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2)
“이는 그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눅 1:15)
녹취자: 김명진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그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눅 1:8-16)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눅 3:1-2)
저는 오늘 누가복음 1장에 나와 있는 세례요한의 탄생에 관한 예고의 기사 속에서 그가 주 앞에서 첫 번째 세례 요한에 관한 예언에,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니라”는 말씀을 가지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찾고자 합니다.
세례요한의 생애를 오늘 성경은 단적으로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전에 세 가지 일이 먼저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그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다,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할 것이다, 그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 저는 오늘 첫 번째,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의 예수님의 생애와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시려고 했던 기독교의 기본 진리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네 권의 복음서를 깊이 묵상하고, 연구하고 파헤쳐야 합니다. 다른 모든 성경도 그렇지만 특별히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 네 권의 복음서는 철저히 그 기사의 초점이 예수그리스도의 생애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과 그분의 구주되심을 선포하고자 기록된 네 권의 복음서가 모두 한 결 같이 예수님의 생애를 말하기에 앞서 세례요한의 생애를 상세하게, 일치하게 전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이것은 세례요한이 무엇을 위해서 이 땅에 보냄을 받았으며,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왔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냅니다. 세례요한, 그는 예수님의 생애를 말함에 있어 결코 제외해 놓을 수 없을 만큼 예수님의 생애의 등장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었고 하나님은 그를 보내셨는데 주님이 그를 보내신 것은 예수님의 복음 사역의 앞길을 예비하기 위해서라고 성경은 거듭거듭 말합니다. 그는 구약의 시대에 마지막 선지자였고 그의 인생은 죽음의 순간까지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삶이었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짧은 생애 오로지 예수그리스도만을 가리켰던 그의 삶은 오늘도 그와 같은 길을 가며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고자 하는 우리의 삶을 흔들어 깨워서 그분을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일꾼들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례요한의 출생은 예수님의 탄생과 버금가는 이적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늙어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제사장 사가랴와 늙어서 이미 수태의 능력을 잃어버린 엘리사벳 사이에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들에게 자식을 주실 것을 예언하십니다. 그리고 이름까지 지어 주셨는데 ‘요한’인 것입니다. 요하네스라고 기록되어있는 요한은 히브리동사 ‘은혜를 베풀다’라는 뜻의 하나, 그리고 야훼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신 자, 하나님이 은혜로 주실 자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의 태어남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축복된 것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부모에게도 즐거움을 주는 인생이 아니었고 자신에게도 기쁨을 주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년시절부터 소년과 청년과 장년 시절을 빈들에서 자라야 했고, 따라서 그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예루살렘과 부모의 곁을 떠나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많은 사람들과 친척들이 있는 예루살렘 거리를 떠나서 허허 벌판의 광야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메뚜기와 석청으로 끼니를 삼고 약대 털을 의복으로 삼는 삶는 소박한 삶에 놓여 있어야 했습니다. 또한 그의 가정은 유복했을지라도 그의 삶은 모든 물질적인 누림에서 벗어나서 광야 속에서 지내는 삶에 놓여야 했습니다. 또한 그의 말년은 정적인 헤롯에게 박해를 받아 옥고를 치르다가 결국은 그의 목이 떨어져서 헤롯의 딸에게 준 선물거리가 된 비참한 생애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생애를 아무리 돌이켜 보아도 그의 부모에게는 끊임없이 애통하며 가슴이 아팠을 것이며, 그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모든 광야의 위협과 광야의 외로움과 광야의 고통과 정치적인 핍박과 종교적인 핍박 속에서 괴로움으로 얼룩진 인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이러한 험난한 생애를 맞게 될 세례요한의 태어남이 너희 부모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라고 증거 합니다. 어째서 그토록 고난과 고독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세례요한이 많은 사람의 기쁨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증거 하는 것일까요? 그가 출생한 이 사실이 기쁨이 될 수 있는 증거를 보여줍니다. 헬라어에는 ‘왜냐하면’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주 앞에서 큰 자가 되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이스라엘 자손 중 많은 사람들을 주 하나님 곧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의 생애는 처음부터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선택된 생애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두움 속에 사로잡혀 있는 이스라엘의 백성들, 구주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아래 매어 있고 거짓된 유대교의 가르침 속에 기이 잠들어 있던 이스라엘의 새벽을 깨우기 위해 선택된 생애였습니다. 그의 생애는 이 일을 이루는 하나님의 도구로 드려졌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들의 인생이 아무리 보잘 것 없고 초라할지라도 만약 우리의 인생이 예수그리스도를 소개하는데 드려진다면 이 세상은 우리들의 인생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생애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으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은 첫 번째로 세례요한이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의 인생, 불신앙에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기 위해서 먼저 이 위대한 일을 위해서 하나님이 요한을 어떻게 준비시킬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15절은 이 위대한 일을 위한 사역자의 준비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들은 무엇을 위해 이 자리에 있습니까? 