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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련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시 66:10)
녹취자: 양현정
66편의 시는 누가 지었는 지는 알 수 없습니다. 추측도 안 되는데 시편 전편에 흐르는 분위기는 아주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은혜를 찬송하고자 이 시를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에 당했던 많은 고난과 시련을 하나님이 구원과 계획이라는 큰 틀에서 다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당시에 그렇게 겪기 싫고 괴롭고 심지어는 죽어버리고 싶은 것 같은 때였는데 돌아보면서 해석을 해보니까 하나님의 그 위대한 구원에 강물이 흐르는데 꼭 필요한 물줄기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짊어지지 되지 않아도 되는 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질 수밖에 없는 짐을 질 수 있도록 우리의 정신의 마음과 근력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의 비결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신의 인생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 있는 두 가지와는 좀 다릅니다.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인생에 일어나는 일을 좁게 봤다 넓게 봤다 이것을 수시로 자기가 조정할 수 있어 인생의 무게를 줄일 수 있습니다. 너무 힘든 시기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멀리 생각하지 말고 그냥 아침에 일어났으면 세수할 생각하고 세수했으면 반나절 살 생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때로는 당하고 있는 이 현실이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 인생을 좀 넓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이 비슷한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렇게 힘들고 괴로웠는데 결국에는 지나가더라. 그리고 나는 여기에 살아 있다. 어떻게 보면 인생이라는 것은 허공 중에 스쳐가는 먼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제 책상 앞에는 항상 세수하고 와서 로션을 바르는데 그 앞에 돌멩이 두 개가 있습니다. 대만에서 산 건데 하나는 맨들맨들 하게 조약돌처럼 갈아 놓은 수정이고 하나는 화석입니다. 두 개 합해서 육만 원 정도에 샀습니다. 대만에서 화석을 파는데 이게 풀 이파리가 나 있습니다. 판매하는 직원한테 이것이 도대체 몇 년이나 되었는지 물어보니 인터넷을 뒤지더니 500만 년 되었다고 합니다. 며칠에 한 번씩 로션을 바르다 그 돌멩이를 만져봅니다. 거기에 식물의 이름은 알 수 없습니다. 이미 종자가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깨알같이 작은 꽃 이파리인데 뚝 부려저서 흩어진 것이 화석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500만 년이라고 합니다. 500을 빼고 만 년만 해도 우리는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고조선이 5000천 년밖에 되지 않는데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아파트 앞에 들어가다 보면 돌멩이 하나가 큰 것이 놓여져 있는데 학의천이 청동기 시절에 주거지였답니다. 많은 유적이 발견되어서 한국 전력의 공사가 중단된 것도 청동기 시절의 유적이 많이 발견되어서입니다. 선사 시대라고 해도 평촌 이쪽이 하천을 따라서 굉장히 중요한 취락지였습니다. 청동기 시대의 바위 하나가 있는데 어디 채석장에서 캐어온 것 같습니다. 최소 5000년은 지난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지석묘를 쌓았던 위에 있는 돌멩이 같은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그 하나를 아파트에 갖다 놓았습니다.
