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①
“이는 저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눅1:15上)
지지난 주에 이어서 말씀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가 7월하고 8월 두달동안에 세례요한에 대해서 8번을 해가지고 다 할 수는 없겠지만 우선 중요한 것만 세례 요한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에 관한 이야기들이 성경에 상당히 많이 나오는데 구약부터 손을 대야되는데 복음서를 중심으로 손을 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선 오늘 첫 번째로 누가복음 1장을 보겠습니다. 8절부터 보겠습니다.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룰 하나님 앞에 행할새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눅1:8~16)
15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오늘 읽어드린 이 본문 중에서 제가 말씀을 증거하려고 하는 부분은 15절이 되겠습니다. 15절을 3번에 나누어서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3장을 다시 한번 열어 주십시오. 누가복음 3장.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3:1~2) 아멘.
이 시간 잠시 한번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전능하시고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으심으로 우리가 죄악으로부터 사함을 입었고 우리의 사는 인생이 끊임없이 주님을 거역하는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우리를 부르사 주의 거룩한 복음의 비밀을 우리에게 맡기시고 하나님의 흩어진 양무리들을 돌볼 수 있는 이 막중한 사명을 우리에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날마다 우리들이 강단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주께서 우리에 앞서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위해 가셨던 그 뒤를 쫓기를 결심합니다만은 그러나 우리들이 육신을 입고 연약함으로 많은 양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지라도 때때로 우리의 가슴 속에 밀려드는 이 허전함과 그리고 우리의 심령의 나약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때가 많사오니 주여, 머리 숙인 당신의 충성스런 종들로 하여금 이 시간도 말씀 앞으로 다가오게 하시고 살아있고 항상 있는 진리의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깨워 주 앞에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비옵나이다.
지난 시간에는 설교자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고 오늘서부터는 세례요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왜 세례 요한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텐데 서두를 설교자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냐 하면은요, 이 세례 요한을 통해서 많은 면들을 볼 수 있겠지만은 요한복음은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왔으니 이는 요한이라 그랬습니다. 저가 빛에 대해서 증거하고 자기를 인하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믿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세례 요한의 모습 속에서 오늘날 우리 설교하는 사람의 모습을 읽어보려고 이 말씀으로 오늘 서두를 시작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으면서 이따금 이 사람을 닮았으면 좋겠다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참 이 사람처럼 되고 싶다 하는 것은 없었어요. 사실은. 다윗을 좋아했고, 바울을 좋아했지만은, 또 시간이 흐르면서 바나바와 요나단이 훨씬 더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지냈는데 몇 년전에 이 누가복음 1장을 읽으면서 아! 맞다.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다. 다윗이나 바울과 같은 사람도 물론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그야말로 이 요한과 같은 사람이 정말로 우리들에게 필요하다. 그 생각을 하게 되고 요한에게로부터 깊은 감화와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그 요한으로부터 그 수많은 감화와 은총을 입은 다음서부터 지금도 매일 기도제목이 내가 요한과 같이 살다가 요한과 같이 죽을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그것이 저의 매일의 기도제목이 되었습니다. 요한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는 부분이 구약성경에서부터 시작해서 쭈욱 신약의 복음서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기 때문에 아마 제가 생각하기로는 20번 정도 설교를 해야지만 세례요한의 윤곽이 드러나리라고 봅니다. 제게 허락된 것은 8시간 정도인데 어떻게 될른지 모르겠는데 어쨋튼 제가 하는데까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누가 복음 1장 8절서부터 17절까지 읽었습니다만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의 생애 그리고 주님이 교회를 세우시려고 했던 그 기초가 있었습니다. 그 기초가 되는 기독교의 근본진리가 무엇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성경의 모든 부분이 귀하지만 끊임없이 우리는 4권의 복음서를 묵상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애처롭게도 조국의 교회에서는 복음서가 잘 설교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서신서쪽이 많이 설교되고 있고, 복음서쪽은 오히려 덜 설교되는 것 같고, 가끔 복음서에 대한 설교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은 제가 보기에는 정말 그 복음서 속에 설교자가 깊이 들어가야 할 필요를 더 많이 느끼게 만들어 줍니다. 이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이것은 철저하게 그 기사의 초점이 예수님과 그분이 직접 가르치신 진리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와 교훈을 그리고 그의 구주되심을 선포하고자 기록된 이 4권의 복음서가 한결같이 세례요한의 이야기로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예수그리스도의 관한 이야기를 시작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이 무엇을 위해서 이 땅에 보냄을 받았는지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증거입니다. 