우리는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기 살아있고 이 세상은 지금도 불신앙의 물결 속에 수많은 영혼들이 고통 속에서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잠들어 있는 이 시간에도 지옥의 불길은 타오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들이 살아있고 이 세상 속에서 우리들이 아무리 많은 것을 누리다 죽는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살아있음과 우리의 죽어감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속에 있는 죽어져 가는 많은 사람이 주님 앞에 돌아오지 않는다면 우리의 태어남과 죽음은 무의미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세례요한은 분명히 하나님에 의해서 그의 인생이 예정되었습니다. “내가 너를 보내는 것은 이스라엘 자손 중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세례요한 때보다 더 험한 불신앙의 물결이, 타락의 물결이 이 시대를 휩쓸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을 보내실 때 거셨던 하나님의 기대를 오늘 여러분을 보내면서도 똑같은 기대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세례요한이 이 세상 속에 큰 자가 되어 불신앙의 세계를 호령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준비시켰는지 똑바로 눈여겨 봐야할 것입니다. 같은 준비가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준비에 대해서 오늘 본문은 세 가지 문장으로 말합니다. 저는 주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다.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할 것이다, 그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것이다. 그는 주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주 앞에 큰 자가 될 것이며 헬라어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읽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두 눈 앞에서 크게 될 자가 될 것이기 때문에”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 많은 사람을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할 자는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될 자였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그의 인생이 조금도 큰 자다운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저명한 가문의 후예로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자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현란한 학술로 교육받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화려한 신학으로 무장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년 시절을 광야에서 보냈고, 그의 신앙과 신학도 광야 속에서 이루어졌고, 그의 복음 역시 모래바람 황량한 들판에서 외로운 외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광야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배척을 받아야 했습니다. 죄인인 헤롯을 번뇌케 하는 설교의 능력을 받았음에도 의를 외치던 그의 목은 여아에게 주는 선물거리로 전락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하나님 앞에, 주님의 두 눈 앞에서 큰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큰 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큰 자가 될 것이었습니다. 이름 없이 30여년의 세월을 광야의 흙먼지 속에 묻혀 지나야했던 들사람 세례요한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마어마한 신학의 지식이 그를 하나님 앞에 큰 자로 만들었습니까? 사람들이 능가할 수 없는 수많은 학위가 그를 하나님 눈앞에 큰 자로 만들었습니까? 만약 그가 수십 개의 학위를 가졌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큰 자로 보셨을까요? 만약 그가 수많은 사람을 압도하는 놀라운 수사학의 지혜를 가졌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큰 자라고 말씀 하였을까요?
이 위대한 처음 사역을 시작한 이 위대한 사역의 첫 장은 누가복음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3장에는 7명의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가 나오는데 한 결 같이 여호와와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을 배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게 내어준 본디오 빌라도가 있었습니다. 자기의 동생의 아내를 정부로 취해서 인륜을 땅에 떨어뜨린 헤롯의 이름이 들어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종교 재판에 처형한 가야바의 이름이 들어있습니다. 안나스의 이름이 그 속에 들어있습니다. 부패와 도덕에 눌려 하나님의 의가 숨 쉬지도 못한 배반의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세례요한에게 임하였다고 성경은 증거고 있습니다. 이 어두운 시대, 이 고통스러운 시대 속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세례요한에게 임하자 그는 주님의 두 눈 앞에 큰 자가 되었습니다. 불신앙으로 타락의 길을 가던 그 시대에 회개를 선포했을 때, 우리는 이제 그가 초라한 들사람이 아니라 큰 자가 된 것을 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강 사방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나아와서 그가 선포하는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자복하고 회개하며 세례를 받는 모습을 보며 그가 큰 자가 되었음을 목격합니다. 당대의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이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외치고 도전하는 요한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과연 그가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되었음을 봅니다. 아무도 돌아봐 주지 않고 눈물 흘리지 않는 타락의 시대 속에 세례요한 홀로 마주서서 역사를 호령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그가 큰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서 오직 두 가지 사실만 이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큰 자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큰 자로 만들었습니다. 들판에서 버린 것처럼 자란 그의 삶이 하나님 눈앞에 큰 자로 변화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누가복음 1장으로 미루어 볼 때 어린 시절부터 광야의 선포를 시작하기까지 계속해서 광야 속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성경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 나타난 날까지 빈들에 있었다라고 말한 다음에 그리고는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 그리고는 “회개하라” 외치면서 등장하는 것은 30세 이후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되어가는 것이 예루살렘 거리에서가 아니라 모태에서부터가 아니라 광야에서 부터였음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도대체 광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가 궁금한데 성경은 그저 두 가지 사실밖에 전해주지 않습니다. 그가 그토록 오랜 세월을 광야에 있었다는 사실과 또 하나는 광야에서 다 잊고 이제는 외치기 시작하기 직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다는 사실 두 가지를 성경은 기록합니다.