인생이라는 것은 잠깐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넓게 보는 것입니다. 영혼에서 영혼 사이로 사라지는 먼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면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때에 신앙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느낍니다. ‘아 내가 이렇게 사라져갈 존재이기에 영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할 수 밖에 없구나.’ 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 시련은 언제나 있고 고통은 언제나 있습니다. 살아온 날들중에서 죽고 싶은 날들 다 죽었으면 수십 번도 더 죽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것을 다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칼빈이 말한 대로 인간의 가장 큰 의무 중에 하나는 그 모든 것을 겪으며 견디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 믿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제 마음을 울리던 찬송이 있었습니다. '비참한 눈물을 흘릴 때와 쓰라린 맘으로 탄식할 때 그때도 주께서 같이 하사 시시때때로 날 도우시네' 하나님이 성령 충만하고 은혜 많이 받을 때뿐만 아니라 비참한 눈물을 흘리며 탄식할 때도 하나님이 함께 해주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고난의 날에 주님의 품을 파고 드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똑같이 쓰라렸던 과거를 회상하는 것입니다. 공동체적으로 회상합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셨습니다.' 여기서 시험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사 할 때 그 단어의 시험이 아닙니다. 히랍어, 그리스어에 '도키마조'라는 '시험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유혹하고 흔들리는 시험이 아니라 '바한'라는 히브리어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킹제임스 버전에서 '프루브'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어떤 물건을 진위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 갈거나 때리거나 해서 확인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시험입니다. 말하자면 진짜 나무인지 가짜 나무인지 귀퉁이를 칼로 벗겨 보면 진짜 나무가 아니라 판때기 위해 나무 껍지를 붙인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봐서는 모르고 우리나라는 전세계에서 프린트 기술이 너무 뛰어나서 이처럼 프린트 기술이 뛰어납니다. 목재를 아는데도 멀리서 봐서는 진짜 나무인지 이미테이션인지 구분이 잘 안 됩니다. 그런 것을 긁거나 흠집을 내어서 확인해보는 것을 '바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그렇게 증명하고 싶으셨을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증명하고 싶어서 시험하신 것입니다. 확인해보고 싶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 보여드릴 때 하나님은 더 기뻐하십니다. 그 기쁨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달해 주십니다. 때로는 오해받을 만한 성경의 묘사도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 앞에 바치지 않습니까.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셔야 하는데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입증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살아있는 날 모든 날 동안에 그 삶의 의미는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는 과정입니다. 매 순간 그것을 증명하는 과정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훌륭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꽃길을 걸으면서 산 것 같나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진짜 믿음의 사람들은 신앙으로 살았던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 사도들 중에서 요한을 제외한 자기 목숨에 죽은 사람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고난의 길을 갑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 그 자체를 끊임없이 나의 믿음을 하나님 앞에 입증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인생의 의미라고 생각하면서 찾아가야 합니다. 그 사람만이 믿음을 지킬 수 있는 모든 시련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이야기가 은을 "연단하는 것처럼, 은이 연단 되듯이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셨나이다." 단련이라고 나왔는데 '차라크'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이것이 제련입니다. 지금은 기술이 많이 발전해서 옛날에는 흑연으로 도가니를 만듭니다. 쇠는 1250도에서 녹고 은은 더 낮은 온도에서 녹는데 1250도 이상의 열을 용기가 견뎌야 쇠가 물로 변할 것 아닙니까. 그런 정도의 물질이 없습니다. 1250도를 견딜 수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 흑연입니다. 연필심입니다. 그 흑연으로 도가니를 만들어 철광석을 넣고 불을 떼면 장작으로는 온도가 오르지 않고 일종의 석탄인 역청탄으로 떼면 온도를 크게 올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금광석을 넣으면 먼저 녹고 찌꺼기들과 분리가 되면 그것을 따라서 굳히고 다시 집어넣고 같은 과정을 반복하는 동안에 조리질해서 쌀에서 돌멩이를 거르는 것처럼 쌀이 돌멩이보다 비중이 가벼우니까 물 위에 뜹니다. 돌멩이들이 까맣게 밑에 있으면 버리고 반복하는 동안 밥이 가능한 쌀이 되었습니다. 그 과정을 여러 번 반복 할수록 그 은은 순수한 은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여기에 나오는 '차라프', 단련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갖는 인생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이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대부분 평안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평안한 것입니다. 그게 우리 모두가 바라는 것입니다. 복의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날로날로 순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싶으신 것입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순전한 사람이 되어가느냐는 하나님의 연단 없이 순전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문제는 고난을 받는 모든 사람이 다 연단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겪는 많은 고통스러운 일을 신앙으로 받아들일 때 연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으로 받아들일 때 자기 자신이 반성을 하고 자기 자신이 깨뜨려지고 변화되면서 예전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고생과 고난은 다릅니다. 고생은 객관적으로 고통을 받는 것이고 고난은 그 고통을 신앙적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연단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가는 비결입니다. 고생을 많이 한 사람이 고난을 받은 사람도 아니고 또 고난을 받은 모든 사람이 남보다 더 많은 고생을 한 것도 아닙니다. 결국은 고생을 어떻게 신앙으로 받아들여서 자기가 소화해내느냐가 고난의 크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고생한 것은 상급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고난을 받은 것이 상급에 들어갑니다. 고생을 고난으로 만드는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을 연단 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를 연단하셔서 순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것이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바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겪는 고통은 끊임없이 우리의 신앙을 요구하고 우리들이 소화해내면서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려고 할 때 그때 우리를 연단 하여 순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