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섬기는 하나님
“내가 그의 아들을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롬 1:9)
녹취자 : 이미란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에 쓴 편지입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목하고 싶지 않고 한 가지 사실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거니와” 증인이라는 것은 법정에서 필요한 사람입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여 법의 판단을 바르게 하는 사람이 증인입니다. 그의 자격은 학식이나 인품이 아니라 사건 현장에 있었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자격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의 정체성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자기가 그렇게 섬기고 있다는 것을 증언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기에 오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자신이 섬기는 일에 있어서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증인이 되실 수 있다면 아마 유대인의 법정에서도 증인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소환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그것은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한)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거니와”라는 이야기는 사실 자신의 양심에 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는데 내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섬겼기 때문에 내 양심이 나의 섬김을 증거한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아무리 훌륭하게 섬겼더라도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겠느냐 하면서 바울의 교만을 꼬집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결국 자신이 잘했다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삶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비전인 삶을 살았는데 얼마나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겨 왔는지 그것은 하나님이 증인이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면서 목회자로서 복음 사역자로서 살아갈 때 혹은 이 세상의 직업인으로 살아갈 때 가장 소중한 것으로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정체성이 무엇이냐,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결국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히랍어 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라뜨리오’ 라고 나옵니다. ‘라뜨레이아’는 예배라는 말로도 번역이 되었고 그리스어의 동치어는 ‘에배드’입니다. 섬김, 종사, 종이라고도 불립니다. 노동을 의미했습니다. ‘라뜨레이아’, ‘레이뚜르이아’ 모두 예배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바드’입니다. 노동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오베드’가 되면 노예가 되는 것이고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전제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어떤 노예냐 하면은 ‘강요받은 노예가 아니라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것 이외에 가장 아름다운 삶이 따로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아온 자기의 삶에 하나님이 증인이시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알아줄 때도 있지만 몰라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때는 알아주었지만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섬김을 잊어버리시는 때가 없습니다.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가슴에 손을 얹고 항상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모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도 정욕도 다 지나가거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섬김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이, 나의 삶이 매 순간 예배가 되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 심령으로”(입니다.) ‘앤 프뉴마티’라고 하는데 ‘프뉴마’는 혼을 가리키는 것인데 번역에 참 어렵습니다. 팔복에서 저는 이 단어를 번역하기를 영혼의 기능으로써 우리의 마음에 가장 은밀하고 깊은 곳에서 결정적인 기능을 하는 그곳으로 이해했습니다. ‘앤 프뉴마티’를 직역하면 ‘in spirit’이고 NIV 성경에서는 ‘with all my heart’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직역은 아니지만, 현대어로 잘 번역을 한 것 같습니다. 결국 ‘프뉴마티’는 일상적인 떠도는 마음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도덕적인 판단을 내리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그 결정적인 좌소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심령으로 하는 기도가 있고 그냥 건성으로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심령으로 하는 기도는 심장을 짜는 것 같은 기도입니다. 에너지가 많이 듭니다. 그렇게 기도를 한 시간하고 나면 너무 탈진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저 우리의 게으른 본성과 실증내기 좋아하는 정신은 기도에서도 그렇게 과도한 노동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그렇게까지는 기도를 안 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해도 자기 자신의 마음이 바뀌지 않습니다. 낙심하던 마음은 그렇게 기도하던 모양으로 여러 번 해도 낙심한 그대로 있고, 상처받은 마음은 그렇게 기도하면 여러 번 기도했는데도 여전히 그 사람을 미워합니다. 깨달은 마음인데 기도를 그렇게 하지 않으니까 여전히 오래 기도했는데 자기는 깨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수박에 물 붓기입니다. 아무리 수박에 물을 부어도 속에 있는 수박의 과육에는 아무 영향이 없습니다. 심지어 물 위를 둥둥 떠다녀도 과일엔 영향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모든 것들이 심령으로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흥이 일어났던 모든 현장에는 하나님이 사용하신 사람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내리는 방법으로 부흥을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부흥이 일어났던 모든 사람은 심령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전도하고 매달렸던 사람들입니다. 한 이틀 동안 목회자 친구들하고 같이 지냈습니다. 요즘 시대에 전도가 안됩니다. 그래서 그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요새 길거리에 가서 전도하면 전도가 됩니까?” 하니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도를) 하다가 대부분의 교회들이 그만둡니다. 우리 교회가 성도들이 얼마나 열심히 전도하는지 길거리에서 30명이 등록했습니다. 한 달에 평균 3명 등록을 한 것입니다. 불가능해 보였던 일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도지를 건네주면 욕을 하고 팽개치고 뿌리칩니다. 심령으로 섬기는 일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을 가져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예기치 못한 일들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문제가 있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심령으로 기도해서 자기가 변화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심령으로 기도한 것입니다.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면서 하루에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렇게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억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쏟으며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교인들을 섬겼습니다. 기도도 전도도 모든 일을 그렇게 한 것입니다. 심령으로 섬기지 않는 섬김보다 심령으로 섬기는 단 하루의 섬김이 더 큰 하나님의 역사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심령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그랬습니다. “그의 아들의 그 복음 안에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NIV 성경은 ‘in preaching the gosfel of him’으로 번역했는데 조금 많이 나간 것 같고, ‘in the gosfel of his son’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무슨 뜻일까요? 복음이 없었더라면 사도바울이 로마인과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요? 그들은 이방인인데, 사도바울이 무엇 때문에 하찮게 여겼던 이방인들을 위해서 심령을 바쳐서 하나님을 섬겼을까요? 무엇이 그걸 가능하게 했을까요? 복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누구의 복음인가요? 그의 아들의 복음, 하나님 아들의 복음이 뭡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기쁜 소식입니다. 뭐가 기쁜 소식입니까? 이제 구원의 때가 이르렀다,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셨다, 이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자기가 먼저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죄인 중에 괴수와 같은 자기를 버리지 않고 사랑하시는 하나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던 자기를 감동시키셔서 아버지 사랑으로 돌아오게 하신 그 목메이는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음입니다.
