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케 하는 자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마 5:9)
녹취자: 배미라
마음이 청결해지는 사람의 복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을 볼 것이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다음 나오는 복이 화평케 하는 자들은 번역이 모호하지만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이렇게 얘기합니다. 7복 혹은 8복이라고 불리어지는 이 내용들이 아주 단단한 고리처럼 이어져서 논리적으로 서로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하면 하나님을 뵈옵게 되는데 그것이 어떻게 보면 중세 철학자들이 오랫동안 사모했던 일종에 ‘비지오베아띠피카’라고 해서 지복직관, 천국에 가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간접적으로가 아니라 직접적 아는 지식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을 지복직관이라고 얘기 합니다. 최고의 행복을 하나님을 보는 데서 찾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복을 받을 수 있느냐?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그런 복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결국 그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안다는 것이고 그의 영광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난 시간에 정리를 했습니다.
하나님을 보고 나면 그런 지복직관의 상태 속에 들어가게 되면 제일 먼저 광범위하게 자기 자신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소위 얘기하는 ‘질서’입니다. 그 질서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평화라고 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질서와 법칙을 따라서 창조하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그 질서와 법칙이 너무 엄정하기 때문에 사실은 하나님이 없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데, 에드워즈가 말한 것처럼 사실 그런 질서와 법칙 자체가 하나님이 아름다우심의 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고 온 사람 속에는 지복직관에 가까운 복을 누렸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는 그 질서를 그대로 자기 자신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질서를 받아들이는 총량은 그의 사랑과 지성의 크기에 비례합니다. 하나님을 아무리 자기가 감정적으로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지성적으로 한계가 있으면 그 질서가 아주 적은 부분만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했는데 워낙 지식이 없으니까 부동산 받치고 교회 묘지 사고 하는데 헌금하는 것으로 자신의 하나님의 질서를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셨고 어떻게 이 세계 창조의 목적의 기반 위에 인류의 존속의 목적이 있으며 존속하는 인류 위에 나 자신의 개인의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찾아가고 그렇게 해서 결국 하나님과 세계와 인간과 자기 자신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되는지에 대한 아주 방대한 인생관과 인간관을 가지고 자기가 살아가면서 어떻게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문화의 건설에 이바지하고 정치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그러면서도 자기자신을 완성해가야되는가 하는 그 질서를 거기서 받아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평화라고 하는 것은 팔복 가운데서 가장 많이 오해받았던 단어가 이 평화입니다. 예로 보면 로마가 건국되고 나서 오현제 시대에 한 200년이 지속됩니다. 최고의 어진 황제들이 나타나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로마가 대로마를 이루고 정복을 이루어서 아무데도 전쟁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것을 ‘팍스로마나’라고 부릅니다. 팍스로마나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팍스 몽골리아도 있고 팍스 차이나도 있고 요새는 팍스 아메리카나라고 얘기합니다. 결국 한나라가 넓은 지역을 지배해서 더 이상 그 안에 있는 나라들이 전쟁을 못 일으키게끔 한 나라가 통제하는 세상을 그거를 ‘팍스로마나’라고 부른 것입니다. 똑같은 사상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소위 얘기하는 ‘팍스이스라엘리아나’라고 말할까 그런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복을 많이 받고 왕국의 위가 영원할 것이라는 그 약속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세계정복을 꿈꾸지야 못했겠지만 적어도 자신들이 살고있는 이 팔레스타이나 안에서는 자잘한 부족들이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강력한 국가가 되어서 그 팔레스타이나 땅을 지배하는 그런 꿈을 나름대로 꾸고 있었는데 그게 말하자면 다윗왕국으로 인한 평화입니다. 이스라엘이 모든 나라를 복속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그런 평화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평화에 관해서 말씀하실 때 이 평화는 그런 국수주의에 갇힌 그런 평화보다 훨씬 더 우주적인 평화를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결국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창조하셨는데 인간의 행복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이 두가지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떨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자기 자신이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데 그 행복이 사람의 행복입니다. 그거는 평화 속에 이루어지는 행복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사람과 평화를 누리고, 그리고 이제까지는 무시되어 왔지만 성경 속에는 사실은 자연 사물들과 누리는 평화가 아주 중요하게 대두가 됩니다. 우리가 워낙 인간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런 성경 구절들을 잘 읽지 못하고 여태까지 넘어간 것입니다.