세례요한, 이 사람은 예수님의 생애를 말함에 있어 빼놓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이 주님의 생애를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만큼 세례요한의 생애는 우리 예수님의 등장과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의 예언은 일찍이 이사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그렇게 외침으로 메시야의 올 앞길을 예비하는 그러한 인생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인생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그런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생애와 그의 비전과 그의 모든 소망과 사역은 오직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인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눈을 들어서 조국의 교회를 보십시오. 지금 조국의 교회는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이론에만 밝은 서기관과 같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세례요한과 같은 사람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씀의 증언을 통하여 세상에 편만한 영향을 끼칠수 있는 이러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교회와 세상이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비록 악한 자의 칼에 죽었지만 짧은 생애는 오늘도 우리들에게 주를 위해서 살아가는 생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출생을 합니다만은 예수님의 탄생에 못지않은 기적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늙은 제사장 사가리야 그리고 수태의 능력을 잃어버린 엘리사벳, 이들 부부에게 아들을 주겠다고 기적적인 예언을 천사를 통해서 하십니다. 그리고는 다음에 사자를 통하여 태어날 아이의 이름까지 미리 지어주셨는데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은 ‘은혜를 베풀다’라는 말의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 ‘하난’, 그리고 ‘야훼’라는 말의 합성어였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실 자’,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자’, 그런 뜻입니다. 오늘 14절은 그의 태어남이 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스러운 기쁨이 될 것인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라 그랬어요. 성경은 오늘 요한의 이름도 여호와의 은혜라고 말하고 또 그의 출생에 대한 예언도 그가 태어날 때에 사가리야와 엘리사벳도 기뻐하고 많은 사람이 그가 태어나는 것을 즐거워할 것이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짧았던 생애는, 돌아보십시오, 부모에게 즐거움을 준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난 지 얼마 안되서 그 아이는 광야 빈들로 보내졌습니다. 또 세례요한 자신에게 있어서도 그의 생애는 실로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고독하고 고난으로 얼룩진 생애였습니다. 그가 행복했다고 말하기에는 그의 얼마 안되는 인생이 너무나 험난했고 세상의 기쁨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어린 시절에 광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아야 할 연약한 유년시절을 광야에서 외롭게 지내야 했습니다. 어린아이적서부터 예루살렘에 있는 부모와 친구가 될만한 이들의 곁을 떠나 있어야 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비록 유복했을 따뜻한 가정을 떠나서 그는 메뚜기와 석청으로 끼니를 삼고 약대털을 의복삼아 지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젊음을 광야 속에 묻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외침으로써 공적인 생애를 시작한 이후로는 자기의 정치적인 적인 헤롯에게 끊임없는 박해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곧 옥에 갇히는 죄수의 신세로 고통을 받아야 했고 마지막에는 자신의 목마저 어린아이에게 주는 선물거리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험난한 생애를 맞게될 그의 태어남이 그의 부모와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라고 증거를 하고 있습니다. 의문은 이것입니다. 어째서 이토록 고난과 핍박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에 대해서 성경은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은 계속해서 그의 출생이 기쁨이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말해줍니다. '이는' 헬라어 성경에는 '가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가 주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않고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마지막에는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할 것이기 때문에 그의 인생이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생애는 처음부터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선택된 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의 앞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세례요한에 대해서 그는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시간도 자신들이 민족적으로 하나님을 떠나있다고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언제고 자신들이 하나님과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을 의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처음 등장해서 외친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렇게 외쳤을 때 그 선포는 이 사람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회개하라니? 우리가 무얼 잘못했나? 이처럼 엄숙한 성전에서 거룩하게 율법의 규례를 따라 제사를 드리고 있고, 지금도 짐승을 태우는 연기가 오르고 있고, 이렇게 성대하게 절기로 모이고, 대대로 흩어지며 우리가 이처럼 정성껏 율법책을 베껴쓰고, 백성을 가르치는데 우리가 무얼 회개하라는 말인가? 더 이상한 것은 회개하여야 하는 이유였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천국이 가까웠으니 회개하라는 겁니다. 아니, 어떻게 천국이 가까워오는가? 그러면 우리는 지금 천국 밖에 있다는 말이 아닌가? 