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은 무슨 날인가?
“너는 고운 가루를 가져다가 떡 열두 개를 굽되 각 덩이를 십분의 이 에바로 하여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너는 또 정결한 유향을 그 각 줄 위에 두어 기념물로 여호와께 화제를 삼을 것이며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레 24:5-8)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레위기 24장은 두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전반부는 1절부터 9절까지 성막의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배와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후반부는 10절부터 23절까지 형벌을 다루고 있는데, 시민생활과 관련하여 범죄했을 때 어떻게 형벌을 줄 것인지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반부는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두 가지 규례를 다루고 있습니다. 지성소 앞에 있는 성소와 성소의 등잔불을 관리하는 것과 안식일에 진설병을 바치는 것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성막은 이런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왼쪽에 출입문이 있고 출입문을 지나서 앞으로 가면 사각형의 텐트가 나옵니다. 성막은 마당을 포함해서 약 310평쯤 되는 크기의 공간이었습니다. 성막이 그 안에 있는데, 성막은 약 14m 길이고 넓이가 4.5m 높이가 4.5m였습니다. 거기를 지나면 열두 평의 성소와 여섯 평의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성막의 문을 통과하면 번제단이 있고 그 앞에 물두멍이 있었습니다. 성소에 들어가면 좌측에 등장대, 우측에 떡 상이 있었고, 지성소 휘장 앞에는 향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성소 속에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언약궤는 십계명의 돌판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민 17:10),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출 16:33-34)와 율법책이 들어있었다고 신명기 31장 26절이 말합니다.
성막은 네 겹의 천과 가죽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앞문을 닫으면 어떠한 빛도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성소를 밝히는 유일한 빛은 등잔불이었습니다. 등잔불은 규칙적으로 점화되었고 일단 한 번 켜지면 도중에 꺼지지 않도록 돌보아야 했습니다. 성소에는 하나님께 드릴 떡이 차려졌습니다. 오른쪽에 차려졌는데, 이것을 가리켜 진설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차려진 떡'이라는 뜻입니다. 바벨론 탈무드에 따르면 여기에 쓰는 밀가루는 채로 열한 번을 걸러내어 고운 가루로 만든 다음에 열두 개의 떡으로 만들었습니다. 떡 하나의 크기가 10분의 2에바(Eba) 분량의 밀가루로 빚은 떡이었습니다. 1에바(Eba)가 얼마쯤 될 것인지에 대해 여러 의견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이게 22kg쯤 될 것이라고 보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안 되고 아마 한 15kg 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마는 떡 한 개당 10분의 2에바(Eba) 분량으로 빚어진 떡이었으니까 대충 떡 한 개당 3kg 내지 4kg의 밀가루로 빚어졌으니 그 떡의 크기는 매우 큰 것이었습니다. 이 떡은 안식일에 바쳐지고 일주일 동안 성소에 그대로 있었는데, 이것은 상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에 누룩이 없이 만든 떡이었습니다. 안식일마다 새 떡으로 바꿔서 바쳐져야 했고, 상에서 물려진 떡은 제사장들의 몫이었습니다.