1960년대에 화이트리니라는 사람의 논문 하나가 세계를 뒤흔들어 놓게 됐는데 그게 뭐냐면 이런 심각한 자연파괴를 가져온 것이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책임이다. 기독교의 가부장적인 세계관이 이런 세계의 파괴를 가져온 것이다. ‘정복하고 다스린다’라는 말 자체를 이 세계를 무한하게 인간에게 소비재로 위탁되어서 약탈하고 침탈하고 파괴하고 소비할 수 있는 대상으로만 가르쳐 온 기독교의 환경문제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떤 면들은 수용할 수 없고 어떤 면들은 수용할 수 있지만 그러나 확실히 그 주제적인 논지는 기독교의 많은 반성을 촉구하게 되었고 1975년 WCC 나이로비 대회에서 환경문제를 주제로 채택하게 되는 그래서 환경신학이 태생하게 되는 생태신학이나 이런 것들이 하게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던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맨 처음에는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십니다. 그 평화가 사실은 지성적인 피조물 속의 평화가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삼위일체 안에서 평화를 놓으시기 때문에 당신이 창조하신 사람들도 그 평화를 온전히 누리기를 원했고 결국 사랑의 나라는 평화의 나라입니다. 마지막에 만드시고 싶었던 사회가 사랑의 사회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라는 것은 질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질서 속에서 사람들이 사랑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사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가 서로에게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에 살’이라고 고백을 했을 그런 사회가 되었을 텐데 죄가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 것들이 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지고, 사람들과의 평화가 깨지고, 자연과의 평화가 깨지는데, 이것은 인간이 노력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인간에게는 죄가 들어온 다음부터는 평화를 유지하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 능력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그거를 일반은총의 영역에 확대해가지고 역사를 쭉 보면 결국 인간의 정치의 역사는 질서를 만들기 위한 역사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불러일으키면서 그 질서들을 서로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왕궁에서부터 시작해서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아주 어린 아이들이 다니는 유치원에 이르기까지 일어나는 그 모든 질서와 질서의 충동들, 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질서를 수용하는 가운데 결국 세계는 평화를 이루게 되어있는데, 아무도 안 받아들이는 상태에서 각자 자기가 자기중심적인 질서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파문을 만들어 가는데 사람마다 다 다른 파문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간섭을 일으킵니다. 간섭을 일으키면서 크고 작은 다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이런 일들은 교회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많이 받고 목회자부터 주일학교 학생들까지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조금씩 의견은 다 다를수 있지만 그 평화를 깨트릴 정도는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 속에 자신이 수렴되지 못할 때 그때에 세상과 똑같은 갈등이 이 세상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화평’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사전적으로 ‘하나님의 질서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수립된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신학적인 화평에 관한 설명입니다. 철저하게 ‘샬롬’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 없이는 인간이 인간과 평화를 누릴 수도 없고 자연과도 평화를 누릴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면 땅이 인간이 싫어합니다. 마지막에 견디다 견디다가 인간이 너무나 타락을 하면 레위기의 말씀대로 땅이 사람을 토해버리는 것입니다. 그게 결국은 죄가 들어온 뒤에 저주를 받았지만 결국은 그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서 똑같이 저주를 받은 땅과 인간 사이에도 끊임없는 부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평화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라’라고 되어있는데 ‘에이레네 포이에어우스’라는 단어예요. ‘포이에어우스’는 ‘만드는 것’, ‘포이에오’는 ‘만들다’라는 것, 그거를 있는 재료를 가지고 뭐를 만드는 사람을 가리켜서 장인같은 것을 가리켜서 ‘포이에오’라고 동사를 얘기합니다. ‘포이에마’는 말하자면 창작하는 것입니다. ‘에이레네’는 평화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것입니다. ‘포이에오’라는 단어 자체가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드는 게 아니라 있는 것을 이용해가지고 만드는 것입니다. 진흙을 가지고 도기를 만든다든지, 말하자면 종이를 가지고 책을 만든다든지 그거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제작자입니다. 결국은 질료가 주어져야 합니다. 평화를 위한 질료가 주어져야 합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평화를 만들려면 평화를 만들 수 있는 질료가 주어져야 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과의 평화라고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내가 누리고, 그 평화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평화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평화를 사람들 속에 평화가 사람들 속에 만들어지면 그만큼 그 사람이 하나님과 평화를 다시 이루는 구조, 그래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평화가 수평적인 평화와 일치를 이루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평화를 만들다는 ‘에이레네보요스’라는 그 단어가 그렇게 간단한 단어가 아닙니다. 