우리는 복음이 아니었으면 현장 속에서 하나님을 섬길 이유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중 아무도 우리의 긍휼을 위해서 여기에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 때문에 하나님 사랑 때문에 주님이 열린 교회를 세우라고 하셔서, 열린 교회를 섬기라고 하셔서, 이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만나주셔서 베푸신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 구원의 사랑과 은혜가 너무 한량 없기 때문에, 내 인생 굽이굽이 붙잡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손이 너무 고맙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 복음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묶어 유대인이 유대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차이점은 우리나라에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차이점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과 극인 사람들이었는데,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피붙이처럼 뜨겁게 사랑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우리가 사랑으로 만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한 예수 그리스도가 계셔서 그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신 그 은혜 때문에 그 하나님이 우리를 각자 각자 부르셔서 여기 있는 것이고 이곳에서 섬기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섬기는 것은 열린 교회 때문이 아닙니다. 김남준 목사 설교에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입니다. 전쟁이 나서 교회가 파괴되어 간 곳이 없어지고 김남준 목사의 부고가 어느 날 전해진다고 하더라도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을 불러주신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살아계시고 그 부르심은 여러분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날 동안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내가 여러분들을 사랑해서 여기 있는 것도 아니요, 여러분들이 나를 존경해서 여기 있는 것도 아니요, 심지어는 이 교회에서 은혜받았기 때문에 여기 있는 것도 아니요, 우리가 사랑할 교회가 이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편 교회 모두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무엇 때문일까요? 복음 때문에, 그 아들의 복음 때문에, 하나님 아들의 복음 때문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서 여기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이 너무 클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이 언제나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참으며 세워주신 곳에서 충성하는 것이고 그 사랑이 그렇게 마르지 않도록 솟아나지 아니하는 사람은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식물이 오래 사는 방법이 둘이 있습니다. 그게 바위에 붙어서 겨우 분재로 사는 방법이 있고, 거목이 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뉴질랜드에 갔는데 둘이 끌어안아도 간신히 안을 정도의 나무들이 수천 그루가 크라이스트 처치(Christ church) 의 한 공원에 즐비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래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 나무들은 수 백년씩 되었겠네요” 하니 안내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심은 지 45년 되었습니다.” 45년 만에 혼자서 끌어안을 수 없는 거목이 된 것입니다. 캐나다에 있는 브리티쉬 컬럼비아(Britsh columbia)에 갔을 때 사람 키 두 배 되는 나무를 보니 과장을 하자면 열린 공간 앞에 있는 나무 크기밖에 안 되는 나무가 있는데 수령이 300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영양가 없이 겨우 살아남은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우리가 늙는 방법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거목과 같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 있고 분재 같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의 끝이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어느 한순간에 사라지는 겁니다. 그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어제도 한 청년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너무 마음이 아파서 위로 예배를 일부러 갔습니다. 61세이신데, 일용직으로 6층에 건설 현장에서 근무하시다가 떨어지셔서 돌아가셨습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모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영원합니다. 복음 안에서 나의 영혼과 연합을 이루신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를 영적으로 하나로 묶어주신 하나님의 아들 그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연합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세례를 주는 순간에 그 선언을 기억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 아무개에게 혹은 아무개와 아무개의 자녀 누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 속으로 세례를 주노라. 세례를 받음으로 그 이름과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면 모든 사람이 그런데 늘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기 위해서는 그 복음이 우리 안에서 현재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actualize’라고 하는데, 우리 안에서 현재적으로 실행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실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금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한 사람처럼 그 사랑이 내 마음을 감동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그런 심령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복음의 피에 잠겨지지 않은 심장은 이렇게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항상 그리스도 예수의 피에 잠겨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복음의 감격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으면서 가장 행복했던 대가 언제입니까? 그때가 바로
(찬양)
나 같은 죄인이 용서함 받아서 주 앞에서 옳다함 받으니
어린 양 예수의 십자가 피로 속죄함 받았다는 사실에 감격할 때 그때가 가장 행복하던 때였습니다. 일을 하면 익숙해집니다. 온 교회가 칭찬하고 여러분들을 유능하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의 인생의 목표는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 인생의 목표는 그보다 훨씬 높은 동기여야 합니다. 내 주 되신 주를 사랑하는 것, 그 십자가의 은혜에 감격하면서 사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복음의 깊이 감격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언젠가 영화를 한 편 봤는데, 무슨 영화인지 기억이 잘 안 납니다. 미국의 블록버스터 영화였는데, 테러범들이 들어와서 대통령, 부통령 등등을 협박하면서 국가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고문을 하면서 총을 머리에 갖다 대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느 고위직 여성이 피를 흘리면서 쓰러져 있는데, 협박하니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성조기 깃발 아래에서 이 나라의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한 사람이다.” 그게 애국심입니다.
그렇다면 애주심, 주를 사랑하는 마음은 무엇입니까? 끊임없이 협박과 위협, 혹은 유혹이 밀려와도 자기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주님을 섬기며 살겠노라고 했던 그 맹서를 배반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이미 주님께 바쳐진 사람이다.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의 감격 때문에 나는 주 앞에 바쳐진 사람이다, 나는 그 맹서에 서약된 사람이다. 그것을 깊이 기억하면서 사는 겁니다. 그렇게 위해서는 복음의 감격이 오늘 우리 안에서 재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걸 쉬운 말로 은혜 생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