그들은 자신들이 천국 속에 사는 사람임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천국이 가까이 오니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아니, 그러면 회개를 안하면 천국이 다가오는데 재앙이 된다는 소리란 말인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회개를 안하면 천국이 다가오는데 그 천국이 재앙이 되어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유대인들의 상식과 신앙의 견해로는 세례요한의 이 메시지가 도무지 이해가 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그간에 선포하신 말씀도 똑 같앴어요. 그때는 사람들이 이해를 좀 하기 시작한 것이예요. 이런 일을 위해서 세례요한이 보냄을 받은 것이예요. 주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서였죠. 요한의 메시지는 도무지 낯설고 생소할 뿐만 아니라 화가 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있는 자로 규정하고 또 회개해야 할 죄악 속에 있는 살고 있는 사람들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에 강단에서 들려오는 모든 설교들을 보면 도무지 설교자가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죄로 가득찬 인생이며 하나님이 사유해 주시는 은혜가 없이는 이들이 용서함을 받을 수 없고 정말 내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붙드심이 아니면 이들은 끊임없는 범죄가운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흉악한 죄인들이라고 하는 신념이 설교자의 가슴 속에서 불타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주님의 관심은 이방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제사로 모이고 대회로 흩어지며 절기로 함께 예배하는 백성들이었지만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많은 백성들이 이스라엘 속에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율법을 깨알같이 베낄지라도 하나님을 떠나 있었고, 거룩한 예복을 입고 사람들에게 죄사를 지내 줄지라도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종교에 열중한 것 같은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는 이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떠나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된다. 세례요한이 이 일을 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되는 여러분들이여! 오늘 우리들은 교회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정말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집단입니까? 정말 우리는 그렇게 믿을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까? 저는 이 시대에 세례요한을 보내시면서 하나님을 떠나있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내가 너를 보내노라고 하는 주님의 이 기대가 오늘 말씀을 수종드는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보내면서도 똑같은 기대를 주님이 걸고 계시다고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로 복음을 위해서 수종드는 우리들에게 말할 수 없는 도전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주의 복음이 만방에 알려지고 주의 거룩한 이름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찬양을 받는 일들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교회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일들이 일어나는 역사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한다고 여러 가지 행사를 교회에서 합니다만은 그러나 여러분 결과는 항상 비참하지 않습니까?
인천에 살 때 일이었습니다. 교회가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그 중에 감리교회 하나가 있었습니다. 교인들을 전도를 열심히 시키는 교회였습니다.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전도를 하면은 시상을 하는데 성경, 찬송을 주는 것이 아니라 칼라TV, 냉장고, 세탁기를 상품으로 줍니다. 이게 지금 뭐하는 겁니까? 그 교회에 수종드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눈물이 전도의 동기가 되고 있는지, 정말 회원들을 모집하는 것이 동기가 되고 있는지 우리는 이점에 있어서 정말 정직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수종들지 않아도 하나님의 교회는 주께서 세우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행한 모든 것들을 그대로 들고 하나님 앞에 가서 헤아림을 받아야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한 복된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가 열방의 생명수처럼 멈추는 역사가 있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의 역사에 감격하는 이 내적인 변화가 교회 속에서 일어날 때에 되었습니다. 여러분, 선교사들이 돌아와서 한결같이 하는 말이 무언지 압니까? 선교지를 위해서 기도하지 말고 내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선교사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왜 선교사들을 다 보내면 필리핀에서 만납니까? 마닐라에서 만난 선교사를 조금 있으면 왜 LA에서 다 만납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대부분의 시간도 하나님의 말씀을 교육받고 연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례요한은 그런 예루살렘이 아니라 광야에 보냄을 받아서 광야에서 큰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두가지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이처럼 하나님 앞에 큰 사람이 되게 만들었던 것, 그것은 무엇이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세례요한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에 불현듯 요단강변에 나타났습니다. 광야에 먼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예루살렘이 아니고 모래바람만이 일고 오가는 사람도 없는 광야에서 외쳤는데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단 사면에서 나왔습니다. 우린 이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아파트에 들어서서 목회를 하려고 합니까? 세례요한을 보십시오. 광야였습니다. 오가는 사람들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이 힘있게 외쳐지자 사람들은 나왔습니다.