성경안에서 뿐 만아니라 성경바깥에서 방대한 연구들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고대에 알렉산더 시대에서부터 나라를 움직이고 세계의 질서를 좌우하는 통치자들에 대한 동형용사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안에는 굉장히 정치적인 의미가 들어있다고 해석을 합니다. 산상수훈을 놓고 볼 때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의 인격적인 특성을 지금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어떤 세상 정치적인 것들을 함유하고 있다고 그렇게 단정해서 말하기에는 굉장히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가이사가 다스리는 세상 나라가 아니였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질서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어쨌든 이 단어가 예수님이 처음 만드신 단어가 아니라 그리스 로마시대 때에 널리 쓰여지고 있었던 단어였고 그리고 그것은 통치자들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면 약간 이야기하고 두 개가 딱 맞아 떨어집니다. 정치가와 군인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제대로 정치를 못하고 전쟁을 제대로 못합니다. 온갖 변방에서 맨 쓰잘때기 없는 나라들이 일어나가지고 데모하듯이 정변을 일으키고 사람을 일으키고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정치가와 군인들이 가서 싹 쓸어서 복속을 시키고 관리를 파송하고 새로운 자기네 나라로 편입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평화가 옵니다. 그런 점에서 진정으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을 정치가와 군인 같은 실력있는 계급들이 그것을 만들어가는 거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거를 이제 예수님의 산상수훈 맥락으로 투영을 해서 보면 결국 어떤 의미가 되냐 하면 ‘얘들아 너희들이 평화는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지배해서 꼼짝못하게 하는 것이 평화라고 생각을 했지. 전쟁이 없으니까 너희들이 물론 좋았겠지. 그 대신 너희들은 그 나라에 복종하면서 나라를 잃은 채 살아야되지 않았느냐. 그 때에 그렇게 지배해서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엄청난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지? 무서울 정도로 그들이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지? 그래서 변방에서 또 반란이 일어나면 그들을 단번에 정복해 버렸지?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렇게 이 세상의 변화에 대해서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란다. 그래서 구걸해서 얻는 그런 평화가 아니라 군인들이 쓸어버리면서 평화를 이루어가듯이 그렇게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다. 너희가 그런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긴 이야기가 굉장히 많이 있는데 대충 이야기하면 평화를 이루어 가는데 삶의 모든 영역에서 평화를 이루어갈 것입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평화를 깨트리는 사람들의 영향력도 대단합니다. 공동체가 시험에 들려면 한 사람이 분탕질을 하고 다니면 여러 사람들이 신앙이 허물어집니다. 놀라운 건 한 사람이 평화를 만들면 그 영향력도 대단합니다. 혼란스러웠던 공동체가 그 한 사람이 평화를 만들면서 아주 놀랍게 정돈이 됩니다. 그러니까 정복을 하고, 자르고, 치리를 하고 이렇게 하지 않아도 평화를 만드는 사람에 의해서 영향력이 놀랍게 확대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런 평화를 만들려면 결국은 가장 중요한 조건이 무엇이냐면 그 사람 자신이 평화를 누리고 있으며 그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그 화평을 못 누리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가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화평한 것,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부당한 일이나 아니면 예기치 못한 징벌이나 혹은 내가 하는 일을 하나님이 싫어할 것이라는 어떠한 배면의 양심을 또 가지고 있는, 양심에 배치되고 있는 이면을 또 가지고 있는, 그런 삶이 아니라 투명이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완전한 평화를 누리고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웃는 얼굴로 만날 수 있는 그런 평화를 내가 누리고 있는가, 그것이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는 가장 중요한 조건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매주 설교하니까 알 것입니다. 올라가서 설교를 해보면 자기가 거지같이 일주일을 살고 이런저런 일로 죄도 짓고 아니면 부부싸움도 하고 정신이 혼란합니다, 설교가 능력이 나타납니까? 