II. 주일은 무슨 날인가?
오늘 이 성경의 내용을 통해서 저는 <주일이 무슨 날인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것은 안식일에 관한 중요한 계시들을 담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바쳐지는 떡덩이들과 등잔에 대한 해석을 통해 주일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A. 안식일에 드린 떡
제일 먼저 안식일에 드려진 떡이 있었습니다. 이 떡은 안식일마다 새롭게 만들어서 바쳐졌습니다. 열두 개의 떡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각 덩어리는 3~4 kg의 밀가루로 만들어졌습니다. 열두 개 떡 전체의 무게는 40~50kg 되는 분량이었으니까 오늘날 우리로 말하자면 다섯 말 정도의 가루로 만든 떡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떡 상의 크기가 성경에는 약 45cm 정도 크기로 나옵니다. 그러면 이 떡을 올려놓기에는 크기가 작았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이 떡 상의 숫자에 대해 여러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7장에서는 떡 상이 한 개라고 말합니다. 또 역대상 28장에는 여러 개가 등장하고, 또 역대하 4장에는 솔로몬 성전에 있었던 떡 상의 개수가 열 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 떡을 횡렬로 여섯 개씩 펼쳐서 두 줄로 놓았을 수도 있고, 어쩌면 여섯 개씩 쌓아서 두 단을 만들어 증설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이 떡을 바치고 있는 떡상은 싯딤나무였는데, 이것은 아카시아 나무의 일종입니다. 수성(水性)이 매우 강하고 썩지 않는 나무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 나무를 잘 깎아서 그 위를 금으로 감싸서 떡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변치 않는 하나님의 영광과 성도의 믿음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열두 개의 새로운 떡이 안식일마다 성소에 차려진 것은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안식일마다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야 함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을 탈출할 때 10대 재앙을 통해 하나님이 애굽에 행하시는 놀라운 대기적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막이 만들어진 후에는 성막 위에 언제나 기적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매 안식일마다 새롭게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쳐야 했습니다. 안식일마다 새롭게 바쳐진 열두 개의 진설병은 그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은 단순히 쉬는 날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의 노동을 쉬는 것은 그냥 쉼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렇게 우리의 정신을 세상일에서 풀어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특별히 바치는 날로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육체를 노동에서 쉬게 하지 않으면 정신에도 쉼이 없기 때문에 육체를 노동에서 쉬게 함으로 마음과 정신을 비우고 그 마음과 정신에 하나님을 충만히 채우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바치는 날이 주일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과 교제하는 주일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누구인가 하는 것을 주일날 깨닫고, 우리가 매우 특별하게 하나님 앞에 바쳐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함으로써 우리가 죄인이었지만 십자가의 사랑으로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받았을 때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 온전히 바쳤던 것을 기억하면서 이 주일에 그 모든 것을 상기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주일에 하나님 앞에 자기를 온전히 바치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새삼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백성임을 마음 깊이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영원한 것이 아니오 하나님 나라로 가는 나그네 길임을 깨닫고 이 땅에 살고 있지만 구별된 거룩한 백성으로 살도록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 드리는 그 날이 주일인 것입니다.
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끊어질 정도의 큰 형벌을 동반하는 죄였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연약함을 아시고 하루를 구별하여 자기를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드리게 하심으로 나머지 6일을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한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가게 만드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은 쉬는 날이 아닙니다. 그냥 노는 날이 아닙니다. 공휴일이 아닙니다. 그날은 특별히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치는 날입니다. 구별하여 엿새 동안에는 누려보지 못했던 하나님과 임재가 있는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날이고 자기를 하나님 앞에 온전히 그날에 하나님께 바침으로 말미암아 내가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며 주님 앞에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 날이 주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 주일에 당신 자신을 바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면하기 위해 그냥 예배를 때우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바치는 훌륭한 표시입니다. 거룩한 주일에 교회 가기 위해 옷을 입으며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맞으며 눈을 뜹니다. 그러면서 교회 갈 준비를 합니다. 그러면서 '오늘은 나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날이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떡으로 바쳐진 진설병처럼 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다.'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육체의 노동을 쉬는 것이니, 그 일에 힘쓰지 않으면 노동에서 하루 쉬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정신과 영혼을 풀어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육체를 쉬게 하신 것이니, 이 주일에 마음과 몸을 주님께 온전히 바치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등잔불 빛을 받음