제가 작년 가을에 강남에 있는 어느 교회에 설교를 하러 갔습니다. 설교 끝나고 간식을 들으라고 그러면서 다과를 펼쳐놨는데 어느 집사님이 인사를 해요. 경희대학교 회계학과 교수래요. 그러면서 주욱 이야기를 하는데 개척교회인데 제법 자리가 잡혔습니다. 아파트 단지 안에. 건물을 하나 샀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30년 전에 교회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 제가 주일학교 학생이었거든요. 집사님 요새는 교인들이 너무 편하게 믿죠? 신학생들이 교회를 개척하려고 해도 요새 평균 2억을 얘기하데요. 2억은 가져야지만 무언가 해본다고 하는데. 그러니 무슨 개척을 엄두나 꾸겠습니까? 옛날에는 천막치고 그 다음에 가마니 깔고, 시유지에서 그렇게 개척을 시작했는데. 그레도 성도들이 모여서 뜨겁게 위해서 기도해 주었는데. 요즘들은 교회가 그렇게 개척을 하면 교인들이 안옵답니다.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뭐라고 그러시는 줄 아세요? 아, 너무 충격을 받았어요. 교수님 지금도 그때처럼 말씀에 능력이 있고 은혜가 되면 가마니 까는 교회에 가서 봉사할 교인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한 나라의 문제는 교회의 문제이고 교회의 문제는 강단의 문제고 강단의 문제는 설교자 자신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광야에서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단강 사면에서 그에게 모두 나왔습니다.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어찌해야 합니까 라고 그에게 갈 길을 물었습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지금도 진리의 말씀이 능력있게 선포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 요한과 같이 주를 위해서 죽고자 하는 종들이 말씀을 증거할 때 빈들이든, 사막이든 주님은 사람들을 보내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참되게 증거하고 힘있게 외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광야의 흙먼지에 묻혀 어린시절과 청장년시절을 보낸 무명의 들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얼마나 뜨거운 열정으로 그 시대를 향하여 외치는 자가 되었는지를 보십시오. 그의 불붙는 메시지 앞에 유대인들은 죄를 자복하였고 사두개인들은 겁에 질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임박한 하나의 심판 앞에 오금을 떨었습니다. 얼굴에는 교만함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기 위해서 요한에게 물었습니다. 어찌해야 하오리까? 가슴을 칩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그는 더 이상 초라한 들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말씀이 임할 때 그는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능력으로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불신하는 그의 시대에 대항하여 마주하는 자로 큰자로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신학교에 와서 보면은 교회의 미래가 컴컴합니다. 컴컴합니다. 30년 전의 목사님들은 지금 신학생들보다 훨씬 경건했습니다. 그리고 훨씬 헌신된 사람들이 신학교에 들어왔는데 지금은 대학교 떨어진 사람들이 신학교에 들어오는 것이 태반입니다. 그렇게 헌신된 사람들이 30년 교회를 섬겼는데 한국 교회는 사향길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철부지들이 이렇게 훈련받고 나아가서 넥타이 매고 전도사, 목사라 그러면서 껍죽대고 다니는 시절이 올 때에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소정의 신학과정을 마치면 세상을 나갑니다. 신학교 들어온지 1년만 되면 전도사 소리를 듣습니다. 그것이 뭐하는 것입니까? 정말 전도사와 목사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의 자격들이 그런 식으로 되는 것입니까? 소정의 과정을 마치면 신학과정을 마쳤고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들을 세상으로 보내기 전에는 먼저 그의 영혼을 말씀을 주시는 일들이 있었어요.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십시오. 그들 중 어느 하나도 스스로 선지자로 지망했기 때문에 세상으로 나아간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세상으로 나아갈 때에 그들의 가슴 속에는 외치지 않을 수 없는 불 같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오늘도 기차를 타고 오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어요. 주님, 나의 가슴 속에 이 세상을 향해서 외치지 않을 수 없는 말씀들이 사무치는 가슴을 주시옵소서. 내가 주의 진리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면 나는 이 세상에 도저히 살아있을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이 설교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외쳐도 강단에서 심각하게 불꽃이 튀지 않고 있습니다. 말은 많습니다만은 그러나 그 말씀이 파도와 같이 다가와서 교만한 영혼들을 모래성처럼 쓸어내버리는 일들이 그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얼굴에는 교만함이 뚝뚝 떨어집니다. 