세례요한, 그는 결코 큰 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에스타인 메가스”, “그는 크게 될 것이다.” 미래인 것입니다. 그는 큰 자가 될 것이었습니다.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는 큰 자가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큰 자가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깊이 이상하게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여지를 줍니다. 그러면 그때까지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듣거나 가르침을 받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는 율법에 정통한 제사장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평범한 엘리사벳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들었고, 율법을 외웠고, 율법을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30년 동안 그는 무엇을 했을까요? 그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그 말씀을 배웠고, 연구하고 탐구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마치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세례요한에게 임했다고 합니다. 세례요한을 세상에 내보내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이 세례요한에게 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기를 바랍니다. 오오. 하나님 이 시간에도 이 심령들을 깨우셔서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시기를 바랍니다. 단순한 지식의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교육을 통해서 받게 되는 신학적 지식의 축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그 시대 속에 외치고 싶으셨던 그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 임하자 그의 마음이 불붙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빈들에서 외쳤습니다. 그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보십시오. 광야의 흙먼지에 묻혀서 어린 시절과 청년시절을 보냈던 무명의 들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자 얼마나 뜨거운 메시지로 많은 유대인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되었는지를 보십시오.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 무서워서 떨고 군인과 죄를 자복하고 어찌해야 하오리까하며 가슴을 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자 그는 더 이상 초라한 들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외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두려워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선포 앞에 번민하게 만들었습니다. 가슴을 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신학교를 나서고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다고 믿으면서도 소정의 신학 과정을 마치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그 중의 어느 한 사람도 스스로 선지자로 지망하여 세상으로 나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세상에 나아가기 전에 그들의 가슴 속에는 목숨을 걸고 외치지 않으면 안 될 불같은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내린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멸망을 눈앞에 둔 유다의 역사의 마지막 비탈길에서 민족의 멸망을 예언하던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의 경험은 이 같은 사실을 증거 합니다. 자신의 예언을 거절하며 핍박하던 시대를 잠에서 다시 깨어나지 아니하리라고 고백할 때 그는 마음속으로 일어났던 뜨거운 열망을 말합니다. “다시는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씀하지 않기로 맹세하였거니와 나의 가슴에 불붙는 것 같아 내가 견딜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 답답하여서 견딜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외치며 죽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12제자를 세상에 보내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도록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순교의 재물이 되었던 스테판의 생애를 보십시오. 그는 돌에 맞으면서도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제목을 붙일 수 있는 한 편의 설교가 있었습니다. 로마 옥 속에 갖혀 그 몸은 메었으나 그를 메었던 밧줄과 착고가 묶어 둘 수 없었던 메시지가 사도 바울의 가슴속에 불붙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였노라 내가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노라. 저들은 십자가에 원수를 행한 사람이요 저들은 멸망의 사람들이요.”
소정의 신학과정을 마치면 신학교는 졸업장을 줍니다. 필요한 절차를 마치면 노회는 여러분에게 안수를 줍니다. 정해진 시일을 거치면 교회는 여러분을 초빙하거나 일꾼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그것만으로는 불신앙의 이 거대한 물결에 휩싸인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자신에게 불붙는 말씀이 주어지기를 간구하십시오. 이 시대를 향해 주시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여러분의 심령을 사로잡히게 하도록 구하십시오. 주님은 배반의 도성 예루살렘을 향해 평화를 말씀하시면서 목 놓아 우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등진 예루살렘 성, 멸망을 40년 앞 둔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면서 우셨습니다. 헬라어 성경은 그분이 우셨다는 기록을 ‘클라이 우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눈물을 흘렸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처럼 소리 내어 엉엉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평화를 말씀하시면서 예루살렘 성을 향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통곡을 하셨습니다. 강도의 굴혈이 되어버린 예루살렘 성전에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외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와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매매하는 자들을 쫒아 내셨습니다. 이 열정을 보십시오.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저들의 심령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세상으로 나가는 저들의 발길이 광야로 나가는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이 말씀이 있기 전에 세상으로 나아가기 전에 광야에서 여러 머리를 숙이고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십시오. 끝까지 이 말씀이 임하지 않으면 차라리 광야에서 버림받은 이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다가 죽으십시오.