두 번째는 등잔불 빛을 받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성막은 가죽과 천으로 되어 네 겹으로 덮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덮여진 제일 위에 가죽은 물돼지 가죽이었습니다. 그러니 일체의 빛이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성막에는 창문이 없습니다. 유일한 빛은 등잔 불빛이었습니다. 아마도 열두 지파를 따라 열두 개의 등불이 있었을 것이고, 그것이 하나로 결합된 아마 그런 등대가 빛을 비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빛은 성소의 유일한 빛이었고, 그 빛은 맞은편에 있는 열두 개의 큰 떡을 두루 비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에 하나님 앞에 바쳐지면 등잔 불빛이 떡을 두루 비쳤던 것처럼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안식일을 지킨 후 칠일 동안 그 등잔불 아래에 있는 떡처럼 그렇게 빛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 빛은 진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안식일에 바쳐진 떡 위에 등잔불이 찬란하게 비추어졌습니다. 마찬가지로 주일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고 말씀의 빛을 흠뻑 받는 날이 바로 주일인 것입니다. 진리의 빛을 받아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함으로 떡들이 다음 안식일 때까지 등잔불빛 아래 있었던 것처럼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모든 백성들은 그 진리의 빛을 생각하며 거룩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안식일은 단지 6일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다가올 또 다른 6일을 위한 시작이었습니다. 주일은 바로 그런 날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진리의 빛을 흠뻑 비춰주셔서 그 진리에 우리의 마음이 온전히 젖는 것입니다. 그 빛이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깊이 침투하여 한 주간 동안 보지 못했던 죄를 보고 회개하고, 한 주간 동안 느끼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그 진리 때문에 찬란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이 그 진리의 불빛 때문에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에 비할 데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고 세상에 대한 사랑을 하나님께로 옮겨놓는 날이 주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산을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맨 처음에 산 아래서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며 산을 오릅니다.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산을 올라가고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고백으로 산등성이를 지납니다. 그다음에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산 정상을 향해 다가가고, 마지막에 산봉우리에 서는 순간이 하나님 앞에 말씀을 듣는 시간입니다. 거기서 주님이 주님의 찬란한 빛을 온전히 비춰주시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 생각했던 것을 그 진리의 빛 때문에 버리게 되고, 그 진리의 빛 때문에 자기가 몰랐던 것을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를 고칠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일날 우리들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자, 한번 보십시오. 어두운 공간에서 옷을 입었을 때는 별로 표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밝은 곳에 가서 거울을 보니 군데군데 묻어 있는 얼룩들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황급히 '아! 이 옷을 입어서는 안 되겠구나.' 생각하고 옷을 벗고 새 옷을 입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우리가 입은 옷은 성도의 행실입니다. 그래서 흰 세마포는 성도의 옳은 행실입니다. 그 세마포가 얼룩이 지고 더러운 것들이 묻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진리의 밝은 빛과 말씀의 거울이 필요합니다. 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이 거울과 이 빛을 함께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거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양심에 비쳐진 것이니,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이 어떠한 처지에 있는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빛을 받은 성도들은 비로소 일주일 동안 별 의식 없이 살아가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삶과 마음을 샅샅이 비추게 됩니다. 그리고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거울이 됩니다.
찬란한 진리의 빛으로 자신의 행실을 비추고, 마음의 거울로 자신의 삶을 거기에 비추어 봄으로써 비로소 자신이 진리에서 어긋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류가 있는 곳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고치게 되고, 어두움을 버리고 빛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고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 속에서 단지 오늘 의무를 해치웠다는 해방감이 아니라 '내가 이 예배를 드리기 전까지는 참으로 무지와 어둠 속에 있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구나.' '이 진리의 말씀에 비추어본 내가 바로 이런 사람이었구나.' 이것을 깨달으면서 마음에 깊은 진리의 감동을 안고 돌아가지 않으면 나머지 일주일의 삶이 지난주보다 나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주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이렇게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이 바쳐지는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지키는 주일에 진리의 빛이 우리의 마음에 충만하게 비쳐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날인지 한번 생각해보기를 바랍니다.
