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라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계 2:1~5)
녹취자: 임지연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고난을 받던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셔서 마지막 때 될 일을 보여주셨습니다. 먼저 소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를 향한 우리 주님의 평가를 들려주셨습니다. 여기서 에베소 교회라고 하는 교회가 등장을 합니다. 칭찬만 받은 교회도 있고 책망만 받은 교회도 있고 또 칭찬과 책망을 아울러 받은 교회가 있었는데, 에베소 교회는 그 세 번째에 해당되는 교회 중 하나였습니다. 에베소 교회 하면 주님께로부터 책망을 받은 교회로 기억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문제가 많은 교회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아직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교회를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대부분의 교회가 말은 많지만 행함이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행함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에베소 교회는 태만한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을 위한 수고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제 점점 교인들은 교회에서 주님을 위해, 성도들을 위해 수고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수고가 있는 교회였고 이것이 사람에게 인정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인정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가 그러하듯이 에베소 교회에도 항상 순풍에 돛단 것처럼 그렇게 흘러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이단으로부터의 위협도 있었고, 교회의 박해도 받았습니다. 도시의 박해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오래 참고 견디며 주님을 위해서 참았던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이런 교회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칭찬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또 예수님이 인정해 주신 것이 있는데, 악한 자들을 도무지 용납하지 아니하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그냥 대충 좋은 것이 좋다고 넘어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는 도덕적으로 잘못된 자들을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고린도 교회는 에베소 교회와 정반대 교회였습니다. 무도하고 타락한 사람들을 교회에서 무지함으로 용납하여 온 교인들이 그렇게 살아도 되는 양 생각하게 만들어서 교회와 세상 사이의 구별을 사라져 버리게 한 교회였기 때문에 사도의 책망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 교회는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서만 멈춰도 우리가 이런 교회를 찾기가 쉽지 않은데 위에 더 뛰어난 장점이 있었습니다.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낸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엄청난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가 필요했습니다. 당시에는 자칭 사도라 칭하는 사람들은 이단의 무리를 만들어 여기저기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회를 어지럽혔습니다. 그들에게는 미혹의 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진실하게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어 그들을 미혹시켰고 어리석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부인하고 이단의 가르침을 따르며 자칭 사도라 하는 거짓된 자들의 제자가 되기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지식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그가 아주 그럴 듯 한 권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라치면 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좀 듣고 나서 ‘저것은 아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가르침과 합치하지 않는다’ 하고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말씀에 대한 지식과 영적인 분별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런 교회를 보셨습니까? 이단의 무리들이 잠잠한 것 같지만 아직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무너뜨립니다. 그런데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과 영적인 분별력이 있었습니다. 그것뿐입니까? 조용히 자신들만 그릇되었다는 것을 알고 끝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그들이 거짓된 가르침을 전하는 거짓 사도들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어 다른 교회들의 순결성까지 보호하고자 했으니 에베소 교회는 용기가 있는 교회였던 것입니다. 이런 담대한 용기와 영적인 분별력과 성경에 대한 지식을 충만히 가지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은 이 교회를 향해 또 칭찬하십니다.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얼마나 많은 고난과 핍박을 에베소 교회가 당했는지 예수님은 참는다는 이야기를 두 번이나 언급하시며 이 교회를 극구 칭찬하셨습니다. 인내했다고 칭찬하셨고, 여기서는 또 참 잘 참았다고 칭찬을 했습니다. 요즘은 얼마나 사람들이 참을 줄 모르는지 아무리 하나님이 큰 사명을 자신에게 주셨어도 기분 나쁘다고 집어치우는 시대입니다. 이게 평신도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심지어 목회자들까지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사명을 못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내가 부족해서 그런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아름답게 묘사하면서 그 사랑의 속성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가운데 참고 견디고 오래 참는다는 이야기를 세 번이나 반복해서 했으니 자신이 경험한 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이렇게 에베소 교회에도 참는 데 있어서는 자신을 다 드려 참았던 교회였습니다. 저는 한번 이런 교회에서 목회해 보고 싶습니다. 제가 그런 교회에 어울릴 목회자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감히 내 생애 이 정도 되는 교회에서 목회를 해보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 걸음을 더하여 예수님은 ‘내 이름을 위하여 견뎠다.’ ‘인내’, ‘참음’, ‘견딤’, 여기서도 세 번이나 반복이 됩니다. 그런데 그냥 소 잡아먹은 귀신처럼 그렇게 참는 목적 없는 인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영광이었습니다. 자신들은 핍박을 당하고 자신들은 고통을 당하고 시련을 겪고 많은 환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속에 예수의 이름을 위한 영광이 꽂혔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목표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80년대 열렬하게 부르던 찬송 중 잊혀져 가고 있는 찬송가가 있습니다.
