들과 경건서적 두 종류의 큰 스트림으로 나오니까 갈아타시면서 계속해서 읽어 가시면 되리라고 그렇게 봅니다. 우선 여러분 손에 있는 이 책을 읽으시지요. 자, 여러분 밤늦게까지 아침부터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