무너진 인간의 삶 한가운데는 감격을 잃은 예배가 있고, 감격을 잃어버린 예배의 한복판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지 못하는 병든 마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병든 마음에서 썩은 물이 흘러 인격을 두루 오염시키고, 생활을 감염시킵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욕을 돌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감격은 우리의 인생을 감격 있게 사는 길이며, 말씀을 듣고 그 빛을 받아 감격하는 것은 예배의 감격을 누리는 주일이 되는 비결인 것입니다. 이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 때 가장 큰 손해를 보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가장 큰 피해자가 되는 것이니, 그런 마음을 가지고 결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의 큰 기적을 보고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그들 위에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비추고 있었으니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구름기둥 아래서 우상을 섬기고 그 불기둥 아래서 간음하고 죄를 지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만약에 이들에게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안식일의 감격이 있었더라면 그런 죄를 지었을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이 안식일에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몸과 마음이 드려졌다면, 드려진 그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충만하게 비추어 은혜의 감격을 누리는 날이었더라면, 그렇게 살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함께 무너져버리게 됩니다.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이름만 이스라엘이었지 실제 마음에는 하나님 없는 불신앙의 백성과 똑같은 그러한 정신이 깃들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멸망을 가져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사실을 명심하고 주일에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충만하게 빛이길 기도해야 됩니다. 오늘 예배에 모인 여러분 중 6일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예배를 위해 기도한 사람이 몇 분이나 됩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매일매일 지난 예배를 기억하며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살기를 상기하며 또 다음 주일에 주님을 깊이 만날 수 있도록 진리의 빛으로 어두운 마음에 찬란한 광채가 깃들기를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주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다가 나온 사람들은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가 드리는 예배는 감격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일주일 동안 기다렸던 예배고, 그리워했던 예배고, 그리고 거기에 영혼의 거룩한 은혜가 충만한 날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이 주일을 내 영혼의 장날이라고 했습니다. 지금은 장날이라는 게 별로 실감이 안 납니다. 옛날에 시골에서는 5일마다 혹은 7일마다 장이 섰습니다. 평상시에는 한산합니다. 그런데 장이 섭니다. 그날은 장이 선다는 것 자체가 온 동네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날입니다. 왜냐하면 가면 평범했던 그 골목길에 휘장이 쳐집니다. 광목으로 만든 휘장들이 쳐지고, 그리고 온갖 물건을 가지고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보부상들이 물건을 가져와서 펴놓고 시골 사람들이 강아지, 병아리, 계란을 비롯해서 산에 나는 나물 심지어 산삼 같은 것까지 가져와서 쭉 펼쳐놓는 장날입니다. 그러면 평소에 구경하지 못했던 수많은 물자들을 보면서, 그 물건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 장날 골목을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너무 신이 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먹을 것들로 가득하고 평소에는 맛볼 수 없었던 간식들이 풍성하게 있습니다. 물론 돈 주고 사 먹어야 되는 것이지만 어쨌든 장날은 그래서 기쁨의 날입니다. 청교도들이 주일을 영혼의 장날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날이 여러분에게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주일에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바쳐졌을 때 하나님 말씀의 빛이 충만하게 들어와서 말씀의 소낙비에 흠뻑 젖어서 집에 돌아갈 때.
(찬양)
주님의 뜻대로 나 평생 살리라
그런 깊은 고백 속에서 돌아가는 날이 주일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빛을 받는 주일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 유향과 함께 드려짐
마지막으로 이 떡은 유향과 함께 드려졌습니다. 그 떡은 반드시 이 유향과 함께 바쳐져야 했으니 이 유향 없이는 이 떡이 온전한 떡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자, 그럼 이 유향은 무엇이겠습니까? 감람나무과(科) 유향수라는 나무에서 받은 일종의 송진입니다. 점도가 높아서 매우 끈끈한 액체인데, 이것을 말리면 노란색 혹은 대부분 연한 녹색을 띤 투명한 덩어리가 됩니다. 이것은 매우 진귀한 것으로서 재산 축적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특별히 약재나 방부제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유향은 요리하는데는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떡을 진설해 놓고 떡 위에다가 유향을 뿌렸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요리하는 데 사용되지 않았고 향료로 쓰였습니다. 떡상에 차려진 진설병과 함께 지성소 바로 앞에 놓였습니다. 이 유향은 별도의 그릇에 담겨진 채 바쳐졌을 것입니다. 주후 1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이 유향은 두 개의 금잔에 담겨 진설병 위에 올려두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전통에 따르면 이 유향들은 바쳐진 후에 향단에서 불태워졌습니다. 그 향기는 하나님께 올려지고 이 향기를 맡으신 하나님이 친히 임하셔서 자기의 백성들과 교제를 나누신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유향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성도의 기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시편 141편 2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시 141:2) 안식일의 떡 위에 바쳐진 등단 불빛이 말씀을 상징한다면, 유향은 그 말씀의 은혜를 받은 성도의 기도를 상징합니다. 안식일의 성소를 생각해 보십시오. 새롭게 빚은 열두 개의 떡들이 바쳐졌고, 순전한 감람유는 등잔불이 밝은 빛을 내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안식일의 성막에는 유향의 향기로운 냄새가 가득하였습니다.