(찬양)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가 지고 가오리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사람 때문에 기분 나빠서 하나님의 일을 그만둡니까?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을 기분 나쁘게 하는 사람이 여러분에게 사명을 주셨습니까? 이 세상 어디에 여러분들이 사명을 감당하는데 온 사람이 여러분들의 마음의 코드를 맞춰주고, 여러분들을 드높여주는 곳이 있는지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예수님도 그런 대접은 안 받으셨습니다. 만약에 나의 사명이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 사람 때문에 내가 그만둘 수 있고, 만약에 사명의 기원이 나의 야망이라면 내가 야망이 바뀌는 순간 사명은 집어치울 수 있습니다. 근데 그걸 주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미끄러지는 모든 사람들, 시험에 드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마지막에 하나님이 사명을 주셨는데, 사람 때문에 사명을 저버리면서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말로 할 때는 논리적이고 어쩌면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연민과 동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사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고 사람이 이해해서 참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인정해줘서 견디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보고 견디고 참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몰라주면 어떡하냐고요? 기뻐하십시오. 그럴수록 천국에서 여러분들은 더 많은 상급을 받게 될 것이고, 여러분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더 큰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명자는 사람 앞에 눈물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명은 모든 것을 견디게 합니다. 왜냐하면, 사명의 근원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만 끝나도 정말 이런 교회는 바라볼 수도 없고, 때로는 이런 교회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텐데 예수님은 한 가지를 더 덧붙이셨습니다. 대개 옳고 그름을 따지고 진리와 비진리를 가리는 데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자신을 바쳐서 불태우는 일에는 게으릅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머리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교회였을 뿐만 아니라 가슴으로 게으르지 않고 열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을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니 제가 어찌 이런 교회에서 한 번 목회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의 한 마디의 말씀이 이 모든 아름다운 것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는 그 순간 칭찬받았던 이 교회의 과거의 모든 장점은 부끄러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수고하며 섬기고 견디고 인내하며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거짓 사도들을 밝혀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열렬한 가슴으로 살았던 이 교회가 과거에는 그랬지만 지금 예수님 앞에서는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였습니다. 사랑이 없다면 이 모든 과거의 아름다운 일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일을 많이 하고 또 용기가 있다고 하더라도 올바른 것을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그 처음 사랑이 없다면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지 한번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왜 이렇게 건조하고 메마릅니까? 왜 눈물이 없는 신앙생활입니까? 왜 땀을 흘리지 않는 신앙생활입니까? 왜 피를 흘리기를 싫어하는 신앙생활입니까? 결국은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랑의 때에는 에베소 교회가 무엇을 하든지 모든 섬김 속에 주님의 사랑이 핏줄처럼 스며들었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그 모든 아름다운 행실의 동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한번 기억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여전히 행위도 있고, 수고도 있고, 인내도 있고, 용기도 있고, 지식도 있지만, 처음 사랑을 버린 사람들은 아닙니까? 그래서 차가운 사명은 차가운 의무감이 되고, 맡은 자리에서 남자답게 굳게 흔들리지 않던 사람들이 이제 흔들리는 처지에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그 처음 사랑을 떠났을 때 나타나는 외식주의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겉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속으로는 자기의 프레임에 꿋꿋이 갇혀서 오로지 자기의 깨어지지 않는 자아를 고집하며 그 안에 주님을 굴복시키려고 하는 것은 결국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처음 사랑했을 때 우리의 마음은 물같이 녹았고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우리는 거절할 것이 없었고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분부하시든지 우리는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가득 찼었으니 이것이 시험에 들지 않은 성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황폐한 벌판이 되었고, 그리고 우리의 기도의 강에는 눈물이 사라지고, 우리의 헌신의 개울에는 물이 그쳤습니다. 나무는 많이 있지만, 잎은 모두 떨어져 앙상한 가지들이 되었고 무화과 잎사귀는 무성하지만 열매는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도 행복할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올바른 길을 가던 때가 있었고, 어느 한순간에 이렇게 사랑을 버리게 된 궤도 이탈의 지점이 있었습니다. 