올라갈 때부터 ‘네가 오늘 뭘 전한다고 그러냐’ 자기 자신 속에서 양심의 송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결국 자기 안에 하나님과의 ‘샬롬’이 없는 사람들은 그거를 자유롭게 ‘샬롬’을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평화를 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강력하게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는 그 평화를 깨트리지 않겠다고 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순결하심을 보고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신앙이 뛰어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평화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안 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평화가 깨질까봐 막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평화를 누리면서 그 평화가 얼마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행복을 자신에게 주는지를 아는 사람들이 그 깨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지 어차피 깨진 채 살아온 사람들은 그 평화가 주는 행복과 안정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우습게 여기면서 깨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이 아주 추로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더 하고 싶은 얘기는 많은데 넘어가면 그렇게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뭐라 말하냐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며’ 이렇게 됐습니다. 그러면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며, 그게 굉장히 큰 복입니다. 가난한 사람의 심경에 그 아픔과는 비교될 수 없는 복이 후반부에 주어집니다. 역시 똑같이 이것도 뭐가 되냐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자체가 아주 굉장한 복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인정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슴에 잘 와 닿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가 뭐 그렇게 복이 대단한 것인가, ‘일컬음을 받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가?’, ‘일컬음을 받는 것이 나의 사실에 그렇게 영향을 끼치는가?’이런 다양한 생각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며 할 때 누구에 의해서 일컬음을 받는가 라고 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도 포함되겠지만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아 저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구나’그렇게 일컬음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와 삶으로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보여 줄 수 있는 그 대열에 동참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인간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고 그 자체가 인간에게는 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나를 보는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여러분 길거리를 다니는데 어떤 사람이 빈말이 좀 섞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 지금 이 자매는 김태희를 쏙 뺐어. 김태희가 평촌에 온 줄 알았다고. 짜증나. 기분이 괜찮아. 어떻게 생각해 너무 좋아? 주체성이 없다.’ 너무 좋다고 그럽니다. 김태희 닮았다고 일컬음을 받을것이요 해도 그렇게 좋은데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큰 복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가장 큰 행복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하나님이 나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신다는 사실을 내가 충분히 느끼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의 경험입니다. 이것과 다른 사람의 삶을 보면서 ‘아 저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렇게 해주는 것이 두 개가 나뉘는 것이 아니라 두 개가 하나로 합쳐져서 이렇게 느끼는 건 내가 만족을 느끼는 것이지만 이렇게 사람들이 나를 보며 하나님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은 나를 통해 만족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개가 구분되는데 나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존재만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거고 하나님께 영광에 돌리는 만큼 그런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 두 개가 일치된 속에서 살 때 진정한 명량한 삶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나는 전혀 행복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행복한 것처럼 사람들에게 위장하라고 보입니다. 그때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때도 마음에는 공허함이 깃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일컬음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당시 문맥으로 가보면 최고의 선교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누군가를 연속으로 설교할 때 베드로서 가지고 설교할 때 그때에 로마시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는 족속은 크게 두 족속이었습니다. 헬라 족속과 유대인과 헬라인 그런데 둘 다 다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3의 족속이 나타났는데 진짜 희한한 족속이더라. 그게 뭐냐면 너무나 생각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고 두 번째가 뭐냐면 너무 정직하고, 그리고 세 번째가 뭐냐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모든 사람들 속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 경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족속들이다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특징이었습니다.