왜 세상 사람들의 눈에 목회자가 비굴해 보이는 그런 교회 시대가 되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상에 보내실 그 때에 주님께서 그들이 세상에 나아가서 설교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기 전에 그들은 먼저 무얼 외칠지에 대해서 무얼 공교할 학문에 대해서 배운 것이 아니라 먼저 외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불타는 증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증거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는고로 증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증거되나 모든 사람들의 마음과 그리고 성도들의 가슴 속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세워주는 일들이 그치고 있습니까? 십자가에 대해서는 말해주지만은 십자가를 보고 온 증언, 골고다 언덕에서 주의 십자가를 만지고 내려온 피묻은 설교자의 손을 보여준 증언들이 왜 그치고 있느냐 말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말씀을 외치는데 듣는 성도들이 뼈 속 깊은 곳에서 사무쳐서 골수에 액이 뚝뚝 떨어지는 것과 같은 이러한 심각함이 설교 속에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목회를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할 기회도 많지만 들을 기회도 참 많습니다. 말씀이 말씀되게 선포되지 않고 설교자가 그 설교에 대해서 확신하지 못한다라고 하는 빛이 역력합니다. 밑에서 듣는 회중들은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세상으로 나아가지 전에 그들의 가슴 속에는 외치지 않을 수 없는 불 같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멸망 직전 유대의 마지막 시대를 외롭게 지키면서 민족의 멸망을 눈물로 예언해야 했던 예레미야의 경험을 보십시오.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자기의 예언을 거절하며 핍박하던 그 시대에 그는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내가 종일토록 수치와 모욕거리가 됩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침이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열두제자를 보내시기 전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도록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순교의 제물로써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렸던 스데반을 보십시오. 그의 심령 속에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는 그리스도라 제목 붙일 수 있는 한편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로마 옥 속에 갇혀 몸은 매였으나 목을 멘 밧줄과 차꼬가 묶어둘 수 없었던 메시지가 사도 바울의 가슴 속에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소정의 과정을 마치매 신학교는 졸업장을 주고 필요한 전철을 마치면 시험한장 치르면 노회는 안수를 줍니다. 교회는 목자를 초빙하고 이 교회에서 초빙하면 저 교회로 가고, 저 교회에서 초빙하면 또 이 교회에서 옮깁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학훈련을 마치면 수료증을 받고 선교지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만으로는 하나님을 떠난 패역과 불신앙이 소용돌이 치는 이 세상과 그리고 안일한 신앙 속에서 하나님을 떠나 있는데 길들여져 있는데 교회성도들을 변화시키기에는 --- . 먼저 고요히 무릎을 꿇고 성전에 엎드려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각자의 영혼 속에 임해서 그것이 내 골수에 사무쳐서 정말 내가 죽더라도 이 말 한마디는 하고서 죽고 싶다라고 하는 사무치는 진리가 교회를 강단을 섬기는 우리들의 가슴에 타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메말랐던 강단의 샘은 터지고 외치는 자 많건만은 생명수가 없어서 갈하던 영혼들이 말씀에 갈한 목을 축일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왜 그렇게 큰자가 되었느냐? 광야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고 그랬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그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쉽게 말해서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는 이야기는 그냥 어떤 말씀을 설교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례요한의 가슴 속에 세상을 향하여 주님이 직접 하시고 싶은 말씀을 요한에게 주신거요. 이것은 반드시 성령의 능력과 함께 임하는 것이 선지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강단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곳이라고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강단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기능입니다. 강단은 뭘 보여줍니까? 교회의 뱃머리입니다. 성도들은 모르는 일들을 강단을 통해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떻게? 여러분들은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만족해 있습니다만은 그러나 주님은 우리 교회의 이러이러한 죄악들을 심히 가슴아파하고 계십니다. 성도들이 환란과 큰 시련과 핍박 속에서 교회를 섬길 소망을 잃어갈 때에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주님이 우리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십니까? 