거기가 어딘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가슴을 들이밀어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히 자기 자신을 성찰하며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던 그 마음이 어느 지점에서 변질하여 미끄러져 시험에 들어버리게 되었는지 사명을 헌신짝처럼 버리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화가 나고 혈기가 나는 것은 밑바닥부터 치솟아 오르지만,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회개는 위의 머리로부터 차갑게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서 자기를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정확하게 추적해 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의 깊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주 중요한 표입니다.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기 때문에, 한때는 넘어졌지만 일어서고 싶기 때문에, 한때는 시험에 들었으나 이제는 그 시험을 이기고 싶기 때문에, 한때는 사명의 자리를 떠나고자 했으나 이제는 그 자리로 돌아가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을 한다는 것. 이것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죄인이 드리는 첫 번째 희생의 제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악인은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악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은 자신을 반성하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자기의 틀을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더 위에 놓고 모든 사람을 그 속에 욱여넣어 버리려고 하는 사람이 악인입니다. 그는 착실한 개신교 신자일 수도 있고, 그리고 헌금을 많이 하는 가톨릭 신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악인입니다. 그러니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살다가 보면 정신적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울증이라는 것도 가끔 찾아오는데 이 우울증은 사실 정신적인 질병이 아니라 육체적인 질병입니다. 마땅히 나와야 할 신경 전달 물질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요소들이 공급되지 않을 때, 혹은 과다하게 분비될 때, 그 때 우울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증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 심리에도 아주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화를 내고서도 ‘평소의 나 같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왜 나답지 않게 그렇게 혈기를 부리고 화를 냈을까?’ 막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기 자랑을 많이 하다가도 ‘평소에 이건 내 모습이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오바를 했을까?’ 생각을 하는 것이죠. 아주 작은 일에 그렇게 크게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건 뭐냐 하면, 심리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심리적인 문제는 치료를 받아야 하고, 죄를 지은 도덕적인 문제는 정신병원에서 치료가 안 됩니다. 이건 회개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하신 것은 뭐냐면 에베소 교회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문제였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모릅니다.
근데 처음 사랑이 사라지고 나면 더 많은 도덕적인 문제들이 나옵니다. 그건 너무나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성도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사라질 때, 마치 습기 찬 곳에서 곰팡이가 피는 것처럼 노력하지 않아도 온갖 도덕적인 문제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지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고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죄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개함으로써 처음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 번째로, 마지막 하신 말씀이 처음 행위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는데 어떻게 하라고 하느냐’라는 것은 변명입니다. 하고자 하는 마음이 하지 않기를 원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에 불순종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주셔서 그 일을 하게 하시고, 죄를 짓고자 하는 자에게는 사단이 유혹을 하여 결국 자신의 의지로 죄를 짓게끔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은혜에서 멀어지고 파괴적인 행위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처음 행위로 돌아가야 합니다. 비록 처음처럼 못할지라도 겉모습이라도 처음에 했던 그대로 돌아가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자신의 힘으로 안 되고 주님의 은혜 아니면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는 열렬해지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그의 간구는 눈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십시오.
다시 한번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삶 전체를 사명으로 불태우며, 나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하나님 경륜 안에서 발견하며, 티끌같이 연약한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보람을 다시 느끼십시오. 내가 이 세상에 한없이 부족한 것이 많지만, 내가 태어난 것이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이 세상이 하나님 보시기에 더 아름답기에 나를 태어나게 하셨으며 구원하셨으며 은혜를 주셨노라고 굳게 믿으셔야 합니다. 이것이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번 여름 수련회 성경학교 단기선교 이 모든 것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여러분 자신이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겠노라고 주 앞에 결단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