그런 힘이 어디에서 원수를 위해서 원수에게 돌을 맞아서 죽어가면서 스테반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남기신 기도를 재현합니다.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맞으면서 죽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완전한 평화가 이 사람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평화를 좀처럼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완전한 평화를 그렇게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어떤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언젠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어느 스님이 글을 썼습니다. 자기 고등학교 때 얘기를 쓴 것이었습니다. 해인사 쪽에 친척집이 있어서 놀러 나갔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인가 되었는데 “여기 오면 그래도 절 구경하고 가거라” 그래서 혜인사인가 어디를 갔다고 합니다. 둘러보니까 그냥 절이니까 툇마루 앉았는데 젊은 스님이 옆에 앉더래요. “너는 누구냐”, “저는 서울에서 고등학교 다니는 아무개인데 친척집에 왔습니다.”, “너는 왜사니” 그러고 선문답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이 아이가 한두 시간 대화를 나누고 올라왔는데 아이가 서울에 오자마자 어머니 아버지한테 무릎을 꿇고 출가하게 허락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 엄마아빠가 허락을 해주겠습니까? 안 해줍니다. 그래도 결국은 출가를 했습니다. 그러고 그분이 70이 되어서 그 글을 쓴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바꾼 한 시간 반의 선문답. 나는 그것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이 저 어린학생의 마음을 한 시간 반 만에 세상에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게 만들었을까, 그 힘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런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그런 아우라가 어디서 나왔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그런 것들이 말하자면 인간에게 끼치는 영향력입니다. 돈이나 부귀나 명예나 권력이나 이런 것들이 어마어마하게 우리의 삶을 흔드는 것 같아도 사실은 우리의 인생 자체를 바꾸어주지 못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육체의 질서를 많이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사태처럼 말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종교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일종에 어디서든 느껴본 적이 없는, 그때에 그렇게 성철 스님이 왔을 때 몇십 년 후에 어마어마한 고승이 될 것이라든지, 아니면 무슨 학교를 졸업했다든지, 독일어를 유창하게 하게 한다든지 그런 것을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과 상관없이 인간의 어떤 깊은 허무의 중심에 던지는 돌멩이 같은 그런 것들이 인간의 그게 뭐예요? 저 사람에게 있는 평화가 나에게는 없다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그 아우라에 눌러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못 보여주고 있는 것이 그런 것입니다. 사자처럼 담대하면서 그러면서 향기롭게 사는 그런 삶, 무엇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명량함, 두려워하면서 명량한 것은 가벼운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가운데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명량한 사람, 그런 사람이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입니다.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되었다는 것은 베드로후서 1장 4절에 나오는 것과 같이 “세상에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하심이니라”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바로 그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를 만드는 자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적용으로 들어가서 현실을 이렇게 보면 사람들이 마치 평화를 깨트리기 위해 태어나 사람들처럼 행동을 합니다. 그것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영국이나 다 똑같습니다. 자기보다 뭔가 훌륭한 사람을 보면 인정하는 대신 끊임없이 깎아내리고 어떡하든지 결점을 찾아내서 그 사람이 별 볼일 없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자신의 발아래 두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만들어 가는데 그것이 기독교 사역자조차도 너무 자기중심의 평화입니다. 에이레네라는 이 개념자체가 사실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람이 살면서 평화를 잃어버렸을 때에는 우리 가운데 평화가 없는 이유를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찾아내고, 그다음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누릴 때, 그 갈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평화가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누려지기를 바라는 그런 마음이 가득 차게 되는 것이 이게 바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주면서 공감하기보다는 시종일관 자기말만 늘어놓는 사람은 평화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자기를 칭송하는 어떤 사람을 칭송하는 사람으로 만들거나 하찮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친구가 많지만 그 평화를 허물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적수가 있거나 똘마니가 있거나 둘 중에 하나입니다. 평화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 무관심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사소한 이견에 그것으로 서로에게 등집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아도 괜찮은데 내 이름은 높여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평화를 만드는 것은 단지 싸움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그 속에서 흐르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이고 배려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대신 아주 거칠고 조잡한 인간을 보여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하루를 지내면서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구지 허물지 않아도 될 평화를 말 속에서 끊임없이 허물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보지도 못한 사람을 깎아내리고 알지도 못한 사람을 평가하고, 그리고 그 사람의 결점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사람에게 그것을 알려서 그 사람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게 만들고 하는 일들이 아침밥 먹고 나서 잘 때까지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입니다. 그래서 평화를 깨트립니다. 만들지는 못합니다. 끊임없이 그런 평화를 깨트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 친구들 안에서. 교회 안에서 평화를 만들어 가야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평화를 깨트리는 이야기를 할 때에 아주 의식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자기 자신이 누군가를 판단하는 우월한 지휘에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과는 정 반대편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이 아닙니다.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그것을 심으면서 살아가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에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의 인격 안에서부터 평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무엇에도 요동치 않는 자기 자신한테 평화를 만들어갑니다. 그 인격을 보여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혼란스러운 세상을 정리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법이 판결을 해도 그게 사람들 속에 평화가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려면 사람들 속에 화해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법과 정치가 함께 가야합니다. 사람이 마지막으로 결국은 그 평화를 주도록 하나님이 그런 평화를 이루는 세상으로 이 세계가 남도록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를 살면서 그 평화에 기여하는 자들로 사는 사람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