너희가 세상에는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너희에게 승리를 주겠노라. 주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괜히 해보는 소리가 아니라 말씀을 펴고 깊이 기도하고 하나님과 대면하는 가운데 주님이 그 교회를 향해 주시는 말씀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안에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강단이 이렇게 교회의 영적인 상태와 방향을 못 잡아 줄 때에 수없이 많은 일을 해도 표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에 --뭡니까? 성전 건축하면서 한번 쫘악 몰아요. 그러더니 기도해야되겠죠? 돈 내야겠죠? 부흥회 해야 되겠죠? 섰다 앉았다 하면서 또 작정금액도 써야 될 것 아닙니까? 그러고 나면 성전 지어놓고 봉헌하고 나면 또 교인들이 해이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다음에 2단계 발동을 거는 거예요. 땅을 사자, 왜? 수양관 짓자, 그렇게 나가는 거죠. 한번 또 모으는 거죠. 그리고 그 과정이 은혜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이외에는 성도들을 잠시 마음을 들뜨게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교회도 집단이니까. 그러나 그들의 신앙을 세워주고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는 지식을 소유하게 할 수는 없다고 하는 사실인 것입니다. 혹시 그런 일들을 통해 은혜 받은 사람이 혹가다 있을지 모르지만은 그러나 주께서 교회를 움직이시는 방법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이 사모하기 위해서는 오늘 요한에게 이 말씀이 임한 곳이 빈들이었다라고 말하는데 저는 주목을 하면서 말씀을 증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광야가 '미드바르'입니다. 그런데 그말은 '다바르'에서 왔어요. 왜 이런 복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체험이 향기로운 제사가 드려지는 성전이 아니었겠습니까? 랍비들이 열심히 율법을 강론하던 회당이 아니었습니까? 왜 따뜻한 부모의 사랑이 있는 가정이 아니었습니까? 왜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는 예루살렘이 아니었을까요? 왜 율법을 낭독하던 그의 공부방이 아니었습니까? 이것은 실로 우리들로 하여금 무얼 할까하고 팔을 걷어 부치고 아침부터 밤까지 수고 하다가 잠자리에 드는 우리들의 옷자락을 붙드는 말씀입니다. 신통치 않지만 교회를 조금 섬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를 섬길 때 주일날 말씀을 열심히 증거하고 분주하게 교회일을 다 보고 저녁 때 혼자 집에 돌아갈 때면은 가슴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공허함이 가슴 속에 밀려들 때가 있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성도들이 제직회 그리고 성가대 연습, 교사 수련회 다 마치고 돌아가서 고요히 여러분 침실에 누웠을 때 가슴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그러한 허망함을 느껴보신적은 없습니까? 빈들이 무엇입니까? 팔레스타인의 빈들은 광야, 이 광야는 아기자기한 숲이나 운치있는 장소가 아닙니다. 낮에는 뜨거운 햇볕이 있지만 해가 지면 모닥불을 지펴 추위를 피해야 하는 곳입니다. 맹수들의 습격이 있는 곳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빈들이 의미하는 바는 세속으로부터 분리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한 분과만 고요히 만나는 긴 시간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조국의 교회의 목회 형편은 너무나 힘들고 그런 목회 현장 속에서 말씀을 전하는 우리의 영적인 생활은 유린당하기가 일수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빈들을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온갖 속된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홀로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그런 곳들을 말합니다. 세속으로부터 분리되어 그 분의 거룩한 임재 앞에 홀로 서 있게 되는 시간, 그런 영적인 훈련, 매일의 그런 빈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탐욕으로 물든 심령, 분주하게 되풀이 되는 일상생활, 이런 예배의식. 예배의식은 또 그렇게 복잡합니까? 복잡하면 뭐합니까? 사람들이 수없이 앉았다, 일어섰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도 말씀의 능력이 성도들을 하나님 앞에 세워지면 예배는 경건해지나 이런 일들이 그쳐지면 예배의 시간은 휴식시간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들이여!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할 수 있는 빈들이 아닙니다. 쓸데없는 지식에 대한 과도한 탐욕들이 우리의 마음의 눈을 들어서 거룩한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분께로부터 주시는 말씀과 나의 목양지를 향한 주님의 뜻들을 알기를 원하는 간절한 소망들을 못 느끼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이 시대의 강단들은 쇠약해 있고, 쇠약한 영성은 사단의 세력들로부터, 으르렁 거리는 마귀의 세력들로부터 성도와 교회를 지키기에는 너무나 연약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많은 것들을 배우기를 원하고 교육의 이론과 화려한 목회의 방법론과 수많은 성경공부의 이야기들이 우리들 속의 많은 귀를 솔깃하게 만들고 있지만은 그러나 파도처럼 밀려드는 세속의 물결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보호하기에는 모래성처럼 연약합니다. 