두 번째, 그가 하나님 앞에 큰 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광야에서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을 끝까지 쫒아간 것은 광야, 세례요한에게 말씀이 임한 곳이 빈들, 혹은 광야라는 것은 수많은 시사점을 줍니다. ‘다바르’라는 말씀에서 나오는 파생된 명사입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은 광야에 나와 있던 요한에게 임하였습니다. 왜 화려한 성전이 있었던 예루살렘 거리가 아니었을까요? 왜 따뜻한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던 예루살렘의 가정이 아니었을까요? 왜 랍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던 회당이 아니었을까요? 왜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던 그의 공부방이 아니었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기 전에 먼저 그를 광야에 두셨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광야에 있던 요한에게 임했고 그것도 30년 가까이 고된 훈련을 마친 후에 있었습니다.
죄악을 물마시듯이 사는 삶, 분주하게 되풀이 되는 일상생활, 뜻 없이 되풀이되는 예배의식, 경박한 기도 생활,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기는 바쁜 생활,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 주님은 빈들에 외롭게 서 있는 자신을 보여주셨습니다. 빈들에서 어쩔 줄 몰라서 말에서 떨어져 주저앉아서 어쩔 줄 몰라하던 바울에게 주님은 나타나셨습니다. 아무도 광야와 같은 고독 속에서 주님의 복음을 묵상하는 세례요한, 오늘 세례요한에게도 똑같이 외롭고 고독하고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들판에 서있는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세상에 관심이 과도하고 이 세상의 진실에 대한 관심이 과도하고 이 세상의 일에 너무나 몰두하고 너무나 바쁘고 너무나 분주한 나머지 위에 계신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눈을 들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 앞에 무릎을 꿇고자 하는 마음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강단의 쇠약한 영성이 끊임없이 으르렁거리는 사단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기에는 너무나 약합니다. 많은 가르침이 있고 교육이 있지만 파도처럼 몰아치는 세속의 물결로부터 그리스도인을 보호하기에는 모래성처럼 연약합니다. 그 많은 교육의 이론과 화려한 신학과 아름다운 목회 방법론이 이 시대 속에서 교회를 지키기에는 너무나 연약하다는 사실입니다. 사회 개혁에 몸부림은 있으면서도 불신앙의 이 세대로 하여금 고민하며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는 영광스러운 말씀의 능력은 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섬기는 사람들의 박약하고 초라한 영성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므로 큰 자가 된 세례요한을 보십시오. 한 시대를 일깨웠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그 세대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그 시대를 흔들어 깨워서 예수그리스도를 세웠습니다. 이 짧은 외침을 위해서 그는 30년 가까운 생활을 각고의 노력 끝에 고통을 받으면서 그 분 앞에 홀로 서는 광야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광야에서 싸우면서 영성을 키워갔고 영력을 쌓아갔습니다. 급기야는 이 시대가 그의 설교 앞에 무릎을 꿇는 그런 큰 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토록 긴 기간을 그 짧은 외침, 불과 1, 2년 밖에 되지 않는 그 외침, 그것도 행복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칼에 목이 떨어져 나가는 그 죽음으로 위해서 30년의 세월을 외로운 광야에서 주님 앞에 홀로 앉아 살아갔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 속에 살아 있고 우리는 예수그리스도가 가장 고귀한 우리의 삶의 가치라고 믿고 있고, 우리는 그분을 위해서 나의 삶을 드리겠노라고 맹세하였습니다. 이 시대는 거대한 불신앙의 물결 속에 수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떠내려 보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거대한 타락의 물결이 교회를 삼킬 듯이 넘어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기 살아있습니다. 우리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이 시대는 조금도 변화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시대 속에 살아있고 또 죽어가고 우리들이 아무리 바쁘게 살고 내가 내 인생을 보람 있게 마쳤다고 할지라도 만약에 하나님을 거스르는 이 시대가 여호와의 거룩하신 이름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사랑은 진실이 아닙니다. 저는 이 시간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살아가는 나의 생애와 죽어가는 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이 변화될 수 있다면 오 하나님 나는 ... 주님께서는 이 세상을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들을 그토록 수많은 당신을 사랑하는 선지자들을 내어버리고, 죽게 하시고, 그토록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큰 자로 여기셨던 세례요한의 목이 떨어지도록 하면서 까지도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들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앞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너무나 타락해서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아비가 자식을 고소하는 이 불신앙의 시대에 세례요한이 살아가는 시대와 똑같이 되풀이 되고 있는 이 시대에 아비의 마음이 자식에게로 자식의 마음이 아비에게 돌아가는 도덕적인 혁명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을 주님이 기대합니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무지몽매한 자들을 의인들의 세계로 돌아오게 하기를 주님께서 원하십니다. 이것을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비록 짧은 생애를 살다간 사람이지만 그는 한 시대를 깨어서 주님의 일을 다 마치고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는 큰 자일 수 있었습니다. 그는 티끌과 같이 연약한 들사람이었지만 그의 신앙 속에 임한 하나님의 위대한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던 것입니다. 30여년 가까운 오랜 기간 동안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울려 ...
우리들은 눈을 떠야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이 시대가 하나님 앞에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