주일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날입니다. 주일은 일주일 동안 잊고 살았던 기도 생활을 충분히 하는 날이고, 막혔던 기도의 교제를 다시 회복하는 날입니다. 안식일에 떡이 바쳐진 것처럼 성도는 자신을 주일에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은 마음과 몸을 당신께 바친 성도들을 어여삐 여기셔서 말씀의 밝은 빛을 비춰주십니다. 성도들은 그 말씀의 불빛에 깊은 감동을 받고 그 말씀이 마음을 움직입니다. 이때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기도가 나오게 되고 자신을 더욱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자 하는 간절한 간구가 드려지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풍부하게 드려지는 날이 바로 주일인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주일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룩한 주일을 잘 지킬 때 비로소 지난 일주일 동안의 삶의 실패를 마침표를 찍을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는 한 주간 동안을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향기로운 향불처럼 그렇게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한 주일의 제도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의 최소한의 신앙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을 거룩히 여기고 그 안식일을 경외하면서 사는 것과 하나님을 공경하면서 사는 삶은 하나인 것입니다. 성소에 대한 경외, 거룩한 안식일에 대한 준수, 이것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여러분이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구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정신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아셨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얼마나 약한지를 아셨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노동을 쉬게 하셨습니다. 우리 정신의 연약함을 아셨기 때문에 세상 것들로부터 정신을 떼어놓아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온전히 바치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배려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에 거룩한 진리의 빛이 가득 차고 우리의 본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막혔던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날이 바로 주일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일에 이렇게 열린 하늘문을 향하여 주 앞에 기도하는 성도들이 기도를 회복하는 신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III. 적용과 결론
당신의 주일은 어떻습니까? 정말 하나님께 바쳐진 날입니까? 기쁨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날입니까?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를 충분히 나누어서 오는 한 주간 동안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되는 날입니까? 여러분에게 주일은 어떻습니까?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며 진리의 말씀으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깨닫는 날입니까? 뜨거운 기도가 주일날 예배를 드리며 다시 살아나서 이제 막혔던 기도의 문이 열리고 지난주처럼 게으른 삶이 아니라 더욱더 열렬히 기도하며 이 기도의 불꽃을 가슴에 유지하며 사는 그런 날이 되도록 거룩한 주일을 지키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 거룩한 주일을 예비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거룩한 주일을 지키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바치고 진리의 빛을 흠뻑 받고 하나님 앞에 열렬한 기도의 은혜를 회복케 하게 하신 날이 주일인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그 주일의 정신을 가슴에 간직하고 일주일 사는 동안에 내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께 나 자신이 바쳐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그러나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믿기 때문에 세상이 유혹할 때마다 '나는 너희와 상관이 없다.' '나는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란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빛을 흠뻑 받음으로 예전에 미처 보지 못했던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놀라운가 하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마음 깊이 결단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그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의 뚜껑을 열 때, 그때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향기로운 유향과 같은 기도가 빨려 올라가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을 주님 앞에 쏟아 놓으며 한 주간 동안 이 세상에서 억울하고 힘들었던 일을 주님의 품 안에서 모두 고자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말씀의 젖을 먹으며 하나님 사랑의 품에서 한 주간을 살아갈 수 있는 은혜의 눈 맞춤을 어린아이가 엄마의 가슴에 안겨서 눈을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 하나님의 눈빛을 보는 것입니다.
(찬양)
주님을 송축하리
내 입술 주를 찬양
나의 눈 보기 원하네
주님 얼굴,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간절히 원하던 우리의 소원이 주일날 응답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거룩한 모습을 봬오며 영광의 힘으로 한 주간을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담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다짐하며 예배당을 나설 때 그의 앞에 승리하는 한 주간이 기다리고 있고, 그런 예배자를 통해 받으실 하나님의 영광이 기대되지 않습니까? 살았으나 죽은 자처럼 그렇게 죽어가지 마십시오. 죄에 대해 죽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의에 대해 살아난 사람으로서 한 주간 동안을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는 선물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껏 살아있는 날 동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불꽃같은 신자의 생활 한복판에는 감격이 있는 예배가 있습니다. 그런 감격이 있는 예배가 찾아올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깊은 사랑은 그의 마음에 울려 퍼집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으니 그는 일주일 동안 승리하며 살 것이고, 그렇게 살아온 그를 하나님은 다음 주일의 예배에 더 깊이 만나주시지 않겠습니까?
예배는 삶을 위해 있고 삶은 예배를 위해 있는 것이니 지금 여러분은 살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마친 후에는 다음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니 사는 것만큼만 예배드릴 수 있고 예배드리는 것만큼만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주님의 사랑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호소합니다. 지금 드리는 이 예배보다 훨씬 영광스러운 예배를 드리십시오. 이보다 훨씬 뛰어난 감격이 있는 예배로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과 은혜를 이 주일에 충만히 받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서 주님의 마음에 기쁨이 되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