강단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야 된다고 외쳐도 성도들은 말씀대로 살기를 즐거워하기보다는 죄악의 세상과 함께 짝하기를 즐겨합니다. 세속의 물결로부터 하나님의 사람들을 세워주지 못하고 있고 사회개혁의 몸부림은 있어도 불신앙의 이 시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죄악을 인하여 괴로워하는 거룩한 고민을 불러일으키는 말씀의 능력들은 보기가 어려워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에 사람들은 한없이 교만합니다. 말씀은 외쳐져도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같은 태도를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진리에 관한 이야기는 많지만은 죄인의 심장을 찔러 쪼개는 진리의 능력은 파장을 맞고 있습니다. 많은 배운 사람들의 설교내용은 화려합니다만은 파도처럼 보여도 그 물은 죄인의 발목만 적시고 빠져나갑니다. 이것입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상담을 하지 않고 심방을 하지 않아도 골방에서 무릎을 꿇고 수천명의 영혼들의 영적인 생활을 지배하고 통하였습니다. 누가 진리의 말씀을 해일과 같이 몰고와서 패역한 이 시대의 바벨탑을 쓰러버리고 여호와의 깃발을 성도들의 가슴에 세울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 척박한 조국의 땅에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 가득하도록 만들어 줄 자가 누구입니까? 성도들은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들의 심령이 물같이 녹아지고 자기들의 마음이 촉농같이 녹아져서 주 앞에 탄원하게 되는 이러한 변화가 영혼 속에서 일어나기를 사모하며 생명샘을 바라보고 있으나 외치는 자 많은데 생명샘은 말라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므로 큰 자가 된 요한을 보십시오. 한 시대를 일깨워 그리스도의 오시는 앞길을 예비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그는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광야에서 극심한 훈련을 받으며 영성을 키워갔고 영력을 쌓아갔습니다. 한 시대를 일깨워 그리스도의 앞길을 예비하는 선포자가 되기까지 그는 그토록 긴 기간을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영적인 연단과 체험을 가져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 외롭고 쓰라린 광야의 훈련을 통해서 그의 심령에 불붙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설교자로 세우셨습니다. 외쳤습니다. 단순했습니다. 회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주의 나라가 가까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단순한 말씀 앞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율법사들에게 눈물 흘리는 것을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통곡하며 자복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아무도 돕는 자도 없고 동역자도 없으면서도 홀로 광야에 등장했고 어두운 세상을 빛으로 깨웠습니다. 그는 비명에 갔습니다만은 그의 외침은 남아서 그 시대를 깨웠습니다. 어두운 시대에 사람들이 그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잠시 후에 불현듯 주 앞에 설 것입니다. 잠시 후 우리는 주의 거룩한 심판대 앞에서 오늘 이 말씀도 기억하며 조국의 교회를 섬겼던 종들로서 손잡고 만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인생을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고, 나는 내 목회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노라고 말했고, 나는 나의 인생을 보람있게 보냈다라고 우리의 인생을 마감한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이 세상에 죽어가는 영혼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가 무슨 면목으로 그분 앞에 설 것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의 육체는 언젠가는 풀 같이 마르며, 우리의 자랑하던 모든 아름다움도 들의 꽃과 같이 시들 것입니다. 세례요한을 세상으로 보내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세상에 보내셔서 이 세상의 사람들의 가슴 속에 주 오실 앞길을 예비하기를 사모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똑같은 기대를 걸고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사랑하셨던 이 세상을 위해서 말씀으로 수종들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대는 우리들의 선포를 통해 교회와 그리고 지옥으로 달려가는 이 내 조국의 동포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두 눈 앞에 큰 자가 되었습니다. 주님이 크게 여겨주셨을 때 세상도 그 앞에 꼼짝 못했습니다. 학위도 없었습니다. 정규 신학교도 안졸업했습니다. 박사 밑에 수업도 안했습니다. 그러나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보다 큰 자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그의 마음에 임했고 그의 영혼은 외치고 싶은 진리로 불타올랐습니다. 언제 이런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광야 속에서 일어났습니까? 우리의 광야는 어디에 있습니까?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